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지도부 싹터 이런 과정 속에서도 시민피해는 줄어들지 않고 계속되었다. 22일 새벽 시외로 빠져나가려는 효천 철길 부근에선 특히 많은 희생자들이 발생했다. 또 이날 오후 3시쯤엔 의료반에 배치된 차량이 적십자마크와 헌혈차라는 플래카드를 부착한 채 화순으로 가던 도중 지원동 너릿재 고개에서 잠복중이던 계엄군으로부터 집중사격을 받아 차안에 타고 있던 대학생, 남녀 고등학생 청년등 20여 명이 한명의 생존자를 제외하고 몰살당하는 참사가 빚어졌다. 유일한 생존자는 춘태여고 2학년에 재학중인 여학생 홍 모양이었다.
“이러한 일은 비일비재했다” 고 한 시민은 기왕의 상황을 전하면서 “이번 사건도 사실 한명의 생존자가 있기에 망정이지 다 죽어버렸으면 아무도 몰랐을 것”이라고 분통을 터뜨렸다. 이보다 앞서 이날 오전중엔 “전남대 박물관 뒷편 숲 속에선 대학생과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시체 2구가 마대푸대에 싸여 땅속에 묻혀 있는 것이 발견되었다.
이를 계기로 노천과 우물속 하수구 복개상가 화장실 등에서도 시체가 발견되었다는 증언이 뒤를 이었다. 한마디로 많은 시민들은 “19, 20일 양일간에 희생된 상당수의 시신들이 이같은 방법으로 암장됐을 것”이라 믿고 있었다.
정확한 보도와 정보교환이 차단된 상황에서 시민들은 사태실상과 추이에 대해 무척 궁금해했다. 이러한 일차적인 정보욕구 충족과 더불어 시민들을 선무할 매체에 골몰하던 운동권에선 5월18일 사태발생 이후 중단된 ‘투사회보’를 다시 발간하기 시작했다.
이같은 유인물은 ‘투사회보’ 말고도 단발적으로 대략 3군데에서 발간된 것으로 보였다. 이러한 유인물 제작 작업은 학생들과 일부 지식인, 노동자들에 의해서 이뤄졌는데, 최초의 유인물은 전남대학교의 ‘대학의 소리’ 팀이 제작․배포했으며, 또 다른 것은 광천동 노동야학인 ‘들불’ 팀을 중심으로 제작되었다. 며칠 후인 22일-23일엔 극단 ‘광대’ 팀을 중심으로 제작되기도 하였다.
‘대학의 소리’ 팀과 ‘들불야학’ 팀은 5월20일 광천동의 들불야학에서 합류, 윤상원의 지도를 받아 ‘투사회보’ 라는 제목의 합동유인물을 발간키로 했다. 노동자(야학생)와 대학생(강학담당)들로 구성된 투사회보 팀 10명은 차량임무 규정, 투쟁대상을 정한 구호, 보급문제, 시체운반 등에 관한 사항을 집중적으로 담기로 했다.
5월21일 첫호가 나온 ‘투사회보’는 5월25일 8호까지 발간하다 그 다음 호수는 이어서 9호로 하면서 제목만 ‘민주시민회보’로 변경, 발간하였으나 마지막 호인 10호는 미처 배포되기 전 계엄군에 의해 압수되었다고 한다. 당시 제작에 참여한 주요 인물들을 보면 다음과 같다.
5월18일 시민들의 시위사태가 발생한 이래 6일째로 접어든 5월23일 광주시의 표정은 점차 안정을 되찾아 가는 듯했으나, 시외곽 지역에서 들려오는 간헐적인 총성에 여전히 긴장감을 씻어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이날 날이 밝기가 무섭게 새벽 6시부터 남녀고교생 7백여명(여학생 50명)은 시내 전역의 청소작업에 앞장섰다. 이에 대해 수많은 시민들이 호응, 청소를 함께 했으며 대다수의 상가들도 문을 열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직 '전쟁상태'는 끝나지 않고 있었다. 22일 밤, 공수부대원 2명이 외곽 경계근무 중이던 일단의 시민군들에게 생포되었는가 하면, 23일 아침 7시경에는 나이어린 학생 3명과 할머니가 살해당하는 끔찍한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 사건을 놓고 시민측에선 공수부대원의 소행으로 보는데 반해 계엄사 측에선 시민군의 소행이라고 맞섰다.
그간 숨겨졌던 끔찍한 사건들이 터져 나와 시민들을 다시 한번 경악케 하는 경우도 적잖았다. 23일 오전 11시 광주세무서 지하실에 시체1구가 있다는 제보에 접한 시민군 측에선 현지에 나가 직접 시신을 확인했는데, 이 시신은 “유방과 음부가 도려내져 있었고 얼굴이 대검으로 난자당한 여고생이었다”고 했다.
교복에서 나온 학생증으로 이 시신의 신원은 광주시내 모여고 2학년에 재학중인 이모양으로 확인되었다. 주소를 찾아 시신을 인도하자 부모들은 그만 실신하고 말았다고 한다.
오후 2시경엔 백운동 지역을 경계하던 시민군들은 50엠티 무장헬기가 시내 동태를 정찰하는 것을 발견하고 대공사격을 개시, 헬기를 추락시켰다. 이로 인해 헬기에 타고 있던 중령 1명과 사병 1명 조종사 1명 등 3명이 사망했다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이날 저녁 무렵엔 시위대 4명이 군찦차를 몰고 화순 너릿재 고개를 넘어가던 중 헬기로부터 기총소사를 받아 차에 타고 있던 4명 전원이 몰살당하기도 했다.
오후 8시쯤에는 광주시 외곽에 위치한 교도소부근을 지나던 시민군들이 공수부대원들의 공격을 받고 총격전을 벌였다. 계엄군은 교도소 수비를 위해 교도소 옥상에다 케이 50 대공기관단총을 설치해 놓고 시위대들의 공격에 대비했다. 이날 총격전에서 시위대 3명이 사망하고 2명이 부상을 당했다.
이후에도 시민군 교도소를 경계중인 계엄군 사이엔 몇 차례에 걸쳐 충돌이 일어났으며, 그때마다 많은 수의 희생자가 뒤따랐다. 시위대들은 21일 다량의 차량을 노획, 담양 곡성 순천 여수 방면으로 진출키 위해 교도소 부근의 고속도로를 통과하려다 교도소 경계경비가 철통같이 엄해 많은 사상자를 냈던 것이다.
시민군은 교도소 옥상으로부터 날아오는 기관총의 포화를 피하기 위해 폭발물을 장치한 3-4대의 차량으로 진격하기도 했으나 그때마다 계엄군에 의해 모두 저지되었다. 이에 대해 계엄사는 “남파간첩 및 좌익수만 해도 1백70명이나 수감된 광주교도소를 습격해 이들을 탈옥 시켜 시위에 가담시키기 위한 시위대들의 교도소 습격”이라고 발표하였다.
광주시 빠져나가는 피난민 줄이어 5월23일을 기해 계엄군과 시민군의 전선이 형성된 시 외곽지역에서는 광주시내를 빠져나가는 행렬이 줄을 이었다. 그런가 하면 광주에서 학교에 다니는 자식들의 생사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시골에선 끊임없이 많은 사람들이 올라오고 있었다.
그들은 계엄군과 시민군의 대치지역을 피해 주로 들판 가운데로 난 작은 오솔길이나 소로를 통하여 광주시내로 진입해 들어왔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도 무고한 희생자는 발생하고 있었다. 젊은이가 끼어 있는 행렬은 시위대의 의심을 받아 총격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날까지도 광주시내 분위기는 전체적으로 “계엄군을 시민 스스로의 힘으로 몰아냈다”는 승리감, 해방감으로 고조돼 있었다. 사태과정에서 수없이 흘러나온 차량들은 통제를 받아 점차 질서가 잡혀가는 반면 시민들 사이에선 ‘무기회수’ 문제가 쟁점으로 등장하면서 여러 의견들이 백가쟁명 식으로 분출하기 시작했다.
오전 11시경 도청 앞 광장은 시내 각 방면에서 모여든 시민들로 거의 메워지다시피 했는데, 여러 자료에 따르면 “10만여 명의 시민이 모인 것”으로 돼 있다. 도청주변 담벼락엔 ‘민주시민 만세’ ‘살인마 전두환 찢어 죽여라’ ‘노동3권 보장하라’ ‘어용노조 물러가라’ ‘김대중을 석방하라’ ‘죽을 때까지 싸운다’ ‘승리의 그날까지’ 등등 빨간색과 검은색 페인트로 씌어진 각종 현수막이 여기저기 결려 있었다.
또한 도청 오른편쪽의 남도예술회관 벽면과 충장로 방향의 YMCA부근 담 벽에는 지금까지 확인된 사망자 명단과 함께 참혹하게 죽은 시체나 부상자들 그리고 병원에서 죽어가고 있는 응급처치 환자들의 모습을 급히 담은 흑백사진들이 무수히 걸려 있었고, 그 주변에는 많은 시민들이 운집, 엊그제의 분노와 울분을 되새기고 있었다.
이날 제1차 민주수호 범시민궐기대회는 원래 오후 3시로 예정돼 있었으나 엄청난 인파가 몰린 데다 수습위원들의 불화로 인해 열리지 못하고 있던 중 ‘녹두서점’을 중심으로 한 운동권이 시민궐기대회의 진행을 주도, 11시30분경부터 비로소 시작되었다. 이날 모임은 먼저 한 학생의 제안에 따라 ‘광주민중․민주항쟁기간 중 목숨을 잃은 민주영령에 대한 묵념’과 애국가 제창으로 시작되었다.
이어서 시민들 중 노동자 농민 교사 주부 등 각계 각층의 사람들이 차례대로 분수대 위로 올라와 자신의 신분을 밝힌 다음 의견을 토로하고 억울함을 호소하기도 하면서 “싸워서 쟁취한 해방을 끝까지 수호하자”고 한결같이 주장했다.
이날 제1차 민주수호 범시민궐기대회에선 시민과 학생의 피해상황이 임시 파악된 대로 보고되었는데 “전대의대병원, 조대의대병원, 기독교병원, 적십자병원 등 종합병원을 전부 합하여 가족에 의해 신원이 확인된 시신 30여구를 포함, 미확인 사망자 6백여명과 중경상자 3천여명, 그외에 공수부대에 의해 옮겨진 시체와 실종자는 파악할 수조차 없다”고 했다.
시민들은 대회를 치르는 동안 연신 울기도 하고 연사에게 박수를 치기도 하였다. 이 자리에 참석한 시민들은 또 누군가의 제안에 의해 장례준비를 위한 즉석모금운동을 벌였는데, 모금된 액수는 1백여만원으로 곧 수습대책위에 전달되었다.
도청앞 광장 맞은편에 위치한 상무관(유도체육관)에도 많은 시체들이 질서정연하게 흰 무명천에 덮여 진열돼 있었고, 관이 부족하여 아직 입관 처리되지 못한 시체들도 수십 구가 넘었다. 이들 시신을 덮은 흰 무명천들은 빨갛게 피로 물들어 있었다. 이곳 입구에는 분향대가 설치돼 향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시체들은 부패되지 않도록 방부제가 뿌려졌으며, 많은 시민들은 계속 줄을 이어 분향하면서 간간이 오열을 터뜨리기도 했다.
행방불명자 신고 접수 개시 이날 아침부터 도청 내에서는 각 가정에 돌아오지 않은 행방불명자 신고를 접수하면서 동시에 각 병원에 입원 중인 환자와 사망자 명단을 입수 확인하고 있었다. 이같은 확인행렬은 끝이 없었는데, 주로 나이 먹은 아주머니들이거나 노인네들이 많았다.
이들은 한결같이 눈물을 짓고 있거나 수심에 싸인 표정들이었다. 도청 정문에는 ‘수습대책위원회’라는 글씨가 쓰인 띠를 어깨로부터 가슴으로 비스듬히 두른 청년들이 출입을 통제했다. 도청 내에 안치돼 있는 사망자를 확인하러 오는 시민들의 신원을 확인한 다음 이들을 직접 안내해 사망자를 확인시켰다.
대부분의 사망자들은 그 형상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일그러져 있었다. 총을 맞았거나 대검과 몽둥이로 난자․난타 당한 상태가 역력히 남아 있었다. 어떤 경우는 팔이 떨어져 따로 관속에 놓여 있거나 목이 다 잘리어져 몸통과 목이 거의 분리된 시신도 있었으며, 얼굴은 상당수가 원래의 모습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푸르스름하게 퉁퉁 부어 올라 있어 그 비참함은 이루 형언할 수 없었다.
도청에서 신원이 확인된 시신은 곧 상무관으로 옮겨지고 입관수속이 밟아졌다. 학생수습위 부위원장 겸 장례담당인 김종배(조선대생)는 관이 절대적으로 부족하게 되자 수습대책위원장이 보증하는 확인서를 가지고 모금이 되는대로 갚겠다는 후불조건으로 시내 장의사를 다 뒤져 관 1백여 개를 준비하였으나 시내에 관이 동이 나버려 전남도 보사국장에게 외지에서의 도입을 주선해 주도록 부탁했다.
이날 오전 일반수습대책위는 당초 15명에서 5명이 사퇴, 10명만이 남았는데, 여기에 학생수습위를 통합, 총 30명의 확대수습위원회(일반수습위 10명, 전남대생 10명, 조선대생 10명)를 구성했다. 위원장에는 윤공희 대주교가 추대되었으며, 일반수습위원으로는 조비오 신부, 신승균 목사, 박영봉 목사, 박윤봉 적십자사 전남지사장, 독립투사 최한영 옹, 변호사 이종기, 태평극장 사장 장휴동, 교사 신영순씨 등이 위촉되었다.
오후 1시 회수된 총기 2백정을 장휴동 김창길 양씨가 계엄사를 찾아 반납한 후 연행됐던 34명의 신병을 인수해 오자, 수습위는 ‘무조건 무기반납’ 측과, ‘조건부 무기반납’ 측으로 갈라져 갈등이 표면화되었다. 무조건 반납을 주장하는 김창길(전남대생) 등은 “계엄사가 실제로 구속된 사람들을 풀어주었다. 우리가 무기만 모두 회수하여 반납한다면 우리의 요구가 받아들여질 것이고, 만약 이 상태에서 더 이상 계엄군과 대결했다가는 엄청난 피를 흘릴 것이다. 서둘러 무기를 반납해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김종배(조선대생) 등은 “지금 이 시점에서 무조건 무기를 반납한다는 것은 광주시민의 피를 팔아먹는 행위이다. 시위대가 반납하려고 하지도 않을 것이다. 시민들을 납득시키기 위해서는 적어도 우리 광주시민을 폭도라고 주장하는 정부의 태도에 변화가 있어야 되며 구속되어 있는 학생과 시민이 석방되어야 하고, 금번 사태로 인한 피해가 정당하게 보상되고 사망자의 장례식이 시민장으로 치뤄져야 한다”고 주장하며 언성을 높였다.
무기 회수율 50%에 육박 5월23일 밤 도청 안의 수습대책위원 중 대부분의 일반수습위원들은 귀가하고 학생수습대책위원들만 남아 계속 ‘무기회수’를 둘러싸고 의견대립을 보이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도청 내에 장치돼 있던 거대한 양의 TNT는 화순탄광에 근무한다는 모씨에 의해 뇌관이 전부 제거돼 버렸다.
도청수습위원중 신부 목사와 학생수습위원들은 무기회수에 주력, 23일 새벽 7군데의 시 외곽지역을 돌면서 총기 반납을 권유, 모두 2천5백정이 회수됨으로써 애초의 시민군 무장상태(총 5천4백여정)에 비해 50% 가까이가 무장해제 된 셈이었다.
한편 계엄사령부는 공식적으로 광주지역 일원에 투입된 계엄군의 행동조치 결과를 발표, “시민들이 점차 시위군중에 합세하여 난폭화 되기 시작, 계엄군 병력을 증원, 주요 시설의 경비를 강화하는 한편 난폭시위자는 연행 조사했다. 군중시위가 과열되자 계엄군은 외곽지대로 철수, 교도소 등 주요시설을 경비하면서 난동자들이 총격을 가하더라도 발포를 억제하고 전단 등을 활용한 선도활동을 전개해왔다”고 밝혔다.
계엄사가 뿌린 적색글씨의 전단내용은 다음과 같다.
경고문
친애하는 시민여러분! 이제까지는 여러분의 이성과 애국심에 호소하여 자진해산과 질서회복을 기대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총기와 탄약과 폭발물을 탈취한 폭도들의 행패는 계속 가열되고 있으며, 이러한 상황 하에서는 부득이 소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시민여러분! 소요는 고정간첩, 불순분자, 깡패에 의해 조종되고 있습니다. 지금 즉시 대열을 이탈하여 집과 직장으로 돌아가십시오
계엄사령관육군대장 이희성
한편 이날 구상용 광주시장은 ‘80만 광주시민에게 호소합니다’ 라는 호소문을 통해 “불행한 마찰로 인명이 더 이상 희생되어선 안되겠다. 전 시민이 머리를 맞대고 수습책을 강구하자”고 호소했다.
일곱째날, 5월 24일
계엄사측과 협상 8개항 발표 사태발생 7일째인 5월24일 아침8시, 계엄사는 임시 재개된 KBS라디오 방송을 통해 “24일 정오까지 광주시는 광주국군통합병원에, 기타 지역은 각 경찰서에 무기를 반납하면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요지의 방송을 했다.
어제의 승리감과는 달리 시간이 갈수록 광주시민들은 점차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승리와 해방감에 도취돼 있었던 열광적인 흥분상태에서 조금씩 벗어나 시민들 사이엔 투쟁열기가 서서히 식어 가는 징후가 역력했다.
도청앞 광장 주변의 담 벽엔 여러 종류의 구호가 적힌 플래카드와 사진 대자보 등이 어지럽게 나붙어 있었는데 그중에는 수습대책위의 ‘투항주의적 자세’를 맹렬히 비난하는 문구도 나붙기 시작했다. 광주시민 궐기대회의 기사와 사진이 실린 일본의 마이니찌 신문이 붙어 있기도 했다.
이날 오전 수습대책위원회는 계엄사 측과의 협상 답변 내용 8개항을 인쇄하여 시내 일원에 배포하였다. 그 내용은 계엄군이 시내에 한 명도 없다는 점과 과잉진압을 인정하며, 연행자 9백27명중 79명을 제외하고 모두 석방하였으며, 보상계획 수립과 치료대책 완비, 사실보도에 대한 노력, 폭도나 불순분자라는 용어의 사용 중지, 비무장 민간인의 시외통행, 사태수습 후 보복금지 약속 등이었다.
그러나 이를 본 많은 시민들은 노골적인 불만을 표시하였다. 이러한 불만은 오후에 제2차 시민궐기대회에서 구체적으로 폭발하였다. 어제에 이어 24일 오후 2시30분께 제2차 민주수호 범시민궐기대회가 열렸다. 참여인파는 어제와 비슷하게 10만을 넘어섰다.
상무관 주위에는 그윽한 분향 냄새와 함께 시신이 부패하는 냄새로 가득 했으나 시민들은 떠날 줄을 몰랐다. 대회 개최에 앞서 흥분한 시민들은 수습대책위의 무성의한 자세와 투항주의적 자세를 맹렬히 비난했다.
이들은 마이크 시설이 부착돼 있는 전경의 개스 차량 속으로 들어가 “지금 도청 안에서는 수습대책위원회가 대다수 시민들의 뜻과는 반대로 계엄당국과 야합하여 무조건적인 타협을 시도하려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음모를 막아야 합니다. 우리 모두 피 흘린 대가를 보상받도록 강력히 촉구합시다.....”라고 외쳤다.
수습대책위에 대한 일부 시민들의 불신과 분노는 아예 이 단체를 해체시켜버려야 한다는 주장으로까지 확산되었다. 시민들은 수습대책위를 향하여 계엄사와의 협상내용을 소상히 밝힐 것을 요구하였고, 수습대책위는 2-3시간이 지난 뒤에야 마지못해 8개항의 협상 내용을 이종기 변호사가 발표하였다.
이에 대해 시민들은 “시민들의 근본적인 요구와는 다르다”면서 노골적인 비난을 서슴지 않았다. 대회 도중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져 분위기가 한순간 어수선해졌으나 사회자가 “ 이 비는 원통하게 숨을 거둔 민주영령들이 눈을 못 감고 흘리시는 눈물입니다”라고 말하자 잠시 혼란스러웠던 군중들은 곧 우산을 접고 다시 숙연한 분위기로 되돌아가 안정을 찾았다. 허수아비 화형식과 ‘전국 민주시민에게 드리는 글’이 낭독된 데 이어 한 여고생에 의해 ‘민주시’가 낭송되었다.
한편 이날 도청 내 수습대책위는 오후 1시경 도청상황실에서 위원장인 김창길의 사회로 학생수습대책위원회를 열었는데, 김종배 허규정 등의 강경한 요구로
-첫째, 금번 광주사태에 대하여 일부 불순분자들인 폭도의 난동으로 보도하고 있는데, 현 광주항쟁은 전 시민의 의지였으므로 폭도로 규정한 점을 사과하라. -둘째, 이번 사태로 사망한 사람들의 장례식을 시민장으로 하라. -셋째, 5․18사태로 구속된 학생 시민 전원을 석방하라. -넷째, 금번 사태로 인한 피해보상을 전 시민이 납득할 수 있도록 하라. 등의 4개 항목을 계엄당국에 요구하기로 결의했다.
밤 9시경 도청상황실에선 또 다시 학생수습대책위가 열려 ‘무기반납’에 대한 토의를 벌였다. 회의는 자정을 넘어서까지 계속됐고, 25일 새벽 1시경에는 학생수습대책위원들 중 일부가 조직에서 이탈하는 사태가 발생 “이런 엄청난 규모의 사태를 학생들만 책임지고 수습한다는 건 힘들다”고 판단하고 황금선 박남선 김화성 등 일반인도 포함하여 학생수습대책위의 기구를 확대 개편하였다. 위원들은 다음과 같다.
▲ 위원장-김창길 ▲ 부위원장 겸 총무 및 대변인-황금선 ▲ 부위원장 겸 대변인 및 장례담당-김종배 ▲ 상황실장-박남선 ▲ 경비담당-김화성 ▲ 기획실장-김종필 ▲ 무기담당-강경섭 ▲ 홍보부장-허규정
여덟째날, 5월25일
의문의 ‘독침사건’ 발생 사태가 발생한지 8일째, 광주시내를 시위대들이 장악한지 나흘째에 접어든 5월25일 아침, 도청 안에선 느닷없는 ‘독침사건’이 발생, 갑자기 분위기가 어수선해졌다. 오전 8시경 장계범(21세․황금동에서 술집경영)이란 사람이 도청 농림국장실로 쓰러지듯 들어오면서 어깨를 움켜쥐고 “독침을 맞았다”고 소리쳤다.
경비 중이던 시위대의 한 명인 신만식(방위병)이 어깨를 살펴보려고 하자 장계범은 “너는 필요 없어, 정형한테 부탁하네” 하면서 옆에 서 있던 정한규(23․운전사)를 지목했다. 정한규는 장의 웃옷을 벗겨 상처부위를 몇 번 빨아낸 후 부축하여 대기중이던 차로 전남대병원으로 급히 실어갔다.
이 사건으로 도청 내의 분위기는 삽시간에 혼란의 도가니로 빠져들고 말았다. ‘독침사건’에 접한 상당수 시민군은 “도청 안에 간첩이 침투한 모양”이라며 “불안해서 더 이상 못 있겠다”고 하나 둘씩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이 사건에 접한 학생들은 즉각 “시위대 교란을 위한 작전”이라고 주장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이 사건은 시민군의 전열을 흐뜨러트리기 위한 고도의 음모임이 밝혀졌다.
부위원장인 김종배는 도청 내 시민군들의 동요를 가라앉히고, 순찰대원 윤석두 이재호 이재춘 등 6명에게 지시하여 이 사건을 확인토록 하였다. 독침에 찔렸다던 장계범은 전남대병원에서 도망친지 이미 오래였다. 장과 정은 첩자였다고 수습대책위는 공식 발표하였다.
광주시는 며칠째의 평온을 바탕으로 어느 정도 질서가 회복돼가고 있었다. 시장과 상점들이 상당수 문을 열었고, 시 외곽지역으로부터 경운기에 실려 야채가 시내로 반입되고 있었으며, 고아원 및 사회복지단체 등에 대한 식량공급은 시청직원들의 지원에 의해 별다른 어려움이 발생하지 않고 있었다.
은행이나 신용금고 등 금융기관에서도 사고가 단 한건도 발생하지 않았다. 부상자와 사망자가 줄을 이어 혈액공급이 원활치 못하던 병원은, 이젠 헌혈차들에 의해 피가 남아 돌아가고 있었다.
도청 내 시민군 지도부의 3-4백명에 달하는 식사는 처음엔 시민들이 밥을 지어 날랐으나 항쟁이 장기화될 조짐을 보이자 각 동 단위로 식량을 거두어 보내기도 했고, 모금된 돈으로 부식을 사오기도 했다. 24일부터는 시청당국의 협조로 비축미를 공급받고 있었다.
이날부터 일선에서 잠시 물러나 있던 대학생들이 활발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난 밤 편성한 잠정적 지도부의 역할분담에 따라 자신들이 할 일을 찾아 앞장서게 된 것이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보성기업에 모여 사태의 전망과 추이를 숙의했던 이 고장 운동권 청년들은 평소 자신들과 민주화운동에 함께 앞장서왔던 광주권 재야인사들에게 개별적으로 ‘YMCA에서 오전 10시에 회합을 갖기’로 연락을 취했다.
YMCA 2층 총무실에서는 홍남순씨(변호사) 이기홍씨(변호사) 이성학씨(장로) 송기숙(전남대) 명노근 교수(전남대) 장두석씨(신협) 윤영규씨(장로) 조아라 여사(YWCA회장) 이애신 여사(YWCA 총무) 등 재야민주인사와 청년대표인 정상용, 윤상원씨 등이 참석한 가운데 사태수습방안에 대한 진지한 토의가 있었다.
재야인사들 중 이성학 장로와 윤영규 장로 등 몇몇 인사는 청년들의 강경입장을 지지했으나, 명노근 교수 등 대부분은 청년들의 입장을 반대하거나 미온적인 태도로 일관했다. 이 자리에서 청년들은 궐기대회에 함께 참석 “여러 어른들께서 성명서를 발표해달라”고 요청했으나 모두 거절당했다.
회의가 끝난 후 오후2시 민주인사들은 남동 성당에서 김성룡 신부 조비오 신부 오병문 교수 등이 함께 모여 재야인사들의 도청수습대책위 참여문제를 논의, 합류키로 결론을 얻고 오후5시 도청에 들어갔다. 이들은 도청 부지사실에서 회의를 속개, 여기서 김성룡 신부가 제의한 4가지 사항을 만장일치로 통과시키고 김신부를 대변인으로 해서 25명의 광주사태수습대책위원들이 이에 서명했다.
23일과 24일에 이어 25일에도 제3차 민주수호 범시민궐기대회가 도청 앞 광장에서 오후 3시를 전후해서 개최되었다. 시민들은 각 동별로 플래카드를 들고 도청 앞 광장으로 집결, 그 숫자가 15만을 넘어서고 있었다.
이 대회에선 ‘희생자가족, 전국종교인, 전국민주학생에게 드리는 글’이 채택되었고 ‘한국정치보복사’에 대해 토론과 성토가 있었다. 특히 시민군 대표에 의해 ‘우리는 왜 총을 들 수밖에 없었는가’ 가 낭독되어 주목을 끌었다. 이어서 ‘광주시민의 결의문’이 채택되었다.
「우리는 왜 총을 들 수밖에 없었나?」 성명 전문
먼저 이 고자의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피를 흘리며 싸우다 숨진 시민, 학생들의 명복을 빕니다. 우리는 왜 총을 들 수밖에 없었는가? 그 대답은 너무나 간단합니다. 너무도 무자비한 만행을 더 이상 보고만 있을 수 없어서 너도 나도 총을 들고 나섰던 것입니다. 18일 아침, 각 학교에 공수대를 투입하고 이에 반발하는 학생들에게 대검을 꽂아 ‘돌격 앞으로’를 감행하였고, 이에 우리 학생들은 거리로 뛰쳐나와 정부 당국의 불법처사를 규탄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아 이럴 수가 있단 말입니까? 계엄 당국은 18일 오후부터 공수대를 대량 투입하여 시내 곳곳에서 학생과 청년들에게 무차별 살상을 자행하였으니! 아! 설마, 설마 했던 일들이 벌어졌으니! 우리 부모 형제들이 무참히 대검에 찔리고, 차에 깔리고, 연약한 아녀자들이 젖가슴을 짤리우고, 차마 입으로 말할 수 없는 무자비하고도 잔인한 만행이 저질러졌습니다.
또한 나중에 알고 보니 군당국은 계획적으로 경상도 출신 제7 공수병들을 보내 지역감정을 충동질했으며, 도구나 공수대를 3일씩이나 굶기고, 더더구나 술과 흥분제를 복용시켰다 합니다.
시민 여러분! 너무도 경악스런 또 하나의 사실은 20일 밤부터 계엄당국은 공식적으로 발포명령을 내려 무차별 발포를 시작했다는 사실입니다. 이 고장을 지키고자 이 자리에 모이신 민주시민 여러분! 그런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묻고 싶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당할 수만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고장을 지키고 우리 부모형제들을 지키고자 손에 손에 총을 들었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정부와 언론에서는 계속 불순배, 폭도로 몰고 있습니다. 여러분! 잔인무도한 만행을 일삼았던 계엄군이 폭돕니까, 이 고장을 지키겠다고 나선 우리 시민군이 폭돕니까! 시민 여러분! 우리 시민군은 온갖 방해에도 불구하고 여러분의 안전을 끝까지 지킬 것입니다. 또한 협상이 올바르게 진행되면 우리는 즉각 총을 놓겠습니다. 민주시민 여러분! 우리 시민군을 절대적으로 밀어주시고 적극 협조해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1980. 5. 25. 시민군 일동
이날 궐기대회에선 지금까지 파악된 시민피해상황이 보고됐는데, 도청본부 집계에 의하면 현재 시내 각 병원에서 사경을 헤매고 있는 환자는 5백20명, 경상자가 2천1백70명, 사망자는 병원 영안실에 안치되었거나 상무관 도청 뜰에 있는 신원이 파악된 시체가 1백69구,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시체가 40여구, 공사중인 충장로 지하상가에서 집단으로 발견된 23구의 시체 등이었다. 이밖에 도청본부는 “이보다 훨씬 많은 수의 시체가 계엄군에 의해 어디론가 실려가 버렸으며, 행방불명자는 2천여명이 훨씬 넘는 것으로 보고되었다”고 밝혔다.
운동권이 참여한 ‘확대수습위’ 구성 이날 궐기대회가 끝난 직후 운동권의 지시를 받는 대학생들이 속속 YMCA에로 모여들었다. 오후 7시경에는 그 수가 1백여 명에 달했다. 이들은 10명을 한 팀으로 조를 짠 후, 윤상원 등 운동권 주체의 인솔하에 도청에 들어가 수습위와 합류하였다. 이 과정에서 ‘투항파’로 비난의 대상이었던 김창길 황금선 등이 조직을 이탈, ‘투쟁파’가 학생수습위를 완전 장악하게 되는 변화를 맞았다. 밤 9시 무렵이었다.
5월26일, 날이 채 밝기도 전인 새벽 5시 무렵 농성동을 경계중이던 한 시위대로부터 “계엄군이 탱크를 앞세우고 시내로 진입하고 있다”는 다급한 목소리가 무전기를 타고 도청으로 흘러들었다. 도청 안은 벌집을 쑤신 듯 벌컥 뒤집혔다. 전시위대에 초비상령이 하달되었다. 이날의 긴박한 분위기를 김성룡 신부는 광주 정평위 간행 <광주의거자료집>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김성룡 신부 등의 ‘죽음의 행진’ 죽음의 행진! 새벽 5시30분경이라고 기억하고 있다. 돌연 초비상사태를 맞이했다. 전차가 진입해 온다. 순간 수라장으로 화했다. 총을 가진 시민군, 학생 전원이 소리를 지르며 달렸으며, 혼란은 극에 달했다. 어떻게 할 것이냐, 전원 자폭하자, 상황실에서 정보를 확인하기 위하여 차가 출동하였으며, 여기저기 다이얼을 돌리면서 주변의 동태를 물었다. 의자에서 자고 있던 부지사가 벌떡 일어나 확인해 보겠다는 말을 남기고 나가서는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또 속은 것이다.
이 사태를 어찌할 것인가.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 수 없다. 괴롭고 불안하다. 철야로 화약고를 지키고 어떻게 하든지 이 사태를 수습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불안과 공포 속에서 설득을 계속해 왔는데….
“주여, 구해주소서. 힘을 주시옵소서!” 순간, 자칫 잘못하면 광주시민은 파멸한다. 자지 못하고 끊임없는 공포와 피로에 심신이 소모된 젊은 사람들이 TNT에 불을 붙이면 모든 것이 끝난다. 막아야 한다. 흥분하고 있는 젊은 사람들을 진정시키고 이 위기를 넘어야 한다는 생각이 번개같이 나의 머리를 스쳐갔다. 용기를 내자.
“주여, 구해주소서. 힘을 주시옵소서!” 큰 소리로 부르짖었다. 조용해졌다. “나의 말을 들어주시오”
전원 흥분된 얼굴로 나를 쳐다보고 있다. 일단 성공이다. “주여 감사합니다. 또 한번만이라도 용기를 주십시오…”
“우리 어른들이 방패가 되어서 나갑시다. 철야한 수습대책위원은 17명이었다. 전차가 진을 치고 있는 데로 나갑시다. 지금 이 상태로는 우리들은 불을 뿜을지 모르는 전차 앞에 나가도 죽을 것이며, 여기 있어도 죽을 것입니다. 그러니 전원 나갑시다. 그리고 젊은이들은 여기 남아서 여기를 지켜주십시오”
전원이 찬동하여 일어났다.
“제의합니다. 그들과 대화를 이룰 수 있다면 우선 항의합시다. 왜 약속을 배반했는가 하고, 해명하고 사죄하라고 합시다. 그것을 이 자리에서 결의합시다.
① 1시간 이내에 군은 본래의 위치에 철퇴하라. ② 그렇지 않으면 전 시민의 무장화를 호소하고, ③ 게릴라전으로 싸웁시다. ④ 최후의 순간이 오면 TNT를 폭발시켜 전원 자폭합시다”
전원 찬동하고 굳게 결의했다. 밖에 나가 공중전화를 잡았다. 방송반이 이미 시민을 향하여 외치고 있었다. 계엄군이 공격해 옵니다. 전차가 진공해 옵니다. 모두 10시까지는 도청 앞에 모여 주십시오.
까리따스 수도원에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가는 데 받는 사람이 없다. 시계를 보았다. 6시30분이 지난 것 같다. 센터에 전화를 걸었다. 박신부가 대답한다. 빠른 말로 상황을 알리고, 대주교에게 보고해 달라고 부탁하고 죽음의 행진을 시작했다. 어떻게 알았는지 외국인 기자들이 차까지 내어서 처음부터 취재를 계속하며 따라온다.
4km정도 행진했을 것이다. 농촌진흥원 앞에 보도를 차단하고 서 있는 전차가 마치 괴물과 같은 포문을 길게 뻗치고 있었다. 한 사람 두 사람 따라오기 시작한 시민이 어언간 수백명에 달했다. 드디어 2층으로 쳐진 바리케이드까지 갔다. 소령 1명이 굳은 표정으로 맞이하면서 부사령관이 곧 올 것이니 기다리라고 한다.
아침 9시경이다. 시민은 점점 증가했다. 양측 인도에는 착검한 계엄군이 실탄을 장전하고 시민을 경계하고 있으며, 양측 빌등 2층과 옥상에도 군인들이 기관총을 내걸고 발포태세를 취한다.
상상도 못할 광경이다. 외국인 기자 앞에서 부끄럽다. 이것이 대한민국 군대인가. 괴뢰군인가. 외국인 기자가 우리들의 치부를 필름에 수록하기 위하여 전차 사이를 내왕해도 말 한마디 못하는 자들이 국민에 대해서는 뽐내고 총을 대는 모습이 원망스럽다. 이야말로 불량배 집단, 폭력배의 부하들이 아닌가. 강자 앞에선 비굴하게 행동하며 약자를 짓밟는 로봇이 아닌가.
검은 세단 차에 탄 장군이 나타났다. 두 개의 별이 빛난다. 부관들을 대동하고 나타난 장군은 부끄러운지 계엄사령부에 가서 이야기하자 한다. 행진 중 대변인으로 선택된 나는 단호히 말했다. 군이 어제 밤의 위치에 후퇴하지 않는 한 갈 수 없다. 장군은 후퇴하겠다고 말하고 전차병에게 명령하자 전차는 소음을 내면서 사라졌다. 시민은 일제히 박수의 세례를 보냈다.
부사령관 김 소장의 제의를 받아들여 학생대표를 포함 11인이 상무대로 갔다. 서로 인사를 교환하고 자리에 앉으니 오전 10시가 되었다. 대변인으로서 입을 열었다. 그러나 김소장은 이야기를 막고 30분간만 이야기하자는 것이었다.
준장이 2인, 소장이 2인, 그리고 중려인 헌병대장의 순서로 앉고 그 옆에 내가 앉게 되었다. 나는 항의했다. 대화라는 것은 대등한 입장에서 이야기해야 하지 않느냐. 그렇게 일방적으로 위협하고 이야기를 중단시키고 시간을 제한하면 어떻게 대화가 되는가고.
약속을 위반하고 전차를 이동케 한데 대한 항의로부터 시작하여 우리의 결의를 말했다. 그리고 무엇 때문에 신부가 여기에 왔는지 진심으로 이 이상 귀중한 피를 흘리지 않고 수습할 것을 요청, 이 일은 전 광주시민 뿐 아니라 국가적인 일이니 이렇게 신부도 수습위에 참가했다고 역설했다. 그러나 말은 통하지 않았다. 교묘히 나의 말을 왜곡하고 유도하면서 이제까지의 이야기는 없었던 것으로 하자는 것이었다.
“나는 군인이다…” 나는 군인이다. 정치문제는 모른다. 그러므로 대화를 하자면 ①무기회수 ②군에 반납 ③그렇게 하면 경찰로 하여금 치안을 회복케 하고 싶다는 일방적인 각본을 강요하는 것이었다. 분명히 같은 얘기를 하면서도 개념이 달랐다. 이질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수습회의는 연 4시간 반이나 계속되었다. 군인들과 이 이상 이야기해도 별 수가 없다는 것을 뼈아프게 느꼈다. 밤 12시까지 수습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최후통첩이다. 그래서 무조건 수습을 위하여 5개 항목의 요구를 제시했다.
▲시간이 필요하다. 노력해서 수습한 것을 군이 약속을 깼으니 시간을 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한마디로 거절당했다. 며칠을 참고 후퇴까지 한 군의 사기에 영향이 있다는 것이다. 군은 항상 이겨야 한다는 것이다. 타당한 말이다. 국군은 언제나 이겨야 한다. 그러나 적군에 이겨야 하는 것이지 나라의 주인인 국민, 80만 광주시민에게 이겨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시간이 없어서 다시 묻지 못했다. ▲약속을 위반하여 전차를 행동케 한 데 대한 이유를 분명히 하고 사죄하라. 이미 방송을 통하여 시민에게 전했다는 것이다.
▲군은 절대로 광주시내에 진공해서는 안된다. 오늘 아침에도 느낀 일이다. 총구를 국민에게 돌리는 군대를 어떻게 대한민국 군인으로서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더욱이 돌연 무자비한 살상해위를 한 군을 광주시민은 절대로 용서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신부이며, 살상해위를 목격하지는 않았으나 김 장군을 처음 만났을 때 혐오감을 느꼈다.
하물며 직접 살상을 목격한 시민, 가족을 잃은 시민, 분노와 원한에 찬 시민이 어떻게 군을 용서할 수 있겠는가. 군인 중에도 많이 살상한 전우의 이러한 모습을 본 젊은 군인들이 분개하고 있다고 한다. 그들은 애국 애족에 관하여 교육이 잘 되어서 참고 있다는 것이다. 말이 통하지 않는다. 민주 학생이 정당한 권리를 주장하고 시위하고 있는 것을 총검으로 무차별 살상하고 전시민의 의거로 쫓기고 지금 와서 피차 매 한가자라니.....
▲경찰에게 치안을 담당시켜라. 무기가 회수되어 군에 반납되면 그렇게 하고 tv다는 조건을 낸다. ▲보도로 화해를 호소하는 방법을 지양하고 시민을 자극하지 말라. 메모로 하여 전령에게 주어라. 노력한다고 약속한다.
“지금 와서 거의 불가능케 된 수습을 위하여 죽음을 각오하고 시민들에게 돌아가서 호소해 보아야지....” 지프를 타고 공업단지 입구까지 와서 내렸다. 시외도로가 통하게 파헤쳐졌던 길들이 정리되어 있었다. 시민이 주의 깊게 왕래하고 있었으며 택시까지 눈에 띈다. 시민이 야채를 구입할 수 있게 한 것이라고 해명하고 있었으나 분명히 군의 작전을 위하여 취해진 것이 틀림없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다른 수습위원을 돌려보내고 본당을 향하여 급히 걸었다. 사제관은 굳게 닫혀져 있었으며 아무도 없었다. 수녀들이 놀란 모습으로 나를 본다. 공포와 긴장 속에 밤을 새우고 사령부에서 4시간 반이나 회담을 하고 돌아왔으니 피곤에 지친 내 얼굴이 무섭게 보였을 것이다.
윤 대주교에게 전화로 보고하고 세수를 했다. 몇번 얼굴을 씻어도 마찬가지다. 수녀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빵 한 조각과 토마토를 먹었다. 이것이 아침 겸 점심이다. 이미 오후3시다. 밤 12시까지는 수습해야 한다. 무거운 마음으로 걸었다. 신도의 집을 찾았다. 민심을 알고 싶었다. 분노에 찬 시민, 무장한 시민군과 학생설득을 위해서였다.
4시에 겨우 가톨릭센터에 도착했다. 많은 시민이 모여 있었으며 또 모이고 있었다. 시민 속을 헤치고 도청에 갔다. 총을 갖고 경비를 담당하고 있던 10대의 젊은이가 신부인 줄 알고 통과시켜 주었다. 부지사실에는 외국인 기자까지 합하여 많은 사람이 모여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떻게 말을 끄집어내야 하느냐. 우선 시간을 끌기 위하여 수습대책위원 전원이 모인 다음에 이야기하고 싶다고 보고서와 호소문 내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진실’ 알리려 광주탈출 이때였다. YMCA에서 젊은이가 와서 곧 서울에 가지 않으면 안된다는 전언이 도착했다. 잠시 생각했다. 지금 이 순간 이 장소를 뜨면 도망하는 것이 아닌가. 시민이 어떻게 생각할까. 비겁한 신부,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무력한 교회라고 비판받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진실을 알리는 것도 중대한 일이라고 생각하면 누군가가 탈출해야 한다. 옆에 앉은 조신부에게 조언을 구했다. 가지 않으면 안된다는 말을 듣고 결단을 내리고 일어섰다.
도중 도지사가 시체안치소에 가는 것이 보였다. 원한과 분노가 가슴속에서 동시에 끓어올랐다. 80만 광주시민과 생사를 같이 해야 할 도지사가 가족과 같이 자취를 감추었다가 지금 와서야 나타나다니 철면피가 아닌가. 그는 그대로의 이유가 있었겠으나…시민의 앞에서 규탄하고 싶은 충동을 억제하면서 길을 재촉했다.
“보다 큰 사명을 다해야 한다. 왜곡된 실상, 공수단의 만행과 계엄군의 무차별 사살을 세상에 폭로해야 한다. 진실은 진실이라고 말하는 예언자적 사명을 받은 신부가 아니냐. 그래야 비로소 80만 광주시민의 피의 대가를 찾을 수가 있다. 무장폭도, 불순분자라는 오명을 씻고 자랑스러운 민주시민임이 인정되어야 한다. 서울에 가자. 추기경에게 알려야 한다.
주님의 자비와 성모님의 도움, 그리고 형제들의 따뜻한 헌신적인 보호를 받으면서 다음날(27일) 밤 10시경 무사히 명동에 도착했다. 9번이나 엄한 검문을 통과했으나 잘못하면 그들에게 화가 미칠까봐 탈출경과는 밝히지 못한다“
임시 민주수호 범시민궐기대회 개최 계엄군이 시내에 진입한다는 소식에 접한 시민들은 아침부터 도청앞 광장으로 모여들었다. 오전 10시 경 3만여명의 시민이 모이자 자발적으로 ‘임시 민주수호 범시민궐기대회’를 개최, 시민들은 “계엄군들이 협상을 위반하고 있다”면서 <전언론인에게 보내는 글>과 <대한민국 국민에게 보내는 글> 등을 채택했다.
점심시간 무렵 궐기대회가 끝난 후 시민들은 대형 태극기를 앞세운 채, 전남대 스쿨버스와 1천여명의 고등학생을 선두로 하여 참석한 시민 전원이 시가행진에 돌입했다. 시위군중들은 5월18일, 19일의 기세가 다시 되살아난 듯 “우리는 싸움을 포기할 수 없다” “무기반납은 절대로 안된다” “살인마 전두환을 찢어 죽이자”는 구호와 함께 ‘투사의 노래’ ‘우리의 소원’을 외쳐 불렀다. 이들 시위대들은 금남로를 출발→광남로→광주공원→양림교→전남대병원→청산학원→계림파출소→구역→한일은행→도청 앞으로 재집결 했다.
한편 이날 오전 도청 내 시위지도부는 각 부서별로 업무를 분담하여 각자 집행에 들어갔으나 계엄군의 일시 진입으로 인해 뒤숭숭한 가운데 급박한 상황 속에서 체계가 잘 잡히지 않았다. 기획부에서는 도청 내부 통제 및 시민군의 전반적인 조직 통제로 도청내 출입을 엄격히 제한하고 유류 사용을 통제하기 위해 유류사용증명서를 발급 받은 후 시내 저장창고에 가서 주유토록 했으며, 무기 및 보급품 관리와 모금활동을 벌여 모금된 돈으로 필요한 곳에 지불했다. 기타 서무 및 총무 일반에 관한 사항 등 투쟁위원회 전체적인 업무를 종합적으로 관장, 조정하는 역할을 수행하기 시작했다.
민원부에서는 피해자 접수, 상무관 시체 정리, 민간인 업무개시 촉진, 관공서 정상가동, 시내 강력사건 접수 및 조사부 이전, 시외전화 재개 추진, 도로청소 등을 수행했다. 조사부는 지금까지 계엄군 측의 첩자나 경찰 기타 정보요원들이 가장 많이 침투해 있는 부서였기 때문에 특별히 도청내 사정을 정확히 알고 있는 운동권 청년대가 신고를 받고 출동하여 체포해온 시민질서 교란범들을 조사하여 일반적인 강력보안사범인 경우에는 기획부로 이첩시켰다.
공보부에서는 지금까지의 궐기대회를 앞으로는 대대적으로 확대시키고 전반적인 홍보활동을 강화하기 위해 전일방송과 전남매일신문을 가동시키도록 계획했다. 또한 <투사회보>를 <민주시민회보>로 바꿈과 동시에 27일부터는 전남대 출판부 인쇄기를 사용토록 했다.
보급부에서는 장례식에 필요한 관과 기타 물자, 그리고 시민군의 식량조달을 위해 시장과 부지사, 기타 도청 내 각 국장급들에게 협조를 요구했다.
대변인은 항쟁지도부내의 모든 결정사항에 대한 대외적인 창구를 일원화하여 시민들로부터 집행부의 공신력을 회복하고, 항쟁의 확산을 피하기 위한 기자회견 등을 개최하기 위해 지도부 내에서도 감각이 뛰어나고 상황판단을 정확히 하면서 실질적으로 집행부 내부의 모든 일을 전체적으로 컨트롤하고 있었던 윤상원이 맡아 오전10시에 대변인실에서 기자회견을 일차적으로 개최하였다.
기자회견 석상에서는 주로 외신기자들이 많이 참석하고, 국내기자도 일부가 참석을 허락받았다. 외신기자로는 프랑스 르몽드지, 미국의 월스트리트저널지, CBS방송, NBC방송국 UPI통신, 영국의 선데이 타임지, 독일의 짜이퉁지, 일본의 아사히 신문, NHK방송국 등과 그외 4-5명쯤 더 되었으며, 국내기자로는 동아일보, 경향신문, 전남매일 등이 참석했고, 이중 외신기자들을 위해 한국 특파원인 한국인 기자가 영어로 통역을 했다.
외신기자들은 모두 비디오로 1시간 동안에 걸친 기자회견을 전부 촬영하였는데, 대변인 윤상원은 미리 준비된 차트로 지금까지의 전반적인 상황을 설명했고, 설명이 끝난 후 외신기자들을부터 차례로 투쟁의 목적, 현재의 상황, 피해상황에 대한 질문을 받았다.
상황실장인 박남선은 일차적으로 지금까지의 순찰대를 다시 보강, 기동타격대장에 윤석두(1961년생, 19세, 자개공), 부대장에 이재호(1947년생 33세, 한양공대졸, 회사원)를 임명하고, 5-6명씩을 1개조로 하여 각 조마다 조장 1명, 타격대원 4-5명, 군용찦차 1대, 무전기 1대, 개인화기로는 카빈소총 1정과 15발들이 실탄 1크립씩을 지급, 모두 13개조로 편성하였다. 기동타격대는 위원장과 부위원장의 지시를 받아 상황실장-기동타격대장-부대장-조장-조원에 이르기까지 지휘계통을 확립하고 외곽지 시민군과의 연락업무 등의 임무가 부여되었다.
상황실장은 위원장과 부위원장의 지시를 받아 시내 지도가 부착된 상황판에 병력 비지도를 작성하여 외곽지 계엄군과 대치중인 지역을 점검하고 도청을 중심으로 한 투항파의 끈질긴 교란작전을 직접 저지하는 일들을 수행했다. 따라서 상황실장이라는 자리는 일단 유사시 시민군의 총지휘관 역할까지 자동적으로 겸한 셈이 됐다. 이날 아침 상황실장은 무기창고를 지키는 일을 전원 대학생팀으로 교체했다. 무기고의 허술한 통제를 긴급 정비한 것이다.
‘도민장’ 등 8개항 요구 위원장과 부위원장 등 지도부는 25일부터 출근하기 시작한 도청 국장급 간부들과 정시채 부지사와 함께 참석 이날 오후 2시 도청기획실에서 광주시장에게 다음과 같은 사항을 요구하였다. 첫째, 매일 백미 1가마씩 제공하라. 둘째, 부식 및 연료를 제공해달라. 셋째, 관 40개를 제공해달라. 넷째, 앰뷸런스를 지원해 달라. 다섯째, 생필품 보급을 원활케 해달라. 여섯째, 치안문제는 일반사범에 한하여 경찰이 책임지라. 일곱째, 시내버스를 운행토록 해달라. 여덟째, 사망자 장례는 도민장으로 해달라.
이와 같은 8가지 요구사항을 내걸고 협상을 시도한 결과, 대부분의 제안이 모두 받아들여졌고, 도민장은 5월29일에 치르기로 합의를 보았으며, 당시 지도부의 판단으로는 최소한 5월29일 장례를 치를 때까지는 계엄군이 공격해오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 속에 그 동안 모든 조직을 재정비할 계획이었다. 이러한 협상과정 속에 정시채 부지사는 무기를 회수하여 반납할 것을 요구하자 시위지도부는 이것을 거절하고 “현정권의 전면적인 퇴진”을 요구하면서 “만약 이것이 관철되지 않으면 당신들과 협상조차 하지 않겠다”고 맞섰다.
이날 오후 3시에는 또 제5차 민주수호 범시민궐기대회가 개최되었다. 참가 시민들의 상당수는 ‘계엄해제’ ‘구속자 석방’ 등의 구호를 쓴 머리띠를 두르고 있었다. 이 자리에서는 행정 지도부의 동별 예비군 조직을 동원하기 위한 조직 작업에 대한 계획이 발표되었고, 시민들의 호응은 적극적이었다.
연사들중 증심사에서 온 젊은 스님(27일 피살됨) 한 사람이 분수대 위에 올라 조용한 말투로 설득력 있게 불교인인 자신이 왜 싸우자고 할 수밖에 없는가를 시민들에게 이야기한 데 이어 또 한 시민은 총기 강도사건을 왜곡, 과장 보도하는 언론을 규탄하기도 했다.
그는 “평상시에도 도시에서는 강력사건이 하루 보통 몇 건씩은 일어난다. 지금껏 10여일 동안 광주에서 강도 등 강력사건이 도대체 몇 건이나 발생했단 말인가. 5천여정의 총기가 시내에 나와 있는데도 은행과 금은방이 한번이라도 털린 적이 있단 말인가. 눈물이 나도록 광주시민의 긍지가 고맙고 자랑스러울 뿐”이라고 역설, 청중들의 뜨거운 박수를 받았다.
대회 도중 장례준비를 위한 모금운동이 계속되었고, 이날 오후 2시30분경에는 기독교 대표 4인이 사태 수습비로 1천만원을 모금중인데, 그중 일부라는 말과 함께 1백만원을 도청 지도부에 전달해왔다.
한편 계엄군은 이날 아침부터 정시채 부지사를 통해 계속 3회에 걸쳐 최후 통첩을 해왔다. 이날 오전 9시경 일반 수습대책위원회가 계엄분소를 찾아가 협상을 계속했는데, 계엄군측은 무장해제와 무기반납을 요구하면서 사태수습을 위해 계엄군 대신 경찰을 치안유지에 투입할 것을 약속했으나 “ 오후 6시까지 무기를 반납하라, 최후 통첩이다”라고 무력 진압을 강력 시사했다. 또 오후 5시에는 “이제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면서 오늘밤 공격해 들어올 의사를 분명히 전달해왔다.
또한 상무대 부근에 근무중인 방위병에 의해 목격된 바로는 군병력 증강과 출전 전야의 돼지고기 파티를 벌였다는 소식을 비롯, 상무대에 근무하는 한 장교 부인이 퇴근시간이 지나도 남편이 집에 들어오지 않아 전화를 해보니 “오늘 저녁에는 못 들어가고 내일저녁에나 들어갈 수 있겠다”는 등 여러 가지 징후로 미루어 보아 이날 밤 공격은 확실해 보였다.
지도부로서는 이같은 사실을 시민들에게 알릴 것인가, 말 것인가를 두고 한동안 당혹스러웠으나 어차피 알릴 수밖에 없는 입장이라면 비록 시민들의 고양된 분위기가 다소 침체된다 할지라도 상황을 정확히 알려 대비책을 강구토록 해야 한다는 판단 아래 궐기대회가 끝날 무렵 “오늘밤 계엄군이 공격해올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발표했다.
순식간에 궐기대회장 분위기가 싸늘해지면서 침통한 분위기에 휩싸였다. “드디어 올 것이 오는 모양이구나”라고 생각들을 하면서 사회자를 비롯해 많은 사람들은 오늘밤 휘몰아 닥칠 피의 살육과 자신들의 운명, 그리고 고귀한 생명을 수없이 희생시킨 끝에 바람 센 어두운 광야에 간신히 켜놓은 민주제단의 촛불이 꺼질지도 모를 마지막 위태로운 순간을 머릿속에 그리고 있었다.
한동안 비장한 침묵이 감돌더니 시민들의 눈에는 저머다 눈물이 괴기 시작했다. 궐기대회는 끝났으나 아무도 일어서려고 하지 않았다. 시민들은 지금 현재 상태에서 계엄군과 싸워 이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너무 많은 무기가 회수되어 버렸고, 많은 시민군들이 해체되어버린 상태에서 증강된 계엄군의 탱크와 화력에 어떻게 대처할 수 있단 말인가. 이런 상황하에서 아무리 탁월한 지도역량을 발휘한다 하더라도 무력대결 앞에서는 어쩔 수 없을 터였다.
며칠 전부터 끓어오르는 분노가 폭발적 행동으로 연결되기에는 지금의 상황은 너무나 합리적이고 강한 피해의식에 젖어 있었다.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어느 곳에선가부터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이라는 노래의 시냇물이 점차 강물로 변하기 시작했다. 모든 시민들이 통일의 노래를 통해 한마음이 돼감과 동시에 노래의 바다를 이루었다.
시가행진이 시작됐다. 많은 사람들이 빠져나가고 6천여명 정도가 금남로, 유동 삼거리, 양동 복개상가, 화정동 고개를 거쳐 공단입구로 나아갔다. 수많은 병력이 한전 앞에서 진을 치고 있었다. 인근 주민들이 참가해 시위대는 3만여명으로 다시 불어났다. 계엄군 대치지역의 100여미터 전방에서 “계엄군 물러가라, 우리는 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순간까지 싸운다”라고 외치며 계엄군을 성토한 후 시위대는 다시 도청으로 돌아왔다. 최종적으로 도청 안에 남은 사람은 대략 200여명 정도로 추산되었다.
광주민주항쟁의 종막, 5월 27일
드디어 계엄군은 27일 새벽 0시를 기하여 광주 외곽 진입로를 봉쇄하면서 M-16, 화염방사기, 수류탄 등 각종 화기와 탱크를 앞세우고 무력 진압작전을 개시했다. 시민군은 전남대 입구에서, 또 한일은행 앞에서 계엄군을 발견하고 급히 도청으로 되돌아 왔다.
이때 계엄군은 양림동에서 하천을 따라 적십자병원을 거쳐 도청 남쪽으로(OO사단), 지원동에서 학동과 전남대병원을 거쳐 도청 후문으로(OO사단), 백운동에서 월산동과 한일은행을 거쳐 도청 정문으로(OO사단), 화정동에서 유동으로(상무대 뱡력), 서방에서 계림국교와 시청을 거쳐 도청 북쪽으로(OO사단) 5개 방면에서 공수부대를 선봉에 세우고 공격해 들어왔다.
이에 대해 시민군들은 YMCA에 농성중이던 200여명을 모두 도청에서 무장시킨 후 전일빌딩과 YMCA, 계림국교에 배치하였다. 또한 박영순(21. 송원전문대 2년)양은 지프차를 타고 가두방송에 나가 “시민 여러분, 지금 계엄군이 공격해오고 있습니다. 우리 형제자매가 계엄군의 총칼에 죽어가고 있으니 전시민은 도청으로 오셔서 무기를 들고 싸웁시다”고 대인동 신역 산수오거리 등지를 돌며 애절한 목소리로 호소, 많은 시민들이 도청으로 속속 몰려들어 저마다의 손에 총을 거머쥐었다.
그러나 도청으로 뛰어오다 100여명이 ‘도청방화’ 혐의로 체포되고 또 100 정도가 사살되는 참극이 벌어져 시내는 순식간에 아비규환의 지옥으로 돌변, 쓰러진 시신이 여기저기서 나뒹굴었다. 새벽 4시10분경, 도청은 계엄군에 완전 포위되었다. 공수부대는 도청 후문을 돌파하고 도청에 난입해 무자비한 살육작전을 자행, 수많은 시민군이 힘없이 스러져 갔다.
이때 수습위원회 대변인을 맡고 있던 윤상원이 계엄군의 총탄에 옆구리를 맞고 휘청거리자, 수습위원 동료들이 그를 자리에 눕히고 이불로 덮어주었으나 수류탄이 터지는 바람에 모두 사망하고 말았다. 또한 “무기를 버리고 항복하라”고 외치는 계엄군의 고함소리에 무기를 버리고 두손을 든 채 몸을 드러냈다가 계엄군이 무자비하게 난사하는 M-16에 맞아 많은 시민군들이 죽어 넘어졌다.
27일 오전 4시 55분께, 마침내 도청의 시민군들은 전우의 시체를 넘으며 두손을 들고 투항했다. 그러나 전일빌딩에 배치됐던 20여명의 시민군들은 끝까지 싸우다가 27일 오후 2시경, 마지막으로 옥상에 올라가 최후까지 항전, 모두가 장렬하게 전사하고 말았다.
도청 및 YMCA, YWCA 등지에서 체포된 생존 시민군들은 일단 상무대 전투병과사령부 건공단으로 끌려가 계엄군들에게 10파운드 곡괭이 자루로 초죽음이 되도록 두들겨 맞았다.
한편 이날(27일) 계엄군은 시내 전역의 가택을 샅샅이 수색하여 수백명의 청년들을 끌고 갔으며, 여관이나 여인숙에서 잠을 자고 있거나 길거리를 통행하고 있던 젊은이는 무조건 시청, 아모레화장품, 관관호텔 등지로 끌려가 무자비한 고문과 구타 속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죽고 다쳤다.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끈질기게 살아남은 사람들 역시 27일 밤 8시께 모두 헌병대로 이송되었다. 이후 계엄군은 골목골목마다 경계를 펼치고 시민들이 일체 바깥 출입을 하지 못하도록 했으며. 심지어 창밖으로 내다보는 것조차 금했다. 창밖을 내다보다 조준사격에 희생된 시민도 수명에 이르렀다. 그리고 언제 끝날지 모르는 검거선풍이 광주시 전역에 몰아닥쳤다.
이리하여 열흘간에 걸쳐 한반도를 뒤흔들었던 <광주민중항쟁>은 일단 겉으로는 막을 내린 듯싶었다. 씻을 수 없는 통한을 남긴 채…차디찬 아스팔트 위로 싸늘하게 식어간 내 자식과 형제․자매들의 영혼을 부여잡고 통곡하던 유족들의 한 많은 오열을 뒤로 한 채…80만 광주시민들의, 400만 전남도민들의, 아니 4천만 대한민국 국민들의 가슴마다에 원(怨)과 한(恨)이 얽히고 맺힌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