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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9일
[2010년] 일본항공(JAL), 법원에 파산 신청
전후(戰後) 일본 경제성장의 상징이었던 일본항공(JAL)이 결국 법정관리에 들어간다. 19일 일본 현지 언론들은 JAL이 도쿄지방법원에 회사갱생법적용(법정관리)을 신청했다고 일제히 보도했다. 1년 전 주당 200엔을 웃돌던 JAL 주가는 19일 5엔으로 마감하며 사실상 휴지조각으로 전락했다. 지난 13일에는 완전감자(減資)와 상장폐지 가능성이 제기되며 하루 만에 주가가 81%(37엔→7엔) 폭락했다. 일본의 자존심으로 불리던 JAL이 이처럼 몰락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JAL의 몰락이 한국경제에 던지는 교훈은 무엇일까.
◆추락하는 JAL
JAL은 1951년 필리핀에서 빌린 여객기 1대와 직원 39명으로 출발해 직원수 4만8900명(2009년 4월 말 현재)을 거느린 세계적 항공사로 성장했다. 2차 세계대전 패전 이후 일본 경제성장의 상징이자 자존심으로까지 불려왔다. 하지만 지금은 날개가 부러진 채 추락에 추락을 거듭하고 있다.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JAL은 2008년 6억3000만달러 적자를 냈다. 2009년 상반기에는 13억6000만달러로 적자가 늘어났다. 고유가로 비용은 증가한 반면, 글로벌 금융위기로 세계 무역량이 급감한 게 직접적 이유였다. 신종플루 영향으로 해외 여행객이 줄어든 것도 몰락의 한 원인으로 거론된다. 하지만 이는 JAL뿐만 아니라 세계 항공업계의 공통된 악재였다. 유독 JAL만이 사실상 부도 지경에 이르게 된 데는 JAL 내부의 구조적 문제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주인없는 JAL
JAL은 1987년 민영화됐다. 하지만 무늬만 민영화에 불과했다. 2009년 9월 말 현재 최대주주 지분율은 2.98%에 불과하다. 주인없는 민영화인 셈이다. 그러다 보니 민영화 이후에도 정치가와 관료들이 경영에 직간접적으로 개입했다. 대대로 부사장 자리에는 관료 출신 '낙하산 인사'가 내려왔다. 정부가 JAL 이사회를 주무르는 것을 빗대 'JAL 이사회는 일본 국토교통성 8층'이라는 이야기까지 나올 정도로 JAL에 대한 정부 간섭은 심했다.정치인들이 선심성 정책으로 지방에 공항을 대거 만들었고, JAL은 경제성과 상관없이 정치적 이유로 신규 노선 취항에 나서야 했다. 지방 공항이 늘수록 적자노선이 늘어났다. 이는 직접적인 경영압박 요인으로 작용했다. 2009년 상반기 JAL의 국내선 탑승률은 59.9%에 불과했다. 우리나라 항공사들의 탑승률이 70%를 넘는다는 점을 감안하면 대형 여객기를 텅텅 비운 채 운항해온 셈이다.1970년에 만들어진 조종사 승무시간 보장제도(실제 승무시간과 관계없이 65시간 승무수당 지급)는 인건비 부담을 늘렸다. 다른 항공사에 비해 경제성이 떨어지는 대형 항공기 보유비중이 높았지만 어떤 경영진도 스스로 개선하려 하지 않았다. 경영이 어려울 때는 공적자금을 받아 해결하면 그만이었다.외국 경쟁사들은 경영효율성을 높이며 자체 생존력을 키워나갔다. 그러나 JAL은 외국항공사 운항 점유율 제한, 저가항공 출범 규제 등 정부의 특혜에 힘입어 1위 자리를 유지했다. 적자도 늘어났지만 JAL 경영진들은 '나라가 뒤를 봐준다'라는 속담처럼 도산할 염려가 없다는 안이함에 젖어들었다. 블룸버그통신 칼럼니스트인 윌리엄 페섹은 "JAL은 좀비기업이라고 부를 정도로 망가진 기업, 일본 경제의 축소판"이라고 혹평했다.
◆노조에 발목잡힌 JAL
노동조합도 JAL 몰락의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JAL 노조는 인수·합병 과정을 거치면서 승무원과 지상근무자 등 1만여명이 가입한 최대규모인 JAL노조를 비롯해, JAL기장조합, JAL승무원조합, JAL 재팬(Japan)조합 등 8개가 난립해있다. 중·장년 사원이 노조를 주도하다 보니 경영이 악화되어도 구조조정이 불가능했다. 또 퇴직자 권력이 막강해 퇴직연금 부족액이 4000억엔에 달하는 등 기업 경영에 악영향을 미쳐왔지만 퇴직연금을 깎을 수도 없었다.삼성경제연구소 정호성 연구원에 따르면 JAL의 퇴직연금 대비 자기자본 비율은 459%에 달해 미국 자동차 메이커 GM(제너럴모터스) 파산 당시와 비슷한 수준이다. JAL과 같은 퇴직연금제도를 갖고 있는 소니와 미쓰비시중공업은 각각 31%와 56%에 불과하다.
◆한국에는 반면교사
일본정부는 세계적 전자부품업체인 교세라의 이나모리 가즈오 명예회장에게 JAL 재건을 맡겼다. 공무원 때문에 망한 JAL이 아이러니하게도 민간 기업인에게 SOS를 친 셈이다. 일본 법원이 JAL의 법정관리 신청을 받아들이면 JAL은 7월까지 정상화계획을 법원에 제출하게 되고, 9월 완전감자와 3000억엔을 출자해 새로운 회사로 재탄생한다. 이 과정에서 전체 인력의 3분의 1 수준인 1만5000명을 감축하고 110개사인 자회사도 청산·매각을 통해 57개사로 줄이는 등 뼈를 깎는 구조조정이 진행된다. 현지 언론은 일본항공 정상화를 위한 부채 탕감 등으로 인해 일본국민이 부담해야 하는 세금은 440억엔(5400억원)에 달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삼성경제연구소 정호성 연구원은 "주식이 한 주도 없는 정부가 경영에 간섭하는 관행이 이어지면서 경영효율화보다는 자리보전에 급급했던 게 몰락의 가장 큰 이유였다"며 "한국경제도 JAL의 몰락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고 말했다. LG경제연구원 이지평 연구원은 "정치가 기업에 개입하거나 노조가 경영에 개입하면 나타날 수 있는 폐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고 말했다.
[2009년] 톱스타 전지현 휴대전화 불법 복제 ← 전지현
서울시경찰청 광역수사대는 19일 인기 영화배우 전지현(28·사진)씨의 소속사인 싸이더스 HQ 사무실에서 컴퓨터 하드디스크와 서류 등을 압수했다고 밝혔다.
경찰은 돈을 받고 휴대전화 불법복제를 해온 혐의로 모 심부름센터 대표 김모(42)씨 등 3명을 붙잡아 조사하는 과정에서, 영화배우 전씨의 휴대전화도 감청되고 있다는 진술을 듣고 수사에 나서게 됐다고 밝혔다.
경찰에 따르면 김씨 등은 2006년 10월부터 2년간 30여 명으로부터 1인당 100~300만원씩 받고 휴대전화 복제, 위치 추적, 불륜 현장 확인 등의 업무를 대행한 혐의를 받고 있다.
경찰은 싸이더스 HQ의 간부가 김씨 등에게 전씨의 휴대전화 복제를 의뢰해 전씨의 통화내역과 문자 메시지를 엿본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조선
전지현 휴대전화 복제 연루 前 소속사 간부, 사회 봉사 80시간
톱스타 전지현의 휴대전화를 복제해 문자 메시지를 훔쳐 본 혐의로 기소된 소속사 전 관계자들에게 집행 유예 2년에 사회 봉사 80시간이 구형됐다.
서울중앙지법 형사4단독 박창렬 판사는 16일 전파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싸이더스HQ 전 고문 정 모씨(56)와 전 직원 박 모씨(42)에게 이같은 판결을 내렸다.
재판부는 이같은 양형 이유에 대해 "피해자의 사생활을 보호해야하는 소속사 관계자들이 신뢰를 저버리고 문자메시지를 엿본 것은 사생활을 침해에 해당되며 이는 마땅히 엄히 처벌해야 마땅하다. 하지만 전과가 없고 피해자가 처벌을 바라지 않는 점 등을 참작해 집행 유예를 선고한다"고 밝혔다.
정훈탁 싸이더스HQ 대표의 친형인 정 씨와 전 직원 박 씨는 전지현과 정 대표의 관계가 소원해지자 전지현에게 남자친구가 있는지 를 확인하기 위해 지난 2007년 11월 심부름업자인 김 모(40)씨에게 640만원을 주고 전지현의 휴대폰을 복제하도록 주문한 뒤 여러차례 문자메시지를 본 혐의로 불구속기소됐다.
한편, 재판부는 앞서 기소된 심부름업자 김 씨에게는 1심과 같이 징역 1년을 선고했다./이데일리 SPN 2009.6.16
[1991년] 모스크바서 발트3국 독립요구 시위
1991년 오늘, 모스크바시내가 수만명의 시위 군중으로 가득찼다.
시위 참가자들은 발트3국의 독립요구를 외면하는 고르바초프 대통령을 비난했다.
1940년 소비에트연방에 강제편입된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에스토니아 등 발트3국은 고르바초프의 개혁정책이 본격화되자 분리독립을 요구했다.
그러나 소련군은 며칠 전 리투아니아의 수도 빌뉴스에서 시위군중들에게 무차별 발포해 10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발트해 세 나라는 같은 해 9월 마침내 독립을 쟁취했다. /YTN
[1990년] 프로복싱 선수 장정구 WBC '80년대 10대 복서'로 선정 ← 장정구 선수
프로복싱 전WBC 라이트 플라이급챔피언 장정구가 WBC선정 ‘80년대 10대 복서’로 선정됐다. 호세 슐레이만 WBC회당은 타이틀 15차 방어 후 반납한 장정구를 비롯 래리 홈스, 로베르토 두란 등 10명이 1980년대 베스트 복서로 뽑혔다며 1990년 1월 19일 한국권투위원회에 알려왔다.
한편 1980년대 최고의 복서로는 헤비급 통합챔피언인 마이크 타이슨이 선정됐으며 최고의 경기로는 1980년대 캐나다에서 열린 슈거 레이 레너드와 로베르토 두란의 경기 등 5게임이 베스트 경기로 선정됐다. 이후 장정구는 1993년 12월, 지난 30년간 세계복싱계를 빛낸 가장 위대한 챔피언 40명 중 한명으로 선정됨으로 ‘챔피언중의 챔피언’으로 선정되는 영광까지 안았다./조선
[1978년] 고구려 고선지장군. 에베레스트 첫 정복자라는 기록을 발견
8세기 실크로드를 지배했던 고구려 출신의 당나라 장군 고선지(高仙芝)가 1978년 1월 19일 대한민국 땅에서 세간의 관심을 끌게 된다.
대만을 방문 중이던 한 국회의원이 그곳의 고궁박물관에서 고선지 장군이 에베레스트를 넘었다는 기록을 발견했다고 밝혔기 때문이었다. 이에 따라 다음 날(20일자) 일부 신문은 ‘에베레스트의 첫 정복자는 고구려인’이라고 보도했다.
이 기사에 따르면 박물관에 있던 ‘당서열전(唐書列傳)’ 제54장에는 당 현종 때 고선지 장군이 인도와 중앙아시아를 정벌하기 위해 원정 중 군인들이 높은 성모산(聖母山) 때문에 진군을 기피하는 것을 보고 직접 선발대를 이끌고 성모산을 정복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성모산은 에베레스트를 지칭하는 것이라고 이들 신문은 밝혔다.
그러나 고선지 장군이 넘은 곳은 에베레스트가 아니라 파미르 고원이라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 고선지 장군은 고구려 유민 출신으로 중국 대륙을 활개치고 다닌 ‘대륙의 별’이었다.
동아시아의 패자였던 고구려는 668년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에 멸망하고 고구려인 20만 명은 중국으로 끌려간다. 그들의 후손이었던 고선지가 세계 제국이던 당의 장수가 돼 실크로드의 지배자로 등극한 것이다.
풍채가 늠름하고 말 타기와 활쏘기에 능했던 그는 20세에 장군이 돼 그 전에 당나라가 세 차례나 실패한 서역 정벌의 임무를 맡는다. 그는 네 차례의 서역 정벌(740∼750년)에 성공해 당나라와 지중해를 잇는 실크로드를 완전히 장악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그는 1만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세계의 지붕이라는 파미르 고원을 넘어 70개국 이상을 정복한다. 원정 길 중 가장 높은 고도는 4600m나 되었다. 유럽의 역사가들이 18세기 나폴레옹의 알프스 등정보다 더 위대한 전사(戰史)로 평가하는 업적이다.
그는 세계 역사의 한가운데 있었다. 751년에 7만 명의 당나라 군대를 이끌고 이슬람 아바스 왕조를 주축으로 한 사라센 연합군 30만 명과 벌인 탈라스 전투에서는 패하는데 당시 포로로 잡힌 당나라 군사들이 제지술, 화약 제조술, 나침반 등을 서역에 전하게 된다.
고선지는 755년 안녹산의 난 때 장안(長安)을 수비하다 조정의 참소(讒訴)로 진중에서 처형된다. 그의 죽음을 억울하게 여긴 부하들의 “원통하다”는 외침이 천지를 진동했다. “고선지는 한민족의 개척정신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고선지 평전’을 쓴 연세대 사학과 지배선 교수의 말이다.
허진석 기자 /동아일보 /[책갈피 속의 오늘]1978년 1월 19일 고선지 장군 기록 발견
http://news.d.paran.com/snews/newsview.php?dirnews=158874&year=2008&dir=4&rtlog=MV
[1969년] 도쿄대학 분쟁(야스다 사건) 사건 종결 ← 도쿄대 야스다 강당
1969년 1월 18일 오후 5시 45분, 도쿄대학 야스다 강당에서 공방전을 벌이던 학생들이 전원 검거되면서 1년을 끌어오던 '도쿄대학 분쟁'이 막을 내렸다. 이 사건은 631명의 학생이 검거된 사건으로 도쿄대학은 1969년도 신입생을 모집하지 못했다.
1960년의 '안보투쟁'에서 패배한 일본 학생운동은 분열을 거듭하며 침체기를 맞았다. 그러나 1968년 도쿄대학과 니혼대학에 일련의 학내문제가 불거지면서 학생운동은 다시 호기를 맞기 시작했다. 당파를 초원한 전공투(전국학생공동투쟁회의)에 일반 학생들도 공감하면서 학생운동은 점차 활기를 띄기 시작했다.
1968년 한 해 동안 전공투를 중심으로 전국 116개 대학에서 교내분쟁이 일어나 15개 대학이 이들에게 점거됐다. 특히 1968년 7월부터 1969년 1월까지 전개된 도쿄대학 야스다 강당 공방전은 '전공투'운동을 상징할 만한 대표적인 사건이었다.
1968년 1월 29일 인턴제 폐지에 불만을 품은 도쿄대학의 의학부 학생들이 농성을 벌이던 중 학교 측 간부가 감금된 것이 발단이었다. 대학 측은 17명의 관련 학생을 제명했으며 사건현장에 없던 학생들까지도 제명하면서 사태는 악화됐다. 의학부 학생들은 야스다 강당을 점거하고 제명철회를 요구했으나 경찰은 물리력으로 학생들을 강당에서 몰아냈다.
같은 해 7월, 일반 학생들까지 가세해 야스다 강당을 재점거 하고 '도쿄대학 전공투'를 결성했다. 자기부정과 도쿄제국대학 해체를 슬로건으로 내세운 학생들이 바리케이트를 치며 장기전에 돌입하자 마침내 1969년 1월 18일, 수천 명의 경찰이 강당 진입을 시도했다. 학생들은 돌과 화염병을 들었고 경찰은 헬리콥터를 동원해 최루탄과 물 세례를 퍼부었다. 진압 작전은 이틀만에 학생측의 패배로 종결됐다.
전국 대학 분쟁의 절정을 이룬 이 공방전 이후 학생운동은 과격하게 치달았고 결국 무장투쟁노선을 추구하는 '적군파'를 탄생시켰다./조선
[1967년] 해군경비정 56함, 북한 포화 맞고 침몰 ← 가라앉고 있는 해군경비정 56함
1967년 1월 19일 오후 2시 34분 동해어로저지선 근방에서 명태잡이 어선을 보호 중이던 해군 56함(PCE 56함) 당포호가 북한해안포의 집중포격을 받고 격침됐다. 해군56함은 이날 명태잡이 어선 60~70 척이 고성군 수원단 남쪽에서 어로저지선을 넘어 북상하는 것을 남쪽으로 돌아오도록 운항 지도중, 수원단 동쪽 6마일 지점에서 나타난 북한 패트롤선 2척에게 포격을 받았다.
56함의 함장인 김승배 중령은 즉각 응사명령을 내렸으나, 교전 끝에 적의 포탄에 기관실을 포함한 선체 일부가 명중했다. 인근의 우리 해군 71함, 53함, 63함이 출동했지만 이미 56함의 선체는 정지된 상태였고, 2시 34분에 결국 침몰했다. 이 56함에 타고있던 78명 중 28명이 실종되고 51명이 구조됐으나 이중 11명이 전사해 결국 총 39명의 아까운 젊은 생명이 목숨을 잃었다./조선
[1966년] 인도 총리에 인디라 간디 선출 ← 인디라 간디
인도의 초대 총리인 J.네루의 무남독녀이고 F.간디의 부인인 인디란 간디가 1966년 1월 19일 인도의 세번째 총리에 취임했다. 12세부터 독립운동에 참가하여 1938년 인도국민회의파에 입당하였으며, 13개월간 투옥된 일도 있다.
옥스퍼드 대학 재학 중, 후에 하원의원이 된 F.간디와 결혼하였으며 독립후에 아버지 네루의 호스티스 역할을 하면서 정치가로서의 훈련을 쌓았다. 1955년 여당인 인도국민회의파 운영의원회에서 활동하였고, 당수가 되었다.
1964년 바하두르 샤스트리 내각에 입각, 1966년 샤스트리 사망 후 총리에 취임하여 경제안정에 힘썼으나 강권정치를 편다는 야당의 공격으로 1977년 총선거에서 패배하여 한때 정계를 떠났다. 그러나 인민당이 우유부단한 정책으로 국민의 신임을 잃자, 1980년 총선거에서 승리, 총리에 복귀하였으나, 1984년 시크교도인 경호원에 의하여 암살당하였다./조선
[1966년] 고한선 개통
고한선 [古汗線] - 태백산 지역의 지하자원개발을 위하여 건설된 산업철도로 길이 25.7 km이며 증산(甑山)∼황지(黃池)를 잇는 철도로 태백선(太白線:제천∼구절)의 지선이다.
길이 25.7 km. 증산(甑山)∼황지(黃池)를 잇는 철도로 태백선(太白線:제천∼구절)의 지선이다. 증산∼고한의 10.7 km는 1966년 1월 19일에 개통되었고, 1973년 2월 28일 함백산(咸白山)을 꿰뚫은 고한∼추전을 연결하는 정암(淨岩) 터널(4,505 m)이 관통됨으로써 1973년 10월 16일 황지까지의 구간이 완전 개통되었다. 이로써 영동선(嶺東線) ·백산삼각선(栢山三角線) ·고한선 ·태백선 ·중앙선으로 연결되어 서울∼강릉 열차 운행시간이 단축되었고, 태백산지의 자원수송이 용이해졌다. 더욱이 증산과 고한 사이는 1972년 전기철도 공사가 완공되어 전기기관차의 시운전이 행해졌으며, 1974년 6월 제천∼고한 구간이, 1975년 12월 고산 ·황지·백산·북평 구간이 전철화되어 수송능력을 높였다. /naver
[1839년] 프랑스의 화가 세잔(Paul Cézanne) 출생 ← Mont Sainte-Victoire, Seen from the Bibemus Quarry, oil on canvas by Paul Cézanne, 1897; in the Baltimore Museum of Art, Baltimore, Maryland, U.S.
1839년 1월 19일 태어남 / 1906년 10월 22일 죽음
"그는 우리 화가 모두에 있어서 아버지와 같은 존재이다." - 파블로 피카소
세잔은 후기인상파를 이끈 프랑스의 대표적 화가이다. 생전에는 크게 인정받지 못했으나 사후에는 현대 회화의 아버지라 불릴 정도로 20세기 서양회화사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인상주의 영향 아래 사물의 형태를 여러 시점에서 바라보는 구도 연구에 몰입했다. 그는 앙리 마티스와 파블로 피카소에게 영향을 미쳤다. 유년 시절부터 에밀 졸라와 두터운 친분이 있었지만 말년에 들어 절교했다. <카드놀이하는 사람들 Card Players>(1890~92)과 <큰 소나무들이 있는 생트빅투아르 산 Mont Sainte-Victoire with Large Pine Trees>(1885~87)과 같이 엑상프로방스 근처의 생트빅투아르 산을 주제로 한 많은 작품들을 남겼다.
[1813년] 영국의 발명가 베서머(Bessemer, Henry) 출생 ← 베서머, R. Lehmann이 그린 유화(부분)
1813. 1. 19 ~ 1898. 3. 15
하트퍼드셔주(州) 찰턴 출생. 어려서부터 아버지가 경영하는 활자 주조소에 들어가 용융(溶融) 금속의 처리를 담당하다가, 17세 때 주조소와 함께 런던으로 이전하였다. 이곳에서 자동 스탬프기, 도료인 청동색 분말, 활자 주조 등 다방면에서 발명품을 만들어 생애를 통해 120가지 이상의 특허를 얻었다. 대표적인 것은 1855년 ‘베서머 제강법’으로 알려진 전로제강법(轉爐製鋼法)의 발명이다. 발명 동기는 대형포탄 발사에 견딜 만한 포신제조용 강철의 필요성으로 실험을 계속하던 중, 당시 전문가들이 미처 착안하지 못한 중요한 사실을 발견하였다. 즉 용해된 선철에 공기를 불어넣어 줌으로써 불순물을 제거, 이것을 가단철(可鍛鐵)로 바꾸어, 외부에서 가열 없이 잉곳(ingot)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것은 1856년 8월 1일 영국 과학진흥협회 회의에서 《연료를 사용하지 않는 단철(鍛鐵)과 강철의 제조법》이라는 제목으로 발표되었다. 1860년 셰필드에 있는 제강공장에서 이 방법으로 가동되는 경주식 전로(傾注式轉爐)가 최초로 조업을 시작하여, 근대 제강법의 기초를 확립하였을 뿐만 아니라 기업화에도 성공하였다. 1871년 영국 철강협회 회장으로 취임하고, 1879년 기사 작위를 수여받았다. 1873년 철강 야금학(冶金學) 분야에 있어서 그의 업적을 기려 베서머상(賞)이 제정되었다. /naver
[1809년] 미국의 시인, 소설가, 비평가 포(Poe, Edgar Allan) 출생 ← 40세. 죽기 직전에 찍은 은판화.
1809. 1. 19 ~ 1849. 10. 7
"낮시간에 꿈꾸는 사람은 밤에만 꿈을 꾸는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 많은 것을 알고 있다." - 에드가 알란 포
미국의 시인, 소설가, 비평가. 1809년 1월 19일 미국 보스턴에서 출생했다. 3세도 못 되어 고아가 되어 리치먼드의 상인 존 앨런에게 양자로 갔다. 일찍이 어머니를 잃은 포는 항상 이상적인 여성상을 추구하던 중, 14세 때 급우의 어머니인 젊고 아름다운 제인 스타나드로부터 그것을 발견하고 나중에 유명한 《헬렌에게》(1831)라는 추억의 시를 쓰게 되었다. 17세에 버지니아대학에 입학하였으나, 양부로부터의 학비조달이 제대로 되지 않는 등 어려운 여건 속에서 무절제한 생활을 하여 1년도 못되어 퇴학당하였다. 그 이후 양부와의 불화와 화해라는 비참한 생활이 시작되었다.
감수성이 강하였던 그는 18세 때 《티무르 Tamerlane and Other Poem》(1827)를 보스턴에서 익명으로 출판하였다. 그러나 아무런 비평도 받지 못하고, 생활이 궁한 나머지 변명(變名)으로 군대에 들어가 한때 웨스트포인트 육군사관학교에 적을 두기도 하였다. 그 동안에도 제2시집 《알 아라프, 티무르 Al Aaraaf, Tamerlane, and Minor Poems》(1829)를 볼티모어에서 출판하였으나 묵살당하였고, 제3시집 《포 시집 Poems by Edgar A.Poe》(1831)을 출판하기에 이르렀으나, 시작(詩作)을 단념하고 소설을 쓰기로 하였다.
1831년부터는 미망인인 숙모와 그의 딸 버지니아와 함께 볼티모어에 살면서 각종 잡지와 신문의 현상소설에 응모하였다. 1832년 《병 속의 수기(手記) A MS. Found in a Bottle》가, 1843년에는 《황금 풍뎅이 The Gold Bug》가 당선, 이로부터 그의 단편의 전성시기가 찾아왔다. 1836년에는 14세밖에 되지 않은 버지니아와 결혼하였고, 각종 잡지의 편집자로 있으면서 단편을 계속 발표, 1840년 《리지아 Ligeia》(1838) 《어셔가(家)의 몰락 The Fall of the House of Usher》(1839)을 포함한 《괴기 단편집(怪奇短篇集)》(2권)을 간행하였다. 그 후 《모르그가(街)의 살인사건 The Murders in the Rue Morgue》(1841) 《큰 소용돌이에 빨려들어서 A Descent into a Maelstrom》(1841) 《붉은 죽음의 가면(假面) The Masque of the Red Death》(1842) 《검은 고양이 The Black Cat》(1845) 《잃어버린 편지 The Purloined Letter》(1845) 등을 썼으며, 1845년에는 《황금 풍뎅이》를 포함해서 《단편집》을 출판하였다.
보들레르는 이들 단편을 읽고 놀라 “여기에는 내가 쓰고 싶었던 작품의 모든 것이 있다”고 하면서 평생을 포의 작품 번역에 바쳤다. 포는 《어셔가의 몰락》에서의 주인공처럼 현실에 등을 돌리고 내면의 심연에 끌리면서도, 한편으로 추리와 분석 능력을 활용하여 《모르그가의 살인사건》에서의 탐정 듀팡과 같은 인물을 창조하여 후세의 ‘셜록홈스’ 등 추리소설의 장르를 개척하였다. 단편작가 포의 불합리와 합리의 양면성은 시인으로서의 그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의 시재(詩材)는 소설에서와 같이 우수를 내포한 로맨틱한 것이지만, 그것을 다룬 방법은 수학자와 같은 냉정함이라 할 수 있는데, 그 전형은 《갈가마귀 The Raven》(1845)이다. 그의 담시(譚詩)는 죽은 연인에 대한 끝없는 연민의 정에 차 있다. 그러나 이듬해의 《창작의 철리(哲理) The Philosophy of Composition》(1846)에서는 이 작품을 분석, 어느 어구도 주도면밀한 계산하에서 구사한 것이라 설명하였다.
이와 같은 시작의 태도는 말라르메를 비롯하여 발레리 등 프랑스 상징파 시인들로부터 깊은 존경을 받았으나, 포의 작품에는 단편이건 시이건 어딘가 내용과 방법이 물과 기름처럼 서로 섞일 수 없는 결점이 있다. 그 때문에 영국이나 미국에서는 비속하다는 지적도 있었다. 그러나 포에 있어서 시는 회화 ·조각 ·건축 ·무용 ·음악 등에서도 찾아볼 수 있으며, 단편이나 시 작품도 그러한 의미에서는 구별이 없었다. 양자는 모두 미적 효과를 목적으로 하였으며, 따라서 작품이 긴 것은 효과의 통일을 기할 수 없다고 하여 부정하였다.
《어셔가의 몰락》은 산문으로 씌어진 시이고, 《갈가마귀》는 운문으로 쓰인 이야기이다. 《시의 원리》(1850)에서 “시는 미(美)의 운율적 창조이다”라고 한 생각은 보들레르나 말라르메에게 영향을 주어 산문시를 낳게 하였다. 또한, 시를 교훈이나 실용적인 도덕의 대용(代用)으로 하는 것을 거부, 그 때문에 실용주의를 신봉하는 미국에서는 이단자로 취급당하였다. 1847년 가난 속에서 아내와 사별한 포는 스스로도 건강을 돌보지 않아 2년 후인 1849년 10월, 볼티모어의 노상에 쓰러져 의식불명인 채 40이라는 젊음으로 세상을 떠났다.
사후에도 오래도록 무시당하였으나, 1875년에야 겨우 그의 기념비가 세워지고, 말라르메는 “검은 재해(災害)의 벌판에 떨어진 조용한 운석(隕石)”이라 노래한 소네트를 프랑스로부터 보내와 비참하였던 그의 생애를 애도하였다. 이후 포의 명예는 점차 회복되어, 19세기 최대의 독창가(獨創家)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naver
[1793년] 루이 16세 사형 확정 ← 루이 16세의 처형
1793년 1월 19일 루이 16세에 대한 사형 집행이 확정되었다. 루이 16세는 1789년 프랑스 혁명이 발발한 이래 대중의 요구를 수용하기보다는 반동세력과 손을 잡아 원성을 샀다. 그는 국외탈출을 시도했다가 실패하는가 하면 오스트리아의 군사력에 의지하고자 전쟁을 부추기기도 했다. 결국 입법의회는 그의 왕권을 일시적으로 정지시켰고 9월 21일에는 프랑스 제1공화정이 선포되었다. 그러던 중 그가 혁명 정부를 무너뜨리기 위해 외세와 결탁했다는 혐의가 포착되어 국민공회로부터 유죄판결을 받고 찬반투표에 의해 사형을 선고받았다. 집행유예의 가능성이 있었지만 집행유예 여부를 가리기 위한 찬반투표에서 과반수가 넘는 반대표로 사형이 확정되었다. 그로부터 며칠 뒤 루이 16세는 파리의 혁명광장에서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이로써 그는 부르봉 왕가 출신의 마지막 왕으로 기록되었다./브리태니커
[1736년] 증기기관 발명가 제임스 와트(Watt, James) 출생 ← 와트, H. Howard가 그린 유화
1736. 1. 19 ~ 1819. 8. 25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 소년시절을 아버지 일터에서 보내는 동안 수세공(手細工)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래머 스쿨을 마친 뒤, 1755년 런던으로 가 수학기계공 견습이 되었고, 1757년 글래스고대학 수학기계공으로 임명되었다. 1763년 최초 발명인 투시화법기(透視畵法器)를 만들어 낼 때까지 J.블랙, J.로벅 등의 과학자들과 교류하였다.
1764년 와트는 대학으로부터 뉴커먼 배수기관(排水機關) 모형의 수리를 의뢰받았다. 이 기관의 열효율이 좋지 못한 점을 발견하고 1765년 콘덴서를 분리하는 착상을 하였다. 이 착상을 로벅이 구체화하려고 하였으나 피스톤의 패킹 문제에 부딪쳐 개발은 진전되지 못했다.
동료인 크레이그가 죽자, 1767년~1774년까지 스코틀랜드 운하측량사(運河測量師)로서 일하였다. 1768년 버밍엄의 업자 M.볼턴을 알게 되었고, 1769년 로벅의 원조를 받아 증기기관에 관한 최초의 특허를 받았다. 1773년 로벅이 파산하자 1774년 볼턴이 와트기관의 특허 소유권을 획득하였다.
1775년 볼턴은 와트의 특허권을 25년간 연장함으로써 버밍엄에 공장을 경영, 볼턴과 와트의 유명한 공동사업 ‘볼턴-와트 상회’가 문을 열게 되었다. 그들 최초기관은 1767년 운전을 개시하였으나, 실용화되기까지는 다시 5년이 걸려 이 기업은 1780년대까지는 이익을 보지 못하였다. 1775년~1780년대까지 와트는 그의 기관을 완성시키기 위하여 전력을 기울였다.
팽창작동(膨脹作動) ·복동기관(複動機關) ·유성기어장치의 회전기관(1782 특허) ·평행운동(1784) ·보일러의 매연방지장치(1785) ·원심조속기(遠心調速器)(1788) ·압력계(1790) 등의 발명과 마력(馬力)의 단위에 의한 동력의 측정 등은 주요한 업적이다.
또 버밍엄의 진보적 과학자 등의 모임인 ‘달의 모임’의 핵심 멤버가 되었고, J.프리스틀리와 만나면서부터 화학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1794년 새로운 기업 ‘볼튼-와트 및 가족상회’를 설립하여 점차 자녀들에게 사업을 이양해 가는 한편, 1795년 소호의 주조공장을 개설, 기관의 대량생산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1800년 최초 특허권의 기한이 만료됨으로써 볼턴과 공동사업도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는 여생을 조각기계의 발명에 바치다가 히스필드에서 죽었다. /naver
[1504년] 조선초기 음악가 성현 사망 ← 조선초기 음악가 성현이 편찬한 `악학궤범`의 한 부분.
‘악학궤범’을 편찬한 조선초기 문관이며 음악학자인 허백당 성현이 1504년 1월19일 사망했다. 성현은 조선초 대단한 문벌을 자랑했던 창녕성씨의 후손으로 세종21년(1439)에 아버지 염조와 어머니 순흥안씨의 삼남으로 태어났다.아버지와 두분의 형 모두 학문이 높고 고관직을 지냈으며, 12세 때 부친을 여읜 성현은 학문적 정신적 성장과정에서 형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음악학자로서 성현은 음악이론과 음악의 쓰임새, 악기의 구조 연주법 제작법, 궁중무용의 종류와 공연절차, 음악과 무용에 필요한 의물 등을 그림을 곁들여 상세히 기록한 종합적인 악서(樂書)인 악학궤범(樂學軌範)을 찬정하여 조선시대 궁중음악의 전승을 가능케 하였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연주법까지 기록할 수 있는 합자 방법을 연구한 끝에 합자보(合字譜)를 창안하였고 이를 응용하여 현금합자보를 간행했다.
성현은 24세 되던 세조8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에 들어감으로써 벼슬길에 올라 사간원 대사간, 성균관 대사성, 경상도 관찰사, 예조판서, 한성부판윤, 공조판서, 사헌부 대사헌 등의 주요 관직을 두루 거쳤고, 특히 음율에 정통하여 궁중 음악기관인 장악원의 제조를 겸임하면서 악학궤범 편찬 등 조선시대 음악의 연구발전에 크게 기여했고, 청백리에 녹선됐다. /조선
그 밖에
2003년 프랑스 언론인 프랑수아즈 지루 사망
2003년 동계유니버시아드 스키점프 강칠구 2관왕
2001년 박찬호, 연봉 990만 달러(126억원) 계약
1992년 젤리오 젤레프, 불가리아 대통령에 당선
1990년 중요무형문화재 제1호 종묘제례악의예능 보유자 이석재씨 별세
1984년 이집트, 회교회의기구(ICO)에 재가입
1981년 미국, 이란. 미국인질석방협정 조인
1980년 한국-기니 단교
1979년 박정희 대통령, 남북당국자간 무조건 대화 촉구
1975년 중국, 신헌법 발표 후 국가주석제 폐지
1974년 한국-사우디아라비아, 경제 및 기술협력협정 체결
1973년 비상각료회의, 형소법 등 사법5법개정안 의결
1962년 KBS-TV, 최초의 드라마 ‘나도 인간이 되련다’ 방송
1960년 미국,일본 신안보조약 조인
1949년 한국 정부, 유엔 가입신청 제출
1946년 학병동맹사건 발생
1942년 일본군대, 버마 침입
1928년 전문학교령 개정
1922년 김한, 박일병. 공산주의자신인동맹 및 무산자동지회 결성
1915년 인도의 사회운동가 고팔 크리슈나 고칼레 사망
1908년 이용직 등 기호흥학회 설립
1905년 근대 인도의 철학자, 종교개혁가 타고르 사망
1903년 독일 작곡가 보리스 블라허 출생
1902년 인찰지 사용 제도화
1900년 우리나라 최초로 미국에 우편물 발송
1881년 프랑스 고고학자 마리에트 사망
1809년 미국 작가 에드거 앨런 포 출생
1807년 미국 남북전쟁의 남군사령관, 로버트 에드워드 리 출생
1798년 프랑스 철학자 콩트 출생
1782년 캐나다 작가 미첼 비보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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