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6월 국내에 번역 출간된 <서른에서 멈추는 여자>, <서른부터 성장하는 여자>는 7개월 만에 8만 부 넘게 팔렸다. 이 책은 의류브랜드 유니클로 점장, 기모노 강사, 웨딩 코디네이터 등을 거친 일본의 여성 자유기고가 아리카와 마유미(有川由美)가 쓴 자기계발서다. 일본에선 2010년에 나와 1만 부도 채 팔리지 않은 무명의 책이다. 이 책을 낸 김보경 웅진지식하우스 대표는 여성고용률이 일본보다 낮은 한국에서 독자들이 폭발적 반응을 보여 저자도 깜짝 놀랐다고 전했다.
20, 30대 여성을 위한 자기계발서가 상한가다. 지난해만 봐도 여성 자기계발서 시장의 온도가 느껴진다. 리더십·스피치 강사인 김미경의 <언니의 독설 1, 2>가 10만 부, 미국 ABC뉴스 서울지국장 조주희의 <아름답게 욕망하라>가 2만 부 팔렸다. 1위 <서른에서 멈추는 여자>까지 합치면 세 권 판매량만 20만 부다. 여성들은 왜 이런 책에 관심을 가질까. 부쩍 커진 여성 자기계발서 시장을 들여다봤다.
여성 독자를 위한 자기계발서가 본격적으로 등장한 건 2006년부터다. <여자의 모든 인생은 20대에 결정된다>(남인숙)와 <여자생활백서>(안은영)가 기폭제가 됐다. 주로 연애와 일의 양립, 연애와 결혼을 바라보는 시각, 실전연애법 등을 다룬 이 두 권은 각각 50만, 37만 부를 넘기면서 이 분야의 바이블로 자리 잡았다. 이어 <꿈이 있는 아내는 늙지 않는다>(김미경), <여자의 인생은 결혼으로 완성된다>(남인숙) 등이 뒤따르면서 시장은 몸집을 불렸다.
인터넷서점 예스24에 따르면 자기관리 분야 베스트셀러 100위권에서 여성 자기계발서가 차지하는 비중은 지난해 12%였다. 2006년 이전까지만 해도 2~3%에 불과했다. 대기업 차장인 김나연(39)씨는 자기개발서를 한 달에 한두 권 구입한다. 관심 분야는 여성 리더십이다. 그는 남자는 그냥 아는데 여자는 배워야 하는 회사 대화법을 예로 들면서 회사 안에선 마땅히 물어볼 만한 여자 선배가 없었는데 남녀의 화법과 업무 스타일, 사고방식의 차이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여성용 자기개발서를 가장 많이 읽는 층은 김씨 같은 30대 여성이다. 20대 여성들이 뒤를 쫓는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말 현재 20∼30대 여성 중 경제활동인구는 416만1000여 명으로, 전체 경제활동인구의 16.7%를 차지한다. 서점에 와서 가장 기꺼이 지갑을 여는 손님이기도 한 이들 하이힐 부대는 여성용이 아니더라도 자기계발서 분야에 관심이 많다. 지난해 예스24 자기관리 분야 구매량을 보면 여성 비중(51.7%)이 남성(48.3%)보다 높았다. 2004년엔 59.5%, 40.5%로 격차가 꽤 컸는데 2008년을 기점으로 역전 현상이 일어났다.
이들의 갈증 중 으뜸은 남성 중심 조직에 적응하고 승진하는 방법이다. 기혼 직장여성의 경우 업무와 육아의 불협화음을 최소화하는 것도 관심거리다. 책 제목만 봐도 이들의 더듬이가 어디로 향해 있는지 짐작할 수 있다. <회사가 여자에게 절대로 알려주지 않는 24가지 비밀>, <27살 여자가 회사에서 일한다는 것>, <하이힐을 신고 사다리를 오르는 법>, <직장과 아이, 둘 다 가져라>, <대한민국에서 일하는 여자로 산다는 것>, <회사 생활에 대한 위험한 착각>, <여자 직장인 잔혹사>, <유혹과 조종의 기술>, <여자, 보스 되다>, <여자, 회사를 사로잡다>, <여성 팀장 리더십>, <똑똑한 여우들의 회사생활 다이어리>, <직장에서 가정까지 일하는 여자들을 위한 여왕의 리더십>, <회사가 붙잡는 여자들의 1% 비밀> 등이다.
왜 이런 책이 쏟아져 나오게 됐을까. 이를 이해하려면 독자들의 성분을 볼 필요가 있다. 30대 초·중반이면 출생 연도로는 1977∼82년생이다. 상당수가 해외 어학연수 경험이 있고 인터넷 등 IT 기기와 친숙하다. 이전 세대보다 풍요롭고 자유로운 환경에서 어린 시절부터 남녀의 능력 차이는 없다고 배우며 자랐다. 일 아니면 결혼이 아니라 일도 잘하고 결혼도 잘하고 싶어 한다. 그런데 사회에 나와 보니 듣던 것과 좀 다르다. 조직 분위기는 아직도 남성 위주 질서가 강하다. 관리자급으로 성장한 여자 선배는 드물다.
여자 선배를 보더라도 일도 잘하고 결혼도 잘하기란 쉽지 않아 보인다. 만혼과 고령 출산이 사회적 이슈가 되는 것도 당연하다. 답을 어디서 구할까. 출판칼럼니스트 한미화씨는 남자들은 군복무 경험 등을 통해 사내 정치나 상사 대하는 법을 익히지만 여성에겐 그런 기회가 적다. 딸에게 이런 교육을 시키는 가정도 드물다. 배울 데가 없으니 책에서라도 답을 찾으려는 것 같다고 말했다.
남성과의 경쟁에서 밀리지 않으려는 여성의 자기계발 욕구가 표출된 결과라는 분석도 있다. 김보경 웅진지식하우스 대표는 여성들은 패거리문화와 라인이 없기 때문에 믿을 건 자신밖에 없다는 의식이 강하다. 돌파구를 찾으려는 욕구 중 일부가 자기개발서를 읽는 것으로 나타난 것 같다고 추측했다. 이런 이유로 여성용 자기계발서 중 베스트셀러를 보면 저자가 언니를 자처하는 경우가 눈에 띈다. 소위 언니가 알려줄게 형 자기계발서다. 대표적인 것이 지난해 히트한 <언니의 독설>이다. 저자인 김미경 아트스피치 대표는 아이 셋 낳고 먼저 사회생활 해본 언니로서 거침없이 일하는 동생들에게 충고와 질타를 퍼붓는다. 내용도 상당히 현실적이다.
‘30대 여자들의 문제가 뭔지 알아? 직장생활 시작한 지 이제 5∼6년밖에 안 됐으면서 무슨 대단한 커리어우먼이 된 걸로 착각을 해. 남자들이 40대 중반에나 이루는 일을 자기는 35세나 36세에는 해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야. 조로증에 걸린 거지. 내가 보기에 너는 지극히 정상이야. 서른다섯에 집 없는 게 정상이라고. 제발 30대에 뭔가 이뤄야 한다는 생각을 버려. 네가 몇 년 돈 벌었어? 네 나이에 집을 사면 그게 정상적인 자본주의냐!’
<여자생활백서>도 궁금한 걸 콕 집어 솔직하게 알려주는 언니가 셀링 포인트였다. 20대 독자들을 겨냥해 달라진 성풍속도에 맞춘 파격 조언이 특히 인기를 끌었다. ‘외박은 해도 지각은 하지 마라. 다리털만 밀지 말고 다른 털도 관리하라’ 등이다. 이런 얘기를 일상생활에서 해 줄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책이기 때문에 가능한 가상의 언니 캐릭터가 상담소 역할을 하는 것이다. 출간 한 달여 만에 3만부가량 나간 <어쨌거나 남자는 필요하다>(남인숙)도 서문경이라는 인물을 내세워 남녀 관계를 카운슬링해 준다.
이런 책들은 1990년대처럼 ‘여성이여, 테러리스트가 되라’며 부담을 주지 않는다. 여성성이나 여성만의 특수성을 감안한 충고를 한다. 책 주제가 일뿐 아니라 연애와 결혼·재테크, 심지어 체중감량법까지 다채로운 이유다. 예컨대 ‘일하는 며느리는 시어머니를 파트너로 포섭해라. 최소한 과장 달고 나서 결혼해라. 아이는 승진하고 나서 가져야 하니 고령 임신을 대비해 한약을 먹어둬라’부터 ‘남자를 고를 때 빚은 없는지 시댁의 경제적 도움은 가능한지 먼저 확인해라. 괜찮은 남자를 만나고 싶으면 만만하게 보여선 안 된다’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회사 화장실 변기를 이용해 허벅지살 빼기, 나한테 어울리는 명품 가방 고르기도 빠지지 않는다.
여성 자기계발서의 효과에 대한 반응은 책을 사는 여성들 사이에서도 엇갈린다. <여자의 모든 인생은 20대에 결정된다>의 남인숙 작가는 하도 많이 읽어 너덜너덜해진 책을 갖고 와 고맙다고 말하는 독자들을 많이 만났다고 말한다. 밑줄 그은 책 사진을 올리며 공감을 표하는 독자 리뷰도 적지 않다. 반면 내 상황에 맞지 않는 내용이 많고 실속 있게 열심히 살라는 메시지가 공허하다는 반응도 상당수다. 많이 팔린다고 해서 자기개발서를 사 읽는 여성 독자들의 반응이 다 뜨거울 거라고 단정하긴 어렵다는 얘기다. 그보다는 현실적 도움이 되지 않더라도 반복해서 읽는 가운데 실천을 다짐하게 만드는 자기응원, 자기확신이 필요해 자기개발서에 지갑을 열게 된다는 의견이 설득력 있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