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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화된 사건의 붉은 흔적, 흑적에 묻어나는 현존적 애가
- 송명화의 수필 <흑적>을 중심으로
권대근, 하북미대 객좌교수
Ⅰ. 들뢰즈적 ‘사건’과 기억의 표면
수필 <흑적>은 낙동강 하구의 섬 ‘진우도’에 얽힌 비극적 역사를 섬세한 작가의 감성과 아장스망 그리고 앙가주망이 만들어낸 걸작이다. 이 작품이 2025년 토제문학제 평사리문학상 대상에 뽑힌 것은 너무나 당연한 귀결이라 하겠다. 송명화 1959년 태풍 사라호로 인해 전쟁고아 280여 명이 희생된 사건을 현재의 시점에서 재호명한다. 그러나 이 글은 단순한 추모문이나 르포가 아니다. 송명화의 시선은 ‘기억의 재현’보다 ‘의미의 생성’에 닿아 있다. 그녀는 잊힌 장소의 침묵을 해석하기보다, 그 침묵이 우리 안에서 새롭게 작동하게 만든다. 이러한 점에서 <흑적>은 들뢰즈가 <의미의 논리>에서 말한 “사건(event)의 존재론”에 근접한다. <흑적>을 읽고, 평자는 “이 사회적 전환기의 최대 비극의 악한 사람들의 거친 아우성이 아니라 선한 사람들의 소름끼치는 침묵이다.”라는 마틴 루터킹의 어록을 소환했다.
누군가가 반복해서 기억할 만한 어떤 것이 될 때, 특이성을 갖는다. 영원성은 영원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반복해서 출현하는 것을 의미한다. ‘진우도 사라호 태풍 사건으로 인한 고아들의 수장사건’은 우리의 기억 속에서 영원히 기억되어야 할 사건이 분명했다. 불에 타서 다르게 태어난다는 불사조의 의미와 같이 그들은 죽었어도 그들의 추모는 살아 있어야 옳다. 송명화 수필 <흑적>에서의 특이점은 어떤 힘이 방사되는 점이다. ‘진우도’라는 섬이다. 이는 역으로 그 힘이 작용하는 것들을 끌어모으고 불러들이는 점이다. 그 힘의 작용 하에서 어떤 것이 반복하게 만드는 어트렉트다. 물론 그 힘은 ‘진우도 방문’ 이후, 그 힘에 매혹되는 것들만을 불러들이고 끌어들인다. 자기장이 모든 철에 작용하지만 돌멩이나 나무는 끌어들이지 못하는 이치와 같다. 우리 독자는 매혹의 이유나 양상에 따라 다른 궤적을 그리면서 끌려들어간다. 바로 공명의 특이점이다. 진우도와 사라호 태풍이라는 특이성 개념은 문학의 영구성과도 연결되며, 수필의 주제 중심적 양식이라는 이론과도 일치한다.
평자는 지난 2023년 토지문학제 토지문학상 심사평에서, “위대한 작품은 ‘있어야 할 것을 있게 하는 데 필수적인’ 저항성을 기본 조건으로 한다. 훌륭한 수필이라면, 미적 진보를 지향해야 한다. 수필이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데 기여하려면, ’비판정신’이 필요하다는 작가인식이 형상으로 드러나야 한다는 말이다. 그때 문학성과 철학성이 생성되기 때문이다. 언어예술로서 수필의 문학성은 당연히 언어적 형상화에서 나오겠지만, 수필은 언어적 형상화 못지않게 작가의 내면 풍경과 체취 그리고 사회를 보는 작가의 의식 또한 중요하다. 수필가는 ‘보이지 않는다’의 눈으로 어두운 세상을 비추고, 바람직한 사회의 거울이 되어 휘청거리는 가치를 바로 비추어 내어야 한다. 어깨가 무거운 자들을 가볍게 할 수 있는 수레 같은 역할을 해내어야 한다.
이런 측면에서 수필은 사회적 이슈를 내용으로 형상화하는 것도 구조 이상으로 매우 중요하다. 욕망의 주체는 처음부터 만들어져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 그것을 필요하다고 느끼고 더욱 아름답게 가꾸려는 사람들에 의해서 완성된다. 수필의 우수성은 ‘있어야 할’ 당위적 가치가 작품 속에 내재되어 있다는 점이다. 수필가는 단연히 보이는 부분보다 보이지 않는 부분, 나아가 ‘있는 것’보다 ‘있어야 할 것’을 ‘있게 하는’ 데 관심을 가져야 한다. 현실과의 타협보다는 현실의 극복을 도모해야 한다. 누구에게나 가장 큰 관심의 대상은 삶과 욕망일 수밖에 없다. 수필은 응축된 정서와 사상의 지도다. 인간은 자연과 사회 환경 그리고 정신이라는 삼각의 동그란 지도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다. 개인적인 삶을 바탕으로 작성되는 그 지도에는 작가가 거처하고 있는 위치가 선명하게 표시되어 있어야 한다. 바로 견고한 주체의 자화상이다.”라고 썼다.
그로부터 2년 후 전남일보 신춘문예 출신으로 수필가, 문학평론가로서 <에세이문예> 주간을 맡고 있으며, 부산교육대에서 수필론을 가르치고 있는 송명화 교수가 토지문학제 수필 부문 대상을 차지하여 기쁘기 그지없다. 대상 작품은 위의 요구에 정확하게 응답하는 작품이다. <흑적>은 심사위원들로부터, “주제의 특이성, 그리고 이야기를 끌고 가면 독자를 이끌어 들이는 역량 측면에서 돋보였다. 우리나라 현대사의 아픈 한 대목을 잔잔하면서도 역동적으로 그리면서 다시 차분한 서사의 행보로 돌아오는 과정에서 긴장과 이완의 어조를 유지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들뢰즈에게서 ‘사건’은 단순한 과거의 사실이 아니다. 그것은 사태의 밑바닥에 깔린 ‘흐름’이며, 언어와 신체, 사유의 표면에서 새롭게 생성되는 ‘순수사건’이다. 송명화가 진우도의 비극을 다시 호출하는 것은, 과거의 재현이 아니라 그 기억이 현재적 의미로 다시 솟구치는 ‘사건화의 순간’을 기록하는 행위다. 따라서 <흑적>은 “기억의 기록”이 아니라 “의미의 재생산”으로 읽혀야 한다. 평자는 <흑적>을 들뢰즈의 사건 존재론을 중심으로 한 사건의 층위 분석, 문예미학적으로 구현된 ‘서정적 리얼리즘’의 미학적 완성도, 작가의 저항정신과 앙가주망의 구현이라는 세 가지 축으로 나누어 분석하고자 한다.
Ⅱ. 사건의 표면에서 피어나는 의미의 ‘흑적’
1. 사건의 존재론, ‘흑적’의 순수사건화
수필창작의 핵심은 단순히 ‘경험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사건이 언어 속에서 새롭게 의미화되는 순간을 포착하는 것이다. 수필은 이야기를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 속에서 의미를 찾아내고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이다. 좋은 수필은 사실을 바탕으로 자신의 경험을 쓰는 것이 아니라, 언어가 사건을 다시 조직해내는 과정을 드러낸다. 작가는 삶에서 일어난 작은 변화, 감정의 진동, 아장스망을 언어로 다시 구성하며 그 속에서 새로운 관계망을 만들어낸다. 이 지점에서 작가의 문학적 역량, 즉 <순장소녀>으로 세종도서 선정, <꽃은 소리내어 울지 않는다>로 문학나눔 선정, <나무의 응시, 풀의 주름>으로 2024년 아르코창작지원금 선정되는 등의 위업이 드러난다. 또한 이 지점에서 <흑적>의 수필시학이 사건의 존재론을 관통하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가 있다. 들뢰즈가 말하는 ‘사건의 언어’란, 바로 이 의미 생성의 운동을 가리킨다. 사건은 한 번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언어를 만날 때마다 다른 의미로 되살아나는 것이다.
전쟁고아란 허물을 막 벗은 어린 게처럼 방호막이 없는 신세다. 튼튼한 갑옷이 되어주어야 할 정부가, 어른들이 내어준 장소가 하필 바다 한가운데 무인도, 그것도 강의 퇴적물이 이룬 낮은 모래섬이었단 말이던가. 아무리 전후 혼란기라 하여도 물이 서서 몰려올 때 피해서 달려갈 언덕도 제대로 없는 이곳 말고 아이들을 거둘 자리가 그리 없었던가. 완벽한 전쟁의 피해자지만 왜 전쟁이 일어났는지 왜 자신이 고아가 되었는지 생각할 겨를조차 없는 미약한 생명들이 밀쳐지고 내쳐지다가 그나마 얻은 거처가 바다 가운데 사상누각인 까닭을 누가 해명할 수 있을까.
- <흑적> 중에서
수필에서의 사건은 일회적이 아니고 반복적이다. 계열화된 반복적인 사건만이 영원히 사라지지 않고 의미를 가진다. “전쟁고아란 허물을 막 벗은 어린 게처럼 방호막이 없는 신세다.”라는 언명은 ‘보호’를 전제한다. 송명화는 언제나 수필을 창작하기 전에 어떤 의미를 발견하고 여기에 어떤 사상을 심을 것인가를 고민한다. 제재의 철학적 통찰이다. 원론적으로 예술성이란 복잡한 구성이나 구조에서 나온다. 하나의 이야기를 가지고 쓴 수필이 감동을 견인하는 문학성을 가지려면 하나의 이야기를 덧씌워 이야기를 이중구조로 만들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양자역학적으로 이야기하면, 하나의 이야기가 ‘입자’라면, 여기에 ‘파동’을 덧씌워야 한다는 것이다. 양자역학에 따르면, 적어도 미시세계에 있는 모든 물질은 입자이거나 파동이거나, 또는 입자이면서 파동이다. 빛은 알갱이라고도 할 수 있고, 파동이라고도 할 수 있고, 입자이면서 파동이라고도 할 수 있다. 문학의 이중성을 원자와 전자의 관계에 빗대거나 또는 입자이면서 파동인 빛의 성격에 견줄 수 있다고 하겠다. 송명화는 진정한 울림을 주기 위해 문학적 상상력을 통한 방법을 써서 감동을 창출한다. “아무리 전후 혼란기라 하여도 물이 서서 몰려올 때 피해서 달려갈 언덕도 제대로 없는 이곳 말고 아이들을 거둘 자리가 그리 없었던가.”라는 대목은 독자의 상상력을 촉발시키고 그의 애민 정서와 저항사상을 고양시킨다.
낙동강이 열심히 실어 나른 토사가 섬을 살찌웠는지 섬의 흰 뱃구레가 몇 년 전보다 넓어진 듯하다. 사라호 태풍의 공습이 시작되기 전에 운 좋게 섬을 나섰던 생존자의 딸에게서 전해 들은 이야기가 아니었다면 우리가 진우도를 찾을 일도 없지 않았을까. 작가들과 함께 서둘러 이곳을 다녀온 뒤로 이 섬은 자주 내 생각 속에 떠올랐다. 꿈인지 생시인지도 모르게 찾아드는 무의식의 장에서, 때로는 비바람 몰아치는 큰바람 속에서, 혹은 방향을 가늠할 수 없는 모래폭풍 속에서, 한번은 갯벌을 뒤덮은 들썩이는 기공들 속에서 인원을 어림할 수 없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뒤엉켜 다녔다. 다시 오리라 하였지만 쉽게 나서지 못하였던 건 그 아픔의 심연을 헤아리기 어려워서다.
- <흑적> 중에서
위 인용 단락에서 우리는 ‘섬의 흰 뱃구레’에서 ‘무의식의 장’으로 이어가는 초월적 이미지의 형상을 볼 수 있다. “섬의 흰 뱃구레가 넓어진 듯하다”는 표현은 자연 묘사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생명체의 신체화된 은유다. 섬은 단순한 지형이 아니라, 생명력을 품은 ‘모성적 존재’로 재현된다. 낙동강이 실어 나른 토사는 피와 살의 물질적 흔적이며, ‘섬의 흰 뱃구레’는 그 토사가 품은 기억의 자궁이다. 이때 섬은 현실적 공간이 아니라, 죽은 아이들의 영혼이 깃든 초월적 장소, 즉 윤리적·정신적 차원의 ‘기억의 몸체’로 변형된다. 이는 들뢰즈가 말한 “사건의 표면”처럼, 물질과 의미, 시간과 감정이 한데 겹쳐진 층위다. “꿈인지 생시인지도 모르게 찾아드는 무의식의 장”은 수필적 상상력의 절정이다. 여기서 작가의 상상력은 재현적 상상력이 아니라, 환기적 상상력이다. 즉, 실재를 복원하는 것이 아니라, 사라진 존재들의 ‘정동적 흔적’을 감각적으로 불러낸다. “갯벌을 뒤덮은 들썩이는 기공들 속에서”라는 문장은 그 대표적인 예다. ‘기공’은 생명체의 호흡기관이며, 동시에 땅의 숨결이다. 이 이미지는 죽은 아이들의 억눌린 생명 에너지가 여전히 대지 속에서 숨 쉬고 있음을 상징한다. 따라서 ‘아이들의 목소리’는 귀로 듣는 소리가 아니라, 윤리적 기억이 환생하는 정동의 진동이다.
송명화의 문학적 상상력은 물질적 상상력, 역동적 상상력, 환기적 상상력 순으로 발생한다. 독자의 문학적 상상력은 소재로부터 발생한 기본적인 이미지의 울림, 그것을 미지의 세계로 도약시키는 역동적 이미지의 울림, 그 역동적 이미지를 궁극적 보편적 가치의 세계로 이끄는 초월적 이미지의 울림으로 위계화되는 것이다. 장 피아제에 의하면, 구조라는 것은 전체성과 변형성, 자기 조정성을 본성으로 갖는 구성요소로, 상호간의 역동적이고 유기적인 관계방식이라 할 수 있다. 수필 텍스트가 주는 감동은 그 구조로부터 나오는 미적 울림이라는 점에서, 송명화의 <흑적>의 사건 계열화는 이야기의 구조화 작업과 미적 울림의 창조원리와 접맥된다. 이야기의 구조화 방법으로부터 미적 울림을 창조하는 원리 즉, 이야기의 메커니즘을 구축해주는 미적 배열의 핵심원리는 스토리를 이중 층위로 변형시키는 방법에서 찾을 수 있다. 이때 스토리는 작가가 자신의 체험 속에서 선택한 글감으로써 아직 미적으로 변형되지 않은 원소재를 가리킨다.
수필이 문학적 성취를 획득하려면, 어떻든 간에 중층구조라는 복합성, 복잡성을 확보해야 한다. 문학의 원리는 메타포의 원리다. 변용, 전이 치환의 미학은 감동의 바로미터다. 중층구조를 갖는 문학작품을 창작하기 위해 표층차원에서 작가가 수행해야 할 과제는 심층차원에서 획득한 제재의 성찰결과를 감동적인 이야기질서로 이중구조화하는 일이다. 현대수필에서 가장 많이 발견되는 문제는 제재의 통찰 결과를 미적인 이야기로 이중구조화, 즉 x축과 y축으로 이원화하는 이야기 배열작업에 대한 무관심이다. 이야기의 미적 구조화에 대한 경시결과는 곧 작품의 미학성을 떨어뜨리는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한다는 점에서 작가들의 인식전환이 필요하다. <흑적>에서 작가가 이야기를 미적으로 배열한 전략은 독자를 감동의 세계로 이끄는 의미구조의 생성원리일 뿐만 아니라, 주제를 형상화하는 미적 원리라는 점에서 창작의 핵심 부분을 차지한다. ‘각혈’은 초험적 사건화이고, 사건의 의미화로 귀결된다.
울컥대는 각혈 같다. 내 손에서 짓이겨지는 장록의 열매가 걸쭉한 검은 피를 뚝뚝 흘린다. 누구는 와인을 떠올리고 누구는 공포영화를 떠올리며, 누구는 버리고 싶은 기억을 호출한다. 누가 뭐라든 척박한 땅에 당당히 자리 잡고, 키를 키우고 가지를 쳤다. 저 무시무시한 암적의 열매를 맘껏 매단 장록을 여기서 만난 것은 우연일까. 가슴을 뜯는 아픔을 되짚어 찾아온 어눌한 글쟁이의 마음이 푸닥거리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다.
- <흑적> 중에서
작품의 첫 문장은 이미 ‘사건의 표면’을 선언한다. “울컥대는 각혈 같다. 내 손에서 짓이겨지는 장록의 열매가 걸쭉한 검은 피를 뚝뚝 흘린다.” 여기서 ‘각혈’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사건이 몸으로 재현되는 감각적 언어의 발생지점이다. 장록의 검은 즙은 단순한 자연의 색이 아니라, 진우도 비극의 순수사건이 현재적 감각으로 되살아나는 징후다. 들뢰즈가 말한 대로 “사건은 사물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사물의 표면에서 일어난다.” 송명화의 장록 묘사는 그 표면에서 솟구치는 의미의 진동을 시각화한다. 그녀에게 진우도는 과거의 섬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내 손끝에서 다시 피를 흘리는 사건의 장”이다. 과거의 역사적 사건이 아닌 언어와 감각의 현재적 생성, 즉 “사건의 재사건화”가 일어난다. 이 지점에서 <흑적>은 단순한 추모문을 넘어 사건의 존재론적 기록이 된다.
낙동강 하구에는 여러 개의 섬이 있다. 가덕도가 그중 으뜸인데 가덕과 다리로 이어진 섬 중의 섬, 눌차도에 와 있다. 하오의 여백과 바다의 들숨과 날숨을 품은 정거마을을 지나고, 갈맷길을 걸었다. 감탄도 평화로움도 낯선 감정인 것은 진우도를 찾아온 길이라서다. 언덕을 오르니 진우도 안내판이 몸을 드러낸다. 그것을 애꾸처럼 만든 장록 가지를 정리하고 엉긴 얼룩을 물휴지로 닦는다. 방금 찍은 낙인처럼 선명한 핏물을 정성껏 닦는 것과 묵념 외에 지금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지근거리에 기다란 섬이 해파리처럼 떠있다. 진우도, 진정으로 돌봄이 필요했던 고아들의 섬, 아이들은 없다. 삶의 첫 장을 제대로 읽기도 전에 책은 덮였다.
- <흑적> 중에서
이 수필의 최대의 압권은 사라노태풍에 희생된 아이들을 ‘흑적’에 비유한 것이다. 수필은 구성적 비유의 존재론적 의미화라고 할 때, 문학적 성취를 위한 이중구조는 필수적 장치다. 또 다른 예문은 그 사건의 ‘비가시성’을 표면으로 끌어올린다. “진우도, 진정으로 돌봄이 필요했던 고아들의 섬, 아이들은 없다. 삶의 첫 장을 제대로 읽기도 전에 책은 덮였다.” ‘책은 덮였다’는 표현은 현실적 사태의 종결처럼 보이지만, 바로 그 덮임이 ‘의미의 생성’을 촉발한다. 사건은 종결되지 않고, 덮인 표면 아래서 계속 ‘진동’한다. 들뢰즈의 용어로 하면, 이는 사건의 잠재적 계열이 새로운 현재로 발화되는 순간이다. 송명화는 이 사건을 언어의 표면 위에서 되살리는 ‘의미적 사건화’를 수행하고 있다. 한마디로 순수사건은 “일어남 자체, 생성의 방식”으로 현실 속 사건을 가능하게 하는 존재의 층위라 하겠다. 즉, 사건은 특정한 시간과 공간 속에서 일어나는 한 번의 일이고, 순수사건은 그러한 일들이 일어날 수 있게 하는 보편적 ‘생성의 원리’다. 수필을 사건을 서사적으로 기술하는 데서 완성되는 게 아니라 사건의 전후에 있늠 맥락을 더듬어 사건과 함께 그 사건의 존재론적 층위를 깊이 있게 다루어야 한다.
장록 열매를 따서 꽉 쥐어짠다. 즙이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린다. 원이름은 미국자리공인데 귀화식물이다. 예전에 이곳 선주가 진우도에 이것이 많이 산다고 일러주었다. 씨앗이 미군의 보급물품에 묻어 진우도에 들어온 것일 터이니 진우원 아이들과 같은 처지였겠다. 대여섯 살짜리부터 있었다는데 피난길에 부모를 놓친 아이도, 폭격 속에 살아남은 아이도 있었을까. 구걸하며 떠돌다 이곳으로 흘러든 아이도 있었겠지. 악몽에 시달리기도, 날마다 먼 바다를 보며 “엄마아, 아부지이….” 불러보기도 했으리라. 같은 처지의 아이들이 단단한 사회공동체를 이룰 수도 있었는데, 비극의 막사에는 작은 비상구조차 없었던 것일까.
- <흑적> 중에서
이어서 작가는 진우도 아이들을 ‘씨앗’ 혹은 ‘귀화식물’에 비유한다. “원이름은 미국자리공인데 귀화식물이다… 씨앗이 미군의 보급물품에 묻어 진우도에 들어온 것일 터이니 진우원 아이들과 같은 처지였겠다.” 여기서 ‘귀화식물’은 단순한 생태적 사실이 아니다. 그것은 ‘이식된 존재들의 운명’, 즉 주체 없는 존재의 조건을 드러내는 들뢰즈적 ‘비인칭 사건’이다. 인간의 역사와 식물의 생태가 겹쳐지는 이 비유는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를 흐트러뜨리며, 사건의 존재론적 평면을 드러낸다. 송명화는 들뢰즈가 말한 ‘의미의 생성’을, 장록 열매의 물성과 감각을 통해 구현한다. ‘피’, ‘즙액’, ‘흑적’ 같은 감각적 어휘들은 단순한 묘사가 아니라, 사건이 언어를 통해 다시 생성되는 표면적 장이다. 그녀의 수필은 ‘사건의 발생’을 ‘언어의 발생’으로 바꾸어 놓는다.
2. 문예미학적 성취, 서정적 리얼리즘의 미학
<흑적>은 철저히 현실에 발 딛고 있으면서도, 단순한 사실 기록을 넘어선다. 서정성과 리얼리즘이 긴장 속에서 공존한다. 낙동강의 지형, 진우도의 역사, 장록의 생태적 디테일은 감각적 리얼리티의 층위를 형성하고, 그 위에 감정의 리듬이 서정적으로 진동한다. “섬의 남쪽 아래에 폐허가 된 진우원의 흔적이 남아있다. 가슴이 비어버린 허름한 우물이 있고, 생명 없는 건물의 뼈대는 누추한 벽체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운 채 바람에 몸을 맡기고 낡아간다.” 는 대목은 사실과 서정이 결합된 대표적 구절이다. 여기서 공간의 묘사는 다큐적 정확성을 지니면서도, 동시에 비유적 감각이 흐른다. “가슴이 비어버린 우물”, “건물의 뼈대”, “바람에 몸을 맡기는 그림자” 등은 사실적 서술을 넘어, 죽은 사건의 잔해 위에서 울리는 언어의 서정적 진동이다. 이런 언어는 들뢰즈가 말한 표면의 시학에 가깝다. 사물의 본질을 파고들기보다, 사물의 표면에서 미끄러지는 감각적 리듬을 통해 의미가 생성되는 것이다.
흑적색 장록 열매가 톡톡 터진다. 내 손에 물이 들었다. 얼마나 분했기에 손길만 스쳐도 저절로 분출하는 것일까. 부모들이 저승에서 흘리는 피눈물 같다. 그들은 아비규환의 주인공이 된 어린 자식들을 어찌 지켜보았을까. 한풀이를 제대로 못 한 섬은 퍼런 바닷물에 둘러싸여 앓고 있다. 보라고, 느끼라고, 잊지 말라고, 그리고 전하라고, 장록 즙액이 내게 적색경보를 날리는 것일까. 창백한 손끝에 전율이 일어 메모하는 볼펜이 떨린다.
- <흑적> 중에서
또한 송명화의 문체는 일관된 정동적 서술을 통해 수필이 지닌 감각적 깊이를 한껏 확장한다. 그녀의 문장은 감정을 직접적으로 토로하지 않는다. 대신 숨을 고르듯 길게 늘어지는 호흡, 짧게 끊어지는 리듬, 의도적으로 배치된 공백과 여백이 내면의 정동을 밀물처럼 밀어올린다. 독자는 ‘분노’나 ‘연민’, ‘죄의식’이란 단어를 만나지 않고서도, 그 정조의 진폭을 온몸으로 느낀다. 송명화의 언어는 감정을 폭로하거나 설명하지 않는다. 대신 감정의 흔들림이 언어의 표면에서 미세하게 진동하도록 내버려두며, 그 떨림 자체를 미학적 사건으로 변환시킨다. 이때 언어는 단순한 표현의 수단이 아니라, 감정이 흐르고 변화하는 ‘장場’이 된다. <흑적>의 문장은 바로 그 장 속에서 피와 열매, 흙과 어둠이 서로의 감각을 섞으며 새로운 생명성을 얻는다. 이러한 문체는 리얼리즘의 서사적 틀을 넘어서, 수필이 지닐 수 있는 서정적 리얼리즘의 정점에 이른다.
섬의 남쪽 아래에 폐허가 된 진우원의 흔적이 남아있다. 가슴이 비어버린 허름한 우물이 있고, 생명 없는 건물의 뼈대는 누추한 벽체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운 채 바람에 몸을 맡기고 낡아간다. “얘들아.” 부르면 음울한 공기의 떨림이 공간을 채웠다가 아스라이 사라져가는 적막한 구역이다. 한때는 아이들의 소란스러운 몸짓과 조잘거림으로 가득 찼을 폐허를 대중없이 바람이 쓰다듬는다. 햇빛에 몸을 말리는 날은 송구스럽고, 비 맞고 선 날은 슬프고, 회색 하늘 아래 종일 어두운 날은 그 그림자에 조사弔詞를 얹을 뿐인 것을. 미리 아이들을 지척의 섬이나 육지로 대피시킬 생각은 왜 못하였을까. 비바람이 몰아치고 바닷물이 몸을 높여 쳐들어올 때 모래섬에 갇힌 아이들의 공포를 대신 느끼는지 친구의 입술이 파래 보인다. 아픈 기억을 깁느라 말이 없다.
- <흑적> 중에서
송명화의 문장은 인간의 고통을 서사화하기보다, 세계의 감각을 다시 쓰려는 시도에 가깝다. 아이의 시선, 식물의 숨결, 섬의 침묵 같은 비인간적 존재들이 그녀의 문장 안에서 또 하나의 감각적 주체로 등장한다. 이들은 말하지 않지만, 존재의 결로써 응답한다. 바로 그 응답의 순간, 수필은 인간 중심의 비극 서사를 벗어나 자연과 사물, 역사와 정동이 함께 울리는 공명체로 변한다. 송명화의 문체가 지닌 진정한 힘은 여기에 있다. 그것은 사건을 서술하는 문체가 아니라, 언어가 스스로 사건이 되는 문체다. 감정의 흔적이 아니라, 감정이 생성되는 자리로서의 언어. 이 정동의 미학이야말로 송명화 수필이 우리 시대의 수필문학에 제시하는 가장 깊은 울림이다. 리얼리즘이 다루지 못했던 ‘침묵의 주체들’, 아이들, 식물, 섬을 언어로 복원하는 이 서정적 리얼리즘은, 들뢰즈의 ‘비인간적 감각의 윤리’와 닿아 있다. 송명화의 시선은 인간 중심의 비극 서사에서 벗어나, 자연과 역사, 사물과 인간이 공명하는 다층적 사건의 장을 구성한다.
3. 저항정신과 앙가주망, 기억의 윤리와 언어의 정치성
본격수필에 올인하고 있는 수필가 송명화 교수의 <흑적>은 ‘날선 비판정신의 저항담론’이라는 데서 그 의미를 발견할 수 있겠다. 그녀는 지금까지 20년이 넘게 작가로 글을 쓰면서 무엇이든 하면 된다는 신념으로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하는 능력을 보여주었다. 말로 글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신념으로 권력 자체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송명화 교수는 냉철하고도 엄정한 판단으로 비뚤어진 세상을 바꿀 수 있다면, 무엇에도 방해받지 않고 지혜를 발휘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송명화 교수야말로 진정한 자유인이라 믿는다. 문학은 자신도 정화해야 하고 시대도 정화해야 한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야 하는 길을 비추는 등불이어야 하고, 동시에 현대인이 살아가는 사회 현실을 비추는 거울이기도 해야 한다. 이런 차원에서 송명화 교수의 수필은 자신을 구원하는 글로써 거울 같은 작품이면서 동시에, 그의 수필은 등불 같은 수필이다.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 자신을 반성적 성찰대 위에 세우는 일이나 그 시대를 살아가는 동인들과 동행자가 되어 국가적 폭력을 들추어 내고, 숨겨진 진실을 캐내는 일은 더없이 중요한 일이다. 이런 면에서 이 작품은 나름의 역할을 다하고 있다. 잊고 있었던 자기에 대한 응시를 통해 무거운 아집을 버리는 일이나, 메모지를 가지고 삶의 진경을 담아내는 것 모두가 날선 수필가다운 면모를 보이는 일이다. 저항담론에 가까운 그의 수필 <흑적>은 그래서 지성적인 면모를 지닌다.
<흑적>은 개인적 추모의 서정을 넘어, 사회적 기억의 복원을 수행하는 윤리적 저항의 문학이다. 송명화의 수필은 과거의 고통을 단순히 회상하거나 재현하지 않는다. 그것은 망각의 층위를 더듬으며, 지워진 존재들의 흔적을 언어의 결로 복원하는 수행적 글쓰기다. 작가는 잊힌 이들의 이름을 부르지 않으면서도, 그 부재의 자리를 언어의 떨림으로 드러낸다. “아무리 전후 혼란기라 하여도 물이 서서 몰려올 때 피해서 달려갈 언덕도 제대로 없는 이곳 말고 아이들을 거둘 자리가 그리 없었던가.”라는 문장은, 그 자체로 하나의 윤리적 사건이다. 이는 단순한 질문이 아니라, 사회와 국가의 무책임을 향한 냉정한 도덕적 심판의 언어이며, 동시에 수필이 감정의 진술이 아닌 사유의 행위로 확장되는 순간이다. 송명화의 문체는 이처럼 서정적 울림과 윤리적 단호함을 동시에 품는다. 그녀는 감정을 터뜨리지 않는다. 대신 문장의 리듬과 여백을 통해 분노의 정동을 응축시킨다. 이때 ‘분노’는 폭로의 감정이 아니라, 침묵 속에서 지속적으로 진동하는 윤리적 에너지로 전환된다. 그런 점에서 <흑적>의 언어는 단지 아름답거나 슬픈 것이 아니라, ‘정동의 윤리’로 작동한다. 그것은 타인의 고통을 미화하지 않으면서, 그 고통의 진동을 언어로서 감각하게 하는 문체의 윤리다.
젊은 날, 매주 가는 고아원에는 유치원에도 가지 못하는 어린 애들이 모여있었다. 인사하는 순간부터 네 발로 가슴에 붙은 아이는 떨어질 줄 몰랐다. 헤어질 때 아이에게 다음을 약속하며 손을 떼어놓는 것이 가장 힘들었는데, 처량하게 응응거리는 아이를 다독이며 나도 눈물 비죽이기 일쑤였다. 세상에 고아가 되지 않는 사람도 있나. 진우원 아이들도 님비현상의 피해자였을까. 앞뒤가 달라 더욱 추운 단어인 ‘님비’는 사람들의 수치심을 가린다. 장록도 한때 땅을 산성화시킨다고 유해식물 꼬리표를 달았는데 더 연구해보니 산성화된 땅에서도 잘 자라는 특성 때문에 생긴 오해였다고 한다. 무지한 말의 칼춤이 홍수를 이루고 부모 잃은 서러움이 피보다 붉더라도 아이들은 장록처럼 꿋꿋하게 살아낼 수 있지 않았을까. 우우우 갑자기 바람이 운다.
- <흑적> 중에서
이 수필에서 특히 주목할 만한 대목은 ‘님비’라는 단어에 대한 작가의 응시다. “진우원 아이들도 님비현상의 피해자였을까. 앞뒤가 달라 더욱 추운 단어인 ‘님비’는 사람들의 수치심을 가린다.” 이 구절에서 ‘님비’는 단순한 사회비판의 용어가 아니라, 언어 속에서 다시 살아나는 윤리적 사건이다. 송명화는 한 단어가 품은 냉소와 수치, 그 말의 온도까지 감각한다. 그녀는 개념을 서술하지 않고, 그 개념이 만들어내는 감정의 기류를 포착한다. ‘님비’라는 단어의 차가운 울림 속에서, 우리는 공동체가 외면한 책임의 부재를 감각적으로 느낀다. 이처럼 송명화의 수필은 사회적 비판을 논리로 전개하지 않는다. 대신 언어의 결을 통해, 비인간적 구조의 냉기를 체험하게 만든다. 그녀의 문학적 저항은 구호가 아니라 감각의 윤리이며, 이때 수필은 사고의 산문이 아니라 정동이 스스로 의미를 형성하는 공간이 된다. 바로 이러한 미학적 긴장 속에서 송명화는 들뢰즈가 말한 ‘사건의 윤리’를 수필문체 안에서 구현한다.
자라지 않는 아이들의 섬, 진우도를 향해 손을 흔든다. 그럴듯한 위령비도 없이 아이들은 어찌 잠들어 있을까. 장록이 우거져 해마다 가슴의 울혈을 대신 토해내는 땅, 언제쯤 흑적의 흔적을 지울 수 있을까.
- <흑적> 중에서
결말부 담론층에서 작가는 “자라지 않는 아이들의 섬, 진우도를 향해 손을 흔든다.”로 글을 맺는다. 이 결말은 단순한 작별의 인사가 아니다. 손을 흔드는 행위는 부재한 존재를 향한 애도의 제스처이자, 동시에 존재론적 호명이다. 송명화는 잊힌 아이들을 과거에 묻지 않고, 현재로 불러낸다. 언어 속에서 그들은 다시 살아 있는 존재로 돌아온다. 이때 수필의 문장은 단순한 기술의 도구가 아니라, 존재를 되살리는 호흡이 된다. ‘흑적’의 마지막 문장은 그래서 슬프기보다 맑고 단단하다. 그것은 절망의 언어가 아니라, 존재를 향한 응답의 언어다. 송명화의 앙가주망은 정치적 구호로서의 참여가 아니다. 그것은 언어의 결 속에서 실천되는 윤리, 곧 문체의 참여다. 그녀는 수필을 통해 세계를 다시 쓰고, 말해지지 않았던 것들에게 발언의 자리를 부여한다. 이때 수필은 한 개인의 감상이나 회고를 넘어, 언어가 윤리로 진화하는 사건의 현장이 된다.
결국 송명화의 글쓰기는 수필이 도달할 수 있는 윤리적 깊이와 미학적 긴장을 동시에 보여준다. 그녀의 문장은 개인의 정서를 사회적 감각으로, 감정의 파동을 언어의 사건으로 전환한다. 그리하여 수필은 사적인 기록이 아니라, 세계와 타자의 고통을 함께 짊어지는 문학적 행위로 변모한다. <흑적>은 이처럼 ‘정동의 미학’과 ‘언어의 윤리’를 한 몸에 결합시킨 보기 드문 수필이다. “장록이 우거져 해마다 가슴의 울혈을 대신 토해내는 땅, 언제쯤 흑적의 흔적을 지울 수 있을까.”에서 느낄 수 있듯이, 송명화의 문체는 부드럽지만 결코 연약하지 않으며, 조용하지만 깊은 저항의 힘을 지닌다. 그것은 세계의 슬픔을 받아들이되, 그 슬픔을 언어로 새롭게 호명함으로써 인간과 세계의 관계를 다시 묻는 문체다. 바로 그 점에서 그녀의 수필은 한국 현대수필이 나아가야 할 새로운 지평을 제시한다. 송명화의 문장은 한 편의 애도가 아니라, 살아 있는 윤리의 문체라 하겠다. 그녀의 언어는 사건의 고통을 감각적으로 체험하게 하면서도, 사회적 책임과 기억의 윤리를 독자에게 직접 전달한다. 장록의 흑적색이 손끝에 묻듯, 그녀의 수필은 독자의 마음에 윤리적 자극을 남기며 행위로 이어지는 성찰을 촉발한다.
Ⅲ. ‘사라호’ 이후의 창작, 윤리적 실천
송명화의 <흑적>은 단순한 추모 수필이 아니다. 그것은 사건의 존재론적 재구성이며, 언어를 통한 윤리적 실천이다. 들뢰즈의 개념으로 말하면, 이 수필은 과거의 ‘사태’를 다시 ‘사건화’함으로써, 새로운 의미의 평면을 창조한다. 철학자 야스퍼스는 “인간과 인간 사이에는 연대감이 존재하기 때문에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잘못된 일과 불의, 악을 저지하기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지 않으면 그때 나는 그것들에 대한 책임을 나눠지게 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야스퍼스는 인간을 고립된 개체로 보지 않았다. 그에게 인간은 ‘공존적 존재’, 즉 함께 존재하는 존재다. 야스퍼스는 악이나 불의가 단지 ‘남의 일’로 방관되는 순간, 그 사회 전체는 공동의 책임을 지게 된다고 보았다. 송명화 교수의 생각도 이와 다르지 않다. 야스퍼스의 이 말은 오늘날에도 깊은 울림을 준다. 사회적 부정의, 차별, 혐오, 환경 파괴 등 수많은 문제 앞에서 “나는 직접 한 일이 아니니까”라는 변명은 통하지 않는다. 그의 사유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당신은 지금 세상의 불의에 대해 어떤 방식으로 침묵하고 있는가?” 결국 야스퍼스의 철학은 인간의 자유가 타인의 자유와 무관하지 않음을 깨닫는 데서 시작되는 실존적 윤리를 가르친다. 송명화 교수는 <흑적>으로 야스퍼스이 철학을 전하면서 윤리적 실천을 당부한다. “책임을 자각할 때 비로소 인간은 인간이 된다.”
‘흑화’라는 말은 색채적, 상징적으로 어둠, 부정적 성격, 은폐, 고통, 죽음 등을 연상시킨다. 단순히 ‘검게 변했다’는 의미를 넘어, 의미가 가려지고, 일반적 인식에서 소외된 상태를 의미한다. ‘사건’과 결합했을 때 사건event은 단순한 사실fact과 달리, 정동, 의미, 윤리적, 사회적 파장을 동반하는 경험적, 철학적 단위가 된다. 따라서 “흑화된 사건”은 표면적으로 드러나지 않거나, 감춰진 채 어두운 의미와 감정을 품고 있는 사건을 의미하기 때문에 ‘진우도 진우원 고아들 희생사건’은 사회적 폭력, 역사적 망각, 억압당한 목소리, 슬픔과 분노를 내포한 사건으로 이에 해당한다. 수필문학적 맥락에서 송명화의 <흑적>과 같은 수필에서는 “흑화된 사건”을 아이들의 부재, 섬의 상처, 잊힌 역사와 같은 비가시적 사건과 연결된다. 즉 사건 자체가 드러나기 어렵고, 표면적 사건이 아닌 정서적, 윤리적 흔적으로만 체험되는 경우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문체적으로는 이러한 사건을 붉은 흔적, 애가, 정동적 울림 같은 이미지로 변환해 독자에게 전달하는 것이 이 수필의 특징이기도 하다. 장록의 붉은 즙이 손끝에서 피어날 때, 그것은 더 이상 자연의 색이 아니라 의미의 생성, 윤리의 탄생이다. 작가는 “기억의 형식이 아니라, 의미의 운동”으로 사건을 되살린다. 그리하여 <흑적>은 죽은 역사 위에 다시 생명의 언어를 심는 문학적 의례가 된다.
문예미학적으로도 송명화의 수필은 서정과 리얼리즘, 감각과 사유, 사실과 상징이 긴장 속에서 어우러진 완성된 작품이다. 그리고 그 미학은 윤리와 직결된다. 작가는 언어의 힘으로 “보이지 않는 존재들”을 다시 보이게 함으로써, 문학의 본령, 세계에 대한 증언과 저항을 수행한다. “언제쯤 흑적의 흔적을 지울 수 있을까”라는 마지막 문장은 역설적으로 말한다. 그것은 지워질 수 없는 사건의 존재, 그리고 계속해서 새로 쓰여야 하는 윤리의 과제를 의미한다. 송명화의 <흑적>은 그 붉은 흔적을 통해, 문학이란 무엇보다 기억의 생명과 윤리의 감각을 되살리는 사건의 예술임을 증명한다고 하겠다. 물질만이 기쁨과 행복을 주는 것은 아니다. 나를 있게 한 과거의 끈으로 튼튼한 미래를 창조하려는 창조적이며 포용적 마인드가 중요하다. 그녀는, 날선 인식에 삶의 현장을 담고, 이를 바탕으로 저항적, 윤리적 미학을 실천하며, 실천의 나무를 키우고 있다. 그녀는 정녕 본받아야 할 이 시대의 지성이요, 정말 사상근육이 튼튼한 사람이다. 마지막으로, 이 글을 마치며 작가에게 다음의 말을 전한다. 알베르 카뮈, “예술가는 슬픔을 말하는 이가 아니라, 슬픔을 견디는 이다. 그 견딤 속에서 언어는 다시 태어난다.” 무라카미 하루키, “문학이란 인간의 고통을 가장 조용한 방식으로 바꿔 쓰는 기술이다.” 송명화의 수필은 이 두 문장을 온몸으로 증명하고 있다. 그녀의 글은 고통을 증언하는 언어가 아니라, 고통을 품은 언어의 윤리 그 자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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