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 당신의 족보는 진짜입니까?"
대부분의 한국인은 족보(族譜)를 '갖고있다'.
18세기만 해도 극소수 양반들이 족보를 가졌는데,
그럼 그 동안 양반 가문만 엄청나게 번성했나?
19세기 인쇄술 발달과 신분상승을 위한 하층민들의
'반란?'으로 시작된 족보위조 현재 한국인의 족보는
어디까지 믿을수 있을까?
이 아무개 씨 는 제법 잘 나가는 건설회사 사장이다.
남도의 시골중학교졸업 학력이 전부인 그는 일찌감치
혈혈단신으로 고향을 떠나 6·25 전쟁이 훑고 지나간
폐허의 도시 서울로 무작정 올라왔다.
그는 인고의 세월을 딛고 1970년대 중반에는 이미
국내 중소건설업계 에서 이름있는 인물로 성장했다.
그런 이 사장 에게 뜻밖의 고민이 하나 생겼다.
그 맏아들 이박사 의 혼사와 관련해 벌어진 일이다.
집안에 재력이 있는데다 미국 명문대 박사 학위를
가진 장남의 배필감을 구하는 것까지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중매쟁이를 통해 최종낙점 된 후보는 국내 명문여대
를 나온 김선하 라는 아가씨였다.
며느리 김선하 충청도 에 대대로 이른바 명문양반가
의 후손이라고 했다.
10대조의 위패가 어느 서원에 배향돼 있고 13대조
는 문묘(文廟)에 모셔진 대단한 집안이라고 했다.
이 사장은 키가 헌칠하고 귀티가 흐르는 김선하 의
겉모습이 마음에 들기도 했지만 양반가라고 하는
그녀의 출신이 썩 마음에 더 끌렸다.
그런데 한학(漢學)에 밝은 김선하 의 백부가 장차
조카사위 가 될 이박사 의 집안 내력을 조사하며
캐묻기 시작했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했다.
그 때까지도 사장 이사장 에게는 족보가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사장 의 호적에는 본관이 경상도 큰고을
어디로 적혀 있다.
그 곳 이씨 라면 나라에서 몇째 안가는 대성이다.
2015년의 인구센서스에 따르면 이사장의 본관을
같이하는 이씨는 100만명 이상 된다.
그러나 호적과 족보는 다르다.
족보는 본관(本貫)을 공유하는 집안(lineage)의
처음 조상인 시조(始祖)로부터 시작해 그 자손들의
이름과 호(號), 출생과 사망에 관한 기록, 벼슬이나
과거시험을 비롯한 특별한 경력, 배우자의 가계에
대한 기록 및 묘지 위치 등이 세대(世代) 순으로
기록돼 있는 것이 보통이다.
이처럼 족보는 직계와 방계의 여러 조상에 관한
기록을 담고 있다.
그리고 조상(祖上)에 대한 공경심이 유달리 강한
유교사회인 한국에서는 신성시되기도 한다.
어린 시절에 듣기로 이사장의 할아버지는 마을
심부름꾼 이었다.
동사(洞使)또는 동노(洞奴)라고도 불리던 이사장의
할아버지 이쇠돌 은 마을의 애경사(哀慶事)가 있을
때면 차일을 치고 자리를 까는 일이나 흉 하거나
길한 소식을 온 마을에 바삐 알리고 다니는 일을
하는 사람이 였다.
이를테면 마을이 공동으로 부리는 한낱 종 에
불과한 신분 이었다.
그래서 마을의 웬만한 사람들은 그에게 말을
하대 했다.
박 형사와 '족보 전문가' 이사장 집안의 '화려한
역사'를 알고 싶어 하는 양반 김씨들 에게 적당한
답을 주기가 아주 어려운 일로만 생각돼 이사장은
매우 낙심했다.
그런데 보잘것없는 조상의 내력 때문에 고민하던
이사장 에게 희망을 안겨 준 이가 나타났다.
수년전부터 친분을 나눠 오던 박노덕 형사였다.
그는 박 형사가 어느 날 술이 거나하게 취한
상태에서 "조상의 뿌리를 찾아야 겠다"고 말한 것을
기억해 내고 그에게 도움을 요청했던 것이다.
박 형사의 말에 따르면 서울 한복판에 자리 잡은
국립중앙도서관 고서실(古書室)에는 일제 때 전국
각지에서 무더기로 쏟아져 나온 족보들이 거의
빠짐없이 비치돼 있는데, 그 곳에 '족보전문가'들이
있다는 것이다.
하루 종일 남의 족보를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는
대여섯 명의 고정 열람객이 바로 족보전문가 들
이라고 했다.
이들은 이 족보들을 소재로 삼아 조상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뿌리를 이어주는 사업을 은밀하게 진행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사실 박 형사가 이들의 정체를 파악하게 된 것도
이씨처럼 변변치않은 조상 내력을 밝혀 보겠다는
취지에서 출발했다고 한다.
박 형사의 본관은 밀양. 호남평야 에서 어렵게
농투성이로만 살아온 박형사 집안에는 시조(始祖)
로 믿어지고 있는 신라의 시조왕 박혁거세를 제외
하고는 이렇다 하게 내세울 인물이 하나도 없었다.
그의 집안에는 언제 누가 만든 것인지는 몰라도
가승(家乘)이라고 하는 것이 하나 있기는 했다.
하지만 직계 조상의 이름과 그 배우자가 속한
씨족의 이름 그리고 제삿날만 간단히 적혀 있을
뿐이었다.
그 중에 고등학교 국사책에 나오는 유명한 박씨는
단 한 사람도 없었다.
본래 박형사 는 족보 같은 것에 관심이 없는
사람 이었는데...
나이 40이 다 돼서야 비로소 자신의 내부에서 꿈틀
거리는 핏줄 의식을 점차 느끼게 됐다고 한다.
비록 쥐꼬리만한 권력이지만 때로는 남을 윽박지를
만한 위치에 있다 보니, "종씨(宗氏)인 것 같은데
항렬이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을 받은적이 종종
있었다.
형과 그의 이름에는 우연인지 필연인지 덕(德)자가
들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을 굳이 항렬이라고 주장할
근거는 없었다.
우물쭈물 얼버무리다가 때로는 그냥 종씨가 되기도
하고 아저씨, 조카, 형님, 또는 동생으로 그때그때 를
넘기곤 했다.
그러다 보니 뿌리와 나는 정말 누구인지 알다가도
모르겠다는 의문이 언젠가 반드시 풀어야할 숙제로
굳어지고 있었다
박 형사는 자신의 호적이 밀양박씨 즉 박혁거세 신라
시조 대왕의 후손이 틀림없으므로 그 뼈대 있는 내력을
반드시 밝혀내고야 말겠다고 결심했다.
족보 전문 출판사의 '작품'
그러던 중에 처가쪽의 대부로부터 국립중앙도서관에
족보 전문가가 있다는 말을 듣게 됐다.
경주정씨로 신라 전설적인 육촌장의 후예임을 고집하는
대부는 종중(宗中) 일에 열심인 사람인데 경주정씨 족보
를 열람하러 중앙도서관에 들렀다가 이들을 만났다는
것이다.
박형사는 그 때로서는 적지않은 액수인 20만원을 들고
가서 고서실에 상주하는 족보 전문가를 만나 통사정을
했다.
가문의 뿌리를 찾고자 하는 박 형사의 열의가 고서실의
박처사 라는 전문가의 마음을 감동시켰던 모양이다.
드디어 박씨 의 주선으로 대전의 족보 전문 출판사 가
1987년 봄에 발간한 밀양박씨의 어느파보에 박씨일가
가 모두 실리게 됐다.
족보 전문가 박처사가 여러 날을두고 연구를 거듭해
찾아낸 바로는 박씨 등은 전라북도 전주에서 대대로
살고 있는 밀양 박씨 집안의 한 가지임에 틀림없다는
것이다.
박처사 는 박형사 고향을 포함한 전라도 밀양박씨
가 수록된 최근의 한 족보를 뒤져서 19세기 말쯤에
자손이 끊어진 한 가닥을 어렵지 않게 발견하였고,
바로 그 박씨의 후손으로 박 형사의 할아버지 를
이어 버린 것이었다.
그런데 박처사 가 서둘러 적당히 꾸며댔기 때문에
박형사 할아버지 박문규는 족보상 어머니가 되는
김한순 씨가 50세가 되던 해에 낳은 것이 되었다.
19세기 부녀자 들의 폐경기는 40세 전후 였으니
쉰살 에 아이를 낳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박 형사는 전문가들이 어렵게 찾아냈다는
그 조상들의 이름이 자기가 시골에서 '발굴해 온'
가승의 여러 할아버지 이름과 일치하지 않은 사실도
발견했다.
박씨의 할아버지 까지는 이름이 같은데 그 윗대는
듣지도 보지도 못한 이름들 뿐이었다.
조금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없지 않았으나,
그것이 무슨 대단한 문제랴 싶어 덮어 두었다.
출판된 족보를 놓고 본다면 박씨의 7대조는 경상도
현감이었고 22대조는 이성계 를 도와 조선을
건국 한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이었다고...
그러니 박형사는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었다.
사실 여부야 전문가들이 책임질 일이지만 하여튼
용하기 짝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한편 이 사장은 박 형사의 족보찾기 내력을 들은
며칠 후 박 형사에게 두툼한 돈봉투 를 내밀며
비밀리에 족보 전문가를 찾아 일을 처리해 달라고
부탁한다.
이 사장의 부탁이 있은지 불과 일주일 만에
이사장의 가계는 화려한 모습으로 다시 태어났다
이름 없는 조부는 일약 대학자로 15세기의
한 유명한 정승이 이 사장의 조상이요,
판서만도 네댓 명을 배출한 그야말로 누대 명문
(累代名門)의 후손으로 둔갑한 것이었다.
이씨는 이렇게 탄생한 족보를 양반 김씨들 에게
내밀었고 그들은 탄복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드디어 양가 축복속에 이박사와 김선하 의 결혼은
일사천리로 순조롭게 성사 되었다.
이 사장은 벼슬과 문명(文名)으로 번쩍이는 족보
에 자신과 일가친척의 이름이 등재되고 나자
족보의 매력에 흠뻑 젖어 버렸다.
조선제일 의 음택(陰宅)으로 소문난 경기도
용인의 한쪽 모퉁이를 사들여서 그 옛날 마을의
종이던 할아버지 묘를 옮겼다.
자취조차 찾을 수 없는 증조와 고조의 묘도
전문가를 동원하여 고향 부근 산야(山野)에서
발견하는 데 성공해서 역시 이장(移葬)했다.
화강암을 많이 써서 웅장하고 격조 있게 다듬어
올린 조상의 묘에는 비석과 상석을 비롯한 석물
(石物)도 골고루 챙겼다.
유명한 한학자와 서예가를 동원하여 무덤가에
새로 세운 이쇠돌 의 비석에 그가 마을 의
종임을 표시하는 내용은 없었다.
글월 문(文)자, 빛날 형(泂)자 이문형이 그의
이름이며, 쇠돌은 소싯적에 쓰던 아명 에
불과 하다고 했다.
비문을 지은 이는 쇠돌 아니 문형이 일찍이
출세의 뜻을 버린 무명의 대학자인 동시에
효행이 탁월했던 일세(一世)의 참된 스승
이라고 마구 극찬하였다.
어느덧 이 사장은 자기가 정말 명문의 후손
이라고 스스로 믿게 된다.
처음에는 약간 머쓱한 느낌도 없지 않았으나,
해마다 가을이면 대종중에서 지내는 시향(時享)
에도 참여했다.
문중에서도 선영(先塋)을 위하는 정성이
극진할 뿐만 아니라 장학금을 조성한다,
문중 회관을 새로 짓는다 하는 일에 열심인
이 사장을 보배로 여기게 됐다.
그리하여 이 사장은 자연스레 문중임원 을
맡게 되었으며 문중의 표창을 받기에 이르렀다.
이 사장은 문중의 숙원 사업으로 전국에 흩어져
사는 종인(宗人)들에게 나누어줄 월간지를
발간할수 있기를 희망하고 있다.
이미 유명한 성씨들 가운데 월간지나 격주간
으로 나오는 신문까지 펴내는 경우가 많으며
조상의 문집을 한글로 번역하여 간행하고
이름이 높았던 조상을 기념하여 무슨 학회를
창립한 예도 있다
이 모든 일을 한꺼번에 다할수야 없겠지만,
이 사장은 이름 없이 죽은 대학자 이문형 의
뜻을 기리는 유허비(遺墟碑)만이라도 고향 마을
어귀에 세울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아직은 그것이 시기상조 일수도
있겠기에 다음에 눈을 감으면서 맏아들
이박사 에게 부탁하면 어떨지를 곰곰이 검토하는
중이다.
<역사 교사의 보고서>
서울 강남 의 어느 고등학교 에서 역사 과목을
담당하는 최아무개 선생은 2019년 2학년
네 학급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실시했다.
설문 조사항목에는 조상의 내력에 관한 것도
들어 있었다.
흥미로운 점은 설문 대상 234명 가운데
무응답자 21명을 제외한 213명 중 198명
그러니까 85%의 학생들이 자기 집 또는
큰집에 족보가 있다고 대답한 것이었다.
그 학생들은 자신이 양반의 후예라 믿고
있었다.
최 선생은 흔한 서원(書院)이니 사우(祠宇)와
같은 유교문화의 표상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은
강남의 학생 들이다
양반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갑신정변(1884년)이전에 성이 없는 백성이
대부분 그후 성을 갖기 시작했다.
-TIP- 노산이 양반 을 구별하는 방법
하나: 대대로 살아온 세거지 가 있어야 한다.
하나: 현세대로부터 5대조는 벼슬을 했어야
하나: 웃 세대 족보를 모두 보유하고 있어야
모두갖고 있지못하면 어디에 있는지 알아야
노산 박종문 編輯 朴鍾文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