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예계 전체가 동네 개구쟁이가 막대기로 들쑤셔놓은 벌통이 된 형국이다.
검찰이 작심하고 먼지를 털기 시작하자 대형 연예기획사 관계자들과 굴지의 방송국 고위 간부들이 호나우도 앞의 중국 수비수들처럼 맥을 못 추며 추풍낙엽으로 우수수 떨어지고 있다.
호사가들의 구미를 돋을 먹거리를 연예계만큼 다양하고 풍부하게 선사하는 데도 드물다.
작전세력에 의해 인위적으로 띄어진 가수와 탤런트, 영화배우와 코미디언이 누구로 밝혀질지 흥미롭게 주시해보자.
술자리 안주거리로 씹어대기에 더 할 나위 없이 좋을 테니까.
대중문화 전성시대를 맞이하여 엔터테인먼트 산업은 대표적인 고부가가치 직종으로 각광받고 있다.
유명 톱스타들의 연간소득은 어지간한 회사 1년 매출액 뺨칠 정도다. 그야말로 움직이는 중소기업이라 하겠다.
급격히 신장된 한국 연예산업의 규모에 걸맞게 떨어지는 콩가루와 떡고물도 만만치 않게 짭짤할 게다.
영악한 청소년들이 장래의 희망으로 연예인을 꿈꾸고 눈치 빠른 부모들이 자식을 스타로 키우기 위해 부지런히 여의도를 드나드는 것이 이제는 전혀 낯설지 않은 예삿일이 되었다.
총체적 부패구조에 시달리는 우리나라에서 연예계라고 예외가 아닐 터이다.
고전적인 금품살포 수법은 물론, 야릇한 상상을 자극해 짜릿한 흥분으로 축축하게 젖어들게 하는 '몸'로비와 성(性)상납에서 벤처기업 비리의 단골손님으로 알려진 편법적인 주식증여까지 동원 가능한 뇌물제공방법은 거의 모두 망라된 듯 하다.
연예산업의 양적 성장은 대중문화를 둘러싼 역학구도의 전면적 개편이라는 질적 변화를 초래하였다.
과거 방송국의 페이스에 일방적으로 끌려 다니던 연예계 인사들이 외려 방송편성에까지 간여할 만큼 연예계의 권력지형 또한 크게 변모한 것이다.
우리가 그저 가수나 코미디언으로 알고 있던 이수만이나 심형래 서세원 같은 이들이 콧대 높기로 소문난 방송국 PD들조차 벌벌 떨게 하는 문화권력자의 반열에 부지불식간에 오른 것이다.
- 하프타임
오비이락 격인지 검찰이 본격적인 연예비리 수사에 착수한 이후 국민들, 특히 왕성한 성적 호기심을 자랑하는 남성들의 눈을 즐겁게 해주던 미스 월드컵의 활동이 뜸하다.
뭐 우연의 일치이겠지. 아리따운 우리 미스 월드컵에게까지 불똥이 튀었을 리 만무하다고 나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위악스런 비아냥이 아니다. 절대 진심이다.
연예 오락프로그램이 뉴스나 시사프로그램 못지 않게 사회적 반향을 일으키는 세상이 되었다.
서세원이 자신의 이름을 내건 TV 토크쇼에서 국가대표팀 축구선수들을 모독했다고 해서 한바탕 홍역을 치르더니, FM에서 가요프로그램 사회자를 담당하고 있는 탤런트 최화정은 독일 축구팀 선수들의 약물 복용설을 섣부르게 제기했다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연평 해전의 진실을 다른 각도에서 조명하는 계기를 마련한 '연평총각'이란 아이디의 글이 올랐던 곳은 신해철이 진행자로 마이크를 잡고 있는 라디오 프로그램의 인터넷 게시판이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정치인과 고위관리들이 독점하고 소수의 지식인에게만 부여됐던 공신력과 대중의 신망이 대중문화를 주도하는 유수의 연예인들에게로 전이된 것이다.
6.13 지방선거 당시 선관위는 장나라를 섭외해 투표율을 높이려 애썼고, 3인조 인기여성 댄스그룹 S.E.S,는 중앙선거관리 위원회가 발행하는 공명선거 캠페인 책자의 캐릭터로 둔갑했다.
기업들 역시 연예인을 홍보이사로 위촉해 톡톡한 홍보효과를 거두기도 한다.
심지어 정치권에서도 연예인들은 영입 일순위로 꼽힌다.
바야흐로 정치·경제·사회·문화 곳곳에 걸쳐 연예인이 득세하는 연예인 공화국이 수립된 셈이다.
- 후반전
"조폭 마누라"는 서세원이 제작자로 참여한 영화였다.
허진호 감독의 두 번째 장편 극영화 "봄날은 간다"를 원사이드하게 흠씬 두들겨 패고 흥행에 성공한 영화다.
서사구조 분석에 시간을 낭비할 필요 없이 그냥 한 번 관람하고 스트레스 풀면 안성맞춤인 영화다.
나는 이 영화를 (오로지 비디오로)보면서 주인공 은진(신은경 분)의 결혼식장을 습격한 라이벌 보스의 조직원들과 은진의 부하들이 치고 박는 결투장면에서 딱 한번 웃었고, 임신한 신은경의 배를 악당이 마구 걷어차 아이를 유산시키는 대목에서 딱 한번 양미간을 찌푸렸으며. 우리의 영원한 터프가이 최민수가 영화 마지막에 까메오로 출연하는 컷에서 딱 한번 입맛이 씁쓸해졌다.
영화에는 무궁무진한 해석의 코드가 내장돼 있다.
마징가Z나 매칸더V 등의 낡은 만화영화에도 의미심장한 정치적 함의가 넘쳐 난다.
가령 악당로봇이 도시를 습격할 때마다 주책없이 출동한 군대가 형편없이 얻어터진 다음, 그제서야 번쩍하고 주인공이 나타나는 스토리 전개에는 자위대 전력을 확충하고픈 일본 우익들의 잠재적 염원이 담겨 있다. 조폭을 마누라로 둔 말단 공무원 처지에서 영화를 감상하면 가슴이 뭉클해진다.
나는 우리나라 공무원들에게 별 기대를 걸지 않는다. 그저 뇌물만 받지 않고 부정이나 저지르지 않았다면 좋겠다.
생산성, 공복의식, 서비스 정신. 그거 전부 구라다.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수험생들이 득실대는 동네에 한번 와보시라.
와서 각종 공무원 입시학원과 수험생의 거처로 사용되는 고시원 주변을 한번만 둘러보시라.
한심할 지경이다. 합격률과 커트라인에 따라 작년에는 경찰직을 응시했다가 금년에는 소방직으로, 또 내년에는 일반 행정직으로 지망을 변경한다.
경찰관과 소방관과 동사무소 직원이 공무원이란 공통점을 제외하고 업무적으로 어떠한 호환성이 있는지 나는 대단히 의심스럽다.
까놓고 말해서 대한민국에서 중하위직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고 있는 젊은이들의 대다수는 안정된 직장을 얻겠다는 일념 이외에는 아무런 의욕이나 포부도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행정법 책을 옆구리에 끼고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골목을 배회하는 젊은 청년(처녀)들과 마주칠 적마다 굳게 결심하곤 한다.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세금을 내지 말자고.
삶의 의지도 없고, 현재보다 미래가 나아지리라는 희망도 없고, 10년 후나 20년 후나 여전히 제자리에 있을 말단 공무원이 능력 있고 수완 좋은 조폭 보스를 마누라로 얻었다.
이야말로 기적 같은 행운이다.
당장 동사무소 때려 치고 와이프 가위 챙겨들고 나와바리(영업구역) 사수에 목숨을 거는 게 당연하다.
작년 한해 한국을 강타한 조폭영화 신드롬은 일탈을 향한 욕망의 대리만족으로 여겨진다.
조폭처럼 스릴 있게 살고 싶지만 일상의 안정성은 조금도 흔들리고 싶지 않은 90년대 학번 이후 세대의 물신적 이중성이 조폭에 대한 동경으로 싹튼 것이다.
그렇다고 조폭이 존경스럽다고 공공연이 발설하기는 왠지 꺼림칙하고 켕긴다.
이럴 경우 조폭 시스템과 가장 유사한 집단에서 대용물을 찾거나 대체재를 구한다.
이곳이 바로 연예계이다. 조폭처럼 화려하면서도 조폭만큼은 위험하지 않은 분야를 향해 미숙한 영혼들과 설익은 재능들이 부나방처럼 모여드는 것이다.
- 연장전
돈과 사람이 몰려드는 곳에는 으레 권력이 형성되고 실력자가 탄생한다. 문화산업의 총아인 연예계에도 여러 명의 쇼균이 태어났다.
내가 스포츠신문 연예가 기자가 아닌 이상 그들의 구체적인 면면을 제시하기는 어렵지만 권력기제의 작동방식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유사하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다음과 같은 가설을 유추할 수 있다.
달리지 않는 자전거는 쓰러지듯이 팽창과 증식을 지향하지 않는 권력은 몰락의 운명을 밟아야 한다.
칼은 쓸수록 무뎌지지만 권력은 사용할수록 단단해진다. 대중문화권력도 마찬가지다.
나는 폼생폼사의 대명사인 최민수가 "조폭 마누라"에 등장하는 것을 보고 아연실색했다.
터프가이의 원조 민수 형이 망가짐을 각오하고 출연을 결정한 것에 놀랐고, 짧은 시간이나마 최민수가 얼굴을 내비치도록 작용한 서세원의 영향력이 두려웠다.
권력은 강제와 동의로 이루어진다. 동의를 끌어내는 설득과 강제력의 기반인 폭력의 배합정도에 따라 권력은 추할 수도 아름다울 수도, 악할 수도 선할 수도 있다.
동료 연예인 사이의 우정과 의리라고 선의로 받아들이기에 그 우정과 의리가 빚어낸 결과물이 못내 께름칙하다.
그 께름칙함은 서세원의 근작 영화인 "긴급조치 19호"에서 소름으로 형체를 구체화한다.
30명의 인기 가수가 단체로 우정출연하는 이 영화를 가수들의 확고한 단결력과 끈끈한 결속력이 빚어낸 미담의 성과로 단정짓기가 망설여진다.
서세원의 인적 네트워크가 맺은 결실이라는 친절한 해설도 그리 미덥지 않다.
한국적 인간관계의 풍토에서 인적 네트워크가 의미하는 바가 긍정적인 면보다는 부정적인 양상을 더 많이 내포하고 있음을 인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인적 네트워크는 의문의 여지없는 복종의 메커니즘으로 작동하고, 거부할 수 없는 명령의 체계로 유지된다.
- 승부차기
금품수수를 엄벌에 처하고 로비활동을 강력히 단속한다고 해서 연예계가 정화되지는 않는다.
연예계에서 공정한 페어플레이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개인 대 개인, 개인 대 집단, 집단 대 집단의 성격을 규정짓고 규율하는 관계의 틀들이 합리적으로 재편되어야 한다.
특정인의 직계사단이므로 밀어줘야 하고 유력한 인맥의 구성원이므로 끌어줘야 한다는 연고의 논리와 정실의 이데올로기 대신, 실력대로 대우받고 재능에 상응하게 대접받는 체제가 구축되어야 하는 것이다.
선배든 후배든 하기 싫으면 단호히 No라고 고개를 가로 저을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어야 하겠다.
능력위주 시스템의 정착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이 서열과 위계에 따라 일방적으로 구조화되는 환경임은 누누이 지적되어 왔다.
서열의 벽을 허물고 위계의 장벽을 깬 한국축구가 이루어낸 금자탑을 우리는 이번 월드컵을 통해 생생히 목격한 바 있다.
70년대 긴급조치는 자유의 박탈과 타율적 획일화로 특징지어진다.
자유를 빼앗긴 가수들이 스스로의 투쟁과 노력으로 다시금 자유를 되찾는다는 내용의 "긴급조치 19호"가 과연 가수들의 자발적 참여와 협력으로 조형한 작품인지 나는 몹시 궁금하다.
그렇지만 그 궁금증을 굳이 영화관에서 풀고 싶지는 안다.
시차를 두더라도 비디오만으로 충분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