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 5월, 10?26 직후의 혼란기를 한 고비 넘긴 우리사회는 새로운 위기국면에 접어들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군부의 정치세력화 조짐에 대한 반발이 학생운동권으로 하여금 정치 중심부에로의 진입을 가속화 하고 있었다.
5월에 들어서면서 서울대를 비롯한 학생운동권은 학생들 스스로조차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는 급속한 변화에 돌입하고 있었다. 5월2일에 서울대 관악캠퍼스에서 개최된 ‘민주화 대총회’에 1만여명에 가까운 서울시내 각 대학생들이 결집한 것도 그중 하나였다.
이후 10여일간 계속된 이른바 ‘민주화 성회’를 통해 학생들은 운동을 지구화 한다는 전략을 수립, 이를 바탕으로 ‘참 민주화’의 돌파구를 마련한다는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 결과, 5월13일 서울 광화문 일대에는 서울시 6개 대학생 2천5백여명이 집결, ‘계엄철폐’를 외치며 본격적인 가두시위에 돌입했고, 그 이튿날(14일)은 전국 37개 대학이 일제히 가두로 뛰쳐나와 민주화 열기를 한층 고조시켰다.
정부당국은 이에 대해 경고와 회유를 병용, “중동을 방문중인 최규하 대통령이 귀국하면 확실한 정치일정을 밝히겠다”며 거듭 학생들의 자제를 촉구했다. 그러나 대다수 시민들과 학생들은 당국의 저의를 의심하였고, 시위대는 경찰차를 불태우는 등 점차 가열, 연 3일째 야간 가두시위가 계속되었다.
중동을 방문중이던 최규하 대통령은 당초의 예정보다 앞당겨 5월16일 급거 귀국했다. 최대통령은 귀국 즉시 청와대에서 시국과 관련한 비상대책회의를 소집, 심야회의를 가졌다. 밤 11시부터 1시간 동안 계속된 이 회의에는 김종환 내무, 주영복 국방, 이희성 계엄사령관, 최광수 대통령 비서실장 등이 참석, 우여곡절 끝에 18일 0시를 기해 확대비상계엄을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한편 10여일간의 ‘민주화성회’ 이후, 서울시내 각 대학들은 5월16일에 접어들면서 어느 정도 소강상태를 보이고 있었다. 서울시내 24개 대학 학생대표들은 이날 모임을 갖고 “우리의 의사가 충분히 전달 것으로 보인다”면서 교내 및 가두시위를 일단 중단하고 시국의 추이를 관망, 새로운 전략을 모색하자는 데 합의하고 있었다.
그러나 광주는 전혀 예외적인 현상을 보이고 있었다. 학생시위가 전국적으로 소강상태로 접어들 무렵 광주에서는 5월16일, 전날보다 훨씬 더 많은 3만여명의 학생?시민이 도청앞 분수대에 모여 횃불시위를 벌였다.
당시 전남대학교는 전국의 어느 대학보다도 일사불란한 조직체계를 확립 “박관현 총학생회장(법대 행정학과 3년)을 중심으로 똘똘 뭉쳐 있었다”고 한다. 특히 박관현 회장의 탁월한 선동성 대중연설은 학생들은 물론 광주시민들로부터도 화제를 불러일으킬 만큼 “논리와 신념에 가득 차 있었다”는 것.
전남대학교는 80년 3월, 31명이나 되는 ‘문제의 복적생‘을 안게 되었는데, 이들은 ‘어용교수문제’와 ‘유신세력 척결 문제’에 대해서 끈질기리만큼 치열한 자세를 보여주었다. “총학생회와 복적생들은 한치의 틈도 없이 합일된 뜻에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고 당시의 학생회 한 관계자는 회고했다.
그러나 조선대학교는 10?26이후 결성된 민주회복추진위원회가 학교측의 끈질긴 방해공작으로 총학생회조차 제대로 구성하지 못한 채 5월을 맞고 있었다.
서울지역의 ‘민주화성회’가 불붙기 시작한 5월13일, 전남대?조선대 학생들은 서울시내 6개 대학생들의 가두시위에 자극 받아 5월14일을 새로운 기점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거기다가 5월15일 서울역 광장에서 벌어진 ‘30개 대학 총10만 여명의 대규모시위’는 광주의 SM권(학생운동권)에 커다란 자극제가 됐다. 그런 의미에서 ‘5?18광주사태’는 그날부터 며칠 거슬러 올라간 5월14일부터 이미 불꽃이 일었다고 봐야 할 터였다.
5?16 횃불시위와 경찰의 대응
5월14일 오후 1시, 전남대학교 도서관 앞에 집결한 1만 여명의 학생들은 가두진출을 시도, 정문 앞에서 기동경찰대의 완강한 저지에 직면하자 일단 후퇴하여 총학생회 지휘아래 각 단과대학별로 담당구역을 설정하고 분산적으로 가두진출을 감행했다.
시위대는 여러 갈래로 흩어져 오후 3시경 도청 앞 분수대를 장악 ‘민주화성회’를 개최했다. 성명서가 낭독되는 동안 시민들도 숙연한 자세로 경청, 궐기대회를 마친 학생들은 ‘의기양양하게’ 학교로 되돌아와 철야농성에 들어갔다.
5월15일의 가두진출은 의외로 별다른 저항 없이 이뤄졌다. 도청 앞까지 무난히 진출한 전남대, 조선대, 광주교대생 등 1만6천여 학생시위대는 도청 앞 분수대를 중심으로 빙 둘러앉아 ‘비상계엄 해제’ 등을 요구하며 ‘민주화성회’를 개최했다.
이날 모임에서는 전남대의 ‘시국성토문’ 낭독에 이어 광주교대, 조선대 민주투쟁위원회의 ‘시국선언문’ 전남대의 ‘대학의 소리’ 전남대-조선대 학보사의 ‘결의문’ 광주교대의 ‘시민에게 드리는 글’ 등이 차례로 낭독되었으며, 전남대 총학생회에선 교수들에게 ‘민주화동참’이란 글자가 쓰인 리본을 가슴에 달아 주었다.
학생들이 요구하는 주내용은 ‘비상계엄 즉각 해제’와 ‘노동3권 보장’ ‘정치일정 단축’ 등으로 요약될 수 있었다. “학생과 시민들은 혼연일체가 되어 질서정연한 시위자세를 견지했다”고 당시의 분위기를 이 고장 출신의 K시인(38세)은 전했다.
5월16일은 열아홉 돌을 맞는 5?16군사쿠데타의 날이자, 광주를 제외한 서울과 다른 지역에선 시위중지를 결정한 날이었다. 그러나 광주의 대학생들은 어제와 마찬가지로 도청 앞 분수대에 진출, 시국성토대회를 벌였다.
전남대 조선대 광주교대 조대공전 동신실업전문 송원전문 성인경상전문 기독병원 간호전문 서강전문대 등 광주시내 9개 대학과 전문대생 3만 여명은 이날 오후3시 도청 앞 분수대 광장에서 대학별 학생대표들이 작성한 ‘제2 시국선언문’을 낭독한 데 이어 복적생을 대표한 정동년씨(당시 38세. 전남대 공대 화공과 4년)가 ‘시민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낭독,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학생들은 오후 6시30분부터 분수대 주위를 돌며 시위에 들어갔다. 8시경엔 다시 모여 ‘계엄철폐’ 등의 구호와 함께 ‘정의가’ ‘투사의 노래’ 등을 합창하며 야간 횃불시위로 돌입했다. 학생들은 미리 준비한 4백여개의 횃불과 각종 구호가 쓰인 플래카드, 피켓을 들고 조선대생들을 선두로 한 1개조는 금남로→유동 3거리→복개상가→중앙여상→현대극장을 거쳐 다시 금남로로 되돌아 왔으며, 전남대를 선두로 한 또 한 개조는 광주체신청→산장입구→산수동 5거리→동명파출소→노동청 등을 거쳐 다시 출발지인 도청 앞 분수대로 집결, ‘5?16 화형식’을 가졌다.
이 과정에서 한가지 특기할만한 사실은 경찰들이 보여준 대응자세. 횃불시위 과정에서 경찰들은 사고방지를 위해 학생회 간부측과 상호협조적인 자세를 보여줬다는 점이다. 이러한 대응은 서울을 비롯한 타지방의 학생시위에서 보여준 경찰들의 자세와는 판이하게 다른 면이었다. 이날의 시위에 대해 한 관계자는 다음과 같이 기억했다.
“이날의 시위는 바로 몇 발자국 앞으로 다가온 처절한 사태를 암시하듯, 태풍전야의 고요함과 평온함으로 일관되었다. 시민들은 학생들의 평화적인 시위에 감동하고 있었다. 시민들은 흥분된 모습을 감추지 못한 채 횃불시위대의 행렬을 따라 길 양옆으로 질서정연하게 함께 행진함으로써 학생들과 의식의 연대감을 보여주었다…”
공포의 밤, 5?17
이날 시위를 종결하는 과정에서 학생지도부는 “연일 계속된 피로를 풀고 전국의 타대학과 보조를 맞추기 위해 시국의 추이를 관망한 뒤” 월요일인 5월19일 다시 성토대회를 갖기로 약속하고, 밤 10시30분쯤 자진해산 형식으로 시위를 종결했다. 이와 함께 휴교령이 내려지면 즉각 오전 10시에 전남대 정문 앞으로 모일 것도 약속했다.
한편 전국 55개 대학 대표 95명은 이날(5월16일) 오후5시30분부터 이화여대에 모여 제1회 전국대학총학생회장단 회의를 열고, 최근의 정세분석과 학생운동방향을 토의했다. 이 회의는 다음날까지 마라톤으로 계속되었으나 뚜렷한 결론에는 도달하지 못했다.
서울과 여타 도시의 이같은 진정된 분위기와는 달리 광주시는 며칠 전서부터 고조되기 시작한 흥분과 긴장감이 여전히 지배하고 있었다. 그와 함께 심상치 않은 몇 가지 조짐들이 포착되기도 했다. 16일 광주 외곽 고속도로에선 공수부대 병력을 실은 군용차 행렬이 많은 시민들에 의해 목격되었다.
5월17일 오후. 전남대 총학생회장단은 서울의 급박한 사태에 접하고(“서울의 대학생회장단이 모두 당국에 연행돼 갔으니 알아서 처신하라”는 긴급 전화연락을 받음), 일단 무등산장으로 모두 몸을 피했다. 이들은 밤 9시쯤 시내 중심가에 있는 대지호텔로 피신처를 옮기고 서울에 몇 차례 연락을 시도했으나 불통이었다. 이들은 사태의 긴박감을 재차 확인, ‘각자 가 알아서 피신할 것’에 합의했다. 일단의 경찰이 대지호텔을 급습한 것은 이들이 흩어진 1시간쯤 뒤였다.
5월17일 밤 11시40분, 이규현 문공장관은 “자정을 기해 비상계엄을 전국에 확대실시 한다”고 발표했는데, 이보다 앞선 밤 11시를 전후, 광주시내 곳곳에선 민주화운동에 주도적인 역할을 해왔던 다수의 인물들이 체포, 연행되고 있었다. 서울에서도 이날 밤 김대중씨를 비롯한 26명의 재야인사와 구공화당계 정치인들이 체포되었다.
광주의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갔다. 80년 봄에 복귀했던 전남대 복적생 정동년 하태수 박형선 문덕희 김상윤 박선정(전남대 인사대 학생회장) 윤목현(자연대학 학생회장)과 조선대 복적생인 유재도 유소영, 그리고 교수 2명이 군부대로 연행돼 갔다.
이로부터 두시간 뒤인 5월18일 새벽 1-2시 무렵, 전남대와 조선대 캠퍼스엔 공수부대원들이 진주했다. 당시 두 대학에는 16일의 횃불시위 등 연이은 학생시위로 지친 많은 학생들이 피곤한 몸으로 농성을 하고 있었다. 이들은 학교에 계속 머물면서 정부 당국의 반응과 정세 추이를 예의 관망하고 있었다.
18일 새벽, 일단의 공수부대원의 급습을 받은 학생들은 ‘미처 손쓸 겨를도 없이’ 이들이 휘두르는 몽둥이와 군화발에 짓이겨졌다. 대부분의 학교 잔류학생들은 학교본부 건물에 감금되었고, 몇몇 운이 좋은 학생들은 강의실 옥상 변소 등을 통해 도망쳐 나오기도 했다. 대학교뿐만 아니라 광주시내 주요관공서와 요소 요소의 거리에도 경찰과 전경 군인 공수부대원들이 배치돼 있었다.
동이 트면서 광주시의 공기는 숨막힐 듯한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시민이나 경찰들 모두의 표정은 한결같이 굳어 있었다. 평소처럼 출근길에 나선 많은 젊은이들은 요소 요소에서 당하는 불신검문에 약간의 저항을 보이긴 했으나 별다른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다. 한마디로 ‘폭풍전야의 정적’ 바로 그것이었다.
운명의 첫째 날, 5월18일
공수부대의 ‘돌격명령’에 비극은 싹트다 5월18일 오전9시를 전후, 광주시내 도처에 무거운 분위기가 감돌 무렵, 전남대학교 정문 앞엔 학생들이 하나 둘씩 모여들기 시작했다. 일요일인데도 불구하고 많은 학생들은 “휴교령이 내리더라도 10시에 학교 앞에서 만나자”는 약속을 기억하고 사태추이를 알아보기 위해 평일이나 다름없이 등교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그러나 학교 정문 앞에는 이미 공수부대원들이 완전무장한 모습으로 학생들의 출입을 저지하고 있었다. 이들은 “오늘은 학교에 들어갈 수 없으니 각자 집으로 돌아가라”고 종용했다. 학생들은 학교 문 앞을 삼삼오오 서성이며 쉽사리 귀가하려 하지 들지 않았다. 30여분이 지나자 학생들의 숫자는 1백여명으로 불어났다. 학생들은 동료들의 수가 불어나자, “점차 겁이 없어지고” 공수부대원들은 긴장된 자세를 취하기 시작했다. 지휘관급으로 보이는 공수부대원이 직접 학교정문 다리 앞까지 나와서 메가폰으로 귀가를 종용했다.
그러나 50여명의 학생들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다리 난간에 걸터앉아 ‘정의가’ ‘투사의 노래’ 등을 합창하며 ‘계엄군 물러가라’ ’전두환 물러가라‘ 등의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다. 10시를 전후해서 학생들의 숫자가 2-3백명선으로 불어나자, 대치중이던 공수부대 지휘관은 매가폰을 통해 “지금 즉시 해산하지 않으면 무력으로 해산시키겠다”고 경고를 발했다.
학생들은 더욱 목청을 높여 노래를 불렀다. 그 순간 갑자기 공수부대 쪽에서 “앞으로 돌격!”하는 명령과 함께 “악!” 소리를 지르며 일단의 공수부대원들이 학생들을 비집고 들어와 닥치는 대로 몽둥이로 후려치기 시작했다. 숫자는 7-8명에 불과했지만 공수부대원은 경찰과 전혀 달랐다. 상당수의 학생들이 거꾸러지면서 피를 흘리는 모습이 눈에 띄기도 했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뿔뿔이 흩어져 인근 골목길로 숨어들었고 사태는 투석전 양상으로 돌변했다. ‘돌비’를 맞으면서도 공수부대원들은 피하려 들지 않았다. 자신에게 돌을 던지는 학생을 겨냥, “끝까지 쫓아가서” 무자비하게 구타를 가한 다음 연행했다.
공수부대원들은 잡아온 학생들을 옷을 벗긴 채 팬티 하나만 입혀 꿇어 앉혔다. 이렇게 잡혀온 학생들이 삽시간에 6명으로 불어났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이들의 ‘비인간적인 진압방식’에 전율을 느끼기도 했으나 대부분의 학생들은 극도로 흥분, 시민들과 합세해 새로운 돌파구를 찾자는 데로 부지불식간에 의견이 모아졌다.
약 30여분간에 걸쳐 공방전이 계속됐으나 잘 훈련된 공수부대원들을 학생들이 당해낼 도리가 없었다. 계속 피해가 늘어나자 몇몇 리더들이 선두에 나서서 상황을 지휘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곧이어 “광주역에서 재집결하자”면서 학생들에게 시내진입을 지시했다. 학생들은 삼삼오오 짝을 지어 광주역 앞 광장으로 향했다.
학교 앞에서 공수부대원들이 보여준 진압방법에 ‘공포감’과 ‘분노’를 동시에 느낀 이들은 보다 짜임새 있는 시위방법을 모색했다. 그 결과 몇몇 시위주동자들은 광주역에 3-4백명 정도의 학생들이 집결하자, 시민들의 원군을 기대할 수 있는 금남로 도청 앞으로 나아가기로 결정했다.
이들은 고속버스터미널과 시외버스공용터미널을 거쳐 금남로 가톨릭센터 앞까지 가는 동안 “비상계엄군 물러가라” “김대중 석방하라” 등의 구호를 번갈아 외쳐가며 시민들의 호응을 유도했다. 특히 이들 학생들은 아직도 많은 시민들이 모르고 있는 김대중씨의 체포 사실을 강조했다.
시민들은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호남사람들이 기대를 걸고 있던 김씨가 체포되었다는 소식에 접하자 시민들은 동요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김씨는 학생들과 시민들이 쉽게 일체감을 이루는 촉매제 역하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떠맡고 있었던 것이다.
금남로의 연좌데모
약 3km(전남대 정문→광주역→공용버스터미널→가톨릭센터)를 순식간에 달려온 3백 여명의 학생들은 피로도 풀 겸 11시경부터 가톨릭센터 앞 금남로 도로상에서 연좌데모에 들어갔다. 학생들의 숫자는 5백여명 선으로 불어나고 금남로 일대의 교통은 차단됐다. 연좌농성중인 학생들을 빙 둘러선 시민들의 숫자는 대략 2천 여명에 달하고 있었다.
연좌농성에 들어간지 10분도 채 못되어 대기 중이던 전투경찰들이 이들을 포위하고 최루탄을 쏘기 시작했다. 학생들의 대오는 급작스레 무너지면서 경찰에 의해 많은 숫자가 연행돼갔다. 경찰들의 태도는 엊그제의 횃불시위 당시와는 판이했다.
곤봉세례와 구둣발로 짓이기는 것쯤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이를 지켜본 시민들은 경악과 분노를 금치 못하면서 서서히 학생세력과 동화되는 기세를 보였다. 그러나 시위에 직접 합세하는 시민은 아직은 별로 없었다.
전투경찰의 완강한 저지를 받은 학생들은 뿔뿔이 흩어져 충장로 황금동 불로동을 무리지어 행진하면서 구호를 외쳐댔다. 이날 시위대는 두 방향으로 나뉘었는데, 충장로 쪽으로 향한 시위대열은 황금동→수기동→광주공원→현대극장→한일은행 4거리를 거치면서 5백여명으로 숫자가 불어났고, 또 다른 시위대열은 광주천에서 광주공고와 동구청을 돌면서 3백명선으로 불어나 있었다.
양 시위대열은 곧 합류하여 공용버스터미널 로타리를 거쳐 시민관 쪽으로 진출을 시도했다. 공용 버스터미널을 지나면서 학생들은 각 지방(목포 여수 순천 해남)주민들에게 광주의 시위사실을 알려 달라고 간곡히 부탁하기도 했다.
그러나 공영터미널 안쪽으로 들어간 학생들은 순식간 포위되고, 터미널은 삽시간에 최루가수에 휩싸였다. 헬리콥터가 계속 공중을 맴돌면서 학생들의 시위현황을 무전으로 연락, 학생들은 군?경 합동저지망을 뚫기가 힘들었다. 계림극장 부근까지 피신한 학생들은 이 과정에서 많은 수가 붙잡혀 곤욕을 치렀다.
마지막 무리를 지은 학생 수자는 겨우 20 여명에 지나지 않았다. 이들은 계림극장 부근 탁구장에 숨어들어 다음의 상황을 숙의하면서 자신들이야말로 중요매개체라는 걸 확인, “끝까지 싸울 것”을 결의했다. 오후 1시30분쯤 계림극장을 빠져 나온 이들은 각자 해산형식을 취하고 오후3시 충장로 우체국 부근의 광주학생운동기념관에서 재집결을 약속했다.
그러나 이들 말고도 시내 곳곳에선 20-30명의 학생들이 함께 모여 산발적으로 시위를 계속하고 있었다. 점심시간을 전후, 5월18일의 광주 시가지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평온한 상태를 되찾는 듯했다. 오전의 시위로 인해 중심가 상가들은 대부분이 셔터를 내려고 철시상태로 들어갔다.
한편 오후1시쯤 수창국민학교에는 20여대의 군용트럭이 집결, 공수부대원들을 속속 토해내고 있었다. 그들은 운동장에서 한 두 시간에 걸쳐 작전지시를 받으며 조를 편성하고 있었다. 그들은 완전무장한 채로 얼굴에는 투석방어용 철망이 부착된 철모를 썼으며, 총은 등에다 비스듬히 어깨총으로 멘 상태였다. 한손에는 대검을, 다른 한손에는 곤봉을 들고 있었다. 이들은 오후2시가 지나면서부터 시외버스터미널을 시작으로 시내 곳곳으로 분산돼 진압작전을 펴나가기 시작했다.
공수부대에 포위된 시위군중
학생 ‘시위조’들은 (아직 ‘시위대’에 이르지 못했다) 오후2시 이후 시내 중심가와 공원 앞 광장에 집결, 학생회관 앞길과 황금동 콜박스로 서서히 옮겨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정보를 선취한 경찰이 대기 중에 있어 학생들은 주로 충장로 5가 부근의 파출소와 태평극장 사이로 몰려들었다.
오후 3시. 학생 ‘시위조’들은 5백여 명의 ‘시위대’로 불어났다. 그들은 구호와 함께 산발적인 투석전을 벌이며 시민과 미참여 학생들을 끌어들이는 작전을 폈다. 공원 주위에서도 3백여명의 학생들이 투석전을 벌이며 경찰과 대치중이라는 소식이 전해졌다.
오후4시가 가까워오면서 학생 시위대는 1천여명으로 불어났다. 이들은 경찰의 경계망을 뚫고 애초에 약속했던 광주학생회관 앞으로 밀고 들어갔다. 20-30명의 경찰들이 지프를 중심으로 긴장을 풀고 서 있다가 학생들이 몰려오자 혼비백산해 도망쳐버렸다.
학생들은 경찰들이 남기고 간 장비를 남김없이 부셔버렸다. 한 학생이 무전기를 땅바닥에 내동댕이치자 다른 학생이 큰 돌멩이를 들어 박살을 내버렸다. 다 부서지다시피 한 가스 지프에 불을 붙이고 옆으로 넘어뜨렸다. 불길과 함께 연기가 치솟자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이날 오후의 시위는 오전보다 훨씬 밀도 있게 전개돼 갔다. 오후 2-3시를 넘기면서부터 시위대의 숫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 시위의 물결은 보다 적극적이고 조직적인 양상을 띠어가기 시작했다. 가로변의 시민들은 시위학생들에게 음료수와 빵 등을 공급, 무언으로 격려했다. 시위대가 점차 불어나고 구호의 내용이 격렬해지면서부터 시민들중 상당수는 직접 학생들의 대오에 참여하기도 했다.
거의 1천5백여 명으로 불어난 시위대는 광주천변을 지나면서 공원부근에 집결해 있던 5백여명의 또 다른 시위대와 맞딱뜨렸다. 환호성이 터져 올랐다. 이들은 합세해서 광주천변 도로를 따라 황금동 입구의 구시청 부근으로 나아가 충장로 입구와 도청 앞으로 진출하려 했다.
그러나 경찰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친 시위대는 도교육위 쪽으로 방향을 선회, 돌을 던지며 “어용 교육집단”이라고 규탄했으며 인근의 호화주택(화천기공사 사장 저택으로서, 개인집으로는 가장 호화주택으로 알려져 있다.)에 일제히 돌을 던지기도 했다.
시위대들이 목표로 삼고 있는 곳은 동명파출소였다. 파출소는 이내 폐허로 변해버렸다. 정부 주요인사의 사진을 비롯한 집기 대부분이 밖으로 내던져지고 불길에 휩싸였다. 경찰용 오토바이 2대와 자전거 2대, 그리고 전화기를 비롯한 기물과 서류 일체가 도로 한가운데서 불타기 시작했다.
시위대가 40여명의 경찰을 포로로 잡아 동명로 입구 청산학원 부근에 이르렀을 때, 3백여 명의 경찰 저지병력과 부딪쳤다. 시위대와 경찰은 협상을 벌였다. 그러나 소득은 없었다. 협상이 결렬된 오후 4시40분쯤, 갑자기 공수부대원들이 시위대를 포위, 학생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경찰과 합세하여 학생들에게 곤봉으로 ‘본때’를 보여주었다.
우선 곤봉으로 어깨쭉지와 머리통을 난타, “학생들이 쓰러지면 2-3명이 함께 달려들어 군화발로 머리를 차고 밟고 하면서, 특히 얼굴을 앞으로 돌리게 하여 그대로 전면을 군화발로 짓밟았다. 곤봉으로 쳐서 피가 낭자하게 돼 실신하면 멱살을 한 손으로 잡아 움켜쥐고 들어올려 차량위로 쓰레기 치우듯 던져버리더라”는 것. 시위대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돼버렸으며, 이를 지켜본 주위 시민들은 모두가 발을 동동 굴렀다.
경찰병력에 밀려 시외버스공용터미널 안쪽으로 몰린 시위대에게도 강압적인 진압작전이 시작되었다. 오후3시쯤, 공수대원들이 이들을 향해 투입되었다. “이들은 3-4명이 1개조가 되어 학생처럼 보이는 젊은 청년이면 무조건 붙잡아 M-16 개머리판과 곤봉으로 때리고 사정없이 구타하고 끌고 갔다”.
공수부대의 무차별 구타와 연행
시위군중들은 10분도 못되어 완전 해산되었다. 공수부대원들은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어 흥분된 자세로 골목골목을 다니면서 시위 참여 여부에 아랑곳없이 주위에 서성이는 청년들과 가게의 젊은 종업원들을 닥치는 대로 잡아 두들겨 팬 후 피가 낭자해지면 손을 뒤로 돌려 포승줄로 꽁꽁 묶어 군 트럭에 던져 올렸다. 차 위에선 또 다른 공수부대원 한 명(주로 무전병)이 젊은이들의 옷을 벗겨 팬티만 입힌 채 계속 난타를 가했다”고 했다.
거리는 삽시간에 살기가 낭자하게 흐르고, 골목골목 집집마다에선 사색이 되어 도망쳐온 젊은이들을 숨겨주기에 바빴다. 어떤 학생은 북동우체국 옆 골목 마지막 집으로 뛰어들어 다급한 김에 안방 장롱 속에 숨었으나 곧 뒤쫓아온 공수부대원이 혼자 집을 보고 있던 할머니에게 방금 도망쳐온 학생이 어디에 있느냐고 물어, 할머니가 모른다고 답하자, “XX년 거짓말을 해, 맛좀 봐야겠구먼” 하면서 “할머니를 곤봉으로 쳐 실신시킨 뒤 군화차림으로 안방까지 뒤져 기어이 장롱 속의 학생을 붙잡아 난타한 후 연행한 예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오후 4시반쯤에는 루문동 광주일고 부근에서 공수부대원이 길가던 여학생을 붙잡아 무조건 구타하는, 차마 눈뜨고 볼 수가 없는 광경이 목격되기도 했다.
이날 오후 4시30분쯤 벌어진 동명로 입구 청산학원 앞에서의 격돌과, 오후4시 무렵의 공용터미널에서의 격돌로 인해 5천여 명의 시민?학생시위대 중 최소한 30여명의 살상이 난 것으로 광주시민들은 알고 있다. 부상자와 사망자는 예외없이 군트럭에 실려 “재빨리 치워졌다”고 인근주민들은 증언했다. 미처 실어가지 못한 시체 2구가 다음날(19일) 아침 공용터미널 변소에서 발견되기도 했다는 것이다.
오후 5시쯤, 학생들의 시위대열은 무참히 깨져버렸다. 그러나 공수부대원들의 적극 방어, 공세적 방어는 수그러들 줄 모르고 더욱 기세가 당당해져갔다. 이들은 시내중심부 주요상가와 다방 이발관 음식점 사무실 가정집 당구장 등을 이 잡듯이 뒤져 아직까지 숨어 있다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학생들을 붙잡아 질질 끌고 나왔다. 많은 사람들은 당시의 상황을 회고하기조차 싫어했다.
오후 7시쯤에는 계림동 광주고등학교 부근에서 청년?시민?학생 등 3백여 명이 또 다시 공수부대와 충돌, 다수의 희생자를 냈다. 시내에서 몇차례에 걸쳐 공수부대원들의 적극방어를 경험한 시위대의 손에는 이때 이미 무기가 될만한 각목과 쇠파이프 등이 쥐어져 있었다. 치열한 공방전이 20-30분 거듭된 끝에 공수부대가 밀리기 시작했다.
이들이 산수동 오거리 방면으로 밀려가자 시위대는 계속 추격, 증강된 공수부대의 반격에 맞딱뜨려 이 부근은 한 순간 공포지대로 돌변하였다. 공수대는 밤새워 인근주택가를 샅샅이 뒤져 학생처럼 보이는 젊은이들이면 빼놓지 않고 연행해 갔다.
이날에 있은 ‘무자비한 만행’과 ‘피내음’은 수군거리는 귀엣말과 전화선을 타고 전국 각지로 퍼져 나갔다. 윤성민 국방장관은 이와 관련, 6월7일 “이날 출동한 병력은 전주지역에 위치한 7공수단 예하의 33대대 및 35대대였다”고 밝힌 바 있다.
한편 이날 오전부터 본격적인 시위가 개시된 이래 오후부터 시내 변두리지역인 산수동 계림동 부근에선 오전에 벌어진 시위상황에 관한 지하유인물이 나돌기 시작했다. 오전중 자신들이 육안으로 목격한 사태의 진상을 고발하는 이같은 유인물은 바로 엊그제까지 전남대학교 내에서 지하유인물 <대학의 소리>를 발간하던 제작팀과 극단 <광대> 회원 등 전남대생 4명에 의해 발간된 것이었다.
이들은 “일반 시민들에게 경찰 및 공수부대원들의 잔인성을 알려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시내 중심부에서 발생한 상황을 변두리 지역으로 전파시키기 위해 직접 제작 배포에 나섰다”고 말했다. 이들 지하유인물 제작팀은 이로부터 4일후 그동안 산발적으로 여러 팀에서 발간돼온 지하유인물을 통합, <투사회보>라는 이름의 유인물을 발간하기 시작했다.
둘째 날, 5월19일
학생차림의 젊은이는 무조건 연행 5월18일은 광주시민들에게 있어서 전율과 공포, 치욕과 분노의 날이었다. 밤새워 공포 속에서 잠을 못 이루던 시민들은 5월19일 날이 밝기가 무섭게 거리로 얼굴을 내밀고 주변분위기 염탐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가족들중 학생이나 젊은이가 있는 집안에선 모두가 걱정이 앞섰다. 특히 지난밤 돌아오지 않은 자식이 있는 집안에선 밤새워 가슴만 조였다. 어디다 수소문해 볼 수조차 없었다. 한마디로 무법천지였다.
5월19일을 기해 많은 가정에선 자식들을 지방이나 시골 친척집으로 피신시키는 예가 생겨났다. 부모들의 강권에 못이겨 집안에 ‘갇힌 몸’이 된 젊은이들도 적지 않았다. ‘살륙의 현장’으로 나갔다간 언제 맞아죽을지 모르는 판국에 부모들의 이같은 성화는 당연한 것이기도 했다. 결과적인 얘기이긴 하나, 사상자 중 상당수가 광주가 객지인 학생이나 시골청년 종업원 등 후견인이 없는 인물들이 많았다는 사실은 바로 그러한 점을 잘 대변해 주고 있었다.
대학을 제외한 초중고교는 아직 정상 수업을 계속하고 있었으며, 시내 중심가의 몇몇 상가가 철시한 것을 제외하고 관공서와 일반기업체 공장들은 대체로 정상근무를 계속하고 있었다. 그러나 5월19일 아침이 밝기가 무섭게 군인과 경찰은 시내 전역에 걸쳐 삼엄한 경비를 편 가운데 학생차림의 젊은이들을 보면 무조건 연행했다. 금남로는 일체의 차량통행이 금지되었으나 많은 시민들과 학생들은 계속 모여들어 오전 10시경엔 1천여명으로 불어났다.
오전 10시반경, 기동경찰이 확성기와 군헬기를 동원, 시내 중심가에 운집한 시민들의 해산을 종용했다. 그러나 군중들의 숫자는 계속 불어나 10시40분 경부터는 경찰과 투석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도청 앞 금남로 입구와 광남로 네거리를 완전차단한 5백여명의 경찰병력에 맞선 시민 학생들은 광주관광호텔 앞과 서울신탁은행 앞에 교통철책과 노변의 대형 화분 등으로 바리케이드를 치고 ‘애국가’ ‘훌라송’ ‘정의가’ ‘전남도민의 노래’ ‘우리의 소원은 통일’ 등을 부르며 시위를 시작했다. 삽시간에 군중은 5천여명으로 불어났다.
시위군중들은 페퍼포그 최루탄 등을 마구 쏘며 진압하려는 경찰에 화염병과 벽돌 각목 등으로 맞섰다. 경찰이 시위 군중을 진압시키지 못하자, 10시50분경 군용트럭 30여대에 분승한 공수대부대원이 도청 앞과 광남로 네거리에 진출, 장갑차 4대씩을 앞세우고 시위군중들을 포위, 압축해가기 시작했다. 이때 시민들은 금남로 3가 신축건물 공사장에서 각목과 철근 쇠파이프 등을 뜯어내 군과 정면충돌 했고, 군의 무차별 폭력에 흥분한 인도변의 많은 시민들도 시위대열에 합세하기 시작했다.
금남로에 투입된 1천여명의 공수부대 병력은 곤봉을 마구 휘두르며 착검한 소총으로 시위군중의 어깨와 다리 등을 마구 찔렀다. 금남로 일대는 삽시간에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군중과 이를 지켜보고 비명을 지르는 시민 등으로 아비규환의 소용돌이로 변했다.
시위 군중 앞에서 공포의 총검술 훈련 시위군중들은 군인들의 무자비한 폭력에 밀려 충장로 등 인근 골목으로 피하거나 건물 등으로 뛰어들었다. 군인들은 이들을 건물 안과 골목길까지 추격, 붙들어내 길바닥에 무릎을 꿇리고 턱을 걷어차거나 엎어진 사람들의 머리와 등을 마구 짓이겨 길가 곳곳에 2열 횡대로 머리를 처박은 자세로 꿇어앉히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수많은 희생자를 내면서 시위대열은 산산이 흩어졌다. 공수부대원들의 끈질긴 추격전은 계속됐다. 이들은 아무 집이나 가게를 밀치고 들어가 “젊은 사람들만 보이면 곤봉으로 난타를 한 후 피투성이가 된 채로 질질 끌고 나왔다.” 그들은 길가로 끌고 나온 젊은이들을 가능한 한 많은 시민들이 주시하는 가운데 팬티만 남기고 옷을 다 벗게 한 후 군대의 유격훈련장에서 실시하는 가혹한 기합을 주었다.
젊은이들은 팬티만 걸친 몸으로 화염병 유리조각 돌멩이가 널려 있는 길바닥에서 손을 뒤로 묶인 채 엎드려서 아랫배만으로 기어가는 ‘올챙이 포복’과 ‘통닭구이’ ‘원산폭격’ 등 고문에 가까운 잔인한 기합에 시달렸다. 여자들 역시 예외없이 가혹한 폭력에 시달리긴 마찬가지였다.
인근 도로변이나 건물 옥상에서 이를 지켜보던 많은 시민들은 이때부터 울분과 분노를 참지 못한 나머지 시위대열에 자발적으로 합세하는 양상을 띄기 시작했다.
공수대원들은 오전 11시15분부터 군지프에 장치한 확성기나 핸드폰 등을 통해 건물 옥상이나 창밖을 내다보는 시민들에게 “문을 닫고 커텐을 치라”고 소리쳤다. 장갑차를 앞세운 이들은 도청 앞 광주천 광남로 제봉로 노동청 등을 포위한 상태에서 빙빙 돌며 시위대가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위협했다.
이 때문에 금남로 광남로 충장로 일대의 관공서와 공공건물은 낮 12시를 전후해 모두 문을 걸어 잠그고 직원들은 외곽지대로 피신했다.
시위대열이 일단 해산해 버리자 공수부대원들은 골목 안 과 건물 안을 뒤져 30대 이하의 남녀 시민들을 집단구타 하면서 길가로 끄집어 내오는 한편, 금남로 노상에서 5백여명의 무장병력이 우렁찬 구령과 함께 총검술 비슷한 진압훈련을 펴 시민들을 위압했다.
공수부대원들은 피를 흐리며 길가에 쓰러져 있는 시민들을 후송하는 경찰에게까지 곤봉을 휘둘렀다. 특전단 소속의 한 중령은 부상 시민의 후송을 지휘하던 안수택 전남도경 작전과장에게 “부상 시민을 빼돌리거나 시위 학생을 피신시키면 당신들도 동조자로 취급하겠다”는 등의 폭언을 퍼부었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진압경찰의 한 간부(경감)는 핸드마이크로 충장로 등 골목길에서 서성이는 시민들을 향해 “제발 돌아가라. 군인들에게 걸리면 죽는다”고 안타까워하며 울먹였다.
오후 12시 30분쯤에는 금남로 1가 소재 YWCA빌딩 내에 있는 무등고시학원에서 몇몇 수강생들이 경고를 무시하고 밖을 내다봤다고 공수부대 1개소대가 학원으로 난입, 50여명의 학원생들을 닥치는 대로 두들겨 패면서 학원 밖으로 내몰았다.
그러자 밖에 대기하고 있던 또 한 패의 공수부대원들은 학생들이 문밖으로 몰려나오자 곤봉으로 무차별 난타, 수강생들은 거의 반죽음이 되다시피 했다. 공수부대원들은 어디서나 피투성이가 된 채 쓰러진 청년들을 군화발로 닥치는 대로 걷어찬 뒤 군 트럭에다 던져 올리곤 지나버렸다.
수창국민학교 앞에선 청년 한명을 전봇대에다 발가벗긴 채 거꾸로 매달아 놓고 여러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곤봉으로 온몸을 난타하는 반인륜적 광경이 벌어져 시민들로 하여금 발을 동동 구르게 만들었다.
격렬해진 시위군중 오후에 시민 학생이 시위에 나서기 시작한 것은 금남로에 진주해 있던 특전단 병력이 조선대학교 캠퍼스 뒤쪽으로 점심식사를 하기 위해 빠져나간 오후 1시 반경부터였다. 금남로엔 몇 안되는 공수부대원과 경찰병력이 바리케이를 지키고 있었다.
시민들은 골목마다 건물마다 숨어 있다가 슬금슬금 모여들기 시작했다. 가톨릭센터 앞에 모인 시위군중은 오전보다 훨씬 많은 4-5천명에 달했다. 이들은 금남로 양쪽을 차단한 경찰을 향해 돌과 화염병을 던지며 계속 몰아붙였다. 오전중의 시위대열에선 볼 수 없었던 40대 이상의 장년층과 부녀자들도 상당수가 눈에 띄었다. 돌과 화염병, 최루개스와 패퍼포그가 난무하는 가운데 쌍방은 계속 공방전을 벌였다.
흥분한 몇몇 청년들이 가톨릭센터 차고에서 승용차 4대를 끌고 나와 차 내부 의자에 기름을 부어 불을 붙인 다음, 군과 경찰의 저지선을 향해 시동을 건 채로 밀어붙였다. 그중 1대는 CBS 취재차였다. 불붙은 차량이 경찰바리케이드에 부딪쳐 폭발할 때마다 시위군중들은 환호성을 올렸다.
일단의 청년들은 금남로2가 소재 제일교회(현 광주백화점) 신축공사장에서 사용하는 두 개의 기름드럼통에 불을 붙여 군경저지선에 힘껏 굴려 보냈다. 이중 한 개의 드럼통이 커다란 폭음을 내면서 폭발, 화염이 높이 치솟아 올랐다. 시위대는 점차 흥분?고조돼 갔고 숫자 역시 계속 불어났다.
군과 경찰은 개스차와 개스탄을 아껴쓰려는 심산이었는지 이것들의 사용을 제한하는 대신 갑자기 시위대로 육탄 접근, 곤봉과 총 대검 등을 휘둘렀다. 시위대열은 흩어졌다간 이내 다시 모였다. 시위대는 도로변의 대형화분과 공중전화박스 교통철책 버스정류장 입간판 등으로 바리케이드를 치고 계속 보도블럭을 깨어 돌멩이를 만들어냈다.
보도블럭을 깨는 작업은 주로 시위대 후미나 중간부분의 아주머니나 아저씨들이 도맡다시피 했다. 지하도 공사장에서 일하던 인부들도 무기가 될만한 연장이나 각목 쇠파이프 등을 젊은 청년들에게 계속 공급했다.
오후 3시쯤 군경저지대는 진압 화기가 바닥이 난 듯 방패를 앞세우고 곤봉을 손에 쥔 채 바짝 긴장한 모습으로 제자리를 고수했다. 바로 이때 군용 헬기 두 대가 시위대열의 머리 위를 저공비행하며 선무방송을 개시했다.
“시민 학생 여러분! 이성을 잃으면 혼란이 가중됩니다. 지체 말고 즉각 해산하여 집으로 돌아가십시오. 여러분들은 지금 극소수 불순분자 및 폭도들에 의해서 자극되고 있는 것입니다. 시민이 가담하거나 동조하면 가정과 개인에게 있어서 중대한 불상사가 닥칩니다. 그때 우리는 어떠한 사태가 발생하더라도 더 이상의 책임을 질 수 없습니다”
가톨릭센터의 처절한 참상 이때 갑자기 가톨릭센터 앞에서 함성이 터지면서 2백여명의 청년들이 가톨릭센터 안쪽으로 밀고 들어갔다. 9층 옥상에서 6명의 무장 공수부대원이 시민들의 시위상황을 무전기로 연락을 취하고 있는 것이 목격된 직후였다.
빌딩 안으로 올라간 청년들 중 몇몇은 공수부대원의 대검에 찔려 병원으로 옮겨졌다. 그러나 수많은 청년들이 집중적으로 돌 세례를 퍼붓자 공수대원들도 비틀거리며 손을 들고 말았다. 공수대원들이 비틀거리자 청년들이 순식간에 달려들어 몽둥이와 쇠파이프로 때려 눕혔다. 그리고 한 청년이 그들로부터 빼앗은 M-16소총 한 자루를 번쩍 치켜올리자 도로의 시위대들은 함성을 질렀다.
그러나 가톨릭센터 빌딩으로 올라가 공수부대원을 인질로 삼은 것도 잠시였다. 오후 3시20분경 점심을 끝낸 공수부대병력이 다시 도청 앞과 광남로 4거리에서 점차 포위망을 좁혀왔기 때문이다. 시위대는 돌과 각목을 휘두르며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열세에 몰린 시민들은 차츰 뒤로 밀리기 시작하면서 골목골목으로 흩어지기 시작했고, 주 대열도 마침내 금남로를 벗어나 뿔뿔이 흩어졌다. 캐리버-60 기관총으로 무장한 장갑차가 무서운 속력으로 시위대를 향해 돌진해왔다. 바로 이 순간 가톨릭센터 안으로 올라갔다가 미처 빠져 나오지 못하고 인질로 잡은 공수부대원을 지키고 있던 청년들은 일시에 들이닥친 공수대에 의해 최후를 맞아야만 했다. 이곳에서 수많은 살상자가 생겼다.
공수부대의 공격에 밀려 문화방송쪽으로 밀린 시위대열은 중앙국민학교 후문 부근에서부터 화염병을 투척, 저항하면서도 계속 열세를 면치 못했다. 시위대는 문화방송을 표적으로 삼았다. 일부 시위군중은 방송국 내부로 들어가 공격하는 한편, 또 한 시위대는 차고로 들어가 취재차량 2대와 승용차 3대 등 5대를 끌어내 불을 질렀다. MBC방송국 사장이 직영하는 것으로 알려진 바로 옆의 전자제품상인 문화상사에도 불을 질렀다. 그러나 이곳에도 공수부대가 급습,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시위청년들을 뒤쫓던 공수부대원들도 흥분한 시민들에 포위되어 희생당한 예가 적지 않았다. 광주천변을 따라 양림교회 쪽으로 뒤쫓아오던 한 공수대원은 수많은 시민들이 포위 역습하자 다급한 김에 광주천으로 뛰어내렸으나 시민들이 가만 놔두지 않았던 것.
공원다리에서도 몇명의 공수부대원들이 시민들에 밀려 다리 밑으로 떨어진 일이 있었으며, 양동시장에서도 한 젊은 청년을 추격하던 공수부대원이 시장상인들로부터 몰매를 맞아 죽은 사건이 발생했다. 이밖에도 시민을 얕보고 단신으로 젊은 학생시위대를 추격했던 공수부대원 상당수가 분노한 시민들의 희생물이 된 예가 적지 않았다.
시위학생을 향한 최초의 발포 이날 오후 4시반 경에는 동구 학동 및 남광주 역전 등 외곽지역으로까지 시위가 확산됐다. ‘피의 살상전’은 이제 광주시 전역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이 무렵이 되면서부터는 고등학생들도 시위대열에 합류하고 있었다. 오후 4시경 전남고 대동고 중앙여고생들은 오후 수업을 거부하고 시가행진에 돌입할 기세였지만, 이미 계엄군이 진주, 학교정문을 굳게 지키고 있었다.
또 광산군 송정읍에 소재한 광산여고와 정광고교 학생 1천여 명도 수업거부농성을 벌이다가 방과후부터는 시위대열에 가담하기 시작했다. 이날 오후 5시 전남 도교육위원회는 중고등학생들의 동요가 있자 다음날(20일) 하루동안 휴교조치를 취한다고 시달했다.
오후 4시30분, 공용터미널 바로 윗편의 구 광주역 4거리에선 40대 초반으로 보이는 한 아주머니(전옥주. 32)가 휴대용 확성기를 붙들고 시민들에게 호소하는 가두방송을 하고 있었다.
“나는 공산당도 아닙니다. 난동자도 아닙니다. 단지 선량한 광주시민의 일원일 뿐입니다. 아무 죄없이 우리 학생 시민들이 죽어 가는 것을 더 이상 바라보고 있을 수만은 없습니다. 우리 모두 나섭시다. 학생들을 살립시다. 계엄군을 물리치고 우리 스스로 광주를 지킵시다”
가두방송에 접한 시민들은 눈시울을 적시면서 이내 수천명의 시위대열을 형성, 시내로 진출을 시도했다. 그러나 잠시 후 공수부대가 들이닥치면서 이곳은 또 한차례 피바다를 이루었다.
시위대열은 바로 옆 공용버스터미널 쪽으로 피신하면서 대오를 정비하기 시작했다. 다시 모여든 시민들의 수는 2-3천명에 달했다. 이곳에서도 한차례 커다란 살상전이 벌어졌다. 공용버스터미널 앞 지하도로 피신한 사람들은 지하도 출입구를 완전 봉쇄당했기 때문에 특히 희생이 컸다.
처참을 극한 ‘전쟁’이 30분만에 또 한차례 벌어졌다. 부상자를 실어 나르던 택시운전사가 이곳에서 최소한 3명이 죽은 것으로 시민들은 증언하고 있는데, 이같은 사건은 다음날(20일) 벌어진 ‘차량시위사건’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공용버스터미널이 아수라장이 된 후 시외버스의 착?발은 광주역으로 옮겨 행해졌다.
오후 5시10분 경에는 계림동 광주고교 앞에서 시위대와 공수대원간에 또다시 충돌이 벌어졌다. 포위된 장갑차 속의 한 공수부대원이 최초로 발포한 총에 맞고 한 고등학생(조선대 부속고교 야간생)이 현장에서 즉사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5월19일의 계속된 ‘살륙전’이 진행되면서 “임신부의 배를 갈라 태아가 튀어 나왔다”는 소문과 함께 “광주역 분수대에서 여학생을 발가벗겨 놓고 유방을 도려내어 죽였다”는 소문이 일파만파로 퍼지면서 시민들을 극도로 흥분시켰다. 이같은 소문은 사실 여부에 관계없이 온 시내에 퍼져나갔다.
이날 밤 7시경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는데도 불구하고 시민들은 헤어질 줄 모르고 요소요소에 집결, “광주시를 구하자”면서 좀처럼 흥분을 가라앉힐 줄 몰랐다.
셋째 날, 5월20일
통곡하는 광주 5월19일 밤 7시쯤부터 내리던 비는 20일 아침 9시부터 차츰 수그러들기 시작했다. 비극의 도시 광주는 어제의 참극을 그대로 간직한 채 소리없이 통곡하고 있었다. 시민들은 오전 9시가 넘으면서부터 하나 둘씩 시내중심가로 나오기 시작했다. 시민들의 얼굴표정 속에선 이미 공포감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이날도 군인과 경찰은 시내 요소요소에 병력을 배치하고 지나는 차량과 사람들을 철저하게 검문?검색했다. 특히 다리나 로타리 부근, 통행이 잦은 중심가의 사거리에선 검문과 경비가 더욱 삼엄했다.
도로변에선 비를 맞으면서 주저앉아 통곡하는 사람들이 한두 명씩 목격되기도 했다. 어떤 아주머닌 자신의 치맛자락을 찢어가면서 “내 아들을 살려내라”고 거의 발광하듯 울부짖고 있었다. 누구 하나 뭐라고 위로해줄 수도 없었다. 많은 시민들도 함께 눈시울을 붉히면서 따라서 울먹일 뿐이었다.
비가 그치기 시작하면서 오전 10시경엔 대인시장 주변에 1천여 명의 시민들이 집결하기 시작했다. 가정주부와 고등학생, 40-50대의 장년층까지 합세한 군중들은 전날의 시민들의 피해상황을 주고받는 동안 자신도 모르게 흥분하고 있었다. 이보다 앞서 새벽 6시쯤 전남주조장 앞길에서 시체 한 구(김안부씨, 36세)가 온몸이 짖이겨진 채 발견되었는데, 이 소식에 접하자 시민들은 더욱 흥분하였던 것.
1천여 명의 시위군중들은 주로 대인시장의 상인들과 인근 주민들이었다. 이들은 장사마저 접어두고 시민관 방면으로 진출해 나갔다. 금남로 도청 앞이 목표였지만 시위대들은 금남로에 채 이르기도 전에 탱크를 앞세운 공수부대원들에 의해 뿔뿔이 흩어졌다. 흩어진 시민들은 삼삼오오 금남로 부근으로 집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공수부대와의 접전은 일어나지 않았다. 공수부대원들은 어제와 달리 M16소총에 착검도 하지 않은 데다 말씨마저 달랐다. 공수특전단의 한 장교(중령)는 시민들에게 자신의 고향이 전남 곡성이라고 하면서 "질서를 지켜줄 것을 당부한다"고 말했다.
이날 광주역과 공용터미널, 서방 삼거리를 경비하는 공수부대원들은 화염방사기로 무장하고 있었다. 화염방사기에 의한 최초의 희생자가 서방 삼거리에서 생겨났다고도 했다. 공수부대원과 팽팽하게 대치하고 있던 시민들중 맨 선두에 섰던 사람이 미처 피할 겨를도 없이 순식간에 불에 타고 말았으며, 그 외 몇 명은 높은 도수의 화상을 입었다는 것이다. 이를 지켜본 사람들은 화염방사기에 그을려 죽은 시체와 부상자들은 재빨리 군용 트럭에 옮겨져 실려갔다고 전했다.
동명동 부근에서는 하교하던 3백여명의 중학생들이 길거리에 늘어선 계엄군에게 돌을 던지며 대치하다 최루탄과 페퍼포그 세례를 받고 물러났다.
한편 어제 사태에서 부상자를 실어 나르던 동료운전사가 최소한 3명이 죽은 데 대해 택시기사들은 저마다 흥분하고 있었다. 시내 어느 누구보다도 상황을 잘 알고 있던 이들은 당일 무등경기장에 모여 대책을 세워보자고 연락을 취했다. 이같은 택시기사들의 움직임은 불과 서너시간 후 커다란 위력을 발휘, 시민들의 환호를 받게 된다.
5월20일 오후3시. 금남로에 모인 시민들의 숫자는 수만명에 달했다. 할머니의 손목을 잡은 다섯살 짜리 어린 꼬마에서부터 아저씨 아주머니 점원 공원 술집아가씨 회사원 방위병 학생 등 남녀노소와 직업의 구별없이 수많은 시민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모인 듯했다.
시위군중, 맨주먹으로 계엄군과 정면 충돌 시위군중들은 경찰의 최루탄에 몇차례 밀리다가 금남로와 중앙로의 교차지점인 지하상가 공사장 부근에 주저앉아 연좌농성에 들어갔다. 시민들은 겁이 없어진 듯했다. 어떤 시민은 “차라리 우리 모두를 죽이라” 면서 품에서 태극기를 꺼내 흔들어대기도 했다.
학생으로 보이는 젊은 청년이 앞에 나와 시위군중들을 향해 구호를 선창하면서 유인물을 낭독했다. 이들은 ‘우리의 소원은 통일’ ‘아리랑’ ‘정의가’ ‘투사의 노래’를 합창하면서 시민들을 규합했다. 학생들의 말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아 스피커가 필요하게 되자 곧바로 40여만원이 모금되었다.
시위군중들이 대오를 정비하고 있는 동안, 금남로 도청 앞을 지키고 있던 군경 저지선에선 모종의 변화가 일고 있었다. 전면을 담당하고 있던 경찰병력이 뒤쪽으로 빠지는 대신 공수부대원들이 전면으로 배치되고 있었던 것.
공수부대원들은 군중들을 향해 귀가를 종용했으나 시민들이 더욱 소리 높여 노래를 부르자 곧바로 작전을 개시, 군중들을 곤봉으로 해산시키려 들었다. 대검으로 찌르는 방법은 취하지 않았으나 강력한 공세 자세로 나온 건 어제와 다를 바 없었다.
얼마 후 모금한 돈으로 준비한 스피커가 등장했다. 자동차용 밧데리에다 소형앰프를 부착시킨 확성기에선 “우리 모두 이 자리에서 먼저 가신 님들과 같이 죽읍시다”면서 시민들의 시위를 독려했다. 이같은 가두방송이 있고 나서 시민들은 더욱 흥분, 계엄군과 몇 차례 공방전이 거세게 일었다.
시위대의 자세는 어제와 달리 훨씬 자신에 차 있는 듯 했다. 금남로를 따라 이들은 공수대의 저지선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전진해가곤 했다. 많은 사람들은 얼굴 특히 코밑 부분에 치약을 발라 최루가스를 참아내고 있었다. 이들이 목표로 삼는 도청 앞은 군경저지선이 겹겹이 쳐져 있었고, 그 후편으로는 분수대를 중심으로 탱크를 위시한 수많은 화력이 진을 치고 있었다.
오후 5시50분쯤 충장로 입구쪽에서 약 5천여명의 시위군중이 스크럼을 짜고 도청을 향해 돌진해왔다. 이들은 맨몸으로 계엄군과 정면충돌, 이내 힘에 밀려 많은 희생자를 내면서 물러섰다.
시민들은 “군은 38선으로 복귀하라”는 등의 구호와 “애국가” 등을 부르며 대표를 선출, 경찰저지선으로 보내 “광주시민을 폭도(적)로 취급하는 공수대와 사생결단을 낼 테니 경찰들은 비켜달라”고 요구했다. 몇차례의 싸움이 계속되었으나 시민들은 끝까지 물러설 줄 몰랐다. 희생자 수도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수백대의 차량행렬 시위 이때 갑자기 금남로 끝부분인 유동 쪽에서부터 수많은 차량들이 일제히 비상라이트를 켜고 동시에 경적을 울리면서 도청을 향해 돌진해왔다. 맨 선두에는 대한통운소속 12톤 대형트럭과 고속버스 시외버스가 앞장섰다.
대형트럭 4대, 시내외버스 11대가 선두에 섰고, 그 뒤로 2백여대의 택시가 도로를 가득 메운 채 뒤따르고 있었다. 트럭 위에는 20여명의 청년들이 올라서서 태극기를 흔들어댔으며, 버스 속에는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시민들이 가득 타고 있었다. 순식간에 시위대열의 기세는 하늘을 찌를 듯 사기가 충천했다.
차량시위행렬과 군경의 접전은 “차마 눈뜨고는 볼 수 없는 참극”이었다. 군경은 최루탄과 페퍼포그를 있는 대로 차량행렬을 향하여 쏘아댔다. 안개처럼 자욱한 가스에 숨이 막힌 운전사들이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자 계엄군은 이들 운전사들을 대부분 연행했다. 끌려가는 운전사들을 보며 시위대는 투석을 하며 차량시위대를 엄호했다.
이날 밤 시위군중과 군경간에 수십 차례의 밀고 밀리는 공방전이 벌어졌다. 밤이 깊어지면서부터는 시 외곽지역에서 뒤늦게 소식을 듣고 달려온 시민들이 합세, 시위군중은 거의 20만명에 육박하고 있었다.
오후 8시30분, 광주소방서를 공격해 소방차 3대를 탈취한 시위대가 차를 앞세우고 금남로에 나타나 소방호스로 최루개스를 제거하면서 군경저지선쪽 장갑차 앞으로 밀어닥치자 일진일퇴의 공방전이 다시 벌어졌다.
밤 9시경, 비교적 시내중심지에서 멀리 떨어진 시청건물의 군경저지선이 무너지면서 시민들에 의해 장악되었으며, 문화방송국과 KBS방송국이 시민들의 공격을 받아 방송이 중단되는 사태를 낳았다. 이 무렵 시내 외각지역의 시위대들은 곳곳의 주유소를 점거하여 휘발유를 퍼내 화염병을 만들거나 시내 전역의 파출소를 파괴하였다.
또 밤 9시20분 경에는 노동청 앞 오거리에서 광주고속버스 10여대를 몰고 나온 시위대가 경찰저지선을 그대로 돌파하는 바람에 함평경찰서 소속 경찰관 4명이 차에 깔려 숨진 사건이 발생했다.
시위대의 열기는 밤이 깊어갈수록 높아가 마침내 밤 10시경에는 시 외곽지역으로 통하는 군경저지선이 곳곳에서 무너져 M16 총성과 예광탄 신호탄이 계속 터져 올랐다. 경찰력은 마비상태에 빠져들었으며 외부와의 연락이 일체 두절되는 사태에 직면하게 됐다. 마치 전시를 방불케 하는 상황이었다.
이제 군경은 도청과 광주역 조선대?전남대 등에서만 볼 수 있었다. 20만에 육박한 시위군중이 도청 앞의 군경저지선을 압박해 들어오자 도청 방어가 위태롭다고 판단한 계엄군은 20일 밤 11시5분 마침내 공식적으로 발포를 개시하기에 이르렀다. M16의 총성이 콩볶듯이 광주의 밤하늘에 울려 퍼졌다. 순식간에 선두에 섰던 시위대가 쓰러지기 시작했다.
유혈공방전 ‘신역(新驛)사태’ 도청앞 시위과정 중 전옥주라는 여성은 휴대용 확성기로 “물러서지 맙시다” “모두들 도청으로” “전투경찰 아저씨 우리에게 최루탄을 쏘지 마세요. 여러분과 우리는 다같이 힘을 합쳐 우리 민족을 못살게 구는 전두환을 몰아내야 해요” 하고 외치면서 밤새 시위대열을 독려했다. 계엄사령부는 한때 이 여인을 간첩으로 발표한 적이 있었지만, 연행 조사 결과 사실과 다름이 밝혀졌다.
이날 밤 도청 3층 도지사실에 있던 장형태 지사는 1층 서무과로 피신했다가 얼마 안 있어 상무대에 있는 계엄사령부로 몸을 피하고 말았다.
밤 11시가 넘으면서 계엄군의 진압 화력이 약화되어 최루탄을 쏘는 속도가 현격하게 줄어들고 있었다. 그러나 군경저지선은 여전히 요지부동으로, 시위대와 군경은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거듭했다. 이보다 앞서 밤 10시경엔 MBC부근에서 갑자기 폭음이 일며 불기둥이 하늘로 치솟았다. 시위대에 의한 화염병 투척이 분명했다. 주위경계를 맡고 있던 10여명의 계엄군도 재빨리 철수해 버렸다.
MBC는 무방비상태에 빠지고 시위대의 수중에 들어갔다. 곧 이어서 MBC는 화염에 휩싸였다. 방송국의 불길로 전 시가지가 대낮같이 훤해졌다.
20일에 있은 주요 공방은 금남로와 신역(광주역)에서 벌어졌다. ‘금남로 전투’는 앞에서 본 그대로였다. ‘신역 전투’는 밤 10시30분쯤 한 청년이 공용터미널에서 광주역으로 통하는 지점의 길 옆 주유소로부터 드럼통 2개에다 휘발유를 가득 담아 트럭에 싣고 불을 붙인 뒤 계엄군 바리케이드를 무너뜨림으로써 촉발되었다.
계엄군 20m전방에서 그 청년은 불이 붙은 트럭에서 재빨리 뛰어내렸다. 트럭은 그대로 계엄군 진지로 돌진, 바리케이드를 박살내고 역전 앞 분수대를 들이받았다. 순간 꽝! 하는 폭발음과 함께 불기둥이 하늘높이 치솟았다.
광주역을 중심으로 한 시위대와 계엄군의 유혈공방전은 새벽 4시까지 계속되었다. 수많은 차량들이 광주역 앞 분수대 주위에서 불타오르고, 시위군중들은 그 곳을 가득히 에워싸고 있었다. 시위대들의 끈질긴 공략을 이겨낼 수 없다고 판단한 계엄군측은 처음 한동안은 공포탄으로 위협사격을 가하며 시위군중을 해산시키려 안간힘을 쏟았다. 그러나 이미 노도처럼 밀려드는 시위대를 막아낼 수는 없었다. 시위대의 손에는 무기가 될만한 각종 잡구가 쥐어져 있었다.
계엄군의 총구의 각도가 갑자기 아래로 수그러들었다. 그 순간 시위군중들이 풀썩 풀썩 고꾸라졌다. 피투성이가 된 시신을 보면서도 시위군중들은 겁을 먹지 않고 계속 계엄군과 대치하며 위협했다. 계엄군들은 서서히 퇴각준비를 서두르는 듯했다.
신역(광주역) 방어는 계엄군으로선 작전상 아주 중요한 지점이었다. 광주역과 고속도로 입구가 시위대들의 손에 들어간다면 병력수송과 보급품 공급을 비롯, 고속도로가 차단됨으로써 빚어질지도 모를 ‘치안부재’를 노출, 전반적인 행정기능의 마비를 재촉할 위험이 컸기 때문이다.
발포 시작된 금남로의 처절한 비극 한편 금남로에서는 자정이 가까워오면서 20만에 육박하는 거대한 시위군중이 도청 앞 계엄군을 완전 포위, 시위대의 도청점거는 다만 시간문제일 따름이었다. 순간 총성이 몇 차례 울려 퍼졌다. 공포의 위협사격이었다. 밤하늘은 기관단총에서 내뿜은 예광탄이 검은 하늘을 가르며 날았다.
‘위협사격’임을 이내 감지한 시위군중들의 공격이 계속 죄어 들어오자 드디어 계엄군측 M16 총구에서 콩볶는 듯한 총성이 계속 튀겼다. 전열에 위치한 시위군중들이 쓰러졌다. 순간 도청 앞 광장은 아수라로 변했다. 시민들은 밟히고 넘어지면서 저마다 길옆으로 피했다.
‘발포’가 공식적으로 개시된 이후 시위군중은 두 갈래 나뉘어졌다. 죽음의 공포를 이기지 못한 시민들은 서둘러 시위현장을 빠져나갔다. 그러나 대부분의 시민은 발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일단 골목길과 건물 옆으로 몸을 피신, 사태의 추이를 주시하며 ‘공격자세’를 늦추지 않았다. “말로만 듣던 시가전에 직접 참가했다”고 한 학생의 말처럼 이날 밤의 도청 앞은 “처절을 극한 이 땅의 최대비극”으로 기록돼야 할 것 같다.
21일 새벽 1시쯤엔 광주세무서가 불탔으며, 새벽 2시 무렵엔 광주역 부근에 있는 KBS방송국이 화염에 휩싸였다. 그리고 광주로부터 외부로 통하는 모든 시외전화는 ‘고장’이라는 이유로 두절되었다. 광주에서 벌어지고 있는 동족상잔의 ‘피내음’은 더 이상 전선을 타고 시외로 빠져나갈 수가 없었다. 밤에 불타버린 두 방송국과 함께 ‘전남일보’ ‘전남매일신문’의 편집제작이 중단됨으로써 광주시는 완전히 고도(孤島)로 화했다.
한편 정부당국은 20일 오후에 열린 국무회의에서 전 국무위원이 최근의 소요사태와 관련하여 사표를 제출하였다고 발표, 과도정부를 주도했던 신현확 내각은 출범후 5개월 6일만에 물러났다. 그러나 광주지역의 심각한 사태에 대해선 아직도 공식적인 발표가 없었다.
넷째 날, 5월21일
헌혈자들의 눈물겨운 행렬 5월21일. 이날은 음력 사월초파일로서 ‘부처님 오신날’이었다. 그러나 광주에는 저주와 분노, 끔찍한 살육의 총성만이 난무했다. 지금도 광주시민들은 이날의 참상을 ‘초파일의 유혈극’이라고 부르고 있다.
계엄군의 발포가 개시된 후 광주시내 전역의 병원이란 병원은 총에 맞은 ‘총상환자’들로 초만원을 이루었다. 운전자들은 앞장서서 부상자와 사망자들을 병원에 실어 날랐다. 병원마다 총상환자들의 신음소리로 넘쳐났으며, 분주한 모습으로 혼신의 노력을 기울이는 의사와 간호원들에게 시민들은 경의를 표했다.
병원 앞엔 미처 들어서지 못한 부상자들이 줄을 이었고, 헌혈자들의 눈물겨운 행렬이 상처받은 시민들의 마음을 그나마 위로해 주었다. 특히 적십자병원에선 인근의 속칭 ‘황금동아가씨’들이 떼지어 몰려와 헌혈을 자청하는, ‘가슴 찡한’ 모습이 눈에 띄기도 했다.
새벽 4시까지 지속된 ‘신역 전투‘를 거쳐 오전 9시30분쯤에 이르자 외곽지역의 시위군중들은 금남로 시내 중심가를 향해 몰려들었다. 10시경엔 이미 시위대열이 10만을 넘어서고 있었다. 바로 이 무렵, 운전을 할 줄 아는 많은 젊은 시위대들은 군납방위산업체인 아세아자동차공장에 진입, 대형버스 22대, 장갑차 3대, 군용트럭 33대, 민간트럭 20대를 몰고 와 도청으로 진격하거나 외곽으로 몰며 시민들을 실어 날랐다.
이날 오전 8시를 기해 전국 각지에선 광주행 고속버스의 운행이 중단되었다. 사태가 심각하게 돌아가자 시위대는 계엄군과 협상을 시도, 오전 9시50분쯤 시위군중이 뽑은 시민대표 김범태(27?조선대 법대 1년)씨와 전옥주(32?가정주부)씨 등 2명을 도청에 들여보내 장형태지사와 협상토록 했다. 이 자리에서 양 대표는
①유혈사태에 대한 당국의 공개사과 ②연행학생 및 시민들의 전원 석방과 입원중인 시민과 학생들의 소재와 생사를 알려줄 것 ③계엄군은 21일 정오까지 모든 병력을 시내 전역에서 철수할 것 ④전남북 계엄분소장과 시민대표간의 협상을 주선할 것 등을 요구했으나 이렇다 할 답변을 얻지 못했다.
오전 10시30분에 이르자 군 헬기가 분주히 도청과 조선대 전남대 등에 이착륙하는 모습이 보였다. 계엄당국은 이들 헬기를 통해 도청 지하실의 진압무기류와 사망자를 어디론가 공수하는 한편, 도청 내의 주요 기밀서류를 이송하기 시작했다.
무위로 끝난 협상시도 오전 11시 40분 경에는 광주시 일원에 ‘전남민주학생총연맹’의 이름으로 전단이 배포했다. ‘4?19의거로 연결하자’는 제목의 이 전단은 “오늘 2시 도청 앞에서 궐기대회를 갖자!”면서 “각 대학은 대학별로 집결지를 정해 행동할 것”과 “시민들은 각 동별로 도청 앞에 집결하자!”고 호소했다. 이들이 제시한 각 대학의 집결지를 보면 전남대학교-공용터미널, 조선대학교-계림동파출소 앞, 서강실업 및 간호대-문화방송 앞, 고교생-산수동오거리 등이었다.
20일 심야에 벌어진 계엄군의 발포개시에 따라 ‘광주사태는 전혀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었다. 시내 곳곳에서 총에 맞은 시체가 나뒹굴자 시위군중 특히 젊은 청년들은 “우리도 살기 위해선 무장을 해야 한다”고 울부짖었다.
계엄군의 총격은 사태를 걷잡을 수 없는 와중으로 몰아넣고 말았다. 아세아자동차 공장과 관공서 차고에서 끌어낸 차량들은 속속 광주시 인접 외곽지역을 향해 빠져나갔다. 젊은 시위대들을 태운 시위차량들은 화순 동면, 보성 벌교 방면과 남평 나주 무안 목포 영암 강진 해남 완도 방면, 그리고 담양 곡성 구례 장성 영광 등지로 빠져나갔다.
한편 도청 앞 시위군중은 시시각각으로 불어나 이날 오전 11시 무렵엔 30만에 육박했다. 바로 이때 시위군중 맨 앞에 도열해 있던 503 벤츠 고속버스가 군경의 저지선으로 돌격하자 계엄군쪽에서 LMG기관총을 난사, 차에 타고 있던 젊은 시위대원 20여명이 살상 당하는 사고가 일어났다. 시위군중들은 이들 사망자의 시체를 대형 태극기로 덮어 2구씩 군용지프와 리어카 등에 싣고 시내를 돌며 시민들의 동참을 촉구했다.
차량을 이용한 군 저지선 돌파작전은 여러 차례 시도됐다. 그러나 번번이 실패, 희생자만 늘어날 따름이었다. 계엄군중 일부 공수대원들은 한발 한발 저지선을 압박해 들어오는 시위군중을 막기 위해 전일빌딩과 관광호텔에 잠입, 시위의 선두에 선 시민들에 대해 조준사격을 시작했다. 사망자는 대폭 늘어났고, 시민들은 남녀노소 직업을 뛰어넘어 ‘분노의 일체감’을 이루었다.
“무장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절박감으로 시위군중들은 ‘총’의 소재지를 찾아 나섰다. 그들이 목표로 하는 곳은 대부분이 예비군 무기고였다. “총에는 총으로!” “이대로 당할 수만은 없다. 우리도 총을 갖자!”면서 시외로 빠져나간 흥분한 젊은 청년시위대들은 텅 비다시피 한 (대부분이 광주시로 차출되었다) 경찰서와 지서를 파괴하고 무기와 탄약을 모으기 시작했다.
우선 오후 2시경 동양고속버스를 선두로 수십대의 차량이 화순에 진입, 곧장 화순탄광으로 직행하여 광부들의 알선으로 시위대들은 무기고에서 다량의 총기와 탄약을 탈취하였다. 처음엔 광부들이 TNT를 내주려 하지 않았으나 광주시의 피비린내 나는 참상을 듣고선 곧장 다량의 TNT를 인도해줬다고 한다.
무장하기 시작한 시위대들 같은 무렵, 20여대의 차량에 나눠 타고 나주방면으로 내달린 5백여명의 시위대는 나주경찰서를 급습, 카빈 94정, 권총 25정, 공기총 1백51정을 빼앗는 한편, 또 다른 차량에 분승한 1백여명의 시위대는 나주 금성파출소를 습격, 파출소 내 예비군무기고를 부수고 엠원 2백정, 카빈 5백여정, 총탄 5만발 등을 탈취했다. 또 오후 2시40분경에는 50여명의 시위대가 광주 지원동 석산화약고에 진입, 다량의 TNT와 뇌관을 날라 왔다.
한편 시민들이 ‘무장’의 필요성을 절감할 무렵, 광주 시가지 위를 떠돌던 군용헬기가 도청 부근을 선회하더니 갑자기 고도를 낮추고는 MBC가 소재한 제봉로 부근에다 기총소사를 하기 시작하자, 금남로 부근의 골목에서 웅성거리던 시위군중들은 혼비백산, 길바닥에 엎드리거나, 건물 가장자리로 재빨리 몸을 숨겼다. 헬기로부터 날아온 탄환에 죽은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나뒹굴었다.
오후 2시30분쯤 2백여명의 시민들이 중앙로 지하상가 공사장 부근에 모여 앉아 농성중이었는데, 앞쪽과 도청쪽에선 총격세례가 계속되고 있었다. 바로 이들에게 시외에서 돌아온 젊은 시위대들은 카빈소총 30여정과 실탄 한 클립씩을 분배하기 시작했다.
시 외곽지역의 예비군 무기고에서 빼앗아온 다량의 총기류와 탄약이 광주에 반입된 오후 3시30분 이후 수백명의 무장 청년시위대는 도청 앞 군경저지선을 향해 진격해 들어갔다. 공수대원과 청년시위대와의 총격전이 개시된 것이다.
광주사태는 어느 새 ‘시가전’의 양상을 띠게 되었다. 온 시내는 그야말로 귀가 아플 정도의 총성에 휩싸였다. 계엄군의 공수부대원들은 도청건물과 관광호텔, 전일빌딩을 중심으로 각종 돌출물을 은폐물 삼아 조준사격을 가했으며, 청년시위대들은 눈에 익은 골목길에 숨어서 조심스레 접근하며, 도청을 향해 응사했다.
이같은 시가전은 계엄군이 도청에서 철수하는 오후 5시반까지 계속되었다. 수많은 부상자와 사망자가 거리마다에 쓰러져 있었다. 이들은 급속하게 병원으로 이송 조치되었다.
계엄군이 도청에서 물러난 직후 광주 시가지는 순간 극도의 혼란에 직면했다. 수많은 시민과 차량행렬, 최루가스 내음과 피내음이 뒤범벅되어 모두가 우왕좌왕 헤매고 있었다. 이러한 혼란과 무질서를 정리하기 위해 젊은 청년들은 몇대의 군용지프에다 마이크를 가설, 시민홍보에 나서기 시작했다.
이들은 광주시내에 너무 많이 들어온 차량들을 우선 정리하는 게 급선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모든 차량은 광주공원과 유동삼거리로 모이자”고 가두방송을 했다. 무질서하게 시가지를 배회하던 각종 차량들은 이 방송이 개시된 지 얼마 뒤 광주공원 앞과 유동삼거리로 집결하기 시작했다.
공원 앞에는 수백대의 차량과 수천명의 시민이 모여 한 40대 남자의 호소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여러분 지금 이런 식으로 무질서하게 돌아다니기만 하면 우리는 이길 수 없습니다. 지금부터 저의 통제에 따라 각자 부대를 편성해서 행동합시다” 하고 커다란 목소리로 외쳤다. 그는 우선 사람들을 탑승한 차량으로부터 내리게 한 뒤 10여명씩 줄을 세웠으며, 무기소지자는 따로 조를 편성, 대열을 만들었다.
편성된 대열은 대부분 10대 후반과 20대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그들의 직업은 그곳에서 당장 정확히 알 수는 없었으나 노동자와 종업원 등 현장근로자와 구두닦이 넝마주이 술집아가씨 일용품팔이 부랑아 등이 대부분이었으며, 교복을 입은 고등학생들도 상당수가 끼어 있었다.
점차 조직화되는 무장시위대 조별로 부대가 편성되자 조장은 먼저 자기 대원들에게 총기 조작법과 수류탄 투척법 등을 교육시키고 사격요령 등에 관해서도 구두로 설명을 해주는 모습이 여기저기서 눈에 띄었다.
유동삼거리에서도 광주공원에서와 마찬가지로 2백여명의 무장시민들에게 총기조작법과 교전요령을 가르치고 있었다. 40대 초반의 리더는 “오늘밤 격전이 예상된다”면서 아세아 극장 옥상과 그 아래 도로변 양옆에 화분대로 바리케이드를 치고 LMG와 기관단총 3정을 배치토록 지시했다.
학동 시장입구에선 30여명의 무장시위대가 화순방면의 진입로를 차단하는 무장경계에 들어갔으며, 기독병원 부근에선 40-50명이 수피아여고 앞에 배치되었다. 이들은 이곳에 배치되기 직전 수피아여고 강당에서 실탄 장전 요령과 조준 및 야간사격 요령을 교육받았다. 해남?강진?무안?목포?나주 방면으로 통하는 백운동 철도건널목에도 20여명의 시위 병력이 배치되었다. 이들은 도로 양옆 3층 건물로 들어가 전방관측이 잘되는 목표 쪽에 각자 위치를 잡았다.
한편 이날 오후 5시쯤 계엄군을 도청으로부터 결정적으로 퇴각케 하는 무장작전이 전남의대병원 12층 옥상에서 일단의 젊은 시위대들에 의해 진행되고 있었다. 그들은 LMG 2정을 의대병원 옥상의 계엄군임시본부인 전남도청이 정확히 사정거리 안에 들어오는 지점에 설치한 것이다. 도청과 병원의 거리는 불과 3백m 내외에 불과했다.
시민시위대는 12층 옥상에서 4층에 불과한 도청건물을 내려다보며 유리한 위치에서 기관단총의 방아쇠를 당기기 시작했다. 삽시간에 도청내의 계엄군 임시본부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시민들의 끈질긴 저항에도 그다지 심각성을 느끼지 않던 도청임시본부는 전남의대 옥상에서 날아오는 총격은 피할 수 없다고 느꼈는지 크게 동요하기 시작했다. 거기에다 “휘발유를 가득 만재한 소방차가 도청문 돌파를 위해 시위대의 엄호를 받으며 속속 접근해 오고 있다”는 정보에 접하면서 더욱 초조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계엄군임시본부는 오후 5시30분 일단 철수를 결정, “장갑차 한 대가 도청에서 학동방면으로 질주하면서 길 양옆에다 기관총을 쏘면서 빠른 속도로 지원동 입구까지 9회나 왕복을 하였다.…퇴로 확보를 위한 필사적인 위협사격임이 분명했다”.
잠시 정적이 흐른 뒤 병력을 가득 실은 군용차량 10여대가 무서운 속도로 질주하면서 M16을 길 양옆으로 난사했다. 주택가 안방까지 날아 들어온 총탄에 안타까운 희생자가 여기서도 많이 생겼다.
이와는 별도로 계엄군들은 각 소속부대 별로 조선대학교 쪽으로 집단 퇴각했다. 전남도경찰국 중요간부는 부하직원들에게 “사태가 지극히 심각하니 각자가 알아서 행동하라”면서 도청 뒷담을 넘어 피신하였다.
시위군중들은 계엄군 임시본부가 도청 내에서 완전 철수한 것도 모른 채 한동안 도청을 포위하고 시위를 계속하다가 이날 오후 8시경에야 비로소 도청 내로 진입, 드디어 도청을 시민의 손으로 ‘접수’ 했다.
그후 광주공원, 유동삼거리 등지로 모였던 무기들은 즉시 도청 내로 모아졌다. 이날 시민들의 손을 통해 도청에 모아진 무기류는 카빈 소총 2천2백40정, 엠원 소총 1천2백25정, 38구경권총 12정, 45구경 권총 16정, 기관총 2정 등 모두 3천5백5정이었으며, 실탄은 4만6천4백발, TNT 4박스, 뇌관 1백개, 장갑차 5대, 수십대의 무전기, 방독면 등이었다(이 숫자는 계엄사가 5월22일 발표한 내용이다).
신현확 총리 사퇴, 박충훈 신내각 들어서 5월21일 밤의 광주 시내 전역은 칠흑같은 암흑으로 일관했다. 무섭게 질주하는 시민시위대들의 암호연락 차량과 무장차량 외에 길거리엔 개미새끼 한 마리 얼씬거리지 않았다. 이날 밤 시민시위대의 암구호는 ‘담배연기’였는데, 이 암호는 비상연락 지프를 통해 각 지역을 경계중인 시위대원들에게 신속하게 전달되었다.
이날 밤을 기하여 계엄군은 송정리 방면으로 통하는 화정동, 화순방면으로 통하는 지원동, 목포방면으로 통하는 대동고교 앞, 장성방면의 동운동, 여수?순천방면의 문화동, 31사단방면의 오치, 그리고 교도소 일대 등 7개 지점에서 광주시를 타지역과 차단?봉쇄시키는 작전으로 전환했다.
특히 이 날밤 퇴각 과정에서 퇴각하는 계엄군 공수부대와 교체병력 00사단 사이에 서로를 확인할 수 없었던 관계로 오인 총격전이 벌어져 최소한 3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을 것으로 인근주민들은 추정했다.
계엄군이 도청에서 철수한 직후, 작전이 광주차단?봉쇄위주로 바뀌면서 이날 밤 9시경부터 서울발 광주행 하행열차가 장성까지만 운행되었다. 이와 함께 계엄사는 광주시위사태를 처음으로 밝히고 “민간인 1명 군경 5명이 사망했다”고 거짓 발표했다.
또한 “광주소요는 서울을 이탈한 소요주동 학생 및 깡패들이 대거 광주에 내려가 유언비어를 날조해 퍼뜨린 데 기인되었다”고 발표했다. 이 날짜로 신현확 총리가 사퇴하고 박충훈 내각이 수립되었다.
또 이 날을 기해 광주시내 거주 미국인 약 2백명은 송정리 비행장을 통해 서울로 빠져나갔다. 또한 송정리 미군비행장에서는 이날 밤 9시부터 자정에 이르기까지 그곳에 착륙 중이던 전투기들을 비롯 모든 비행기들을 군산 혹은 오산 비행장으로 이동시켰다.
한편 이날에야 동아일보에는 ‘광주사태 대책강구’라는 제하에 “지난 18일 광주 일원에서 발생한 소요사태 아직 수습되지 않고 있다”고 짤막하게 보도했다. 계엄사는 이날 동시에 김대중씨에 대한 중간조사 내용을 발표, “학원시위사태의 치밀하고 조직적인 배후조종자”로 규정했다.
21일 오후 총격전이 개시되고부터 무장한 시위대를 광주시민들은 일반 시위군중과 구별 ‘시민군’으로 호칭하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비조직적?분산적이던 시위대들은 30-40대의 장년층이 참여하면서부터 예비군조직과 군대경험을 살려 점차 조직적이고 질서정연한 편대를 갖춰갔다.
시민군을 중심의 무장항쟁 성격으로 광주 시위사태가 성격이 바뀌어가는 동안, 학생운동권에선 윤상원을 중심으로 녹두서점과 보성기업에서 수차례에 걸쳐 모임을 갖고 ‘현 상황에서의 학생운동의 진로’에 관해 논의를 벌였다.이 자리에는 윤상원을 비롯, 정상용, 이양현, 정해직 등 7명이 참석했다.
다섯째 날, 5월22일
광주시의 두 얼굴 ‘시민항쟁’ 5일째로 접어든 5월22일의 광주시는 두 얼굴로 떠올랐다. 계엄군이 시위군중들의 공격에 못이겨 시외곽으로 퇴각한 데 대한 일종의 ‘승리감’과 한편으로 수많은 희생자를 낸 데 대한 분노와 허탈감으로 뒤범벅이 돼 있었다. 시내 곳곳에선 총구를 창밖으로 내놓은 채 복면을 한 시위대들의 차량이 시가지를 누비곤 했다.
‘계엄철폐’ ‘전두환을 찢어 죽이라’ 등의 플레카드를 달고 구호를 외치는 이들을 보면서 시민들은 마치 전투에서 막 승리하고 돌아온 개선용사처럼 생각돼 시민군들이라면 너나없이 환호를 보냈다. 도로변 인근주민들과 아낙네들은 각종 드링크류와 청량음료, 푸짐한 음식을 날아와 이들 젊은이들이 배불리 먹도록 했다. 그들은 시민군들이 자신이 가져온 음식을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면서 마냥 흐뭇해했다. 가게 주인들은 담배를 몇 박스씩 가져다 시위대 차량 속의 시민군들에게 몸소 나눠주기도 했다.
22일 날이 밝으면서 광주공원에는 많은 시민들과 지난 밤 외곽지역 전투에 참여했던 무장시민군들이 모여들었다. 이들은 김원갑(19?재수생)을 중심으로 5-6명의 청년들이 이곳으로 모여드는 차량들에게 모두 번호를 매겨주면서 일종의 ‘차량등록’을 필해주고 있었다.
하얀 페인트로 차량 앞뒷면에 일련번호를 큼지막하게 쓴 차들 중 소형차량은 주로 의료, 연락 등의 임무를, 대형 차량은 병력 및 시민들의 수송과 보급, 청소업무를 맡겼다. 그리고 군용 지프는 지휘 통제 순찰 상황통제와 전달 등 헌병업무를, 군용트럭은 전투업무를 맡겼다. 이들은 몇몇 소형차량을 동원, “등록을 필하지 않은 차량은 즉시 공원으로 모여 등록과 동시에 임무를 부여 받으라”고 홍보하였다.
이날까지 무장한 시위대는 대략 5백 명 정도에 달했는데 이들은 나름의 조직과 편성에 따라 각 지역에 배치, 경계근무에 들어갔다.
이날 오전 금남로와 도청주변에는 수많은 군중들이 분수대를 중심으로 모여 앉아 도청 내의 지도부 결성 여부에 큰 관심을 갖고 있었다. 이날 새벽 일찍 도청을 점령한 일단의 무장시위대들은 도청을 본부로 확정하고 1층 서무과를 작전상황실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처음 이곳에는 일반시민들이 너나없이 들어가 체계적인 질서와 통제가 결여돼 한동안 혼란을 면치 못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질서와 체계를 갖춰갔다.
‘사태수습위’ 구성 이와 함께 이날 아침 일찍부터 도청상황실 옆 사무실에는 정시채 부지사를 중심으로 한 광주의 몇몇 지명인사들이 모여 계엄사에 요구할 협상조건에 관해 토의했다. 몇 시간의 마라톤회의 끝에 이날 낮 12시30분 경 목사 신부 학생 변호사 관료 교사 등 광주시내의 지도급 인사 15인으로 ‘5?18사태수습대책위원회’(위원장 독립투사 최한영 옹)를 결성하고 다음과 같은 7개항의 요구를 결의했다.
▲ 사태수습 전에 군 투입을 말라 ▲ 연행자를 석방하라 ▲ 군의 과잉진압을 인정하라 ▲ 사태수습 후의 보복금지 ▲ 책임 면제 ▲ 사망자에 대한 보상 ▲ 이상의 요구가 관철되면 무장을 해제하겠다.
그러나 이들 수습대책위의 결의사항에 대해 “시위 사태의 근본적인 원인에 대한 언급은 전혀 찾아볼 수 없고 임시방편적인 ‘수습’에만 급급했다”는 비판이 젊은 시위대들부터 터져 나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날 오후 1시30분경 이들 수습위원 중 8명이 상무대로 전남북계엄분소를 찾아 군측과 협상을 개시했다.
도청 앞에서는 주최측은 없는 채 자발적으로 시민궐기대회가 개최되어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가 나와 발표를 하고 또 이에 대해 토론을 벌였다. 궐기대회의 연장으로 이날 오후 5시경엔 수습위원들이 계엄군측과 논의한 협상보고대회가 정시채 부지사의 사회로 이어졌다.
협상자 8명은 연단에 나와 차례로 협상결과를 보고했는데 이들의 발언 중 ‘유혈방지’와 ‘질서유지’ 부분에 대해선 너나없이 적극 찬동했다. 김종배씨(27?조선대 3년)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 대회에서 ‘무기회수’에 합의함으로써 도청과 공원에서 약 2백여정의 총기가 회수되었다.
수습위원들의 협상보고대회가 끝난 직후 김창길씨(23?전남대 농경과 3년)등이 “이번 사태는 대학생이 책임을 져야 할 성질의 것이므로 우리들이 사태수습에 나서자”고 제안하자, 이에 대해 약 50명 정도가 동조, 전남대 조선대 등 종합대에서 각 5명, 그리고 나머지 전문대에서 5명을 뽑아 ‘15인 학생수습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이들은 전남대의 송기숙, 명노근 교수와 함께 오후 6시경 1층 서무과에 들어가 위원장에 김창길, 총무에 정해민(23?전남대 경제과 4년) 대변인에 양원식(조선대 재학중) 허규정(조선대), 부위원장 겸 장례담당에 김종배(조선대) 기타 총기회수반 차량통제반 수리보수반 질서회복반 의료반 등의 부서를 각각 두기로 하였다. 이렇게 해서 광주시위사태 수습대책위는 15인의 일반수습위와 15인 학생수습위로 2원화 됐다.
그러나 이들 수습위에 대해 광주시민들은 여전히 “미흡하다”는 생각을 떨쳐 버리지 못하였다. 특히 젊은 청년세력을 중심으로 한 시민군과 운동권에선 이들을 불신하는 생각마저 갖고 있었다. 그 결과, 녹두서점을 중심으로 이 고장의 운동권을 형성하고 있던 많은 젊은이들은 “윤상원을 중심으로 한 민중항쟁지도부 결성의 필요성”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제1부 끝, 제2부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