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파스카 신비를 기억하기
탈출 12,1-14; 1코린 11,23-26; 요한 13,1-15
주님 만찬 성목요일; 2024.3.28.
1. 이스라엘 백성의 기억과 재현
성주간은 사순시기를 마무리하고 부활시기로 건너가는 시기입니다. 오늘은 파스카 성삼일을 시작하는 성목요일이고, 우리는 이 성목요일 저녁에 예수님께서 생의 마지막 순간에 준비하신 최후의 만찬을 기념하는 미사를 봉헌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미사에서 들려온 말씀들은 예수님의 공생활을 정리하고 새 하느님 백성인 교회의 창조를 준비하는 역사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오늘 미사의 첫째 독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자신들 역사의 뿌리가 되어 온 파스카 사건을 어떻게 기념하는지를 탈출기 12장을 통해 알려줍니다. 당시 지중해 문명에서 최강대국이었던 이집트에서 무기 하나 없이 막강한 이집트군의 손아귀에서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었고, 바다의 마른 땅을 밟고 건너는 홍해의 기적까지 겪으면서 탈출했던 경험이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같은 민족의식을 지닐 수 있게 하는 원체험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해마다 파스카 사건이 일어난 날이 되면 이집트를 빠져나오던 그날 밤의 상황을 그대로 재현하면서 이 원체험을 상기하곤 했습니다. 양을 잡아서 가족이 함께 먹는 일도 그대로 재현했고, 그 피는 받아서 문설주와 상인방에 발라서 죽음의 불칼을 든 천사가 지나가라는 표시를 하는 일도 그대로 재현했으며, 시간을 아껴 빠져나와야 했으므로 누룩이나 나물을 발효시킬 시간도 아껴서 누룩 없는 빵과 쓴 맛이 나는 나물을 날것으로 먹던 일도 그대로 재현했고, 허리에 띠를 매고 발에는 신을 신고 손에는 지팡이를 쥔 채로 서둘러 먹는 동작까지 그대로 재현하였습니다. 이집트 탈출 당시의 긴박성을 가능한 한 고스란히 체험하고자 했던 시도였습니다. 이 파스카 사건을 기념하면서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의 정체성이 오직 하느님의 해방 의지에 기원하고 있음을 해마다 확인했고 그래서 이 파스카 축제는 연중행사 중에 최대의 민족축제로 자리 잡았습니다.
2, 예수의 기억과 재현
민족의 정체성이 담겨있는 이런 파스카 축제를 예수님께서도 당신 공생활의 마지막 해에 맞이하는지라, 조촐하지만 의미있게 당신 제자들과 함께 보내시고자 하셨습니다. 사전에 미리 약속이 되어 있는 ‘도성 안의 아무개’(마태 26,18)들의 보이지 않는 협조를 받아서 마련한 작은 방에서 그야말로 당신 생애 최후의 만찬을 나누셨습니다. 이 자리는 예수님께서 당신의 사명을 제자들에게 최종적으로 부여하시는 기회여서 특별한 절차를 마련하셨으니, 그것은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는 일이었습니다. 누룩 없는 빵과 쓴 나물은 그대로이지만, 허리에 띠를 매거나 지팡이를 짚고 서서 먹는 일 대신에 선택하신 발씻김이었습니다. 당신께서 공생활 동안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 복음의 의미를 이 발씻김 즉, 세족례(洗足禮) 행위 하나로 제자들에게 보여주고자 하셨던 것 같습니다. 이는 섬김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스승인 당신께서 제자들의 발을 마치 하인처럼 씻겨 주었으니, 제자들끼리는 물론 서로 발을 씻겨 주어야 한다는 뜻이 담겨 있는 성사적 행위였습니다.
요한 복음사가는 이런 뜻에서, 공관복음사가들이 다 기록해 놓은 바 빵과 포도주를 나누는 절차에 대한 소개를 다 생략하고서 이 발씻김의 성사를 거행하신 예수님의 선택을 특별히 기록해 놓았습니다. 이 섬김의 생애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운명을 맞이하셨는데, 제자들은 단순히 빵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는 일로 그칠 것이 아니라 섬김의 십자가를 기억하는 것이 스승을 기억하는 일이라고 명령하셨다는 뜻이었습니다. 새로이 소집된 하느님 백성이 나아가야 할 파스카 과업의 길에서 이 백성이 파스카의 길로 나아가도록 섬겨야 할 제자들끼리는 서로 섬겨야 한다는 수칙도 정해 주셨음을 기록한 것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이 섬김의 예식으로 그분과 제자들 사이에는 새로운 계약을 맺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으며, 이 계약은 파스카 과업이 성취될 때까지 영원하리라고 못 박으셨습니다. 사실상 그분이 선포하셨던 하느님 나라의 역사적 현실이란 파스카 과업임을 분명하게 선언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당시까지 이스라엘 백성이 걸어온 역사가 제 때에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와 같다고 안타까워하시면서, 모세 이래 이스라엘 백성이 매년 잊지 않고 꼬박꼬박 기념해 온 파스카 의식을 당신의 사명에 비추어 의미 있게 거행하고자 하셨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바야흐로 열두 제자들로 하느님 백성의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시겠다는 선언이었습니다. 그 선언으로 섬김의 깃발을 성체성사로 확실하게 드신 셈입니다. 이 섬김은 서로 발을 씻어주어야 하는 상호 섬김인 것이요, 비단 열두 제자들 안에서만이 아니라 ‘도성 안의 아무개’로 지칭되던 ‘익명의 제자들’까지도 포함되는 것이었으며, 나아가서는 이 섬김의 파스카 여정에 함께 할 하느님 백성 전체에게도 해당되는 ‘새롭고 영원한 계약’이었습니다.
3. 우리의 기억과 재현
오늘날 성체성사를 거행하는 우리 가톨릭교회의 현실을 주의깊게 살펴보면 유감스럽게도 파스카 정신을 망각한 채, 상호 섬김의 계약도 무시하려는 움직임이 있습니다.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을 해방시켜야 한다는 파스카 과업 대신에 영원한 생명의 축복을 내세에로 무책임하게 미루는 영성이 그러하고, 상호 섬김 대신에 순명을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제도와 문화가 또한 그러합니다. 순명의 덕행은 상호 섬김이라는 예수님 유훈에 따라서 자발적으로 행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제물로 삼아 스스로 하느님께 바치셨습니다. 미사에서 축성되는 빵과 포도주는 단순한 식사용 음식과 음료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하느님께 봉헌하신 몸과 피를 앞당겨 일치시키신 제물이었습니다. 하루 뒤 십자가에서, 최후의 만찬에서 떼어졌던 빵은 못박히는 몸이 되었고, 나뉘어졌던 포도주는 창에 찔린 옆구리에서 흘리어진 피가 되었습니다. 둘 다 상호 섬김이라는 희생을 상징하는 희생 제물이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뜻이었고, 또한 하느님의 섭리였기 때문에, 주님 만찬 미사는 모든 미사의 원형이 됩니다. 그래서 주님 만찬 미사에서 유래된 모든 미사는 하느님께 바치는 예수님의 제사가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파스카 축제를 지내면서 그 옛날 이집트에서 빠져나올 때의 상황을 그대로 재현해온 것처럼, 새 이스라엘 백성으로 불리운 우리 교회와 그리스도인들도 예수님께서 새로운 파스카 제사로 세우신 주님 만찬 미사를 그대로 재현하는 배경과 이유를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됩니다. 세족례는 이 상호 섬김의 유훈을 잊지 않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상호 섬김이 교회가 미사를 거행할 수 있는 자격 조건입니다. 이 역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 특히 예수님을 따라 미사를 거행하는 사제들이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자격 조건입니다. 또한 이 미사에서 재현하는 이 자격 조건이 사제들만이 아니라 평신도와 수도자들이 세상에서 실천함으로써, 교회가 인류에게 봉사하는 길이기도 합니다. 즉, 미사가 예수님께서 계시하셨고 남겨 주신 유일무이한 제사 양식인 것처럼, 서로 섬기는 삶을 살아가는 교회야말로 하느님께서 당신께 제사를 바치는 교회를 통해 인류를 축복하시는 유일무이한 계시 방식이라는 것입니다. 서로 섬기는 삶의 양식을 자신의 본령으로 삼는 교회라야 하느님과 인류를 소통시키고 일치시키는 성사가 될 수 있습니다(교회헌장, 1항).
4. 민족의 파스카를 기억하고 재현함
그런데 하느님과 인류의 소통과 일치를 이루는 성사가 되어야 한다는 보편교회의 선교 사명에 비추어 보면, 우리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이 민족의 파스카를 기억하는 일도 중요합니다. 하느님께서 인류를 위해 한민족을 이끄셨던 역사의 발자취는 결코 취소될 수 없기 때문에, 이제와 향후에 더욱 더 선명히 기억되어야 합니다.
첫째, 하느님께서는 칼데아 우르에서 가나안에로 아브라함을 부르시던 그 시기에 한민족을 아시아의 동방으로 불러내셨습니다. 그리하여 빛이 떠오르는 그 동방에서 진리를 숭상하며 평화를 실현하도록 이끄셨습니다. 이에 대한 역사적 흔적이 유적과 문화 그리고 한민족의 DNA에 고스란히 남아 있는 제천의식과 홍익인간 정신입니다. 그리고 오늘날에도 선한 영향력으로 전 세계인들의 공감을 폭넓게 형성하고 있는 한류 문화는 그 소산입니다. 제국주의 시대에 전 세계를 풍미했던 프랑스나 영국과 미국, 그리고 동아시아에서 한때 지배적 문화로 군림했던 중국과 일본의 문화들에서 자기중심적이고 패권적인 특성이 두드러지는 것과 다릅니다. 그들 민족은 힘이 강성해지면 약소민족을 침략하여 자기 영토를 넓히려 들었고, 사람은 노예로 삼아 억압하고 자원은 수탈하여 착취했었으므로 ‘민족들의 빛’이 되기는커녕 하느님의 진노를 사서 무너지게 마련인 또 다른 ‘바벨탑’만 쌓았을 뿐이었습니다.
둘째, 그 후 수많은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이스라엘에서는 여러 예언자들이 백성에게 신앙을 일깨워주었듯이, 하느님께서는 오묘한 섭리로 조선의 선비 이벽으로 하여금 천주교 교리를 통해 그리스도 신앙의 진리를 깨닫게 하시고 교회를 세우게 하셨습니다. 선교사 없이 자생적으로 세워진 이 교회에서 이벽은 겨레의 예언자였습니다.
셋째, 이벽 요한은 이승훈으로부터 세례자 요한이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나서 불과 일 년만에 한양 선비 천여 명에게 교리를 가르쳐서 입교시켰지만, 이 활발한 활동이 문중박해를 불러와서 식음을 전폐당하는 고초를 겪은 끝에 사실상 치명을 당해야 했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나자 충격을 받은 남은 동료 선비들은 대책회의에서 이벽이 수행하던 역할을 지속하기로 결의하였는데, 이런 상황에서 하느님께서는 그의 동료 선비들을 교회의 지도자로 삼으시고 성사적 열망을 불러일으키시어 놀라운 선교적 성과를 거두게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평신도 지도자들의 이러한 활약 덕분에 십여 년 만에 전국의 양반, 중인, 상민, 천민 그리고 부녀자 등 만여 명이 조선의 하느님 백성이 되었습니다. 이 한국의 초대교회 시절에 평신도 사도직이 밤하늘의 별처럼 빛났습니다.
넷째, 19세기 초 신유박해가 일어나서 신자들 4백여 명이 치명하거나 유배당하는 등 교회의 지도부가 와해되자, 하느님께서는 남은 신자들에게 신앙의 자유를 지키려는 용기를 불러일으키시어 전국으로 흩어져 백여 곳에서 교우촌을 세우게 하셨습니다. 이 역시 자발적으로 일어난 현상으로서 자생적인 교회 설립 못지않게, 가톨릭교회 선교역사상 전무후무한 놀라운 기적의 역사였습니다.
다섯째, 또한 하느님께서는 백년 박해에서 고문에 못이겨 입술로 배교한 이들이나 치명자의 후손들을 통하여 순교자를 현양하게 하시고 순교정신을 이어가게 이끄셨습니다. 이러한 순교자 현양의 문화 역시 다른 나라 교회에서는 보기 드문 현상입니다. 그리하여 또 다른 백년이 지나는 동안 103위의 순교성인과 124위의 순교복자를 비롯한 2만여 명의 순교자들을 기억하도록 하느님께서는 한국의 교회와 신자들을 이끄셨습니다.
교우 여러분!
이것이 우리가 기억해야 할 민족의 파스카 역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