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나들이 1. 무안
2019. 4. 금계
3월 27일 오전, 나는 운동화 끈을 단단히 죄고 똑딱이 사진기를 주머니에 담고 봄나들이에 나선다. 또 새봄이다.
태어나서 일흔네 번째 봄을 맞이했다. 나는 이 세상에 나를 태어나게 해주신 부모님께 감사드리고, 그 배후에서 내가 태어나도록 조종하고도 모른 척 시치미를 뚝 떼고 있는 조물주한테도 감사드린다. 우리 일생의 가장 큰 성공은 탄생이었고 가장 큰 실패는 죽음일 것이다. 나는 또 한 번의 새봄을 맞이하게 해주신 조물주한테 깊이 감사드린다.
봄은 만물이 소생하고 생동하는 생명의 계절이다. 이 춘삼월 호시절에 방구석에 처박혀 있기만은 좀이 쑤신다. 나는 또 역마살이 되살아난다. 봄바람도 좀 쐬고, 봄 햇살도 좀 즐기고, 들판에 아련히 감도는 두엄냄새도 좀 맡고, 아지랑이 사이로 흐늘흐늘 뿌옇게 사라져가는 것들도 눈 부릅뜨고 지켜보고 싶다. 또 화냥기가 동한 대지에서 분탕질을 치는 온갖 생명들이 움을 틔우고 새싹을 돋우고 꽃을 피우고 짝을 찾느라고 119 구조대처럼 다급하게 우왕좌왕하는 꼴도 구경하고 싶다.
현재는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과거와 미래의 접점이 바로 현재다. 우리는 끊임없이 과거에서 미래를 향하여 나아간다. 우리를 꿰뚫고 지나가는 과거는 그 순간 그 자리에 얼어붙어 꼼짝도 않고 미래는 질풍처럼 빠르게 밀어닥쳐 현재를 과거로 밀어내버린다.
나는 무안 가는 200번 버스에 오른다. 봄 햇살이 담벼락에 달라붙어 질질 흐른다. 나는 벽화를 참 사랑한다. 시골집 담장에 피어나는 연꽃도 좋고 봄볕을 받으며 유유히 헤엄치는 괴기들도 참 보기 좋다.
지형에 맞추다 보니까 그랬는지 무안군청은 아침 햇살을 등에 지고 있다. 현관에는 “군민과 함께 만드는 생동하는 행복 무안”이라고 쓰여 있다. 요즘에는 주민들이 써놓은 듯 “군 공항 무안 이전 결사반대”라는 현수막이 곳곳에 걸려 있다. 생동스럽기는 한데 어째서 좀 행복스럽지는 못한 것 같다.
무안군청 구석에 목련꽃이 만발했다.
“목련꽃 그늘 아래서 ‘베르테르의 편지’를 읽노라. 이름 없는 항구에서 배를 타노라.”
학창시절에 부르던 노래가 떠올라 잠시 가슴이 두근거린다. 사춘기에는 그런 노래만 불러도 가슴이 설레고 무언지 모를 낭만과 그리움과 서러움이 목울대까지 치밀어 올랐었다. 칠순을 넘긴 나그네는 이제 희미한 미소만 지을 따름이다.
나는 아무런 종교도 믿지 않지만 성당을 보면 반갑고 고맙다. 무안에 갈 때마다 성당에 들러 성모동산을 찾는다. 순전히 우리 할머님 덕분이다.
6.25 전란 직후, 난리 통에 자식을 잃은 우리 할머님은 성당을 다니면서 겨우 마음의 안정을 되찾았다. 성당에서는 가끔 미국에서 구호물자로 보내온 밀가루를 나누어주었다. 밀가루포대를 이고 대문 안으로 들어서는 할머님의 눈은 자랑스러움으로 반짝반짝 빛났다. 밀가루포대가 대문 안으로 들어서는 날이 우리 집의 잔칫날이었다. 수대로 수제비나 칼국수를 두 그릇 세 그릇씩 먹고 꺽꺽 게트림을 했다. 꽁보리밥으로 꺼끌꺼끌해진 위장이 몰라보게 부드러워졌다.
나는 성모동산 앞에 서서 아무도 모르게 기도를 올린다.
“자비로우신 성모마리아님! 그 허기진 시절에 저희들한테까지 일용할 양식을 베풀어주셔서 감사, 또 감사하나이다. 아멘.”
개나리는 활짝 피었는데 벚꽃은 이제야 드문드문 피기 시작한다. 활짝 피려면 일주일 정도 더 기다려야 할 것 같다.
담벼락 화분에서 서향을 발견하니 아주 반갑다. 향기가 멀리까지 퍼져서 천리향이라고도 한다던가.
서향만 보면 돌아가신 전교조 윤영규 위원장이 생각난다. 전교조 창립부터 옥살이를 하고 당국의 계속되는 탄압에 무안 어느 조용한 곳으로 피접을 나왔던 당신께서는 심심파적으로 서향 꺾꽂이를 해두었다가 나한테까지 한 뿌리 나누어주셨다.
그 서향을 우리 집 화단에 심었더니 금방 무성하게 가지를 치고 해마다 봄이 되면 집 앞 골목까지 향기가 진동하였다. 사람도 윤 위원장처럼 고결하고 인품이 높은 분한테서는 서향처럼 은은한 향내가 난다.
‘성내 1리, 서문안’, 저 바윗돌에 새겨진 글자를 보니 무안에도 성이 있었나보다. 나는 나주읍성 안에서 20년을 살았으므로 저런 글자만 보면 눈이 번쩍 뜨일 정도로 친숙하고 반갑다. 성 안, 성 밖, 성까테(성가에), 남문안, 서문거리, 동밖께(동문 밖에), 붕밖에(북문 밖에), 시구밖에(시구문 밖에)......
드디어 시가지를 벗어나 한적한 들판에 다다른다. 예전 꼬불꼬불한 시냇가에서는 버들개지에 솜털을 단 망울들이 부풀어 오르고 물총새가 수면에 닿을락 말락 스치듯이 날아다닐 텐데 이 반듯하게 펴진 하천에서는 그런 기대가 무리겠지.
요즘은 쑥, 미나리, 바지락과 함께 풋마늘이 맛있을 철이다. 뿌리와 잎사귀까지 함께 아울러서 탕탕 토막 쳐서 갖은양념에 매콤하게 무쳐도 좋고, 살짝 고춧가루를 뿌리고 젓갈에 버물려서 보름쯤 삭혔다가 마늘김치로 먹으면 매운 맛이 부드러워지고 헤실헤실한 봄 체력을 보강하기에 그만이다.
철 지난, 작년의 무성한 잎사귀와 하얗던 솜털을 죄다 날려 보내고, 숨겨두었던 씨알까지 아낌없이 털어버리고, 겨우 가벼운 쭉정이만 남아 텅 빈 봄 들판에 서서 바람에 맥없이 고개를 주억거리는 모습이 꼭 일흔 넘은 내 모습을 닮은 듯 애잔하고 허허롭다.
나는 저 전원주택이 부럽다. 너무 도회지에서 벗어난 곳이라면 시장, 병원 다니기에 불편한데 저 집처럼 승용차로 5분이면 도심지에 다다를 수 있는 거리이면서도 들녘의 신선한 공기를 맘껏 들이마실 수 있으니 말이다. 게다가 집 뒤로 꼬부라져 올라가는 오솔길이 산책하기로는 그만일 것 같아서 더욱 부럽다.
전에는 못 보았는데 새로운 전통시장이 생겼다. 어쩌면 우리 같은 노인네들이 다 세상을 떠나면 20-30년 후에는 전통시장이 사라질지도 모르겠다.
무안 근린공원 ‘불무공원’. 도심지 아주 가까이에 이토록 근사한 공원이 있다는 게 무안 사람들로서는 커다란 행운이 아닐 수 없다.
불무공원의 물 오른 수양버들. 때마침 불어 젖히는 꽃샘바람에 칭칭 늘어진 가지가 질정 없이 흔들려 나그네의 마음이 절로 싱숭생숭해진다.
불무공원의 조각상. 마치 초콜릿을 나이프로 뚝뚝 떠서 아무렇게나 덕지덕지 처발라놓은 듯 끈적끈적한 질감이다. 봄볕에 금방이라도 질질 흘러내릴 것 같으면서도 묘하게 친근감과 안정감을 주는 작품이다.
뭐니 뭐니 해도 봄의 전령사는 민들레라고 해야겄제.
무궁화 말고 우리나라 국화를 산천에 지천으로 피어나는 진달래꽃이나 민들레꽃으로 했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든다.
유산정(遊山亭). 박 씨들이 세운 정자. 고려 충열왕 때 면남(綿南) 박문오(朴文晤)가 지었단다. 내 보기에는 무안읍에서 가장 예스럽고 경관이 뛰어난 곳이다.
유산정으로 올라가는 돌계단 나무그늘에 숨어 있는 동백꽃이 처절하게 요염하다.
유산정에서 바라본 옛 무안고등학교. 군내 고등학교들을 통합하여 새로운 무안고등학교를 지어 다른 곳으로 이사하는 바람에 저 무안고등학교는 졸지에 학생들의 소음이 멎고 도시의 미아로 전락하고 말았다.
나는 지붕에 창문이 있는 집을 퍽이나 좋아한다. 저 창문이 뚫린 다락방에서 네 활개 쫘악 펴고 봄 햇살을 받으며 늘어지게 낮잠이라도 한 번 자봤으면 원이 없겄다.
저 나무는 나이가 나보다 제법 더 먹었을 법하다. 나이를 먹을수록 복잡하게 배배꼬이는 내 심사처럼 저 나무도 엄청나게 여러 가닥으로 뒤엉켜 있다. 저 고목나무도 나이 들수록 생각이 많아지는 모양이다.
멀구슬나무가 작년의 열매를 달고 있다. 열대식물인 멀구슬나무는 남해안까지만 자생한다고 한다. 약성이 강한 나무로 뿌리, 줄기, 잎사귀, 열매까지 죄다 이런저런 약으로 쓰인단다. 약 성분도 고맙지만 나는 멀구슬이라는 나무 이름을 열렬히 사랑한다.
폐교된 무안고등학교 바로 곁의 무안북중학교 정문.
“자란다(그로우), 잘한다(액설런트), 인성으로 자란다.”
입학 축하 현수막이 아직도 걸려 있다.
무안북중학교로 들어가는 광장 담장의 벽화. 저 농부는 벌써 몇 년째 저 담벼락에서 쟁기질을 하느라 참 수고가 많다.
농자천하지대본! 나 어렸을 적에는 우리나라 인구의 8할이 농부였는데 지금은 2할이나 되나? 1할도 못 되나?
‘여기를 지나는 크고 작은 사람들은 모두 말에서 내리시오.’
무안북중학교 언저리의 무안 향교. 그 들머리에 하마비가 서 있다. 요즘은 말 대신 승용차를 타고 다니니까 원칙적으로는 승용차나 트럭이나 모두 일단 정지해서 예를 갖추어야 하건만 예는커녕 왱왱 뒤꽁무니에 연기를 내뿜으며 쏜살같이 내뺀다.
1394년(태조3년)에 창건. 1470년(성종 1년)에 현 위치로 이전. 개항 100년을 맞은 목포는 향교가 없지만 무안은 향교만 보아도 오랜 역사와 문화가 숨 쉬는 곳이다. 내 생각으로는 목포와 무안 신안이 통합했으면 더 좋을 것 같은데 무슨 까닭인지 무안은 통합에 도리질을 하는 사람들이 더 많다고 한다.
무안향교 마당의 은행나무와 왼쪽의 대성전. 문이 열리지 않았으니 하는 수 없이 밖에서 찍을 수밖에 없다.
도로 귀퉁이에 설치된 볼록거울을 활용하여 셀카(셀프 카메라 - 자가 촬영)를 시도해보았다. 향교 건물들은 그런 대로 잘 나왔지만 인물은 그렇지 못한 듯.
무너져 내리는 것들을 사랑하리. 새마을운동의 일환으로 지붕개량 - 초가지붕을 걷어 내고 기와나 함석이나 슬레이트로 바꾸던 일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50년이 다 되었다. 나는 말짱한 새것보다는 반질반질 손때가 묻고 조금쯤 퇴색하고 조금쯤 허름한 것을 좋아하는 편이지만 슬레이트 지붕만큼은 발암물질 때문에 그다지 반갑지 않다. 이제 이 지붕과 함께 새마을운동도 깃발을 내릴 때가 되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방금 밭에서 캐 온 쪽파를 차에 싣는 아저씨. 봄볕 때문에 쪽파가 더욱 싱싱하고 먹음직스러워 보인다. 나는 파를 송송 썰어 간장 참기름 듬뿍 치고 고춧가루와 깨소금을 뿌린 ‘파장’을 끔찍이 좋아한다.
장터에도 ‘25시’가 있었다. 그 식당은 한때 이름값에 걸맞게 비둘기 꿩 토끼 등 특별히 자연산을 요리해서 호사가들의 입을 즐겁게 해주었는데 이제는 자연보호에 밀려 주인도 바뀌고 평범한 식당으로 변모한 채 이름만 남았다.
나는 역사가 짧은 목포 바로 가까이에 향교도 있고 까치집도 있고 골목길도 꼬불꼬불한 무안이 있어 언제든지 맘만 내키면 돌아볼 수 있다는 데에 적잖이 위안을 받고 있다. 사람의 입맛은 까다로워서 금방 담은 겉절이만 먹을 수도 없고, 케케묵은 묵은지만 먹을 수도 없다. 금방 겉절이를 집어올린 젓가락으로 또 새콤한 묵은지를 집어 올리기 마련이다.
무안 명자나무 꽃
무안 개불알꽃
무안 담장 벽화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