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늦가을, 작품을 쓰다가 답답해서 혼자 정관평 들을 산책한 적이 있었다. 이 생각 저 생각, 작품을 어떻게 전개해갈 것인가를 고심하며 논둑을 걷고 있는데 내 귓가에서,
“나, 채련이야. 나, 채련이야.”
하는 수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너무 놀라서 걸음을 멈추고 그 자리에 선 채 꼼짝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담무갈>속의 수잔이, <우담바라>에서 죽은 채련의 환생임을 속삭여주고 있는 그 놀라움, 나는 그때 받았던 충격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그 이후부터 나는 <담무갈>을 <우담바라>의 후편으로 전개해갔다.
모든 생명은 자신의 완성을 향해 부단히 진화해가고 있다. 그것은 일종의 회귀 본능으로 모든 생명 안에 내재해 있는 근원적인 힘이다.
때문에 완성에 이르지 못한 생명은 자신의 완성을 위해, 완성에 이른 생명은 완성에 이르지 못한 다른 생명의 완성을 돕기 위해 부단히 몸을 받고 환생을 반복해간다. 이런 힘은 작중의 인물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음을 그들이 펼쳐가는 생을 통해 비로소 알았다.
위의 얘기는 <담무갈> 작가의 말중에서 한 부분입니다..
남지심님의 경험은 일반 독자(시자)로써는 알기 힘든
특수한 경험이 아닐까 합니다. 새로운 누군가를 만드는..
소설속의 인물이 될수도 그림속의 인물이 될수도 있는
새로운 이름을 부여받은 인물은 소설안에서. 그림속에서만
표정이 있고 감정과 이성이 있지는 않은듯 합니다.
그 인물들은 비록 작가의 손과 머리 가슴으로 인해 존재하기
시작했지만 후에는 그 인물들은 새로운 생명력을 갖고 있는
하나의 개체가 되어 있는것입니다.. 비록 그것이 생명을
부여해준 작가의 생각과 가슴속에서만이 존재하는 또 다른
허상이겠지만..
이렇듯 작가라는 분들은 항상 그들이 만들어 놓은 인물들과
함께 살아가는듯 합니다. 만들어 놓으면 그대로 잊혀지는
일회성이 아닌 그 분들에게는 실제로 생명을 갖고 있는
인물로 그렇게 함께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받으며 평생을
살아가는듯 합니다...
우리가 아는 피노키오와 그 할아버지의 이야기 처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