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으하하하!---으흐흐흑! 하늘은 높고 청산은 푸르며 녹수는 끝
없이 이어지나 오늘도 이 못난 몸은 혼자이려니 대장부 슬프
다하여 봄날의 흥취를 그냥 보낼까?-- 세상살이 큰 꿈과 같
거니---"
세상살이 큰 꿈과 같거니
무엇하러 그 생(生)을 괴롭힐건가.
그러므로 하루종일 술에 취하여
기둥 앞에 쓰러져 누워 있노라
깨어나 뜰 앞을 내다보나니
어인 새 한 마리 꽃 속에서 울고 있다.
묻노라, 지금 무슨 철인가.
봄바람 꾀꼬리 울고 있네
이 말을 듣고 느낌이 많아
술을 앞에 두고 다시 따른다.
큰소리 노래하며 달을 기다리다가
가락 끝나자 이미 정(情)을 잊었다.
울다 웃고 낭랑히 노래부르다 술 한잔을 기울인다. 이미 취
하여 덜덜 떨리는 손으로 술통을 집어 들어 정신이 혼미하도
록 마시지만 가슴에 쌓인 슬픔이 꿈속의 일인 양 사라지지
않는다.
"사매!----사매!"
봄날의 정취가 완연한 산곡!
도화가 만발하여 끝없이 펼쳐지고 부드러운 바람에도 연분
홍 빛 복사꽃은 눈처럼 흩날리며 호접(胡蝶)이 날아들며 도
화향을 희롱했다.
바람에 흩날리는 도화가 회오리바람에 눈처럼 휘날리는 산
곡의 가운데로 개울물이 아직은 조금 차가운 냉기를 머금고
흐르고 있었다.
술통을 높이 들고 봉두난발(蓬頭亂髮)의 청년은 꿈꾸듯 중얼
거렸다.
"사---매! 사---매! 나는---나는--- "
꿈꾸듯 중얼거리며 청년은 일어나다 부지중에 잘못 딛은 듯
술통을 품에 안고 개울물에 쓸어졌다. 온갖 힘을 다하는 듯
느릿느릿 개울가로 기어 나온 청년은 정신이 돌아온 듯 머리
를 흔들더니 풀잎을 꺾어 들어 풀피리를 불었다.
생사교(生死橋)를 지나간 사별(死別)이라면
목놓아 천일(千日)을 울어 애겠다.
생사교를 지나간 사별이라면
쑥구렁(墓)에 그대와 같이 누어
한수(漢水 : 은하수)가를 거닐겠구나!
시내는 돌고 돌아 도화향은 항상 일고
송백(松柏)의 바람소리 골짜기마다
예전과 변함 없이 불어오건만
한번 떠난 님의 마음은 오지 않는다.
세상 길에 막힘이 많아
내 삶 또한 끝이 있지만
술병 들고 개울에 앉아
취중몽(醉中夢)에 눈물 지며 한숨짓는다.
청년은 불던 풀피리를 집어 던지며 또 다시 술통을 기울였
다. 비록 완연한 봄이지만 그래도 산곡의 냉기는 아직도 차
가운 듯 청년은 젖은 몸에 추위를 느끼는 듯 부르르 몸을 떨
며 연신 꿀꺽대며 술을 마셨다.
막 청년이 술통에 입을 때는데 돌연 청년을 비웃는 목소리
가 들려 왔다.
"이놈아! 아까운 술! 모두 옷이 먹는구나!"
창노한 음성과 함께 술통이 청년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허공
으로 떠오르며 도화림을 뚫고 천공에 우뚝 솟은 기암괴석 사
이로 날아갔다.
"아아! 이미 마음은 돌이 되고 육체는 쇠잔하여 심신이 황폐
한데 술 한잔도 이 못난 몸에 들어오기를 거절하는 구나!"
청년은 탄식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비틀거리며 도화림 속으
로 걸어 들다가 그만 나무에 부딪혀 나뒹굴었다.
"크으! 몇 년만의 술이더냐! 향취한번 좋구나!"
또 다시 창노한 음성이 들리며 청년의 귀를 파고들었다.
"이놈아! 그까짓 계집 때문에 상심하여 천하를 잃은 듯 비통
해 하느냐! 네놈의 그 꼬락서니를 보면 좋아할 놈들이 따로
있겠지!"
청년은 괴인의 목소리에 놀라 소리쳤다.
"다!--- 당신은 누구요! 어찌 나를 놀리시는 것입니까?"
청년이 부지중에 소리쳤으나 음성은 미약하여 입안에서 웅
얼거리듯 했다.
"크하하하! 이놈 보겠나! 이제는 말할 힘도 없구나! 네놈은 이
곳에 올 수 있겠느냐!"
괴인의 음성에 청년은 힘겹게 말했다.
"좋소! 좋아! 어차피 이 밤을 넘기지 못하고 죽어 나갈 몸! 혼
자 쓸쓸히 죽기보다 누군가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이 있다면
도솔천을 넘을 때 그래도 위안이 되겠지!"
청년은 비틀거리며 개울을 건너기 시작했다.
산곡의 개울인지라 폭이 불과 일장도 되지 않는데 청년은 매
우 힘겹게 개울을 건너 괴인의 음성이 들려 오는 기암괴석
앞에 이르렀다. 그러나 어디에도 괴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
다.
"아아! 이 사람은 이미 떠난 모양이구나! 무형비련사에 근골
이 제압되어 이곳에 오기까지 시간이 걸려 기다리다 가버린
게지!"
청년은 거친 숨을 몰아 쉬며 바위에 앉아 중얼거리다 자신
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청년의 양 손목은 햇빛이 반짝거리
며 옅은 빛이 일렁이었다.
"아아! 무형비린사(無形 鱗絲)가 양 손목과 두발 비파골을
꿰뚫고 있으니 어찌 이 몸으로 사매를 볼 수 있으랴!"
청년은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돌연 바위를 향하여 머리를
부딪혀 갔다. 청년이 바위에 몸을 부딪혀 가는데 공후( )
소리가 울렸다.
팅! 티딩!
청년은 공후소리가 들려오자 행동를 멈추고 소리가 들리는
곳을 바라보았다. 공후소리는 마치 선계에서 울려오듯 아름
다웠다.
"아아! 죽기 전에 이처럼 아름다운 공후소리를 들을 수 있을
줄이야!"
공후에서 울려나는 음률은 아름다워 청년은 심신이 가벼워
지는 것을 느꼈다. 아름다운 공후의 선율이 점점 가까이 다
가오더니 도화가 난무하는 도화림 사이로 섬세한 인형이 나
타났다. 공후를 가슴에 안고 튕기며 다가오는 인형은 도화
를 희롱하며 춤을 추는 선녀인양 아름다웠다. 청년의 곁으
로 다가온 공후을 든 여인은 아름다운 목소리로 청년을 향하
여 물었다.
"그대는 어찌 헛되이 목숨을 버리려 하지요."
청년은 그제서야 공후를 튕긴 여인의 얼굴에 면사를 쓰고 있
는 것을 볼 수 가 있었다.
"아아! 정말 아름답구려! 그런데 공후음은 마치 신교의 금강
음(金剛音)인 듯하군요!"
청년의 말에 공후가인( 佳人)은 오히려 청년에게 말했다.
"호호호! 나는 그대를 알아 볼 수 있겠어요! 그대가 영주선문
(靈主仙派)의 천협인검(天俠仁劍) 탁문경(卓文慶)이라는 걸--
-"
청년은 여인의 말에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소저께서 저를 알아보니 소생 몸 둘 바를 모르겠군요! 오늘
소생은 이승의 연이 다하여 죽으려 하는데 소저의 금강음을
들을 수 있어 그래도 이승의 복이 있었던 듯합니다."
청년 탁문경의 말에 공후면사녀는 크게 놀라 말했다.
"그럼! 사매와의 불미스런--- 아! 불화로 사문으로부터 무형비
린사의 금제를 당하여 폐인이 되었다는 것이 사실인 모양이
군요?"
공후면사녀는 자신의 실수를 느낀 듯 탁문경의 손목을 바라
보며 말했다.
"아아! 참으로 악독한지고-- 자신의 대제자를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 만들다니---"
공후면사녀는 천협인검 탁문경의 손목을 바라보며 탄식을
터트렸다. 탁문경의 양 손목에 어리는 옅은 기운이 무형비린
사가 뿜어내는 것을 알아 본 것이다
"소저께서는 본 선문의 일을 가지고 더 이상 말하지 마시구
려! 모두 어리석은 이 몸의 실책이니 죽어서도 사문장백들
을 뵙기가 부끄러울 뿐이오."
탁문경의 말에 공후면사녀의 두 눈에 이채가 발하였다.
"그대는 정말 광오한 사람이군요! 누가 그대의 억울함을 모
르겠어요. 그대가 사문의 명성에 먹칠할 것을 두려워하여 스
스로 자진한다 하여도 억울함이 벗겨지는 것이 아니에요."
공후면사녀의 말에 탁문경이 벌컥 화를 냈다.
"그대는 어찌 우리사문을 욕하는 것이오. 모두가 이 못난 몸
의 잘못일 뿐이오. 그대는 더 이상 그 일을 거론하여 나를 어
렵게 만들지 말기 바라오."
말을 하다 탁문경은 피를 토하며 혼절했다. 분노에 심기가
진탕되자 그만 약한 몸에 기혈이 들끌어 혼절한 것이다.
"아아! 이 사람은 보기 드문 의인이로구나! 인연이 있다면 또
다시 보겠지. 나에게 지금 천무비(天武匕)가 없어 이 사람의
무형비린사를 잘라 줄 수 없는 것이 아쉽구나!"
공후면사녀는 탄식을 터트리며 품안으로부터 단약을 꺼내
들었다. 공후면사녀가 단약을 꺼내들자 정신을 쇄락하게 하
는 청량한 향기가 진동했다. 공후면사녀는 단약을 탁문경의
입안에 밀어 넣더니 나직한 탄식을 터트리며 도화 속으로 사
라지며 공후를 튕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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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울가의 도화는 천년만년 피고 지고
흐르는 시냇물은 그 끝이 없어라.
청량한 개울소리 귀에 기쁘고
도화향 그윽하여 춘몽 속에 잠든다.
인생의 영화는 굴곡 속에 다함이 없고
아름다운 관은 청춘의 꿈속에 빛이 나는데
스스로 머리를 밀고
명애에 쫓겨 몸을 헤하는가!
인세에 오고감은 한갖 꿈인 것을
천지의 오묘한 조화는 그 끝이 없으니
본래 어리석은 이내몸은 보잘 것 없지만
다만 그대의 뒷일이 가련타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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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후면사녀의 옥음이 공후음률에 섞이어 아득히 들려 오는
것을 들으며 탁문경은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이놈아! 그만 자고 일어나거라!'
창노한 음성을 들으며 탁문경은 잠에서 깨어났다. 코끝에
단향냄새가 물씬 느껴지고 입안은 향기로와 정신이 맑았다.
무형비린사로 폐인이 된 이후 이보다 더한 편안함을 느낀 적
이 없었다. 어디선가 공후소리와 공후면사녀의 옥음에서 흘
러나오는 노래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이리생각하자 공후면
사녀의 섬연한 자태가 눈앞에 어리는 것이다.
"끌끌끌! 어리석은 놈! 한 계집도 잊지 못하여 몸을 헤치면서
도 그 까짓 신교의 요망한 계집에게 마음을 빼앗기다니---"
탁문경은 또 다시 들려 오는 괴인의 음성에 벌컥 화를 냈다.
"그대는 더 이상 나를 괴롭히지 마시오! 이미 그대는 나의
술 한 통을 가져 가버려 나는 저승주 한잔 먹지 못하게 생겼
오이다."
탁문경이 외치자 갑자기 어딘선가 썩은 입 냄새가 풍기면서
홀홀 거리는 음성이 들려 왔다.
"홀홀홀! 어느 놈이 저승주를 마시겠다는 것이냐! 이 걸귀가
살아서 저승주를 마신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다."
탁문경이 바라보니 건너편에 언제 나타났는지 거지가 개울
가에 발을 담구고 호루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런데 주향에
섞이어 풍겨오는 거지의 썩은 입 냄새가 너무 독하여 머리
가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홀홀홀! 이놈아 새파란 젊은 놈이 저승주를 마시겠다니--- 옳
커니 안주감이 없으니 네놈이 죽으면 다리를 뜯어 안주로 삼
으면 적격이겠구나!"
탁문경은 거지의 말에 피식 웃으며 말했다.
"어이! 거지 양반! 죽으면 썩어 문드러질 육신인데 안주감으
로 이 육신을 보시한다하여도 아까울게 무어겠오. 부디 죽으
면 내 몸을 안주 삼아 술잔을 기울이구려! 그런데 지금 나는
매우 목이 타니 술 한잔 얻어먹어야 겠오."
탁문경은 말을 하며 한참 시간을 들여 걸어 온 길을 뒤돌아
가며 힘들게 개울을 건너 거지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가까
이 다가가니 의외로 거지는 너무 늙어 이마의 주름살이 눈
썹 아래까지 덮고 있었고 백염인 듯한 수염 주변에 온갖 이
물이 너덕너덕 붙어 있어 구역질이 절로 치밀었다.
"어허! 거지양반이 아니라 거지할아버지시오! 나는 지금 술
을 마시지 않아 무척 목이 마릅니다. 한 모금만 마시게 하
면 내 죽어 할아버지의 안주가 되겠으니 딱 한 모금만 마시
게 해주시겠습니까?"
"홀홀홀! 그놈 제법 줏대가 있구나! 그래 네놈의 육신이 몇 푼
치의 값이 나간다고 나의 이 귀중한 술을 준단 말이더냐!"
탁문경은 노개가 자신의 제안을 거절하자 난감해 하며 말했
다.
"거지할아버지! 분명 제가 힘들게 이곳에 오기 전에 내 몸을
안주로 삼는다하였습니다. 그런데 안주란 술에 재워 요리해
야 제 맛이 나는 법입니다. 나는 일찍이 여러 안주로 술을 먹
어 보았으나 그래도 역시 술에 재워 요리한 안주가 최고였습
니다. 그러니 먼저 저에게 술을 주시면 내 스스로 안주가 되
어 술에 재우게 되는 것이니 저를 구워 잡수신다면 더욱 맛
좋은 안주를 드실 수 있을 것입니다."
"홀홀! 듣고 보니 그 말도 그럴 듯 하구나! 네놈의 입심에 졌
다. 자! 이 술을 마셔 보거라!"
노개는 말과 함께 호로를 던졌다. 탁문경은 노개가 호로를
던지자 받아 들다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그만 개울 속으로
나 뒹굴었다.
"으흐! 웬 호로가 이리 무거워!"
개울 속에서 일어나며 탁문경은 호로를 들어 올리려 했으나
너무 무거워 들어 올릴 수가 없었다.
"홀홀홀! 그래 그래 잘한다! 술에 재워지기 전에 먼저 깨끗이
씻어 이 노개의 수고로움을 덜어 주겠다니 그래도 그놈 어른
을 공경할 줄 아는 구나!"
노개가 홀홀대며 비웃자 탁문경은 오기가 솟았다.
"이 못된 늙은 거지야! 그래도 나는 연장자인지라 애써 공경
하는데 골탕을 먹이다니---이러고도 공경을 받기 바란다면
삼대가 기름 지옥에서 튀겨질 것이다."
"피죽 한 그릇 들 힘도 없는 놈이 입심은 좋구나! 이놈아! 거
지주제에 마누라가 있겠느냐! 자식이 있겠느냐! 그런데 어찌
삼대에 걸친 홍복을 바라겠느냐! 차라리 기름 지옥에 네놈
을 튀겨 안주로 삼는 것이 삼대의 후손을 보는 것보다 이롭
겠다. 못 마시겠거든 어서 호로를 던져라!"
노개의 말에 탁문경은 실소하며 말했다.
"내가 이 호로를 들 수 있다면 이미 호로 속의 술은 한 방울
도 남아 있지 않았을 것이오! 이 빌어먹을 호로가 너무 무거
워 들 수가 없으니 노개께서 가져가시오."
탁문경의 말에 노개가 가가대소를 터트렸다.
"요놈아! 네놈이 저 호로 속의 술을 전부 마셔 버릴 수 있다
고---- 홀홀홀! 나는 평생 동안 저 호로 속의 술을 마셨어도
다 마시지 못했다. 네놈이 무슨 재주로 저 술을 다 마실 수
있단 말이더냐!"
탁문경은 노개의 말에 깜짝 놀라며 말했다.
"이 호로가 화수분이라도 된단 말이오! 어찌 겨우 한 되박 담
을 수 있는 호로의 술을 다 마실 수 없단 말입니까?"
"그래! 좋다! 좋아! 네놈이 저 호로 속의 술을 다 마실 수 있다
면 나는 너에게 내가 원하는 무공 한 가지를 가르쳐 주마! 그
러나 네놈이 저 술을 다 마실 수 없다면 네놈의 피를 모조리
빼 저 호로 속에 담아야 한다."
탁문경은 노개의 말에 부르르 몸을 떨다 크게 소리쳤다. 의
외로 탁문경의 음성은 매우 커 조용한 도화림을 흔들었다.
"다-- 당신은 혈주노개(血酒老 )!"
"홀홀홀! 네놈이 이 어른을 알아보는 구나! 그래! 내가 혈주노
개이니라! 내 놈은 어찌 할 것인가 빨리 결정하라!"
혈주노개의 말에 탁문경은 호기롭게 말했다.
"이미 내가 자청하여 안주가 되겠다고 했거늘 피가 무엇이
아깝겠오! 나의 피는 그대의 혈주가 되고 몸은 안주가 되니
죽어서도 나의 육신은 이승을 떠나지 못할 듯 합니다."
탁문경의 혈주노개에 이끌려 개울로부터 끌어 올려져 마주
앉았다. 혈주노개는 홀홀거리며 말했다.
"나는 세상의 모든 것을 공짜로 얻어 사용한다만 남의 피만
은 공짜로 얻어 쓸 수는 없지! 너와 나의 내기는 정당한 것이
므로 내가 네놈의 피를 모조리 빨아 버린다해도 원망하거나
후회하지 않는다고 천지신명에게 약속하거라!"
이 혈주노개는 기묘한 습관이 있었다. 호로에 피를 채워 숙
성시켜 이를 마시는데 호로에 피를 담을 때마다 상호간에 무
공과 피를 담보로 내기를 하는 기행을 벌였다.
이 내기는 매우 괴이하여 혈주노개의 강요에 의하여 벌어지
는 것이 아니라 혈주노개로부터 무공을 얻으려는 자들이 자
청하기 때문이어서 이러한 기행으로 지탄을 받는 일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그에게 무공을 전수 받았다는 사람은 아무
도 없었다.
"나 탁문경은 혈주노개와의 내기에서 진다하여 그를 원망하
거나 주위의 인물들이 나를 대신하여 복수하는 일이 없을 것
을 천지 신명에게 맹세합니다."
"홀홀홀! 좋아! 좋아! 이놈아 입을 벌려라!"
혈주노개가 혈호로를 흔들자 주향이 진하게 진동하며 붉은
액체가 호로로부터 뿜어 나와 탁문경의 입안으로 흘러들었
다.
탁문경은 입안으로 술이 날아들자 입을 벌리고 연신 꿀꺽대
며 마셔댔다. 호로에서 뿜어 나오는 술은 향기가 매우 좋았
고 달콤하였으나 비릿한 쓴맛이 미진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탁문경은 술을 마실수록 오히려 정신이 맑아 왔다.
'톡톡 쏘는 것이 술이 분명하건만 어찌 마실수록 정신이 맑
아지지----'
탁문경은 돌연 비통하게 울부짖는 혈주노개의 목소리를 들
었다.
"헐헐헐! 이놈이 어떻게 생긴 놈이냐! 나의 혈주를 단숨에 반
호로를 먹어 치우고도 갈수록 정신이 맑아지는 듯하니---"
혈주노개는 돌연 탁문경의 입안에 부어 넣던 호로를 치우며
말했다.
"이놈아 너는 어떤 사술로 나의 귀중한 술을 허비하게 만든
것이냐?"
혈주노개의 말에 탁문경은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노개께서는 호로에 들어 있는 술로 내기를 하였는데 어찌
도중에 내기를 그만 두시는 것이지요. 나는 죽든 살던 호로
속의 술을 다 마셔야 겠습니다."
탁장경의 말에 혈주노개는 손을 저으며 말했다.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두 모금 이상 한번에 이 술을 마신 자
가 없었다. 몰론 나도 하루에 한 모금을 수도 없이 나누어서
마신다. 이 술은 너무 독하여 두 모금 이상 한번에 마셨다가
는 최 절정 고수도 심장이 타들어 죽어 가는데 네놈은 물경
반 호로를 마시고도 끄덕 없으니 나는 이 내기에서 진 것을
인정하마! 네놈이 원하는 무공을 말하거라!'
혈주노개의 말에 탁문경은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이미 사문이 있는 몸인데 어찌 타 선문(仙派)의 무공을 얻으
려 하겠습니까! 나는 단지 지금 술을 마시고 싶을 뿐이니 어
서 술이나 내놓으세요!"
탁문경의 말에 혈주노개의 안면이 일그러졌다.
"이놈아 내가졌다는데 무슨 잔말이 그리 많으냐! 네놈이 무
공을 배우지 않겠다면 나는 그만 가보련다."
혈주노개의 말에 탁문경은 냉소하며 말했다.
"으하하하! 좋아요! 가시려면 마음대로 가시구려! 나는 이일
을 크게 소문을 내어 천하의 기인인 혈주노개가 어린 후배에
게 패하여 꼬리를 감추고 도망갔다 소문을 내고 말 것입니
다."
막 자리를 뜨려던 혈주노개는 탁장경의 말에 주춤하더니 호
로를 팽개치며 말했다.
"좋다! 이놈아! 한 시진 이내에 다시 올테니 내 놈이 호로의
술을 다 마시던 말던 하여라!"
혈주노개는 화가 난 듯 호로를 팽개치며 휭하니 사라져 버렸
다.
"하하하! 노신선이 화가 머리끝까지 난 모양이구나! 애지중지
하던 호로를 팽개치고 사라지다니---"
탁문경은 혈주노개에 대하여 본적은 없었지만 잘 알고 있었
다.
혈주노개는 바람과 구름을 벗삼아 천하를 주유하는 기인이
사로 전 전대 고인이었다. 혈주노개는 금화수분로(金花水盆
爐)라 불리는 호로에 피로써 술을 담아 마시는데 그 맛이 신
이하여 명주 중에 명주로 알려져 있었으나 너무 독하여 반
모금 이상 마실 수 없다고 알려져 있었다.
탁장경은 팽개쳐진 호로가 무거워 들어 올릴 수 없자 갈대
를 꺽어 빨대를 만들더니 호로 속에 집어넣어 빨아댔다.
이때 또 다시 창노한 음성이 들려 왔다.
"이놈아! 그 맛있는 술을 혼자 다 쳐 먹을 것이더냐!"
탁문경이 갈대에 입을 떼며 말했다.
"하하하! 쥐새끼처럼 숨어 있으니 내 어찌 술을 대접할 수 있
단 말입니까? 이미 이 호로에는 한 방울의 술도 남아있지 않
습니다."
"뭐라고! 이놈! 혼자 그 독한 금화수분로주를 다 마셔 버렸단
말이냐!"
창노한 음성이 다급히 들리며 탁문경의 신형과 호로가 허공
중에 떠오르며 음성이 들려왔던 기암괴석으로 쏜살 같이 끌
려갔다.
'어허! 이 기인의 무위가 가히 신의 경지에 이르렀구나! 마치
솜털 만지 듯 섭물신공으로 저 무거운 호로와 나를 끌어들인
다니---'
이때 뒤쪽으로부터 혈주노개의 외침이 들려 왔다.
"이놈! 어디를 도망가는 것이냐! 내 호로를 남겨 놓아라!"
말과 함께 가공할 잠력이 몰아치며 탁장경의 등판을 후려갈
겼다.
퍽!
둔탁한 소음이 일며 탁장경은 울컥 선혈을 뱉아 냈다.
"이!--- 이놈이 갑자기 어디로 사라졌지?"
혈주노개는 급히 탁장경의 뒤를 쫓아 날아 왔으나 기암괴석
앞에서 탁장경의 신형이 갑자기 사라져 버리자 크게 놀라 당
황했다.
'이놈의 피가 여기에 떨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분명 이곳에
있을 터인데 어찌 찾을 수 없단 말인가?----'
혈주노개는 도저히 알 수 없었다. 분명 이 암벽 앞에서 탁문
경의 신형이 사라졌건만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시내물 흐
르는 소리와 바람에 풀잎 스치는 소리 속에 이따금 들려오
는 산새의 울음소리만 들렸다.
탁문경은 혈주노개의 장력에 등판을 가격 당하자 눈이 핑핑
돌며 울컥 입안에서 피가 솟았다. 혈주노개가 전력으로 가격
했다면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것이라 생각하니 오히
려 혈주노개에 얄미운 생각이 들었다.
'내가 세상에 무슨 낙이 있단 말인가? 이왕이면 그 한 수로
나의 목숨을 거두어 갈 일이지!'
탁문경은 정신이 아찔한 가운데에서도 혈주노개가 얄미운
생각이 들었다. 혈주노개의 장력에 격타되어 더욱 빠르게 앞
으로 날아가던 탁문경은 기암괴석을 들어 받자 다급히 나직
한 비명을 질렀다.
"어!---악!"
순간 탁문경은 텅 빈 공간 속에 자신이 떨어져 내리는 것은
느끼고 실소했다.
"죽겠다고 한 내가 바위에 부딪히려하자 비명을 지르다니---
아! ---사매가 나의 이런 멍청한 모습을 보았다면 크게 비웃
었을 것이다. 바보같이 비명을 지르다니!----"
바위에 부딪히려하자 무심코 비명을 지른 자신의 모습을 생
각하니 우스운 생각이 절로 들었다. 바닥에 떨어져 일어나
살펴보니 희미한 빛이 뿌리는 동굴이었다.
'공력을 상실하지 않았다면 환희 볼 수 있었을 턴데 겨우 손
끝밖에 보이지 않는구나!'
탁문경이 중얼거리는데 또 다시 괴인의 음성이 들려 왔다.
"이놈아! 그 못된 거지 놈은 이미 가버렸으니 이곳으로 들어
오거라!"
괴인의 음성이 들려오자 탁문경은 천천히 일어나 목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나아가며 말했다.
"하하하! 거지영감이 가든 가지 않던 그것이 어쨌다는 것입
니까? 당신은 그 늙은 거지가 매우 두려운 모양입니다?"
탁문경의 말에 괴인이 가가대소하며 말했다.
"이놈아! 내가 혈주노개 따위를 두려워한다면 강호의 동도들
이 모두 나를 비웃을 것이다."
탁문경은 괴인의 말에 크게 놀라 말했다.
"혈주노개는 지난 오십년 동안 강호를 종횡무진한 기인이사
로 그 누가 그의 무공을 얕볼 수 있단 말입니까? 당신이 신
교의 교주인 불사성제(不死聖啼)라도 된단 말입니까?"
탁장경의 말에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안았다. 탁장경은 입가
에 흘린 피를 닦아내며 앞으로 나아가니 거대한 암벽이 앞
을 가로막고 있었다.
"음! 도대체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구나! 목소리는 이
암벽의 뒤에서 들린 것 같은데----"
탁문경이 중얼거리는데 또 다시 창노한 괴인의 음성이 들려
왔다.
"이놈아 너는 어째서 거지놈이 신교의 불사성제를 두려워한
다고 생각하느냐!"
"하하하! 당금 강호에서 누가 신교의 교주인 불사성제를 두
려워하지 않는단 말입니까? 불사성제의 천환자단선무신공
(天桓紫壇仙武神功)은 이미 천인의 경지에 올라 그를 대적
할 자가 없다 하였습니다. 혈주노개가 아무리 뛰어나다하여
도 강호의 일류고수일 뿐이니 어찌 불사성제의 적수가 될
수 있겠습니까?"
"프하하하! 이놈아 그렇다면 영주선문의 장문인인 네놈의 사
부 가군선인(嘉君仙人) 위종향(魏種享)은 거지놈이 두려워하
지 않는단 말이더냐?"
"어찌 선배께서는 본인의 사문을 희롱하러 들려 하시오! 비
록 혈주노개의 무공이 높다하나 어찌 저의 사부님과 비교할
수 있단 말입니까!"
"프하하하! 어리석은 놈! 네놈은 아직도 사문을 생각하는 모
양인데 어떤 사부가 대제자의 몸에 무형비린사를 채워 무공
을 패쇄 시킨단 말이더냐! 위종향! 그놈은 계략이 깊고 사악
하니 이익을 위하여 제자하나쯤 버리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
겠지!"
탁문경은 괴인의 말에 크게 화가 나 소리를 질렀다.
"닥치시오! 이 모든 것은 나의 불찰로 일어난 것이지 사부와
는 관계가 없는 일이오! 나는 삼년동안 근신하라는 징계를
받았을 뿐이오. 당신이 계속 나의 사문을 욕한다면 더 이상
말하지 않겠오!"
탁문경의 말에 괴인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탁문경이
괴인의 음성이 흘러나오는 암벽을 바라보다 돌연 기이함을
느껴 말했다.
"그런데 당신은 어찌 이곳에 있단 말입니까? 분명 이곳은 우
리 영주선문의 관할로 본문의 제자들에게도 출입금지 지역
인데----"
탁문경이 갸웃뚱하며 말하자 괴인의 껄껄거리며 웃는 소리
가 들렸다. 그러나 음성에는 가득한 슬픔이 베어 있었다.
"크허허허! 그놈이 그일 이후로 이곳을 폐쇄한 모양이구나!
아아! 이 아름다운 도화림은 우리 영주선문의 비지로서 천하
의 절경지이건만--- 내 죽어서 어찌 사문장백들을 뵐 수 있
단 말인가!--- 아이야! 이리 들어와라!"
괴인의 말소리가 들리며 암벽이 드르륵거리며 열렸다.
탁문경은 열리는 문 사이로 안의 정경을 볼 수가 있었다. 천
정으로부터 밝은 햇빛이 쏟아져 들어와 방금 전의 어둠과 달
리 밝은 기운이 넘쳤다. 전면에 괴인이 앉아 있는 좌대가 있
었으며 빼앗아 간 술통이 놓여 있었다. 괴인은 백발이 전신
을 덮고 있어 그 형체를 알아 볼 수 없었으나 안광에서 형형
한 빛이 뿜어나고 있어 섬뜩한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저는 이 도화림을 수 차례 왔었으나 이와 같은 곳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습니다. 선배께서는 뉘신데 어떻게 이곳에 계
십니까?"
탁문경의 말에 괴인은 조용히 눈을 감으며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네놈이 아주 어렸을 때부터 지켜보았지!"
이 말에 탁문경은 깜짝 놀라 물었다.
"제가 어렸을 때부터요?"
탁문경이 의아한 듯 말하자 괴인이 웃으며 누군가의 음성을
흉내냈다.
"안돼! 대사형! 까치가 파먹은 복숭아가 제일 맛있는 복숭아
라 했단 말이야! 저 꼭대기에서 까치가 날아갔으니 저 곳에
있는 복숭아가 제일 맛있을 것이야! 저 꼭대기의 봉숭아를
따 달란 말이야!"
괴인의 음성을 마치 어린 소녀의 앙증맞은 음성처럼 날카롭
게 동굴을 울렸다.
탁문경은 괴인의 음성에 쓰라린 마음에 일어 자기도 모르게
비통한 눈물을 흘렸다.
이미 몇 년 전의 일이었다. 탁문경은 사매인 위월군(魏月君)
과 함께 몰래 이곳에 놀러와 복숭아를 따주려다 나무에 떨어
져 다리가 부러진 적이 있었다. 이때 사부로부터 크게 혼났
고 위월군은 탁문경이 자리에서 일어나기까지 온갖 정성을
다했었다. 그런데 이 괴인은 이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아아! 사매!----"
탁문경은 당시의 사매의 다정다감한 모습이 마치 눈앞에 어
른거리 듯하여 처연한 심정에 눈물이 줄줄 흘렀다.
"이놈아! 우리 영주선문에서는 너 같이 마음 약한 놈이 없었
다. 어찌 여인과의 정에 메여 눈물을 흘리면서 장부라 할 수
있단 말이더냐!"
괴인의 말에 탁문경은 눈물을 씻어내며 말했다.
"나는--- 나는--- 죽어도 사매를 잊을 수가 없어요! 그런데 ---
그녀가--- 그녀가-- 몇 일 후면 ---혼례를 올리나---- 그런데---
나는--- 나는-- 아무런 일을 할 수가 없어!---"
탁문경이 넋이 나간 듯 중얼거리자 괴인이 가가대소하며 말
했다.
"하하하! 이놈아! 네놈이 이곳에서 눈물을 흘린다하여 변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죽으려는 놈이 죽기 전에 목숨을 걸고
계집을 빼았을 생각은 않고 홀로 슬퍼하며 죽는다하여 변할
게 무엇이더냐?"
괴인의 말에 탁문경은 넋이 나간 듯 말했다.
"나는!----나는! ---이미 무형비린사로 인하여 무공이 전폐되
어 칼 한자루 들 힘이 없는데 어떻게---어떻게----나는----아
무 일도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으니----크흐흑!---" 탁문경
은 괴인의 말에 또 다시 슬픔이 솟아올라 오열을 터트렸다.
괴인은 탁문경의 눈물을 보더니 슬그머니 고개를 돌리며 말
했다.
"이놈아! 너는 내가 왜 영주선문의 금지인 이곳에 있는지 궁
금하지도 않느냐!"
괴인의 돌연한 말에 탁문경은 그제서야 정신이 돌아와 매우
이상하다 생각이 들었다.
'이 사람은 누구이길래! 이곳에 있을까? 더욱이 나와 사매의
일도 잘 아는 듯 한데----아아! 이제 와서 괴인의 일을 안다하
여 나에게 무슨 필요가 있단 말인가!'
이미 무형비린사에 의하여 공력은 전폐되고 혈주노개의 금
화수분로주를 마신지라 오래 살수 없다는 생각이 절로 들고
사매를 떠나 보내야 된다는 슬픔에 생에 대한 의욕을 잃은지
라 괴인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괴인은 탁문경이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며 탄식을 터트렸다.
"매우 나약한 놈이로구나! 나는 일년 전 네놈이 처음으로 배
운 천파뇌정식(天波雷精式)을 한 번 보고 단번에 펼치는 것
을 보며 놀란 적이 있었다."
탁문경은 괴인의 말에 깜짝 놀랐다.
천파뇌정식은 자신의 사모인 도화선자(桃花仙子) 주문봉(朱
紋鳳)의 독문절기로 사매로부터 이곳에서 배운 적이 있었
다. 도화선자의 무공은 매우 아름다워 마치 복사꽃이 휘날리
는 듯하여 도화선자라 불리게 되었으나 그녀의 절기 중 가
장 패도적인 위력을 가진 것 중의 하나가 천파뇌정식이었
다. 탁문경은 사매인 위월군과 이곳에 놀러왔다 위월군이 펼
치는 천파뇌정식을 보고 단번에 이를 펼치며 위월군이 전개
한 초식의 허실을 밝힌 적이 있었다. 이 괴인은 이일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탁문경은 괴인의 말에 깜짝 놀라 말했다.
"나는 결코 사모의 무공을 배우려 한 것이 아니라 사매와 같
이 서로의 허실을 밝혀 단점을 보안하려 한 것이니 제가 사
모의 무공을 배우려 한 것이 아님을 알아 주셔야 합니다."
"하하하! 영주선문의 대제자가 사모의 무공을 안다하여 욕
할 사람이 있단 말이더냐! 나는 네놈이 그와 같은 제주를 지
니고 있으면서도 스스로 정에 메여 앞길을 망치는 것에 대하
여 말하는 것뿐이다."
괴인은 탁문경의 나약함을 꾸짖으며 계속 말했다.
"너는 혈주노개의 금화수분로주를 마시고도 죽지 않은 것이
무엇 때문인지 아느냐? 금화수분로주는 혈주노개도 수십년
을 마셨어도 하루에 한모금 이상 마시지 못한다. 그런데 너
는 어떻게 살아 있을 수 있을까?"
괴인의 말에 탁문경은 그 일이 매우 이상하다 생각했다. 그
러나 탁문경은 가슴에 슬픔이 가득하여 괴인의 술 이야기에
그러한 의문보다 오히려 술 생각이 더욱 간절해 졌다.
"어째서 그런지 알 수 없으나 나는 지금도 정신이 말짱합니
다. 그래도 술에 취해 있으면 조금이라도 슬픔을 잊을 수 있
는데----이제---한 방울의 술도 없으니 더욱 슬퍼질 뿐입니
다."
탁문경은 호로로부터 주향이 풍겨나오자 크게 기뻐하며 다
가갔다. 호로로부터 주향에 섞이어 달콤한 내음이 뿜어 나
고 있었다.
"허허! 이 호로의 술은 어째서 혈주노개가 준 술보다 더 향기
로울까!"
괴인의 말에 탁문경은 기뻐하며 침을 삼키며 다가가 호로를
들으려 했으나 무거워서 도저히 들 수가 없었다.
"아아! 술병하나 들 수 없으니--- 나의 이 깊은 시름을 달래줄
것이 천지간의 어디에도 없구나!"
탁문경이 탄식을 터트리자 괴인이 말을 했다.
"정말로 한심한 놈이로구나! 영웅은 진흙 속에서도 창천에
비웅할 꿈을 꾸고 가인은 월하에서도 님을 위하여 몸단장을
하건만 네놈은 여전히 정에 메어 스스로 몸을 헤치는 짓만
자초하니 어찌 사내로써 천지간에 유아독존할 수 있겠느냐!"
괴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호로에서 주향이 심하게 풍겨나
며 탁문경의 입안으로 술이 날아들었다.
탁문경은 연신 꿀꺽대며 술을 마시다 입안에 호로의 술이 사
라지자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네놈은 아직도 술이 부족한 모양이구나! 나는 내가 마실 술
을 너에게 주었는데 네놈은 죽기 전에 나에게 무엇을 주겠느
냐?"
괴인의 말에 탁문경은 돌연 박수를 치며 좋아했다.
"하하하! 나는 술을 끝없이 마실 수 있는 방법이 생각났습니
다. 선배께서는 제가 술을 마시다 죽거던 남은 술을 드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말을 하며 탁문경은 돌연 손의 동맥을
물어뜯었다. 동맥에서 피가 흘러나오자 호로에 손을 올려놓
으며 탁문경은 가가대소하며 말했다.
"하하하! 이 호로에 피가 들어가면 술이 되어 나오니 나는 내
피로써 슬을 만들어 스스로 저승주를 마실까 합니다."
탁문경의 말에 괴인의 백염들이 물결치듯 흔들렸다. 이로 보
아 괴인은 크게 격동하는 듯 했다.
탁문경은 호로에 피가 가득차며 달콤한 주향이 풍기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음 ! 어째서 이 호로의 안의 술이 방금 전보다 더욱 달콤한
냄새를 풍길까!'
탁문경은 기이함을 느끼면서도 괴인에게 말했다.
"이제 이 호로에는 술이 넘칩니다. 그러나 소생은 술을 마실
방법이 없으니 선배께서는 저에게 이 술을 먹을 수 있도록
하여 주시고 선배께서도 한 모금의 술을 드시는 것이 어떻실
런지요?"
탁문경의 말에 괴인은 탄식하며 중얼거렸다.
"아아! 고해는 그 끝이 없구나! 어찌 이미 수십년이 지나가도
어찌 인과는 다하지 않는 것일까!"
괴인은 탄식하며 침중한 목소리로 탁문경에게 물었다.
"애야! 그 술을 먹기 전에 네가 죽지 않는 이유를 알려주마!"
괴인의 말에 탁문경은 처량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미 죽기를 결심한 몸이니 안다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
까! 하나 선배께서 그와 같이 말씀하시니 세이경청하겠습니
다."
"이놈아! 네놈은 어찌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느냐! 너는 신교
의 삼대 영단중의 하나인 양명태양환속고(陽明太陽丸粟膏)
를 먹어 천하에 둘도 없이 독하다는 금화수분로를 먹어도 취
하지 않는 것이다. 더욱이 양명태양환속고는 무림인이라면
꿈속에서도 그리는 영약중의 영약이다."
탁문경은 괴인의 말에 어리둥절하였다.
"제가 신교의 양명태양환속고를 복용했다고요!"
양명태양환속고는 천하에서 가장 뛰어난 신교의 삼대 영단
으로 알려진 영약중의 영약인 것을 탁문경은 알고 있었다.
그런 영단을 자신이 먹었다하나 전혀 기억이 없었다.
탁문경이 고개를 갸웃뚱하자 괴인이 대소하며 말했다.
"하하하! 네놈은 저 호로 속의 술을 마셔도 취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기혈에 더욱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
괴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호로의 술이 솟아오르며 탁문경
의 입 속으로 빨려 들었다. 탁문경은 그윽한 주향과 함께 술
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자 가슴이 상쾌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놈아! 네놈의 피를 호로에 다시 담아라! 이호로는 주정을
더욱 강하게 하는 효능을 가지고 있다. 혈주노개가 젊어서
이 호루를 얻었을 때 밝달산에서만 구할 수 있다는 단주삼황
(丹朱蔘皇)을 먹은 자의 피를 넣어 마셨는데 그 피만으로도
단주삼황을 먹은 것보다 더한 효능을 얻을 수 있었다 한다."
탁문경은 괴인의 말에 따라 호로에 피를 흘려 넣으며 말했
다.
"나는 단지 술만 필요할 뿐입니다. 나의 피에 양명태양환속
고가 녹아 있다하여도 이미 사지가 무형비련사에 묶여 있으
니 어찌 이를 풀 수가 있단 말입니까? 더욱이 근골이 상하
여 더 이상 무공을 배우기는 고사하고 닭 한마리 잡을 힘이
없는데 무인으로써 모든 것을 잃어 버려 손가락 받는 일은
도저히 참을 수 없고 살아도 죽은 것만 못하니 어찌 생명에
연연하겠습니까?"
괴인은 탁문경의 말에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말했다.
"너는 혈주노개가 어찌하여 너와 내기를 한 줄 아느냐! 이놈
아! 혈주노개는 사도의 인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협도의 인
물 또한 아니다. 그놈은 정사중간의 인물로 이득이 없다면
어찌 너와 내기를 하겠느냐!"
괴인의 말에 탁문경은 의아한 듯 물었다. 탁문경은 계속하
여 괴인과 대화를 하자 자신도 모르게 괴인의 이야기에 빠져
들었다.
"저는 그것까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혈주노개가 무엇 때문
에 나와 내기를 하였지요?"
탁문경의 말에 괴인은 냉소를 치며 말했다.
"혈주노개 놈은 너의 몸에서 나는 양명태환환속고의 영단향
에 이끌려 이곳에 와 너를 보았을 것이다. 양명태양환속고
는 그 효능만큼이나 공기 중에 들어 나면 일류무인은 사방
십리 안에서도 그 향을 알 수 있지. 그러나 네놈이 신교의 인
물이 아닌지라 의아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본래 양명태양환
속고는 신교의 천환자단선무신공에서만 그 효력을 다 발휘
할 수 있는 것이다만 단순한 복용만으로도 효과가 매우 크
다 할 수 있지. 그러나 무형비련사와 접하면 천환자단선무신
공에 못지 않은 효력을 얻을 수 있단 말이다."
괴인은 탁문경이 주의 깊게 자신의 말을 듣자 기쁜 눈빛을
발하며 계속하여 말했다.
"혈주노개는 너를 죽이고 피를 얻는다해도 효력이 크게 떨어
지는 것이 두려워 내기를 하게 된것이다만 무형비련사와 양
명태양환속고가 너의 몸 속에서 만나 너의 기를 북돋고 있
는 곳에 금화수분로주가 들어가자 오히려 너에게 득이 되었
다는 것을 상상이나 하였겠느냐!"
"그렇다면 혈주노개는 제 몸에 무형비련사가 채워져 있는 것
을 몰랐단 말입니까?"
탁문경의 말에 괴인은 껄껄거리며 말했다.
"혈주노개는 너의 피를 얻으려는 욕심에 그만 네가 무형비련
사로 금제를 받고 있는 것을 미처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다."
괴인의 말에 탁문경은 혈주노개의 행동에 이해가 갔다.
"아하! 혈주노개는 혹시라도 내가 신교의 인물일까 두려워
나에게 맹세를 시킨 것이로군요! 그런데 나는 이곳에 섭물신
공에 끌려들어 왔는데 뒤를 쫓아오던 혈주노개는 어찌 이곳
에 호로를 찾으러 오지 않는 것이죠?"
탁문경의 말에 괴인은 빙그레 웃음 지며 말했다.
"이놈아! 너는 이곳에 지난 삼십년 동안 가장 많이 왔었다.
이 때문에 나는 너를 잘 알고 있다. 그런데 너는 이곳에 이러
한 동부가 있다는 것을 알았느냐?"
괴인의 말에 탁문경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는 사매와 함께 이곳에 봄마다 놀러 왔지요. 이 도화림에
서 가보지 않은 곳이 없지만 오늘 처음에야 이런 곳이 있다
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하하!. 어느 누구도 이곳을 발견할 수 없지! 혹 불사성제
가 이곳에 온다면 모를까!"
괴인의 말에 탁문경은 기이함을 느꼈다. 과연 이 동부는 어
째서 밖에서 찾을 수 없을까 생각하니 의아한 생각이 들었
다. 탁문경의 생각을 아는 듯 괴인이 말했다.
"크으으으으! ---- 그래 내가 영주선문에서 반역도라 몰아 세
우는 능양산인이지---- 으하하하!----"
괴인의 음성이 동부를 쩌렁쩌렁 울렸다. 그 웃음은 비통하
여 탁문경은 자신의 심장이 에이는 듯 했다. 괴인은 한참 동
안 비통한 웃음을 쏟아 내더니 갑자기 탁문경에게 말했다.
"이놈아! 나도 너와 똑같이 무형비련사에 제압 된 몸이 되었
지. 반역도의 누명을 쓰고 말이야! 크하하하!----"
탁문경은 능양산인 허일무의 말에 갑자기 동병상린의 아픔
을 느꼈다. 무형비련사에 묶이어 이 괴인 능양산인은 어쩌
면 지난 수십년을 동부에서 살았는지 몰랐다. 이리 생각하
니 자신 또한 능양선인과 같이 동부에서 쓰라린 가슴을 않
고 살아야 할지 모른다 생각하니 울컥 화가 솟았다.
"무형비련사만 가지고도 이미 폐인이 되었는데 어찌 이런 곳
에서 치욕스런 삶을 유지하게 만든단 말입니까? 비로 제가
힘이 없다하여도 살아서 사부님을 만날 수 있다면 반드시 사
숙의 죄를 사면해 줄 것을 부탁하겠습니다."
능양산인은 탁문경의 말에 냉소했다.
"흥! 그 개만도 못한 위종향이 지금까지 내가 살아있다는 말
을 들으면 나를 가만 둘 것 같으냐!"
탁문경은 능양산인의 말에 화가 나 소리쳤다.
"제가 사숙이라 부르는 것은 후배로써 예를 다하고 있는 것
일 뿐 ---선배를 존경해서 그러는 것은 아니오! 비록 나 또한
무형비련사의 구속에서 벗어 날 수 없겠지만 그렇다고 사부
님을 욕하는 것은 참을 수 없습니다."
탁문경의 말에 능양산인은 가가대소하며 말했다.
"그 인면수심 위종향이 제자하나는 제대로 두었구나! 이놈
아! 네놈의 사부가 네 이야기를 하더냐! 네놈은 어찌 나를 알
아보느냐?"
능양산인의 말에 탁문경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과연 자신
은 사모나 사부로부터 능양산인 허일무에 관하여 들어 본적
이 없었다.
"나는!---나는! 당신에 대하여---- 설노(雪老)에게 조금 들었을
뿐입니다."
"무어라고 설노가 ---막내사제가 지금까지 살아 있단 말이더
냐?"
능양산인의 말에 탁문경이 오히려 더욱 크게 놀라 물었다.
"설노가---설노가---저의 사숙조란 말입니까?"
"아아! 설노가 살아 있을 줄이야!"
능양산인은 중얼거리며 탁문경에게 말했다.
"우리는 한 사부 밑에서 무공을 배웠지! 그러나 나는 우리 영
주선문의 무공이 그 기본을 이(理)에 두어야 한다는 이파(異
派)에 속했고 위종향이란 놈은 기파(氣派)에 속했다."
탁문경은 능양산인의 말이 아리송했으나 일찍부터 사부가
무공의 수련에 있어서는 이보다 기가 더욱 즁요하다 강조한
것이 기억이 났다.
능양산인의 눈에서는 비통한 기운이 어리어 있었고 거칠게
숨을 몰아 쉬었다. 그러더니 침착하게 말했다.
"아아! 모두가 부질없는 일이지! 이제 와서 잘잘못을 따지면
무슨 필요가 있단 말인가! 단지 그녀만 행복하다면---- 그것으
로 족하지! 하나 설 삼제의 고통이 매우 심하겠구나!"
탁문경은 능양산인의 넋두리를 듣자 이상한 생각이 절로 들
었다. 이때 능양산인의 음성이 들렸다.
"이놈아! 나를 보거라!"
능양산인의 말에 탁문경이 바라보니 백발이 마치 흰 붓을 세
워 놓은 듯 위로 치솟았다.
"어허! 팔이-----"
능양산인을 뒤덮고 있던 백발이 하늘로 치솟아 오르자 탁문
경은 능양산인의 양팔이 없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탁문경이
놀라자 능양산인은 침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너와 같이 무형비련사로 무공이 제압되어 위종향에게
죽음을 당하기 전에 설사제의 도움으로 그 놈의 마수에서
탈출하여 유함진인의 삼제무형무기진이 설치된 이곳으로 탈
출하여 사지를 절단하여 무형비련사로부터 벗어 날수 있었
다. 일찍이 내 어렸을 때 유함진인이 나의 머리를 쓰다듬으
며 반드시 어려움이 닥치면 이곳으로 몸을 피하라는 말씀이
계셨었다."
탁문경은 영주선문의 전설적 기이이사인 유함진인에 대하
여 여러 차례 들은 적이 있었다.
"이놈아 호로에 피가 넘친다!"
탁문경은 능양산인의 말에 크게 놀라 호로를 바라보니 이미
피가 넘치고 있었다.
"하하하! 사숙조님을 죽음 앞에서 만나니 제대로 대접을 할
수 없군요! 미천한 후배의 피로만든 술이지만 한잔 올릴까
합니다."
탁문경의 말에 능양선인은 크게 말했다.
"그래! 금화수분로주를 마시고 이승을 하직하는 것도 좋은
일이지!"
탁문경은 능양산인의 말에 계면 적었다. 이 금화수분로주를
마시면 죽는다는 것을 깜박한 것이다. 탁문경이 자신의 실수
에 계면쩍게 웃자 능양산인이 가가대소하며 말했다.
"이놈아! 아마도 하늘이 나에게 더 이상 이승에 머무르지 마
라고 너를 보낸 모양이다."
능양산인의 말과 함께 호로의 술이 뿜어져 올라와 입안으로
술이 흘러들자 탁문경은 정신이 아득해지며 풀썩 자리에 쓸
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