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 <일인 백색>에는 형상화된 표현이 전혀 없는가?
수필가 정임표
지금 우리가 문학의 형상화를 공부하고자 하는 시간임으로 윗 글에서 필자가 보여준 <일인백색> 본문 안에는 형상화가 된 표현이 전혀 없는지를 살펴 보기로 합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작가가 추상적인 개념(본질, 종교, 철학, 정치, 인간의 욕망)을 독자들의 눈앞에 쾅쾅 부딪히게 만들려고 쓴 강렬하고 감각적인 형상화의 표현들이 여럿 숨어 있습니다.
본문 속에서 문학적 형상화가 번뜩이는 대표적인 구절들을 짚어보겠습니다.
1. 추상적인 '사상'과 '수사'의 시각적·동적 형상화
구절: "사상은 현란한 수사를 칼처럼 휘두른다. 멋있어 보인다. 사상에 목을 매는 어리석음은 수사가 주는 겉멋에 도취된 때문이다."
형상화 포인트: 눈에 보이지 않는 '사상'과 '수사(말재주)'라는 추상적인 개념을, 날카롭게 빛나는 '칼을 휘두르는 모습'과 멱살을 잡히는 '목을 매는 모습'이라는 시각적이고 잔인하리만치 구체적인 행동으로 바꿔놓았습니다. 사상의 폭력성을 몸서리치게 형상화한 대목입니다.
2. 정치가들이 부리는 권력의 실체를 보여주는 형상화
구절: "정치가 잘한 게 있다면 종교로부터 칼을 빼앗아 자기 것으로 삼은 일이고 철학으로 하여금 권력에의 의지를 포기토록 한 일이다."
형상화 포인트: '종교가 가진 신성함'이나 '철학의 사유'라는 보이지 않는 정신적 권력을, 실제로 손에 쥐고 휘두르는 '칼'이라는 구체적인 무기로 치환하여 종교와 정치가 세상을 지배해 온 방식을 시각적으로 형상화했습니다.
3. 인간의 욕망과 파멸의 과정을 보여주는 형상화
구절: "무언가를 믿어야 하고 그 믿는 하나를 향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려는 욕구는 결국 완성을 향한 욕구이다. 그 욕구 때문에 인간은 힘을 모으고 그 모은 힘 때문에 파멸한다."
구절: "전체를 하나로 모아 획일화 시키면 세상은 숨도 쉴 수 없는 암흑천지가 된다."
형상화 포인트: '획일화'라는 추상적인 상태를 "숨도 쉴 수 없는 암흑천지"라는 촉각적·시각적 공포로 형상화했습니다. 사람들이 힘을 모아 완벽을 좇을 때 세상이 마주할 질식할 것 같은 분위기를 독자의 폐부로 직접 들이마시게 만듭니다.
4. 인간과 짐승의 차이를 대비시키는 형상화
구절: "새들은 짐승들은 자신을 미완이라 여기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일용할 양식만으로도 만족한다."
형상화 포인트: 철학적 논증을 하다가 갑자기 툭 던져진 이 구절은, 인간의 끝없는 욕망과 대비되는 자연물(새와 짐승)의 가볍고 평화로운 삶의 태도를 눈앞에 그려지듯 선명하게 시각화하여 보여줍니다.
<일인백색> 전체를 읽어보면 전반부는 확실히 '철학적 논설문'처럼 딱딱한 개념들의 싸움(본질, 이데아, 종교, 철학, 정치)으로 시작됩니다. 하지만 그 무거운 관념 속에서도 작가는 '칼을 휘두르는 수사', '숨을 조여오는 암흑천지', '비누 거품을 불어내는 세숫대야와 보릿대' 같은 생생한 비유와 감각을 끊임없이 직조해 넣었습니다. 결국 이 작품은 철학의 옷을 입었지만, 그 철학적 회의를 독자의 오감으로 돌파하기 위해 문학적 형상화의 붓질을 끝까지 놓지 않은 글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작품에 문학적 감동은 보이지 않습니다. 문학적 감동이란 작가와 독자 사이의 영혼이 통하는 '소통의 울림'에서 완성됩니다. 그런데 작가 스스로 "소통은 애초에 불가능하다"는 전제를 깔고, 기성 문단과 세상에 대한 분노, 억울함, 혹은 지적 방어기제를 바탕으로 글을 밀어붙이다 보니, 독자는 작가의 내면 깊은 곳으로 다가갈 수 있는 다리를 건너지 못하고 문전박대당하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독자를 포용하기보다 나 홀로 독방에서 사유의 문을 닫아버린 형국이 되는 것입니다.
감동이란 머리로 이해하는 인식의 영역이 아니라, 온몸으로 겪어내는 '체온의 영역'입니다. 때문에, 이 글은 거대한 관념의 성벽 안에서 뿜어져 나오는 지적 카타르시스는 있을지언정 가슴을 적시는 인간적 감동을 주기는 어려운 것입니다. 이 작품은 작가의 지적인 치열함과 세상에 대한 매서운 비판 정신이 돋보이는 '사유의 에세이'입니다. 한 작가가 써내는 모든 작품들이 세상 독자들의 눈물 콧물을 짜게하는 글들로만 이뤄 진다면 문학성이라기 보다는 신파극에 가까워질 위험을 내포합니다. 형상화를 시키되 감정 조절을 잘 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쉬운일이 하나도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