休逸
윤추尹推 墓表[尹拯]
嗚呼! 此乃有明朝鮮司憲府掌令尹君諱推字子恕之墓也。 君之先坡平人。 祖諱煌, 大司諫八松先生。 考諱宣擧, 魯西先生。 妣公州李氏, 生員諱長白之女也。
君以崇禎五年壬申五月五日, 生于漢城。 幼勁特不群。 旣長, 治擧業, 再得解, 未成名。 年未三十, 得疾在床褥者幾十年。 戊申, 始又赴科, 屈於殿試, 士論惜之。 明年己酉, 丁憂。 辛亥, 服闋, 更不赴擧, 自號農隱, 服田食力, 爲終焉計。 連除繕工監監役、童蒙敎官、司饔院參奉, 皆不赴。 以薦剡有陞敍六品之命, 辛酉, 始除長興庫主簿, 尋除懷德縣監。 君旣屢被除命, 以漸得不仕之名爲懼, 遂謝恩之官, 居一年, 有所不樂, 棄歸。 丙寅, 除定山縣監, 明年丁卯, 遭先君子被懷川之誣詆, 棄歸。 己巳, 除石城, 赴任未數月, 遭牛、栗兩先生文廟輟享之厄, 又棄歸。 甲戌, 除龍潭縣令, 踰年而歸。 乙亥, 被廉謹之選, 超敍準職, 除禮賓寺正, 赴謝而歸。 丙子, 除靑松府使, 不赴。 丁丑冬, 除金堤郡守, 戊寅夏, 棄歸。 丙戌, 始拜司憲府掌令, 君時年已七十矣。 陳疏辭, 聖批申諭上來, 再疏而遞。 又拜掌令, 旋以公格遞。 丁亥十一
月二日, 終于竹里。 以明年正月二十五日, 葬于公州南木洞鄕斗山某坐某向之原。
嗚呼! 君爲人淸峻明決, 且有高才遠識, 早以病廢, 晩仍自屛於畎畝, 竟不能有所展布而終。 旣老, 常自歎曰: “當爲國家少效材力, 而白髮乃如許耶!” 世人以此無有知其蘊者。 其爲邑, 絶異於人, 自處如在家時, 視官事如家事, 未嘗以私惠、小恩呴呴於民。 唯有害則去之, 有橫斂則除之, 務令民無煩撓而已。 待吏、民一以誠信, 無不愛而畏之。 其欲歸也, 命駕獨出, 而家屬隨之, 邑人亦不及知也。 歸家則蕭然如舊, 無一介官物之帶來者, 未知古之范萊蕪、元魯山輩何如也?
居家極簡儉, 安貧守素, 略無所厭。 爲便於調病, 多處齋菴, 服食與老衲無別, 人之見者莫不以爲難堪, 而常泰然也。 無求於人, 無慕於外, 與古之隱居獨行者實多暗合, 非必學得於他也。 少時峭直, 好面折人, 嬰病之後, 變得氣質, 口不言人之過, 遇人恭謹, 雖卑賤不敢忽易也。 然論人, 其邪正、虛實, 洞然如見其肺肝, 久而益信。 論事, 無大小, 其是非、成敗, 後多如其所料, 古人所謂先見者, 無讓焉。
與我爲兄弟, 七十年偲切如朋友, 遇有過失, 直斥苦爭, 至於變色。 而旣老猶未嘗偃息於前, 吾每謂老人竝臥無妨, 而猶不敢也。 雅性不喜芬華, 不喜煩鬧, 常以淡靜爲味。 嘗曰: “聖人每言命, 所以曉衆人者, 而人之信得及者尟矣。” 末年衰病鰥獨, 苦惱無比, 而一切任他, 不以動其心, 其定力人不可及。 此蓋君之本末, 而吾不能盡之也。
配豐壤趙氏, 郡守進陽之女, 浦渚先生之孫; 繼室全義李氏, 士人𣞗之女, 俱淑人。 子二人: 長曰自敎, 質厚行醇, 年纔半百, 先君六年卒; 少曰可敎, 才高志遠, 不幸短命, 二十四歲而夭。 李氏生一子, 不育。 自敎有一子四女: 子曰東洙, 以學行薦內侍敎官。 有二子: 光蘊, 光謙。 長女適李思齊, 二子二女; 次適李普元, 二子一女; 次適權在衡, 生一男而夭; 季適李弼聖。 可敎有遺腹一女而無子, 以從弟行敎之子東浚爲嗣。 女適金時濟, 二子二女。
東洙請余題墓表, 病惛不省, 僅略述如右。 而別爲遺事十餘條, 使之以此求誌於作者云。
윤추[尹推]의 묘표(墓表) 윤증(尹拯)
아! 이는 조선(朝鮮)의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 윤군(尹君) 휘(諱) 추(推), 자(字) 자서(子恕)의 묘소이다. 군의 선조는 파평(坡平) 사람인데, 할아버지 윤황(尹煌)은 대사간(大司諫) 팔송 선생(八松先生)이고 아버지 윤선거(尹宣擧)는 노서 선생(魯西先生)이며 어머니 전주 이씨(全州李氏)는 생원(生員) 이장백(李長白)의 딸이다.
군이 숭정(崇禎) 임신년(壬申年, 1632년 인조 10년) 5월 5일 한성(漢城)에서 태어났는데, 어려서부터 특출하여 보통 아이들과 달랐다. 장성하자 과거 공부를 하여 두 번이나 시험을 보았으나 성공하지 못하였고 나이 30세가 안 되어 병이 나 10년 가까이 병상에 누워있었다. 무신년(戊申年, 1668년 현종 9년)에 비로소 또 과장(科場)에 나갔으나 전시(殿試)에서 떨어지니, 사론(士論)이 애석해 하였다. 그 이듬해 기유년(己酉年, 1669년 현종 10년)에 상(喪)을 당하고 신해년(辛亥年, 1671년 현종 12년)에 상복(喪服)을 벗었는데, 다시금 과장에 나가지 않은 채 스스로 호를 농은(農隱)으로 짓고 자신의 힘으로 농사를 지어 생활하며 일생을 끝마치려고 계획하였다. 이에 선공감 감역(繕工監監役)ㆍ동몽 교관(童蒙敎官)ㆍ사옹원 참봉(司饔院參奉)을 연달아 임명하였으나 모두 나가지 않았다. 그런데 추천으로 인해 육품(六品)으로 승진시키라는 명이 있었다. 신유년(辛酉年, 1681년 숙종 7년)에 비로소 장흥고 주부(長興庫主簿)에 임명되었으나 그 뒤 얼마 안 되어 회덕 현감(懷德縣監)에 임명되었다. 군이 누차 벼슬의 임명을 받음으로써 점차 벼슬하지 않는다는 이름을 얻은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사은(謝恩)하고 부임하여 1년 있다가 즐겁지 않은 바가 있어 벼슬을 버리고 돌아와 버렸다. 병인년(丙寅年, 1686년 숙종 12년)에 정산 현감(定山縣監)에 임명되었다가 그 이듬해 정묘년(丁卯年, 1687년 현종 13년)에 선친(先君子, 윤선거(尹宣擧)를 가리킴)이 회천(懷川, 송시열(宋時烈)이 회덕(懷德)에 살았음)의 무고를 당하자 벼슬을 버리고 돌아왔다. 기사년(己巳年, 1689년 숙종 15년)에 석성 현감(石城縣監)에 임명되어 부임한 지 몇 달이 되지 않아 우계(牛溪)ㆍ율곡(栗谷)을 문묘(文廟)에서 퇴출하는 액운을 만나 또 벼슬을 버리고 돌아왔다. 갑술년(甲戌年, 1694년 숙종 20년)에 용담 현령(龍潭縣令)에 임명되어 부임하였다가 1년이 넘어 돌아왔다. 을해년(乙亥年, 1695년 숙종 21년)에 청렴 근신한 수령의 선발에 뽑혀 그에 해당한 벼슬에 승진되어 예빈시 정(禮賓寺正)으로 임명하니 나가서 사은하고 돌아왔다. 병자년(丙子年, 1696년 숙종 22년)에 청송 부사(靑松府使)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정축년(丁丑年, 1697년 숙종 23년) 겨울에 김제 군수(金堤郡守)에 임명되어 부임하였다가 무인년(戊寅年, 1698년 숙종 24년) 여름에 벼슬을 버리고 돌아왔다. 병술년(丙戌年, 1706년 숙종 32년)에 비로소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에 임명되었는데, 윤군의 그때 나이 이미 70세였으므로 상소를 올려 사양하니, 내린 비답에 올라오라고 신신 당부하였으므로 재차 상소를 올리어 해직되었다. 그 뒤 또다시 장령에 임명되었다가 곧바로 공격(公格)으로 체직되었다. 정해년(丁亥年, 1707년 숙종 33년) 11월 2일에 죽리(竹里)에서 세상을 떠나 그 이듬해 1월 25일에 공주(公州) 남목동(南木洞) 향두산(鄕斗山) 모좌(某坐) 모향(某向)의 자리에 묻히었다.
아! 군의 위인이 고상하고 명쾌한데다 높은 재주와 원대한 식견이 있었으나 일찍이 병으로 인해 폐인이 되었고 만년에는 스스로 초야로 물러난 바람에 결국 펼쳐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미 늙어서 항상 스스로 탄식하기를, “마땅히 나라를 위하여 조금이라도 재능을 발휘해야 할 터인데 이처럼 백발이 되어버렸단 말인가?” 하였는데, 이로 인해 세상에 그의 온오(蘊奧)를 아는 사람이 없었다. 고을을 다스릴 때 다른 사람과 전혀 달랐다. 스스로의 처신을 집에 있을 때와 같이 하였고 관청의 일을 집안 일처럼 보았는가 하면 사적인 은혜나 조그만 은정을 백성에게 베풀지 않고 해로운 것이 있거나 과도한 세금이 있으면 제거하여 백성으로 하여금 동요하지 않도록 힘쓸 뿐이었다. 그리고 서리와 백성을 한결같이 성신(誠信)으로 대하니, 너나없이 사랑하면서 두려워하였다. 임소에서 돌아올 적에 수레를 준비시켜 혼자 출발하고 가족이 뒤따라갔으므로 고을 사람들도 미처 알지 못하였으며 집에 돌아왔을 적에는 옛날처럼 소연(蕭然)하여 가지고 온 관물(官物)이 하나도 없었으니, 옛날 범 래무(范萊蕪, 범자운(范子雲))ㆍ원 노산(元魯山, 원덕수(元德秀)) 무리는 어떠하였는지 모르겠다. 가정생활이 매우 검소하여 가난에 안주하고 본분을 지켜 조금도 싫어한 바가 없었다. 병환을 요양하기 위하여 대부분 암자에 거처하며 의복과 음식이 늙은 중들과 다름이 없었으므로 보는 사람들이 모두 난감하게 여기었으나 항상 태연하였다. 다른 사람에게 요구한 바도 없고 외부의 사물을 부러워한 바도 없어서 옛날 은거하며 혼자 실행하는 사람과 은연중 합치된 바가 실로 많았는데, 꼭 그것을 배워서 얻은 것이 아니었다. 젊었을 때 강직하여 사람을 대놓고 과실을 말하기 좋아하였으나 병이 난 뒤로 기질을 변화하여 남의 과실을 말하지 않고 사람을 만나면 공경하고 근신하여 비록 비천한 사람이라도 감히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람을 논할 적에 사정(邪正)과 허실(虛實)을 폐간(肺肝)을 들여다보듯이 꿰뚫어보았으므로 오래될수록 더욱 믿었다. 일을 논하면 대소를 막론하고 그 시비와 성패가 나중에 대부분 예측한 바와 같았으니, 고인이 이른바 선견지명(先見之明)을 가진 사람과 비해 볼 때 손색이 없었다. 나와 70년간 형제로 지내면서 벗처럼 서로 권장하고 규계하되, 과실이 있을 경우에는 곧바로 배척하고 괴롭게 간쟁하여 심지어 안색을 변하기도 하였다. 그런가 하면 늙은 뒤에도 나의 앞에서 눕지 않기에 내가 매양 “노인은 같이 누워도 괜찮다.”고 말하였으나 여전히 감히 하지 않았다. 본래 성품이 화려한 것이나 시끄러운 것을 좋아하지 않아 항상 담담하고 조용한 것에 맛을 붙여 말하기를, “성인(聖人)이 매양 명(命)을 말한 이유는 사람들을 깨우치려고 한 것인데 믿는 사람이 드물다.” 하였다. 만년에 쇠병(衰病)이 들고 홀아비가 되어 그 고뇌가 비할 데가 없었으나 일체 닥치는 대로 살며 마음을 동요하지 않았으니 그 정력(定力)은 남들이 따라갈 수 없었다. 이는 대체로 군 사적의 본말인데 내가 다 쓰지 못하였다.
부인 풍양 조씨(豐陽趙氏)는 군수(郡守) 조진양(趙進陽)의 딸이자 포저 선생(浦楮先生)의 손녀이고 둘째 부인 전의 이씨(全義李氏)는 사인(士人) 이유(李木劉)의 딸인데 모두 숙인(淑人)이다. 조씨는 2남을 낳았는데 큰아들 윤자교(尹自敎)는 자질이 두텁고 행실이 순수하였으나 50세의 나이로 군보다 6년 전에 죽었고, 작은 아들 윤가교(尹可敎)는 재주가 뛰어나고 뜻이 원대하였으나 불행하게도 단명하여 24세에 요사하였다. 이씨는 1남을 낳았으나 기르지 못하였다. 윤자교는 1남 4녀를 낳았다. 아들 윤동수(尹東洙)는 학문과 덕행으로 추천되어 내시 교관(內侍敎官)이 되었고 2남 윤광온(尹光蘊)ㆍ윤광겸(尹光謙)을 두었다. 큰딸은 이사제(李思齊)에게 시집가 2남 2녀를 낳고 둘째 딸은 이보원(李普元)에게 시집가 2남 1녀를 낳고 셋째 딸은 권재형(權在衡)에게 시집가 1남을 낳았으나 요사하였고 넷째 딸은 이필성(李弼聖)에게 시집갔다. 윤가교는 유복녀(遺腹女) 하나만 있고 아들이 없어서 종제 윤행교(尹行敎)의 아들 윤동준(尹東浚)을 후사로 삼았다. 딸은 김시제(金時濟)에게 시집가 2남 2녀를 낳았다. 윤동수가 나에게 군의 묘표를 써달라고 청원하기에 병이 들어 혼미하여 살피지 못하고 겨우 위와 같이 대략 기술한 다음 별도로 유사(遺事) 10여 조목을 기술하여 그로 하여금 이것을 가지고 작자에게 묘지를 청원하도록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