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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불교와의 인연: 남아메리카 포교활동에 있어 구산 스님의 가르침과 한국 불교의 통불교적 가치”
My affinities with Korean Buddhism:the value of Kusan Sunim’s teachings and the Korean Buddhist ecumenical tradition in propagating Buddhism in South America
르노 네우바우(RenaudNeubauer) / 키토대학(Quito Univ.), 에콰도르
삼귀의
Namo Buddhāya 귀의불
Namo Dharmāya 귀의법
Namo Saṅghāya 귀의승
Namo Triratnāya 귀의삼보
들어가는 말
시작하기에 앞서 나는 여기 있는 친애하는 나의 벗들처럼 도인이나 위대한 학자가 되기 위해 필요한 마음의 일경성을 개발할 수 없었다는 사실을 밝히려 한다. 따라서 여기에서 논의되는 것들은 모두 일반적인 사람으로서, 그러나 운 좋게도 이번 생에서 붓다의 가르침을 만날 수 있었고 구산 방장스님과 같이 몇몇 깨달은 선사들로부터 귀중한 영적 가르침을 받는 특권을 누린 범부(pṛtagjana)의 입장에서 말하는 것임을 확실히 하고 싶다. 수많은 업장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가르침을 개인적인 삶 속에서 실천하기 위해, 동시에 붓다와 조사들께서 설하신 지혜의 자산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해 왔다.
붓다의 평범한 제자로서, 나는 그의 가르침이 21세기 초반으로 접어들면서 큰 위기 속에 있는 이 세계에 평화와 조화를 가져다 줄 수 있는 단 하나의 길임을 깊이 확신하고 있다.
한국을 포함한 몇몇 아시아 국가들에서 불교학을 10년 이상 공부해 오면서 나는 붓다의 가르침 중 가장 기본적인 원리들과 아시아의 지혜 전통을 에콰도르에 소재한 인문대학 Universidad San Francisco de Quito의 학생들에게 소개하기 위해 지난 25년 간 작업에 임해 왔다.
그리고 동시에 지난 몇 년간 다른 불교적 전통과 다른 국가로부터 온 선지식(kalyana mitra)들의 도움을 통해 이 동일한 지혜의 가르침을 에콰도르의 수도 키토(Quito) 근교의 산 속에 설립된 불교 명상센터, 즉 불승선사(佛乘禪寺, Buddhayāna Vihāra)에서 영적 수행에 흥미를 지닌 대중들에게 소개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지금부터는 이 과정에서 나타난 몇 가지 단계와 구산스님과의 만남으로 가지게 된 역할을 짧은 자전적 기록의 형식을 통해 간략히 묘사하고자 한다.
I. 한국불교와의 숙명적인 인연
내가 한국을 처음으로 방문한 것은 일본에서 장학생 시절을 보내던 1971년 여름방학 기간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 나는 자연과학, 특히 동물학에 큰 관심을 지니고 있던 청년이었으며 서구 문명의 세계, 즉 환경에 대한 태도가 무언가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임을 직감하여 매우 불편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던 중 아시아 문명과 그들의 지혜 전통, 특히 불교는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있어 매우 다른 패러다임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알고 크나큰 위로를 받고는 하였다.
이것이 지난 수년 간 내가 불교에 관심을 가지게 된 이유이며, 따라서 그 시간을 교토대학의 수업에서 불교 및 아시아학과 관련된 다른 주제들에 할애하게 되었다. 중관사상의 매우 난해한 문헌들을 읽기는 했지만, 붓다의 가르침에 대한 나의 이해는 여전히 매우 기초적인 단계에 그쳐 있다. 그리고 사실을 말하자면, 한국 불교에 관한 한 나는 당시 거의 완전히 무지한 상태였으며, 알더라도 매우 막연하고 모호한 이해에 불과했음을 고백해야 하겠다. 그러므로 한국에서 경험한 일련의 사건들은 나에게 있어 완전히 놀라움으로 가득한 것이었다.
시모노세키에서 부산으로 향하는 캄푸 페리에서 내리자마자 뭔가 기이한 인연으로 나의 발걸음은 그대로 선종대사찰 범어사로 향했다.
사실 그 때 여행 가이드에게 부산에서 머무를 수 있는 유스호스텔을 물어 보았는데, 오래된 불교 사원 바로 옆에 하나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배에서 알게 된 한 친구와 함께 바로 그곳으로 가기로 결정했던 것이었다. 먼저 우리는 절로 향하고 있던 한 한국 불교도와 우정을 쌓게 되었다. 그는 친절하게도 우리를 그곳의 주지이자 강사 스님이었던 광덕스님에게 소개시켜 주었다. 광덕스님은 우리를 매우 따뜻하게 맞이해 주었으며, 한국에서 일본 게다를 신고 있었던 나를 꾸짖기도 하셨는데, 그 후 절에서 밤을 보낼 수 있도록 초대해 주셨다. 일본에서는 불교와 보통 좀 더 거리를 두고 있어 생각지도 못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그처럼 불교 전통을 바로 접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기게 되자 매우 기뻤다.
그리고 스님은 우리를 범어사에 머물고 있는 미국인 승려 케리(Kerry)에게 소개시켜 주었는데, 그는 아마도 한국에서 불교를 공부하며 머물렀던 첫 번째 승려들 가운데 하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케리 스님은 우리에게 그곳의 안내를 해 주셨다. 그는 여러 관습들에 대해 설명해 주었고 다양한 선사들을 소개시켜 주었다. 그 중에 밀교 수행승이었던 양익스님은 마치 한산이나 습득과 같은 기이한 인물들을 떠올리게 하는 독특한 외양과 태도를 지니고 있는 선승이었다. 당시에 나는 마치 마술과도 같이 당이나 송대의 위대한 선 사찰이 있던 시대로 역행한 것 같이 느꼈다.
아침저녁으로 예불에 참석하면서 발우공양을 하고, 일본어가 뒤섞인 불완전한 한국어로 스님들과 교우하며 대화를 나누면서 불교 사원에서 머물렀던 것은 나의 인생에 있어 처음 있던 일이었다. 마치 마법에 걸려 다른 세상에 있는 것과 같이 느껴졌던 나날이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을 먹은 후 광덕스님께 하직을 고하려 했을 때, 놀랍게도 스님은 우리를 대신하여 통도사에 우리에 대한 소개장을 써 주셨고 그곳으로 가도록 격려해 주셨다. 그리하여 예정에도 없이 우리의 한국 방문은 어엿한 불교 순례로 바뀌게 되었다. 통도사에서 나는 지금은 법명이 잘 생각나지 않지만, 직접 지은 한시를 읊어 주곤 하여 깊은 인상을 남겼던 젊은 강사스님과 친분을 쌓게 되었다. 불국사를 방문하고, 당시에는 방치되고 버려져 있던 석굴암의 석불을 뵌 후, 우리는 해인사, 갑사 등에서 똑같이 환대를 받았다. 부여에 도달했을 때에 나는 한국 고고학자들이 공주 부근의 백제왕릉인 무령왕릉을 발굴했다는 소식을 접했는데, 이는 나에게 한국이 고고학적으로 발전되어 있다는 인상을 남겼다.
지금까지도 나는 한국 불교에 대해 그 같이 아름다운 인상을 남겨 주신 광덕스님과 당시에 만난 스님들에게 매우 감사한 마음을 지니고 있다. 이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이 다채롭고도 매혹적인 전통에 대해 좀 더 배우고 싶다는 동기를 부여해 주었다.
태국에서 불교를 공부하고 수행하는 데 삼 년을 보내면서 방콕에서 만난 해인사 출신의 일타스님과 거해스님(이후 Bhikku Amaraño)의 소개 덕분에 1975년 봄 한국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하게 되었는데, 이 때 처음으로 미소암에서 구산스님을 만나게 되었다.
II. 송광사에서 구산스님과의 개인적 경험들에 관하여
1.구산스님과의 첫 만남
송광사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물론 바로 방장실에 소개되어 선사를 만나게 되었다. 그는 내가 머물렀던 태국 사원에서 어떤 종류의 수행을 하였는지 질문하셨다. 태국과 인도의 스승에게서 배운 위빠사나(vipassana) 수행에 대하여 가능한 한 잘 설명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였는데, 놀랍게도 나의 설명을 들은 구산스님은 돌연 단호히 말씀하셨다. “그것은 공부가 아니다!”
그 때 나는 매우 충격을 받았고 스님이 어떤 근거로 그런 식으로 말씀하시는지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자 구산스님은 조주무자(趙州無字)의 화두를 살펴 수행하는 방식을 가르쳐 주셨고, 당시 문수전이었던 명상실로 돌려보내셨다. 그 때부터 그 가장 심오한 의미를 이해하기 위한 화두와의 싸움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2.구산스님과 송광사 승려 공동체에서의 삶
나에게 구산스님은 마조대사의 선어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의 완벽한 화신이었다.
밭이나 절 마당에서 운력이 있을 때마다 구산스님이 항상 가장 먼저 도구를 들고 나와 일하고 제일 마지막으로 쉬러 들어가시는 모습을 보는 것은 매우 고무되는 일이었다. 밭에서 운력이 있을 때 한 무리의 승려들이 크고 무거운 돌을 없애기 위해 노력하자, 이 노승께서 자신의 모든 힘을 끌어내어 포기하는 일 없이 동참하기 위해 분투하던 장면은 지금도 여전히 생생하게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다. 그가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젊은이들처럼 일하는 모습은 진심으로 놀라웠던 것이다!
산속에서 일생을 기거하며 세상으로 나오지 않았던 것으로 명성이 높았던 중봉선사와 마찬가지로, 구산스님은 속세에 무관심하였으며, 그와 관계된 것에서 완전히 초연한 생활을 유지하셨는데, 어느 날 오후 당시 워싱턴에서 큰 스캔들의 중심에 있었던 박동선의 방문은 송광사 대중들에게 일종의 여흥거리였다. 그러나 그가 구산스님과 만나기를 청했을 때에 구산스님은 그 인물에 대해 아무것도 아는 바가 없었으며 그저 보통 방문자들과 똑같이 대했을 뿐이었다.
3. 구산스님과 우리에 대한 그의 노파심
하안거와 동안거가 있는 결제시기 동안, 보름마다 행해진 공식 법문 후에, 구산스님은 미소실에서 우리와 같은 소수의 외국인 그룹을 받아주시곤 하셨는데, 스님은 다과와 맛있는 음식을 주시면서 혜명스님(Robert Buswell)과 내가 동료들이 받아 적은 법문 필기에 대해 번역한 것을 주의 깊게 검토해 주시곤 하셨다. 그 필기는 스님이 항상 포괄적인 방식으로 해 주셨던 추가적인 설명을 종종 필요로 했다. 구두로 이루어진 해설과 더불어 이 번역은 후에 구산스님의 가르침에 관한 첫 번째 책의 형태를 취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1976년 출간된 Nine Mountains이다.
우리처럼 작은 외국인 그룹에까지 미치는 구산스님의 관심과 인내는 의심의 여지없이 붓다와 선사들의 가르침이 서구 세계, 특히 그가 짧게 방문했었고 강한 인상을 받았던 미국을 필두로 전파될 것이라는 확신에 대한 그의 깊은 열망에서 비롯된 것이었음에 틀림없었는데, 스님은 아마도 우리가 이 위대한 포교의 씨앗이 될 수 있다고 보셨던 것 같았다.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이, 구산스님은 활발한 가르침을 대부분 송광사에서 펼치셨다. 중국인들은 고대부터 사람과 장소의 명칭에서 사용된 한자를 따라 예언하는 방법을 발전시켜 왔다. 그러한 관점에 따르면 송광사에 사용된 세 한자는 “열여덟 스승들(十八公)이 붓다와 선사들의 가르침을 널리(廣) 퍼뜨리게 될 것이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이 예언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고려와 이조시대 열여섯의 국사스님 이후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구산스님의 스승이신 효봉스님과 구산스님을 마지막 두 명의 스승으로 예언에서 언급하고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구산스님의 지도 아래 수련을 했던 수행자들은 한국에서 붓다와 선승들의 가르침을 펴기 위해 안팎으로 광범위하게 기여했다. 많은 사람들 중 몇 사람만을 언급하자면, 혜국스님과 연수 스님, 그리고 무여 스님을 들 수 있는데 그분들은 한국에서 현재 가장 걸출한 분들에 속한다.
한국 밖에서는 우리와 같은 소수 외국인 그룹이 인연에 따라(隨緣) 그러한 역할을 담당했는데, 미국 학계에서는 로버트 버스웰, 유럽 전역 및 세계의 여러 곳에서는 스티븐과 마틴 배츨러, 그리고 스칸디나비아에서는 헨릭 소렌슨, 호주에서는 지광스님, 캐나다에서는 자광스님을 들 수 있다. 나 역시 에콰도르에서 결국 정착하였다. 이 같은 “법우(法雨)”를 접하지 못한 대륙과 지역이 거의 없을 정도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서로 다른 문화적 배경과 환경을 지닌 외국인 그룹을 입문시키는 데 있어 불가피한 어려움들과 민감한 문제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70년대의 조계총림에서 구산스님이 우리 그룹을 환대하기로 하셨을 때에는 그 같은 선견지명이 있었던 것이다.
III. 구산스님을 모시고 일본으로
1977년 구산스님은 2차 세계대전 당시에 일본으로 강제 징역을 당한 사람들을 추도하는 의식을 위해 오키나와에 공식으로 초청되어 나와 함께 (처음으로) 일본을 방문하셨다. 구산스님이 일본어를 더 잘하시는데도 나는 한국어와 일본어 통역을 위해 동행하게 되었는데, 이는 명백히 과거에 한국에 대한 잘못을 저질렀던 일본 사람들에게 한국의 자부심을 보여주기 위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 국가적 자부심은 그 같은 슬픈 추도식의 상황에서 특별한 뜻을 지니는 것이었다.
도쿄에 도착하여 우리는 그 행사의 주최자였던 일본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그는 바로 구산스님에게 깊은 존경의 표시를 하였는데, 당시 일본에 남아 있는 선승이 얼마나 적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도쿄에서 우리는 일본에 있는 명월사(明月寺)라는 한국 절에서 며칠을 보냈는데, 그곳의 주지스님이었던 법인스님은 재일 한국인들의 원조를 받아 한국 천안에 평화를 상징하는 거대한 붓다의 동상을 건립하였다.
그 때 절은 매우 작아서 나는 구산스님과 한 방을 쓰게 되었다. 그날 하루 있었던 여러 활동과 만남들, 그리고 여행으로 인해 우리가 쉬기 위해 돌아왔을 때는 예상했던 것처럼 매우 지쳐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새벽 2시경, 그 엄청난 활동으로 인한 피곤함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졸면서도 구산스님은 명상을 위해 앉아 계셨다. 30대의 젊은 나는 네 시 정도까지 조금이라도 더 자기위해 누워 있었다. 내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정말로 그 상황이 부끄러우면서도 불편했지만, 노스님과 같은 그런 힘과 의지를 불러일으킬 수 없었던 것이다! 구산스님의 그러한 열의와 투지는 “생사대사(生死大事)”의 과제를 풀기 위한 것이었다.
다음 날 우리는 고속전철 신칸센을 타고 오사카로 향했다.
몇 해 전, 내가 일본에서 학생이었을 때 몇 번인가 신칸센을 탈 기회가 있었지만 불행하게도 기차가 후지산을 지나갈 때마다 구름에 가려 산을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이번에도 역시 후지산은 구름으로 가려져 있어서 보이지 않는 듯 했다. 그런데 기차가 산 앞을 지나자 갑자기 구름이 활짝 걷혀 우리는 거대한 화산의 아름다운 광경을 볼 수 있게 되었다. 구산스님은 후지산을 마치 놀란 어린아이처럼 바라보고 있었는데 신칸센이 그곳을 지난 직후 바로 산은 다시 구름 속에 삼켜져 보이지 않게 되었다.
이 일은 꽤 시간이 지난 후 어느 일요일 오후 구산스님이 재가신도들에게 설법하셨던 때에 일어났던 유사한 에피소드를 떠올리게 한다. 그곳의 전기 시설이 고장 나자 오전 내내 주최자들은 이를 고치기 위해 고군분투했지만 허사였다. 한시쯤 스님께서 법상에 올라 주장자로 단상을 치기 시작하셨는데, 세 번째 내리치셨던 바로 그 때 기적적으로 전기가 들어왔다.
그것은 단지 우연으로 설명하려 하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위대한 선승의 영적 능력이 현현된 것이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일들이었다...
스코틀랜드 비구니였던 선일스님(Ana Proctor)은 한 때에 구산스님을 모시고 부산에서 열릴 법회에 참석하기 위해 차를 타고 가던 중에 일어난 일을 말해 주었다. 순천에서 한 나이든 여성이 갑자기 나타나 차를 막는 바람에 하마터면 거의 치일 뻔 했는데, 기적적으로 그 마지막 찰나에 그녀가 물러나 길 왼쪽 편으로 아무런 상처 없이 피할 수 있었던 일이었다. 늘 그렇듯이 구산스님은 그런 엄청난 일이 일어났는지 깨닫지도 못하신 듯 보였다..
그것이 바로 우리 구산스님이 제자들과 재가 신도들에게 보여주셨던 흠잡을 데 없는 삶이었던 것이다!
IV. 서구세계에서 불법 전하기
1. 스위스의 불승사(Buddhayāna Vihāra)
80년대 초 유럽으로 되돌아왔을 때 나의 인연은 여행사에서 새로이 직장을 구하는 것과 동시에 나를 스위스의 제네바로 보냈는데, 같은 마음을 지니고 있던 소수의 친구들의 도움으로 우리는 불승사(佛乘寺, Buddhayāna Vihāra)라는 이름의 작은 다르마 센터를 열기 시작하였다. “불승(Buddhayāna)”이라는 용어는 무종파와 관련되어 사용된 말로, 이곳의 통불교적 지향점을 시사하는 말이었고, 불교 내의 모든 전통에 개방되어 있었으며, 어떤 승(乘, yāna)에도 개의치 않았음을 의미하였다. 이 생각을 현호스님에게 말했을 때, 그는 즉시 전폭적인 지지를 해 주었다. 1983년 여름 구산스님은 센터를 개관하고 명상을 지도하기 위해 개인적으로 스위스를 방문하셨는데, 그는 결국 송광사에서 젊은 제자인 현종스님을 그곳의 활동을 돕기 위해 보내주셨다. 당시에 불승사는 인천 송담스님의 제자인 무주성 보살님에게 값진 도움을 받았는데, 그녀는 로잔 대학에서 불교 철학 박사과정 공부를 막 시작하고 있었다. 우리는 시내 아파트에 작은 명상홀을 마련하였고, 현호스님은 한국에서 아름다운 불상을 보내주셨다. 우리는 매일 아침 일찍, 그리고 일요일 아침에도 그곳에서 모여 함께 명상을 하곤 했다. 스위스로 들어온 어떤 불교 국가에서 오신 스님이든 센터를 방문하여 법문을 해 주시거나 불승사에 이끌려 온 미얀마, 태국, 한국 친구들의 작은 국제 불교 모임을 위한 의식을 집전해 주시곤 하였다.
이 활동은 내가 남아메리카로 가서 정착할 때까지 육년 간 계속되었는데, 다른 사람들 중에서는 그 책임을 맡을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센터는 문을 닫게 되었고 불상은 런던에 있는 한국 절로 보냈다.
2. 남아메리카로 옮긴 불승사 활동
1977년 내가 송광사에 있는 수선사 법당에서 명상을 하고 있을 때, 망상(妄想)이 매우 생생하게 일어났는데, “다음 나의 여정은 남아메리카에서 일어날 것”이라는 것이었으며, 남아메리카는 내가 불법을 전하고 싶었던 곳이었다. 사실 어린 시절부터 나는 항상 아시아와 고대 아메리카 문명에 깊은 매력을 느끼고 있었는데, 내 개인적인 인연의 두 측면을 엮는 것이 분명 내 삶의 목적이었다..
결국 1979년 유럽에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이 목적을 마음에 품고 준비하기 시작했다. 먼저 소르본 대학에서 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장 중요한 토착어이자 남아메리카를 통틀어 오개국 이상에 퍼져 있는 팔백만의 인구가 사용하는 케추아 어 수업을 듣고 난 후, 수료증서를 통해 나는 남아메리카의 지방 대학들에서 선생님으로 일할 수 있게 되었다.
1989년 새해가 밝은 후에 모든 필요조건이 충족되었고 여섯 번째로 키토에 돌아왔을 때, 불교, 요가 및 도교에 깊은 흥미를 지니고 있었던 미국 출신의 핵 물리학 박사인 산티아고 간고테나 박사가 총장으로 부임해 있는 신설 대학교에 기적적으로 채용되었다. 그는 대학 신입생들을 대상으로 “자기이해의 개론”이라는 필수 과목을 도입하였는데, 아시아의 지혜에 관한 몇몇 고전들에 대한 이론적 학습과 명상과 같은 실습을 조합한 과목이었다. 이 과목의 주된 목적은 젊은 청년들이 자신의 내적 본성과 직접적으로 만나게 함으로써 삶의 중대한 교차점에 있을 때에 자기 자신과 삶의 목적들을 좀 더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월폴라 라훌라 스님의 책 What the Buddha Taught에 바탕을 둔 붓다의 가르침에 대한 공부는 이 과목의 중요한 시발점이었다. 나는 이 과목이 젊은이들을 일깨울 수 있다는 엄청난 가능성에 처음부터 매우 열의를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25년이 지나서도 이 중대한 열의는 사그라지지 않았다! 결국 작은 규모로 시작했던 산 프란시스코 드 키토 대학은 시간이 흘러 나라를 이끄는 창립 25주년을 맞이한 대학이 되었다.
대학에서 첫 학기에 어린 학생들에게 가르쳤던 여러 명상 기술들 가운데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깊이 생각하기는 내 생각에 “이 뭣고?”라는 질문에 대해 생각하는 것과 거의 유사한 것인데, 이는 구산스님이 선 전통에서 화두 수행을 위해 상세히 설명한 사항들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에콰도르에서의 상황들과 에콰도르 출신의 내 부인의 소중한 도움으로 적응에 전념하여 몇 년이 지난 뒤에 우리는 꾸준히 우리만의 명상처를 마련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우리는 2002-3년에 걸쳐 먼저 한적한 곳에 집을 하나 빌렸고, 키토 외곽의 일랄로(Ilalo) 산속에 마련한 작은 사원을 위한 기초 시설을 짓기로 결정하였다. 일랄로 산은 고대부터 사람들에게 신성한 장소로 여겨져 왔으며 남아메리카에서 가장 오래된 화산으로, 안데스의 형성보다도 이전에 생긴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이것이 불승선사의 설립 역사 중 두 번째 단계이다.
이 불사를 진행하는 가운데 우리는 이곳이 중국과 한국의 풍수에서 좌청룡과 우백호 양 날개의 보호를 받듯이 일랄로 산을 배후에 두고 있고, (카얌베 산의) 빙하 근처에 흐르는 물줄기로 악한 영향을 막는 명당자리와 완전히 일치한다는 데 있어 조금의 의심도 없었다. 시내에서 차로 불과 30분 위치에 자리하고 있으면서도 자연 속에서 고요함을 즐길 수 있는 곳으로서 때때로 근처 산에서 재칼들이 정원에 나올 정도였다!
이 계획의 실현을 통해 우리는 이 건물을 짓는 과정의 각 단계의 완성에 있어 얼마나 다양한 도움을 받았는지를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가능하다면 키토 근교의 다음 불승선사 사진들을 보아주시길 바란다.)
불승선사의 외형:
http://www.clasedeprogramacion.com/sites/toursVirtuales/vistaVihara/
http://www.clasedeprogramacion.com/sites/toursVirtuales/vistaViharaB/
불승선사의 명상 홀:
http://www.clasedeprogramacion.com/sites/toursVirtuales/meditacion/
일랄로 산 위에서 본 조감도:
http://www.clasedeprogramacion.com/sites/toursVirtuales/cloudless/
이와는 별개로 우리는 조건이 되는대로 키토 북부의 주로 토착민들이 거주하는 조그마한 마을에 강의 활동에 착수하기 위해 작은 땅을 얻었다.
3. 남아메리카와 같은 새로운 환경에서 붓다의 가르침을 펴기 위한 구산스님의 가풍
구산스님은 항상 수행에 있어 백장청규(百丈淸規)에 바탕을 둔 순수한 삶이 중요하다고 강조하셨다.
모든 불교집단의 공존과 수행의 윤리적 강령이 분명히 명시되어야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며, 그렇지 않으면 쉽게 혼란을 초래하는 것이다. 유사하게 사부대중 각각의 역할 역시 명확히 규정되어야 하며, 특히 일본 불교에서 만연한 종류의 혼란을 피하기 위해 승려와 재가신도 사이의 구별이 굉장히 중요하다. 그러나 이는 고대 인도의 비나야 계율을 문자 그대로 엄격히 적용해야 함을 반드시 시사하는 것은 아니며, 특히 새로운 문화적 환경에서 붓다의 가르침이 이제 막 도입되기 시작할 때에는 남방 불교에서 승려와 재가신도 사이에 행해지는 것과 같이 강한 위계적 구분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유교 사상에서의 중요한 교의 중 한 가지 개념인 “정명(正名)”은 교파적 혼란이 야기시키는 사회적 혼란의 위험을 피하기 위해 적절한 명칭을 사용함으로써 사물, 사람, 기능과 관계된 필연성을 언급하는 것이다.
몇몇 결혼한 일본 선승들은 “몰래 부적절한 관계를 가지는 것보다 –결혼을 통하여- 공개적으로 성적 관계를 가지는 것이 더욱 적절하다”고 주장한 바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승려로 간주되기를 주장하곤 한다. 이는 일견 논리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이는 재가신도가 승려에 대하여 도덕적 책임을 지니게 하는 원인이 되는, 즉 불교 수행에서 존재하는 승려와 재가 신도의 근본적인 차이를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이 차이는 인도의 브라만들처럼 단지 승려들이 일반 사람들의 힘이 미치지 않는 복잡한 몇몇 의식을 집전할 수 있기 때문만은 아닌 것이다.
“본각(本覺)”의 개념에 뿌리를 두고 있건 그렇지 않건 한국의 만공 가풍이 지니는 명백한 자유로움은 특히 이를 정당화할 수 있는 개념적 배경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서구인들에게는 일견 매우 매력적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만일 이러한 배경을 분명히 이해하지 않으면 불교를 관대하거나 문란한 것으로 간주하게 될 초보자들은 쉽게 혼란스러워진다. 구산스님은 언젠가 우리에게 무애행(無礙行)의 수행이 단지 진정 생사를 초월한 존재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뒤를 이을 일반 사람들에게 본보기와 영감을 주기 위한 필요에 의해 무관심하거나 개의치 않는 존재들에게만 허용되는 것이라고 설명해 주신 적이 있다. 따라서 구산스님은 제자들에게 이 문제들에 관해 가능한 한 주의하도록 이르곤 하셨으며, 적어도 그들이 낙공에 떨어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4. 통불교의 개념과 남아메리카에서의 불교 가르침에서 가지는 중요성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이, 구산스님은 고려 왕조의 위대한 선승이자 송광사를 창건한 보조국사 지눌의 발자취를 주의 깊게 따르고 있었다. 지눌선사가 주창했던 하나의 주된 교의는 경전의 가르침인 교(敎)와 명상 수행인 선(禪)을 상호보완적으로 유지하는 것에 관한 중요성(禪敎等持)이었으며, 다른 말로 화연의 신비한 예지와 명상 수행에서 오는 직관적 경험을 조화롭게 결합하는 것이다.
학술적인 접근과 수행적 접근의 이 조화로운 결합은 고대부터 중국과 한국에서 서로 다른 불교 학파 도처에 퍼져있던 무종파적인 불교, 즉 통불교와 관련되어 있다.
나는 21세기에 들어선 현대적인 관점에서 통불교적 접근이란 오늘날 불교의 세 가지 주된 전통인 남방불교 혹은 테라바다 불교, 북방불교 또는 중국 전통의 마하야나 불교, 그리고 티벳 전통의 밀교 삼승이 각 전통의 고귀한 가르침을 유지하면서도 상호보완적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사실이 중요함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되어야 한다고 본다.
같은 방식으로 큰 나무를 키울 수 있게 해주는 깊은 뿌리와 같이, 삼법인과 사성제에 관한 이해는 남방 테라바다에서 강조되는 윤리적 규율의 중요성과 더불어 필수적인 토대를 이루는 것이다. 이는 북방불교에서는 공성의 가르침에 대한 올바른 이해의 중요성으로 번역되었다.
더욱이 북방불교 전통에서 나타나는 마하야나의 가르침에서는 자비와 지혜를 동시에 수행하는 것을 의미하는 보살행을 강조하는데, 후자는 나가르주나의 해석에 따라 정의된 것이다. 중국의 학승 인순도사(印順導師)의 저서 도처에 널리 퍼져 있었던 것과 같이 나가르주나의 사상은 고대 불교에 대한 이해와 마하야나 불교를 연결시키는 다리로 생각되었다.
티벳 불교 전통에서는 자신과 다른 모든 중생의 이익과 구원을 위해 행동하는 것을 의미하는 보리심(bodhicitta)의 발생과 관계된 일련의 가르침을 가장 기본적인 교의로 주장한다. 그 전통에서 보리심에 대한 일련의 가르침은 육도에서 반복되는 탄생의 고통에 대한 깊은 성찰과 더불어 업과 윤회에 대한 체계적이고 상세한 가르침을 포함한다. 실질적으로 삼사라의 존재에 관한 강한 믿음이 없이는 궁극적인 깨달음에 필수적인 강한 동기를 일으키는 것과 완전한 깨달음을 향한 과정이기도 한 다른 중생들을 돕기 위한 결의를 다지는 것이 어렵거나 불가능할 것이다.
오늘날, 전에 없이 탐욕과 무지로 행위하는 인간은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에 견딜 수 없는 압박을 가하고 있는데, 예컨대 전쟁은 어떤 핑계에서든 많은 나라들이 모든 사람들에게서 천연자원을 강탈하게 만들었다. 탐욕과 무지는 또한 야생 동물이나 가축들에게 가해지는 끔찍한 고통으로도 번역할 수 있다(상아를 위해 아프리카 코끼리를 학살하는 것, 그 외에도 고래, 호랑이 등을 들 수 있으며, 돼지와 가금류를 참혹한 악조건 속에서 공장 사육하는 일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자세한 사항은 Jonathan Safran Foer의 Eating Animals, 2009를 참조할 것). 넓은 의미의 불자로서 우리는 그러한 학대에 대해 공개적으로 말할 필요가 있으며, 불교도라면 그와 같은 인간과 동물의 고통에서 눈을 돌리거나 무관심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최근 유투브에서 몇몇 불교 집단이 학살당하는 운명에서 구조되어 새 주인을 찾을 때까지 돌보아 주는 것을 볼 수 있었던 중국 본토에서도 이러한 의식을 확인할 수 있다.
내가 미얀마의 성지 곳곳을 여행하고 있을 때, 만달레이에 있는 몇몇 사원의 벽에 붙어 있는 알림을 보고 인상적인 느낌을 받았는데, 거기에는 “동물들을 먹지 않음으로써 그들에게 인정을 베푸십시오!”라고 적혀 있었다. 비록 불교는 붓다 시대부터 자이나교처럼 비폭력의 실행에 있어 극단적으로 가지는 않지만, 승려가 어떤 종류의 고기를 어떠한 조건에서 먹어야 하는지에 대해 명확히 한계를 정하고 있었다. 즉, 탐욕이나 동정심 없는 태도에서 벗어나야 하는 것이다! 후에 능가경에서는 좀 더 단정적인 용어들로 금지규정을 언급하고 있다. 모든 중생을 구제한다는 자주 반복되는 서원이 오늘날 정육업으로 용인된 이 세상의 생지옥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보살행의 수행은 또한 지혜와 숙련된 방식들의 상호보완적인 수행과 관련지어 정의될 수 있다. “숙련된 방식들”은 학생/수행자의 환경/조건과 잠재성에 따라 가르침을 나누는 능력을 언급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는 물론 가르침이 수승선근(殊勝善根)으로 불리는 최고의 선택된 제자들에게만 행해지도록 정해져 있다는 엘리트주의와는 양립할 수 없는 것이다. 이 수승선근은 직접성의 선 전통 속에서 때때로 언급되는 경우로, Bernard Faure가 자신의 저서 The Rhetoric of Immediacy/A cultural Critique of Chan/Zen Buddhism, 1991에서 지적하고 있다.
대학에서의 지난 20년간의 강의 경험에 따르면, 화두로서 수행한 “내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성찰을 학생들은 매우 고된 일로 받아들였으며, 단지 소수의 선택된 학생들만이 이를 오롯이 인식하고 즐겼다. 그렇다면 이는 남겨진 다른 사람들이 “삼매의 축복”을 경험할 수 있는 가능성을 빼앗아야 한다는 말일까? 물론 그렇지 않다. 그리고 불교나 명상 수행에 대해 전혀 들어본 적도 없는 농민이나 토착민들을 대상으로 명상 수행을 소개하는 경우에는 사실 좀 더 접근 가능한 방식들에 의존해야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앞서 언급된 전통들에 들어 있는 불교 수행의 방대한 레퍼토리 가운데 자신에게 하나만을 제한하지 않고 가장 뛰어난 것으로 생각되는 것을 가장 능숙하게 개발해내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인 것이다.
불승선사는 설립부터 그 다양한 풍미와 양상들 속에 있는 법의 심오함을 탐구하기 위해 불학원, 강원, 그리고 역경원으로서 동시에 기능하고자 구마라집 학원의 창설을 포함시키고 있었다.
A. 왜 남아메리카, 특히 에콰도르인가?
a. 고대의 역사와 문화의 다양성을 담고 있는 땅
남아메리카의 역사는 매우 오래되고 의문에 싸여있다. 남아메리카 문명의 유물과 관련되어 일반적으로 받아들이는 이론들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남아메리카에서, 특히 에콰도르에서 키토 북부의 코차스키 피라미드 유적과 같은 매우 고대의 자취를 찾을 수 있었다. 이는 독일의 고고학자 우도 오베름(Udo Oberm)에 따르면 이집트의 피라미드보다도 몇 천 년이나 앞선 것이라고 한다(독일 출신의 저명한 아메리카문명 연구가인 우도 오베름 및 막스 그룰레와 친밀하게 작업하는 아버지를 둔 한 친구로부터 얻은 정보이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볼리비아의 푸마풍쿠 및 티아왕코 유적에서는 거석들의 기이한 정렬에 대해 아직까지도 그 비밀이 밝혀져 있지 않다.
스페인의 정복 이후 남아메리카는 인종과 문화의 용광로가 되었는데, 이는 북미의 규모보다 더욱 거대한 것이며, 따라서 이는 장차 세계적 문명의 요람이 될 수 있는 모든 조건들을 보여준다. 강한 문화적 정체성을 여전히 지니고 있는 토착민을 시작으로 다양한 민족 집단들은 자신들의 특징과 문화적 특성을 유지해 왔다.
토착 요소의 중요성 때문에 남아메리카는 동아시아와 서구 세계 사이의 교각으로 생각될 수 있을 것이다. 몇몇 국가에 거주하는 많은 수의 토착 인구는 동아시아, 특히 한국과 중요한 문화적 영향과 수많은 고대적 친밀감을 공유한다. 이는 매우 도전적인 연구과제이기도 한데, 상반되는 두 집단 사이의 공간에 관한 신화적 구분이라는 개념과 연결되는 팅쿠이(tinkuy) 혹은 전투제의와 같은 몇몇 문화적 요소들은 한국 인류학에 있어서 완전히 낯선 것은 아니다(Alexandre Guillemoz, Les Algues, les anciens, les dieux: la vie et la religion d’un village de pécheurs-agriculteurs coréens, Paris, Le Léopard d’Or, 1983을 참조할 것).
b. 기후의 다양성/미기후와 생물의 다양성
중부 시에라 지방에서 우리는 오랜 시간 지속되는 봄 날씨를 즐길 수 있었는데, 이러한 기후는 명상을 수행하고, 나아가 신선도(神仙道)까지도 수련하기에 좋은 것이다. 해안가와 아마존 정글에서는 열대와 적도기후를 볼 수 있으며, 이는 붓다시대의 인도나 오늘날의 동남아시아와 마찬가지로 훗날 숲 속에 사원이나 한정처를 짓기에 적합하다.
c. 미래 중요한 경제적/정치적 축이 될 수 있는 전략적 위치
이 나라에서 정치와 경제 분야에서 높은 위치에 익숙한 어느 한국 경영인이 어느 날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면서 나의 관심을 끈 적이 있다. “당신은 왜 새로이 선출된 에콰도르의 대통령들이 항상 자신들의 임기를 동아시아를 도는 것으로 시작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건 바로 정치가들, 사업가들, 그리고 군대까지도 에콰도르를 남아메리카 전체로 들어갈 수 있는 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각 나라가 에콰도르에 발을 들이고 싶어 하기 때문에 이 대통령들은 중국, 한국, 그리고 일본에서 후한 원조를 받아 돌아오곤 하는 것이지요.”
그러한 맥락에서 에콰도르 정부가 한국과 협력하여 수백만 달러의 규모로 추진하는 키토 북부의 우르쿠키 계곡의 야차이 프로젝트(Yachay Project) “지혜의 대학(University of Wisdom)”은 실리콘 밸리를 모방한 것이며 이 나라를 21세기 최첨단 기술로 향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d. 영적/종교적 분야
천주교가 라틴아메리카 전체에 퍼져 있음에도 불구하고(세계 천주교 인구의 20%중 절반이 라틴아메리카에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발견 이전의 토착 문화와 관행들은 에콰도르의 아마존 정글과 해안가의 시에라에서 여전히 강하게 번성하고 있다.
위클리프 성서 번역자들과 하계 언어학 연구소와 같은 단체들의 활동으로 복음주의 종파 또한 60년대부터 번성해 왔다(미국 학자 David Stoll의 연구 Fishers of Men or Founders of Empire?(1983) 및 Is Latin America Turning Protestant?(1990)를 참조할 것).
불교는 70년대에 CDI(Centre for Integral Development)라는 일본 전통의 선 센터가 건립되면서 처음으로 등장하였다. 이 센터는 파리에서 공부하던 중 데시마루 타이젠 스님의 제자가 되었던 카톨릭 신부인 비니치오 루에다가 건립하였는데, 독일 흑삼림지의 선승 Graf Von Dürkheim의 제자였던 유태인 심리치료사 베라 콘 박사도 함께 참여하였다. 거의 매년 일본의 선승 히라노 카츠후미 로시가 이곳을 방문하고 수행(攝心)을 이끌었는데, 초반 몇 년 동안 나는 그를 도와 통역자로 활동하였다.
그리고 90년대에 다른 불교 전통들이 점차적으로 건립되기 시작하였는데, U Bakin과 S.N.Goenka와 같은 미얀마 전통의 위빠사나 그룹은 전통적인 10일 코스를 일년에 한 번 내지는 두 번 진행하였고, 키토와 과야킬의 주요 도시들에 다양한 학파(까규파, 겔룩파)의 티벳어 연구 센터를 함께 운영하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2008년 대만 출신의 중국 정토종 승려인 푸먀오 스님이 남아메리카 전체에서 가장 큰 불교사원인 원형사(元亨寺)를 과야킬에 창립하였고, 주로 해안 지역에 집중되어 거주하고 있는 중요 중국인 공동체의 영적 요구를 충족시켰다.
몇 해 전에 에콰도르에 불사리들을 가져와 전시했을 때에 각계각층의 수많은 순례자들과 호기심에 찬 사람들이 여기에 매료되었는데, 이를 통해 에콰도르 사람들이 모든 종교를 향해 마음이 열려있다는 사실이 증명되었다.
지난 2-30년 동안 이 같은 영적인 환경 속에서 불교는 꾸준히 유입되고 발전해 왔으며, 우리가 기울이는 모든 헌신과 인내가 있는 한 불승선사/구마라집 학원의 설립은 매우 전도유망한 상황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나가는 말
에릭 쥐르허의 고전 『불교의 중국정복』(The Buddhist Conquest of China)과 우리의 벗 스티븐 배츨러의 저서 The Awakening of the West에서 추측할 수 있듯이, 붓다의 가르침을 완전히 새로운 문화적 환경으로 도입하는 일은 항상 섬세하고 복잡한 과정을 거쳐 왔다. 영국의 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서구세계에 불교가 등장한 것은 20세기 들어 가장 중요한 사건이라는 것이 분명 증명될 것이다.”라는 말로 인정한 바 있다.
현대에 이 같은 도입의 과정은 공업화된 서구 세계의 대부분을 향해 진행되고 있다. 아직까지 깊이 영향을 미치지 않은 부분은 바로 22개가 넘는 공화국에 분포된 동일한 언어와 종교적 신앙을 가지고 기본적으로 단일한 문화를 공유한 6억 명의 사람들의 고향인 이 리오 그란데의 거대한 대륙이다. 90년대부터 시작된 불교전파의 역사적 과정은 이제 그곳에서 진행 중에 있는 것이다.
나는 에콰도르에 불교를 전파하는 것이 이러한 방향성에 있어 중요한 이정표가 될 수 있으며, 그곳에 있는 많은 중생에게 이익을 줄 수 있다고 확신한다.
수많은 나라에 있는 다양한 청중들에게 붓다와 조사들의 지혜의 메시지를 전하는 것에 자신의 모든 삶을 바치셨던 구산스님의 열반을 기념하기 위해 열린 이 세미나를 맞이하여, 나는 감히 이곳의 고귀한 분들에게 우리의 불사를 도와주십사 청하는 것에 이 기회를 활용하고 싶다. 현재 가장 시급한 것은 그처럼 동떨어진 지역을 여행할 의욕이 있고, 이곳 한국보다 때때로 조금은 더 어렵고 불편할 수도 있는 생활 조건을 견딜 준비가 되어 있으며, 우리의 포교활동에 참여하고자 하고 앞에서 말한 선과 교의 측면에서 명상수행과 이론 혹은 경전적 지식을 가르치고자 하는 작은 무리의 선지식들이다.
붓다와 조사들께서 모든 중생들의 이익을 위해 이 세상에서 법을 유지하고 전파하는 데 도움을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하며 귀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