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지문 교수는 내게 메모를 해주었다.
“ 중앙일보에서 나온 책이예요. 하이틴 잡지였어요. 아마도 1993년에서 1994년 4․ 5․ 6 월인 듯해요. 또 다른 잡지로는 여성 동아 1980년대 초에 인터뷰 기사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해요.”
내가 작가 최명희의 글을 찾았으면 한다고 하자 해준 말이었다.
작년 12월이었다.
내가 서 교수를 안 것은 작가 최명희가 인연이었다.
작가의 글을 모아 만든 한 권의 책을 주자 서 교수는 고마워했다. 그 인연으로 서 교수는 내 노력이 고맙다고 했다.
서 교수와 작가와는 막역한 사이였다.
“ 최명희 씨가 내게 자기의 원고를 팩스로 보내온 것이 있어서 보내드릴게요.”
서교수는 둘둘 말려 오랜 세월 잠겨있던 작가 최명희가 보낸 원고교정지를 한쪽 씩 잘라내서 복사를 해서 한 벌은 내게 보내주었다.
1996년 2월9일 오전과 오후에 작가가 나누워서 보냈다.
이런 메모가 팩스 앞부분에 달려있다.
1996년 2 월 9일 금
지문씨, 안녕하세요?
어젯밤 (정확하게 오늘 새벽 3시 반) 교정본 원고를 FAX띄우고, 드디어 강연 건에 관해서는 일을 마쳤습니다. 그런데, 그쪽에 온 원고에 초교본 용지까지 한 번 보내볼게요. 그 작업의 '처참'을 함께 웃으며 함께 나누고 싶어서, 초교본 말고 재교본도 있는데(내가 FAX온 것을 다시 복사를 떴거든요. 여러 부를)그것은 생략하고. 밤새 글씨를 썼더니 비뜰 비뜰,기어갑니다. 그럼 이만
최명희
춥지만 명석한
겨울 날.
작가 최명희가 1995년 10월 31일 미국 스토니부룩 뉴욕주립대학한국학과 초청으로 대학에서 강의한 것과 스토니부록 한국학회와 미주지역 문인협회가 공동 주관하여 뉴욕에서 강연한 내용을 자신이 정리한 '나의 혼, 나의 문학'에 대한 메모이다.
나의 혼, 나의 문학은 이렇게 정리되어있다.
자신이 연설하였던 내용을 자필로 꼼꼼하게 썼던 원고 초안이 시작이고, 그 원고를 받아 출판사에서 워드 작업을 하고 초벌 판에 작가가 다시 교정을 본 교정쇄와 각 쪽마다 작가가 꼼꼼하게 작업지시를 달아놓은 노트였다.
노트는 이렇게 시작 된다.
최명희 원고 교정
P.02
1. 나의 혼 나의 문학 : '나' 사이에 ',、를 넣어주시고
2. 작가 이름 '최명희'는 본문보다 1호 쯤 활자를 키우면 어떨는지요?
그리고 '소설가'는 '최명희'옆으로 올려 〈 〉 속에 넣어보면 좋겠습니다. 등등 8쪽으로 이어진다.
글자 하나 토씨 하나 부호 하나 신경 쓰는 작가라는 말 그대로이다.
건둥건둥 글을 쓰는 나는 아예 질려버린다.
글을 버리듯이 쓰는 나와 생명을 담듯 쓰는 그와는 같을 리 없다.
서 교수의 말에 착안하여 나는 작가의 글을 찾아 헤맸다.
연도와 잡지를 찾아서 국립도서관에 가서 잡지의 복사 필름을 눈이 뻑뻑해질 정도로 돌려보았으나 찾아 낼 도리가 없다. 그 많은 세월 것을 다 돌려볼 수도 없고.
마이크로필름을 보는 것도 한계가 있다.
잡지사의 게시판에 글을 올려서 찾아볼까 협조를 구하기도 했다.
답답한 마음에 서 교수에게 작업 부진한 이유를 매일로 보내기도 했다.
서 교수가 답장을 보냈다.
“잡지사를 통해서 구해서 보낼게요.”
서 교수는 보내주었다.
내가 받은 지 한참이 된다.
나는 한동안 작가의 글을 그냥 봉투 속에 두었다.
작가의 글을 다시 워드로 찍거나 들여다 볼 때는 나도 어떤 감응이 있어야한다.
드디어 오늘 나는 작가의 글을 펼쳤다.
그리고 그의 글을 한 글자씩 조심스럽게 찍어 나간다.
허울과 애착을 다 벗은 조그만 씨앗이 되어…….
최명희
내 어린 날의 서랍 속에는 지금도 잊을 수 없는 갖가지 물건들이 가득 차 있었다. 무엇이나 쉽게 버리지 못하고 오래 간직하는 성격 때문이었으리라.
뒤안 마당 감나무 아래 앉아 소꼽 놀던 사금파리 꽃접시며, 깨진 조갑지를 곱게 갈아 흙밥도 담고 싱건지 국물도 떠 놓던 밥그릇, 국그릇,그리고 그 빛깔이 하도 선명하고 예뻐서 만지기조차 아깝던 색색갈 색종이들의 노랑․빨강․남색․초록․보라․주황. 설레이며 그 빛깔들을 접고 오려서 저고리․치마에 레이스 달린 원피스 입혀준 중이인형들. 쓰다가 더 못쓰게 된 몽당연필들과 닳아진 지우개, 귀퉁이가 꺾인 책받침, 낡은 필통. 서투르게 한 자 한 자 꼭꼭 눌러 쓴 국어 공책, 방학숙제 일기장과, 참 잘 썼어요, 라고 적힌 선생님의 붉은 잉크 날렵한 펜글씨. 우리들의 우정은 변치 말자, 아쉬운 국민학교 졸업을 앞두고 굳은 맹세를 나눈 친구의 쪽지 한 장. 그런 것들은 중학교에 진학을 하고서도 버려지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이제는 더욱더 늘어나게 된 갖가지 살림살이들 때문에 서랍이 비좁아 상자를 몇 개씩이나 더 가지게 되었으니.
막 배우기 시작한 십자수로 장미꽃 연분홍 진분홍 겹겹이 피우고, 홀치기로는 노란 꽃 꽃씨 박으며, 학년이 올라가 조선자수 정성어린 솜씨로 동백꽃 선홍색 꽃잎을 수놓던 「구정 불란서실」,명주실 푼사실․꼰사실, 물 고운 색실들과, 끊임없이 주고받던 여러 친구의 편지며, 두꺼워지는 일기, 이런 것도 나중에는 다 그리운 추억이 된다, 하면서 가지고 있던 손톱깎이 뚜껑에서 영숙이가 떼 주던 플라스틱 장식물. 그 속에는 그야말로 깎은 손톱만한 꽃송이 하나가 초록 이파리 달고 새빨갛게 박혀 있었다. 그 뿐이랴. 학교 화단에서 주운 공기돌과 수학여행 갔던 여수 바닷가의 흰 조개껍질을 꿰어 만든 목걸이, 그리고 처음으로 가지게 된 나만의 사진첩과 졸업 앨범. 손수건.
고등학교에 가서는 그 위에 더 많은 기록물과 책갈피의 나뭇잎, 상자로는 감당 못 할 편지들이 쌓이고, 밤을 새워 읽은 책들의 독후감이며 홀로 지은 소설들이 연습지조차 소중하게 보관되었다. 도화지를 사다가 노트 제본소까지 찾아가서 재단하여 구멍을 뚫고 스프링을 꿰어 만든 뒤, 앞앞이 번호를 매기고 제목까지 붙인 수첩 몇 십 권이 모두 다 떠오르는 생각과 보고 들은 것을 메모한 글로 빼곡히 들어차서, 상자나 서랍이 아니라 커다란 궤짝이 있어도 모자랄 지경이 되었지만, 수은이 벗겨진 거울, 어느 해 가을엔가 넣어 둔 탱자(그것은 용케도 상하지 않은 채 어쩌면 그렇게도 형체 그대로 향기까지 딱딱하게 말랐었는지), 미술시간에 그려서 만든 크리스마스카드도 그 옆구리에 보관 되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여학교의 선생이 되고, 그동안 이사를 몇 번씩 이나 다니면서도 그 사소한 물건들을 가장 소중한 나의 재산으로서, 언제나 새로운 모퉁이를 맨 먼저 차지하였고, 그것들이 놓인 자리로부터 방안은 정리되곤 하였으니, 나는 아마 이것들에 묻은 자신의 지문을 버릴 수 없어 그렇게 데불고 다닌 것이리라. 깊은 애착을 가지고 실용이나 환전의 가치라고는 눈곱만치도 없었으나.
내 마음이 닿지 않으면 이 세상의 온갖 사물이 나와는 무관하고, 내 마음이 기울면 티끌도 유정한 것인데.
어려서의 물건들이 그러할 때, 스무 살 넘어 오늘에 이르기까지 켜켜이 쌓이고 모여진 것들은 또 어떠할까. 더 말할 나위 없을 것이다.
수십만 갈래 보이지 않는 길들은 검푸른 물밑바닥으로만 숨어서 저희끼리 흘러가는 것 같고, 나는 위태로운 파도의 물마루 아슬아슬 밟으며, 저 흔들리는 물 아래 깊이 감추어진 내 생애의 길 한 가닥을 놓치지 않으려고, 더듬거리는 발자국마다 서투른 더듬이를 세웠던 젊은 날. 아무리 애를 써도 허전한 발은 길에 닿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자꾸만 아무 것도 잡히지 않는 수면위로 휘청이며 떠올랐으니, 꿈은 높아서 허공에 빛났지만, 그 꿈을 나뭇가지 싱싱한 두 팔로 끌어안아 꿈과 내가 한 몸의 둥치를 이루게 하기는 참으로 어려웠다. 그러니, 하물며 발아래 질기고 무성한 뿌리를 내리는 일에랴.
존재의 기둥을 세우지 못한 채, 가도 가도 막막하여 쉴만한 널빤지 한 장 붙들지 못하면서, 캄캄한 밤 어둠 속의 풍랑에 뒤집히기도 하고, 넘치는 해일에 떠밀리기도 하고, 온 몸이 울음에 빠져 시퍼렇게 멍들기도 하지만.
그러나, 그 불안하고, 외롭고, 아무 것도 이루지지 않은 수면위의 물살에 햇살은 또 얼마나 눈부시게 찬란한 유리구슬로 부서져 쏟아졌으며, 물비늘 영롱하게 일으켜 반짝였던가. 그리고 물살의 가슴 안쪽 갈피갈피 서려 둔 속 이야기를 둥그렇게 둥그렇게 주름지어 펼치면서 아득히 멀어지던 물무늬는 또 얼마나 많은 그리움으로 에에게 하였던가.
이러한 젊은 날의 방황과 아픔과 아름다움들이 남겨 놓은 물건들은 사람마다 다르리라. 만, 나에게는 읽어도 읽어도 다함이 없는 일기와, 편지와, 만년필과, 사진, 그때 입었던 옷가지들에 그 시간의 숨과 결이 눈물나게 배어있으니. 그것을 내 어찌 차마 버릴 수 있으리오.
그러다가 어느 날 자기 몫의 가구들이며 집이 생기고, 또 사는 데 필요한 못과 망치에서부터 텔레비전․냉장고․세탁기․이러저러한 가전제품, 그리고 밥통․ 밥솥․국자․냄비․주방 조리기구에 구두약․신발장․그릇 장식장․서랍장․장롱들이며 책장․책상들과 크고 작은 온갖 잡살뱅이 도구와 물건들이 이 구석과 저 귀퉁이에 앉고, 서고, 끼어들고, 겹치고, 쌓이고, 처박히고, 드디어 이제는 손도 못 대게 어수선한 아수라장이 되어 버려서.
하나씩 가져오거나 사들일 때는 꼭 필요한 것들이었으련만, 이제는 무엇이 어디에 들어있는지도 알 수 없고, 생각은 나지만 그 엄청난 북쑤세미 속을 뒤져 헤쳐 찾느니 차라리 다시 하나 사는 것이 나을 만큼 복잡한가 하면, 일껀 땀 흘리어 찾아내도 이미 쓰기 어려운 녹이 슬어 버린 것 또한 한 둘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책과 책 사이에, 찬장에, 수납장에, 책상 밑에, 그 무슨 옆구리 틈바구니에 그득그득 들이차서 숨도 못 쉬게 빼곡한 이 물건들은 다 무엇일까.
어쩌면, 내가 어디로 이사를 가서 모조리 한 줄로 늘어놓거나 한 겹으로 펼쳐 놓지 않는 한, 죽는 날까지 단 한번도 열어보거나 꺼내 쓸 일 없이 그냥 그 자리에 구겨 박힌 채 다만 삭아갈 뿐일는지도 모를 물건들. 시간의 흔적. 거기다가 끝내 버리지 못한 지난날의 옷들이며, 언젠가 쓰려고 버리지 않는 끈, 끈의 뭉치들.
깊고 얕은 서랍마다 채곡채곡 쟁여진 옷들은 이미 '입는'옷이 아니라 내 살아온 날들의 시간이 스며 그 기억을 '간직하고' 있는 것들이지만, 그저 쟁여두는 저 많은 옷들. 철 지난 것, 낡은 것, 그냥 둔 것,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
그 버리지 못한 옷들이 버리지 않은 끈에 옭히어 나의 머릿속 뇌수까지 덮어씌우며 칭칭 묶고 있는 것만 같아서, 나는 때때로 숨이 막히곤 한다.
그것이 어찌 꼭 '옷'에만 한하는 것이랴. 내가 아직까지 애착하여 버리지 못 하고 있으나 버려야한 하는 물건과 기억과 마음들. 이 모든 것들이 나를 무겁게 하고, 답답하게 누르고, 가장 요긴한 것조차도 분명히 저기 저곳에 있는 줄을 알건만 꺼내지 못 하게, 꽉 차서 가로막고 있는 것이 아닐까.
문득 두 벌 옷도 무겁고, 두 자루의 만년필, 두 권의 공책도 무겁게 느껴진다.
허지만 비록 단 한번의 옷에 단 한 개의 밥공기, 그리고 단 한 자루의 만년필과 단 한 권의 공책만 남기고, 내가 가진 도든 것을 다 버렸다 할지라도, 과연 그것들은 참으로 남겨도 좋고 간직해도 좋을 만큼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며, 나의 전존재를 알맹이로 응축시킨 진실일 것인가. 아니면 그것마저 그저 다만 허영이거나 부질없는 집착일 뿐일 것인가.
계절은 벌써 여름의 한복판에 입추를 세우고, 열대야로 잠 못 이루게 하던 무더위를 고비로, 이제 아침저녁 바람이 삽상한 가을, 9월에 이르렀다.
봄날에 여린 눈 연두로 싹 터서, 고운 꽃 피었다지고, 여름날에 가지마다 잎사귀 무성한 진초록 무너지게 우거져 그 어떤 폭우나 태풍에도 꼬투리 한 낱 떨어뜨리지 않았던 나무가, 그 애착의 잎사귀를 곱게 곱게 물들이어, 내 어린 날의 색색가지 색종이처럼 눈부시도록 샛노랗게, 불타는 주홍으로, 꽃보다 더 고운 선홍으로, 무르녹아 오히려 담담하게 투명해진 갈색으로, 호르르 호르르 가벼웁게 '버리는'계절에 이른 것이다.
나뭇잎들도, 그토록 생명을 다하여 매달렸던 가지를 미련 없이 '버리고'허공에 몸을 날려 땅위로 떨어진다. 마치 지난날의 여학교 수틀에 끊기던 오색 색실이 책갈피로 접히어 들듯이.
그리고 나무는 빈 몸 가지에 열매를 남긴다. 더불어 함께 지내오던 그 수천수만의 자랑스러운 잎사귀를 다 벗고 그 착(着)의 옷을 남김없이 다 벗어 버리고.
만일 나무가 그 향기롭고 어여삐 자지러지는 꽃들에 매혹되어 꽃잎을 끝끝내 붙들고있었거니, 짙푸른 잎사귀를 몹시도 아까워하며 버리지 못하고 가을에도 겨울에도 매달고 있다면, 무슨 조화로 탐스러운 열매를 저토록 맺을 수 있으랴.
그러나 이윽고 그 달고도 탐스러운 열매마저, 무겁다, 지상으로 떨어뜨려 오직 홀로 빈가지 빈 둥치로 나무가 남을 때, 과육의 껍질마저 깨버린 씨앗, 존재의 핵(核)이, 또 하나의 새로운 나무로 온전히 태어나게 될 것이니, 이 순간에 비로소 저 나무가 그곳에 서있었던 본디의 참뜻에 이르는 것이 아니겠는가. 모든 허울과 애착을 다 벗은 조그만 씨앗이 되어.
사람의 한 세상도 그러하랴.
저 자신의 근원인 한 톨 씨앗에 이르기 위하여 우리는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남기며, 무엇을 이루어야 할 것인가.
나는 이 가을에 저 오래 묵은 서랍들을 열어놓고, 고요히, 황홀하게 버리고 버려지는 저 나무들을 바라보고자 한다. 다만 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