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8. 자랑스런 소대 전우들께
● 필자가 1975년 임관후 월남은 공산화됨
필자는 1975년 3월 28일 육군소위로 임관
후 광주보병학교에서 초군반 교육을 받았다.
필자는 초군반 교육중 4월 30일 자유월남이
공산화되었다.
자유월남이 공산화되자 다음차례는 한반도가
아니냐라는 분위기로인해 당시 군내 분위기는
어수선했다.
당시 미 키신저 국무장관은 한반도에서 북한
이 또다시 남침하면 북한에 핵무기를 투하하
겠다는 매우 강경한 포문을 열었다.
비록 월남이 공산화되었다고 해서 장교가 공
포스러운 모습은 보이는것은 육사출신답게
늠름해야하는 전통적 분위기에는 맞지않은
것이었다.
다행히 광주에서 훈련중 하늘을 날으는 F-5
전투기들의 웅장한 비행은 필자에게 상당한 안도감을 주었다.
필자는 이런 분위기에서 초군반 교육을 마치
고 보병 20사단으로 보직 된 것이다.
● 당시 경제력과 군사력
필자가 임관후 소위 첫봉급은 33100원이었
으며 당시 남북한 경제력은 비슷하였다.
당시 순대국밥 한그릇은 200원이니 33100원
을 오늘날 순대국밥 한그릇 1,3000원으로 환
산시 약 200만원에 해당된다.
그러나 군사력만은 북한이 우세하여 남한군사
력은 북한 군사력의 70%라는 소문이 회자되
었다.
다행히도 당시 2차대전시 사용했던 M-1소총
은 월남전에서 위용을 떨쳤던 M-16소총으로
바뀌어 필자는 M-16소총을 휴대하면 뭔가 모
르게 북괴군을 한방에 제압할 것 같았다.
● 보병 20사단 62연대 3대대 11중대
ㆍ소위 임관후 최초 보직
필자인 20사단으로 보직은 1975년 8월 초순
경으로 기억된다.
당시 의정부 000보충대 연병장에서 더블백을
메고 기다리니까 수 많은 사단에서 트럭들이
먼지를 일으키면서 들어왔다.
당시 소대장은 올빼미 마크가 붙인 20사단
트럭에 10여명 육사 동기생들과 탑승하여
동두천을 지나 북으로 계속 질주하였다.
트럭 선탑장교의 안내에 따라 동기생들은
해당부대 앞에서 한명씩 하차하였는 이런 모습은 마치 보급품을 각부대에 분배하는
것같아 역시 군인은 명령에 죽고산다는것을 세삼 실감하였다.
필자는 대광리 냇물 건너편 62연대 3대대에
보직되었다.
당시 연대장은 육사 12기 유백 대령, 대대장은
육사 16기 양재일 중령, 중대장은 육사 26기
조승룡 대위였다.
양재일 대대장 사모님 생신은 필자 생일과 같
은날이고 조승룡 중대장은 필자 중ㆍ고등학교
및 육사선배였으며 필자 선친의 제자였다.
그런데 대대장 사모님은 오래전 작고하셨고 조승룡 선배도 수년전 고인이 되었으니 삼가 명복을 드린다.
ㆍ부대생활
필자는 미혼장교로서 독신장교숙소인 BOQ
를 사용하였으며 복지시절은 그저 그렇지만
사관학교생활같이 규율이 엄격하지않고 장
교로서 보다 더 자연스러워 생활 할만 했다.
목욕은 부대밖 목욕탕에서 하였고 GP에서는 별도 목욕탕이 없으니 목욕물을 대워 소대장
실에서 하였다.
당시는 먹고살기가 어려워 병식당 앞에는 정
량급식이라는 글귀가 크게 부착되었고 병사들
은 플라스틱 밥그릇에 젖갈도 없이 숫갈로만 식사를 하였다.
일식삼찬이지만 쌀보다는 새까만 보리밥이
주류를 이루었다.
그런대도 병들은 아무 불평없이 소대장 명령
에 절대복종하고 윗분을 모시는 충성심도 매
우 강했다.
필자는 부대앞 상점에서 사과와 감을 사가지
고 가서 소대원 30여명에게 먹인것이 기억난
다.
그리고 최전방 GP장시에는 매월 봉급을 타면
밀가루 한포대(3000원으로 기억됨)값을 지
불하고 나머지 부족액은 소대원들이 십시일반
하여 GP내에서 부침개를 요리해서 함께 먹었
다.
꽃들중에서 인동초꽃이 가장 향기로운 이유는
혹한을 극복했기 때문이란다.
필자도 혹한보다 열악한 1975년 불리한 환경
속에 소대원들과 만남의 인연은 오늘날까지
지난 48년간 지속 된 것이다.
● 자연인으로 소대원들과 만남
필자는 소대원들과 첫 만남은 대략 20년전으
로 기억된다.
필자가 소대장 시절 전령이었던 조백구 전우
가 개인택시를 운행중 장교분이 탑승하자 무
심코 우리 소대장 김명수 이름을 대자 당시 장
교분이 김명수 선배요? 하면서 필자의 전화
번호를 준것이 필자와 만남의 시작이었다.
필자가 소대장 시절 인연을 맺은 자랑스런 전
우들중 모임에 동참 인원은 총 6명이다.
황영진 전우 : 당시 분대장으로서 1군 하사관
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였다.
제대후에는 명문 연세대를 졸업 하였으며 슬하에 두 아들은 모두 서울대를 졸업후 의
사ㆍ변리사가 되는등 자식농사를 잘했다.
특히 소대장 친구 아들을 버스기사로 조치해
준것은 너무 고마웠다.
황전우는 군 직책으로 보나 나이로보나 최고
선임으로서 우리의 소중한 인연을 빛나는데
크게 일조 할것을 기대한다.
조백구 전우 : 조전우는 필자가 소대장시 전령
이었으며 주말에 서울 아가씨와 데이트를 하
고 있는데 갑자기 비상이라는 전갈을 전해주
었는데 당시는 조전우가 그렇게 미워 보였다.
조 전우는 필자와 소대원들과 만남을 이룬 일
등공신으로 화랑무공훈장감이다.
조전우는 건강해서 오래도록 자영업(택시운
전)을 지속하길 바란다.
가재용 전우 : 군생활시 별로 말이없는 조용
하고도 침착하였으며 군생활에 매우 성실한
것으로 기억된다.
가전우는 아직도 직장생활을 하는것으로 보아
가전우의 성실성은 직장에서도 200% 인정을
받은것으로 믿어 확신한다.
필자는 우리 모임을 소중히 여기는 가전우의 공동체 정신을 매우 고맙게 여긴다
염영수 전우 : 염전우는 소대에 있다가 중대 행정반 통신병으로 보직되어 성실히 생활하
였다.
서울시청 공무원으로 오래도록 근무후 퇴임하
였고 특히 서예와 묵화에는 대단한 재능을 갖
고 있다.
염 전우의 친화력과 원만한 성격은 전우들 모
임에 윤활류가 될 것이다.
양병열 전우 : 양전우는 군생활시 전기 다루는 솜씨가 대단하였으며 당시 칠갑산 노래수준은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필자는 연대훈련시 한탄강 주변 텐트속에서 양전우와 동숙을 하는데 양전우는 춥다보니 소대장 다리를 감싸고 숙면한 기억이 난다.
양전우는 은행(지점장)에 오랜기간 근무하였
으며 요즘은 손자를 돌보는 황혼육아에 바쁘
게 보낸다.
장상헌 전우 : 필자와 장전우는 소총중대와
수색중대에서 두 번 근무를 같이했다.
장전우는 군생활에 매우 성실 한 것으로 기억
된다.
장전우는 법대를 졸업후 기업은행에 취직하여
부행장으로 퇴임후에는 법무법인에 출근한다.
장전우는 진실ㆍ겸손ㆍ친절등 훌륭한 인품을
보이고 있어 전우들 사교모임에 크게 일조할
것을 기대한다.
● 제언
인연을 맺는것은 식목이지만 맺은 인연을 잘
가꾸는것은 양목이다.
우리 모두 전우들간 양보ㆍ배려와 역지사지
입장에서 21세기 최고의 친목이 되도록 합시
다.
소대장 . 김 명수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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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이야기
75년전우의 이야기
가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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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19 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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