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전자·조선업계…
"단가 낮춰" 후려치기 여전, 품질 저하로 '리콜' 등 우려
협력업체만 쥐어짜 놓고 대기업은 '성과급 잔치'
현대기아자동차그룹의 한 계열사는 지난해 12월 10여개 협력업체에 공작기계 부품의 납품 단가를 일률적으로 6% 삭감하겠다고 통보했다. 협력업체들은 처음엔 "단가를 5% 인상해도 본전 맞추기 빠듯한데 6% 일률 삭감은 지나치다"고 반발했다. 하지만 이들 업체는 대기업의 일방적 인하 요구에 굴복, 결국 지난 1월 중순 '단가 3% 인하와 1월 소급 적용' 조건의 계약서에 서명했다. 협력업체 A사 사장은 "특정 대기업과 CR(코스트 리덕션·비용절감)에 합의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다른 대기업도 단가를 낮추자고 난리를 친다"면서 "대기업에 납품하려면 이런 불이익을 당해도 속으로 앓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현대자동차·삼성전자 등 지난해 사상 최대 실적을 거둔 국내 대기업도 일본 도요타자동차가 겪고 있는 '원가 절감 부메랑'의 직격탄을 맞을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도요타가 원가 절감에 주력하다 리콜사태를 맞은 것처럼, 한국의 대기업들도 '협력업체 쥐어짜기'식 원가절감 관행에서 벗어나지 못할 경우 위기를 맞을 수 있다는 것이다.
◆상생 구호 높지만 단가 후려치기 여전
세계 최대 자동차 업체로 부상한 도요타가 가속 페달 결함 등으로 순식간에 '글로벌 문제아'로 전락한 것은 원가 절감에 주력하다 벌어진 참사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원가 절감을 위해 부품 단가를 끊임없이 낮추는 과정에서 협력업체가 납품하는 부품의 품질 관리에 누수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이런 '도요타식 참사'가 언제라도 국내 기업을 덮칠 수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최근 이명박 대통령까지 대·중소기업의 상생(相生) 협력을 강조했지만, 일부 대기업이 글로벌 경쟁력 확보를 명목으로 협력업체만 쥐어짜는 관행이 여전하기 때문이다.
◆대기업의 단기 성과주의가 요인
정몽구 현대기아차 회장이 최근 "올해는 품질 관리를 위해 납품단가 인하를 하지 마라"고 지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협력업체들은 이 같은 방침이 실제로 지켜질지에 회의적 반응이다. 서병문 주물공업협동조합 이사장은 "정 회장이 과거에도 납품단가 인하를 무리하게 추진하지 않겠다고 여러 차례 공언한 적 있다"면서 "하지만 팀별·부문별 실적 관리 압력에 시달리는 대기업 구매 실무자들이 여전히 사생결단식으로 단가 인하 압력을 행사하고 있다"고 말했다.
최근 어떤 대기업은 원자재 가격과 납품 단가 연동제를 도입했다. 하지만 생색내기라는 비판도 적지 않다. 원자재 가격이 내리면 곧바로 단가를 삭감하면서도, 원자재 가격이 오르면 최대한 단가 인상을 늦추는 '조삼모사(朝三暮四)식 단가 삭감'이 비일비재하다는 것이다. 서병문 이사장은 "주물업체들이 지난 2008년 원자재 가격 상승으로 납품 거부에 나설 때 현대차가 마지못해 납품가 인상 요구를 받아들인 뒤 같은 해 완성차 가격을 2% 정도 올린 적이 있었다"면서 "이후 현대차가 원자재 가격 인하를 이유로 납품 단가를 끊임없이 내렸지만 차량 가격을 내렸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다"고 말했다.
이런 납품 단가 후려치기는 전자·조선산업에도 만연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 중소기업체 사장은 "대형 조선업체들이 지난해 경기 침체로 수주 물량이 줄자 '덤핑 수주'에 나선 뒤 이에 따른 손해를 중소기업에 고스란히 떠넘겼다"면서 "고통 분담을 내세우며 납품 단가를 단번에 30% 삭감한 경우도 있었다"고 주장했다.
◆중소업체들의 설움
A그룹은 얼마 전 1조원이 넘는 성과급을 직원들에게 풀었다. 사상 최대 실적 달성에 대한 보상이었다. 하지만 협력업체들은 막대한 성과급 지급 소식에 맥이 풀릴 수밖에 없었다. 한 협력업체 사장은 "그 회사의 1인당 성과급이 우리 회사 직원 연봉에 버금간다"면서 "납품 단가 인하로 적자에 허덕이는 협력업체가 적지 않은 상황에서 대기업만 성과급 잔치를 벌이는 것 같아 씁쓸했다"고 말했다.
실제로 A그룹 계열 부품사들은 고속 성장을 거듭하고 있지만, 협력업체들은 생존마저 급급한 상황이다. 산업연구원이 현대차의 경우를 분석해보았다. 현대차 계열 11개 부품업체와 비계열 31개 부품업체의 영업이익률을 분석한 결과, 현대차 계열사의 영업이익률은 지난해 상반기 10%에 육박한 반면 비계열사는 2.0%에 그쳤다. 현대차가 사상 최대 실적을 거두는 동안 울산 지역 현대차 협력업체 대여섯 곳은 지난해 줄줄이 부도를 맞기도 했다. 한 협력업체 사장은 "현대차가 2~3% 영업이익률을 보장해 준다고 하지만, 은행에 이자를 내고 나면 사실상 적자"라면서 "생존도 급한 상황에서 연구·개발이나 시설 투자는 꿈도 못 꾼다"고 말했다.
이항구 산업연구원 자동차산업팀장은 "협력업체 직원들의 평균 연봉은 현대기아차그룹의 3분의 1 수준"이라면서 "완성차의 품질은 결국 협력업체 경쟁력에 좌우되는데 대·중소기업 간 불균형이 장기화되는 상황에서 완성차 업체만 홀로 살아남을 수 없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