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주의 경제학의 실패는 유럽 1,2 차 세계대전으로 나타났다.
수요 공급의 이론에 따라 시장은 ‘보이지않는 손’에 의해 자동으로 조정이 된다고 보았던 아담 스미스의 이론은 여지 없이 깨졌다.
그것을 해결한 사람이 케인즈다.
케인즈는 ‘거시경제학’의 거목으로 정부의 역할을 강력하게 주장하였고,
2차 대전 후, 브래튼우즈 회의를 이끌었다.
세계 대전의 원인이 되었던, 변동 환률제를 달러가 주축이 된 고정환률제로 변화시켰다.
그리고, IMF, IBRD, GATT 등 국제 경제 기구를 만들었다.
그리고 브레툰우즈 회의로 미국 달러가 금태환화폐로 기축통화가 되었다.
케인즈가 주축이 된 세계 경제는 2차 대전 후부터 1970년대 까지 안정적인 성장을 이루면서 호황의 시대를 열었다.
70 년대 초반, 스테그 플레이션으로 세계경제는 다시 위기에 빠진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경기침체기에는 물가가 하락하고 경기호황기에는 물가가 상승하는 것이 일반적 현상이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특히 1970년대 들어 두 번의 유가파동을 겪으면서 실업이 늘어나는 침체기에도 인플레이션이 지속되는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와 같이 실업과 인플레이션이 동시에 증가하는 현상을 스태그플레이션이라 한다.
스태그플레이션을 해결한 것이, 시카고 학파다.
시카고 학파는 시카고 대학의 학생들과 교수진들의 연구와 관련된 신고전파 경제학 학파이다.
1930년대에 처음 태동하였으며, 이 시기 제이콥 바이너나 프랭크 나이트 등의 학자들의 활약이 두드러졌으나,
시대적 한계 때문에 주류학계의 담론으로 발전하지는 못하였다. 이들을 계승한 시카고학파의 대표적인 인물들이 바로 밀턴 프리드먼과 조지 스티글러이다.
거시 경제학의 맥락에서, 시카고 학파는 연안 대학들에 기반을 둔 짠물 학파와 대조적으로, 거시 경제학의 "민물 학파"와 연결된다.
시카고 거시 경제 이론은 1970년대 중반까지 통화 주의를 지지하는 케인즈식을 거부해 왔는데, 그 때 그것은 합리적인 기대의 개념에 기초하여 주로 새로운 고전적인 거시 경제학으로 돌아섰다.
민물 학파와 짠물 학파의 구분은 두 전통이 서로 상당히 결합된 개념을 갖고 있기 때문에 오늘날 대부분 구식이다.
구체적으로, 새케인스학파 경제학자들은 새로운 고전적인 경제학에 대한 반응으로 불완전한 경쟁과 경직된 임금에 대한 전통적인 케인스 학파의 집중을 포기하지 않고 합리적인 기대치를 반영하기로 결정했다.
1980년도에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과 영국의 마거릿 대처 수상이 시카고 학파의 경제학 이론들을 전폭적으로 지지하며 미국과 영국의 경제 정책에 반영 시켰다. 또한 남미에서는 일명 "시카고 보이즈"라고 불리는 시카고대 출신 경제학자들이 경제부 총리 같은 중요 직책들을 다루었다.
그후, 시카코 학파의 이론은 레이거니즘과 대처리즘으로 확대되어 전 세계 경제를 신자유주의 시대를 열었다.
한국은 그것의 영향을 받아 ‘한미 FTA’를 체결하였다.
시카고 학파의 루카스는 정부의 간섭을 최소화 하고 국가 간의 무역 자유화를 주장하였다.
루카스의 내생적 성장이론 중 하나인 인적자본모형과 합리적 기대를 전제로 한 섬모형, 루카스 총공급함수, 화폐경기변동이론 그리고 동태확률일반균형 등 굵직한 이론과 모형들을 제창한 장본인이다. 이를 통해 엄밀한 수리통계적, 미시경제학적 분석을 기초로 한 현대 거시경제학 계량분석의 지평을 열었다.
그가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하기 7년 전인 1988년, 그는 낸시 스토키와 눈이 맞아 아내와 이혼을 하게 되는데 그 조건으로 아내는 1995년 10월 31일 안에 루카스가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할 시 상금의 절반을 본인이 가지겠다는 조건을 내건다.
시간은 흐르고 결국 기한 만료 20여일을 앞 둔, 1995년 10월 7일 루카스는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하고 전(前) 아내는 결국 상금의 절반을 가져가게 된다.
그의 이론, ‘합리적 기대’는 그의 아내가 확실하게 실천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