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의 집
이정화
물의 집이 어디에 있는지 아무도 아는 이가 없다
입에서는 침이라는 이름으로
코에서는 콧물이란 이름으로
눈에서는 눈물이란 이름으로
도깨비처럼 이름 바꿔가며 살아가는
담기는 그릇마다 달라지는 물
물 내리면 숲의 몸부림이 심해지고
물오르면 푸르름 아우성이 시작되어도
끄떡도 않고
지구를 휘젓고 다니는 물 물 물
지구를 뒤흔들며 괴물도 되었다가 생명수도 되었다가
횡포를 부리는 전지전능한 신神
냄새도 맛도 없이 늘 젖어 있는 물
집앞 골목처럼 낯익지만
시공을 넘나드는 물
뜨거운 여름이나 추운 겨울을 밀어내는 건
미지근한 가을이나 봄이듯
사람이 태어나게 하는 것도 죽게 하는 것도
늘 맛도 냄새도 없는 맹물이다
갈증이 나 물 한 사발 벌컥벌컥 들이킨다
---남과 다른 시쓰기 동인 시집 이서빈 외, {길이의 슬픔}에서
물은 모든 생명이 기원이며, 우리 인간들의 몸의 70%가 물이라고 한다. 이정화 시인의 말대로, “물의 집이 어디에 있는지 아무도 아는 이가 없”지만, 그러나 물은 도처에 있고, 물은 다양한 형태로 존재한다. 안개와 구름의 형태도 있고, 눈과 얼음의 형태도 있다. 수증기와 입김의 형태도 있고, 침과 콧물의 형태도 있다. 눈물과 오줌도 물이고, 젖과 정액도 물이다. 샘과 시냇물도 물이고, 호수와 강도 물이다. 피와 이슬도 물이고, 바다와 석유도 물이다. 물의 형태는 매우 다양하고 물은 영원한 생명수도 되지만, 이 물은 뱀처럼 자기 방어의 독이 될 수도 있고, 이 물의 사용용도에 따라서 치명적인 재앙이 될 수도 있다.
물은 이정화 시인의 표현대로, “도깨비처럼 이름을 바꿔가며” 살고, 그릇에 따라 그 모습이 달라진다. 물이 내리면, 즉, 많은 비가 오면, 숲의 몸부림이 심해지고, 물이 오르면 풀과 나무와 모든 생명들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게 된다. 이 장엄하고, 이 아름답고, 이 하늘의 재앙과도 같은 기후 변화와 이 세계의 모든 풍경들을 다 연출해내면서도 물은 너무나도 태연하고, 그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지구를 휘젓고” 다닌다.
물, 물, 물----. 지구를 뒤흔들며 괴물도 되었다가, 생명수도 되었다가 모든 기적을 창출해내면서도, 단번에, 모든 기적을 도로아미타불의 헛수고처럼 다 파괴해버린다. 물은 창조의 신이자 파괴의 신이고, 이 창조와 파괴, 이 생성과 소멸을 다 움켜쥐고 있는 전지전능한 신이라고 할 수가 있다. “냄새도 맛도 없이 늘 젖어 있는 물”, “집앞 골목처럼 낯익지만/ 시공을 넘나드는 물”, “뜨거운 여름이나 추운 겨울을 밀어내는 건/ 미지근한 가을이나 봄이듯”이, “사람을 태어나게 하는 것도 죽게 하는 것도” “늘 맛도 냄새도 없는 맹물”이라고 할 수가 있다.
늘, 항상, 변함없이 졸졸졸 솟아나오는 물, 더없이 부드럽고 달콤한 물, 한여름의 불볕 더위를 속 시원하게 식혀주는 물, 수많은 온천지역의 광천수처럼 펄펄펄 끓어오르는 물, 마치 천지창조의 첫날처럼 활화산으로 활활활 타오르는 물, 수많은 바다의 동식물들을 먹여 살려주는 물, 기나긴 가뭄을 해소해주고 젖과 꿀처럼 모든 생명체들을 길러주는 물, 모든 부정부패와 모든 과오들을 다 씻어내 듯이 밤낮으로 퍼부어대는 물, 맹물처럼 보이지만 수많은 자양분을 실어 나르며 모든 생명체들을 먹여 살려주는 물----. 이 물은 어디에도 있지만, 그러나 [물의 집]은 아무데도 없다. 아니, [물의 집]은 아무데도 없지만, 모든 생명체의 몸과 하늘과 땅과 바람과 불속에도 있다고 할 수가 있다.
물은 모든 생명의 기원이며, 지구가 대폭발을 한다고 할지라도 물만은 영원할 것이다. 물은 홍수와 가뭄, 생성과 소멸, 창조와 파괴를 주재하는 신이며, 영원히 그 권능을 잃지 않을 것이다. 물은 끊임없이 솟아나오고, 물은 끊임없이 흘러넘친다. 물은 끊임없이 끓어오르고, 때로는 차가운 공기와 더운 공기로 모든 시간과 날짜와 사계절의 운행마저도 주재한다. 요컨대 물은 눈, 비, 얼음, 서리, 성에, 샘물, 강, 호수, 바다, 안개, 구름, 무지개 등의 천의 얼굴을 가진 변장술의 대가이자 영원한 시인, 또는 천하제일의 명품 주연배우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감히 어느 시인이, 또는 어느 명품배우가 이러한 물의 창조성과 물의 연기력----물의 화장술과 물의 분장술----을 흉내내고 뛰어넘을 수가 있을 것이란 말인가!
사막은 물의 죽음이고, 물이 없으면 어떤 생명체도 살아갈 수가 없다.
영원한 생명수인 물, 우리의 몸, 아니, 모든 생명체는 [물의 집]이고, 이 [물의 집]을 오염시키는 것은 자기 자신을 죽이고, 모든 생명체를 다 죽이는 것이다.
오오, 물이여!
우리들의 몸에 영원히 집을 짓고 사는 물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