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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림(保任)에 대한 소견
보림(保任)은 선불교에서 깨달음 얻은 이후의 수행을 말한다.
보호임지(保護任持)의 준말이며,
보임이라고 읽지 않고 보림이라고 읽는다.
불교 선종(禪宗)에서 깨달은 뒤에 더욱 갈고닦는 수행법,
깨친 후에도 깨달은 바를 잃지 않고 더욱 단단히 하는 작업을 말한다.
즉, 오후(悟後)에도 수행을 게을리 하지 않고
완전히 자기 것으로 만드는 수행을 말한다.
수행인이 진리를 깨친 후에
안으로 자성이 요란하지 않게 잘 보호하고,
밖으로 경계를 만나서 끌려가지 않게
잘 보호하는 수행을 게을리 하지 않고,
계속 정진하는 것을 보림수행(保任修行)이라 하는데,
만행과 행각도 보림을 위해 행해지는 것이다.
깨달음에 관해, 돈오(頓悟)한 뒤에
점수(漸修)의 수행이 필요하다고 하는
돈오점수설(頓悟漸修說)과
돈오하는 것 자체가 점수까지를 모두 끝마쳤으므로 더 이상의 수행이 필요하지 않다는 돈오돈수설(頓悟頓修說)로 나누어져 있다.
띠라서 돈오돈수설에 입각하면 견성한 뒤에
보림(保任)이라는 수행과정이 필요하지 않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돈오점수설과 마찬가지로 역시 견성한 뒤에
반드시 보림(保任)의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는 주장도 있다.
견성을 한 사람은 그 성품자리를 천만 경계 속에서 잘 활용하기 위해서는 그 깨친 진리를 보다 확고히 하고 보다 완전한 힘이 되도록 멈추지 않고 안으로 계속 단련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선지식들도 중생을 교화하다가 때때로 조용히 숨어서 보림(保任) 공부를 더 해 보다 큰 힘을 기르기도 한다.
깨달은 사람이 더 닦을 것이 있나 하겠지만
바로 알았기 때문에 참으로 닦을 수가 있다.
깨닫기 전에 닦은 것은 진실한 것이 아니다.
이처럼 깨달은 사람이 계속 정진하는 것이 보림(保任)이다.
수행, 즉 닦는 행위는 일시적인 것이 아니다.
지속적으로 보림 수행해야 한다. 깨달음은 한순간이지만 닦음은 늘 지속해야 할 과제이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가 복잡 미묘한 관계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거울이 밝은 바탕을 지니고 있지만 가만히 두면 더렵혀지듯이 우리 마음도 그런 것이다.
그래서 오후보림(悟後保任)이란 말이 있다.
깨달은 뒤에 선지식을 찾아 인가를 받고,
다시 숲속이나 토굴에 들어가 다생(多生)의 습기(習氣)를 제거하고 도(道)의 역량을 키우는 보림(保任) 공부를 말한다.
한국 조계종에서 인정하는 제48대 조사인
원오 극근(圓悟克勤, 1063~1135) 선사는
설사 사람이 자성(自性)을 깨달았다 해도
그것은 완전한 단계가 아니며,
그것은 아직 어린 새가 막 세상에 나온 것과 같으니 마음이 철저히 무심(無心)에 들어가
한 점의 물건도 남아있지 않도록 보림(保任) 수행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보림을 해야 한다는 주장만 있는 것은 아니다.
제33대 조사인 육조 혜능(慧能, 638~713) 대사는
"부지런히 털고 닦아서 티끌과 먼지가 묻지 않게 해야 한다"는
신수(神秀) 스님의 주장을 반박하면서,
“본래 깨끗한데 어느 곳이 티끌과 먼지에 물들겠느냐”고 주장해,
제32대 조사인 홍인(弘忍, 601~674) 스님으로부터 법맥을 이어받게 됐다.
혜능 대사는 의발을 전수 받았지만,
경쟁자 신수(神秀) 스님과 비교하여, 글자도 모르는 무지랭이로서
그 자격을 의심하며 의발을 뺏으려는 사람들에게 쫓겨 다니며 본의 아니게 16년 동안 "보호임지"의 시간을 가졌다.
깨달았다는 사실에 취하기보다는
그 깨달음을 곱씹고 스스로에게 질문하며 명확히 하는 작업이
선행되어야만 깨달음을 공고히 할 수 있다.
그런데 혜능 대사가 숨어 지낸 16년을
보림(保任)과 연결시키는 것은 무리가 있어 보인다.
제35대 조사인 마조 도일(馬祖道一, 709∼788) 선사는
"한번 깨달으면 영원히 깨달아서 다시는 미혹해지지 않는다."고 주장해
보림(保任)을 부정했다.
불교는 철저한 수행을 중요시하는 소승불교와 수행보다는 믿음을 중요시하는 대승불교로 나뉜다.
3세기 대승불교의 아버지로 불리는
제14대 조사 용수(龍樹, Nagarjuna, 150?-250?) 존자는 기존 불교를 소승불교라 비하하는 명칭을 붙여가며, 자신의 새로운 교단을 대승불교라고 주장했다.
기존 소승불교의 수많은 계율을 대폭 삭제했으며, 오랜 기간 수행하는 수행중심 불교를 매우 짧은 <반야심경>을 승속이 모두 외우게 해서 믿음중심 불교로 개혁했다.
그러나 다시 100년이 지나서 4세기에 후기 대승불교를 일으킨 제21대 조사 세친(世親) 보살이 믿음중심 불교를 수행중심 불교로 또다시 혁신했다.
세친은 원래 당대 소승불교 최고 경지의 스님이었다.
대승불교로 개종했다지만, 모든 소승불교 이론을 다 가져와 대승불교에 편입시켜, 믿음중심 대승불교를 수행중심 소승불교로 매우 비슷하게 바뀌었다.
수행중심 불교를 비판하며 대승불교를 창시한 용수 존자라고 해서,
수행을 전혀 안하는 것은 아니다. 석가모니는 29세에 출가하여,
1년은 당대 최고의 명상 스승을 찾아다녔고,
2년차부터 5년차까지 4년 동안은 3명의 당대 최고 명상 스승으로부터 최종단계까지 명상 수행법을 배웠다.
그리고 수자타로부터 우유죽을 받아먹고 나서
1년 동안 오로지 혼자서 독자적인 명상 수행을 해서 깨달았다.
즉, 진정한 명상 수행은 겨우 1년만 했다.
그런데 소승불교는 석가모니의 1년 명상과는 달리, 평생의 명상 수행을 주장했다.
이의 폐해를 지적한 것이 용수 존자이다.
그렇다고 용수 존자가 석가모니의 1년 수행조차도 하지 않는 불교를 주장한 것은 아니다.
석가모니는 단 1년간 명상 수행을 하여 깨달았으며, 그 후에 수십 년간 보림(保任)을 했다는 기록은 없다.
오히려, 깨닫자마자 바로 부처 지혜를 쓰며 설법을 시작했다.
불교의 해탈방법은 단번에 궁극적인 본성을 깨닫는 돈오(頓悟)와 점차적인 수행의 단계를 거쳐 오랜 기간의 수행 끝에 부처가 되는 점수(漸修)의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특히 선종은 돈오와 점수 가운데 돈오를 중요시 했다.
돈오한 뒤에 점수의 수행이 필요하다고 하는
돈오점수설(頓悟漸修說)과 돈오하는 것 자체가 점수까지를 모두 끝마쳤으므로 더 이상의 수행이 필요하지 않다는 돈오돈수설(頓悟頓修說)로 나누어져서 커다란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따라서 돈오돈수설에 입각하면 견성한 뒤에
보림(保任)이라는 수행과정이 필요하지 않지만,
돈오점수설에 의하면 반드시 보림(保任)의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전통적으로 돈오점수설을 채택하여 견성한 뒤에는 반드시 보림(保任)을 하도록 돼있다.
특히 고려 중기의 고승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 1158~1210) 선사는 이를 강력히 천명했는데,
견성을 한다는 것은 마치 어린아이가 세상에 태어나는 것과 같아서 눈⋅귀⋅코⋅팔⋅다리 등을 모두 갖추고 있지만 제대로 볼 수도 걸을 수도 없는 상태와 같고, 차츰 지극한 정성으로 보살펴 키우면 걸을 수도 있고 말도 할 수 있게 되는 것과 같다고 했다.
그리고 얼어붙은 얼음이 곧 물인 줄 아는 것이 견성이고, 그 견성을 토대로 하여 그 얼음을 녹이는 것이 보림(保任)이며,
그와 같은 보림(保任)이 있고 난 다음에
물을 자재롭게 이용하여 식수로도 이용하고 빨래도 하고 논과 밭에 물을 댈 수도 있게 된다고 했다.
따라서 지눌(知訥) 이후 우리나라의 수행승들은 지눌의 가르침에 따라 처음 견성한 뒤의 보림 때에 온갖 정성을 아끼지 않았다. 보림(保任)은 견성한 그것이 과연 올 바른가 아닌가를 점검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이때 먼저 깨달은 고승들을 찾아가서 깨달음을 점검받게 되는데, 고승은 이때 갖가지 시험을 통해 올바로 견성한 것인가를
살피고 견성했음을 확인하면 깨달음을 인정하는 신표와 함께, 깨달음의 기쁨 속에 빠져서 자칫 헛된 길로 빠지기 쉬운 수행자를 올바른 길로 인도하기 위해 여러 가지 지침을 내리게 된다.
그 까닭은 견성하기는 했지만 아직 그 본성에는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의 티끌이 많이 묻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승의 인도로 이와 같은 티끌을 모두 제거하기 위해 보림(保任)의 공부를 하는 것이다.
이때 앞서 깨달은 고승의 지도를 받는 한편
대장경을 열람하기도 하고, 깊은 산 속에서 동물들과 함께 생활하거나 시장 등의 시끄러운 곳에서 장사를 하며 선정(禪定)을 익히기도 한다.
그리고 이 보림이 어느 정도 완성되면 본격적인 중생교화의 길에 나서게 되어 있다.
―한암과 경봉의 오후 보림(悟後保任)에 대해―
한암(漢巖, 1876~1951)은 경봉(鏡峰, 1892~1982)과 같이 근현대 한국불교의 선맥을 대표하는 선승이다.
두 선사는 법형제로서 수행을 하면서 서로 24편의 편지를 남겼다.
그중에 일상적인이야기를 적은 내용을 제외하고, 깨달음 이후의 보림(保任)에 대한 문제에 대한 것에 의하면, 한암이 나이가 16살 더 많고 깨침을 먼저 이루었기에 주로 한암이 경봉에게 오후의 보림(保任)에 대해 길을 제시해주고 있다.
보림(保任)은 백장(百丈懷海)과 조산(曹山本寂) 등은 모두 수행했었고, 간화선을 창안한 대혜(大慧宗杲) 또한 보림(保任)의 전통을 계승했는데,
그의 어록에는 보림에 대한 근거로
<법화경>의 “내가 이제 너희들을 위해 이 일을 보림(保任)할 것이니, 끝내 헛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한 구절을 지적했다.
이는 모두 자성본래청정(自性本來淸淨)이라는 초기선종 이래의 선종의 종지를 계승하는 것이다.
또 몽산(夢山德異, 1231~1308) 화상은 견성 이후 반드시 정안종사(正眼宗師)를 찾아 보림(保任)해야 한다는 지침을 그의 어록에서 밝히고 있다.
한암은 오후(悟後) 보림을 오후의 생애라고도 하면서,
대혜 선사의 <서장(書狀)>, 보조국사의 <절요(節要)>와
<간화결의(看話決疑)> 등을 전거로 들어
오후 보림(保任)을 하도록 권하고 있다.
이는 중국선의 한국화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보조국사의 <진심직설(眞心直說)>에 나오는 10가지 망념을 쉬게 하는 10종식망(十種息忘)을 오후 보림의 길잡이로 삼았다.
이러한 한암의 가르침은 후에 경봉이 후학들에게 오후 보림을 권하는 내용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오후 보림의 목표는 망념을 제단(除斷)하여 무심(無心)⋅무념(無念)에 이르는 것이다.
둘째, 무념에 이르는 방법으로 보조국사의 <진심직설> 중
진심망식(眞心亡息)장의 10종식망(十種息忘)을 길잡이로 삼았다.
셋째, 한암과 경봉은 보조의 사상을 계승하고 있다.
넷째, 두 선사들은 보조 이래의 정혜겸수(定慧兼修)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
다섯째, 그리고 이러한 가르침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오후 보림을 행하면서 선사들 간에 절차탁마했다.
그런데 돈오돈수설을 주장한 성철(性徹) 스님도 깨친 후에도 정진을 멈추지 않았다.
장좌불와 수행을 계속하며 흐트러짐이 없었다.
송광사, 수덕사, 간월암, 법주사, 도리사, 대승사, 통도사 등 제방에서 안거를 했다.
1940년 오도송을 외친 이후 7년 동안 안거를 거르지 않았다.
이를 오후 보림(悟後保任)이라 말하는 이들도 있다.
그렇다면 돈오돈수, 즉 한번 깨달으면 더 이상 닦을 필요가 없는
대해탈경계(大解脫境界)에 도달했으면서도
왜 성철 스님은 수행을 계속한 것인가.
선종에서는 견성하면 모든 것을 원만히 증득한다고 했는데
다시 무슨 수행이 필요한가. 깨쳤다지만
혹시 아직까지 무언가 남아있어 닦고 배우는 것이 아닌가.
번뇌가 멸진해도 습기가 남아있어 그것을 없애는, 즉 돈오한 뒤에 다시 점수를 하는 돈오점수가 아닌가.
그렇다면 성철 스님 역시 점수(漸修)를 했단 말인가.
이에 대한 대답은 ‘그렇지 않다’이다.
점수론의 지눌 스님과 돈수론의 성철 스님은 결국 오후 보림에서 확연히 다른 입장 차이를 드러냈다.
“돈오와 점수의 두 문은 모든 성인이 밟아온 길이다.
과거의 모든 성인도 먼저 깨닫고 뒤에 닦아나갔으니,
그 닦음에 의해 증득하지 않음이 없었다.” ― 지눌 <수심결>
이와 같은 지눌의 주장에 대해 성철 스님의 의견은 달랐다.
“고불고조의 말씀을 살펴보면 무심을 철저히 증득한 것을 견성이라 하고,
일체 망념이 일어나지 않아 할 일이 없는 대무심지(大無心地)를 보림이라 했다.”
― 성철 <선문정로>
결국 성철 스님이 주장하는, 또 깨닫고 난 후
체득한 것으로 보이는 보림이란
자유자재한 대무심삼매(大無心三昧)를 일컫는 것이다.
깨달은 뒤에 망상을 하나하나 끊는 것이 보림이 아니라는 말이다.
"일체 망념이 일어나지 않아 할 일이 없는 대무심지"를
<증도가(證道歌)>에 나오는 ‘배움이 끊어진 하릴없는
한가한 도인[閑道人]’의 경지로 바꾸어도 무방할 것이다.
이렇듯 깨친 한가한 도인은 ‘망상도 구하지 않고
참됨도 구하지 않는다(不除妄想不求眞)’고 했다.
성철 스님은 이를 풀이하면서 ‘망상이 일어나도 그대로가 참됨이니,
망상을 내놓고 달리 참됨을 구할 필요가 없다고 해석하면 큰일’이라고 선을 그었다.
한가한 도인은 망상이나 참됨도 완전히 끊어졌기에 그것들이 들어설 곳이 없는 경계를 지칭한 것이다.
도인의 ‘한가함’이란 우리가 세속에서 누리는 ‘풀어진 시간’ 속의
느긋함이 아니다. 도인은 탐욕과 분노,
어리석음의 꺼들림에서 벗어난 대자유 속에 있음이다.
망상과 참됨이라는 양변을 떠난 중도의 시간 속에 놓여 있음이다.
따라서 견성했을 때의 대무심경계에서 온갖 일상사를 자유자재로 영위하는 것이 오후 보림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술 마시고 여자를 품는 행위를
달관의 기행 또는 무애자재의 만행으로 여길 수는 없다.
깨달은 도인에게 그런 망상은 일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일 그런 기행과 만행을 하는 자가 있다면
증오(證俉)가 아닌 단지 해오(解悟)를 얻은 사람일 것이다.
<심경(心經)>에서도 도(道)는 나지도 사라지지도 않으며,
더럽지도 깨끗하지도 않으며, 늘지도 줄지도 않는다고 했다.
깨달은 후 더 수련했다고 해서 그 경지가 깊어지거나,
또 방일한다고 해서 깨침이 부서진다면
그것은 도의 본체가 아닐 것이다.
그래서 한 번 깨친 도는 늘 일상 속에 있음이다.
성철 스님은 법어집 <돈오입도요문론> 강설’의 부록인
<제방문인참문어록(諸方門人參問語錄)>에서 이런 우화를 들려주고 있다.
원율사(源律師)라는 이가 와서 물었다.
“화상께서도 도를 닦으실 때 공력을 들이십니까?”
“그렇다 공력을 들인다.”
“어떻게 공력을 들이십니까?”
“배고프면 밥을 먹고, 피곤하면 잠을 잔다.”
“다른 사람들도 모두 스님과 같이 공력을 들인다 하겠습니까?”
“같지 못하다.”
“왜 다릅니까?”
“그들은 밥을 먹을 때에 밥을 먹지 않고 백 천 가지 분별을 따지며,
잠을 잘 때에는 잠을 자지 않고 백 천 가지 계교를 일으킨다.
그것이 다른 까닭이다.”
율사는 입을 다물었다.
무심지(無心地)를 체득한 도인은 시절인연의 형편에 따라 자유자재하다.
같은 차를 마시고 같은 밥을 먹어도
범부는 온갖 망상 속에 차를 마시고 밥을 먹지만 도인은 일체 망념을 떨치고 차를 마시며 밥을 먹는다.
그래서 도인은 차와 밥맛을 제대로 안다.
범부나 깨친 이나 겉보기에는 평범하다.
도인도 때론 아이처럼 화를 내고 사소한 일에도 기뻐한다.
하지만 그 마음은 완전히 다르다.
빛을 감추고 속세의 티끌과 함께 함이니(화광동진/和光同塵)
진흙에 빠져 물을 묻혀도(타니대수/拖泥帶水),
온 몸을 털로 덮고 머리에 뿔을 이고 있어도(피모대각/被毛戴角)
흔들림이 없다.
“스님께서는 보림에 대해서 병이 다 나아서 병이 없는 그 깨끗한 자리를 보호하는 것이 보림이지, 병 있는 몸을 다시 고친다는 것은 보림이 아니라고 말씀하셨다.
(혜암 스님)
그렇다면 오후 보림 속의 ‘수행’이란 무엇인가.
성철 스님은 깨달은 후의 수행이란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유위행(有爲行)이 아니라고 말한다.
“말을 하자니 ‘수행한다’ ‘짓는다’고 표현했지만 도무지 하는 바가 없고 짓는 바가 없다.
닦을 것이 있고 할 일이 남아 있어서
‘수행한다’ ‘짓는다’고 한 것이 아니다.”― 성철 <선문정로>
그렇다면 오후 보림은 어떤 경지이며 깨달은 이들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깨달음 후의 수행이란 원증한 후의 일상생활로서 겨울이면 핫옷 입고 여름이면 삼베옷을 입으며 배고프면 밥을 먹고 때맞춰 예불을 드리는 것이다.
일상사 그대로가 무량불사(無量佛事)이다.”
“돈오견성하면 불지(佛地)이므로 오후점수(悟後漸修)는 필요 없고
불행(佛行)을 수행한다 함이니, 이것이 무심으로 원증 후의 무사행(無事行)이다.”
― 성철 <선문정로>
오후 보림은 바로 무량불사이며 불행(佛行)이다.
즉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下化衆生)의 실천이다.
깨달음 이후의 일상이 특별한 것은 아니다.
단지 마음이 특별한 것이니, 이는 마음속에 세상이 맑게 비침이었다.
깨달았으면 불법을 전해야 했다.
부처님이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이 구원돼 있음을 가르쳐주려고 오셨음을 알았으니
‘가르쳐야’ 했다.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그 방법은 무궁무진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무척 어려운 길이기도 하다.
깨달은 자들은
부처가 세상에 온 일대사 인연에 대한 응답을 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자비행(慈悲行)이다.
달마가 동쪽으로 온 까닭도 중생제도의 자비행이 아니던가.
이미 깨달은 보리달마가 숭산 소림사에서 면벽하고 9년 동안
좌선을 한 것은 완전히 깨달음을 얻지 못해
다시 수행하고 있었음이 아니었다(보림한 것이 아니었다).
아직도 남아있는 습기를 제거하는 시간이 아니라 불법을 전수해줄 사람을 찾는 기다림의 시간이었다.
혜가에게 법을 전함으로써 비로소 선종의 초조가 된 것이다.
육조 혜능(慧能) 대사도 오조 홍인(홍忍) 대사로부터
법통을 계승하는 가사를 받고 몰래 남쪽으로 도망쳐야 했다.
‘무식한’ 혜능 행자에게 법통이 넘어가자
수백 명의 학인들이 가사와 발우를 빼앗으려 쫓아왔다.
목숨이 실 끝에 매달린 듯 위태로웠다.
혜능 행자는 신분을 속이고 산속에 숨어
사냥꾼과 더불어 16년을 보냈다.
그리고 마침내 불법을 전파할 기회를 얻고 사자후를 토했다.
혜능 대사도 날마다 살생을 하고 육식을 하는 무리 속에서도
내일을 기다렸다. 보림을 한 것은 아니었다.
천태종에 혜사(慧思, 515~577) 선사가 있었다.
그는 깨친 후 외딴 산봉우리에 머물며 산을 내려가지 않았다.
사람들이 물었다.
“도를 깨닫고도 왜 하산해서 중생을 제도하지 않으십니까?”
세상의 의심과 비난에도 그는 꼼짝하지 않았다.
그리고 산 속에서 제자 한 명을 키웠다.
그가 바로 천태종을 일으킨 지자(智者, 지의/智顗) 대사였다.
지자는 동방의 작은 석가로 불린 뛰어난 도사였다.
혜사는 세상 밖에 나오지 않았지만 이 제자 한 사람으로 족했다.
자신보다 더 출중한 제자를 길렀으니 그것이 하화중생을 성취한 것이었다.
임제(臨濟義玄) 스님의 ‘할(喝)’과 덕산(德山) 스님의 ‘방(棒)’도
결국 깨달음 이후의 불행(佛行)이었다.
그 고함과 몽둥이가 불법을 깨웠으니 깨달음을 실천한 것이었다.
성철 스님이 7년 동안 제방에서 머물고 있었음은 어떤 기간을 정해놓고 보림을 한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다만 시절인연이 그를 일으켜 세웠을 것이다.
성철 스님이 봉암사로 간 까닭은 불법을 바로 세우고 부처님 제자를 양성해 지혜와 자비를 전파하려 했음일 것이다.
그것은 당시의 시절인연을 살펴 자신의 할 일을 찾았음을 의미한다.
해방공간에서도 승, 사찰, 종단 모두가 오염되어 어느 한 곳도 성한 데가 없었다.
이 땅의 불교는 몇 군데 손질하고 고쳐서 다시 세울 수 없었다.
부처님을 팔아먹는 모든 것들을 부수고 몰아내야 했다.
다시 시작해야 했다.
성철 스님은 도반들과 그 시작을 책임지기로 했다.
7년 동안 웅크리고 있던 성철 스님이
마침내 서른여섯에 일어섰다. ― 김택근 법보신문 고문
[출처] 작성자 아미산
첫댓글 완릉록의 종강까지 한 번 남았습니다.
다음주 모두 참석하시어 종강을 여여하게 하였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