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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해 3월 27일은 박정현에게 뜻깊은 날이었다. 데뷔앨범 [Piece]가 발매된지 정확히 10년째 되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라이브의 여왕','R&B의 요정' 등의 애칭으로 불리던 박정현도 이젠 가요계에서 제법 고참이 됐다. 폭넓은 음역대와 능수능란한 바이브레이션으로 대표되는 박정현의 가창력은 어느새 가요계에 하나의 랜드마크로 자리잡았다. '나의 하루'와 'P.S. I Love You'의 성공은 이미 지난 세기의 추억이 됐고, 음악적 진보의 결실이었던 네 번째 앨범 [Op. 4]와 다섯 번째 앨범 [On & On]도 벌써 오래 전 일처럼 기억된다.
박정현이 [On & On] 이후 3년 가까운 공백을 갖는 사이 국내 음반시장은 거의 몰락에 가까운 수준에 이르렀다. 아무리 좋은 앨범을 내놓는다 해도 예전의 성공을 재현할 수 없다는 건 불 보듯 뻔한 일. 박정현은 욕심을 버렸다. 자신을 위해, 팬들을 위해, 팬들과 만날 수 있는 공연을 위해 박정현은 다시 스튜디오로 돌아왔다. 박정현이 원래 있던 곳, 그래서 여섯 번째 앨범 제목도 [Come to Where I am]이다.
"공연에선 극적인 노래를 많이 부르게 되죠. '꿈에'나 '달'처럼 극적인 노래를 하다 집에 들어가면 잭 존슨의 음악처럼 차분하고 편안한 노래를 들어요. 심리적으로 저도 극적인 노래들과는 거리가 생기는 거겠죠." 지난 해 12월 발매된 [Come to Where I am]은 박정현의 현재 삶을 반영하는 앨범이다. 시간이 지나면 취향도 변하고 삶도 변하게 마련이다. 마음 속에 열정적인 감정이 없다면 화려한 창법으로 부르는 것도 힘들다면서 박정현은 "팬들이 화려한 창법을 바랄까 봐 걱정했지만 이번에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어요" 라고 말했다.
컨셉트 없는 컨셉트. 박정현은 마음 가는 대로 가사에 집중하며 목소리에도 힘을 빼고 불렀다. "나이가 드니까 옛날 생각도 많이 하게 돼요. 저만 그런 게 아니라 주변에서도 많이 이야기하시더라고요. '4집도 좋고 5집도 좋은데 그래도 1집이 제일 좋아요'라는 식의 이야기요. 생각해 보니 저의 시작이기도 했던 팝 발라드가 언제부턴가 제 앨범에서 빠지기 시작했더라고요. 황성제 프로듀서와 작업하면서도 특별한 컨셉트를 갖지 말고 순수한 발라드를 만들자고 이야기했어요."
여섯 번째 앨범 [Come to Where I am]에서 박정현은 12곡 중에 총 10곡의 작곡에 참여했다. 그 중 네 곡은 혼자 만든 곡이고 나머지는 황성제 프로듀서와 만들었다. 많아야 세 곡 정도에 참여했던 이전 앨범에 비하면 박정현이 본격적인 싱어송라이터의 길에 들어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Funny Star', '믿어요', 'Hey Yeah', 세 곡은 이미 오래 전에 만들어두었던 곡들이다. 제목은 '순간'의 가사인 'I come to where you are'를 변형시킨 것이다. 인터뷰 당시 박정현은 어쿠스틱 공연(3월 26일~30일)을 준비 중이었다. 뜻하지 않게 공연 날짜가 10년 전 데뷔앨범 발매일(3월 27일)과 겹쳐 10주년 기념공연이 돼버렸다.
"어떤 팬이 10년 전 3월 27일 제 데뷔앨범이 발매됐다고 알려주셔서 그제서야 데뷔 10주년이 되는 날이라는 걸 알게 됐죠. '늘 푸른'의 의미로 시작한 공연이지만 이제 '늘 처음처럼' 혹은 '늘 지금처럼' 같은 의미로 넓어졌어요."
음악에 대한 한결같은 열정으로 10년간 노래한 박정현에게 가장 좋아하는 보컬리스트의 앨범 다섯 장을 꼽아달라고 부탁했다.
글 / 고경석 기자 (Ticket link)
박정현이 첫 번째로 선정한 앨범은 단 두 장의 앨범을 발표하고 미국으로 돌아간 여자가수 앤의 데뷔 앨범 [Infinite Wave of Love]다.
"국내 여자 가수 중에는 최고의 목소리를 갖고 있는 것 같아요. 들을 때마다 소름 끼쳐요. 미국에서 만든 데모 테이프를 우연히 듣게 됐는데 목소리의 주인공이 흑인인줄 알았어요. 재미 교포라는 말을 들었을 때도 '정말?' 하고 안 믿었으니까요." 앤의 국내 데뷔 전까지 두 사람은 전혀 모르는 사이였다. "제가 4집으로 활동하던 때여서 방송국에서 한두 번 만난 적이 있어요. 같은 영문학 전공이라서 소설 이야기를 많이 나눴죠. 혼자 한국에 와서 활동하느라 무척 외로워했던 기억이 나요. 앨범이 그다지 잘 안돼서 안타까워하면서도 돌아갈 수 있어 좋아했었죠."
조용히 데뷔 앨범을 내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간 앤은 2년 후 박효신, 윤도현, 윤미래, 김조한, 김현철 등이 참여한 두 번째 앨범으로 활동을 재개했지만 이 역시 뛰어난 완성도에 비해 별다른 반향을 이끌어내지는 못했다. 데뷔앨범에 수록된 '아프고 아픈 이름'과 'Memories'를 들어보면 박정현이 안타까워하는 이유를 금방 알 수 있다. 더 아쉬운 건 두 앨범 모두 국내에서 구하기 힘든 품절 음반이라는 점이다.
박정현이 두 번째로 추천한 가수는 김조한이다. "표현할 수 있는 폭이 정말 넓은 가수예요. 지난해 말에 나온 [Soul Family with Johan]을 추천하고 싶어요. 자기 스타일로 부른 곡도 많지만 예전에 시도하지 않았던 발라드 가요도 잘 소화했더라고요. 김형석 씨가 작곡한 '먼 행복'이 특히 그래요. 예전 같았으면 소화하기 어려웠을 텐데, 한국에서 활동하면서 음악도 계속 발전하는 것 같아요. 어머니를 위해서 만든 '안녕'이란 노래를 들었을 때는 눈물도 났어요."
박정현이 김조한의 보컬에 높은 평가를 내리는 것은 R&B 창법이 연습을 통해서가 아니라 타고난 것이라는 점 때문이다. "노래하는 입장에선 어떤 가수들의 노래를 들을 때 '아, 이 친구 노력 많이 했구나'라고 느끼기도 하는데 김조한 씨는 본능적인 것 같아요. 그런 경우는 정말 드물거든요. 예전에 여럿이서 함께 잠깐 노래방을 간 적이 있어요. 거기서 김조한 씨가 누군가의 부탁으로 레이 찰스의 'Georgia on My Mind'를 부르는데 정말 소름이 끼쳤어요. 노래하는 입장에선 도저히 따라가려 해도 따라갈 수가 없는 보컬리스트예요."
잠시 팝 뮤지션으로 화제를 돌렸다. 박정현은 주저 없이 스티비 원더를 꼽았다. 좋은 앨범이 너무 많다며 예전 노래도 있고 최근 노래도 있는 베스트 앨범 [The Definitive Collection]을 추천했다.
"우리 세대 이후 이런 목소리가 사라지면 정말 슬플 것 같아요. 전 스티비 원더가 최고의 보컬리스트라고 생각해요. 사실 어릴 때는 'I Just Called to Say I Love You'를 부른 사람이라고만 알았죠. 제대로 알게 된 건 한국 데뷔 후에요. 한국 활동 후에 UCLA에서 컬럼비아로 학교를 옮겨 뉴욕으로 이사간 지 얼마 안 된 때였어요. 친구 집에 놀러갔는데 친구 룸메이트가 DJ라서 스티비 원더 LP를 계속 틀며 디제잉 연습을 하고 있었어요. 그때 들었던 게 'Happy Birthday'였는데 들으면서 정말 펑키하고 세련됐다고 생각했어요. 누굴까 했는데 바로 스티비 원더더라고요. 그 후에 'Lately'나 'I Believe' 같은 곡을 정말 좋아하게 됐죠."
인터넷 검색창에 '박정현'과 'Lately'만 치면 어렵지 않게 그녀가 부르는 'Lately'를 들어볼 수 있다.
네 번째는 우리나라 남자가수다. 박정현이 데뷔앨범에서 '사랑보다 깊은 상처'를 함께 부른 임재범이다.
"듀엣 녹음할 때 잠깐 만난 게 전부예요. 그 전부터 팬이었죠. 한국에 처음 왔을 때 당시 제작자가 자신이 듣던 앨범을 몇 장 던져주셨는데 그때 있었던 게 임재범 씨 2집 앨범이었어요. 앨범 사진 보고 정말 멋있다, 잘생겼다 생각했는데 막상 만나니까 너무 무서웠어요. 덩치도 큰데 산에서 막 내려온 것처럼 수염과 머리를 길게 기른 상태였거든요. 목소리도 아주 낮잖아요. 기가 뿜어져 나오는 분이죠. 그래도 오랫동안 알던 오빠처럼 친절하게 대해주셔서 무척 편하게 작업했어요. 좋은 기억이죠. 그 후로 만난 적은 별로 없어요. 3집 작업하실 때 제게 영어 가사 부탁하신 적이 있어서 해드린 것 빼고는요."
박정현은 라디오 방송에서 들었던 임재범의 노래를 떠올리며 찬사를 이어갔다. "엘튼 존의 'Sorry Seems to be the Hardest Word'를 듣는데 정말 원래부터 자기가 부른 노래처럼 부르셨어요. 그건 정말 힘든 일이거든요. 임재범 씨는 음폭도 엄청나요. 보통 남자들은 임재범 씨 노래를 절대 소화 못하죠. 저도 같이 부를 땐 남자 음정으로 부를 정도니까요."
마지막으로 선택한 가수는 다소 뜻밖이었다. 가창력과 바로 연결되는 가수는 아니기 때문이었다.
"노래 잘하는 가수는 너무 많죠. 하지만 개인적으로 추천하고 싶은 가수는 켈리 클락슨이에요. 셀린 디온 이후 속 시원하게 노래 잘하는 여자가수는 처음인 것 같아요. 편한 목소리인 데다 여러 장르를 완벽하게 소화해요. 신기한 건 텍사스 출신이라 컨트리나 록만 잘하는 줄 알았는데 리듬을 쪼개는 팀버랜드 스타일의 R&B도 정말 잘 부르더라고요. 다양한 장르를 어색하지 않게 잘 소화해내는 재능이 있어요. 진성의 음역이 높아서 높게 지르는 데도 목소리가 자연스럽죠. 저는 음이 올라가면 목소리가 얇아지는데 이 친구는 똑같이 굵어요. 그건 도저히 흉내 못 내겠더라고요."
켈리 클락슨은 평범한 옆집 소녀 같은 이미지와 폭발적인 젊음의 에너지를 동시에 갖고 있는 가수다. 박정현이 켈리 클락슨을 좋아하는 이유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자기가 가질 수 없는 남의 것이 더 매력적으로 보이기도 하잖아요. 목소리도 그래요. 제가 할 수 있는 한 다양하게 불러보기도 하지만 정말 제가 가질 수 없는 목소리는 듣는 걸로 만족하죠. 나 대신 내 마음을 표현해주는 느낌이랄까.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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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켈리클락슨이 가창력과연결이 안되다니 말도 안됨 켈리클락슨같이 여러장르를 잘부르는 가수도 없을낀데... 물론 우리 정현님도 여러장르 잘부르긴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