메소포타미아는 고대 그리스어 'Μεσοποταμία'에서 온 말로서 '메소'는 중간이라는 뜻을, '포타미아'는 강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기원전 4세기 후반 알렉산드로스 대왕 시대 이래로 역사, 지리학 및 고고학적 명칭으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지리 및 환경
메소포타미아는 지리학상 중동의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의 주변 지역(현재의 이라크)을 일컫는다. 메소포타미아는 두 강이 자연적으로 가져다주는 비옥한 토지로 인하여 기원전 약 6000년 구석기 시대에 인간이 정착 주거하기 시작한 이래 인류 고대 문명의 발상지의 하나로 발전하였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개방적인 지리적 요건 때문에 외부와의 교섭이 빈번하여 정치·문화적 색채가 복잡하였다. 폐쇄적인 이집트 문명과는 달리 두 강 유역은 항상 이민족의 침입이 잦았고, 국가의 흥망과 민족의 교체가 극심하였기 때문에 이 지역에 전개된 문화는 개방적, 능동적이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주위의 문화적 파급과 후세의 영향을 고려해 볼 때 세계사적 의의가 크다.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 사이의 메소포타미아 지방은 강의 범람이 불규칙적이고 잦아서 치수와 관개 등 대규모 사업이 필요하였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모여들어 여러 도시 국가가 나타나고, 교역과 상업 활동이 활발해졌다.
역사
메소포타미아의 역사는 기원전 4000년경 이라크 남부의 지방 군소 도시들의 출현에서부터, 기원전 400년경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점령까지 이어지며, 우루크·니푸르·니네베·바빌론 등의 도시와, 아카드 왕국·우르 제 3왕조·아시리아 제국등 중요한 영토국가를 포함한다.
수메르
인더스 문명의 도시 유적에서는 많은 테라코타제의 토우, 석회암제의 상, 동석제의 호부, 도장 그리고 귀금속으로 치장된 장신구 등이 출토되었다.
테라코타제의 토우는 신상·동물·완구류로 나뉘며 점토를 손으로 반죽하여 만든 단순하고 소박한 조형으로, 힘차고 늠름한 미의식을 엿볼 수가 있다. 신상 토우는 풍요와 다산의 기원 대상으로서 유방이나 허리만을 과장한 지모신의 부류가 많은데 눈과 코를 극단적으로 생략하며 두발의 상투나 장신구를 만들었으며, 때로는 표정이 파충류와 흡사한 그로테스크한 것도 있다. 동물 토우은 공작·원숭이·양·거북 등을 조형화하였으며, 거칠고 소박하지만 각 동물들의 특징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러한 소박한 솜씨의 테라코타 토우에 비해서 석회암제나 청동제의 조각상은 조형 감각이나 표현 기법이 뛰어나다. 하라파에서 출토된 석회암제 토르소나 모헨조다로에서 출토된 청동제 무희상 등을 보면, 양감의 파악 방식이나 육체의 사실적인 관찰에 의한 모델링의 적확하게 표현되어 있다.
수메르는 메소포타미아의 가장 남쪽 지방으로 오늘날 이라크의 남부 지역이다. 수메르 문명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문명으로 그들이 어디서 왔는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수메르인은 대략 기원전 7000년부터 수메르 지방에서 살기 시작하였다. 수메르의 도시국가들은 선사시대의 우바이드기와 우루크기에 성장하기 시작하였다. 기원전 29세기경 초기 왕조 시대부터 역사적 기록들이 드물게 발견되기 시작하여, 기원전 26세기경 라가시기부터는 많은 자료들이 발견되고 있다. 고대 수메르 즉 우바이드기와 우루크기의 메소포타미아 남부의 도시국가들에 바탕을 둔 초기 왕조는 기원전 24세기에 메소포타미아 중부의 도시국가에 바탕을 둔 아카드 제국이 들어서면서 막을 내린다. 이후 구티인 지배기를 지나, 기원전 22세기에 '수메르 부흥기(우르 제3왕조)'를 맞았다가, 20세기경에 아모리인이 침입한다. 아모리인의 이신 왕조는 기원전 1730년, 메소포타미아가 바빌로니아 지배하에 들어갈 때까지 유지된다.
우바이드기
우바이드기 동안에 특징적인 양식을 갖는 양질의 도기류가 메소포타미아와 페르시아만 영역에 분포되어 있다. 당시 수메르인의 종교적 중심지는 에리두였으나, 인근의 도시인 우루크가 점진적으로 성장하여 에리두를 추월하게 된다. 고고학적으로 우바이드기에서 우루크기로의 이동은 느린 물레에서 만들어진 채색 토기에서, 빠른 물레에서 양산하여 만든 비채색 토기로 바뀌는 현상으로 나타난다. 제 4우바이드기에서 초기 우루크기로의 이러한 변화는, 논란의 여지가 있으나 대략 기원전 45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우루크기
우루크기 (기원전 4500년경~기원전 3100년경)에 이르러, 대량의 물품이 남부 메소포타미아의 운하와 수로를 통해서 거래되면서, 거대한 신전중심 도시들이 많이 세워졌고, 집권화 된 관료층이 전문화된 일꾼들을 고용하였다. 이 시기에 노예 제도가 시작되었다는 많은 증거가 발견되고 있다. 많은 공예품과 우루크의 식민지들이 터키의 타우루스 산맥과 지중해 서안 및 이란 중부에 이르는 넓은 지역에서 발견되고 있다.
수메르 상인들과, 이민자들에 의해서 우루크기의 문명은 모든 주변세력에게 영향을 미쳤고, 점차 주변세력들도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비교될 만큼 성장하였다. 그러나 수메르의 도시들은 먼 거리의 식민지를 무력으로 제압할 만한 군사력은 갖추지 못했다.
우루크기의 끝은 기원전 3200년~기원전 2900년경의 기후 변화 시기와 일치한다. 이 시기에 홀로세 최적기후라고 불리는 따뜻하고 습도가 높은 기후가 끝나고, 건조한 기후가 지속되었다.
역사적 기록들은 대체로 수메르인이 메소포타미아 남부에 한정되어 있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루갈안네문두와 같은 왕은 지중해, 타우루스, 자그로스까지 영역을 넓혔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그보다 조금 전에, 에리두 문화가 우루크 문화로 넘어가는 역사적 과정의 신화와 관련되어 있는 엔메카르와 길가메시와 같은 왕들도 넓은 지역을 통치하였다.
초기 왕조
고대 수메르의 왕들의 목록이 초기 왕조 시대(기원전 2900년경~기원전 2350년경)를 보여주고 있다. 다른 많은 고대 왕명표와 마찬가지로, 전설적인 이름도 포함되어 있을 수 있다. 목록에서 다른 문서에서 찾을 수 있는 첫 번째 왕은 에타나로, 키시의 첫 번째 왕조의 13번째 왕이다. 고고학적으로 발굴된 첫 번째 왕은 키시의 엔메바라게시로 왕조의 22번째 왕이자, 끝에서 두 번째 왕이며, 길가메시 서사시에서도 이름이 언급되고 있다. 당시 패권이 키시에서 우루크로 넘어갔던 것으로 미루어, 길가메시가 우루크의 전설적인 왕이라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움마의 제사장-왕, 루갈자게시는 라가시 왕조를 전복시키고, 우루크를 정복하여 새로운 수도로 삼고, 페르시아 만에서 지중해에 이르는 제국을 세웠다. 그는 솀어족의 아카드왕 사르곤이 등장하기 이전의 마지막 수메르인 왕이었다.
라가시 왕조
라가시 왕조는 많은 유적들로 잘 알려져 있으며, 그중 기록상 최초의 제국은 에안나툼의 제국으로, 그는 수메르의 키시, 우루크, 우르, 라르사 등 모든 도시들 실질적으로 지배하였고, 경쟁 도시였던 움마로부터는 조공을 받았다. 또한, 그의 영토는 페르시아 만을 따라 엘람의 일부까지 미쳤다. 그는 통치를 위하여 공포정치를 했던 것으로 보인다. 발굴된 독수리 석비에서 적을 무자비하게 대하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아카드 제국

아카드 제국은 수메르 북부의 고대 도시인 아카드를 중심으로 성장한 고대 제국으로, 사르곤 왕 치세에서 최고로 성장하였다. 정확한 시기는 기원전 2350년 무렵부터 2150년 무렵까지 2백여 년으로 추측된다. 셈족의 한 갈래로 유목민이었던 아카드 인이 눈부신 활동을 시작한 것은 기원전 2350년경이며, 아카드의 왕인 사르곤은 수메르인의 도시국가들을 정복하여 메소포타미아 최초의 통일국가를 건설하였다. 아카드 왕국이 수립되면서 바빌로니아(남부 메소포타미아)의 북반부를 아카드, 남반부를 수메르라고 부르게 되었다. 수도는 아가데였으나, 그 소재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사르곤은 56년간의 치세 동안 남쪽은 페르시아 만에서 북쪽은 동지중해에 이르는 대제국을 형성하였는데, 궁병대를 중심으로 한 강력한 군대와 중앙 집권적 정치제도로 국가의 기초를 다졌다. 사르곤의 두 아들 시대에는 변경지방의 반란으로 고통을 받았지만, 제4대 나람신 왕은 반란을 진압하고 사르곤 시대의 제국을 회복하여 ‘아카드의 신, 사계의 왕’이라 일컬으며 신격화되었다. 그러나 뒤에는 국운이 점점 기울다가 기원전 2150년경 이란 고원에서 침입해온 구티족에 의해 멸망하였다.
바빌론
바빌론은 고대 메소포타미아에 있는 고대 도시이다. 현재의 이라크 알 히라에 있는 유적으로 바그다드 남쪽 80km 지점에 위치한다. 기원전 2300년경부터 고대 바빌로니아의 ‘성스러운 도시’로 기원전 612년 신바빌로니아에 이르기까지 바빌로니아의 중심 도시로 가장 위대한 도시로 여겨졌다. 바빌론의 공중 정원은 고대 세계 7대 불가사의 중의 하나이다.
바빌론은 대략 기원전 20세기경 아모리인들이 메소포타미아 서쪽으로부터 남동쪽으로 이주하면서부터 이 지역에 정착한 것으로 보인다. 기원전 1894년 아모리의 수무아붐이 최초로 세운 아모리 왕국의 도시로 시작해 기원전 18세기 유명한 함무라비대왕의 치세에 본격적으로 번성했다. 바빌론은 지리적, 상업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있어서 고대 바빌로니아 왕국의 수도이자 중심지로 발전했다.
기원전 1595년경부터 대략 440년간은 카사이트 왕국의 지배를 받았고 도시이름은 카르두니아 시로 개명되었다. 바빌론은 그 후 일어난 아시리아의 영향력 아래 계속 중요한 도시로 남아있었는데 바빌론의 정치적 지배권을 둘러싸고 아람인, 칼데아인 그리고 아시리아 인들 사이에 분쟁이 계속되었는데 아시리아 인이 비교적 관대한 정책으로 다른 민족보다 바빌론의 환영을 받았다.
아시리아

기원전 9세기부터 7세기 후반까지 바빌론은 아시리아 왕이 직·간접적으로 통치했는데 칼데아 부족들이 바빌론을 침범해 수차례나 왕위를 찬탈했다. 특히 아시리아의 왕 센나케립 통치기간 동안 칼데아인의 반란으로 통치가 어려워졌는데 칼데아 족의 새로운 지도자 무셰지브 마르두크는 바빌론 신전 재물로 용병을 사서 바빌론을 점령하였다. 기원전 689년 센나케리브는 다시 바빌론을 포위 공격해 9개월 만에 재탈환하고 이때부터는 바빌론에 대한 유화책을 버리고 파괴와 약탈을 명령하였다. 신전과 마르둑 신상은 파괴되었고 버려졌는데 이는 메소포타미아 인에게는 엄청난 종교적 충격을 주었고 이로 인해 결국 센나케리브는 암살당하고 만다. 센나케리브의 뒤를 이은 에사르하돈은 바빌론을 재건하고 주민들의 재산을 돌려주는 등 융합정책을 폈으나 항상 바빌론에서 반란의 빌미가 된 마르둑 신상은 바빌론에 두지 못하게 했다. 에사르하돈의 사후 뒤를 이은 아들들 사이에 내분이 일어났고 아슈르바니팔은 바빌론을 포위해 기원전 648년 함락시켰다.
신바빌로니아
아슈르나비팔이 죽은 후 기원전 626년 칼데아인 나보폴라사르는 바빌론을 점령하고 그곳에서 아시리아 세력을 몰아낸 후 신 바빌로니아 제국의 수도로 정했다. 뒤이어 네부카드네자르 2세 때 바빌론은 대규모 토목공사와 건축으로 새로운 시대가 열리는데 에메테난키 지구라트, 이슈타르 문, 그리고 세계 7대 불가사의인 바빌론의 공중 정원도 모두 이때 건설된 것이다.

페르시아
기원전 539년 바빌론은 다시 페르시아의 키루스 2세에 의해 점령되는데 네부카드네자르 2세의 뒤를 이은 나보니두스의 실정으로 키루스는 거의 무혈입성하였다. 키루스 대왕, 다리우스 대왕으로 이어지는 아케메네스 왕조시절, 바빌론은 페르시아 제국의 행정적인 중심지로 이 시기가 바빌론이 가장 번성했던 시기로 기록된다. 비록 크세르크세스 1세 때 일어난 반란으로 잠시 마르둑 신상과 도시가 파괴되지만 바빌론은 페르시아 제국의 교육과 과학의 중심지로 바빌로니아의 수학과 천문학이 발달하고 고대 세계에서 가장 번영하고 위대한 도시로 부각된다. 현대 바빌론에서 중요한 고고학적 발굴은 모두 이 시기의 것이다.
헬레니즘
기원전 331년 바빌론을 점령한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바빌론의 상업적·종교적·지리적 이점을 인정하고 신전의 복구와 무역육성을 위한 부두를 건설하였다. 그는 바빌론을 그의 위대한 제국의 수도로 삼을 계획을 갖고 있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고, 이후 알렉산드로스 부하 장군들의 내분을 거쳐 바빌론은 기원전 312년 셀레우코스 왕조에게 넘어갔다. 기원전 275년에는 셀레우코스 왕조의 새로운 수도인 셀레우키아가 티그리스 강에 건설되고 바빌론의 주민들을 강제 이주시키자 바빌론의 지위는 많이 약화되어 갔다. 기원전 141년 파르티아가 이 지역을 점령한 이후 사산조 페르시아를 거쳐 약 900여년간 페르시아 제국의 영토였으나, 이후 문화적, 종교적인 의미의 위대한 도시로만 기능하게 되었다.
종교
고대 메소포타미아 인들의 종교는 현세적 다신교로서 사후 세계를 인정하지 않았다. 점성술도 현세의 행복을 기원하는 의미로서 발전하였다.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의 불규칙적이고 잦은 범람은 참혹한 재앙을 가져왔고, 개방적인 지형은 끊임없는 외적의 침입을 불렀다. 이러한 자연 환경은 메소포타미아 인들의 세계관에 영향을 끼쳤다. 자연의 혜택보다는 재앙을 극복하는 데 힘써야 했던 수메르 인들은 삶도 지극히 현세적인 삶을 꾸려 나갔고, 사후 세계에 대해서는 거의 희망을 갖지 않았다. 문화적으로도 암울하고, 비관주의적인 특징이 강하였다. 그들이 갖고 있는 신에 대한 생각과 현세적인 가치관은 노아 홍수 설화와 '길가메시 서사시'에 잘 나타나 있다.
근년에 와서 고대사에 관한 많은 새로운 지식이 더해짐에 따라, 인류의 가장 오랜 문명을 쌓아올린 메소포타미아 지방에서는 이미 BC 4000년에 놀랄 만한 고도의 기술이나 물질문명이 결실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문학·미술·종교에 있어서 소박하지만 인간성의 깊은 이해를 나타내는 걸작과 제신에 대한 신앙을 나타내는 갖가지 유품들이 알려지게 되었다.
메소포타미아는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에 의한 비옥한 퇴적평야로서 수메르인은 역사의 시초에 이미 남부에 정주하여, 각지에 소도시를 중심으로 한 지역사회를 형성하고 있었다. 수메르인의 왕은 주신의 하나인 엔릴의 아들이라 칭하여 신으로서 숭배 받았으나, 그들의 뒤를 계승한 셈 인의 왕은 스스로를 신이라 부르지 않았다. 예컨대 바빌론 제1왕조의 함무라비 왕(기원전 2000년 전반)은 신 에아와 엔릴에 의해 왕으로 지명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주요한 3주의 제신을 한 쌍으로 해서 숭앙하는 습관이 있었다. 수메르인 사이에서는 아누·엔릴·엔키 등이 숭앙받았다. 최고신 아누는 이미 형식적 존재가 되어 있었으며, 수메르 판테온의 실권은 엔릴에 돌아와 땅뿐만 아니라 하늘까지 다스리는 신이 되었다.
왕권의 신장과 함께 주신은 국가신의 성격을 강화했다. 셈 판테온에서는 셈인의 주신 마르두크가 함무라비왕 시대에 엔릴의 기능을 계승하여 최고신이 되었으며, 샤마쉬·신과 함께 한 쌍을 이루었다. 기원전 2000년 말부터 융성하기 시작한 아시리아 제국에서는 주신 아슈르가 최고신이 되었다.
수메르인은 이미 발달한 신전·제사 계급을 갖고 있었다. 고대에서는 후에 분화한 예술·학문과 같은 문화 활동 뿐만 아니라 세제·금융 등의 사회·경제활동도 신전과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다. 당시 고급관리가 되는 지름길은 신전 부속의 서기학교에서 점토판에 설형문자를 배우는 일이었으며, 문학작품도 발달하였다. 그 가운데서도 '길가메시 서사시'는 인류가 소유하는 가장 오랜 이야기의 하나이다.
또한 새해에는 천지창조의 성극이 제사들에 의해 상연되고, 신전은 토지나 양의 무리를 소유, 소작이나 목축자에게 빌려 주어 연공을 바치게 하거나, 이자를 붙여 돈을 빌려 주거나, 물가의 기준이 되는 은의 정제가공이 행해졌다. 신전의 경내에는 자주 지구라트라고 불리는 벽돌을 쌓아올린 높이 수십 미터나 되는 인공의 산이 구축되었다. 그 가운데서도 이른바 '바빌론의 탑'으로 불리는 에산길라 신전의 지구라트가 유명하다.
거듭된 타민족의 침입이나 주권의 교대에도 불구하고, 메소포타미아의 종교는 어떤 종류의 형태를 계속 유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두무지(탐무즈, 아도니스) 신앙을 들 수 있다. 훗날 탐무즈는 해마다 시들고 봄이 오면 다시금 싹이 돋는 식물의 죽음과 부활을 상징한다고 했다. 원래 수메르에서는, 두무지가 사후 이 지상에 되살아나는 것이 아니라, 저승의 주민이 되었음에 불과한 듯싶다. 아무튼 그의 아내인 여신 이난나(이쉬타르, 아티스)와 함께 농산물의 풍요나 가축의 다산을 기원하는 신앙 대상으로서 극히 광범하게 고대 오리엔트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 뒤로 점술은 매우 융성해졌다. 1년의 반 이상이나 맑은 날씨가 계속되는 이 지방에서는 별의 관찰이 용이하여 규칙적인 천체의 운행은 사람들에게 정신적인 안정을 주었다.
문자와 역법
고대 메소포타미아 인들의 종교는 현세적 다신교로서 사후 세계를 인정하지 않았다. 점성술도 현세의 행복을 기원하는 의미로서 발전하였다.
수메르 인들이 처음으로 썼던 문자는 상형문자였는데, 이 상형문자는 형체가 있는 물건의 모양을 본떠서 만든 글자로 낱말의 뜻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를테면 산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산의 모양을 그려야 하고, 새를 나타내려면 새의 모양을 그려야 했다. 그러나 나타내기가 어려운 것들이 많았기 때문에 뒷날 그들은 쐐기 모양으로 나타낸 설형문자를 만들어 냈다. 그리고 그들은 많은 전설과 영웅들의 이야기 등을 영원히 남기기 위해 뼈나 갈대 줄기를 펜으로 삼아서 전토판 위에 설형 문자를 적고 불에 구워 보존했다. 뒷날, 페니키아인들이 이 설형문자를 간단하게 만들었으며, 이 페니키아 문자에 모음이 보태져서 오늘날 쓰고 있는 알파벳의 근본이 되었다.
또한 수메르 인은 달의 운행을 기준으로 하여 1년을 12달로 하는 태음력을 만들고, 다시 하루를 24시간, 한 시간을 60분, 1분을 60초로 하는 60진법을 만들었다. 원을 360°로 나누는 것도 그들에게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