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 26:25]
예수를 파는 유다가 대답하여 가로되 랍비여 내니이까 대답하시되 네가 말하였도다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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랍비여 내니이까 - 이 문장 앞에 나오는 '예수를 파는 유다'라는 문구는 마태가 열두 제자의 명단을 제시할 때마다 덧붙였던 형용구였다. 여하튼 이미 예수를 팔기로 공회원들과 내통하고 있었으며, 더욱이 예수의 회개에의 권고성 발언에도불구하고 그가 이런 질문을 한다는 것은 보통사람의 양심으로는 생각할 수 없는 지독한 위선이다.
더구나 유다는 다른 제자들과 달리 '랍비'라는 호칭으로 예수를 부른다. 이것은 유다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자 주로 보는 것을 거부하고 예수의 메시야성을 철저히 무시한 언사이다. 특히 마태복음에서는 예수의 적대자들이 '랍비'라는 칭호를 사용한다.
그런데 유다 역시 이 칭호를 사용함으로써 적대자들의 반열에 서고 있는 것이다. 유다는 이 칭호를 겟세마네 동산에서 마지막 배반하는 순간에 또 한 번 사용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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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26:26]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을 주시며 가라사대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저희가 먼을 때에 - 본절 이하 사건의 시간적 위치를 말해 주는의미는. 아마 이때는 유월절 본 식사가 끝나기 전, 곧 '축복의 잔'인 세째번 잔이 비워지기 전으로 추정된다.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 떡기 '떡'은 무교병 큰 덩이일 것이다. 그리고 '축복하였다'는 것은 마치 '오병 이어'에서처럼 감사와 찬양의 평이한 식기도가 아니라
유대인의 유월절식탁의 전통적 관례에 따라 감사를 드린다는 뜻이다. 여기서 ''떡'이라는 단어는 (1) '들어, (2) '축사하시고', (3) '떼어', (4) '주셨다' 네 동사와 연결되는데 본래 이 동사들은 유대인들이 식탁에서 감사드릴 때 하는 동작을 나타내 주는 일반적인 표현이었다
아마 이때 예수께서는 유월절 식사에서 전통적으로 쓰이던 공식 문구인 '우리 주 하나넘, 우주의 왕이시여, 땅에서 떡을 내신 당신께 영광이 있기를'과 같은 말로 축사하셨을 것이다. 떼어 - 떡을 떼는 행위는 공동식사에서 혼히있는 일로 식탁의 주체자의 고유한 일이다. 그런테 여기서 페는 행위는 단순히 먹기 편하게 하기 위함이 아니다.
구약 시대에서는 이 떼내어진 떡은 곧 선민 이스라엘의 뼈아픈 과거의 고통을 상징했었다. 그러나 이제 새 시대의 문을 여선 예수께서 친히 떡을 또시며 당신과 연관시킴으로써 장차 고난받아 쨔기실 당신의 몸을 예시하신 것으로 볼수 있다. 제자들을 주시며...받아 먹으라 - 떡을 떼어 건네는 것은 상호간의 신뢰와 두터운 관계성을 의미한다.
그리고 '받아 먹으라'는 명령 문구는 예수의 죽음과 그죽음이 가져다주는 죄로부터의 혜방(解放)과 구원의 은혜에 참여하라는 축복의 말씀으로 간주할 수 있다. 이것이 내 몸이니라 - 바울과 누가는 여기에 '너희를 위한'이라는 수석어를 첨가시켰고 더불어 '이것을 행하며 나를 기념하라'는 말을 덧붙임으로써 당신의 제자들로 하여금 육체로는 더이상
그들과 함께 계시지 않을 예수 자신을 기억하도록하며 또 그들을 위해 대속의 희생양이 되신 예수를 기념하도록 가르치고 계신다. 이에 비해 마가와 마태는 그냥 '이것은 내 몸이니라'고만 말하면서 '떡'을 곧 죽게 될 예수의 몸과 나란히 연간시키로 있다. 이로써 앞에서 암시했듯이(19절) 예수께서 유월절의 희생양이 되어
그들을 모든 속박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시는 새로운 구속사가 시작될 것이다. 즉 떡이 여러 조각으로 떼어진 것처럼 예수의 몸도 찢어질 것이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의 구원을 하나넘이 정해 주신 유월절 식사와 관련시키듯이, 메시야의 백성들도 예수의 대속적인 죽음을 그분의 권위로 제정된 성례와 연결시킬 것이다.
한편 본문에 제시된 '...이니라'는 말은 주어진 술어를 연결시켜 주는 역할을 하는 계사로서 이 말이 뜻하는 바가 진정 실제적 동질성을 언급한 것인지, 단지 상징적인 대비에 불과한 것인지, 아니면 성령에 의한 결과론적인 임재를 뜻하는 것인지 확실치 않다. 여하튼 예수께서는 친히 화육하신
분으로 당신의 사람들에게 당신이 가르치신 성를 근거한 성만찬을 통해 당신이 주시고자 하시는 크고 놀라운 은혜와 축복을 전달하시고자 한 것은 사실이다. 이에 대해 주의 말씀에 경청했던 그당시 제자들은 이 메시지를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분명 예수께서 주신 이 거룩한 성체를 믿음으로 받아들임으로써 그들의 영적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는 사실을 능히 알았을 것이다
따라서 예수께서 제정하신 성만찬은 단순히 기념 예식일 수 없으며, 또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기억하는 하나의 절차일 수도 없었다. 오히려 그것은 예수의 희생과 주권적인 은혜에 의해 그들이 과거에 얻지 못했던 것을 얻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단순하고도 순수한 열정으로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성만찬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그 예식에 참여하여 성체를 기념하기만 한다면 말로 다할 수 없는 크나큰 은혜의 체험을 하게 될 것이다 한편 본문의 성만찬과 관련된 제견해들을 역사적 변천 과정을 따라 살펴보면 아래와 갈다.
[마 26:27]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 이것이 유월절 식사라는 점을 고려할 때 이 '잔'은세번째 곧 '축복의 잔'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께서는 다시 추사하시고 '오 우리 주 하나님, 우주의 왕이시여, 포도의 열매를 창조하신 당신에게 영광 돌리렵니다'라고 기도했을 것이다.
한편 여기 사용된 '사례하다'는 뜻인 원어 '유카리스테사스'는 '감사'를 뜻하는 '유카리스테오'의 분사로서 여기서 '성만찬'을 뜻하는 '유카리스트'라는 말이 파생되었다. 저희에게 주시며 - 여기 '주시며'에 해당하는 원어 '에도켄'은 부정 과거형으로 단 1회적인 행동을 나타낸다. 즉 예수께서는 사례하신 후 단 한번만 잔을 주셨을 것이다.
따라서 잔을 받은 제자들은 그 잔을 받고 차례로 돌려가며 마셨을 것이다. 다 이것을 마시라 - 마가는 '저희에게 주시니 다 이를 마시매'(막 14:23)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마태는 이 본문을 '너희가 다 이것을 먹으라'고 명령한 것과 일치시킴으로써 더욱 이 장면을 생동감있게 전하고 있다.
특히 여기서 '다'라는 말이 강조된 것은 떡을 먹은 사람이면 '모두' 잔을 마시는 일에 참여해야 할 것을 암시한 것이다. 결국 이 말씀은 사제들만을 잔 마시는 행사에 참여시키고 있는 로마 카톨릭의 예전의 그릇됨을 분명히 지적해 주고 있다.
실로 그들은 사도들에게 돌려진 잔은 오직 사제들만이 계승한다는 원칙을 고수함으로써 일반 신도들의 성찬 예식을 잘못 인도하고 있다. 그러나 주의 살과 마찬가지로 주의 피는 우리 모든 신자의 신령한 음식이요 음료가 되어야 한다.
[마 26:28]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 구약 제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체죄용서를 얻게 하는 대속 제물의 '피'였다. 실로 피 없이는 하나님께 속죄받을수 없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짐승으로서의 대속 제물은 임시적이요, 단편적이며, 불완전한 효능을 가지고있어 인간을 죄악에서 완전히 자유롭게 할 수 없었다.
따라서 이제 주께서는 그 대속제물의 궁극적 완성자요 영원한 표상으로서 친히 십자가 제단에 오르시려 하신 것이다(요일 1:7). 정녕 당신의 죽음은 인류의 죄를 용서하시는 유일하고도, 가장 확실한 근거이다.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 히브리 관용구에 의하면 '많은 사람'은 '모든 사람'을 뜻한다.
즉 예수께서 어떤 특정한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죽었으며, 그 외의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는 죽지않았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 죽음은 본질적으로 세상 모두를 위해서 죽었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이 죽음의 선한 영향력이 각자의 믿음 여하에 달려 있다는 점은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한편 '흘리는 바'에 해당하는 원어 '에크퀸노메논'은 현재수동태 분사를 취한 단어로서 당신의 대속적 죽음이 확정적 사실이며, 지금부터 영원토록 흘려질당신의 피흘림으로 인해 그대속의 효력이 영속할 것임을 드러내고 계신다.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
예수의 이같은 선인은 구약의 출 24:8 ; 렘 31:31-34 ; 슥 9:11 과 깊은 관계를 가진다. 특히 바울과 누가는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라는 말을 사용함로써 렘 31:31-34의 내용과 긴밀히 연관시키고 있다. 한편 본문에 언급된 '언약'란 말은 '둘' 사이에 무엇을 '세우는 것', 곧 둘 사이에 맺어진 계약을 뜻한다.
그런데 유대인들의 개념에 있어서 이 언약은 피흘린 생명을 근거로 맺는 그야말로 전존재론적 약속을 의미한다. 이졔 예수께서는 당신의 피, 곧 십자가 회생을 담보로한 새로운 계약을 맺으시고 계신 것이다. 즉 그 옛날 이스라엘이 출애굽한 직후 '시내산'에서 짐승의 피로 맺었던 '옛 언약'의 시대를 마감하시
이제 그 옛 언약이 상징하는 바 '갈보리 십자가'에서의 당신의 피흘림을 통해 온 인류와 교회 앞에 본질적으로 '새로운 언약'을 수립하셨다. 따라서 성찬에 참여하여 이 예수의 흘린 피를 마시는 자는 개별적으로 내밀하게 이새 언약에 참여하는 영광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마 26:29]
그러나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마시지 아니하리라 - 먼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이란 유대인들이 기도 중 포도주를 가리키는 통상적 표현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신 때는 유월절 식사 중 마지막 네번째 잔을 마신 후라고 보는 것이 문맥상 적절하다. 즉 예수께서는 이 최후의 만찬의 마지막 잔을 들이키심으로써 구약 술법에의한 유월절 식사가 최종 마감되었음을 선언하신 것이다.
이제 예수 자신의 관점에서는 이 지상에서 오직 '고난의 잔'만을 남겨놓고 계신것이며, 구속사적 관점에서는 구약의 유월절 예식이 마감되고 새언약에 따른 성찬 예식이 새롭게 제정된 것이다. 한편 유월절 식사 중 잔을 네 번 마시는 것은 출 6:6, 7의 네 가지 약속에 대응된다. 따라서 예수가 성례 제정에서 말씀한 세번째 축복의 잔은 구속과 관계되는데 비해
네번째 잔은 '너희로 내 백성을 삼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니'라는 약속에 대응되는 것이다. 이제 예수께서는 이 네번째 잔을 드시며, 더 이상의 잔을 물리치심으로써 제자들의 관심을 하나님나라의 백성된 자로서의 시각에 의한 '아버지의 나라'와 그곳에서의 '기쁨의 잔치'에로 돌리게 하신다.
내 아버지의 나리에서 새것으로 너희와 함께 - 예수께서는 유월절 예식을 마감하시는 자리에서 질적으로 차원을 달리하는 한 예식 곧 '그 나라'에서의 잔치를 고대하고 계신다. 이 종말론적 기대감 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내 아버지의 나라'라고 말씀하신다. 진정 이 아버지의 나라는 예수의 나라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너희와 함께' 마실 것을 이야기함으로써 완성의 때에 예수와 그의 제자들 사이에 이루어질 영속적이고도 친밀한 교제와 운명적 연대성이 강하게 암시되고 있다. 물론 이것은 오늘 이 시대, 우리들에게도 적용되고 약속되는 바이다
.한편 본문의 '새 것란 옛 것과 비교해서 질적으로 차원을 달리하는 것이라는 의미이지 단지 시간적으로 이전에 없었던 '새로운 것'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이는 아버지의 나라 곧 새하늘과 새 땅은 현세의 기존 질서와 차원을 달리하는 질적으로 완전히 새로운 것임을 암시해 준다. 따라서 예수께서 하신 '새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은 단지 작별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 속에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룩될 것과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이 메시야의 축제에 다같이 참여하리라는 약속이 내포되어 있다. 즉 첫번째의 유월절이 애굽에서의 구원 뿐 아니라 약속의 땅에 정착할 것을 기대하는 것처럼 이 최후의 만찬도 앞으로 이루어질 나라에서의 구원과 삶을 기대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에게 있어서 십자가는 결코 실패나 영원한 종결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영광에의 진입로였다. 결국 그의 갈보리로의 행로(行路는 하나님 나라의 보좌로 올라가는 길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