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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김명숙의 문학향기 원문보기 글쓴이: 목련화
4·19 혁명(四一九革命)은 1960년 4월 대한민국에서 제1공화국 자유당 정권이 이승만을 대통령에 당선시키고 이기붕을부통령으로 당선시키기 위한 개표조작을 하자, 이에 반발하여 부정선거 무효와 재선거를 주장하는 학생들의 시위에서 비롯된 혁명이다.
3·15 부정 선거의 무효와 재선거를 주장하던 시위는 시위대 중의 한 사람으로서 3월 18일경에 실종되었다가 시신에 최루탄이 박힌 채 경상남도 마산 앞바다에서 떠오른 김주열의 시신이 4월 11일 부산일보 허종 기자가 작성한 기사를 통해 공개되면서 더욱 격화되었다.[1] 4월 19일 경찰은 경무대에 몰려든 시위대를 향해 발포했고, 발포 이후 시위대는 무장을 하여 경찰과 총격전을 벌이며 맞서기도 했다. 4월 26일 이승만 대통령은 책임을 지고 하야했으며 부통령 당선자였던 이기붕의 일가족은 사퇴 후 동반 자살했다.
4·19 민주혁명 혹은 4·19 학생운동, 4·19 의거, 4월 의거, 4월 혁명, 미완의 혁명 등으로도 일컫는다. 5·16 군사정변 이후 군사정권에서는 '의거'(義擧)로 불리다가 문민정부부터 다시 혁명으로 승격되었다.[2][3]
1960년 1월말에 민주당 대통령 후보였던 조병옥이 선거 운동 도중 신병 말기라는 판정을 받게 되어 하와이병원으로 급히 갔으나 결국 선거 한달 전인 2월 25일 신병 치료하고 돌아오는 도중에 갑자기 사망하여 이승만이 단독 후보가 되었다.
그러나 민주당의 부통령 후보인 장면은 건재하였고, 이 소식을 듣는 자유당은 부통령에 이기붕을 당선시키기 위해 어느 선거보다도 부정선거활동에 열을 올렸다. 정부로 하여금 공무원을 통한 선거운동망을 조직하고, 전국 경찰에 지시하여 이를 감시독찰하도록 하는[4] 등 선거에 승리하기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하였다.
2월 28일 대구에서 고등학생들이 “학원의 자유 보장하라”, “독재정치, 부정부패를 물리치자”는 구호를 앞세우며 대구 도심에서 시위를 벌였다. 이를 2·28 대구 학생의거라고 부르고 있는데, 이것이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3월 15일 마산에서 부정선거에 대한 규탄 시위가 벌어졌다. 당시 내무부장관 최인규는 무자비하게 강경진압함으로써, 마산 시민들의 분노감은 서서히 달아오르기 시작하였다. 결국 3월 18일 내무부장관 최인규와 치안국장 이가학이 마산사건의 책임을 지고 사임하였고, 내무부장관이 홍진기로 교체·임명되는 등 정국을 수습하려는 노력이 있었다.
4월 18일의 서울의 고려대학교 학생들이 정오에 총궐기 선언문을 발표한 후, 세종로-태평로 일대로 진출해 시위를 벌였다. 하지만, 유진오 고려대학교 총장 등의 만류로 하오 4시쯤 데모를 중단하고, 평화행진을 하면서 귀교하는 도중 신도환의 대한반공청년단 종로구 단장 임화수 등 폭력배들로부터 취재한 기자들 일부와 함께 학생들이 피습된 4·18 고려대학생 피습 사건이 일어났다.[5]
3·15 의거는 이승만 자유당 정권의 부정선거에 맞서 마산 시민과 학생들이 항거한 사건으로, 이후 전 국민적 분노와 함께 4.19혁명의 도화선이 돼 이승만 정권을 무너뜨리게 된 계기를 마련했다. 3.15의거는 지난 2001년 제정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법을 통해 대한민국 최초의 민주화 운동으로 규정됐으나, 4.19혁명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모진 평가를 받으면서 독자적인 위상을 갖지 못했다. 때문에 국회의원 전원인 293명의 동의서명을 받은 '3.15의거 국가기념일 제정촉구 결의안'이 지난해 12월말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됐는데도 국가보훈처가 '국가기념일' 제정 불가 입장을 밝히면서 폐기될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이후 부정적 입장을 밝혀온 국가보훈처가 3.15의거 '국가기념일' 제정에 최종 동의를 하면서 행정안전부는 2010년 2월 23일부터 2010년 3월 2일까지 입법예고했으며, 2010년 3월 9일 국무회의 의결을 통해 사실상 '국가기념일'로 확정됐다.[6]
한편 광주에서는 투표소에서 부정표를 발견한 한 시민이 선관위에 항의하자 정치 깡패가 무자비하게 폭행한 것이 발단이 돼 시민 1천여 명이 낮 12시45분부터 금남로에 모여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데모를 벌였다.[7]
4월 11일, 마산시위 때 행방불명되었던 마산상고 학생 김주열의 시체가 바다에서 발견되어 검시가 이루어졌는데, 검시 결과가 발표되지 않자 시민들이 병원으로 들어가 눈에서 뒷머리까지 최루탄이 박혀 있는 것을 확인하였다. 이 김주열 시체 인양사건이 알려지면서 당시 국민들의 분노는 극에 달하게 되어, 부정선거 시정을 요구하는 시위가 전국으로 확산된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이날 시위대는 마산경찰서 무기고 문을 파괴하고 수류탄 1~3를 탈취했으며 경찰서장실 앞뜰에 투척 폭발시켰다.[8]
1960년 3월 15일의 부정선거를 계기로 마산을 시발점으로 하여 전국 각지에서 벌어진 학생 데모에 호응, 서울에서는 4월 18일 고려대학생 3,000여 명이 구속학생의 석방과 학원의 자유보장 등을 요구하면서 시가를 행진하였다. 국회의사당 앞에서 연좌데모를 벌이다가 고려대학교 유진오(兪鎭午) 총장의 만류로 하오 4시쯤 데모를 중단하고, 귀교 도중 종로 4가 천일백화점에서 대한반공청년단 소속의 폭력배들에게 피습을 당하면서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4월 11일 마산에서 김주열 학생 시신이 발견된 게 도화선이 됐죠. 서울 지역 총학생회 간에 물밑 논의를 통해 19일 오전 9시 일제히 경무대와 중앙청 앞에 집결하는 것으로 행동 지침을 정했습니다. 경무대 앞엔 대학생만 2만여 명을 헤아릴 만큼 엄청난 군중이 몰렸습니다. 여기에 경찰이 무차별 총격을 가하면서 많은 희생자가 났습니다(사망 21명, 부상 172명). 과잉 진압은 국민을 격노시켰고, 결국 엿새 후 대학교수들의 시국선언과 대통령 하야로 이어졌습니다." [9]
1960년 3월 3.15 부정선거 규탄시위에 민주당 측에서는 윤보선 등이 부상당한 학생을 위문하였다. 4월 학생 시위의 진상조사단이 각 정당별로 꾸려질 때 그는 민주당측 부정선거 규탄사태 진상조사단장이 되어 마산과 부산, 창원 등을 순방하고 돌아왔다. 이어 정부의 부정선거를 항의하고 관련자 색출 처벌을 요청하였다.
1960년 4월 11일 윤보선은 민주당의 마산시위 진상조사단장에 임명되어 경상남도 마산으로 파견되었다. 당시 민주당에서는 최고위원회를 긴급 소집하여 대책을 숙의했다. 우선 현지에 내려가 사태의 진상을 조사, 파악하고 자유당 정권에 강력한 대응책을 요구하기로 결정했다.[10]회의에서 그가 조사단장으로 결정되었다. 그는 급히 조사단을 구성, 야당의원 세 사람을 동반하고 마산 현지로 내려갔다.[10] 마산에 도착해 보니 온 시가지가 극히 혼란한 상태였다. 그것은 데모가 아니라 완전히 혁명이었다. 법에 의한 질서는 찾아볼 수가 없었고 흥분한 군중들에 의해 마산은 지배되어 있었다. 도착한 즉시 김주열이 안치된 병원에 가 보니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그대로 있었다.[10] 그를 단장으로 한 민주당 진상조사단이 도착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마산 시민들은 데모를 중지하고 몰려와 사태를 빨리 해결해 시민들을 희생시킨 경찰을 처벌해줄 것을 요구하며 즉석 연설을 청하기도 했다.[10]
윤보선은 마산시장과 경남도지사, 마산경찰국장, 그리고 법원 사람들을 만나 회의를 열고 군중에 대한 발포금지와 감금된 시민들을 석방할 것 등을 골자로하는 몇 가지 조건을 제시했다. 그 과정에서 그는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회의장을 에워싸고 기다리던 시민들이 회의 결과가 빨리 발표되지 않자 무차별 투석을 가하고 전기를 끊는가 하면 폭력을 휘두르는 등 난폭한 행동을 벌였던 것이다. 그는 직접 피해를 당하지는 않았다.[10]
“ | 소란이 있은 후 밤에 모씨 집에서 잠을 자다가 멀리서 성난 파도처럼 만세 소리가 퍼져 나오다가 일제히 쏘는 총소리에 끊어지고 다시 만세 소리가 일어나는 것을 들었다.[11] | ” |
이튿날 그를 비롯한 민주당 조사단은 다시 경찰서장과 지방법원 관계자들을 만나 해결책을 협의했으나 뚜렷한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서울로 올라와야 했다. [10] 당시 내무부차관은 마산 시민의 1차 봉기 배후에 공산당 조직과 민주당이 개입돼 있다고 발표하였다. 그리고 2차 봉기 역시 공산당 조직의 조정에 의한 것이라고 단언했다.[10]윤보선은 그런 사실이 없다며 즉각 반박성명을 냈다.
“ | 내가 조사한 바로는 공산당 조직이 조정했다는 증거는 전혀 찾아볼 수 가 없었다. 그것은 자유당 정권이 애국적인 동기에서 부정선거를 규탄한 마산 시민들을 불순한 세력으로 몰아붙인 결과 박에 되지 않았다. 아무리 궁여지책이라 하더라도 어찌 선량한 국민을 빨갱이 세력으로 매도할 수 있단 말인가. 떳떳하지 못한 정권이 돌이킬 수 없는 큰 죄를 범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12] | ” |
마산 현지에서 조사를 마치고 국회발언을 통해 윤보선은 마산 시민 봉기는 공산당의 폭동이 아니라 애국시민의 의거라고 규정지었다. 그러자 자유당은 윤보선에 대해 비난을 퍼부었다.[12]
1960년 4월 19일, 전날 고려대학교 학생들이 발표한 총궐기 선언문과 같은 선언을 발표한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대학생들과 이에 고무되어 자극을 받은 중고등학교 학생들이 대통령 관저인 경무대와 '서대문 경무대'로 불리던 이기붕의 자택으로 몰려갔다. 그들은 경무대로 몰려가 이승만 대통령과 면담을 요구하였고, 김주열의 죽음에 대한 관련자 처벌을 요구하였다.
한편 제1공화국 시절, 소위 '부부통령' 이라 불리던 권력의 제3인자로 기세충천하여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당시 경무대 경찰서장, 곽영주 경무관(현 대통령 경호실장급)은 곡사포를 동원하여 학생들을 진압하여 막았으나, 곡사포는 곧 무너졌다. 경무대 정문을 부순 순간에 갑자기 군인들이 덮쳐서, 여기서도 많은 학생들이 희생당했다.
재선거와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를 요구하는 시위대에 당황한 제1공화국 정부는 오후 3시 계엄령을 선포했다. 이기붕은 이미 자택을 빠져나와, 경기도 양주의 모 육군부대로 피신하였다. 경찰로부터 무기를 탈취하여 기동화된 이들 무장시위대원들은 저녁무렵 종로와 을지로 일대를 휩쓸었다. 오후 6시40분경 소방차와 트럭등에 분승한 시위대원들이 종로3가를 지나다가 동대문 경찰서 앞을 통과할 무렵 경찰은 일제사격을 퍼부었다. 이곳에서 쌍방간 최초의 사격전이 벌어졌다. 40여대의 차량에 분승, 밤거리를 질주하며 시위하던 수백명의 시위대는 숭인동 근처에서 경찰의 저지를 받고 잠시 주춤했으나 밤8시경부터는 동대문에서 청량리에 이르는 연도의 파출소를 모조리 불태우면서 27자루의 카빈총마저 탈취, 창동쪽으로 몰려갔다. 이들은 이에 앞서 을지로 6가 서울운동장 앞에서 경찰과 한때 총격전을 벌이기도 했다.[13]
야간기동 시위대들은 계엄군의 진주로 뿔뿔이 흩어지고 일부는 20여대의 차량에 분승, 미아리쪽으로 퇴각하여 의정부무기고를 찾아 창동까지 밀려갔다. 이들은 창동지서 경찰들과 한때 총격전을 벌이다가 자정무렵 급거 출동한 계엄군과 경기도경이 협공할 기세를 보이자 다시 시내로 되돌아와 고려대 뒷산쪽으로 몰렸다.[14] 안암동 근처 산에서는 20일 새벽까지 시위대원과 무장경찰 사이에서 사격전이 끝까지 벌어졌다.[15] 하지만 계엄사령관이었던 송요찬은 계엄군에 선제발포를 금하고 유연하게 대처하여 사태를 수습했다.[16]
1960년 4월 18일 고려대학교 학생 데모가 있던 날 저녁 당시 서울대학교 총장 윤일선은 자유당 국회의원인 최규남으로부터 "서울대학생들도 데모에 나올 주 모르니 조심하라"는 말을 들었다. 4월 19일 아침 8시에 서울대학교 총장 윤일선은 각 단과대학 학장회의를 소집했다. 회의가 끝나기도 전에 서울대 문리대생들이 데모를 벌일 기세를 보여 학장들이 황급히 달려나가 말렸으나 소용이 없었다. 이후 4.19 혁명이 발생하자 그는 학생들을 다치지 않게 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윤일선은 경찰청과 법원에 전화를 걸어 학생들의 데모 참여를 만류할테니 최대한 관대한 처리를 요청하였다.
4월 19일 낮 서울대학교 총장 윤일선은 신태환 서울법대 학장 등 7,8명의 학장들과 함께 국회의사당 (지금의 서울시의회 건물)까지 간 서울대 데모대를 찾아가 학교로 되돌아가라고 설득했다.[16] 학생들은 공부가 학생들의 본분이며, 자기 분야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진정한 애국이라는 것이었다.
그가 학생들의 귀교 조건으로 내세운 것은 "연행된 학생들의 석방[16]"이었다. 이어 학생들의 귀교 조건으로 내세운 연행된 학생들의 석방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동대문경찰서장을 만나고 왔는데 서울대생들은 건대, 중앙대 등의 데모대 대열과 함께 중앙청 쪽으로 움직이고 있었다.[16] 시위가 격화되면서 그는 학생들 옆을 따라갔다. 동아일보사 사옥 앞에서 서울대생도 아닌 불량차림의 청년이 데모대열에 끼어들어 선동하는 것을 본 윤일선은 "너 학생이냐"라고 물었다.[16] 학생들 사이에 끼어들어 유언비어를 선동하는 자들을 막기도 하면서 그는 시위 학생들과 동행하였다. 국민대학교 앞에 이르러 경찰들이 발포 사격을 가하자 그는 학생들의 앞에서 이를 가로막고 중지를 호소하기도 했다.
그러나 국민대학 앞에서의 경찰의 총격에 학생들이 쓰러지는 것을 목격한 당시 서울대학교 총장 윤일선은 사태를 돌이킬수 없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고 회상한다.[16] 이어 서울대학교 총장 윤일선은 학생들의 학교 복귀를 촉구하는 한편 경찰에 찾아가 연행된 학생들의 석방, 사면을 호소하여 학생들의 석방, 사면을 위해 노력하였다. 이어 4월 26일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하면서 데모대에 가담했던 학생들도 자연 해산했고 그도 학교로 되돌아왔다.
계엄령에 주춤했던 시위는 시간이 감에 따라 더 번져갔다. 4월 23일, 장면 부통령이 사임하고 민주화를 위해 노력할 것을 선언하였다. 4월 25일에 묵묵히 지켜보던 대학 교수들까지 시위를 함으로써, 이승만의 제1공화국 정부는 무너질 위기를 맞고 있었다. 학생을 중심으로 하여 사회 전 계층으로 확산되어 시위가 확산되자, 주한 미국대사였던 W. P. 매카나기가 이승만 대통령을 찾아가서 하야할 것을 권유, 설득하였다.
법무부장관 권승렬, 신임 외무부장관 허정 등도 이승만의 하야를 요청했다.
이에 이승만은 자유당 당직을 사퇴하고 대통령직에만 전념하겠다 하였다. 주한 미국대사였던 매카나기의 방문을 받은 이승만은 이 모든 사태가 장면과 교회세력의 지시라고 설명했지만 메카나기 대사는 3.15부정 선거와 이를 저지르고도 숨긴 각료들 특히 경찰의 탓이라고 이야기하였고, 즉각적인 개혁을 강력히 촉구했다.
“ | In my younger days I certainly knew my people well and even now felt myself certainly one of them. (내가 젊었을때에는 우리국민들을 잘 알고 이해해 왔었습니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 ” |
— 이승만의 대답) |
한편 학생들을 탄압하자는 측근자들의 제의를 받자 그는 서슴치 않고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불의를 보고 일어나지 못하는 민족은 죽은 민족이다. 민중이 내가 그만둘 것을 원한다면 물러서면 된다.[17]'며 강경 대응론에는 반대하였다. 이에 이원순은 '학생들의 의거가 한창일 때 그는 대통령 직위를 미련 없이 버렸다. 이런 것을 보면 그는 별로 명예욕이 강한 인물은 아닌 것 같이도 생각된다.[17] 라고 평하였다.
이어 이승만 대통령은 하야할것을 결정하게 되었으며, 4월 23일 시위진압경찰의 발포로 시민들의 사망소식이 전달되자 애도의 뜻을 발표한다. 4월 24일에는 유혈사태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자유당 총재직을 사임하였다.[18]
1960년 4월 26일 이승만은 하야의 뜻을 밝혔다. 그는 불의를 보고 국민이 좌시한다면 이 나라는 희망이 없다고 하였다.[19] 그는 학생들의 궐기를 높이 평가하며 우리 선열들의 독립투쟁과 3.1운동을 이어받은 것이라고 하였다.[20]
4월 26일 새벽 6시경 허정은 이승만에게 하야를 권고할 결심으로 경무대를 방문했다. 이때 이승만은 구 비서에게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직을 하야하겠다는 성명서를 구술하고 있었다. 이승만은 4월 25일 저녁에도 학생들이 많이 죽고 다쳤다는 보고를 듣고 어떻게 국민들을 죽일 수가 있느냐. 내가 물러 나야지 하며 하야를 결심했다[21]이승만의 하야 권고를 하러 간 허정은 하야 성명을 구술하는 이승만을 문전에서 보고 목이 메어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22] 고 한다.
이에 장시간 동안 여러 사람의 설득 끝에 이승만 대통령은 하야를 결정했으며 4월 23일 시위진압 경찰의 발포로 시민들의 사망 소식을 전달받고 병원을 찾아 부상 학생들을 위문한 뒤, 방송에 애도의 뜻을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4월 24일 유혈사태에 대한 정치적 책임을 지고 자유당 총재직 사임선언을 했다. 4월 26일 오후 1시에 이승만은 라디오 연설을 통해, 대통령 자리에서 하야하겠다고 발표했는데, 연설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승만 대통령 대국민 담화문
나는 해방 후 본국에 돌아와서 우리 여러 애국 애족하는 동포들과 더불어 잘 지내 왔으니 이제는 세상을 떠나도 한이 없으나 나는 무엇이든지 국민이 원하는 것만이 있다면 민의를 따라서 하고자 할 것이며, 또 그렇게 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보고를 들으면 우리 사랑하는 청소년 학도들을 위시해서 우리 애국 애족하는 동포들이 내게 몇 가지 결심을 요구하고 있다 하니 내가 아래서 말하는 바대로 할 것이며, 한 가지 내가 부탁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 동포들이 지금도 38선 이북에서 우리를 침입코자 공산군이 호시탐탐하게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명심하고, 그들에게 기회를 주지 않도록 힘써 주기를 바라는 바이다.
-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직을 사임하겠다.
- 3·15 정부통령 선거에 많은 부정이 있었다 하니 선거를 다시 하도록 지시하였다.
- 선거로 인연한 모든 불미스러운 것을 없게 하기 위하여 이미 이기붕 의장에게 공직에서 완전히 물러나도록 하였다.
- 내가 이미 합의를 준 것이지만 만일 국민이 원한다면 내각책임제 개헌을 하겠다.
이리하여 오후 2시, 국회는 이 대통령 즉시 하야, 정부통령 선거 재개, 내각책임제 개헌 등을 만장일치로 결의하였고 다음날 오후 3시에 국회에 제출된 이 대통령 사임서가 즉시 수리되었으며, 헌법 규정에 따라 수석국무위원인 허정이 대통령 권한을 대행하게 되어 후에 제2공화국이 출범하게 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물러나면서 자유당 정권과 이승만 추종자들은 저항할 여지도 없이 힘을 잃었으며, 연설 발표 당일 오후 4시에 이승만은 경무대를 떠나 이화장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대한민국 부통령장면이 그보다 하루 먼저 사퇴하였으므로 궐위 중인 부통령과 총리를 대신해 외무부장관 허정이 수석국무위원 자격으로 대통령 권한대행에 취임했다.
4월 26일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취임한 허정은 성명서를 발표하고 관련자 처벌을 약속했다. 학생들과 교수들은 이기붕 처벌을 요청했지만 그는 이기붕의 처벌을 거부했다.
4월 27일 경무대의 비서관 박찬일이 대통령 권한대행 허정의 집을 방문했다.[23] 박찬일은 이기붕의 딱한 처지를 말하며 망명의 길을 열어줄 수 없겠느냐고 물었다.[23] 허정은 이기붕의 망명을 결정하였다. 허정 자신의 표현에 의하면 그는 '박 비서관에게 확실한 언질을 주지는 않았다. 그러나 마음 속으로는 만송('이기붕'의 호)을 해외로 내보내기로 작정했던 것이다.[23]'
그는 '만송('이기붕'의 호)이 부패와 부정에 대한 책임을 면할 수 없다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공산 국가에서처럼 실권(失權) = 곧 죽음이라는 사태가 벌어진다면 민주국가로서의 대한민국의 체면에도 관계되는 일이었다.'[23] 고 했다. 그는 사태가 가라앉아 만송에 대한 공정한 재판이 가능할 때까지만 그를 해외로 안전하게 피신시킬 생각이었다.[24]
한편, 양주로 피신했던 이기붕은 4월 27일에 몰래 경무대로 들어왔다. 당시 그의 장남 이강석 소위는 이승만의 양자로 들어가 있었는데, 4월 28일 새벽 0시경에 아버지이기붕, 어머니 박마리아, 남동생 이강욱을 총으로 쏴 죽이고, 자신도 자살했다.
이승만은 이기붕 가족을 조문한 다음날 5월 29일 비밀리에 하와이로 망명했고, 그곳에서 조용히 살다가, 1965년 7월 19일 91세의 나이에 병으로 사망하였다. 민중당 대변인 김영삼은 '적잖은 정치적 과오가 있으나 평생을 조국의 독립투쟁에 몸바쳐왔으며, 초대 대통령을 지냈다는 것을 감안하여 전 국민과 더불어 깊은 애도의 뜻을 표한다'는 애도성명서를 발표하였다.[25] 작가 최인호는 그의 연재소설 《가족》에서 이승만의 죽음에 대해 '독재자다운 비참한 말로'라고 비평하였다.
1960년 4월, 부통령 장면은 잔여임기를 4개월 남겨놓고 부통령직을 사퇴했다. 그는 당시 현직 대통령 이승만의 유고 시 대통령직 계승서열 1위권자였다.
장면 부통령 대국민 담화문
1. 본인은 오늘로서 부통령직을 사퇴한다. 3·15 부정선거로 인하여 3천만 동포의 울분은 드디어 절정에 달하고, 마침내 민족의 정화인 청소년 남녀들이 불법과 불의에 항쟁하다 총탄에 쓰러져, 그 고귀한 피가 이 강산을 물들게 됨을 볼 때에 하루라도 그 자리에 머무를 수 없는 비통한 심경에 다다른 것이다.
동시에 본인의 사퇴로서 권력을 갈취하여 압제와 폭정을 계속하는 이승만 정부에게 경종을 울리고, 나아가 자유·민주의 정신을 이 땅에 소생시켜, 국가 위기를 극복하는 데 일조가 되기를 바라는 바이다.
2. 본인이 국민 여러분의 지지로서 부통령에 당선된 이래, 헌법이 본인에게 부여한 직책을 수행하려고 노력하였으나, 이를 수행할 기관들은 이승만 정부의 고의적인 방해로 인하여 그 구성조차 보지 못하였으며, 그 외에도 독재화하여가는 정치, 파탄되어가는 국민경제, 혼란 일로의 사회상, 고립되어가는 외교 등을 시정하기 위하여 기회 있을 때마다 행정부에 대한 충고를 하였고, 이 대통령과의 면담을 요구함도 수차이었으나, 그때마다 거부당하였으며, 부득이 서면으로 한 본인의 진언도 아무런 반향을 보지 못하였다.
금년의 선거를 앞두고 이 박사의 4선을 실현하기 위하여 자유당과 정부는 재작년 12월에 신성한 국회의사당에서 야당 의원을 폭력으로 축출· 감금한 후, 국가보안법과 지방자치법을 개악했으며, 언론 기관과 야당활동을 무자비하게 탄압하였고, 평화적 집회 및 시위의 자유에 대한 불법 제한을 더욱 강화하는 등으로 부정선거의 복선을 갖추었고, 헌법정신에 배치되는 3월 조기선거, 유령 유권자의 조작, 입후보 등록의 폭력방해, 관권 총동원에 의한 유권자 협박, 야당인사의 살상, 투표권 강탈, 부정 무더기표 투입, 3인조 공개투표, 야당 참관인에 대한 각종 방해, 부정개표 등으로 3·15 정부통령 선거에서 97퍼센트 내외의 여당 득표를 조작 발표함에 이르러서는 정권욕의 불법수단이 극한에 달하여 민주선거제도는 완전히 파괴되고 말았다.[26]
3. 이러한 부정, 살인선거 등에 대하여 국민의 분함은 가슴에 사무쳤고, 진리와 정의에 민감한 청소년 학도들의 시위운동은 전국 각지를 휩쓸게 되었다. 집권자의 사병화한 경찰은 평화적 시위 학도들에게 총탄을 퍼부었으며, 그도 부족하여 학살한 보복살상과 고문을 무수히 감행하여 국민을 경악케 하였고, 또다시 총탄을 퍼붓는 등 무단정책을 사용한 나머지, 드디어 법적 요건에 어긋나는 비상계엄령까지 선포하는 수치스런 사태에 이르렀다. 이러한 중대위기에 즈음하여 이 대통령은 3·15 선거의 불법과 무효를 솔직히 시인하고, 또 12년간 누적된 비정에 대한 책임을 지고 물러서야 할 것이다.
4. 본인은 비록 부통령의 직을 떠난다 할지라도 민주투쟁 전열에서 국민들과 더불어 최후 승리의 날까지 분투할 것을 맹세한다.
5. 이번의 전국 학도 총궐기 운동은 우리 역사상 새로운 시기를 획하는 것으로서, 3·1 독립운동에 비견할 만한 금자탑이며, 이제부터 민족정기와 자유정신은 온갖 압제력을 물리치고, 광명의 천지를 개척하여 조국의 민주건설과 반공통일을 완수하게 될 것으로 믿는 바이다. 끝으로 민주 수호를 위하여 생명을 바친 '민족의 꽃'들에 대하여 그 명복을 빌며, 명예의 부상자 여러분의 쾌유를 소원한다.
장면은 부통령직 사임 이유로 정권을 내놓더라도 장면이 대통령 직을 계승하지 않는다는 보장을 하여 이승만의 하야를 유도하려는 것이었다[28]:55는 주장과, 두 번째로 부통령으로서의 도의적인 책임, 세 번째로 이승만의 불행을 이용해서 권력을 잡는다는 인식을 심는 것이 싫어서 였다고 하였다.[28]:56[29][30]
장면의 부통령직 사임에 대해 이영석은 이승만이 퇴임하고 3.15 선거가 무효로 처리되면 잔여 임기가 4개월도 안 되지만 대통령직이 장면에게 넘어오게 되어 있는데 이것을 거부한 것은 무책임한 주장이라고 비판하였다.[28]:55 [31]
민주당 구파는 장면의 부통령직 사퇴에 대해 정략적 사임설을 주장, 그가 새 정부의 실권을 잡는데 보다 유리하리라는 정치적 타산에서 부통령직을 사퇴했다고 비판했다. 독재 방지를 위해 내각책임제가 필요하다는 인식이 퍼지면서 장면이 대통령이 되면 내각제 개헌을 실현해야 되는데, 현직 대통령에 있으면서 차기 정부 국무총리직 경쟁에 나서는 것은 여론으로부터 환영받지 못할 것이고 그것을 내다본 것이라는 것이었다.[28]:56
민주당 구파 인사였던 김도연은 1968년에 펴낸 자신의 회고록에서 장면의 부통령직 사퇴가 이승만 하야를 촉진했을 가능성은 인정하였으나, 당시 장면이 부통령직을 사퇴하지 않고 대통령직을 유지한다면 사태를 수습할 수 있었다는 평을 내리기도 했다.[28]:57 [32]
부통령 장면은 4월 25일에 미리 사퇴하였으므로 궐위 중인 부통령과 국무총리를 대신하여 외무부장관인 허정(許政)이 수석 국무위원 자격으로 내각수반 겸 대통령 권한대행에 취임하였다. 이후 6월 허정은 권한대행직을 일시 사퇴하였으나 곽상훈이 일주일만에 사퇴하므로 다시 대통령 권한대행에 취임하였다.
5월 29일 새벽 대통령 권한대행 겸 내각수반 허정은 이수영 외무부 차관에게 이화장으로 가서 직접 이승만 내외를 모시고 나오도록 지시하고, 그는 직접 김포공항으로 나갔다.[33]
이른 새벽이어서 공항 직원들은 아직 일어나지도 않아, 나는 그들을 깨우게 하고 이 박사의 출국 준비를 갖추었다. 이윽고 이 박사 내외를 태운 차가 새벽의 어둠 속에 도착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경향신문의 취재 지이프가 뒤를 따르고 있지 않은가. 나중에 안 일이지만, 이 박사 출국의 눈치를 채고 밤을 새워 이화장을 지켰다는 것이다.[33]
허정의 이승만 출국 정보를 입수한 경향신문은 5월초 이화장에 사람을 보내 이승만의 동태를 감시했다.[33]
김포공항에 미리 도착하여 이승만 내외를 면담했다. 이승만은 그의 손을 잡고 '바쁜데 왜 여기까지...' 하며 말을 잇지 못했다.[33] 뒤따라온 신문기자가 이 박사에게 소감을 묻자 옆에서 프란체스카 도너가 대신 대답했다.[33] 허정은 '더 지체하는 것이 좋지 않을 듯 해서' 이 박사 내외를 비행기 내로 안내했다.
CAT 전세기는 정비 관계로 약 한 시간 동안 지체하고 있었다. 넓은 비행기 안에는 이 박사 내외와 내가 있을 뿐이었다. 우리는 묵묵히 앉아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이 박사나 나나 이 순간에 어떤 말을 할 수 있었을 것인가.[33]
당시 이승만을 배웅한 허정에 의하면 '나는 이승만의 아픈 심정을 직접 느끼는 듯해서 목이 메었다.[34]'고 회고했다.
비행기의 정비가 끝나고 출발을 알리자, 이 박사는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승만: 나 하와이에서 잠시 쉬고 아이크가 오기 전에 돌아오겠소.
허 정: 염려 마시고 푹 쉬고 오십시오.[34]
이 말 이외에는 더 이상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이것이 이 박사와 내가 직접 나눈 마지막 말이 될 줄이야...[34]
이후 프란체스카 도너가 오스트리아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여, 직접 프란체스카 도너의 편의도 봐 주었고, 여권도 발급해 주었다.
그는 심지어 '각료들까지도 모르게' 비밀리에 이승만의 출국을 추진[35] 했다. 이는 허정이 단독으로 비밀리에 주한미국대사관 대사와 상의하여 이승만을 출국시켰던 것이다.[35]
이승만 부처를 태운 비행기가 일본을 거쳐 하와이로 건너갈 때 쯤 허정은 바로 공보실을 통해 이승만의 출국을 발표했고, 국회와 언론과 국민은 이승만의 출국 문제로 논란을 벌였다.[34] 이승만이 망명하자 국회에서는 항의가 빗발쳤다. 장면은 그를 이승만의 심복이라고 평가하였다.[36] 그러나 허정은 즉시 각의(閣議)를 열고 평소 이승만과의 사적 관계라든가 기타 여러 가지 사리로 보아 할 수 없이 그와 같이 단행하였다는 말을 하면서, 이에 대해서는 자기가 책임을 지겠노라고 하였다.[35]
5월 30일 국회에서는 이승만 망명에 대한 책임추궁이 있었다.[37] 허정은 국회에 불려가서 이승만 출국의 경위를 설명했다.[34] 국회의원들 중에는 이승만의 출국 조치에 대한 그의 책임을 추궁하는 사람도 있었다.[34] 양일동 국회의원은 그에게 이승만 망명의 책임을 추궁하였다. 양일동 의원의 추궁에 허정은 어쩔 수 없었다고 답변했다.[37]
이 박사는 건강이 나빠 하와이로 요양차 여행한 것이며 외교관 여권을 주선해 주었다고 말하고, 이 박사의 이한(離韓)은 오히려 시국수습에 도움이 될 것이며 필요하면 언제든지 소환할 수 있다.[37]
한편 장면 민주당 대표는 과도정부에 이승만의 탈출 경위와 진상을 밝히도록 요구하고 부패와 독재와 학정에 인책·사과하지 않고 망명함은 무책임한 행동이라는 성명을 발표하여 정부를 비난했다.[37] 그가 설명을 마치고 하단하자 곽상훈 의장과 그 밖의 많은 간부들은 '영감 잘 내보냈소.'라며 오히려 허정을 격려해 주었다.[34] 그는 국회에 나가서도 그러한 경위[38] 를 자세히 설명하고 양해를 구함으로써, 그 일을 무사히 매듭지었다.[35] 그러나 윤치영 등 이승만의 최측근들은 개인적으로 이승만을 비밀리에 출국 조치시킨 허정을 비판하였다.
한 두어 주일 후에는 돌아오게 될 것이라고 담담한 표정으로 떠나간 이 박사는 이것이 영영 살아서 고국과의 이별이 되고 말았으니 그런 일을 꾸민 자세한 음모가 이제는 반드시 밝혀져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그런 의미에서나 개인으로는 당시의 정부를 책임지고 있었던 허정 과도정부 수반과 하와이로의 일시 요양을 권고한 매카나기 주한미국 대사와 그 여행을 위해 심부름을 맡았던 이수영(李壽榮) 외무차관에게 그 경위를 묻고 싶다.[39]
한편 이승만의 측근 윤치영, 장택상 등 이승만의 최측근들은 그가 매카나기 주한미국대사 및 이수영 외무부 차관 등과 음모를 꾸며 이승만을 해외로 몰아냈다고 성토하였다.
5월 민,참의원 총선거 후보 등록이 있었고, 이때 자유당원들에 대한 집단적인 낙선운동과 선거방해운동이 있었다. 그러나 제1공화국의 고관이자 부산정치파동의 주역으로 규탄받던 장택상, 이범석 등은 학생들의 후보자 사퇴 요구를 묵살하고 민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7월 29일로 예정된 제5대 총선거에 관심을 보인 미국은 친미성향이 강한 장면을 선택했다. 7월 11일 미국 대통령 드와이트 아이젠하워는 서울의 주한 미국대사에게 장문의 훈령을 보냈다.[28]:66 훈령에서 장면을 지도자로 선발하는 것이 이상적인 선택임을 주지시키고, 이 점을 허정에게 말한 뒤, 장면에게 지도자 자리를 수락하도록 은밀히 요청하라고 주문하였다.[28]:66[40]
6월 12일 내각제 개헌안이 통과되면서 국무총리로 내각수반이었던 허정을 추대하였다. 그리고 8월 12일 국회 선거를 통해 대통령 윤보선을 선출했다. 그러나 민주당 구파이자 한민당 출신이었던 윤보선은 같은 구파 출신의 김도연을 총리로 지명하려 했고, 이 때문에 민주당 신파가 집단 반발, 자유당은 자유당대로 민주당을 흔들기 위해 반대하여 낙마했다. 8월 18일 2차로 지명한 민주당 신파의 장면이 총리로 당선됨으로써 제2공화국이 출범하였다.
하지만 제2공화국은 얼마 못 가 박정희가 주도한 5·16 군사정변에 의하여 막을 내리게 되고 1979년까지 박정희의 장기집권이 시작되었다.
1960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지도부는 4월 19일 '피의 화요일'에 분명히 이승만의 사퇴를 예견하였다.[41] 4월 21일 김일성은 이승만의 후계자를 언급하며 반공연맹 의장 장택상을 그 후계자로 지목하였다.[41] 그러나 장택상에 대한 미국의 신뢰를 의심했다.[41] 이어 김일성은 이승만의 후계자들에 대해 전망하면서 미국이 난처한 입장에 처해 있다고 말했다. 이승만은 연령상 도저히 안되는 상태인 바, 특히 최근들어 권위를 엄청나게 훼손당하였다고 말했다.[41]
그를 교체해야 한다. 그러나 충분한 권위와 특색을 지닌 인물이 없다. 또 다시 부통령이자 민주당 최고위원인 가톨릭신자 장면도 적합하지 않다. 그나마 권위를 누리고 있었던 조봉암 진보당 당수는 평화적 조국통일이라는 당 강령을 성급하게 공표하는 바람에 이승만의 명령으로 체포돼 지난해 처형되고 말았다. 부르조아민주당 최고위원인 조병옥은 1960년 3월 15일 대선후보였으나 선거를 며칠 앞두고 급사했다. 현재로서는 남조선 정치지도자들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인물은 반공연맹 의장 장택상이다. 그러나 그는 친일 성향을 가지고 있으며 이 때문에 미국은 그를 신뢰할 수 있는지 망설이고 있다.[41]
한편 김일성은 국제부장 박용국을 시켜 대한민국 내 주한미군만 철수되면 평화통일이 가능할 것이라며 설득하게 하기도 했다.
1995년 국립묘지로 승격된 이후 2007년 5월 19일 처음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측에서 4.19 국립묘지에 방문했다. 홍성옥 위원장은 방명록에 "4.19 용사들의 불굴의 투쟁 정신과 의지를 안고 일본의 과거 청산을 위한 활동에서 조선 민족의 대중적 화합으로 투쟁할 때 승리를 달성할 것이다"라는 글을 남겼다. 북측 일행을 안내한 소장은 "이들이 4.19에 대한 깊은 배경 지식을 갖고 찾아온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며 "4.19라는 ‘혁명’의 의미를 되새기면서 접근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42]
김성식은 당시 《사상계》기고를 통해 4월혁명의 의의를 7가지로 제시했다.
전 청와대 수석 김정남은 4월혁명의 정신은 "반독재민주, 반외세자주, 반분열통일, 반기득권민중주의"라고 단언하고 이는 이승만 정권에 대한 부정을 넘어서는 것으로 정권타도뿐만 아니라 향후 미래의 공동체적 이상을 제시했다면서, 4월혁명은 "우리 사회가 반드시 시작해야 할 시원, 고향이요, 반드시 이루어야 할 이상, 목표로서 계속 진행되고 있다"고 했다. 4.19혁명은 민족정기이자 혼이요 생명이고 영원히 타오르는 민족의 숨결이고 정신이라는 것이다.
역사학자 서중석은 4월혁명을〈낡은 것, 썩은 것을 퇴치하고 4월의 봄같이 새 생명이 돋아나는 새 세상을 만들자는 운동이었다〉고 했다. 이승만과 자유당 간부의 대다수를 차지한 친일파가 썩은 것으로 이를 몰아내고, 관존민비, 남존여비 등 온갖 인간차별적 낡은 봉건인습을 타파하는 것이었다. 4월혁명은 모든 퇴영적인 것, 침울하고 억압된 것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었다. 혁명으로 한국인은 일종의 '사회적 민주주의'라는 '정신혁명'을 경험했다고 평가했다.[43]
"부정선거 다시 하라!"를 목표로 출발한 이 혁명은 대한민국 대통령 이승만의 퇴진과 이기붕에 대한 심판이라는 기대 이상의 성과를 얻었다는 평가가 있다.
역사학자 겸 언론인 한홍구에 의하면 '학생들과 시민들이 흘린 피의 수혜자가 된 민주당 정권은 '혁명의 계승자'이기보다는 이승만 정권 수립 당시 권력의 배분에서 배제된, 어떤 의미에서 자유당 정권보다 더 보수적인 집단이었다.[44]'는 평가를 내렸다. 이 때문에 제2공화국은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 분출을 수용하지 못하였고, 4.19혁명은미완의 혁명이라 불리게 되었다.
구 자유당 지지세력과 일부 우익세력 등 일각에서는 4.19를 혁명으로 인정하지 않고 '사태'로 보기도 한다. 대표적으로 이승만의 측근 윤치영, 허정 등은 '4.19 사태'라고 평가하였다.
이승만의 측근이었던 허정은 4.19 사태[45] 라고 평가하였다. 그에 의하면 4.19 사태는 혁명으로 보고 싶지 않다[45] 고 하였다. 허정은 또 '4월의 사자들의 민주회복을 위한 투쟁은 의거였고 결코 혁명은 아니었다.[45]'는 것이다. 허정에 의하면 '4.19 사태는 꺼져가는 민주주의의 횃불을 지키려는 의로운 궐기였을 뿐 정권에는 조금도 뜻이 없던 한없이 투명한 젊은 애국심의 발로였다. 이러한 의거는 혁명과는 분명 구별되어야 한다.[45]'고 하였다. 그는 '4.19 의거는 혁명이 아니다'[46] 라고 평가하였다.
이승만의 다른 측근이었던 윤치영은 4.19를 두고 김창룡의 요절을 아쉬워하기도 하였다. 윤치영은 김창룡이 오래 살았다면 4.19 사태와 같은 허술한 사태 처리로 이승만이 맥없이 하야하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보았다.[47] 윤치영은 4.19에 대해서도 부정적이었다. 그는 4.19를 '4.19 사태'라고 보았다.[47]
한편 보수주의 논객 지만원 등은 4.19 당시 이석, 김용규 등 간첩이 침투하여 소요사태를 조장했다는 주장[48][49] 을 제기하였다.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 누가 구름 한 송이 없이 맑은 / 하늘을 보았다 / 하는가. // 네가 본 건, 먹구름 / 그걸 하늘로 알고 / 일생을 살아갔다. // 네가 본 건, 지붕 덮은 / 쇠 항아리, / 그걸 하늘로 알고 / 일생을 살아갔다. // 닦아라, 사람들아 / 네 마음속 구름 / 찢어라, 사람들아, / 네 머리 덮은 쇠항아리 // 아침 저녁 / 네 마음속 구름을 닦고 / 티없이 맑은 영원의 하늘 / 볼 수 있는 사람은 / 외경을 / 알리라 // 아침 저녁 / 네 머리 위 쇠 항아릴 찢고 / 티 없이 맑은 구원(久遠)의 하늘 / 마실 수 있는 사람은 // 연민(憐憫)을 / 알리라 / 차마 삼가서 / 발걸음도 조심 / 마음 아모리며, // 서럽게 / 아, 엄숙한 세상을 / 서럽게 / 눈물 흘려 // 살아가리라 /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 누가 구름 한 자락 없이 맑은 /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전체, 초판 1979년, 개정판 1989년에 내놓은 같은 이름의 시집,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에 수록된 신동엽의 대표적인 참여 저항시, 4.19혁명에 직접 참여하여 피를 흘렸던 시인 신동엽은 4.19 때는 잠깐 맑은 하늘이 빛났다고 읊었다)’- 1960년 신동엽은 건강을 되찾아 서울에 있는 '교육평론사'에 취업한 뒤 성북구 동선동에 터를 잡았다. 그해 《학생혁명시집》을 집필하며 4·19 혁명에 온몸으로 뛰어들었다. 그래서 신동엽을 가리켜 '4.19 시인'으로 평가하고 있다.
‘껍데기는 가라. / 사월도 알맹이만 남고 / 껍데기는 가라. // 껍데기는 가라. / 동학년(東學年)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 껍데기는 가라. // 그리하여, 다시 / 껍데기는 가라. / 이곳에선, 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논 // 아사달 아사녀가 / 중립의 초례청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 / 맞절할지니 // 껍데기는 가라. / 한라에서 백두까지 /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 /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전체, 4.19를 떠오르게 하는 1967년 1월 《52인 시집》에 수록된 신동엽의 대표적인 시)’
한편 국회의장을 지낸 이만섭에 의하면 4.19의 직접적인 원인이 이기붕이라는 견해를 내놓았다. 이기붕을 무리하게 부통령으로 만들려던 것이 4.19의 원인이 되었다고 해석했다. 야당 대통령 후보가 죽었으니 이승만 대통령 후보가 이미 당선된 거나 마찬가지이기에 부통령은 야당은 장면이고 여당은 이기붕인데, 그 전에도 장면 박사가 부통령을 했고 굳이 이기붕이 부통령이 될 필요는 없었지만 끝내 부통령에 당선시키려고 자유당에서 애를 썼는데 무리수를 두다가 사탄이 났다는 주장이다.[50]
[숨기기]대한민국의 대규모 시위 및 농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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