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땀이 덜 배입니다. 산행에서 느껴지는 바람이 가을을 더 가까이 부르고 있습니다. 머리를 들면 하늘은 완전 가을색입니다. 이렇게 파랗고 맑은 하늘을 볼 수 있다니 감사가 절로 나옵니다. 누가 일부러 만들 수가 있겠습니까? 그림보다도 아름다운 하늘을 머리에 얹고 아직은 푸르른 잎으로 가득한 산길을 오릅니다. 멋진 아침 아닌가요? 가을바람을 맞으며 밤송이가 익어가고 도토리가 하나 둘 떨어집니다. 반 이상 빗물에 젖었던 여름이 계면쩍은 모습으로 멀어져가고 있습니다. 어찌 됐든 지나간 일이지요. 탓한들 뭔 소용이고 탓해봐야 뭔 득이 있겠습니까? 어차피 지나가는 시간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대비가 필요함을 배웠습니다.
지난 주말은 8월의 자투리를 뺏은 기분이었고 오늘이야말로 9월의 주말을 느낍니다. 하늘도 다르고 바람도 다르고 기분도 다릅니다. 아침 기온이 이제 20도 아래로까지 내려가고 있습니다. 20도 위와 아래가 이렇게 차이가 난다는 것을 확실하게 느낍니다. 물론 낮 기온은 여전히 30도를 붙잡고 있기는 합니다. 그래봤자 다음 주를 이겨내기 어려우리라 생각합니다. 이번 한가위는 9월의 끄트머리에 있어서 가을의 정취가 물씬 담길 것이라 예상합니다. 기분만 그렇기 시장이나 마트에 가면 사실 꽝입니다. 세상에! 이게 과일인지 금덩이인지 모르겠습니다. 뱃속에 들어가 금덩이가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입이 쩍 벌어집니다. 양을 줄여야 하나?
세상은 어렵고 힘들어도 우리는 즐겁고 행복하게 살아야 합니다. 돈 안들이고 행복한 길도 있을 테니 말입니다. 파란 하늘을 이고 산으로 갑니다. ㅋㅋ
건강하고 행복한 주말을 빕니다. ^)^
2023년 09월 09일 김종우 목사 드림
“아침빛 같이 뚜렷하고 달 같이 아름답고 해 같이 맑고 기치를 벌인 군대 같이 엄위한 여자가 누구인가” (아가 6 : 10)
<달짝지근해 - 7510>
우리는 언제부터 사랑을 할까요? 그야 생명을 가지고 태어날 때부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남녀 간 이성의 사랑에 눈을 뜨는 것은 아마도 사춘기를 기점으로 구체화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물론 초등학교 학생들도 서로 좋아하는 아이가 있는 줄 알고 있습니다. 조금 일찍 눈을 떴다고나 할까요? 대부분은 그냥 친구처럼 생각하며 가깝게 지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성으로의 감정을 느끼기 시작하는 것은 사춘기를 지나며 생기는 것이 일반적인 과정이라 여겨집니다. 설렘이나 울렁거림 그리고 왠지 그냥 보고 싶어지는 마음이 생기는 등등 자신도 잘 깨닫지 못하며 찾아옵니다. 한 번이라도 더 보려고 지나던 그 길로 자주 다니게 됩니다. 설렘이 깊어지지요.
나이 들어 소위 철이 들면 나아집니까? 그런 사람을 만나지 못한 것이 문제이지 그런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설령 그런 나이를 지났다고 생각하는 때조차 일어날 수 있습니다. ‘로맨스그레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아마도 나이와는 상관없는 일이 아닐까요? 십대 청소년 때 소위 사춘기 때는 멋도 모르고 감정이 복잡해지기도 합니다. 그 때는 이성에 눈을 뜨는 때이기도 하지만 또한 인생의 문제에 대해서도 생각이 깊어지기 시작하는 때이기도 합니다. 독서나 영화 또는 TV 드라마에서조차 감정이입이 쉽게 되면서 흠뻑 빠지기도 합니다. 주인공의 분신이 되어 며칠을 공상 속에 헤맬 때도 있습니다. 그런 경험들을 쌓으며 자신을 만들어갑니다.
다른 많은 경험들이 있지만 사랑도 우리 인생을 만드는데 큰 역할과 영향을 미칩니다. 그래서 때로는 사랑에 목숨까지도 거는 것입니다. 물론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희생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가족이 아닌 이성의 사랑입니다. 그 순간 그에게는 사랑이 전부였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빠져보지 않은 사람은 이해하기 어려울지도 모릅니다. 그깟 사랑 때문에? 말할지 모릅니다. 당해보지 않으니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대표적으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읽어보면 혹시 조금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본인이 직접 그런 사랑에 부딪쳐보는 것이 가장 좋겠지요. 문제는 그만한 상대를 찾는 일입니다.
그냥 한 가지 일에 몰두하여 지낸 평범한 직장인입니다. 어떻게 빠져버렸는지 그것으로 식사까지 대용합니다. 그러니 영양실조에 걸릴 수밖에 없지요. 사실 현실 속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도 안 되고요. 자기 일에 몰두하여 있고 아마도 그것으로 인정을 받고 있으니 또한 자랑스럽고 자부심도 가질 수 있습니다. 그야말로 그의 인생의 의미이고 보람입니다. 그렇게 좌우 돌아볼 틈도 없이 나이 40이 되었습니다. ‘치호’는 제과회사의 알아주는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혼자 사는 데 아무런 어려움은 없습니다. 망나니 같은 형의 뒷바라지까지 해주며 살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성에 대해 관심도 감정도 없이 살아왔습니다.
어느 날 은행에 볼일 보러 갑니다. 기다리며 한 어린아이와 장난하는 것이 창구 직원 눈에 찍힙니다. 마침 치호의 볼일이 그 창구직원과 상대하게 되었습니다. ‘일영’과 치호의 만남은 그렇게 이루어졌습니다. 치호의 재밌는 행동에 관심을 주며 적극적으로 나옵니다. 사실 일영의 근무태도가 여타직원들과는 좀 다르기는 합니다. 입사한지 얼마 되지 않아 타 직원들과 상사에게도 이미 눈도장을 찍었습니다. 미혼모로 딸을 키워온 매우 당찬 여성입니다. 하는 태도를 보면 긍정적이고 적극적이며 당돌하기도 합니다. 홀몸으로 아이를 키워온 이력만큼 갑작스런 상황에도 대처능력을 갖추고 있다고 보입니다. 또한 그 동안 마땅한 이성을 만나지 못했나 봅니다.
처음(?) 당해보는 이성과의 의미 있는(?) 대화입니다. 좀 엉뚱하면서도 그냥 끌려들어갑니다. 일부러 피할 수도 피할 필요도 없는 그런 대화입니다. 그래서 또 만납니다. 마치 드라마 끝처럼 다음 회를 기다리게 만드는 것이지요. 큰돈이 드는 것도 아니고 서로를 해코지하는 것도 아니고 어딘가 낯설지만 괜스레 기대도 되는 교제가 시작된 것입니다. 더구나 싫은 감정이 드는 것도 아닙니다. 시간이 가고 만나는 회수가 늘어가고 전에는 몰랐던 감정이 생깁니다. 여태 경험하지 못한 느낌이 생깁니다. 마치 어린아이 같은 장난도 서슴없이 드러냅니다. 일영은 치호의 좀 모자란듯하면서 순수한 마음과 행동에 끌립니다. 치호는 처음 가져보는 야릇한 감정에 끌려들어갑니다.
사랑은 동화 같다가도 소설 ‘테스’ 같은 비극이 되기도 합니다. 소위 롤러코스터를 타는 기분이 들지요. 사랑의 묘미라 할 수도 있지만 당하는 사람은 그야말로 천국과 지옥을 넘나듭니다. 일영은 강한듯하다가도 약해지고, 치호는 생소한 자신의 감정 변화에 어찌할 바를 모릅니다. 오락가락, 왔다 갔다 하는, 흔한 사랑의 터널을 지나 두 사람의 행복한 사랑의 드라마가 완성됩니다. 영화 ‘달짝지근해 - 7510’(Honey Sweet)을 보았습니다. 두 배우의 진짜 연애를 보는듯한 착각을 합니다. 예쁘고 귀엽고 오금이 저립니다. 분명 두 사람이 모두 중년의 나이일 텐데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을 하면 예뻐지고 젊어집니다. 나이 탓만 말고 연애 한 번 해보시죠. ㅋㅋ
살자고 먹는 겁니다
모든 동물이 마찬가지지만 사람은 살기 위해 먹어야 합니다. 먹는다는 것은 그 자체의 즐거움도 있지만 우선 살아야 하기 때문에 반드시 필요합니다. 양식의 문제는 곧 생명의 문제이기 때문에 삶의 가장 기본적인 문제입니다. 개인도 가정도 사회도 나아가 국가도 먹는 문제부터 해결하지 않으면 다른 것은 문제도 되지 않습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했듯이 아무리 좋은 일이 있다 하더라도 배가 고프면 만사가 귀찮아집니다. 부부교육을 시킬 때도 그렇게 권고합니다. 아내가 혹 남편에게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할 경우가 생긴다면 절대로 식전에 하지 말라고 충고합니다. 배고픈 남편에게서 긍정적인 답변이 나올 확률은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의식주 가운데서도 먹는 것이 우선입니다. 일단 먹어야 그 다음 문제가 보이는 것이지요. 부자도 먹어야 하고 가난한 자도 먹어야 합니다. 성인군자도 일단 먹어야 성인군자의 체면을 지키기 쉽습니다. 뜻이 있어 정해놓은 일이 아니라면 억지로 굶어야 한다는 것은 단지 고통이요 생명의 위협까지 받아야 하는 일입니다.
우리 하나님도 우리가 먹어야 사는 존재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십니다. 그러나 그것을 구하고 그것을 위해 기도하는 수준의 사람이 되는 것은 원치 않으십니다. 그렇다면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기도를 가르쳐주신 예수님이 잘못된 것이냐 하고 반문할 수 있습니다. 주님 가르쳐주신 기도에 나와 있으니까요. 마 6 : 11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이 말씀이 무슨 뜻인가 알아야 합니다. 그 뒤의 내용을 본다면 어렵지 않게 깨달을 수 있습니다. 25절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그런 의식주의 문제 가지고 구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31 - 32절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 것은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백성이 구할 대상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앞에서는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고 해놓고, 뒤에서는 아니라고 하니 이상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장난하십니까?
앞뒤가 맞지를 않지요. 그러므로 기도해서 구하라 하신 이 ‘일용할 양식’이 육적인 양식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솔직히 우리의 기도 대부분이 어디에 치우쳐 있는가, 살펴보십시오. 육적입니까, 영적입니까? 이미 시작하였습니다. 다시 수능시험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미 ‘수험생을 위한 100일 기도회’가 교회마다 연례행사처럼 나타난 줄 압니다. 물론 넓게 생각하면 우리 자식들이 하나님의 일꾼이 되도록 필요한 과정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과연 그런 비전을 가지고 기도하는 부모가 얼마나 될까요? 개인적인 욕심이 아닐까요? 남편의 직장문제, 자식의 취업문제, 사업의 문제, 가족 안의 문제 등등. 왜 금식까지 하면서 울부짖는지 한번 돌아보아야 합니다. 마 6 : 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하나님의 것을 위해서 구한 것이 얼마나 되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기도한 것이 얼마나 될까 생각해봅니다. 우리 하나님이 기뻐하실까요? 우리의 기도가 주로 무엇이었는지 정직하게 판단해보기 바랍니다.
이러한 우리들의 신앙 수준으로 보니 성경도 그렇게 보입니다. 요 6 : 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주님은 분명히 영을 말씀하시는데 우리는 육으로 듣습니다. 그게 우리의 수준이었다는 말입니다. 그 뒤에 설명이 나옴에도 불구하고 ‘일용할 양식’을 우리는 육적인 양식으로 구해 왔습니다. 좋으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서 아직도 어린아이, 젖먹이인 우리를 생각하사 그 기도도 응답하셨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 수준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됩니다. 10년, 20년 아니 그 이상이 되었는데도 여전히 젖이나 먹어야 하겠습니까? 아버지께서 탄식하십니다. 잠 17 : 21 “미련한 자를 낳는 자는 근심을 당하나니 미련한 자의 아비는 낙이 없느니라” 우리 아버지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고 부르신 낙이 없으실 것입니다. 그런 자녀로 살아야 하겠습니까? 그런 것은 이방인이나 구하는 것이랍니다. 우리가 이방인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우선은 성경을 모르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깨달았으면 또한 행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제 양식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살펴봅니다. 물론 성경에도 육의 양식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구약에서는 광야에서 먹은 만나이고 신약에서는 예수님의 오병이어 기적으로 먹은 양식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제 알고자 하는 것은 신약의 그리스도인이 먹어야 할 양식 곧 영적 양식입니다. 그런데 육의 양식에도 먹어야 할 양식이 있는가 하면 먹어서는 안 될 양식이 있습니다. 가끔 부정식품이나 집단 식중독에 관한 기사가 나옵니다. 볼 때마다 화도 나고 안타깝습니다. 이제는 해산물에 비상이 걸렸습니다. 바로 이웃 나라에서 방사능 오염수를 바다에 방출했기 때문입니다. 괜찮다고 주장하는데 불안한 마음은 피할 수 없습니다. 앞으로 먹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많은 사람이 고민합니다. 그 좋아하는 회를 못 먹게 되다니, 마음이 아픕니다. 당장 식탁에 오른 것은 아니지만 곧 닥치리라는 것은 뻔한 일입니다. 먹는 일은 그만큼 중요한 것입니다. 생명이 달려있으니가요.
부정식품이 한창 사회문제가 된 적도 있습니다. 그것은 좀 과하게 표현한다면 살인죄를 적용해야 할 일입니다. 먹는 것은 생명과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자기는 안 먹으면서 남들은 먹으라는 것 아닙니까? 너나 먹고 죽으라는 이야기지요. 그러니 살인 아닙니까? 아무튼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영적인 양식에도 먹어야 할 양식이 있는가 하면 먹어서는 안 될 양식이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즉 하나님이 주시는 양식이 있는가 하면 사단이 주는 양식도 있습니다. 잘 아는 대로 영적인 양식은 입으로 먹지 않고 귀로 듣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양식은 진리의 말씀이고 사단이 주는 양식은 거짓말, 비진리의 말입니다. 잘 아는 대로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의 말씀이고 사단의 말은 절대 먹어서는 안 되는 독입니다.
하나님이 백성을 초대하십니다. 사 55 : 1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여기 먹을 양식은 물, 포도주 그리고 젖입니다. 모두 하나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육적인 양식이 아니라 영적인 양식입니다. 그러므로 이 모든 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비유하고 있는 것이지요. 신 32 : 2 “나의 교훈은 내리는 비요 나의 말은 맺히는 이슬이요 연한 풀 위에 가는 비요 채소 위에 단 비로다” 비, 이슬 모두 물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을 비유합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포도나무라고 하지요. 요 15 : 1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포도나무에서 나오는 열매로 포도주가 생깁니다. 예수님에게서 말씀이 나오듯이 말이지요. 고전 3 : 2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치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사도 바울이 말한 젖도 젖이 아니라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초대하신 하나님은 백성에게 진짜 포도주나 젖이 아니라 바로 당신의 말씀을 주려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누구를 초대하시는가 보십시오.
하나님은 ‘목마른 자들,’ 그리고 ‘돈 없는 자’를 부르십니다. 배부른 자들이나 부자들을 부르시지 않습니다. 부족함이 없다 하는 자들을 부른다 한들 오겠습니까? 하나님은 간절히 찾는 자들을 부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말씀하시지요. 마 5 : 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가난한 자는 부족함을 느끼고 그것을 채우려고 찾을 것입니다. 바로 그런 사람을 주님은 찾으십니다. 우리에게 영생을 주는 하나님의 말씀 곧 진리의 말씀은 돈으로도 환산이 되지 않습니다. 값을 따질 수가 없지요. 마치 공기와도 같습니다. 그래서 그냥 주십니다. 우리는 목마른 심정으로 나아가면 됩니다. 아무런 제약이 없지요. 오로지 주님 앞에 나아가면 됩니다. 단지 사람들이 나오지 않는 것이 문제지요. 믿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 8 : 45 “내가 진리를 말하므로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는도다”
진리의 말씀을 가진 예수님께 오지 않으면서 그들은 엉뚱한 곳에 힘을 쏟습니다. 사 55 : 2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나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마음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백성이 먹고 있는 것이 ‘양식 아닌 것’이며 ‘배부르게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양식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다시 말해서 진리의 말씀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당시 서기관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 8 : 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마귀의 자식으로 마귀가 함께 하는 자들이니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그들에게서는 진리가 나오지 않고 거짓과 비진리가 나올 것입니다. 그런데 백성은 그들을 예우하며 그 말을 먹고 살았지요. 오늘 우리는 어떠합니까? 열심히 교회 출석하고 봉사하고 헌금합니다. 그런데 무엇을 먹고 있는지 생각해보았습니까? 과연 진리의 말씀인지, 아니면 진리 같은 비진리인지 생각해보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나오는 말씀이니 당연히 하나님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예, 그게 우리 신자들의 소망입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기 때문에 문제입니다.
이사야는 구약의 선지자입니다. 하나님이 구약 선지자로 말씀하신 것은 예수님이 오셔서 이루셨습니다.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또는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한다고 탄식하신 그 탄식은 어느 때 이루어질 일입니까? 예수님 때 이루어질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셔서 말씀하십니다. 요 6 : 27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 치신 자니라”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라 하십니다. 선지자 이사야의 말한바 ‘양식 아닌 것’이며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하여 일하지 말라는 것이지요. 우리는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일해야 합니다.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주시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십니다. 요 14 : 24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너희의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 그리고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입니다. 요 17 : 17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교회에서는 당연히 하나님 말씀 곧 진리의 말씀이 나와야 합니다. 예수님 당시 예루살렘 성전에서 과연 하나님 말씀이 나왔습니까? 그 때 성전을 장악하고 있던 사람이 누구입니까? 제사장, 장로들 그리고 서기관, 바리새인들입니다. 대부분 예수님을 비난하고 모욕하고 반대하던 사람들입니다. 결국 백성을 충동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막 15 : 1 “새벽에 대제사장들이 즉시 장로들과 서기관들 곧 온 공회로 더불어 의논하고 예수를 결박하여 끌고 가서 빌라도에게 넘겨주니” 그랬지요. 그들이 성전을 장악하고 백성들의 영혼을 미혹하였습니다. 그러나 어쩌겠습니까? 백성은 권세를 잡고 있는 자들에게 약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전세를 내며 그곳에 헌금을 하며 성전을 지키고 있던 그들을 섬겨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가르치는 대로 따라가야 하지요. 예수님은 탄식하셨습니다. 마 15 : 14 “그냥 두어라 저희는 소경이 되어 소경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 하신대” 그 때의 일은 오늘날 우리에게 거울이 되고 경계가 됩니다. 그 어리석음을 그대로 답습해서는 안 됩니다.
교회에서 나오는 말씀이 당연히 하나님 말씀이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교회에 하나님의 종이 아니라 사단의 종이 서있기 때문이지요. 살후 2 : 4 “저는 대적하는 자라 범사에 일컫는 하나님이나 숭배함을 받는 자 위에 뛰어나 자존하여 하나님 성전에 앉아 자기를 보여 하나님이라 하느니라” 그가 자기를 가리켜 ‘사단의 종’이라 밝히겠습니까? 그런 일은 없습니다. 그는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종입니다. 스스로 사단의 종이라 한다면 그 교회에 누가 가겠습니까? 모르기 때문에 가서 말씀 듣고 헌금도 하고 충성 봉사하는 것입니다. 마귀는 결코 자신을 마귀라고 드러내지 않습니다. 고후 11 : 13 - 15 “저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궤휼의 역군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그러므로 사단의 일군들도 자기를 의의 일군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큰 일이 아니라 저희의 결국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 때문에 성도 스스로 분별해야 합니다. 어렵지요. 아니, 모르니까 어려운 것입니다. 알면 쉽지요. 문제는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는데 있습니다. 알아야 합니다. 살기 위해서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가 무엇을 먹는지도 모르고 먹습니다. 때로는 육의 양식도 분별하지 못해 먹고 탈이 나는데 영의 양식을 분별하는 것이 그냥 되겠습니까?
하나님이 창설하신 에덴동산에도 먹어서는 안 되는 양식이 있었습니다.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동산에 있었다는 말입니다. 오늘날로 말한다면 바로 교회에 있다는 말이지요. 그곳에 먹어도 되는 각종 나무의 실과도 있었지만 먹어서는 안 되는 선악나무의 실과도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우리 교회에 먹어서는 안 되는 양식이 있다는 말입니다. 똑같이 하나님 말씀을 전합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잘 모릅니다. 분별을 하지 못합니다. 교회에서 전파되는 말씀이니 어련히 하나님의 말씀이겠거니 하고 아멘! 하며 받아먹습니다. 안타까운 일이지요.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사 55 : 8 - 9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그럼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수준으로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치는 것입니다. 사 29 : 13 “주께서 가라사대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자기 수준으로 내리는 것이지요.
우리는 그런 예를 많이 보아 왔습니다. 창세 때는 뱀이 말을 했답니다. 그리고 죄를 짓기 전에는 걸어 다녔는데 저주를 받아 기어 다니게 되었답니다. 창 3 : 14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육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종신토록 흙을 먹을지니라” 그러면서도 끝 부분은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못합니다. 모르니까요. 뱀이 흙을 먹습니까? 말이 안 되지요. 앞에서도 말했듯이 예수님 가르쳐주신 기도 중에 ‘일용할 양식’을 육의 양식으로 생각합니다. 특히 마지막 때의 징조에 대해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마 24 : 19 “그 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로다” 그래서 때가 가까울수록 결혼도 가능하면 하지 말고 아이도 낳지 말라고 합니다. 근래에 와서는 모두가 인구 감소의 위기를 느끼고 있기 때문에 이 말이 쏙 들어갔습니다. 29절 “그 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천재지변이 일어난답니다. 모두가 우리 수준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말들이지요. 거짓말입니다. 한 마디로 비진리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전하는 목자가 하나님의 종입니까?
다시 말하지만 세상에서도 기본적으로 먹어야 삽니다. 살자고 먹는 것입니다. 문제는 무엇을 먹느냐 하는 것이지요. 지금 옆에 있는 이웃나라에서 핵 오염수를 방출하기 시작했습니다. 된다, 안 된다, 먹자, 말자 아우성입니다. 먹자니 찝찝하고 안 먹자니 안타깝고, 어쩌지요? 왜 이렇게 아우성입니까? 이 먹는 것이 우리 생명과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육신에 대해서는 예민함에도 영적인 것에 대해서는 너무 무감각합니다. 우리 아버지 하나님 보시기에 얼마나 답답하시겠습니까? 세상 사람들이야 그렇다 해도 하나님을 믿는다는 그리스도인들조차 육신에 매여 있습니다. 자신들이 지금 어떤 양식을 먹고 있는지 그다지 관심이 없습니다. 그냥 교회에서 나오는 것이니 당연히 하나님말씀이라고 여깁니다. 앞에서 이야기했지만 그것은 그냥 희망사항일 뿐입니다. 그래야 할 텐데 그렇지 않으니 문제입니다. 초림 때 예루살렘이 그러지 않았습니까?
그렇게 밤이 된 세상에 예수님이 빛으로 오셨습니다. 요 12 : 46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두움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 예수께로 나가면 그 빛을 받기에 또한 빛이 되는 것입니다. 36절 “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떠나가서 숨으시니라” 예수님은 세상에 계신 동안 백성이 빛을 받고 빛의 아들들이 되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러나 따라온 자가 많지 않았습니다. 오늘날은 어떻게 될까요? 이 어두운 세상에 주님 다시 오시면 비로소 빛이 비출 것입니다. 그런데 따라갈 자가 얼마나 될까요? 그 빛이 생명이고 그 분에게서 생명의 말씀이 나올 것입니다. 우리가 먹어야 할 양식입니다. 우리의 영도 굶으면 죽습니다. 먹어야 합니다. 살자고 먹는 것입니다. 다만 먹어야 할 양식을 찾아 먹어야 하는 것입니다. 무턱대고 아멘, 하면서 삼키면 안 됩니다.
성경이 경고합니다. 요일 4 : 1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 거짓 선지자가 많이 나올 것을 말씀하십니다.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인데 ‘거짓 선지자’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아니라 마귀의 영이 함께 한다는 뜻입니다. 무엇으로 분별합니까? 그 영은 보이지 않으니 그 하는 말로 분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전하지만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이라고 포장은 되어 있지만 사실은 ‘사람의 계명’이란 말입니다. 그것을 어디서 전한다고요?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 선포합니다. 정신 차리지 않으면 함께 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스스로 배워서 깨우쳐 알고 신앙해야 합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찾아다니십시오. 단 12 : 4 “다니엘아 마지막 때까지 이 말을 간수하고 이 글을 봉함하라 많은 사람이 빨리 왕래하며 지식이 더하리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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