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딜 가도 안동 찜닭집이 보인다. 가끔은 봉추 찜닭이라는 간판도.외대 앞, 고대 앞, 석계역 그리고 내가 사는 경기도 장현에도 닭들의 비명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나는 화사하고 깔끔하게 인테리어된 실내를 들여다보며 한참을 망설이기도 하였다. 혼자 들어가서 외롭게 식욕을 과시하는 일만큼 기괴한 것도 없을 듯해서, 그냥 스쳐 지나가곤 했는데.
동생이 찜닭집을 냈단다. 마침 귀국한 아내의 근친 길에 부산에 들러 동생네 안동 찜닭집에 가서 약간 실패작이라는 찜닭을 먹었다. 매콤했다. 대학 다닐 때 가끔씩 안동 내려가면 구시장 찜닭 거리에서 찜닭에 소주를 푸곤 했다. 그리고 더 오랜 옛날, 고 3 시절에도 어쩌다 찜닭을 먹었던 기억 한 토막. 입시 한달을 남겨 놓고 정말 학교 있기 싫어서 1교시 마치고 문득 일어나 가방 들고 학교 진입로를 태연히 걸어나와 소주 한 잔 먹고 자취방으로 돌아와 자 버린 적 있지. 말하자면 땡땡이를 친 셈인데, 내가 우리 방 옆 친구 자취방에서 자고 있을 동안 애꿎은 우상하(그 시절 목민 멤버였음)는 담임(이우성 선생님, 별명은 아우성이었고 펀치가 셌음) 명을 받고 법상동 산자락에 있는 자취집을 두 번이나 헐떡거리며 찾아와 허탕치고 돌아갔지. 그 날 저녁, 나락 타작하다가 담임의 연락을 받고 지푸라기 잔뜩 묻히고 허겁지겁 학교 불려 갔다가 자취방을 찾아온 아버지 손에는 안동 찜닭이 들려 있었지. 찜닭은 커녕 달걀이나 근근이 사먹고, 맨날 콩나물, 오뎅, 김 세 가지로 일 년 돌아가고 맨밥 도시락 싸들고 가 학교 매점에서 오뎅 국물에 그 밥 말아먹던 시절이었는데, 난 그 때 안동 찜닭을 처음 먹어 봤던 것 같다. 아버지가 뭐라고 날 타일렀는지는 진짜 한 마디도 생각 안 난다. 찜닭 맛도 약간 희미하지만, 그리고 이 날 이 때까지 아버지는 어려운 분이지만, 그 때를 생각하면 가슴이 찡해진다. 뜻밖에 찾아온 한밤의 포식. 동생과 나는 행복했지만, 그것도 무슨 인연이었을까. 안동대학교를 다니고 학생 운동을 하던 동생은 서울, 광명을 떠돌다가 부산으로 시집가 어찌 사는지도 감감했는데, 다시 민중으로 돌아가 닭집 아줌마가 됐다. 장사가 잘 된다고 했다.
아내는 다시 동해와 태평양을 건너 떠나가고 찜닭집은 자꾸만 늘어간다. 얼마 전 어머니의 전화. "니 형네도 찜달집이라카든가 먼가 그거 한다 카드라. 자야한테 기술 배아가 인제 차랬다.처양꼬치 부치라 캐가 지금 너 아부지하고 꼬치 꼭대이 딴데이." 부산 사는 형도 결국 민속 주점에서 안동 찜닭집으로 업종 전환했다. 닭하고 무슨 원수가 졌는지 오빠는 닭집 아저씨, 동생은 닭집 아줌마, 난리도 아니다. 그럼 난 닭집 아저씨와 닭집 아줌마와 무척이나 지근거리에 있는 아저씬가. 어쨌든 장사는 잘 된다 하니 다행이긴 하지만 너무 멀어서 자주 가긴 틀렸다.
세월 흐르니까 형제들도 만나기가 어렵다. 서울 하나 인천 둘, 부산 둘로 찢어진 우리 형제들. 고사리 시절부터 안동 나가 학교 다니다 뿔뿔이 흩어져 저마다 이 세상과 시비하고 살아간다. 옛날 <두시언해>에서 착한 시인 두보가 동생들을 그리워하며 읊은 '부쳐 보내는 글발이 쟝상 사맛지 아니할쌔'라던 서글픈 구절이 생각난다. 이제 곧 설이다. 우리 형제들 다시 모여 저마다 아픈 세월 상대하느라 매듭 굵어진 손마디나 쑥스럽게 풀어놓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