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으로 훌륭한 일을 하셨습니다. 당신은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한 산증인이십니다”(朴正熙 대통령)
河四容 ⊙1930년생. 초등학교 2학년 중퇴. ⊙동탑산업훈장·국민훈장 목련장 수훈.
하사용씨는 지금도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중앙새마을연수원 등에서 새마을운동 관련 강연을 하고 있다. 앞줄 왼쪽에서 다섯 번째가 하사용씨다.
2010년 10월 25일 오전 10시 서울 동작구 국립현충원 박정희(朴正熙) 전(前) 대통령 묘역 앞. 70대에서 80대까지 노인 40여 명이 모였다. 해마다 박 대통령 서거일 하루 전날인 이날이면 이들은 이 자리에 모여 박 대통령을 추모한다. 박 대통령 서거 6년째인 1985년부터 시작했으니까 지난해가 26번째 추모행사였다.
이들이 추모행사를 열기 시작한 이유는 “생전 박 전 대통령에게 술 한 잔 올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이기에 이들은 이처럼 박 대통령에 대한 애틋함을 서거 30년이 지난 지금까지 간직하고 있는 걸까.
이들은 박 대통령이 살아생전 그토록 애정을 쏟아부었던 새마을운동에서 지도자 역할을 맡았던 이들이다. 이들 가운데는 농부도 있었다. 1970년대 새마을운동 당시 전설적인 새마을운동 지도자로 알려졌던 하사용(河四容)씨도 그 가운데 한 명이다. 올해 만 81세인 그는 지금도 충청북도 청원군에서 농사를 짓고 있다. 이날 추모행사에도 그는 자신이 직접 농사를 지어 생산한 수박 두 통을 짊어지고 왔다. 추모행사가 시작된 후 한 해도 거르지 않은 일이다.
하사용. 그는 박 대통령을 생각하면 눈가에 눈물이 먼저 맺힌다고 한다. 새마을운동을 하며 느꼈던 벅찬 감격의 눈물, 어처구니없이 일찍 떠나보내야 했던 아쉬움의 눈물…. 어떤 인연이기에 하사용씨의 가슴 속에는 박 대통령의 모습이 그처럼 강하게 박혀 있는 걸까.
공무원이 써준 원고를 버리고
1970년 11월 11일 서울 시민회관. 박정희 대통령을 비롯한 3부 요인과 농어민 대표 등 3000여 명이 시민회관 객석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이날의 행사명은 전국 농어민 소득증대 특별사업 경진대회. 대회는 텔레비전을 통해서 전국에 중계되고 있었다.
모든 참석자가 정장 차림인 가운데 남편은 점퍼 차림, 아내는 스웨터 차림인 부부가 눈길을 끌었다. 이 대회에서 전국 1등을 차지한 하사용씨 부부였다. 하씨는 이 자리에서 성공사례 발표와 함께 박 대통령으로부터 동탑산업훈장을 받게 돼 있었다.
대회 참석 전 하씨 고장의 공무원들은 대통령 앞에 서는 자리인 만큼 양복을 입어야 한다고 했다. 하씨에게는 양복이 없었고, 양복이 필요 없었다. 밭에서 일하는 농부에게 양복은 필요 없는 차림새였다. 끝내 고집을 피우고 깨끗이 빨아 입은 점퍼 차림으로 대회에 참석했다.
대회가 시작되면서 그는 성공사례 발표 내용이 담긴 원고를 만지작거렸다. 공무원들이 며칠을 밤새워가며 작성해 준 원고였다. 원고에는 소득액을 부풀려 적는 등 사실과 다른 내용이 많았다. 텔레비전 앞에 모여 있을 마을 사람들과 거짓 없이 살기 위해 애를 쓰는 농민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옆에 앉아 있는 청원군수를 흘끗 바라보았다. 하씨보다 더 긴장한 모습이었다. 군수는 옆자리에 앉아 “나가서 말씀하실 때는 정신 차려 가지고 요거(공무원들이 작성해 준 원고)를 잘 보고 하셔야지 말을 한마디라도 잘못하면 큰일 납니다”며 자꾸 주의를 주었다. 무섭기도 하고 떨리기도 했다. 식순에 따라 성공사례를 발표할 차례가 되었다.
하씨는 연단을 향해 갔다. 만지작거리던 원고는 그가 앉았던 자리에 그대로 두고서였다. 등 뒤로 경악하는 군수의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았다. 진실과 사실만을 말하기로 결심하자 더 이상 떨리지도 무섭지도 않았다.
“충청북도 청원군 강외면 정중리에서 온 하사용입니다”라는 말로 하씨의 성공사례 발표는 시작됐다. 고생스러웠던 지난날을 이야기할 때는 자신도 모르게 설움에 북받쳐 울먹이기도 했지만 그는 아무 꾸밈 없이 자신의 ‘가난 탈출기’와 그동안 체득한 ‘자신만의 농법’을 소개했다.
박 대통령도 원고 없는 연설로 화답
2009년 10월 25일 박정희 대통령 묘소를 참배하고 있는 하사용씨(맨 왼쪽).
발표가 끝났을 때 객석에서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 ‘감동이 물결쳤다’는 말은 그런 장면을 설명하는 가장 적합한 말일 것이다.
박 대통령이 2층 특별석에서 내려와 하씨 앞에 섰다. 하씨의 손을 잡아주었다. 따뜻했다. 하씨는 박 대통령의 눈을 바라보았다. 박 대통령의 눈에는 이슬이 맺혀 있었다. 박 대통령이 말했다.
“참으로 훌륭한 일을 하셨습니다. 당신은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한 산증인이십니다.”
박 대통령의 농민에 대한 따뜻한 사랑. 하씨는 대통령의 눈물과 격려의 말에서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박 대통령은 하씨의 목에 동탑산업훈장을 걸어 주었다. 곧바로 이어진 박정희 대통령의 치사 첫마디는 이렇게 시작됐다.
“이 치사문은 인쇄된 것이니 가지고 가서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조금 전 충청북도에서 오신 농민 하사용씨의 성공사례가 너무나 큰 감명을 주었기에 본인의 소감을 말하겠습니다.”
한 농민의 원고 없는 진솔한 성공사례 발표에 박 대통령도 즉흥연설로 화답한 것이다.
이후 하씨는 새마을운동이 본격화한 1971년부터 체험으로 느낀 새마을운동의 정신을 전파하는 최고의 ‘전도사’가 됐다. 수원에 있는 새마을 연수원은 물론 각 기업체, 관공서, 학교 심지어 교도소에서까지 초청을 받아 강연을 했다. 그의 강연은 감동을 주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가난한 시대를 사는 국민들에게 ‘나도 가난을 극복할 수 있다’는 의지를 심어주었다.
이날의 동탑산업 훈장은 새마을운동 첫 성공사례 발표에 대한 상이었다.
하씨는 1970년대에만 1500여 회의 강연을 했다. 강연을 하는 그의 모습은 1970년 11월 11일 서울 시민회관에 섰던 그 모습 그대로 점퍼 차림이었다. 하씨의 성공사례 발표가 대통령의 눈가를 젖게 하고 전 국민에게 감동을 줄 수 있었던 것은 그런 일관됨과 진솔함에 있지 않았을까. 그는 지금도 틈만 나면 새마을운동과 관련해 강연을 다닌다. 중국 측의 초청으로 해외 강연을 다니기도 하고 해외 수십 개국에서 새마을운동을 배우려고 찾아오는 이들을 위해 강연을 한다. 청원군 중외면에서 자신이 운영하는 농장도 새마을운동을 배우려는 외국인들에게는 훌륭한 교육장이 되고 있다.
머슴살이 새경으로 땅 장만
버려지는 종이컵을 수거해 묘종을 기르는 것도 하사용씨의 주요 일과다.
하사용. 1930년 4월 충청북도 청원군 강외면 정중리에서 8남매 중 4남으로 태어났다. 두부집에서 나오는 비지나 엿집에서 나오는 엿밥, 양조장에서 나오는 술지게미를 얻어먹으며 컸다. 배고픔을 이기지 못할 때는 들판을 배회하며 올무(일찍 자란 무)를 뽑아 먹었다. 여덟 살에 초등학교에 입학했지만 수업료를 내지 못해 2학년 때 퇴학을 당했다. 열 살 때부터는 고물수집, 엿장수, 나무장사, 채소장사 등 돈을 벌 수 있는 일이면 뭐든 닥치는 대로 했다.
채소장사를 하면서 그는 채소농사를 짓는 화교(華僑)들의 수입이 높은 것에 놀랐다. 당시의 채소농사는 하씨의 마을뿐만 아니라 서울 근교에서도 주로 화교들이 지었다. 하씨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고소득을 올릴 수 있는 채소농사를 왜 짓지 않는지 의아했다. 직접 채소농사를 짓고 싶었지만 그에게는 단 한 평의 땅도 없었다.
6·25전쟁이 터졌고, 인민군에 한 번 끌려갔다가 목숨을 건 탈출에 성공한 후 군에 입대했다. 강원도 양구군에 있는 20사단에 배치되었다. 전투에 참가해 적들과 교전을 벌이던 중 부상을 당해 육군병원으로 후송됐다. 부상을 치료하던 중 폐결핵이 발견됐다. 치료 불가능 판정이 나왔다. 의병제대를 했다.
삶에 대한 강한 집착 때문인가. 육군병원에서 치료불가라는 판정을 받았음에도 그의 병은 호전되었고, 하씨 못지않게 찢어지게 가난한 집의 딸(신경복)과 결혼을 했다. 혼수는 홑청 없는 이불 한 채가 전부였다.
가정을 제대로 꾸리려면 제대 후에 그가 해온 품팔이만으로는 어려울 것 같았다. 화교들이 짓던 채소농사가 떠올랐다. 땅이 필요했다. 땅이 있는 사람들에게 농사를 지어서 갚겠다며 땅을 몇 평만이라도 빌려달라고 애원해 보았으나 허사였다.
남의 집 머슴을 살아서라도 직접 땅을 살 밑천을 마련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아내 몰래 집을 나왔다. 걸식을 하며 춘천까지 갔다. 춘천을 목표로 삼아서 간 것이 아니라 머슴 살 집을 찾다 보니까 그곳까지 흘러간 것이다. 3년간 정말 ‘죽어라 하고’ 일을 했다. 쌀 열다섯 가마를 새경으로 받아 고향 청원군 정중리로 돌아왔다. 아내는 남의 집 식모살이를 하고 있었다. 봉급 대신 끼니만 해결해 주는 식모살이였다. 아내의 모습에 설움이 북받쳤다. 목놓아 울지는 못했다. 천형(天刑) 같은 가난에 대한 증오가 더 컸다. 반드시 이놈의 가난을 이겨내리라고 이를 악물었다.
아! 내 땅, 내 집
1957년에 쌀 열다섯 가마로 밭 270평을 구입하고, 그 밭 한쪽에 두 평 남짓한 움막을 지었다. 처음 가져보는 내 땅과 내 집이었다. 돌을 골라내고 흙을 퍼날랐다. 인근 조치원읍에 가서 인분을 퍼다 밭에 뿌렸다. 인분을 퍼오다가 뺨을 맞기도 했다. 길거리에서 개똥도 주워다 거름으로 썼다. 미친 듯이 일을 했다. 지친 몸으로 집에 돌아오면 멀리 갈 수 없게 노끈으로 묶어 놓았던 어린 자식이 울다 지쳐서 땅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가슴이 미어졌다. 울지는 못했다.
남들과 똑같은 방법으로 농사를 지어서는 성공할 수 없다. 밭에 채소를 심은 후 콩기름을 바른 종이를 씌워서 보온을 해주었다. 나중에 하씨의 농법은 농촌에서 보편화되었지만 당시만 해도 주위 사람들은 종이 속에서 어떻게 작물이 자랄 수 있느냐며 조소를 보냈다. 결과는 성공이었다. 그는 남들보다 채소를 일찍 수확할 수 있었고, 일반 농사보다 열 배 이상의 소득을 올릴 수 있었다.
선대(先代)들이 단 한 평도 갖지 못했던 땅. 땅을 더 사야 했다. 1원도 헛되이 쓸 수 없었다. 저축을 했고, 그 돈으로 매년 땅을 늘렸다. 하늘의 시샘인가. 덜컥 폐결핵이 도졌다. 아내가 거름통을 지고 다니는 모습을 누워서만 지켜볼 수 없었다. 똥통을 지고 다시 조치원 읍내로 갔다. 똥통을 지고 오는 길에 피를 토하며 쓰러지기도 했다. 멈출 수 없었다. 가여운 아내와 가여운 자식들 때문에라도 쓰러질 수는 없었다.
하늘도 그의 의지를 꺾을 수는 없었던 것 같다. 그는 결핵을 이겨냈고, 농어민소득증대 특별사업 경진대회에서 전국 1등을 차지해 대통령으로부터 동탑산업훈장을 수상함으로써 대한민국 최고의 농부로 우뚝 서게 된 것이다.
270평으로 시작한 하씨의 농토는 1만2000여 평까지 늘어났다. 땅을 더 늘릴 수도 있지만 늘리지 않고 있다. 그만하면 농사를 짓기에는 충분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自助정신
2007년 4월 18일 중국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새마을운동 관련 출판기념회에 참석한 하사용씨(맨 오른쪽).
하씨가 강조하는 것 중 하나가 자조(自助)정신이다. 그는 이 자조정신 때문에 박 대통령에게 불경죄(?)를 저지르기도 했다. 동탑산업훈장 상금으로 대통령이 재가(裁可)한 포상금 1000만원 수령을 거부했던 것이다.
농어민소득증대 특별사업 경진대회에서 하씨의 성공사례에 감동한 박 대통령은 이튿날 하씨 부부를 청와대로 초청했다. 하씨가 기억하고 있는 박 대통령과의 만남 장면이다.
“나와 아내는 전날 복장인 점퍼와 스웨터 차림으로 청와대에 갔어. 박 대통령께서 반갑게 맞아주셨지. 대통령께서 ‘어떤 소원을 가지고 살아왔느냐’고 내게 물어서 나는 이렇게 대답했던 걸로 기억이 나. ‘한이 맺힌 게 가난이니까, 소원이라면 배고픔과 싸워서 승자가 되는 것입니다’고 했지.
박 대통령은 그 말에 감동하는 눈치였어. 그때 박 대통령께서 이런 말씀도 하셨어. ‘나도 대통령을 그만두면 하사용씨 같은 새마을 지도자가 되겠다’고 말여. 대화 중에는 또 이런 말씀도 하셨어. ‘우리 민족을 위해서 내가 무얼 하다가 간 사람인지 죽은 뒤에는 알 것이다’고 말여.
크기에는 차이가 있겠지만 얘기를 나눠 보니까 나하고는 배짱이나 성격이 잘 맞는 분이셨어. 나도 당시에 내 목표를 위해 가족을 강하게 끌고 가다가 보니까 가족의 불만들이 있었거든. 그래도 나는 나중에 가족이나 근동 사람들이 가난과 싸워 이긴 후에 죽으면 제대로 평가를 하게 될 것이다, 하는 확신이 있었거든.”
청와대를 방문한 후 하씨에게 1000만원의 포상금이 내려졌다.
하씨의 당시 농토는 3000여 평이었다. 영양실조로 결핵에 걸릴 정도로 먹지도 쓰지도 않으며 돈이 생기는 대로 저축만 했던 하씨가 270평의 땅을 3000평으로 늘리는 데 무려 13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당시 1000만원으로 구입할 수 있는 땅은 2만 평 정도였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씨는 포상금 수령을 거부했다.
“처음에 보통 사람들은 그런 이야기(1000만원 수령을 거부했다는)를 하면 후라이 까는(거짓으로 과장하는) 걸로 알았어. 왜 안 받았느냐. 나는 목표한 것이 있으니까. 모든 것을 내 힘으로 해결한다 하는 결심 말야. 그때 당시 1000만원을 받아다가 내가 땅을 샀으면 좀 더 쉽고 편하게 부자도 될 수 있었겠지. 일을 안 해도 먹고살 수 있었겠지.
두 가지 이유가 있었는데 첫째는 내가 내 힘으로 가난을 극복하고 말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살아나가는 과정에서 그 결심을 허물면 안 된다는 생각이 앞섰고, 또 하나는 내가 그런 것을 받고 이웃들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느냐, 열심히 일하면 부자가 될 수 있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느냐, 이런 생각이 들었어. 사람들이 그럴 거 아냐. ‘저 자식도 별 수 없이 정부에서 돈을 주니까 저만큼 큰 농장도 갖고 그러고 어쩌고 다니는 거지, 제까짓 놈이 무슨 재주로 그런 걸 하느냐’는 소리를 듣는 건 뻔한 이치였거든. 난 그게 싫었어. 난 가난과 싸워서 이길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있었거든. 그리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보여주어야 그 사람들도 열심히 일을 할 거 아니겠어?”
의지하려는 맘 버려라
“세상에 버릴 것은 없다”는 하사용씨. 그는 지금도 농사를 짓는 한편으로 지역 관공서나 금융기관을 돌면서 1회용 종이컵을 회수한다. 종이컵에 흙을 담아서 호박, 오이, 참외 등의 모종을 키운다. 버려진 종이컵을 활용한 이런 육묘(育苗)를 통한 수입도 만만치 않다.
그는 매년 10만 개의 종이컵을 모아 육묘를 한다.
“종이컵 종묘 한 개에 100원인데 남이 보면 우스워 보여도 한 개에 100원이지만 10만 개면 얼마여. 1000만원이여. 1000만원 줍는 거 쉽거든. 길바닥에 서 1000만원 줍는 거 아녀. 거기에 뭐 10원이나 투자되는 거 있어? 씨앗 값 조금하고 노동력만 있으면 되는 거여. 농사짓는 틈틈이 하면 되는 일이기도 하고 말여. 2000년에는 1400만원을 벌었어. 인건비 농약 들어간 것 다 빼고도 1000만원 남았어.”
그러면서 이런 말을 덧붙인다.
“종이컵을 재활용하니까 쓰레기 감량에 도움도 되고 모종도 튼튼해져 일석이조야. 일거리가 없어서 굶어죽겠다는 사람들을 보면 이해가 안돼. 아, 스스로 일거리를 만들어야지. 그런데 자꾸 큰 것만 보기 때문에 일거리가 안 보이는 거여.”
공짜를 바라지 않았고 농사를 짓기 시작한 이후 단돈 10원도 빚을 지지 않았던 하사용씨가 바라보는 요즘의 농촌 모습은 어떨까. 빚더미에 올라앉아 부채탕감 문제가 공공연히 운위되는 농촌의 현실이 그에게 곱게 보일 리 없다.
“의지하려고 하는 맘을 버려야 돼. 사람이나 모든 것이 자꾸 남에게 무엇을 바라게 되면 불만을 가지게 돼. 내가 한 가지 지적하고 싶은 것은 우리나라 농촌에 정부에 대해서 불만을 가진 젊은이들이 많아. 그런데 그 사람들의 대부분이 정부로부터 가장 많이 혜택을 받은 사람들이야. 정부가 돈을 싸게 주고 공짜로 주고 하니까 무조건 갖다가 쓰고 보자 하다가 빚을 짊어지게 된 거라. 거의가. 그래서 정부에 ‘농민들에게 덮어놓고 돈만 주면 성공할 줄 아는데 그건 착각이다. 자식을 키울 때도 아비가 돈을 많이 주어가지고 하면 절대 성공 못 하는 거다. 고기를 잡는 방법을 가르쳐주어야 하는 것이지 돈을 줘가지고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고 말하지만 어디 듣나, 그 사람들이.”
이어지는 그의 말이다.
“정부가 자꾸 농민에게 무얼 주겠다고 그러는 걸 식물에 비유하면 ‘질소과다 현상’을 일으키는 거여. 질소과다 현상이라는 게 뭔지 알어? 질소를 많이 주면 당장은 빨리 자라지만 금방 썩어버리는 게 질소과다 현상이여. 내가 젊은이들한테 ‘농업은 투기가 될 수 없다. 돈 많이 들여가지고 쉽게 돈 벌 생각 절대로 하지 마라. 그런 식으로 하면 90% 이상이 실패다. 농업이라는 것은 자기가 노력한 만큼의 대가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농사를 지으려면 열심히 일한다는 마음 자세부터 가져야 된다’고 얘기하지만 소용없어. 지금 젊은 사람들 농사짓는 것 좀 봐. 거의가 건달 농사야. 자가용 타고 다니고, 아니 자기 돈이 있으면 타고 다녀도 되는데, 자기 돈도 아냐, 빚이라고.”
새마을운동의 전도사였던 하씨에게 새마을운동의 성공 요인이 무어라고 생각하는지를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경쟁을 시켰다는 거야. 지금처럼 돈 타내기 경쟁이 아니라 잘살기 경쟁을 시켰다는 거야. 농촌에서 퇴비증산 경쟁처럼 잘하면 조금 더 주고, 못하면 덜 주고 서로 경쟁을 시켰잖아. 경쟁을 통해서 자조정신을 심어준 거, 그게 새마을운동을 성공시킨 거야. 우선은 내 스스로 나를 도와야 남도 나를 도와주는 거 아니겠어.
지금 농민들은 너무 의존적이야. 자조정신이 사라졌어. 부채탕감이니 뭐니 하는 이야기들이 그래서 나오는 거야. 나를 봐. 난 IMF가 아니라 그 할아버지가 와도 자신 있어. 빚이 없거든. 왜 빚을 안 지었겠어. 자립과 자조정신을 잃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참으로 훌륭한 일을 하셨습니다. 당신은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한 산증인이십니다”(朴正熙 대통령)
河四容 ⊙1930년생. 초등학교 2학년 중퇴. ⊙동탑산업훈장·국민훈장 목련장 수훈.
하사용씨는 지금도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중앙새마을연수원 등에서 새마을운동 관련 강연을 하고 있다. 앞줄 왼쪽에서 다섯 번째가 하사용씨다.
2010년 10월 25일 오전 10시 서울 동작구 국립현충원 박정희(朴正熙) 전(前) 대통령 묘역 앞. 70대에서 80대까지 노인 40여 명이 모였다. 해마다 박 대통령 서거일 하루 전날인 이날이면 이들은 이 자리에 모여 박 대통령을 추모한다. 박 대통령 서거 6년째인 1985년부터 시작했으니까 지난해가 26번째 추모행사였다.
이들이 추모행사를 열기 시작한 이유는 “생전 박 전 대통령에게 술 한 잔 올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이기에 이들은 이처럼 박 대통령에 대한 애틋함을 서거 30년이 지난 지금까지 간직하고 있는 걸까.
이들은 박 대통령이 살아생전 그토록 애정을 쏟아부었던 새마을운동에서 지도자 역할을 맡았던 이들이다. 이들 가운데는 농부도 있었다. 1970년대 새마을운동 당시 전설적인 새마을운동 지도자로 알려졌던 하사용(河四容)씨도 그 가운데 한 명이다. 올해 만 81세인 그는 지금도 충청북도 청원군에서 농사를 짓고 있다. 이날 추모행사에도 그는 자신이 직접 농사를 지어 생산한 수박 두 통을 짊어지고 왔다. 추모행사가 시작된 후 한 해도 거르지 않은 일이다.
하사용. 그는 박 대통령을 생각하면 눈가에 눈물이 먼저 맺힌다고 한다. 새마을운동을 하며 느꼈던 벅찬 감격의 눈물, 어처구니없이 일찍 떠나보내야 했던 아쉬움의 눈물…. 어떤 인연이기에 하사용씨의 가슴 속에는 박 대통령의 모습이 그처럼 강하게 박혀 있는 걸까.
공무원이 써준 원고를 버리고
1970년 11월 11일 서울 시민회관. 박정희 대통령을 비롯한 3부 요인과 농어민 대표 등 3000여 명이 시민회관 객석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이날의 행사명은 전국 농어민 소득증대 특별사업 경진대회. 대회는 텔레비전을 통해서 전국에 중계되고 있었다.
모든 참석자가 정장 차림인 가운데 남편은 점퍼 차림, 아내는 스웨터 차림인 부부가 눈길을 끌었다. 이 대회에서 전국 1등을 차지한 하사용씨 부부였다. 하씨는 이 자리에서 성공사례 발표와 함께 박 대통령으로부터 동탑산업훈장을 받게 돼 있었다.
대회 참석 전 하씨 고장의 공무원들은 대통령 앞에 서는 자리인 만큼 양복을 입어야 한다고 했다. 하씨에게는 양복이 없었고, 양복이 필요 없었다. 밭에서 일하는 농부에게 양복은 필요 없는 차림새였다. 끝내 고집을 피우고 깨끗이 빨아 입은 점퍼 차림으로 대회에 참석했다.
대회가 시작되면서 그는 성공사례 발표 내용이 담긴 원고를 만지작거렸다. 공무원들이 며칠을 밤새워가며 작성해 준 원고였다. 원고에는 소득액을 부풀려 적는 등 사실과 다른 내용이 많았다. 텔레비전 앞에 모여 있을 마을 사람들과 거짓 없이 살기 위해 애를 쓰는 농민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옆에 앉아 있는 청원군수를 흘끗 바라보았다. 하씨보다 더 긴장한 모습이었다. 군수는 옆자리에 앉아 “나가서 말씀하실 때는 정신 차려 가지고 요거(공무원들이 작성해 준 원고)를 잘 보고 하셔야지 말을 한마디라도 잘못하면 큰일 납니다”며 자꾸 주의를 주었다. 무섭기도 하고 떨리기도 했다. 식순에 따라 성공사례를 발표할 차례가 되었다.
하씨는 연단을 향해 갔다. 만지작거리던 원고는 그가 앉았던 자리에 그대로 두고서였다. 등 뒤로 경악하는 군수의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았다. 진실과 사실만을 말하기로 결심하자 더 이상 떨리지도 무섭지도 않았다.
“충청북도 청원군 강외면 정중리에서 온 하사용입니다”라는 말로 하씨의 성공사례 발표는 시작됐다. 고생스러웠던 지난날을 이야기할 때는 자신도 모르게 설움에 북받쳐 울먹이기도 했지만 그는 아무 꾸밈 없이 자신의 ‘가난 탈출기’와 그동안 체득한 ‘자신만의 농법’을 소개했다.
박 대통령도 원고 없는 연설로 화답
2009년 10월 25일 박정희 대통령 묘소를 참배하고 있는 하사용씨(맨 왼쪽).
발표가 끝났을 때 객석에서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 ‘감동이 물결쳤다’는 말은 그런 장면을 설명하는 가장 적합한 말일 것이다.
박 대통령이 2층 특별석에서 내려와 하씨 앞에 섰다. 하씨의 손을 잡아주었다. 따뜻했다. 하씨는 박 대통령의 눈을 바라보았다. 박 대통령의 눈에는 이슬이 맺혀 있었다. 박 대통령이 말했다.
“참으로 훌륭한 일을 하셨습니다. 당신은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한 산증인이십니다.”
박 대통령의 농민에 대한 따뜻한 사랑. 하씨는 대통령의 눈물과 격려의 말에서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박 대통령은 하씨의 목에 동탑산업훈장을 걸어 주었다. 곧바로 이어진 박정희 대통령의 치사 첫마디는 이렇게 시작됐다.
“이 치사문은 인쇄된 것이니 가지고 가서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조금 전 충청북도에서 오신 농민 하사용씨의 성공사례가 너무나 큰 감명을 주었기에 본인의 소감을 말하겠습니다.”
한 농민의 원고 없는 진솔한 성공사례 발표에 박 대통령도 즉흥연설로 화답한 것이다.
이후 하씨는 새마을운동이 본격화한 1971년부터 체험으로 느낀 새마을운동의 정신을 전파하는 최고의 ‘전도사’가 됐다. 수원에 있는 새마을 연수원은 물론 각 기업체, 관공서, 학교 심지어 교도소에서까지 초청을 받아 강연을 했다. 그의 강연은 감동을 주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가난한 시대를 사는 국민들에게 ‘나도 가난을 극복할 수 있다’는 의지를 심어주었다.
이날의 동탑산업 훈장은 새마을운동 첫 성공사례 발표에 대한 상이었다.
하씨는 1970년대에만 1500여 회의 강연을 했다. 강연을 하는 그의 모습은 1970년 11월 11일 서울 시민회관에 섰던 그 모습 그대로 점퍼 차림이었다. 하씨의 성공사례 발표가 대통령의 눈가를 젖게 하고 전 국민에게 감동을 줄 수 있었던 것은 그런 일관됨과 진솔함에 있지 않았을까. 그는 지금도 틈만 나면 새마을운동과 관련해 강연을 다닌다. 중국 측의 초청으로 해외 강연을 다니기도 하고 해외 수십 개국에서 새마을운동을 배우려고 찾아오는 이들을 위해 강연을 한다. 청원군 중외면에서 자신이 운영하는 농장도 새마을운동을 배우려는 외국인들에게는 훌륭한 교육장이 되고 있다.
머슴살이 새경으로 땅 장만
버려지는 종이컵을 수거해 묘종을 기르는 것도 하사용씨의 주요 일과다.
하사용. 1930년 4월 충청북도 청원군 강외면 정중리에서 8남매 중 4남으로 태어났다. 두부집에서 나오는 비지나 엿집에서 나오는 엿밥, 양조장에서 나오는 술지게미를 얻어먹으며 컸다. 배고픔을 이기지 못할 때는 들판을 배회하며 올무(일찍 자란 무)를 뽑아 먹었다. 여덟 살에 초등학교에 입학했지만 수업료를 내지 못해 2학년 때 퇴학을 당했다. 열 살 때부터는 고물수집, 엿장수, 나무장사, 채소장사 등 돈을 벌 수 있는 일이면 뭐든 닥치는 대로 했다.
채소장사를 하면서 그는 채소농사를 짓는 화교(華僑)들의 수입이 높은 것에 놀랐다. 당시의 채소농사는 하씨의 마을뿐만 아니라 서울 근교에서도 주로 화교들이 지었다. 하씨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고소득을 올릴 수 있는 채소농사를 왜 짓지 않는지 의아했다. 직접 채소농사를 짓고 싶었지만 그에게는 단 한 평의 땅도 없었다.
6·25전쟁이 터졌고, 인민군에 한 번 끌려갔다가 목숨을 건 탈출에 성공한 후 군에 입대했다. 강원도 양구군에 있는 20사단에 배치되었다. 전투에 참가해 적들과 교전을 벌이던 중 부상을 당해 육군병원으로 후송됐다. 부상을 치료하던 중 폐결핵이 발견됐다. 치료 불가능 판정이 나왔다. 의병제대를 했다.
삶에 대한 강한 집착 때문인가. 육군병원에서 치료불가라는 판정을 받았음에도 그의 병은 호전되었고, 하씨 못지않게 찢어지게 가난한 집의 딸(신경복)과 결혼을 했다. 혼수는 홑청 없는 이불 한 채가 전부였다.
가정을 제대로 꾸리려면 제대 후에 그가 해온 품팔이만으로는 어려울 것 같았다. 화교들이 짓던 채소농사가 떠올랐다. 땅이 필요했다. 땅이 있는 사람들에게 농사를 지어서 갚겠다며 땅을 몇 평만이라도 빌려달라고 애원해 보았으나 허사였다.
남의 집 머슴을 살아서라도 직접 땅을 살 밑천을 마련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아내 몰래 집을 나왔다. 걸식을 하며 춘천까지 갔다. 춘천을 목표로 삼아서 간 것이 아니라 머슴 살 집을 찾다 보니까 그곳까지 흘러간 것이다. 3년간 정말 ‘죽어라 하고’ 일을 했다. 쌀 열다섯 가마를 새경으로 받아 고향 청원군 정중리로 돌아왔다. 아내는 남의 집 식모살이를 하고 있었다. 봉급 대신 끼니만 해결해 주는 식모살이였다. 아내의 모습에 설움이 북받쳤다. 목놓아 울지는 못했다. 천형(天刑) 같은 가난에 대한 증오가 더 컸다. 반드시 이놈의 가난을 이겨내리라고 이를 악물었다.
아! 내 땅, 내 집
1957년에 쌀 열다섯 가마로 밭 270평을 구입하고, 그 밭 한쪽에 두 평 남짓한 움막을 지었다. 처음 가져보는 내 땅과 내 집이었다. 돌을 골라내고 흙을 퍼날랐다. 인근 조치원읍에 가서 인분을 퍼다 밭에 뿌렸다. 인분을 퍼오다가 뺨을 맞기도 했다. 길거리에서 개똥도 주워다 거름으로 썼다. 미친 듯이 일을 했다. 지친 몸으로 집에 돌아오면 멀리 갈 수 없게 노끈으로 묶어 놓았던 어린 자식이 울다 지쳐서 땅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가슴이 미어졌다. 울지는 못했다.
남들과 똑같은 방법으로 농사를 지어서는 성공할 수 없다. 밭에 채소를 심은 후 콩기름을 바른 종이를 씌워서 보온을 해주었다. 나중에 하씨의 농법은 농촌에서 보편화되었지만 당시만 해도 주위 사람들은 종이 속에서 어떻게 작물이 자랄 수 있느냐며 조소를 보냈다. 결과는 성공이었다. 그는 남들보다 채소를 일찍 수확할 수 있었고, 일반 농사보다 열 배 이상의 소득을 올릴 수 있었다.
선대(先代)들이 단 한 평도 갖지 못했던 땅. 땅을 더 사야 했다. 1원도 헛되이 쓸 수 없었다. 저축을 했고, 그 돈으로 매년 땅을 늘렸다. 하늘의 시샘인가. 덜컥 폐결핵이 도졌다. 아내가 거름통을 지고 다니는 모습을 누워서만 지켜볼 수 없었다. 똥통을 지고 다시 조치원 읍내로 갔다. 똥통을 지고 오는 길에 피를 토하며 쓰러지기도 했다. 멈출 수 없었다. 가여운 아내와 가여운 자식들 때문에라도 쓰러질 수는 없었다.
하늘도 그의 의지를 꺾을 수는 없었던 것 같다. 그는 결핵을 이겨냈고, 농어민소득증대 특별사업 경진대회에서 전국 1등을 차지해 대통령으로부터 동탑산업훈장을 수상함으로써 대한민국 최고의 농부로 우뚝 서게 된 것이다.
270평으로 시작한 하씨의 농토는 1만2000여 평까지 늘어났다. 땅을 더 늘릴 수도 있지만 늘리지 않고 있다. 그만하면 농사를 짓기에는 충분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自助정신
2007년 4월 18일 중국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새마을운동 관련 출판기념회에 참석한 하사용씨(맨 오른쪽).
하씨가 강조하는 것 중 하나가 자조(自助)정신이다. 그는 이 자조정신 때문에 박 대통령에게 불경죄(?)를 저지르기도 했다. 동탑산업훈장 상금으로 대통령이 재가(裁可)한 포상금 1000만원 수령을 거부했던 것이다.
농어민소득증대 특별사업 경진대회에서 하씨의 성공사례에 감동한 박 대통령은 이튿날 하씨 부부를 청와대로 초청했다. 하씨가 기억하고 있는 박 대통령과의 만남 장면이다.
“나와 아내는 전날 복장인 점퍼와 스웨터 차림으로 청와대에 갔어. 박 대통령께서 반갑게 맞아주셨지. 대통령께서 ‘어떤 소원을 가지고 살아왔느냐’고 내게 물어서 나는 이렇게 대답했던 걸로 기억이 나. ‘한이 맺힌 게 가난이니까, 소원이라면 배고픔과 싸워서 승자가 되는 것입니다’고 했지.
박 대통령은 그 말에 감동하는 눈치였어. 그때 박 대통령께서 이런 말씀도 하셨어. ‘나도 대통령을 그만두면 하사용씨 같은 새마을 지도자가 되겠다’고 말여. 대화 중에는 또 이런 말씀도 하셨어. ‘우리 민족을 위해서 내가 무얼 하다가 간 사람인지 죽은 뒤에는 알 것이다’고 말여.
크기에는 차이가 있겠지만 얘기를 나눠 보니까 나하고는 배짱이나 성격이 잘 맞는 분이셨어. 나도 당시에 내 목표를 위해 가족을 강하게 끌고 가다가 보니까 가족의 불만들이 있었거든. 그래도 나는 나중에 가족이나 근동 사람들이 가난과 싸워 이긴 후에 죽으면 제대로 평가를 하게 될 것이다, 하는 확신이 있었거든.”
청와대를 방문한 후 하씨에게 1000만원의 포상금이 내려졌다.
하씨의 당시 농토는 3000여 평이었다. 영양실조로 결핵에 걸릴 정도로 먹지도 쓰지도 않으며 돈이 생기는 대로 저축만 했던 하씨가 270평의 땅을 3000평으로 늘리는 데 무려 13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당시 1000만원으로 구입할 수 있는 땅은 2만 평 정도였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씨는 포상금 수령을 거부했다.
“처음에 보통 사람들은 그런 이야기(1000만원 수령을 거부했다는)를 하면 후라이 까는(거짓으로 과장하는) 걸로 알았어. 왜 안 받았느냐. 나는 목표한 것이 있으니까. 모든 것을 내 힘으로 해결한다 하는 결심 말야. 그때 당시 1000만원을 받아다가 내가 땅을 샀으면 좀 더 쉽고 편하게 부자도 될 수 있었겠지. 일을 안 해도 먹고살 수 있었겠지.
두 가지 이유가 있었는데 첫째는 내가 내 힘으로 가난을 극복하고 말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살아나가는 과정에서 그 결심을 허물면 안 된다는 생각이 앞섰고, 또 하나는 내가 그런 것을 받고 이웃들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느냐, 열심히 일하면 부자가 될 수 있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느냐, 이런 생각이 들었어. 사람들이 그럴 거 아냐. ‘저 자식도 별 수 없이 정부에서 돈을 주니까 저만큼 큰 농장도 갖고 그러고 어쩌고 다니는 거지, 제까짓 놈이 무슨 재주로 그런 걸 하느냐’는 소리를 듣는 건 뻔한 이치였거든. 난 그게 싫었어. 난 가난과 싸워서 이길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있었거든. 그리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보여주어야 그 사람들도 열심히 일을 할 거 아니겠어?”
의지하려는 맘 버려라
“세상에 버릴 것은 없다”는 하사용씨. 그는 지금도 농사를 짓는 한편으로 지역 관공서나 금융기관을 돌면서 1회용 종이컵을 회수한다. 종이컵에 흙을 담아서 호박, 오이, 참외 등의 모종을 키운다. 버려진 종이컵을 활용한 이런 육묘(育苗)를 통한 수입도 만만치 않다.
그는 매년 10만 개의 종이컵을 모아 육묘를 한다.
“종이컵 종묘 한 개에 100원인데 남이 보면 우스워 보여도 한 개에 100원이지만 10만 개면 얼마여. 1000만원이여. 1000만원 줍는 거 쉽거든. 길바닥에 서 1000만원 줍는 거 아녀. 거기에 뭐 10원이나 투자되는 거 있어? 씨앗 값 조금하고 노동력만 있으면 되는 거여. 농사짓는 틈틈이 하면 되는 일이기도 하고 말여. 2000년에는 1400만원을 벌었어. 인건비 농약 들어간 것 다 빼고도 1000만원 남았어.”
그러면서 이런 말을 덧붙인다.
“종이컵을 재활용하니까 쓰레기 감량에 도움도 되고 모종도 튼튼해져 일석이조야. 일거리가 없어서 굶어죽겠다는 사람들을 보면 이해가 안돼. 아, 스스로 일거리를 만들어야지. 그런데 자꾸 큰 것만 보기 때문에 일거리가 안 보이는 거여.”
공짜를 바라지 않았고 농사를 짓기 시작한 이후 단돈 10원도 빚을 지지 않았던 하사용씨가 바라보는 요즘의 농촌 모습은 어떨까. 빚더미에 올라앉아 부채탕감 문제가 공공연히 운위되는 농촌의 현실이 그에게 곱게 보일 리 없다.
“의지하려고 하는 맘을 버려야 돼. 사람이나 모든 것이 자꾸 남에게 무엇을 바라게 되면 불만을 가지게 돼. 내가 한 가지 지적하고 싶은 것은 우리나라 농촌에 정부에 대해서 불만을 가진 젊은이들이 많아. 그런데 그 사람들의 대부분이 정부로부터 가장 많이 혜택을 받은 사람들이야. 정부가 돈을 싸게 주고 공짜로 주고 하니까 무조건 갖다가 쓰고 보자 하다가 빚을 짊어지게 된 거라. 거의가. 그래서 정부에 ‘농민들에게 덮어놓고 돈만 주면 성공할 줄 아는데 그건 착각이다. 자식을 키울 때도 아비가 돈을 많이 주어가지고 하면 절대 성공 못 하는 거다. 고기를 잡는 방법을 가르쳐주어야 하는 것이지 돈을 줘가지고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고 말하지만 어디 듣나, 그 사람들이.”
이어지는 그의 말이다.
“정부가 자꾸 농민에게 무얼 주겠다고 그러는 걸 식물에 비유하면 ‘질소과다 현상’을 일으키는 거여. 질소과다 현상이라는 게 뭔지 알어? 질소를 많이 주면 당장은 빨리 자라지만 금방 썩어버리는 게 질소과다 현상이여. 내가 젊은이들한테 ‘농업은 투기가 될 수 없다. 돈 많이 들여가지고 쉽게 돈 벌 생각 절대로 하지 마라. 그런 식으로 하면 90% 이상이 실패다. 농업이라는 것은 자기가 노력한 만큼의 대가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농사를 지으려면 열심히 일한다는 마음 자세부터 가져야 된다’고 얘기하지만 소용없어. 지금 젊은 사람들 농사짓는 것 좀 봐. 거의가 건달 농사야. 자가용 타고 다니고, 아니 자기 돈이 있으면 타고 다녀도 되는데, 자기 돈도 아냐, 빚이라고.”
새마을운동의 전도사였던 하씨에게 새마을운동의 성공 요인이 무어라고 생각하는지를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경쟁을 시켰다는 거야. 지금처럼 돈 타내기 경쟁이 아니라 잘살기 경쟁을 시켰다는 거야. 농촌에서 퇴비증산 경쟁처럼 잘하면 조금 더 주고, 못하면 덜 주고 서로 경쟁을 시켰잖아. 경쟁을 통해서 자조정신을 심어준 거, 그게 새마을운동을 성공시킨 거야. 우선은 내 스스로 나를 도와야 남도 나를 도와주는 거 아니겠어.
지금 농민들은 너무 의존적이야. 자조정신이 사라졌어. 부채탕감이니 뭐니 하는 이야기들이 그래서 나오는 거야. 나를 봐. 난 IMF가 아니라 그 할아버지가 와도 자신 있어. 빚이 없거든. 왜 빚을 안 지었겠어. 자립과 자조정신을 잃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