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역사상 최악의 전염병은 무엇일까?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에이즈(AIDS)를 맨 먼저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지금처럼 의학이 발달하기 이전에는 그 파급력이며 파괴력 모두에서 에이즈를 능가하는 전염병이 수두룩했다. 가령 결핵이나 홍역, 콜레라나 말라리아가 그랬으며, 최근까지도 여러 가지 변종으로 전 세계를 긴장시킨 인플루엔자가 그랬다. 14세기 중반, 유럽 인구의 3분의 1을 몰살시키며 악명을 떨친 흑사병(페스트)도 빼놓을 수 없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최악은 아마 천연두일 것이다. 1979년에 이르러 공식적으로 근절되기는 했지만, 20세기에만 해도 천연두 사망자는 최소한 3억 명 이상에 달했을 정도다.
천연두의 길고도 무시무시한 역사
천연두의 역사는 사실상 인류의 역사나 마찬가지다. 기원전 3000년경의 것으로 보이는 고대 이집트의 미이라에서도 그 흔적이 나타났을 정도다. 인도에서는 기원전 1500년경, 중국에서는 기원전 1100년경에 천연두로 추정되는 질병에 관한 기록이 나왔다. 천연두의 창궐은 종종 중대한 역사적 사건으로 이어졌다. 유럽 각국에서는 군주나 왕족이 천연두로 갑작스레 사망한 후, 누가 왕위를 계승하느냐 하는 논란이 정치 및 외교 문제로 비화되는 일도 있었다.
16세기에 아즈텍 문명이 소수의 에스파냐인 침략자에게 맥없이 무릎을 꿇은 배경에도 천연두가 있었다고 설명된다. 유럽인과 달리 신대륙 사람들은 이 끔찍한 전염병에 대한 면역력이 전혀 없었던 까닭이다. 천연두에 걸리면 고열과 함께 얼굴과 손발을 비롯한 온몸에 물집이 잡힌다. 차차 시간이 지나면서 물집에는 고름이 차오르고, 결국 딱지가 앉았다가 떨어지면 피부에는 움푹 들어간 흉터가 남는다. 흔히 ‘곰보자국’이라고 부르는 흉터다.
천연두는 치명적인 질병이기도 하지만 운 좋게 회복된다 해도 얼굴에 흉한 상처를 남겼다. 그러다가 18세기에 영국에서 안전하고 효과적인 예방법이 개발됨으로써, 인류는 천연두와의 싸움에서 일단 유리한 고지를 확보하게 되었다. 그 쾌거의 주역은 바로 에드워드 제너라는 영국의 의사였다. 하지만 제너가 종두법의 원리를 사상 최초로 발견한 인물은 아니었다. 정확한 기원을 알 수는 없지만, 천연두 균을 이용한 면역 방법은 그보다 훨씬 이전부터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18세기 초에 영국의 여성 작가 메리 몬터규는 외교관인 남편을 따라서 이스탄불에 한동안 체류했는데, 이때 한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종두법에 관해 자세히 기록한 바 있었다.
천연두가 역사상 최악의 전염병인 까닭은 높은 치사율뿐 아니라 외모 손상도 심하기 때문. 1912년 미국의 천연두 환자.
“우리들에겐 아주 흔하고 치명적인 천연두가 이곳에서는 전혀 발생하지 않아. 여기 사람들이 ‘접목’이라고 부르는 예방법이 있기 때문이야. (…) 천연두에 걸린 사람의 고름을 (...) ‘접목’ 하겠냐고 물어보지. 그리고는 곧바로 큰바늘로 사람들의 혈관을 째고, 바늘 끝에 얹을 수 있는 만큼의 고름을 집어넣어.” 한때는 사교계의 명사였지만 천연두로 얼굴이 망가져 인기가 떨어졌던 쓰라린 경험 때문인지, 몬터규는 인두 접종을 하면 “얼굴에 흉터가 나는 경우도 거의 없다”는 사실에 열광했다. “이 유용한 방법을 영국에 확산시키기 위해서라면 어떤 어려움도 감수할 생각이야. (...) 내가 아는 모든 의사들에게 이 내용을 자세히 써 보낼 생각이야.” (존 캐리 편저의 [지식의 원전]에서)
몬터규는 우선 자기 아들딸에게 인두 접종을 실시했고, 귀국 직후인 1721년에 영국에서도 천연두가 유행하자 얼른 왕실에 접근해 인두 접종을 적극 권유했다. 처음에는 이 제안을 그리 탐탁잖게 생각했던 왕실에서는 안전을 위해 우선 범죄자와 빈민을 대상으로실시했고, 그로 인해 효과가 입증되자 결국 왕손들에게도 인두 접종을 실시했다. 하지만 천연두는 워낙 무서운 질병이었기 때문에, 예방을 위해 실시한 인두 접종 때문에 도리어 천연두에 걸려 죽는 사람이 종종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등장한 제너의 우두법은 면역 물질을 천연두보다 훨씬 경미한 우두로 바꿈으로써 안전성을 높였다는 점에서 각광을 받았다. ‘종두법’(種痘法)에는 ‘인두법’(人痘法)과 ‘우두법’(牛痘法)이 있다. 천연두를 면역 물질로 사용하는 인두법은 제너 이전부터 있었고, ‘우두(소 천연두)’를 면역 물질로 사용하는 우두법이 바로 제너의 공적이다.
제너의 생애와 우두법의 발견
에드워드 제너는 1749년 5월 17일, 영국 글로스터셔 주 버클리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14세 때부터 외과의사 대니얼 러들로 밑에서 도제로 일하기 시작했으며, 21세 때인 1770년에는 런던의 세인트 조지 병원에 들어가서 당대 최고의 외과의사이며 박물학 연구로도 유명한 존 헌터 밑에서 외과학과 해부학을 배웠다(일각에서는 오늘날과 같은 정규 의학교육을 받지 않았다는 이유로 제너의 실력을 의문시하기도 하는데, 이 당시에만 해도 의료계의 교육 방식이 지금과는 달랐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1773년에 고향으로 돌아온 제너는 일반의로 개업해 성공을 거두었으며, 1788년에는 왕립학회의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당시 영국에서는 부분적으로 인두법이 실시되고 있었고 유럽의 여러 국가는 물론 영국 내의 일부 지역에서도 우두법에 관한 연구가 산발적으로 시도되었다(물론 제너의 연구와는 별개인 것으로 평가된다). 왜냐하면 소젖 짜는 일을 하는 여자들은 이상하게도 천연두에 안 걸린다는 속설이 이미 널리 퍼져 있었기 때문이다. 이를 근거로 제너는 소와 접촉해서 우두를 앓은 사람은 천연두에도 면역력을 갖게 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을 내놓았다. 1796년 5월 14일, 그는 이런 가설을 입증하기 위해 사상 최초의 우두법 실험을 실시했다.
실험 대상자는 제임스 피프스라는 8세 소년이었다. 우두는 새러 넴스라는 이름의 소젖 짜는 여자의 손에서 채취했다(그녀에게 우두를 옮긴 ‘블로섬’이란 암소의 가죽은 훗날 우두법의 발견을 기념하여 세인트조지 의과대학에 기증되었다). 제너는 인두 접종에서 흔히 하는 방법대로, 넴스의 물집에서 뽑은 고름을 피프스의 양팔에 낸 상처에 주입했다(주사기가 발명되기 이전이었기 때문에, 제너는 나뭇조각에 고름을 묻혀서 상처 부위에 문지르는 방법으로 주입했다). 얼마 후에 소년은 우두 증세를 보이며 앓아 누웠다. 머지않아 회복된 피프스에게 다시 천연두를 주입했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자, 제너는 이를 토대로 우두에 천연두 예방 효과가 있음을 확신했다.
이후 제너는 23명을 대상으로 우두접종 실험을 재현했고, 그 결과로 그의 이론은 더욱 설득력을 얻게 되었다. 제너는 이 연구 결과를 ‘바리올라에 바키나에, 일명 우두의 원인과 영향에 관한 연구’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작성해서 왕립학회에 제출했으며, 수정과 보강을 거쳐 1798년에 정식 간행했다. 제너는 영어의 ‘우두’(cowpox)를 라틴어로 ‘바리올라에 바키나에’(Variolae vaccinae, 소 천연두)라고 표현했는데, (라틴어의 ‘바카’(vacca)는 ‘소(牛)’라는 뜻이다)여기서부터 ‘예방접종’(vaccination)과 ‘백신’(vaccine)이라는 단어가 비롯되었다.
제너가 우두법을 개발하자 한때 “소 고름을 맞으면 사람이 소로 변한다”는 헛소문이 돌았다.
당시 사람들이 느낀 공포를 재치 있게 풍자한 제임스 길레이의 만평(1802년 작).
하지만 종교계(그리고 의료계 일부)에서는 우두법을 반대했다. 하느님이 천벌로 내린 전염병을 인간이 극복한다는 것은 신성모독이라는 주장이었다(이후 매독을 비롯해서 여러 가지 전염병의 치료법이 발견될 때마다 유사한 논리가 재차 등장하곤 했다). 한편으로는 “소의 고름을 사람한테 넣는다”는 사실에 대한 거부감도 확산되어, 심지어 우두 접종을 받으면 사람이 소가 된다는 헛소문까지 나왔다. 접종 과정에서 위생 문제로 인한 부작용이 종종 생긴 것도 우두법의 악명을 높이는 데 일조했다. 하지만 천연두라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질병인지를 기억한다면 어느 누구도 결코 제너의 업적을 함부로 폄하할 수는 없으리라.
수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우두법은 전 세계로 신속히 퍼져 나갔다. 제너의 논문이 발표된 지 불과 몇 년 뒤에는 멕시코, 필리핀, 중국 등 지구 반대편에 위치한 여러 국가의 오지에서도 우두 접종이 실시되었다. 미국의 작가이며 사서인 로버트 B. 다운스는 제너의 논문을 ‘세계를 바꾼 책들’ 가운데 하나로 선정한 바 있는데, 한때 천연두가 그랬던 것처럼 우두법이 이후의 역사에 끼친 영향을 생각해 보면 충분히 일리가 있다. 가령 1805년에 나폴레옹이 전쟁을 앞두고 전군에 우두접종을 실시하지 않았더라면, 오늘날 세계의 역사는 전혀 의외의 방향으로 흘러갔을 수도 있었으리라.
이후 제너는 일반의로서의 활동을 포기하다시피 하고 우두접종법 연구에만 전념했고, 영국 정부와 의료계에서는 이를 위해 거액의 후원금을 내놓았다. 1803년에는 천연두 백신 보급을 위한 ‘제너 연구소’가 설립되었고, 이 기관은 1808년에 ‘영국 국립 백신 연구소’로 이름을 바꾸었다. 고향과 런던을 오가며 천연두 백신 연구를 지속하던 제너는 1821년에 국왕 조지 4세의 특별 시의로 임명되는 영예를 누렸고, 고향 버클리에서는 시장과 치안판사를 역임했다. 1823년 1월 25일, 제너는 갑자기 뇌졸중을 일으켰고, 이튿날인 26일에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73세를 일기로 고향 버클리에서 사망했다.
천연두의 근절
토머스 제퍼슨은 1806년에 제너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귀하는 인류 역사에서 가장 심각한 질병을 퇴치했습니다. 우두법으로 인해 인류는 귀하의 존재를 영원히 기억할 것입니다. 미래의 후손들은 역사 속에 천연두라는 끔찍한 질병이 존재한 바 있으며, 또한 귀하가 그것을 박멸했다는 사실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 (로버트 다운스의 [교과서가 죽인 책들]에서) 하지만 제퍼슨의 낙관은 너무 때 이른 감이 없지 않았다. 비록 천연두를 퇴치할 강력한 무기가 생기긴 했지만, 오늘날처럼 저렴한 백신이 대량 보급되지 못하는 상황에서는 천연두 사망자는 여전히 많았다. 가령 제너의 활동 시기인 18세기에만 해도 유럽에서 천연두로 목숨을 잃은 사람은 6천만 명에 달했다.
외국에서는 각광받았던 우두법이 유독 제너의 고국인 영국에서는 의외로 찬밥 대접을 받았다. 그러다가 제너의 사후인 1840년대에 들어서야 영국에서도 위험한 인두법을 금지하고 상대적으로 안전한 우두법을 무료로 실시하는 법률이 마련되었다. 18세기 초에 들어서야 천연두 퇴치에 관심을 보인 유럽과 달리 중동과 아프리카, 그리고 북아메리카 일부 지역에서는 오래 전부터 인두법이 전해지고 있었다. 우리나라에는 1880년에 지석영이 우두법을 도입했지만, 그 이전부터 인두법이 민간요법으로 실시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가령 중국에서도 11세기경에 인도를 통해 인두법이 전래되었다고 하니, 어쩌면 우리나라에서도 천연두와의 전쟁은 꽤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1960년대부터 천연두 근절을 목표로 삼은 세계보건기구(WHO)는 1979년 말에 이르러 천연두가 지구상에서 사실상 없어졌다고 발표했다.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이 무서운 질병을 정복했다는 것은 대단한 위업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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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 박중서 | 출판기획자, 번역가
- 글쓴이 박중서는 [약소국 그랜드 펜윅] 시리즈인 [뉴욕 침공기]와 [월스트리트 공략기] 등 수 십권의 책을 우리 말로 옮긴 번역가다. 1만권이 넘는 책을 소장했으며, 독서 관련 칼럼을 쓰고 있다. [불굴의 용기], [끝없는 탐구] 등 인물 논픽션을 번역했으며 외국 인물들에 대해 관심을 갖고 꾸준히 소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