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웃고 있다.
손에는 스노우 보드가 들려 있고 발은 딱딱한 장화에 묶여 있다. 공기는 차갑고 양 볼은 빨갛게 얼어붙어 있다. 수많은 눈보라 속을 가로 질러 저 사이렌을 울리는 응급 구조 오토바이는 모두가 힘을 다해 내려오고 있는 길을 가로질러 올라간다. 그 도착 지점에는 어느 사람이 누워 있는 듯 보이며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모든 사람들이 그곳을 응시한다. 그렇게 들 것에 그 사람을 누이고 다시 한번 사이렌을 보다 크게 울리며 재빨리 내려와 내 눈앞을 지나간다. 누워 있는 사람은 미동이 없고 운전수의 표정은 이상할 정도로 고독하다. 공기는 더욱 차가워지고 빨갛게 달아올랐던 얼굴은 차갑게 식는다. 이를 지켜보고 있던 몇 무리의 학생들은 선생에게 떨리는 목소리로 말한다.
“저 사람 안 움직이는 거 같은데요?”
옆에 있던 친구가 쓸데없는 말을 더한다. “진짜 죽은 거 아니야?”
“조용히 하고 신경 꺼라.” 선생님의 말씀이다.
그 떨리는 목소리는 불안감과 당혹함을 의미하는 듯했다. 그렇기에 난 생각했다. 선생과 제자. ‘이 즐거운 날에 불상사를 겪어 분위기를 망쳤네 이러니 사고가 나면 안되지.’
하지만 그들은 웃고 있었다.
그저 교회를 나간다. 그저 예배를 드린다. 그저 선교를 나간다. 우리가 하고 있는 것은 교회생활이지 신앙생활이 아닌 듯싶다. ‘사람들은 이를 알아차렸을가?’ 이런 고민을 하는 것 또한 교만일까? 이렇게 부질없는 시간을 보내는 중에도 사람들은 장로와 권사라는 명패를 가슴팍에 또한 이마 정 가운데 붙이고 당당하고도 시끄럽게 떠들어 댄다. 이에 이질감을 느끼고 혐오감을 가지는 것 또한 죄인가? 이런 생각을 말로 한다면 혹 ‘너도 혐오스러운 죄인이야!’라는 송곳이 날 찌를 가 두려워 마음속 깊은 곳에 묵혀 두는 이가 있다. 분명 그는 혹은 그녀는 그 마음이 썩을 것이며 마음속으로 여러 사람을 욕하고 죽일 것이며 그 중에는 본인도 포함일 것이다. 왜냐하면 “결국 똑같은 죄인”이라는 키워드에 본인의 모든 생각을 묶여 두고 있기 때문이다.
‘이 모습 저 모습 욕하면 안된다.’ 이런 생각이 뇌를 뒤덮는다. 하지만 그 와중에 저들은 자신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을 곧 이쪽에서는 저쪽을, 저쪽에서는 이쪽을 욕하고 있다. 이에 환멸을 느낀 한 사람은 속으로는 뭉개지며 겉으로는 동참한다. 어찌 할 줄 모르기에 자신도 모르게 그곳에 발을 들인다. “공동체의 붕괴”, “교회의 붕괴”, “기독교인으로써의 붕괴”의 집중하며 정작 “복음의 붕괴”에는 집중하지 않고 있다. 이들은 교회생활을 하기에 신앙생활에는 집중하지 않는다. 그러니 그대들이여 가면 쓴 교회가 아닌 벌거벗은 채 울고 있는 살인자에게 집중해라.
이미 썩을 대로 썩은 누군가는 참을 수가 없어 자신 속에 있던 역겹고, 혐오스럽고, 뭉개질대로 뭉개진 너덜너덜한 영혼을 입 밖으로 토해낸다. 그후 결국 그토록 두려워하던 그 송곳이 그를 관통하고 피 흘리며 쓰러진다. 그 모습을 본 장로와 권사라는 명패를 붙인 자들, 혹 붙이려고 애쓰는 자들은 반창고를 가져와 붙여준다. 그 반창고는 씁쓸하고 외롭고 괴상할 정도로 착하다.
그 너덜너덜하게 찢긴 상처를 본 사람들은 공감하고 괴로워하고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닌 그저 우는 척 공감하는 척 괴로워하는 척 복음을 전하는 척한다. 속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웃고 있었다. 저 쓰라린 상처에 입맛을 다시며, 드디어 나의 의를 충족시킬 수 있는 병자가 온 것을 반기며.
이제는 어찌 보면 도피처가 될지도 모르는 선생들과의 만남을 가진다. 공자여, 헤세여, 하루키여, 오사무여, 카뮈여. 역겨운 인간성을 느낀 채 터덜터덜 걸어가 서당의 문을 두드린다. 인이요, 인간이요, 관계요, 예라. 이미 내가 맛본 것이 있기 때문에 공감을 할 수가 없다. 하지만 다른 맛이 있다는 사실 또한 아주 잘 알기에 다시한번 일어설 준비를 하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군자가, 소인이, 제자가, 백성이 나의 목을 쪼이고 ‘나는 어디에 속하였는가?’하는 질문 속에 마음속 공갈은 쓰레기로 채워져 간다. 그 와중 열 번째 대화에서 나는 무너지며 동시에 세워진다. 공자이자 노인이자 소년이자 선생은 결국 자신의 삶 만을 권유하고 있구나. 그 생각이 들 때에 ‘아, 나는 바른 자리에만 앉을 자신도 없고 밥 투정을 부릴 자신도 없고 홀을 무겁게 여길 자신도 없다.’ 이런 푸념만이 머리 속 공갈을 새로운 쓰레기로 채워간다. 분명 나는 군자로써 실천할 수 있는 부분도 있고 소인으로써 벗어나지 못할 부분도 있을 터인데, 그 실천의 방법으로 자신을 소개하니 기가 차면서도 동시에 말려든다.
동시에 세워지는 것은 이제는 완벽히 조각되어야 한다는 믿음이다. 내가 나로서 사는 것 또한 군자다운 것일지 몰라도 선생이 보기에 그것은 결국 천민이다. 천민을 떨어져야 하니, 저 밑에서 대화 나누는 그의 발바닥만을 봐야하니, 바람이 불면 고개를 숙여야만하니 이제 더 이상 내 손에는 인으로, 예로 더불어 산다는 의지는 없고 조각칼 만이 들려 있다. 내 마음과 얼굴은 선생에 알맞게 자르고 있자 하니 마음의 공갈이자 여유는 사라지고 주름이 깊게 패인다. 이제 차다 못해 넘쳐나는 쓰레기들은 밖으로 흐르고 몸과 마음, 그 아우라가 짜증으로 가득하다. 자신에 대한 불만족과 정죄함, 그것은 저 선생대로 날 조각했기에 나오는 것이다. 나답게 사는 것은 잊고 공자라는 틀에 몸을 억지로 쑤셔 넣는다.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는 인간관계의 인과관계에서 ‘이처럼 살라, 나처럼 살라’하는 강박이 더해지니 이 모든 것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굳은 채로 부셔져서 그 딱딱한 돌로 여러 사람을 죽인다. 이글을 쓰는 내가, 저기 저 차가운 옥상에서 뜨거운 태양아래 몸을 던지는 학생이 그러하다.
내가 나에게 속삭인다. “이렇게 조각된 나는 내가 아니야. 넌 여전히 소인이고 천민이야.”
나는 고개를 가로로 젓는다. “괜찮아. 저 제자들이 또 나의 선생이. 오, 그들이 웃고 있잖아.”
경공은 공자의 말의 크게 기뻐하였다. “그래 좋은 말씀이오! 임금이 임금답지 못하고, 신하가 신하답지 못하고, 아비가 아비답지 못하고, 아들이 아들답지 못하면, 곡식이 있어도 내가 어떻게 그것을 얻어먹겠습니까(12.11)?” 그 다음도 대화도 마찬가지였다. 경공은 기뻐했다. 하지만 두번의 대화 후 더 이상 경공이 공자에게 예를 묻지 않은 이유는 간단하다.
안영왈 “무릇 유학자는 해학으로 말재주를 부리지만 법으로 그를 규제할 수는 없습니다. 옛날의 어진 사람이 사라진 이래 주왕실은 쇠미해졌고 예악이 무너진 지 오래되었습니다. 지금 공자는 용모와 복식을 추존하고 번잡스런 예절만을 따지고 세세한 절차만을 따르고 있으나 아마 몇 세대가 지나도 이를 다 배울 수 없으며 평생 그 예법을 다 마칠 수 없습니다. 군주께서 그를 체용하여 제나라 풍속을 바꾸려고 하신다면 이것은 백성들을 먼저 인도하기에는 적합하지 않는 것입니다({사기},{공자세가}책 주석)”라 하니 경공은 그의 말에 경청한다.
어쩌면 그 선생은 울고있었을지도 모른다. 아무리 뜻을 말해보아도 이미 자리를 차지한 사람들이 이리저리 구슬려 귀를 막게 하고, 본인의 뜻을 펼칠 자리를 찾아도 이미 만석이다. 그가 살아 있을 때에 보여준 것이 없고 오직 어록만이 남으니 그가 경계하였던 형식주의의 빠지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다. 왜냐하면 어록은 사람 멋대로 만져 내기 좋고 원래도 꿈보다는 해몽인 것이다. 제멋대로 선생을 이웃집 아저씨로, 무서운 주름 난 선생으로, 혹은 따스하고 인자로운 군자로 생각하니 그 아저씨가, 노인이, 선생이, 군자가 지금까지 없고 오직 말만이 남았기 때문이다.
과연 그 선생이 실천할 수 있던 기회가 왔더라면 오, 저 산속 다리 위의 까투리처럼 그 때를 만났다면 이 모든 것이 달랐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저기 이미 자리에 앉은 자들을 봐라. 이미 저 왕들 앞에 앉아 다리 벌린 자들을 봐라. “당신이 진실로 군자입니다.”하는 저 아첨떠는 자들을 봐라. 그들은 웃고 있다.
저 찢어진 입. 소름 돋는 이. 상기된 볼. 재미도 없는 농담에서 벗어나지 못한 머리. 구겨진 얼굴. 영혼은 온통 쓰레기. 생각이란 모두 남의 탓과 허망한 이상. 나도 벗어나지 못한 그 순간 그 무리에 섞여 함께 찢어진 입으로 소름 돋는 이를 들어낸 채 웃고 있다. 항상 이리저리 저질스럽게 웃고 있는 무리만 봐서 그런지 몰라도 누구에게 말을 걸어도 항상 그들은 찢어진 입에 소름 돋는 이를 들어낸 채 웃고 있다. 그는 공자이고, 헤세이고, 하루키고, 오사무고, 카뮈이다. 그 다음은 예수일까? 이런 생각을 아무도 모르게 하며 나는 나도 모르게 웃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