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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7월 9일
말씀 : 시32:1-2
제목 : 화목하게 하심
사람들은 죄를 지으면 숨습니다. 직면하지 않습니다. 직면할 용기도 마음도 없다는 것이 문제인데 이것이 죄의 특징입니다. 구체적인 내용을 성경에서 찾는다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아담과 화와를 만드시고 그 아담과 화와가 첫 번째로 범죄했을 때 반응을 보십시오. 창3:8에서 ‘그들이 그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이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하나님이 동산을 거시실 때 숨었습니다, 대면하지 않고 숨었다는 것은 부끄러워서 숨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대면할 수 있는 힘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죄인들의 특징이 하나님을 피하고 부정하고 멀리 떠나있는 것입니다, 대면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했습니다.
이런 상황을 왜 설명하느냐 하면, 인간이 스스로 죄를 해결할 수도 없지만, 죄에 대한 감각이 사라지고, 해결할 방법도 찾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우리의 죄를 다 사하시고 이제 내가 대신 죄를 다 담당하고 너희들을 죄 없다 선포하고 의인으로 인정했으니 하나님 앞에 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직면할 수 있도록 길을 열었으니 하나님을 구하고 찾으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에 대한 회피는 현실적으로 나타나고 있지 않습니까? 부부간에도 서로 거리낌이 있으면 회피합니다. 바람을 피운다든지 돈을 빌려 빚을 졌다든지, 부부가 서로 몰래 큰일을 질렸다든지 하면 서로 회피합니다. 자식들이 잘못을 저지르면 부모를 회피합니다. 도망갑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은 이제 너희 죄를 사했으니 하나님을 구하고 찾도록 길을 열었으니 ‘오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너희들과 이미 화목시켰으니 와서 직면하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회개는 하나님을 찾는 행위입니다, 분명한 사실은 잘못을 하나님과 직면하면 사람 앞에서도 직면하여 화해의 삶, 용서의 삶을 구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면 사람과의 관계도 회복된다는 말입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이 부분에 대해 질문을 많이 해왔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데 어떤 경로를 통해 알아야 합니까? 바로 십자가의 경로를 통해서만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일에 십자가가 제외된다면 그것은 온전히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뿌리를 두지 않는 모든 믿음,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시작되고, 유지되고, 마쳐지지 않은 모든 믿음은 가짜입니다. 죽은 믿음, 형식적인 믿음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 체험적 믿음, 천국을 맛보는 영광을 절대로 누릴 수 없습니다. 이론적인, 교리적인 믿음밖에 나올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믿음을 십자가에 뿌리는 둔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믿음은 우리가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고 계속적으로 강조해왔습니다. 즉, 우리가 믿습니다. 우리의 의지를 동원해서 확신적인 감정을 동원해서 하나님께 나아가면 하나님이 들어주신다는 믿음은 가짜믿음일 수밖에 없습니다. 믿음은 우리의 감성과 이성과 감정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그리스도를 보고 듣고 그 말씀에 기준을 삼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람들을 대할 때, 사람을 깊이 신뢰하고 의지하는 상황이 올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배신을 당한다든지 모른 체하므로 인해 낭패를 당하는 일들을 겪게 될 때도 있습니다. 기대했는데, 소망을 품었는데 물거품이 될 때가 많지요. 정치를 보면 오늘의 삶의 단면을 보는 것 같습니다. 순식간에 배신도 했다가, 또 친구가 되고 오늘의 친구가 내일의 원수가 되는 상황들을 우리는 늘 보고 있습니다. 이런 일들을 겪다 보면 우리가 이 세상에서 기대하는 것들은 우리의 헛된 희망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믿음도 늘 의심이 생기고 마음에 흔들림이 있습니다. 그래서 구별을 좀 해야 된다는 것인데요, 먼저 감성으로 이성으로 대하는 인간관계와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 형성이 다르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감성으로 감정으로 이성으로 하나님을 대하면 늘 의심과 흔들리는 믿음을 바로세우는 일이 굉장히 힘들어집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감정과 감성으로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십자가의 사실과 진리 앞에 서야 된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처참하고 냉혹한 그 십자가에서 자기 죄를 보고 그 흘리신 보혈의 은혜에 잠기고 내 속에 십자가가 굳건히 세워질 때 믿음은 온전한 믿음, 흔들리지 않은 믿음, 확고한 믿음으로 세워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형식적으로 교리적으로 기계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면, 평소에는 문제가 없을 수 있습니다. 그러고 내가 잘 믿고 있다고 착각하면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를 들어 죽음의 그림자가 덮치면, 어떤 위기상황이나 돌발 상황이 나타나면 여러분들이 믿고 있던 그 하나님은 한 순간에 사라지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믿음을 적용할 수 없는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죽음을 맞이하게 되면 실질적으로는 우리가 평생 의지해 온 하나님은 죽음의 순간 아무 힘이나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누구나 죽음의 순간에는 평강과 기쁨과 소망이 나와야 됩니다. 우리가 지금 믿고 있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그 분의 말씀을 기준으로 이해할 때 평강과 기쁨과 소망으로 죽음을 맞이해야지요. 그런데 그렇게 맞이하느냐 하는 문제는 또 다른 문제가 되어버렸습니다. 우리가 죽음을 맞이할 때 어디에 뿌리를 두고 신앙생활을 했느냐하는 것이 증명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뿌리를 두었다면 온전히 평강과 기쁨과 소망으로 죽음을 맞이할 것입니다. 물론 한 순간 위기감이나 두려움이나 긴장감을 가질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순간은 얼마가지 않아 평안을 찾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감성으로 육체적으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면 죽음 앞에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믿음은 아무 쓸모없는 것이 되고 만다는 말입니다. 의사들이나 간호사들의 말을 빌리자면, 오히려 죽음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목사, 장로 권사님들이라는 소리를 듣습니다. 의료진들이 죽음을 맞이하는 그리스도인을 보고 평안과 기쁨과 소망가운데 죽음을 맞이했다고 들은 기억이 없습니다. 의사 앞에 살려달라고 호들갑을 떠는 사람들이 목사, 장로, 권사님이라면 우리의 믿음을 다시 한 번 점검하고 또한 죽음을 준비하는 삶, 하나님나라를 목적으로 하는 삶을 살고 있는지 점검할 필요가 있고 그 점검의 기준이 바로 십자가복음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의 결정적인 순간에 우리의 믿음이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우리의 삶속에서도 흔히 찾아볼 수 있습니다. 자기에게 조금의 불리함을 참아내지 못하고, 유익이 되는 곳에 자신의 명예를 걸고, 귀찮은 일, 수고스러운 일은 얄팍한 계략으로 피하기만 하고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 한, 절대 우리의 믿음을 삶속에 적용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한, 하나님의 약속은 물거품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우리가 찰떡같이 믿고 있는 하나님, 위기 상황이나 돌발 상황이나 죽음의 문턱에 이르렀을 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장애요소가 된다면 이 얼마나 끔찍한 일입니까? 어떻게 믿음이 죽음 앞에 장애요소가 됩니까? 예를 들어 죽음이 임박했습니다. 현대 의술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무엇을 여러분들이 의지합니까? 기적밖에 의지할 것이 없다고 믿고 낫게 해 달라고 회복하게 해 달라고 다시 기회를 달라고 기도는 하지만, 하나님나라를 소망하며 그 나라를 평생 준비했는데, 그 나라를 준비하는 마음과 자세는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나라를 준비하는데 평소 여러분들의 믿음이 장애가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십자가 복음에서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바로 화목 제물이 되신 그리스도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첫째 화목제물이 되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상급과 보상’을 주십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런 마음을 품고 살아갑니다. 하나님나라의 상급과 보상은 관심이 없고 이 땅에서 보상과 상급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의 상급과 보상을 이 땅의 것으로 이해하고 해석하는 경향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 땅에서 복 받았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합니까? 하나님의 상급으로 이해합니다. (물론 하나님나라의 것도 보상이라고 이해하지만), 그런데요, 이 땅에 복은 하나님나라의 상급과 보상에 비해 언어적으로 설명될 수 없는 엄청난 부분이라 이 땅의 것으로 하나님나라의 상급을 이해하면 안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죄인입니다. 지옥 가야 마땅한 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과 우리가 화목하지 않았다면 벌써 지옥만이 우리가 가야할 곳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나라의 백성들로 초청받고 그리스도의 보혈로 인해 의로운 자로 세움을 입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살아야만 우리의 책임과 의무를 다하는 것이 됩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우리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아야 하고 그 삶의 대가는 하나님나라에서 보상으로 받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사실은 하나님을 버리고 대적한 자들 아닙니까?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 결국 하나님을 버리고 대적한 삶입니다. 그런데요, 이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러면 자녀로서의 의무와 책임이 있습니다. 군대에서도 의무와 책임이 있고 그 의무와 책임을 성실히 했을 때 포상이 있습니다. 사회의 어떤 구조에서도 동일하게 작동하는 문제 아닙니까?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화목제물로 우리에게 내어 주면서 대신 우리를 당신의 백성으로 삼았다면, 우리의 의무와 책임은 그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삶을 성실히 살아가야 합니다. 만일 구원했음에도 불구하고 옛날처럼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짓밟고 살아간다면 십자가의 공로가 적용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 백성으로서 성실이 의무와 책임을 다한 심령들에게 하나님나라에서 상급과 보상을 준비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보상과 상급은 이 땅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있기 때문에 그 나라를 목적으로 삶을 살아가는 것은 당연한 삶의 원리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삶의 목적이 하나님나라에 있고 그것은 십자가의 은혜가 뿌리가 되어 흔들릴 수 없는 사실이요 진리인데,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나라를 목적으로 삶을 살아가는 과정이 하나님나라를 증명해 내고, 설명해내는 일이기 때문에 보상과 상급이 따른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나라의 보상과 상급을 바라본다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이 현실에 만족하며 살아가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이 땅에 욕심을 부리며 이 땅에서 무엇인가 이루고자 하여 신앙을 버리는 일들을 할 수 없다는 말이 됩니다. 우리가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구원만 받으면 하나님나라의 상급이 그냥 따라온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구원만 받았으면 됐지, 상급까지 생각할 필요가 있느냐. 하나님나라에 가면 다 평강과 기쁨으로 살아가는데 상급이 더 이상 필요한 부분이 아니다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굉장히 위험한 생각입니다.
롬10:3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 하였느니라’
보상을 인간이 만들어 내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도 엄청나게 많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면죄부입니다. 그리고 교회에서도 상급을 얼마나 많이 만들어 내고 있습니까? 섬김과 봉사직에 보상을 하고 상금을 줍니다. 상패도 주고 공로패도 주곤 합니다. 이 모든 것들은 인간이 만들어낸 보상입니다. 그래서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진실한 보상이 되신다는 것을 어떻게 보면 이 땅에서 보상을 만들어 내므로 하나님나라의 보상이 희석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둘째 그리스도께서 화목제물이 되셨다는 것은 덮어주셨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구약적으로 이야기하면, 하나님이 유일하게 만나주시는 장소인 속죄소를 가리는 덮개의 의미입니다. 우리의 죄를 덮어주시는 덮개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덮어주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공의의 눈, 율법의 자대로 볼 때 우리의 죄가 보이지 않도록 우리의 죄를 덮어주시는데, 이 말씀은 가려주신다, 보이지 않게 하신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렇게 덮어주신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보혈의 은혜로 인해 우리가 의로운 자로 세워주셨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리스도께 죄를 전가시켰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의로 전가시켰습니다. 이해되십니까? 그리스도의 의가 모든 십자가를 믿는 자에게 전가되어 의의 옷을 입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의의 옷이 덮개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시편32:1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다윗이 인생들에게 기원하고 있는 복은 사죄함의 복입니다. 그가 ‘사죄의 복’을 말하고 있는 것은 처음부터 죄 없는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전제한 것입니다. 즉, 죄 없는 인간이란 결단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는 ‘죄 없는 자’의 복을 기원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사죄함을 받은 자’의 복을 간절히 원하고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다윗이 나열한 죄는 허물은 히브리어로‘폐솨’인데, 반역하다, 거역하다는 뜻입니다. 그 다음에 하나님의 뜻을 인간의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오는 것’을 의미합니다.
둘째는 죄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하타아’인데, 이 용어는 표적을 빗 맞추거나 참된 길, 진리의 길에서 벗어난 것을 말합니다. 셋째는 2절의 ‘정죄’에서 ‘죄’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운’‘왜곡된 것’을 의미하는 말로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는 태도’라는 말입니다. 이런 죄를 지적하는 것은 인간의 모든 죄를 다 포함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이 죄악들에서 구원을 받은 자 들만이 진정으로 복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선포하고 있는데, 사죄에 대한 세 가지 용어로 나열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사함을 얻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나사’ 인데 이 뜻은 하나님께서 이 죄악의 짐을 치워버리거나 옮겨주셨다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더 이상 죄의 고통을 받지 않는 다는 뜻입니다.
둘째, ‘가리움을 받은’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카사’가 본래 ‘덮다’는 의미입니다(85:2; 잠 10:12). 즉, 죄인의 죄가 가리워져서 더 이상 하나님께 보이지 않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 죄가 가리워짐으로 그 죄가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처럼 여겨지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셋째는 ‘정죄를 당치 않은’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로하솨브’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죄에 대한 책임을 일체 전가하지 않으셨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이런 죄 사함의 은총에 최소한 한 가지 인간적 요소가 필수적입니다. 그 요소는 ‘마음에 간사가 없고’라는 구절에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간사’는 히브리어 ‘레미야’인데 ‘속임’을 의미합니다. 이는 완전한 사죄의 은총을 받기 위해서 인간이 자신의 죄를 하나라도 속임 없이 하나님 앞에 고백해야 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 화목제물과 연관되어 있는 또 다른 개념은 ‘화목’입니다. 그리스도는 귀한 보배피를 흘러 우리와 화목하게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친구로 삼으셨고, 성자 하나님과 우리를 하나로 묶어 한 몸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속죄가 하나님으로 이해하셔도 된다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인해 하나님과 우리와의 적대관계가 소멸되었습니다. 의롭고 거룩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화평을 이루게 된 것입니다.
이 말씀이 왜 중요하냐 하면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교제와 교통에 걸림돌을 완전히 제거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품고 계신 그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가로막고 있는 엄청난 걸림돌이 있었습니다, 이 걸림돌은 누구도 치우지 못하는 걸림돌입니다. 천사가 총동원되어도 소용없는 걸림돌입니다. 이것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성자 하나님, 죄 없으신 하나님이 오셔서 대신 걸림돌을 짊어지셔야만 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는 죄로 인하여 갈라진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서서 중보자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나라에 도달할 수 없는 엄청난 거리를 예수님이 십자가의 다리를 놓으셨습니다.
어떤 형태의 화목이든지 화목은 즐거운 일입니다. 갈등으로 헤어졌던 친구가 서로 화해하고, 마음으로 멀어졌단 사람들이 가까워지고, 부모 곁을 떠나고 싶어 멀리 떠났던 자녀들이 다시 부모 곁으로 돌아오고, 이런 화목은 언제나 즐겁고 감동적입니다. 하물며 거룩하신 하나님과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화목하는 것입니다. 고후5:18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골1:21-22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하게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이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
그리스도를 믿는 죄인입니다. 이런 죄인과 거룩하신 하나님과 화목했습니다. 이 화목으로 인해 인간은 드디어 평화를 누리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진정한 보상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우리가 고백하는 믿음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만족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까? 아니면 여러분들이 만들어 낸 환경에 두고 있습니까?
죽은 후에 천국을 소유하는 백성으로서의 삶의 근거가 속죄에 근거합니까? 아니면 여러분들이 행하는 순종에 근거합니까?
여러분들이 영원한 구원과 관련하여 여러분들의 믿음은 어디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무엇을 신뢰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죄를 덮어주시는 그리스도가 근거가 되지 않으면 하나님과 화목 된 상태가 아닙니다.
화목을 이루신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우리에게 나타난 보상이 무엇입니까?
다음 시간부터 이 보상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아보기를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