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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만/ 기독교 /대한민국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했고, 대한제국이 아닌 대한민국의 탄생에 앞장섰고, 일평생 기독교인으로 살았습니다.
첫째로, 출생과 성장 배경과 미국 유학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그는 1875년 3월 26일(음력 2월 19일) 황해도 평산군 마산면 대경리에서 아버지 이경선(1839~1913년)과 어머니 김해 김씨 김말란(1833~1896년) 사이에서 3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으나, 손 위의 두 형이 그의 출생 전에 사망했으며, 사실상 6대 독자였습니다.
아버지 이경선은 조선왕조의 후예인 전주 이씨 가문으로 태종의 장남이며, 세종의 형인 양녕대군의 다섯째 아들 장평정 이흔의 15대손입니다. 즉 태조 이성계의 18대손입니다.
양녕대군은 세자 책봉을 받았지만 왕의 자리를 동생인 세종에게 넘겨주었습니다.
선조가 동생에게 상속권을 넘겨주지 않았다면, 양녕대군의 16대손이었던 이승만은 그때 고종(1852 ~ 1919년)의 위치에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5대조부터 벼슬길이 끊겨 이미 몰락한 집안이었습니다.
부친 이경선은 과거에 낙방해 특별한 직업 없이 살아갔으며, 왕족의 후예로 이승만을 유교 정신에 충실한 선비로 키우고자 했습니다.
모친은 독실한 불교 신자였는데 모친이 절에서 제사를 지내고 용꿈을 꾼 이후 이름을 승룡(承龍)이라고 했는데, ‘늦게 왕이 될’ 사주라 하여 그의 부모가 이름을 승만(승晩)으로 개명시켰습니다.
3살 때 1877년에 아들의 교육을 위해 모친의 결정으로 한성부 남대문 밖 우수현으로 이사하여 그곳에서 자랐습니다.
이승만의 호 ‘우남’은 ‘우수현의 남쪽’이라는 뜻입니다.
이승만은 어린 시절부터 불교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생일마다 모친과 함께 사찰에 가서 복과 장수를 기원했습니다.
어려서부터 입신양명을 위한 한학 공부에 몰두했습니다.
양반으로서 몰락한 가문의 위신을 다시 세우는 길은 오직 과거 급제뿐이었습니다.
이에 서당 훈장의 딸이었던 모친은 이승만에게 천자문을 가르쳤고, 모친의 열정적인 교육열로 인해 6살에 천자문을 암기했습니다.
그는 1887년경 과거에 도전할 때까지 몰락한 가문을 살리기 위해 한학 공부에 열중했으나 그의 목표는 현실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1887년부터 시작한 그의 노력은 1894년 갑오개혁으로 과거제도가 폐지되면서 사실상 물거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동안 해오던 한학 공부는 출세의 수단이 되어주지 못했습니다.
하나의 목표를 위해 정진해온 사람에게 목표의 상실이 얼마나 큰 실망이었겠습니까?
그러나 실망은 더 큰 전환을 위한 새로운 기회였습니다.
그로 인해 그가 기독교 학교인 배재학당에 다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갑신정변에 가담하여 사형수로 한성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한학에 천착했던 이승만은 사실 구시대의 사고와 정신에 갇혔던 인물이었으나 서방 정신을 배울 기회가 생겼는데, 바로 서당에서 함께 공부하던 신긍우가 배재학당을 소개해 주었던 것입니다.
배재학당은 아펜젤러(Henry Gerhard Appenzeller) 선교사가 1886년에 설립했고, 이후 관직의 등용문이 되곤 했습니다.
정부는 배재학당 졸업생과 재학생을 시험 없이 관료로 임명했기 때문에 갑오개혁으로 인해 관직의 길이 막혔던 양반들에게는 막힌 창문에서 새어 나오는 빛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에 이승만도 1895년에 배재학당의 영어과에 입학했습니다.
영어를 배워서 출세의 도구로 활용하려는 심산이었습니다.
그러나 배재학당의 교육에는 서방의 역사를 비롯한 정치제도 등이 포함되어 있었고, 이것은 그의 삶의 방향을 전환하는 매개가 되었습니다.
특별히 그는 배재학당에서 정치적 자유와 평등을 공부하며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조선왕조라는 정치 체제 속에서 개인은 왕조의 절대적 통치의 대상일 뿐이었고, 정치적으로 개인을 보호할 법적 체계는 전혀 없었습니다.
배재학당에서 이승만에게 민주정신을 불어넣어 준 중요한 인물 중 한 명은 바로 서재필이었습니다. 그는 1884년 갑신정변의 중심인물로 미국에 망명한 뒤 미국 국적을 취득하고, 의사가 되었습니다.
이후 청·일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고 개화파가 중심이 되어 갑오개혁이 이루어지자 1895년에 미국인 신분으로 귀국해 조선의 개혁을 위해서 활동했습니다.
이때 그가 활동했던 장소 중 한 곳이 바로 배재학당이었습니다.
서재필은 1896년 5월부터 배재학당에서 1년간 강의를 했습니다.
그는 이때 학생들에게 민주주의를 가르쳤는데, 서재필이 가르친 민주주의의 실천 방식인 토론과 다수결의 법칙은 당시 학생들에게는 획기적인 것이었습니다.
특별히 배재학당 학생들은 서재필이 1896년 7월 2일에 설립한 독립협회와 유사한 협성회를 만들었습니다.
독립협회의 만민공동회, 관민공동회가 대중적 토론의 장이었던 것과 같이, 협성회도 회원들이 모여서 민족주의, 민주주의, 사회개혁 등의 주제를 가지고 토론을 하는 모임이었습니다.
이승만은 협성회의 초대 맴버 13인 중 한 사람이었고, 후에 회장으로 활동했습니다.
배재학당을 통한 이승만의 내적 변화를 잘 보여주는 사건이 바로 상투를 제거한 것입니다.
1895년 12월 단발령이 시행되었을 때, 이승만은 조선의 오랜 전통으로 자리 잡고 있던 상투를 잘라 버렸습니다.
이런 행위는 그가 조선이라는 구시대에 갇힌 봉건적 인물이 아니라, 근대정신을 가지고 민주정신 속에서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인물로 성장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행위였습니다.
그의 내면에 분명해진 독립정신과 민주정신을 확산시키기 위한 도구는 신문이었습니다.
1898년 1월, 그를 포함한 배재학당의 협성회 회원들이 <협성회회보>를 창간했습니다.
그는 협성회보의 주필로 활동하며, 주간 신문인 <협성회회보>를 일간 신문으로 확대했습니다.
또 <매일신문>을 창간했으며, <제국신문>의 창간에도 동참했습니다.
이 신문들은 그가 배재학당에서 배운 민주정신과 독립정신을 확산시키는 하나의 도구였습니다.
그는 독립협회에도 참여했습니다.
수구세력과 충돌은 있었지만, 대중의 지지를 받는 이승만 등 독립협회 회원들은 수구세력의 회유 대상이 되었습니다.
1898년 11월 19일, 이승만을 비롯한 독립협회 회원 17명은 중추원 의관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이때 이승만은 박영효를 중추원 의장으로 추천합니다.
당시 박영효는 갑신정변을 통해 새로운 내각을 수립할 계획을 세웠는데, 이승만은 여기에 가담했습니다.
그 결과 1899년 1월 5일에 이승만은 중추원 의관에서 해임당했고, 박영효의 쿠테타 음모가 발각되어 그해 1월 9일에 경무청에 체포되고 말았습니다.
이승만은 투옥된 지 20일 후인 1월 30일에 감옥으로 반입된 권총을 가지고 최정식, 서상대와 함께 탈옥했습니다.
그는 감리교 선교부로 도망쳤지만, 곧 다시 체포되었고, 탈옥을 이유로 사형을 선고받았습니다.
사형수로 한성 감옥에서 수감생활을 하는 그는 삶과 죽음의 경계에 있었습니다.
같이 탈옥을 시도했던 최정식과 서상대는 사형을 당했습니다.
10kg의 칼을 목에 쓰고, 고문의 후유증 속에서 사형을 기다리는 이승만에게 일상적 평안은 거리가 멀었습니다.
죽음이 목전에 다가온 사람은 죽음 이후를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죽음의 위기가 인간을 종교적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이승만 역시 삶과 죽음의 실존적 위기 속에서 죽음 이후를 생각했습니다.
그는 한성 감옥에서 선교사를 통해 영어로 된 신약성경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 성경은 죽음을 기다리는 그의 유일한 친구이자, 신앙인으로서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는 성경을 읽으며 배재학당에서 들은 설교를 기억했고, 자연스럽게 설교 때 배운 기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기도는 단순했습니다.
먼저 자신의 영혼 구원을 위해, 그 다음은 나라의 구원을 기도했습니다.
이렇게 감옥의 깊은 곳에서 하나님을 찾자 그의 마음에는 기쁨과 평화가 임했습니다.
불교와 유교의 전통에 있던 그가 기독교 신앙체험을 한 것이었습니다.
이승만 역시 죽음의 고통을 느끼던 때 경험했던 신앙체험을 주변 수감자들에게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40명이 넘는 수감자들이 개종했습니다.
여기에는 이상재, 이원긍 등의 양반도 포함되었습니다.
더 나아가 이승만은 감옥에서 의미 있는 삶을 찾았습니다.
그것은 감옥에서 학교를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깊은 신앙체험을 통해 인간 영혼의 소중함을 깨달은 그는 수감자들을 교화할 필요성을 느꼈고, 영어, 일어, 문법, 산수, 한자, 성경, 기도 등을 가르치는 감옥 학교를 열었습니다.
또한, 선교사들이 감옥에 반입해주는 서적들로 옥중 도서관을 만들었는데, 감옥 서장이었던 김영선은 이승만의 활동을 적극적으로 도와주었습니다.
도서관의 책은 주로 기독교 서적이었고, 당시 선교사들이 발행하던 《그리스도신문》, 《신학월보》도 있었습니다.
이승만의 기독교 신앙체험과 개종이 중요한 이유는 그의 정치사상과 기독교가 연결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배재학당을 통해 민주정신을 배웠고, 독립을 위한 자주 의식의 중요성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되면서 인간이 바른 의식을 갖게 하는 것이 기독교이고, 기독교가 바로 나라의 근본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한성 감옥은 그의 정치관과 신앙관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그 다음, 출소 후 미국으로 유학을 갔습니다.
청년 이승만이 한성 감옥에 6년 가까이 있다가 출소하자 선교사들의 주선으로 30세에 미국 유학을 가게 됩니다.
그때 이승만은 워싱턴DC에 있는 정통 장로교회인 언약교회(Church of Covenant)에 출석하면서 조지워싱턴대학(George Washington University)에서 공부했습니다.
그런데 그 언약교회의 담임목사는 헴린(Tuenis S. Hamlin)이었고, 그는 하버드대학교(Harvard University)의 이사장이자, 조지워싱턴대학의 이사였습니다.
그래서 헴린 목사는 1900년대 초에 미국 교회의 대지도자로서 이승만을 신앙적으로 알뜰히 보살폈습니다.
이승만은 헴린 목사에게 세례를 받고, 그의 신앙적 사상적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 후 이승만은 박사학위를 위해서 프린스턴대학으로 왔습니다.
그런데 이승만은 처음부터 정치외교학을 공부한 것은 아니고, 1년 동안 신학을 공부했습니다.
그 당시 프린스턴신학교의 분위기는 철저한 칼빈주의 신학과 세계관이 지배적이었습니다.
1898년 프린스턴신학교의 교장인 B.B. 워필드(B.B. Warfield) 박사는 화란의 위대한 칼빈주의 신학자요, 대 정치가요, 저널리스트인 아브라함 카이퍼(Abrah a m Kuyper. 1837-1920) 박사를 초청해서 ‘칼빈주의 강연’을 함으로 프린스턴신학교가 칼빈주의 사상이 대세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시기에 이승만은 1년간 신학 공부를 했습니다.
특히 카이퍼의 칼빈주의 사상에 크게 영향을 받았습니다.
특히 이승만은 워필드의 대를 이은 페톤(Paton) 교장 아래에서 헬라어, 라틴어, 철학을 공부했고, 어드만(Prof, Eerdman) 교수 아래에서 ‘바울 서신연구’를 했고, 그린(Prof. Greene) 교수로부터 기독교 변증학을 배웠습니다. 그 당시 프린스턴 신학교는 위대한 칼빈주의자 월필드(B.B. Warfield) 박사와 칼빈주의 성경신학자 게할더스 보스(Geerhardus Vos) 박사의 영향 아래 있었습니다.
앞서 말한 대로 이승만은 워싱턴의 카버난트 교회의 헴린 목사로부터 정통개혁신앙을 배웠고,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1년간 역사적 칼빈주의 신학과 신앙을 배웠습니다.
그래서 이승만의 가슴속에는 장차 조선이 일본으로부터 독립된다면, 기독교 신앙 위에 즉 성경적 세계관 위에 나라를 세우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성경적 세계관이란 바로 카이퍼 박사와 월필드 박사가 말하는 칼빈주의 세계관 그것은 곧 미국의 건국이념과 같습니다. 즉 조선이 일본으로부터 독립되면 하나님 중심의 나라, 성경 중심의 나라를 세우는 것이 이승만의 꿈이었습니다.
물론 이승만은 배재학당에서 공부했고, 하와이 감리교회에서 봉사한 것도 맞습니다.
그러나 이승만은 그의 멘토였던 헴린 목사와 대 칼빈주의자 B.B 워필드 교수와 페톤 교수로부터 받은 칼빈주의 사상으로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와 우리 민족을 세우려고 했습니다.
1907년에 조지워싱턴 대학(George Washington University)에서 학사를 취득하고, 하버드대학(Harvard University)에서 석사학위를 받은 후 1910년 프린스턴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으면서 국제적인 인물로 주목받기 시작했습니다.
미국 유학 5년만에 이룬 쾌거였습니다.
한국인 최초의 박사였기 때문에 ‘이승만 대통령’보다 ‘이승만 박사’라고 더 많이 부르게 되었습니다.
1945년 귀국한 이승만은 오늘의 대한민국을 세우기 위한 기초를 다졌고, 1948년 이승만 대통령은 헌법을 만들고, 선포하기 전 목사였던 이윤영 의원을 향하여 앞으로 나와 기도하도록 했습니다.
이것은 세계역사에 대한민국 같은 나라는 처음입니다.
시편에 있는 대로, ‘이러한 백성은 복이 있나니 하나님을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백성은 복이 있다’라고 했습니다.
그러기에 이승만 대통령은 우리 민족의 위대한 선지자요, 위대한 독립운동가요, 위대한 외교가요, 저널리스트요, 위대한 정치 전략가였습니다.
이러한 위대한 이승만 박사를 대한민국의 국부로 모신 것은 하나님의 은혜요, 축복이었습니다.
둘째로, 대한민국을 세운 국부 이승만 대통령은 어떤 분일까?
20세기는 공산주의 시대였습니다. 1917년 10월 볼세비키 혁명을 시작으로 세계 곳곳에 공산주의 열풍이 식민지 민족해방운동의 강렬한 복음처럼 퍼졌습니다.
한국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1946년 5월, 미국 트루먼 대통령 대일 배상특사로 내한해 한국을 둘러 봤던 폴리는 “한국의 공산주의는 세계의 어느 곳보다 보다 좋은 출발을 할 수 있었다.”고 평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공산주의와 가장 치열하게 대결한 독립운동가가 다름 아닌 이승만과 김구였습니다.
이승만은 언론을 무기로 삼아 독립운동과 구국 투쟁을 전개한 언론인이자 독립운동가요 정치가였습니다.
그는 청년기부터 언론을 통해 항일운동과 정치개혁을 전개한 후 마침내 자유민주주의를 기반으로한 대한민국 건국을 일궈 냈습니다.
이승만의 언론 활동을 연구한 정진석 박사는 이승만을 “언론 대통령”이라고 칭했습니다.
우남 이승만은 대한민국 건국을 위해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입니다.
이승만은 이 땅에 5천년 만에 처음으로 ‘자유민주주의’의 씨앗을 뿌려 대한민국의 번영의 기틀을 다진 건국 대통령입니다.
70년 전 이승만이 세운 자유민주주의로 인해 대한민국은 세계 강국의 대열에 서게 되었습니다.
이승만을 바라본 외국인들의 다양한 시각과 평가들은 놀랐습니다.
이승만의 청년기를 직접 지켜봤던 올리버 R. 에비슨 선교사는 “이승만이야말로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위대한 인물이다.
그는 한국이 배출한 세계적 위인 중의 하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의 정치 고문이었던 로버트 T. 올리버 박사는 “이승만은 금세기에 등장하기 시작한 새로운 유형의 인간 지도자형으로써 동서 문화를 조정 통합하는 탁월한 능력의 소유자였다”고 평가했습니다.
동시에 그는 “20세기를 통틀어 이승만만큼 중요한 역할을 한 역사적 인물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우리 시대의 가장 걸출했던 인물 중에서 그는 아마 가장 덜 알려진 인물일 것이다. …
그의 이름은 많은 정치가들을 배출한 한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정치가로 기록될 것이다. …
이승만은 참으로 위대한 인물이다.
그는 조직력과 지도력, 예언자의 비전을 두루 겸비한 참으로 훌륭한 인물”이라고 극찬했습니다.
유엔 사령관 마크 클라크(Mark Clark)는 “한국전을 통하여 이승만은 아시아에서 장개석, 네루와 버금가는 위상을 확보하였다.
그는 공산주의자들과의 투쟁을 통하여서 뿐만아니라 때로는 미국과 맞서기를 서슴치 않는 행동을 한다는 사실을 통하여 그런 지도자가 되었다. …
많은 아시아 사람들에게 이승만은 극동 지역에 존엄과 자존심을 가져다 줄 인물이었다”고 말했습니다.
한국전을 승리로 이끌어 ‘한국군의 아버지’라는 호칭을 얻었던 미8군 사령관 벤 플리트(Van Fleet)는 “그는 그의 몸무게만큼의 다이아몬드와 같은 존재이다. 그는 우리 시대의 가장 위대한 사상가, 학자, 정치가 및 애국자들 중의 한 사람이다.”고 회상했습니다.
특히 한국사 연구의 기념비적 저작으로 꼽히는 「소용돌이의 한국 정치」의 저자 그레고리 헨더슨은 “그는 1945년 조국에 첫발을 내디딘 순간부터 이미 일종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신이 내려준 인물이 되었다.”고 극찬했습니다.
심지어 1965년 이승만이 하와이에서 서거하자 미국 [에드버타이즈]는 7월 20일자 사설에서 “이승만의 90년 삶에는 열정과 논란이 있었지만 1960년대 이승만과 대한민국은 미국 반공의 심볼이었다.
이승만은 2차대전 후 아시아에서 가장 뛰어난 지도자였고, 그는 단순한 미국의 꼭두각시가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이승만은 대한민국의 애국자였다.”고 적었습니다.
해외에서는 그처럼 위대한 지도자로 평가를 받았으나 이승만은 정작 대한민국의 역사에서 잊혀 졌습니다.
잘못된 역사 인식과 편견으로 인해 ‘이승만은 민주주의 파괴자’로 인식되어 왔고, ‘독재자’였다는 누명까지 쓰게 되었습니다.
오늘에 이르러서는 건국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의 위상이 추락되었고, 갈곳 없는 역사의 방랑자가 되어 슬픈 역사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미국에서는 링컨 대통령이 일궈낸 업적을 기리며 수백년이 지난 지금도 그를 추모하면서 유명한 게티즈버그 연설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제라도 우리는 건국 대통령 이승만이 세운 업적들을 재조명하여 역사를 바로 세워야 합니다.
대한민국의 해방 전후는 혼돈 그 자체였습니다.
일제의 압제에서 해방되었으나 대한민국 국민들은 방향을 잃었습니다.
당시 대다수의 사람들은 민족주의를 주창한 김구나 사회주의를 주창한 여운형 등에 열광하면서 자본주의나 민주주의를 외면했습니다.
5천년 역사에서 자본주의나 민주주의란 말조차 들어보지 못한 탓이었을 것입니다.
그 무렵 1946년 군정청에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귀하가 찬성하는 것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에 답한 8천명 중에서 77%가 사회주의·공산주의를 찬성했습니다.
그리고 자본주의는 14%, 모르겠다고 답한 사람이 8%였다는 통계는 해방 후 대한민국의 사회적인 상황을 알 수 있는 단서가 됩니다.
실제로 해방 직후 대한민국에 조선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다는 언론 보도가 나올 정도였으니 사회주의 및 공산당 활동이 얼마나 득세했는지 짐작이 갑니다. 당시 여운형이 주도한 건국준비위원회가 박헌영이 만든 조선공산당의 책동에 따라 1945년 9월 6일 〈조선인민공화국〉을 조직 구성하여 9월 15일자 매일신문에 보도했습니다.
당시 상황은 그 정도로 좌익이 판을 치던 시기였습니다.
아슬아슬한 순간이었습니다.
그로부터 한 달 후 1945년 10월 26일 이승만은 귀국한 후 언론 보도와 관련하여 자신은 “(조선)인민공화국 주석을 공식적으로나 비공식적으로나 수락한 적이 없다”는 성명서를 발표했습니다.
그 무렵 국민들의 인식대로라면 대한민국은 사회주의·공산주의로 향하는 것은 시간 문제였습니다. 하지만 단 한 사람 이승만은 자본주의를 주창했고, 자유민주주의만이 대한민국이 살 길이라고 외쳤습니다.
이승만에게는 자유와 평등, 자유민주주의 등을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절대적인 가치로 삼았고, 평생동안 부동의 신념으로 가슴에 새겨 왔습니다.
연세대 사회학과 송복 명예교수는 이승만이 대한민국의 공산화를 막아내고, 자유민주주의를 뿌리 내리게 한 장본인이라고 주장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자유민주주의 국가다.
그 자유민주주의가 어떤 우여곡절, 어떤 기적의 과정을 밟으며 오늘날 이같이 정착되었는지 그 연원을 따져 올라가면 오직 이승만에게 가닿는다.
그가 아니었다면, 자유민주주의 지식과 신념이 없던 시대, 정치지도자들의 좌우합작 열풍에 휘말려 당시 동구가 모두 공산화 되었듯이 우리 또한 공산화되었을 것은 불을 보듯 분명하다.
오로지 이승만의 확고한 자유민주주의의 신념과 비전이 공산화를 막고 오늘의 한국으로 살려낸 것이다”
이승만의 가슴에 새겨진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은 청년기부터였습니다.
이승만의 청년 시절을 지켜봤던 미국 선교사 올리버 R. 에비슨은 갑신정변의 주역들이 개혁에 실패하여 일본, 청나라, 미국으로 망명하였으나 “약간의 개혁의 씨가 뿌려졌고, 이승만은 그들을 추종하는 일부 사람들과 접촉했고, 자신의 조국에 민주주의를 도입하려는 생각을 마음에 품게 되었다”고 증언했습니다.
이어 올리버 R. 에비슨 선교사는 “그는 자신의 일생을 조국의 정부 형태를 바꾸는 것을 돕는데 바치기로 했다고 나에게 말했고, …
그는 너무나 위대한 목표를 추구하는데 있어서 자신에게 무슨 일이 닥쳐오더라도 기꺼이 받아 들이겠다 말했으며, 이후 너무나도 혹독한 시련, 뼈에 스미는 고통, 살해의 협박 등이 있었음에도 자신의 이상에 여전히 충실했다.”고 증언했습니다.
이처럼 이승만은 청년기 때부터 조선 땅에 민주주의를 세워야겠다는 확고한 신념으로 일생동안 투쟁하다 마침내 대한민국에 자유민주주의 기초를 세운 건국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셋째로, 그러면 이승만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로버트 올리버(이승만 대통령 정치 고문)는 “모든 역경에도 이승만 박사는 한국 고유의 독립을 되찾으려는 자신의 십자군 운동을 끈질기게 이끌고 나갔다.”고 증언한 바 있습니다.
이승만은 구한말 무너져가는 조국을 위해 개혁의 깃발을 든 후 5년 7개월간의 옥중생활, 33년간의 해외 독립운동 등으로 투혼을 불사르다 마침내 대한민국을 자유민주주의 나라로 세웠습니다.
1945년 10월 17일 33년만에 귀국하여 가진 기자회견에서 이승만은 ‘조선의 자주독립’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소회를 밝혔습니다.
“나는 앞으로 조선의 자주독립을 위해서 일하겠거니와 싸움을 할 일이 있으면 싸우겠다.
그러나 여러분 4천년의 우리 역사가 어둠에 묻혀 있는 것은 우리 민족의 불미한 탓이었다.
그중에도 나와 같이 나이가 많은 사람의 잘못이 많았다.
그것은 내가 책임지겠다.
여러분은 젊기 때문에 그 책임이 적다.
4천년의 역사가 이제 우리들의 손으로 다시 꽃피어야 하는 것이다.
그 좋은 기회가 우리 앞에 있다.”
“오늘에 거행하는 식은 우리의 해방을 기념하는 동시에 우리 민국이 새로 탄생한 것을 겸하여 경축하는 것입니다.
이날에 동양에 한 고대국인 대한민국 정부가 회복되어 40여년을 두고 바라며 꿈꾸며 투쟁하여 온 결실이 표현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시간은 내 평생에 제일 긴중 시기입니다.”
그리고 나서 이승만은 “민주주의가 인민의 자유 권리와 참정권을 다 허락하되 불량분자들이 민권 자유라는 구실을 이용해서 정부를 전복하려는 것을 허락한 나라는 없다”고 호소한 후 “민주주의에 대한 믿음, 민권과 개인의 자유 보호, 서로 이해와 협의, 동포들의 생활 개량, 경제적 원조” 등의 주제로 연설했습니다.
이어 그는 “가장 중대한 바는 일반 국민의 충성과 책임심과 굳센 결심”이며, “이것을 신뢰하는 우리로는 모든 어려운 일에 주저하지 않고 이 문제를 해결하며 장애를 극복하여 이 정부가 대한민국에 처음으로 서서 끝까지 변함이 없이 민주주의에 대한 모범적 정부임을 세계에 표명되도록 매진할 것”을 선언했습니다.
이처럼 이승만은 대한민국에 견고한 자유민주주의의 기초석을 세웠습니다.
그는 자유의 개념이 낯설고, 민주주의 체제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던 구한말 시대부터 대한민국에 자유민주주의를 도입하기 위해 일생을 싸우면서 국민들을 설득하고 계몽하여 마침내 건국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실로 이승만은 대한민국을 위해 하나님께서 보낸 위대한 지도자였습니다.
(크리스챤포커스 2020.1.31. 참조)
이 나라는 반만년 역사 동안 적게는 900회, 많게는 1300여회 크고 작은 외침을 받았으며, 1910년에는 민족 국가로서 조선이 세계 지도에서 사라졌으나
세계 2차대전에서 승리한 미국의 도움으로 36년만에 일제에서 해방되었으며, 선지자 이승만 대통령에 의해 대한민국이 세워졌습니다. .그 이후 한미동맹으로 지금까지 단 한번도 전쟁이 없었습니다.
2차세계대전 이후 탄생한 100여개 신생 독립국 중에서 가장 성공적으로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룩했습니다.
한강의 기적을 통하여 세계 10위의 경제대국으로 우뚝 올라 설 수 있었습니다.
<정리, 옮긴 글> Y.S. CHO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