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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한상원목사
PW : 믿음 BIW : 제단을 쌓으라 AG : 성도
TS : 믿음이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제단을 쌓는 예배의 자리로 나아가는 것이다.
여자 말을 잘 듣자!
서울 잠실에 있는 어느 식당에 이런 문구가 써 있다고 합니다.
“여자 말을 잘 듣자!”
요즘 세대에는 세 여자 말을 잘 들으면 행복해진다고 합니다.
어릴 때는 엄마 말을, 결혼해서는 아내 말을, 그리고 운전할 때는 네비게이션에 나오는 아가씨 말을 잘 들으면 행복하다고 합니다.
어떻든 남자들은 여자의 말을 잘 들어야 잘 살 수 있습니다.
교회에도 여자들이 많습니다.
가정에도 반드시 여자들이 있어야 합니다.
교회와 가정이 평안하려면 여자들, 여성도들의 말을 잘 들어야 행복해집니다.
여성들이여! 자부심을 가지셔도 좋습니다.
남성들이여! 여성의 말에 귀 기울여 들으면서 살아보세요.
그러면 가정과 교회가 화목하고 행복해집니다.
예수님을 향한 믿음도 쑥쑥 자란답니다.
P4.
아무런 죄를 지은 것 같지 않은데도 경찰서에서 오라는 출두명령서를 받았다면 어떨까?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길래 경찰서에 오라고 출두명령서를 보냈단 말인가? 라고 두려워하지 않겠는가?
검찰이나 법원에서 다녀가야 한다고 하면서 통지서를 받았다면 어떨까?
더더구나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어떤 곳에서 다녀가야 한다고 하면서 통지서를 보냈다면 우리들은 어떤 감정일까?
두근반세근반 하면서 가슴이 진정되지 않아서 안절부절하지 못하고 있지 않겠는가?
차량을 운행하는 운전사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대상은 누구일까?
바로 교통경찰이다. 교통경찰을 대신하는 감시카메라이다.
앞에 교통경찰이 있거나 감시카메라가 있으면 운전사들은 움츠려들게 마련이다.
요즘은 한술 더 떠서 제한속도 30km이다.
무심코 지나가다 보면 40km가 넘어서 카메라에 찍혀서 벌금고지서가 날아오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교통법규를 따라서 정상적으로 운전하는 운전사는 교통경찰이 있어도, 감시카메라가 있어도 하나도 두렵지 않고 당당하게 운전할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천지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시고 애굽에 10재앙을 내리고 강권적인 권능과 권세로 430년 동안 종살이하던 애굽에서 이끌어내시고 홍해를 갈라주시고 마라의 쓴물을 단물로 바꾸어 주시고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시고 반석에서 물을 내어주신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러 가는 길이라면 어떤 감정일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전에는 모세와 아론을 통해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 들었는데, 이제는 자신들이 직접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된다면 어떤 감정이 앞서게 될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하는 두려운 마음이 앞서지 않을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 하나님이 어떤 신인지에 대하여 자세하게는 몰라도 적어도 여호와 하나님을 직접 만나게 되면 즉사 당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게 되면 즉사 당할 수 있는데, 그 하나님을 만나러 간다는 것은 오금이 저려올 정도로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두려움에 휩싸이고 있는데, 시내 산에서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하여 어떻게 하고 계실까?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계실까?
시내 산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떻게 반응하고 있을까?
D4.
① 임재하시는 하나님
출애굽기19:16-19에 보면 “셋째 날 아침에 우레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이 산 위에 있고 나팔 소리가 매우 크게 들리니 진중에 있는 모든 백성이 다 떨더라. 모세가 하나님을 맞으려고 백성을 거느리고 진에서 나오매 그들이 산기슭에 서 있는데, 시내 산에 연기가 자욱하니 여호와께서 불 가운데서 거기 강림하심이라. 그 연기가 옹기 가마 연기 같이 떠오르고 온 산이 크게 진동하며, 나팔 소리가 점점 커질 때에 모세가 말한즉 하나님이 음성으로 대답하시더라.”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하나님은 우레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 가운데서 시내산에 연기가 자욱한 상태로 임재하신다.
피어오르는 연기가 마치 옹기 가마에서 연기가 솟아오르는 것처럼 보였고, 온 산이 마치 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진동하면서 나팔 소리가 크게 울리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임재하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여호와께서 불 가운데 강림하셨다고 말씀하고 있다.
그래서 오늘 본문 18-19절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레와 번개와 나팔 소리와 산의 연기를 보면서 떨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왜 아니 두렵고 떨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세상에 태어나서 이런 광경을 보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애굽에서 430년 동안 살면서 수많은 잡동산이 신들을 보았지만 이런 모습은 처음 보는 일이다.
세상에 태어나서 살아 있는 신이 직접 내려와서 말씀하시는 장면을 보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기 때문에 너무나 두렵고 떨리는 순간이다.
그래서 백성들은 모세에게 “당신이 우리에게 말씀하소서. 우리가 들으리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말게 하소서. 우리가 죽을까 하나이다.”라고 말하면서 자신들은 너무너무 두렵고 무서워서 감히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들을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모세와 아론이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앞으로도 계속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시고 전해 주시는 말씀을 듣도록 해 주세요.라고 간절하게 부탁드리는 것이다.
하나님은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임재하신다.
그 하나님은 아들 예수님으로 인간 세계에 찾아와 임재하셨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면서 인류구원의 길을 활짝 열어주신다.
사도행전2:2-4절에서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라고 기록하면서 오순절에 성령 하나님께서 임재하신다.
성령 하나님께서 임재하시고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고백한 모든 신앙인들의 심령 속으로 들어오셔서 임재하신다.
고린도전서 6:19-20에서 바울은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라고 말씀하시면서 우리 신앙인은 성령 하나님께서 임재하고 계시는 성전이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우리 신앙인들안에 하나님께서 임재하셔서 내주하고 계신다는 믿음으로 성령 하나님의 감동하심의 은혜를 따라서 믿음으로 살아가는 성도가 되어야 한다.
② 시험하여 살리시는 하나님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직접 목격한 백성들은 모세에게 “당신이 우리에게 말씀하소서. 우리가 들으리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말게 하소서. 우리가 죽을까 하나이다.”라고 말하면서 자신들은 너무너무 두렵고 무서워서 감히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들을 수 없습니다라고 말한다.
그러자 모세는 백성들에게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님이 임하심은 너희를 시험하고 너희로 경외하여 범죄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라고 하면서 위로하고 격려해 준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임재하심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시험하면서 하나님을 경외하여 범죄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말씀한다.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애굽의 온갖 잡동산이 신들처럼 죽은 신이 아니라 생생하게 살아 계시는 하나님이심을 보여줌으로써 하나님을 대할 때에 죽은 신들처럼 막 대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두려워함으로 바라보면서 하나님을 다른 잡동산이 신들처럼 막 대함으로 징계와 징벌을 받는 죄악을 범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임재하시는 것이라고 설명하는 것이다.
사람이란 존재는 나랏님도 뒤에서는 험담하고 온갖 비난하고 욕하면서 산다고 말한다.
그러니 한 나라의 지도자가 되면 얼마나 많은 욕을 먹어야 하고, 온갖 비난, 비판의 소리를 들으면서 살아야 하는 자리인지 모른다.
지금도 나라의 대통령이라는 자리에 앉아 있는 어떤 사람을 얼마나 욕하고 비난하고 험담하고 저주하고 있는가.
그런 것처럼 백성들은 온갖 잡동산이 신들에 대하여 이러쿵저러쿵하면서 어떤 때는 감사하고 고마워하지만, 어쩌면 매일매일 그 신들을 비난하고 조롱하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사람이란 존재는 자기 자신에게 잘해 주면 비난하지 않고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지만, 조금이라도 자기 자신에게 섭섭하게 하면서 잘해 주지 않으면 곧바로 비난하고 비판하고 욕을 하면서 살아가는 악한 존재이다.
그러기 때문에 성인군자는 근본부터 존재할 수 없다.
한편으로 보면 성인군자처럼 보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보면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악인이요 패악한 인간이라는 것을 금방 알아볼 수 있다.
사람이란 존재는 100% 모든 사람들에게 좋은 모습을 보여줄 수 없다.
예수님조차도 100% 모든 사람들에게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셨지 않은가.
예수님께서도 어떤 이들에게는 야단도 치시고 비난도 하시고 책망도 하신 분이다.
예수님조차도 100% 모든 사람들에게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는데, 우리와 같은 일반인들이야 오죽하겠는가.
그러기 때문에 백성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향하여 비난하고 욕하고 원망하는 죄악을 범함으로 하나님의 진노와 재앙을 받을까 봐서 하나님께서 생생하게 살아계신 모습으로 임재하시고 백성들이 직접 알아들을 수 있도록 음성으로 들려주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백성들을 아끼고 사랑하면서 어떻게 하든지 백성들을 살려서 조상들에게 약속해 주신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가나안 땅으로 이끌어가고 싶어하시는 것이다.
그런데도 백성들은 시시때때로 하나님을 향하여 비난하고 원망하고 믿지 않으면서 금송아지 사건을 일으키고, 급기야는 바란 광야에서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자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진노를 일으키고 광야에서 죽어야 하는 참사를 일으키고 만다.
하나님께서 시험하시는 목적은 단 하나, 하나님의 백성들을 살리기 위해서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살리기 위해서 백성들을 다독이면서 이끌어가셨음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대적하고 불신앙으로 떨어지면서 하나님의 무서운 징계를 받아 죽게 된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는 어떤 모습으로 시험해 오실까?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시험하는 것은 우리 신앙인들이 얼마나 하나님만을 믿는 믿음으로 살려고 하고 있는가? 하는 믿음의 정도와 수준을 시험하신다.
특히 작년과 올해에 행정기관에서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하여 발생하는 예배를 금지시키고 각 모임을 금지시키는 상황에서 얼마나 신앙인의 진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가? 하는 것을 시험하신다.
신앙인의 자세는 어떤 위험과 핍박과 박해 속에서도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고백과 행함의 모습을 보여주어야 하는 것이다.
③ 어떠한 신상도 세우지 말라고 경고하시는 하나님.
여호와 하나님은 모세에게 22-23절의 말씀을 통하여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라. 내가 하늘로부터 너희에게 말하는 것을 너희 스스로 보았으니, 너희는 나를 비겨서 은으로나 금으로나 너희를 위하여 신상을 만들지 말고,”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십계명의 말씀 중에서 제2계명에 해당하는 말씀을 다시 말씀하고 계신다.
곧 어떤 종류의 우상이든지 우상을 만들어 섬기지 말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살아계신 하나님은 죽은 우상의 모습으로 보여주고 싶어하지 않으신다.
온갖 잡동산이 신상들은 죽은 신을 형상화하는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은 죽은 신이 아니라 생생하게 살아계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어떤 종류의 신상이나 어떤 이유로 만들어진 신상이든지 만들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브라질이나 베트남에 세워진 예수상은 잘못된 것이다.
브라질의 코르코바도(Corcovado)언덕에 1931년 브라질의 독립 100주년을 기념하여 초대형 예수상을 세워놓았다.
높이 38m, 양팔 너비 28m, 무게 1,145톤에 이르는 이 예수상은 도시 전체를 내려다보며 감싸 안고 있다.
베트남 붕따우에도 거대한 예수상이 세워져 있다.
이런 예수상은 카토릭교회에서 만들어놓은 것들이다.
로마 카토릭교회에는 제2계명인 우상을 만들어 세우지 말라고 하신 말씀을 없애버렸기 때문에 성당들마다 예수상, 마리아상, 위인상, 천사상을 만들어놓고 섬기면서 우상숭배의 죄악을 범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신앙인들은 죽은 신을 믿는 사람들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이다.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당당하게 다시 살아나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 신앙인이다.
성령 하나님께서도 여전히 살아계시면서 각자의 영혼과 심령 속에 살아계시면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우리 신앙인들은 생생하게 살아계신 삼위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신앙인들이다.
그러기 때문에 어떤 종류의 신상이든지 죽은 신상을 만들어 세워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④ 하나님을 만나는 제단을 쌓아 제사와 예배드리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모세에게 24-25절에서 “내게 토단을 쌓고 그 위에 네 양과 소로 네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라. 내가 내 이름을 기념하게 하는 모든 곳에서 네게 임하여 복을 주리라. 네가 내게 돌로 제단을 쌓거든 다듬은 돌로 쌓지 말라. 네가 정으로 그것을 쪼면 부정하게 함이니라.”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드리는 제사를 받으시기 위하여 애굽에서 430년 동안 종살이하던 히브리 민족을 이끌어내신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 하나님께 제사드리는 민족이요 제사장의 나라로 세우시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께 제사드리기 위해서 제물을 올려놓고 제사드릴 수 있는 제단을 쌓아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토단 곧 흙으로 제단을 쌓으라고 말씀하신다.
토단을 쌓아서 양과 소로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그런데 성경에서 흙으로 제단을 쌓는 것, 토단을 쌓는 것은 오직 이 본문에서만 기록하고 있을 뿐이다.
성막에 있는 제단도, 성전에 있는 제단도 흙으로 쌓지 않는다.
흙이란 존재는 정결한 것이든, 부정한 것이든 다 빨아드리고 흡수하는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부정한 것으로 취급한다.
성경에서 정결하냐 부정하냐로 구별하는 기준은 흙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이다.
흙으로 된 그릇, 토기를 만들더라도 유월절 기간에는 다 깨뜨려버리고 다시 다른 토기를 만들어 사용할 정도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흙으로 제단을 쌓아 올려서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실제적으로 성경에서는 흙으로 만든 제단, 토단을 샇았다는 기록을 찾아볼 수 없다.
그러면 성막이나 성전에서의 제단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는 어떤 제단을 쌓아서 제사를 드리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돌로 제단을 쌓아 올려서 그 제단 위에 번제와 다른 제사들을 드리는 것이다.
성경에서 일반적으로 제단을 쌓아 올리는 것은 돌로 된 제단을 쌓아 올려서 그 제단에서 제사를 드리는 것이다.
아담으로부터 시작하여 아벨이 드린 제단, 노아가 드린 제단, 아브라함이 드린 제단, 이삭이 드린 제단, 야곱이 드린 제단, 다윗이 세 번에 걸쳐서 1000번제를 드린 제단, 솔로몬이 1000번제를 드린 제단, 엘리야 선지자가 갈멜산에 쌓아 올린 제단 등등 대부분의 제단들은 돌로 쌓아 올린 제단이다.
하나님은 돌로 제단을 쌓을 때에 다듬은 돌로 쌓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다.
돌을 다듬으려고 하면 정과 쇠망치를 사용해야 한다.
정으로 쪼는 것은 칼을 말하기도 하지만 돌을 다듬는 데 사용하는 도구를 말한다.
돌을 다듬기 위해서 뾰쪽뾰쪽한 꿀과 철에 쇠망치로 때리면서 돌을 편편하게 다듬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처럼 도구로 돌을 다듬어서 제단을 쌓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면 왜 도구로 다듬은 돌을 사용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것일까?
돌을 다듬는 데 사용하는 도구는 철로 만들어진 도구이다.
철은 사람의 생명을 죽이는 데 사용하는 칼이나 창이나 화살과 같은 무기를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다.
제단은 생명을 살리는 장치인데, 죽이는 무기를 사용하여 만든 돌로 제단을 쌓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도구로 다듬어진 돌로 제단을 쌓지 말고 자연적으로 생겨난 돌을 모으고 쌓아 올려서 제단을 만들어서 제사를 드리라고 말씀하고 있다.
자연적으로 생겨난 돌은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은혜로 만들어진 돌이다.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제단을 쌓아 올리더라도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능력으로 만들어진 제단을 쌓아서 그 제단에 제물을 올려놓고 화제를 드리는 제사가 하나님께서 받으시기에 합당한 제사가 되는 것이다.
예루살렘 성에 세워진 성전도 돌로 바닥을 만들고 그 바닥 위에 성전을 건축하였다.
돌로 성전 벽을 쌓아 올리기도 하였다.
이 돌로 된 제단이 바로 예수그리스도께서 드린 십자가의 제단이다.
예수님께서 못 박히셨던 골고다 언덕이 바위로 되어 있는 장소이기도 하고, 예수님께서 잡하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기도하셨던 겟세마네 동산도 돌로 된 곳이다.
예수님 자신을 반석, 흰돌, 산돌이라고 설명하시기도 하신다.
우리 신앙인들은 흰돌, 산돌이신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제단을 쌓아서 하나님을 만나는 예배의 자리로 나아가는 것이다.
신앙인들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는 믿음으로 예배의 자리로 나아가면 된다.
돌로 제단을 쌓아 올릴 때에 너무 높게 쌓아 올리면 안 된다.
26절에서 “너는 층계로 내 제단에 오르지 말라. 네 하체가 그 위에서 드러날까 함이니라.”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제단에 제사를 드리러 올라가는데 왜 하체를 드러내게 되는 것일까?
고고고고대사회에 살던 고대인들은 오늘날처럼 의상이 발전된 의상을 입으면서 살았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간혹 고고고고대사회의 모습을 드라마나 영화로 만들 때 배우들이 화려한 의상을 입고 연기하지만, 그것은 현대인들의 의상을 고대사회의 모습으로 형상화해서 만든 작품에 불과하다.
지금으로부터 3500년 전에는 그야말로 원시시대이다.
의상이 발전되지 않았던 고고고고대사회에서, 특히 양을 치면서 살아가는 유목민들은 양을 잡을 때 생기는 가죽들을 이어서 통옷을 만들어서 외투처럼 걸쳐서 입던 시절이다.
아랫도리를 감출 수 있는 팬티와 같은 속옷을 만들어 입을 형편이나 기술이 발전되지 않았던 시절이다.
그러기 때문에 제단을 높이 쌓아 올려서 계단을 만들어 올라가게 되면 자연스럽게 아랫도리가 드러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 앞에서 수치스러운 일, 부정한 일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 제사드리는 일은 이스라엘 백성들로서 가장 명예로운 일이고, 정결한 일이고, 거룩한 일이고, 온전한 일인데, 하체를 드러냄으로 인하여 부정하게 되거나 수치스러운 일이 된다면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제사 자체가 부정하게 되고, 수치스러운 제사가 되는 것이다.
만약에 아랫도리를 드러냄으로 인하여 수치스러운 제사가 된다면 제사를 드리지 않은만 못한 결과가 되는 것이다.
수치스러운 제사, 부정한 제사는 도리어 제사를 드리지 않음이 더 옳고 의로운 일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제단을 쌓아서 제사를 드리더라도 하나님께서 받으시기에 합당한 제사, 명예로운 제사를 드려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수치스러운 제사, 부정한 제사는 드려서는 안 되는 것이다.
L4 & B4.
예수님은 요한복음 4;21-24절에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신앙인이 하나님을 만나는 자리로 나아가는 길은 예배의 자리로 나아가는 것이다.
신앙인들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더라도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를 드려야 하는 것이다.
예배를 드렸다고 해서 모든 예배가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가 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사, 사울 왕의 제사, 북이스라엘이 드린 제사를 받지 않으셨던 것처럼 신앙인들이 드리는 모든 예배를 다 받으시는 것이 아니다.
이들은 제사를 드리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제사를 드렸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제사를 드렸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법대로 드리지 않은 제사는 하나님께서 열납하지 않는 거짓 제사가 되는 것이다.
코로나로 인해서 인터넷예배니, 비대면예배니, 영상예배가 대세인 것처럼 거론하지만, 이런 예배는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예배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예배라는 이름만 사용했을 뿐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는 될 수 없는 것이다.
제사라는 이름으로 드려진 제사를 하나님은 다 제사로 인정해 주지 않으셨다.
이사야서 1:11-15에서 하나님은 아주 단호하게 말씀하고 계신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내 눈을 너희에게서 가리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라.”라고 말씀하시면서 가식적인 제사를 드리는 것에 하나님은 탄식하고 계신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제사, 하나님께서 열납하시는 예배를 드리는 신앙인으로 돌아와야만 하는 것이다.
그래야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와 은혜가 넘치는 예배다운 예배를 드리는 신앙인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예배드리는 장소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배드리는 신앙인의 근본적인 마음의 자세가 중요한 것이다.
굳이 가인의 제사와 아벨의 제사를 비교하지 않더라도 우리 신앙인들은 하나님께서 받으시기에 합당한 예배, 성령 하나님께서 임재하시고 기름부어주시고 감동을 주시며 역사해 주시는 예배를 올려 드릴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는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과 복음을 믿는 믿음으로 오직 온 맘과 영혼을 다하여 삼위 하나님 앞에서 드려지는 예배라야 하는 것이다.
사람이 많고 적음의 문제가 아니다.
장소의 문제가 아니다. 예배 장소가 크냐 작으냐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얼마나 화려하고 웅장하냐? 절제된 찬양대의 찬양과 오케스트라의 연주로 예배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두세 사람이 모이더라도, 아주 작은 소수의 인원들이 모이더라도 거기에 주님의 십자가가 있고, 주님을 향한 믿음과 은혜가 있어서 하나님 앞에서 드려지는 예배가 하나님을 향한 예배가 되는 것이다.
초대교회 신앙인들은 로마제국의 온갖 핍박과 박해를 피하여 동굴에 들어가서 십자가를 그리면서 하나님을 향한 예배를 올려드렸다.
이제 우리 신앙인들은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과 복음을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삼위 하나님만을 향하여 예배드리는 신앙인의 자세로 돌아오기를 소망한다. 아멘.
하나님 말씀 따라 살아나기 http://cafe.daum.net/GRACEOFJESUS
♥프레임 설교를 하시려는 분들에게 책을 소개합니다.♥
이 책은 출판되어진 책이 아니라 제본된 책입니다.
① 프레임설교의 이론과 실제(1권, 2권)
② 청중마음열기 2권(유머편, 예화편)
③ 감(感)으로 읽는 성경 이야기
④ 은혜로운 물 붓기
⑤ 성경의 여인들 이야기 3권(구약1권, 2권, 신약1권)
⑥ 사무엘 & 왕들의 이야기
⑦ 창세기 이야기 1권, 2권
모두 12권입니다.
혹시 관심이 있으신 분은 010-5797-9094(한상원목사)로 연락 주시면 고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