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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년 12월 21일 동지 지나 한겨울 날씨치곤 눈도 안오고 따뜻하고 이와 같이 좋은 날이 없었다.
원년 교우였던 이은숙님과 김형운님, 윤유순 권사님이 참여하셨다.
변함없이 귀신사 가섭사 꽃화분이 도착하고 귀신사의 축하떡과 헌금을 보내주셨다.
◈예수의 탄생과 메시지: 영적, 사회적 해방
- 크리스마스의 의미를 예수의 탄생과 연관 지어 탐구하고, 예수의 삶과 죽음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제시한다.
- 세례 요한의 이야기를 통해 예수의 리더십과 현실 세계에 대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점을 강조한다.
- 영적 해방과 사회적 해방의 개념을 구분하여, 사회적 해방의 어려움을 위정자들의 장벽으로 설명한다.
◈ 신앙의 진화 과정: 요한과 그리스도
- 인류 역사는 회피와 외면의 과정이었으나, 이제 해방의 시대가 도래했다는 주장.
- 요한의 삶을 예수의 탄생 설화와 대비하여 신자의 성장 과정(신자→예언자→그리스도)을 제시.
- 광야에서 수도하는 삶, 고난을 통한 성숙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받는 모습으로 해석.
◈ 분열된 형제들의 신앙 여정
- 흩어진 형제들의 기독교 신앙의 현황과 요한의 삶을 통한 예수의 삶으로의 회복 과정을 논의.
- 그리스도의 삶의 이전 과정으로서 광야의 삶, 정치적 광야의 삶을 언급하며 현재 상황과의 연관성 제시.
- 이현필과 유영모 선생의 제자들의 공동생활과 대속신앙 수용 여부에 따른 분열의 원인 분석.
◈ 예수의 탄생과 십자가: 기쁨과 슬픔의 조화
- 예수의 탄생과 십자가의 의미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존재함을 논의.
- 십자가의 의미를 단순히 슬픔으로만 해석하는 것에 대한 비판적 시각 제시.
- 크리스마스의 기쁨과 예수의 희생이라는 슬픔의 공존에 대한 고찰.
◈ 예수 탄생의 역설: 슬픔과 기쁨의 공존
- 예수의 탄생은 슬픔과 기쁨이 뒤섞인 역설적인 사건으로 묘사된다.
- 예수의 죽음을 위한 희생과 그 죽음을 통한 미래에 대한 슬픔과 기쁨이 공존한다는 내용이 언급된다.
- 하나님을 위한 희생과 기쁨, 민중을 위한 희생과 기쁨이 공존하는 성숙한 신앙을 강조한다.
◈ 역설의 삶과 하나님의 사랑
- 하나님을 쫓는 삶과 광야의 고통스러운 삶이 공존하는 역설적인 삶에 대한 논의.
- 광야의 삶이 하나님의 극진한 사랑을 받는 모습이라는 성경적 역설 제시.
- 이러한 역설적 삶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성장과 진보를 위한 기도 내용 포함.
저는 이제 오늘의 크리스마스는 누구의 생일일까 이런 생각을 해봤어요, 예수의 생일이죠. 네 이게 저는 그렇게 느껴지는 거야, 우리의 생일이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우리 교회가 이를테면 이제 오래된 그런 도그마의 틀을 빼고 예수 믿고 천국을 들어가는 도그마를, 에수처럼 되는 그길을 택한다고 하는 것은 그것이 저는 복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의 복음은 하나님을 믿고 어떻게 되는 게 아니고 하나님이 되는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굉장한 도전이다.. 그리고 전부 우리가 예수처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처럼 돼야 되기 때문에 주님의 생일이기도 하면서 우리의 생일이기도 하다. 오늘 본문은 알다시피 세례 요한의 대한 이야기 얘긴데 그 내용은 예수의 이야기죠. 이분이 오시면 이러실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시지 않습니까? 어 다른 부분에 비해서 이 사가랴의 예언은 확실히 참 난해하다.
현실 세계에 대한 그런 복음 그런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고 생가합니다. 그동안 예수가 태어나기 전에 많은 분들이 예수의 삶을 예언했어요. 사가랴 뿐만이 아니고 시므온, 안나, 가브리엘 천사 이런 어 존재들이 예수가 어떻게 살 것이냐 어떻게 죽을 것이다 어떤 일을 할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했는데 시므온은 이제 슬픈 예언을 한다. 핍박을 하는 것이죠 어 그러나 사가랴는 정신적인 그런 그 고통 속에 있는 민중들 속에 있었기 때문에 이런 예언을 한 것 같아요. 우리를 원수의 손에서 구하고 해방시켜 줄것이다 이렇게 이해를 합니다. 영적인 해방과 이런 세 세상의 물질적인 해방은 사실은 둘이 아니다
어 성속불여라고 그러죠. 그런데 이게 인제 어느 시대 때부터인가 이게 나눠서 생각을 하기 시작했어요. 왜냐하면 영적인 해방은 개인의 노력에 의해서 해탈할 수 있지만 사회적 예방 너무나 두터운 위정자들의 벽이 가로막이기 때문에 이것을 우회하거나 또는 외면하거나 하면서 어 인간의 역사가 지속되었다. 인간은 점점 해방되고 있고 이 해방되고 있다고 하는 것이 하느님의 손길이에요. 이게 예수께서 그 일을 하러 오신다라고 하는 예언이다.
이렇게 생각을 하거든요 예수의 탄생 설화는 여러분 너무 잘 아시기 때문에 그래서 예수의 탄생 설화는 요한의 탄생설화를 거쳐야 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우리는 신자에서 요한과 같은 예언자로 진화해 나가야 되고 예언자에서 그리스도로 진화해 나가야 된다고 믿습니다. 요한도 비참한 최후를 맞지만 그러나 잘하는 모습을 보면 두 가지 모습이 있죠 하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면서 자라요. 어 근데 그 어디서 삽니까? 빈들에서 산다고 광야에서 살았다.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면서 낙타 털옺을 입고 가면서 산다. 이런 전형적인 사막의 수도자의 모습입니다.
그러니까 세속 생활을 하는 일반인 신자들이 이 과정을 거쳐요. 수도하는 그 과정을 거쳐서 그 다음에 메시아의 그런 얘기들을 나눠 봤습니다. 지금 그리스도교는 아직 어린 아이 같아서 예수를 믿고, 그를 의지하고 그 대속에 어떤 대속의 어떤 산물로 생활을 이렇게 살아갈려고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게 편하고 쉽기 때문에 어 낙타털옷을 입고 메뚜기를 먹으면서 살아갈려고 하지 않아요.
그런데 이렇게 광야에서 거친 삶을 살아가는 모습이 하나님의 사랑을 극진한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모습으로 표현합니다. 어 그러니까 광야에서 이렇게 시험 받고 주의 길을 예비하는 수도사의 모습이 하느님의 눈으로 보면 어떤 믿는 자의 눈으로 보면 그것이 극진한 사랑의 모습이라는 거죠. 어 물론 이렇게 세상에서 살아가는 신자의 모습이 뭐 덜떨어졌다. 이런 이야기는 아니고 이렇게 과정과 단계가 있습니다, 하는님이 우리가 어 지금 이제 많은 형제들이 흩어져 있어요. 이제 기독교를 졸업을 했거나 아니면 대학원 가야 되는 게 들어가지고 이 하위 기복적인 기독교 신앙에 신물이 난다. 이런 분들이 제가 알기로 한국에 600만 명이었습니다.
이제 그의 마음은 뭔가를 향하고 있는 거지. 그런데 이게 어디를 향하고 있냐면 정확하게 요한의 삶을 향하고 있어요. 본인을 모르는데 흩어진 우리의 형제들이 요한의 삶을 통해서 예수의 삶으로 이렇게 들어오게 되어 있습니다.
과정이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오늘 말씀드린 그런 요한의 삶들은 앞에 이렇게 구세주에 여러 가지 원수들에게서 구원하고 우리를 해방시키는 그리스도의 삶의 이전 모습입니다. 바로 앞에 이를테면 해방은 어 광야의 빈들에서 사는 삶을 거쳐서 이제 우리가 지금 무슨 계엄같은 뭐 말도 안 되는 상황을 겪고 있는데 지금이 우리가 정치적으로 이제 광야에 있는 삶 이것을 우리가 철저하게 견뎌내지 않으면 민주주의가 뽑히는 뭐 그런 어 해방된 세상을 우리가 얻을 수가 없다. 이런 것도 마찬가지로 예수의 생일이 곧 우리의 생일이고 요한의 생일이 곧 우리의 생일 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우리가 믿습니다. 그 이현필 선생의 제자들이 있는데 그분들은 공동 생활을 하면서 살았어요. 근데 이현필과 유영모가 유영모 선생이 예 어쨌든 신앙과 철학이 좀 맞아 떨어졌습니다.
그래서 두 분이 굉장히 친하게 지내죠? 근데 색깔이 너무 다르기 때문에 같이 살지 못해 근데 유영모와 이현필 선생의 제자들이 끝까지 함께하지 못하는 이유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대속 신앙예요 유영모는 예수의 대속신앙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현필의 제자들은 예수의 대속을 빼버리면 우리가 뭐가 나옵니까 이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이 유영모 선생은 예수의 대속이나 처녀 탄생을 도외시 하더라도 어 그분은 예수를 받아들일 수 있는 그런 이제 품이 있었던 것이죠, 대속은 사실 신비주의 신화로 보면 신비주의학으로 보면 대속 내가 누가 누구를 위해서 이렇게 까르마를 짊어지고 죽는다 하는 그런 대속은 굉장히 심오한 비밀이다. 그 데속이 있다 없다를 이야기하기 전에 우리의 입장은 모른다입니다. 너무 깊은 비밀이 숨어 있기 때문에 어 그 믿어서 될 일이 아니고 이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경지에 이르지 않으면 이해할 수는 없는 옛날 동양에서도 고대 인도에서도 대속 신앙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거기에 대해서 말하지 않죠 이것은 하나님의 어전 회의에서나 이루어지는 일들이 그러니까 우리는 십자가의 대속은 없다.
이렇게 말하면 성급한 것이고 우리는 십자가의 대속으로 살아간다 이건 또 성급한 해석입니다. 뭘 기쁜 성탄절 마당에 항상 우리 기장은 옛날에 제가 청년회 할 때 이렇게 성탄절 때 기쁘잖아요. 충장로에서는 어 캐럴이 막 울려 파지고 난리 법석이었어요. 즐거운 그런 행사를 우리는 항상 생각을 했어요, 크리스마스를, 근데 제가 간 교회가 기장인데요. 그래 가지고 어디 즐겁게 크리스마스를 지내려고 하면은 꼭 뭐 너희들은 죽기 위해서 오신 예수에 대해서 그렇게 즐겁냐?.이야기를 하면은 진이 쫙 빠져가지고 아 이거 좀 슬퍼해야 되겠다. 그러다 보니까 이렇게 얼굴이 찌그러들어 가지고 즐거움의 그 크리스마스를 지내 본 적이 거의 없었는데 이게 저는 불행하다고 생각을 합니다. 어 이제 불의라고 하는 것이 기독교에도 있어요. 예수의 탄생은 어른들의 입장으로 보면 예언자의 입장으로 보면 죽으러 가는 것이다.
그래서 슬픈 거지 그렇지만 원수에게서 나를 해방시키러 오셨기 때문에 또한 기쁜 겁니다. 예수의 탄생은 슬픔과 기쁨이 버무라져 있어요? 이 슬픔과 기쁨을 버무리면서 변증법적으로 초월하고 있지.
이러한 탄생이 예수의 탄생이다. 요한도 천사의 그 예언을 받으면서 엄청난 어떤 거룩함으로 태어나잖아요. 그러나 목이 베여 죽어 그러면 그 사람도 죽음을 위해서 온 거거든요. 죽음을 위해서 오는 자들이 예언자들인데 이 애언자의 길이 우리의 길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우리는 슬프다 하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 죽음에 미래가 싫으니까 당신들만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저는 좀 편하게 살게 해 주십시오 이렇게 기도할 수밖에 없어요. 어 그러나 이런 기도는 이를테면 우리를 하나님에게 이르게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런 기도도 하나님께서 허락을 하십니다. 나는 어린아이로 계속 있을 거야. 그래라 그리고 복을 주세요. 저는 좀 커서 당신처럼 보통 고난을 받을게요. 그러면 그렇게 해라. 우리 진달래 교회가 여타 교회와 달리 이 좀 성숙한 그런 어 신앙으로 하느님을 따라간다라고 한다면 이 두 가지 버무린 그런 심정을 항상 가져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하느님을 위한 희생과 민중을 위한 희생과 또 하느님을 위한 기쁨과 민중을 위한 기쁨 이 두 가지가 우리 수업에 같이 있어야 된다.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그런 시각으로 신약 성서를 읽어가면 예수의 마음을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께서 항상 서운해 했던 것이 뭡니까? 제자들이 자신의 마음을 몰라요. 그렇게 사랑했지만 또 삼 년이나 데리고 다니면서 가르쳤지만 제자들이 예수의 마음을 몰라 준다는 것에 대한 서운함이 항상 그의 말씀에 배어 있어요 우리는 예수의 제자들보다는 고급 단계이기 때문에 예수의 마음을 이야기 위해서는 우리 마음속에 하나님을 위한 슬픔과 하느님을 위한 기쁨이 동시에 있어야 된다. 오늘 그 하나님이 탄생한 날이죠.
그렇지만 그 하나님을 쫓아가려고 하는 우리의 생일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생일을 축하하는 것이죠. 또 중간에 우리가 거치고 싶어 하지 않는 광야의 생활도 있습니다.
이 광야의 생활은 거칠고 고통스럽겠죠. 그러나 예언자의 눈으로 보면 이 광야의 삶이야말로 하나님의 극진한 사랑을 받는 모습이다 하는 이런 역설이 우리 성서에 계속해서 관통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성숙한 제자들이 되기 위해서는 그 역설의 삶을 우리의 삶으로 받아들이고 우리 일상에서 그런 역설이 현실화 될 수 있도록 기도 하고 또 강구해야 된다.
주님 어떻게 하면? 예수의 삶을 우리가 살 수 있습니까?. 어떻게 원수의 손아귀에서 이 사람들을 해방시킬 수 있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요한의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우리의 믿음에 측량치 만큼 우리에게 진보를 허락해 주시고 우리가 좀 더 하나님을 향해서 나아갈 수 있도록 용기와 힘을 허락해 주소서.
진달래교우들은 특별한 교우들입니다. 주님 우리 교우들에게 극진한 사랑을 주셔서 빈들에서도 당신만을 사랑하는 자들이 되게 하소서 우리의 몸이 그리스도의 몸으로 살 수 있도록 끝내 축복하여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감사하며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