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과의사봉달희>에는 거의 모든 멜로드라마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삼각관계나 삼각관계가 야기하는 음해나 음모는 등장하지 않는다. 봉달희를 궁지에 빠뜨리는 것은 불편한 관계로부터 비롯되는 음모나 정치적 암투가 아니라 의사로서의 미숙함(초반)이거나 혹은 그녀의 열정과 의지를 감당하지 못하는 몸의 한계(종반)이다. 사실 달희에게 몸의 한계는 다른 평범한 의사의 경우 보다 특별한 의미를 띤다. 그녀를 의사로서 발을 내딛게 만든 동인이 그녀가 심장판막에 문제가 있는 환자였다는 것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이 드라마에서 달희가 좌절하지 않고 의사의 길로 들어설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람은 언제나 안중근이었다. 안중근은 아직 의사로서 입문하지 못한 1회와 갓 입문한 그녀에게 호된 의사수업을 시킨다. 사실 2회의 사망자 컨퍼런스에서 안중근의 호된 질책은 겉으로 보기에 달희를 코너로 몰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미달사태로 인해 겨우 전공의 과정에 입문하게 된 달희에게 안중근의 냉혹함은 오히려 그녀를 무시하거나 냉대했던 재범이나 민우 등 레지던트 1년차 다른 동료들이 그녀에게 호의적이 되는 1차 계기로 작용했고, 오히려 달희의 도전 의지를 더 강하게 만든다. 이것은 달희가 (심장병 전력이 있는 환자가 아닌) 의사로서 지속적으로 안중근의 한 치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는 의학적 태도와 이를 위해서는 최첨단의 의학적 능력을 지향해야 한다는 안중근의 의사로서의 꿈과 신념에 동참하게 되었다는 의미이다.
사실 의사하지 말라는 달희 엄마와의 갈등을 우연히 목격함으로써 달희의 심장병 전력을 알게 된 6회의 중근의 모습이 그의 달희에 대한 태도 변화의 극적 전환점을 이루지만, 4회의 아이를 버리고 도망쳐버리고자 하는 미혼모를 찾아 뛰어가는 안중근에게 보인 달희의 태도, 그리고 5회의 한국에서는 한 번도 시도되지 않았던 안중근의 승민 심장 이식 수술의 성공(달희가 성공을 축하하며 중근을 옆에서 안아주는 장면) 등등에서 보여준 달희의 모습은 안중근의 태도 변화를 6회 이전에 이미 예비하고 있었던 셈이다.
이런 식으로 드라마의 초반부터 달희는 안중근의 완벽하고자 하는 의사에의 꿈과 신념 속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중반부에서 달희는 아직 안중근의 자신에 대한 태도의 변화를 감지하지 못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안중근의 꿈을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 다시 말해 달희의 의사로서의 성장과 안중근의 신념은 마치 드라마의 초반부에서는 별개의 것처럼 등장하다가 드라마가 중반부로 접어들면서 중근의 일방적인 사랑과는 별개로 하나의 톱니바퀴처럼 서로 맞물리며 드라마를 이끌어가는 주요 동력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동건의 죽음과 그 바로 직후 그녀가 담당했던 심장병 환자의 죽음 등의 충격으로 인해 달희가 병원을 무단이탈했을 때 그녀를 병원으로 다시 돌아오게 만든 동력이 그녀가 사랑한다고 생각했던 이건욱이 아니라 안중근에게서 나왔다는 점 역시 드라마의 이러한 방향과 궤를 같이 하고 있다.
그러나 환자로서 의사에 도전하는 것이 달희에게 자신의 생명을 더 단축할 지도, 이식된 조직판막의 수술 시기를 더 앞당길 지도 모르는 위험하고 모험에 가득한 시도였듯이 의사 안중근이 가고자 하는 의사로서의 길 역시 인간으로서 겪을 수 있는 여러 가지 위험인자를 포함하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에이즈 환자의 에피이고, 경찰을 찌르고 도망치다 다시 살아온 살인용의자를 다시 살려내는 에피 역시 완벽한 의학(과학)의 길이 얼마나 많은 인간적 고뇌를 야기할 수 있는 지, 일선의 의료현장에서 의료인으로서의 최선의 행동은 때때로 위험을 동반할 수 있다는 또 한 번 상기시킨다.
물론 이 두 가지 에피만이 전부는 아니다. 전공의 과정만을 무사히 마치고 비만 클리닉을 운영하면서 살고자 하는 재범의 경우에도 의료현장은 실수를 용납하지 않는, 생명을 좌우하는 냉혹한 공간이지만 안중근의 경우는 단지 실수를 하지 않고 안전하게 치료한다는 것만이 목표가 아니다. 그에게 의료인의 최선의 선택이란 확률에 의거한 안전한 선택이 아니다. 승민의 수술 성공이나 자살을 시도한 환자의 혈관 문합에서 보듯 그는 최첨단의 외과적 시술을 지향한다. 이러한 그의 지향은 그의 삶을 끊임없는 모험으로 만든다. 모험은 언제나 실패를 예비한다. 하지만 쉼 없는 노력으로 그는 실패의 가능성을 줄이고자 하지만 언제나 어느 곳에서나 그의 선택이 완벽한 것은 아니라는 점(ex. 성악가의 수술) 에서 그의 삶에 대한 태도는 모험적이다. 그러나 모험이 없이는 발전도 없다. 발전은 언제나 모험을 수반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달희는 이러한 안중근의 모험적이고 어쩌면 위태로울 수도 있는 이상적 의사의 꿈에 동참한다.
이 드라마가 실질적 전환점을 이루는 것은 6회가 아니라 11회이다. 11회로 들어서면서 그토록 완벽해보였던 안중근의 인간적 결핍과 균열이 서서히 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고, 아이큐 185의 천재 의사이기 이전에 상처받기 쉬운 안중근의 인간적인 모습에 카메라의 포커스가 맞추어진다. 하지만 이 지점에서 그들의 꿈은 서로에게 등을 돌린다. 안중근의 고통이 그를 단단하게 둘러싸고 있었던 그의 이성의 벽을 허물고 자신의 취약한 감정을 드러내게 만들지만(안중근의 버럭 사랑 고백), 그의 고백은 응답받지 못한다. 과연 무엇이 달희의 응답을 지연시켰을까?
사실 달희의 꿈은 안중근의 꿈보다 훨씬 도전적이고 훨씬 더 모험적이다. 안중근은 병원 내에서 발생할 수 있는 우연한 사건으로 인해 “가끔” 위험에 노출될 수 있지만 달희가 꾸는 꿈은 언제나 생명을 담보로 한다. 달희의 꿈은 안중근과 마찬가지로 쉽게 흘려버릴 수 있는 현재의 순간 순간에 쉼 없이 최선을 다하고자 하는 데서 생겨나는 즐김이라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하지만 그 강도는 다르다. 달희의 의사의 꿈은 자신의 생명을 달려있는 대단히 공격적인 너무나 공격적인 즐김이라는 점에서 안중근의 꿈과 갈라서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자 안중근은 생명을 담보로 하는 달희의 그 위태로운 꿈에 동참하지 못한다. 그래서 안중근은 달희의 수술 직후부터 하루만 더 누워 있으라고 충고하고, 수술이 심내막염을 야기시킬 수 있다는 것을 경고하고, 수술 휴유증이 생길까 학회 발표와 장시간의 고난도 수술에서 달희를 제외한다. 이것은 안중근이 달희를 사랑하는 평범한 남자의 방식이다. 그러나 달희는 이러한 평범한 사랑의 방식에 응답하지 않는다.
정확히 드라마 속에서 재현되지는 않았지만 아마도 달희가 결혼을 앞둔 남자에게서 버림받은 것도 이러한 평범한 남자의 사랑의 방식에서 비롯된 것일 것이다. 사랑의 최소 요건이 건강에 대한 배려라는 것은 뒤집어 말하면 달희의 고통스런 즐김에 동참하기를 거부하는 것과 다름이 없는 것이고, 언제나 달희에게 환자로서 살아갈 것을 요구하는 행위와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달희에게 배려하는 중근의 모습은 자신의 질병의 표상, 2번의 수술 흉터를 참아내지 못한 첫사랑의 남자와 다르지 않아 보였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달희의 중근의 사랑에 응답한 것은 겉으로 나타난 것과 같이 중근의 옛 후배의 등장과 후배에 대한 질투 때문만은 아니다. 질투를 유발했던 후배와의 사건 이전에 중근은 달희의 건강에 대한 지나친 관심을 먼저 철회한다. 물론 이것은 그가 달희를 걱정하지 않는 것과는 다르다. 그는 더 이상 달희에게 쉴 것을 권유하지 않는다. 제소자의 에피에서 보듯 달희가 반발하자 중근은 살인용의자의 사건도 있으니, 주치의를 바꾸라는 지시를 거두고 한걸음 물러선다. 이 안중근의 “물러섬”이 오히려 달희에겐 사랑의 표현으로 느껴진 것은 아닐까? 그러므로 질투는 이러한 안중근의 태도 변화를 받아들이는 달희의 외연을 뿐....
따라서 이 드라마는 상대방의 건강에 대한 배려, 자신의 잣대로서 사랑하는 사람을 진단하고 걱정하는 것만이 사랑의 행위가 아님을 보여준다. 달희에게 진정한 사랑의 표시는 환자에 대한 배려와 같은 그런 종류가 아니라. 자신의 꿈과 즐김에 동참해주는 것이다. 맥락은 다르긴 하지만 그녀가 안중근의 꿈에 참여하듯이, 그녀가 안중근의 아픈 기억을 자신의 잣대로 평가하지 않듯이....
물론 안중근의 의학적 판단은 옳았을 것이다. 안중근의 의학적 소견을 받아들여서 달희가 심내막염 진단을 받기 이전에 좀 더 쉬고 좀 더 안정을 취했더라면 어쩌면 다시 수술을 받아야 하는 그런 상황은 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판단을 사랑이 아니다.
쓰러져 입원한 달희를 찾아간 중근, “언제까지 숨길 작정이었냐”고 화를 내는 중근, “죄송하다”고 말하는 달희 앞에서 달희의 꿈을 무너뜨린 것이 자신이라고 자책하는 중근, 달희의 마음이 제대로 열린 것은 바로 이 순간이 아닐까. 이 장면과 수술 직전의 휴게실 장면에서 달희는 중근에게 마음을 연다. 그녀가 중근의 꿈에 동참했듯 중근에게 달희의 꿈에 동참해줄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수술이 위험했기도 했지만 수술당시 안중근은 달희의 생명에 건 모험에 동참하지 않는다. 그 사실을 안 달희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한마디 말도 없이 병원과 안중근을 떠났다. 그리고 진정으로 용서를 구하는 참회자의 모습으로 안중근은 달희를 찾는다.

울릉도에서 중근은 달희에게 사과한다. 하지만 이 사과는 의학적 판단이 틀렸다고 사과하는 것이 아니라 그녀의 꿈에 그녀의 즐김에 동참하지 못할 수 없었던 그의 인간적 고뇌를 고백하는 장면으로 보인다.

이렇게 달희가 중근을 만나고 다시 병원으로 돌아가는 것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그리고 그 둘은 다시 위험한 약속을 한다. 달희는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다시 모험을 감행할 것을, 그리고 그 모험이 이제는 달희 혼자만의 것이 아님을 안다. 마치 장난처럼 마치 농담처럼 그들의 대화는 대단히 가볍다.

이렇게 현재를 즐기는 자는 아름답다. 희망을 세우고 희망에 충실하는 자는 더욱 아름답다. 이들은 대단히 가볍게 정말 아무 것도 아닌 듯이, 그렇게.... 17회의 중근의 대사처럼 “완전히 불가능하지는 않은” 또 한번의 위태로운 모험을 시도할 것 같이 보인다. "나중에 딴 소리 하면 안돼요!"
그래서 눈이 시리도록 아름다운 것은 때로 눈이 시리도록 슬프고, 궁극적 즐김은 역설적으로 궁극적 고통과 만나며, 모든 것을 무너뜨리는 무거움은 때로 새의 깃털처럼 가볍다.
그들의 위태로운 사랑이 결실을 맺기를....
역시 캡처는 제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