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황수鳳凰愁/조지훈
벌레먹은 두리기둥 빛 낡은 단청丹靑 풍경소리 날러간 추녀 끝에는
산새도 비둘기도 동주리를 마구 쳤다. 큰 나라 섬기다 거미줄 친
옥좌玉座 위엔 여의주如意珠 희롱하는 쌍룡 대신에 두 마리 봉황새를
틀어올렸다. 어느 땐들 봉황이 울었으랴만 푸르른 하늘 밑 추석甃石을
밟고 가는 나의 그림자. 패옥珮玉 소리도 없었다. 품석品石 옆에서
정일품正一品, 종구품從九品 어느 줄에도 나의 몸 둘 곳은 바이
없었다. 눈물 속된 줄을 모를 양이면 봉황새야 구천九天에 호곡號哭
하리라
<시 읽기> 봉황수/조지훈
1940년 2월 『문장』에 발표된 조지훈의 시. 식민지 조선의 암울한 현실을 시창작의 모티프로 삼았다. 삶의 다채로운 빛깔이 시의 형식과 내용이 된다는 것을 독자는 알고 있다. 그러나 삶의 빛깔이 제대로 빛나기 위해서는 일상을 불편하게 하는 어떤 것이 먼저 해결되어야 하는지를 오래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이 시는 퇴락한 고궁을 돌아보면서 조선의 패망 원인을 “큰 나라 섬기다 거미줄 친 옥좌玉座”라는 사대사상으로 단정 짓는다. 왕을 상징하는 “쌍룡雙龍 대신에 두 마리 봉황새를 틀어 올”린 시행에서 우리는 용 대신 봉황으로 제왕帝王을 상징할 수밖에 없었던 역사의 비극을 쓰라리게 확인한다. 국권과 민족 주체성이 회복되기를 염원한 시인의 역사의식이 드러난 것이다.
시상이 전환되는 “어느 땐들 봉황이 울었으랴만”에서 독자는 비극과 모순으로 점철된 역사를 읽는다. 중국 문화를 비껴갈 수 없는 5쳔 년의 역사, 기쁨보다는 참담한 슬픔이 더 많았던 우리 역사의 오래된 미래를 돌아보는 것이다. 우리의 미래는 우리가 통과해 온 불행한 역사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의 현실은 비관적이다. 눈물 흘림이 부질없음을 알기 때문에 통곡을 억제하고 망국의 한恨을 내면으로 삭이는 지사志士의 기품은, “봉황새야 구천九天에 호곡號哭하리라.”에서 절망감으로 교차된다. ‘구천九天’이 아닌, 가장 높은 하늘이란 뜻의 ‘구천九天’이 아닌, 가장 높은 하늘이란 뜻의 ‘구천九天’은 조국 광복 또는 조국 해방의 지평을 상징한 것으로 읽힌다.
고궁을 제재로 한 「봉황수」를 복고적復古的 회고回顧의 정서로만 이해할 필요는 없다. 퇴락한 고궁을 시의 제재로 삼은 역사적 수심愁心은 조선의 해방은 민족 주체성을 회복하는 지점에서 비롯되는 것임을 뜻하기 때문이다.
―이병초, 『우연히 마주친 한 편의 시』, 형설출판사, 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