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겐 두 분의 할머니가 계셨다.
좀 더 쉽게 말한다면 할아버지께서는 대를 잇기 위해 후처를 두셨다.
후처로 들어오신 할머니는 할아버지와 나이차가 20년도 더 넘었다고 들었는데 난 그 할머니에게 정이 가지 않았다는 것! 이것은 지금도 두고두고 유감이다.
할아버지는 아버지가 결혼도 하시기 전에 일찍 돌아가셔서 뵌 적이 없고 다만 초상화로만 얼굴을 익혔고, 창고에 그냥 놓여져 있던 약장이며 한문만 가득 적힌 누런 한의학 책들( 이것은 나중에 경주 동국대학교에 모두 기증했다), 소설 책 크기만한 성능이 무척 뛰어났던 일제 라디오, 일본 글이 꼬불꼬불 적혀있고 가끔 야한 장면의 만화가 섞인 할아버지께서 즐겨 보셨다던 일본 잡지책 들만 할아버지을 대신해서 집안 곳곳에 보였을 뿐이었다.
일제시대 때, 할아버지는 ‘활천당’이란 한의원 의사였고 조랑말을 타고 다니시며 고향마을에 서당을 열어 훈장도 하시며 아이들도 가르쳤다고 한다. 학식이 풍부하고 인자하셔서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으시며 어려운 이웃도 곧잘 도와주셨다는 할아버지께서는 후처로 들어오신 할머니에게서 아들 셋을 내리 얻으시고 딸 하나를 막내로 두셨다,
할아버지께서는 뒤늦게 얻은 큰아들, 즉 나의 아버지를 끔찍이도 애지중지 하셨고 아버지가 두 살 되던 해에 그 전부터 알고 지내던 친한 친구의 남동생 부인이 임신을 하자 뱃속의 아이가 여자이면 서로 사돈을 맺자고 언약을 했고, 마침 여자라서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뜻을 따라서 어머니와 결혼을 하여 그 언약을 지키셨던 것이다.
일제의 암울했던 그 시기에 지금은 증산교로 잘 알려진 전라도에서 발생한 강증산 님의 민족종교가 민중들 사이로 ‘태을주’ 라는 주문을 외우며 그 주문이 ‘훔치 훔치......’로 시작하기에 ‘훔치교’로도 불리며 일제의 감시와 탄압 속에서도 급속도로 전국으로 퍼져나가 신도 수는 구름처럼 몰려들었고 이 종교에 심취하신 할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절친했던 친구 분들은 종교를 위해 천지개벽을 꿈꾸며 희망을 찾아서 경상도에서 전라북도 김제로 집단 위주를 하셨다. 강증산(본명은 강일순)님께는 무남독녀의 따님이 한 분 계셨는데 그 따님과 할아버지는 의남매를 맺으시고 종교활동에 전념하셨던 것이다.
이 때 두 분의 할머니 중 청주 한씨였던 큰할머니는 고향에 남겠다고 따라가지 않고 조카 집에서 얹혀서 살다가 아버지가 제대하신 후, 고향에 내려와 살면서부터 우리 집으로 들어오셔서 함께 살게 되었다.
어렸던 난 당연히 이 할머니가 친할머니라고 생각하며 자랐는데 나중에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후에서야 우리에게 전라도 할머니로 불렸던 작은 아버지가 모시고 계신 할머니가 아버지를 낳으신 분이시란 걸 알게 되었다.
두 분의 할머니는 너무나 대조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다.
인자하시고 너그러우셨던 큰할머니는 몸을 아끼지 않으시고 일을 하시면서 조금이라도 우리가 넉넉하고 잘 살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하셨는데, 전라도 할머니께서는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일도 거의 안하셨고, 매사에 간섭과 역정만 잘 내시며 작은 일도 트집을 잘 잡으시는 분이셨다.
또한 전라도 할머니께서는 어머니를 많이 구박하셨는데 가장 큰 이유가 너희 집(엄마의 집을 집을 지칭함)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힘들게 산다면서 할아버지의 가장 절친했던 친구인 외할아버지의 큰형님이 그 종교에 먼저 빠져서 할아버지를 꼬드겨서 그 많던 재산을 절 짓는다고 다 넣고 이렇게 가난하게 살게 되었다며 시간이 날 때마다 구박을 하셨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어린 마음에 어머니를 힘들게 하시는 전라도 할머니가 너무 미웠다.
내가 미워했던 이유 중 또 다른 하나는 두 달 늦게 태어난 동갑내기 사촌 남동생과 나를 심하게 차별하는데도 이유가 있었다. 한 집안에서 같은 해에 아이가 태어나면 한 사람은 잘 되고 한사람은 잘되지 못한다고 믿었던 할머니께서는 사촌 동생이 어릴 때부터 몸이 약해서 힘들게 자라고 일이 잘 풀리지 않는 것을 내 탓으로 돌렸다. 내가 이 집의 정기를 다 뺏어가서 그렇다고 하면서 나와 어머니를 싸잡아 함께 드러내놓고 미워했는데 그 분위기에서 나도 할머니를 좋아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어린 마음에 얼굴도 모르는 할아버지를 원망도 많이 했다. 할아버지는 왜 이상한 종교에 빠져서 우리를 힘들게 하셨을까? 하는 마음에서 그렇게 미워했나보다.
두 분의 할머니가 지금은 다 고인이 되셨지만 내가 좋아했던 할머니와 미워했던 할머니마저 나이가 들수록 그리워진다. 그 분들은 그 분들 나름대로 그 시대를 얼마나 힘들게 고뇌하며 살다 가셨을까 생각하니 안타까움마저 들게 됨은 나도 나이가 들어가고 있다는 것이겠지. 아니 이제야 철이 든다고나 해야 옳은 지도 모르겠다.
누군가 어른들이 한 사람 한 사람 저세상으로 간다는 건 우리에게 간섭할 어른들이 하나 둘 없어지는 거라서 슬픈 것이라고 했다.
간섭은 곧 사랑이라고.
내가 미워했던 할머니마저 그리워지는 것도 이런 맥락일까?
‘전라도 할머니! 그 동안 할머니 미워했던 것 사과 드려요.’ 라고 나직히 속으로 되뇌이며 조용히 화해의 손을 내밀어 본다. ^^
첫댓글 세상에 제일 못할 짓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