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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3767
2월15일[재의 예식 다음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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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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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P8gYvOT2Et4
[서울대교구 이승규 토마스데아퀴노 신부님 집전(둔촌동성당 부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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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1)우리네 인생에 있어서 십자가는 선택 과목이 아니라 필수과목입니다!>
사순 시기를 시작하며 이토록 특별한 은총의 시기를 어떻게 하면 보다 의미 있게 보낼 수 있을까? 고민하는 제게 예수님께서는 사순 시기뿐만 아니라 평생토록 의미 있고 행복하게 지낼 수 있는 한 가지 비결을 건네주셨습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여기서 십자가를 어떻게 지는가? 그것이 정말 중요한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일년에 한 번 사순 시기 때마다, 아니면 가끔 생각날 때마다 십자가를 지라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매 순간 십자가를 지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지기 전에 한 가지 작은 숙제를 하나 주시네요. ‘자신을 버리고’ 십자가를 지라고 하십니다. 이번 사순 시기 동안 한 번 노력해봐야겠습니다.
매일 아침이면 오늘 내가 어깨에 짊어지고 걸어야 할 십자가가 무엇인지 깊이 성찰해봐야겠습니다. 불평불만이나 군말 늘어놓지 않고 기꺼이 그 십자가를 져야겠습니다. 내 안에 가득한 상처와 분노, 갖은 욕심과 질투를 내려놓은 다음 십자가를 짊어져야겠습니다.
돌아보니 그리 길지도 않은 날들 안에 어찌 그리도 많은 십자가들이 즐비하던지 깜짝 놀랐습니다. 더구나 한번 짊어진 십자가는 마치도 ‘평생 웬수’처럼 딱 달라붙어 떨어지지도 않습니다. 너무 괴로워 도망이라도 가려 하면 점점 더 찰거머리처럼 달라붙습니다.
그래서 최종적으로 느낀 바가 한 가지 있습니다. 우리네 인생에 있어서 십자가는 선택 과목이 아니라 필수과목이라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삶의 한 부분이라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일생 생활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마음으로 십자가를 지는가에 따라 십자가가 은총이 될 수 있는가 하면 죽음으로 몰고 가는 흉기도 될 수 있습니다. 밥 먹듯이 다가오는 십자가입니다. 친구처럼 다가오는 십자가입니다.
이왕 지고 가야 할 십자가라면 기꺼이 지고가면 좋겠습니다. 십자가가 다가올 때 마다 절친한 친구가 또 놀러 왔나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십자가가 다가올 때마다 ‘십자가의 달인’ 예수님을 바라봐야겠습니다. 예수님은 기꺼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연히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예수님은 당당하게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예수님은 기쁘게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 결과 영광스런 승리를 맛보셨습니다.
은혜로운 사순 시기, 그저 내 한 몸 챙기기 바쁜 육적인 삶, 그냥 하루하루 살아가기에 빠듯한 세속의 삶을 넘어 영적인 삶으로 넘어가기 위해 노력해야겠습니다.
그저 육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면 십자가는 짜증 덩어리요 스트레스의 원천이지만 영적으로 충만한 삶을 살고있는 사람에게 있어 십자가는 더 이상 십자가가 아니라 하느님 사랑의 표시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가 다가올 때마다 반드시 기억해야겠습니다. 십자가는 변장하고 찾아오시는 하느님의 또 다른 얼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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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바꿔야 할 것을 바꿀 수 있는 용기>
외국 손님들이 한국을 방문할 때, 여기저기 모시고 다니다 보면 다들 큰 호기심을 가지고 제게 던지는 질문이 한 가지 있습니다. “가는 곳마다 십자가가 왜 이렇게 많습니까? 저게 다 교회가 맞습니까?”
그러고 보니 이 땅에는 정말 십자가가 많더군요. 여기저기, 50미터 100미터도 못가서 나타나는 교회들, 그 교회의 꼭대기에는 다들 보란 듯이 십자가를 매달고 있습니다.
한(恨)으로, 고통으로, 슬픔으로 점철된 ‘십자가의 민족’이어서 그런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십자가는 왜?’ ‘고통은 왜?’라는 질문은 인간 역사 안에서 늘 되풀이되어온 질문입니다. 어떻게 보면 인류의 역사는 십자가의 역사요, 고통의 역사입니다.
그래서 시편 작가들도 고통의 연속인 인간의 삶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인생은 기껏해야 칠십 년, 근력이 좋아서야 팔십 년, 그나마 대부분이 고생과 슬픔이오니 덧없이 지나가고, 우리는 나는 듯 가버리나이다.”
밀물이 밀려오고, 썰물 빠져나가듯이 평생토록 반복적으로 다가오는 고통 앞에 시편 작가는 차라리 체념하고 수용하는 게 더 낫다는 식의 표현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 왜 인간에게 고통을 허락하시는가?’라는 질문에 사람들은 너무도 쉽게 대답합니다.
“인류의 고통은 인간이 저지른 죄악, 특히 원죄에 대한 경고이자 징벌입니다. 십자가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정화하기 위해 보내시는 선물입니다. 고난은 인생의 보약입니다.”
‘고통은 왜?’란 질문 앞에 지금까지 교회가 제시한 전형적인 답안이었습니다. 물론 고통을 통해 신앙이 성장하고, 십자가를 통해 우리의 신앙은 일취월장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고통에 대한 조건 없는 수용, 십자가에 대한 도에 넘치는 수동적, 소극적인 자세는
최선책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로서의 삶에 필수 불가결한 조건으로 십자가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자신을 버리라는 당부는 힘에 겨우니 체념하라는 말, 어쩔 수 없으니 그 자리에 주저앉으라는 말이 절대로 아닙니다. 자신의 그릇을 더욱 크게 만들라는 뜻입니다. 그 어떤 난관이 다가와도 당황하지 않고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큰 사람이 되라는 의미입니다.
제 십자가를 지라는 말은 매일 와닿는 고통과 악, 병고와 불의 앞에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고
지내라는 말이 절대로 아닐 것입니다. 피할 수 없는 고통은 어쩔 수 없이 수용해라. 그러나 퇴치할 수 있는 고통은 마땅히 퇴치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인간의 고통을 거슬러 투쟁하셨습니다. 인간의 불행과 슬픔에 마음 아파하시며 이를 없애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셨습니다. 병든 이를 고쳐주셨고, 굶주린 이들을 배불리셨으며, 슬퍼하는 이들을 위로하셨습니다. 멸시받는 이들에게 용기를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불행을 원치 않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힘에 겨운 십자가를 우리에게 보내셔서 우리를 괴롭히시는 분이 절대로 아니십니다.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갖은 고난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방할 수 있는 십자가는 미리 예방하고, 극복할 수 있는 고통은 각고의 노력을 다해 극복해야만 합니다.
폴 클로델이란 영성가의 기도가 오늘 하루 십자가를 지고 가는 우리 삶의 양식이 되길 바랍니다.
“주님, 바꿔야 할 것을 바꿀 수 있는 용기를 주시고, 어쩔 수 없는 것은 받아들이는 평온함을 주십시오. 그리고 이를 분별할 수 있는 지혜도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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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7QoVaFIp0T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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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한 방울의 물을 어떻게 마르지 않게 할 수 있을까?>
사막 한 가운데 폐허가 된 주유소가 있고 그곳엔 물 펌프 하나가 유일하게 남아있었습니다. 목이 말라 실신할 지경에 이른 나그네가 주유소의 물 펌프를 발견하고 달려갔습니다. 거기엔 바가지의 물과 함께 다음과 같은 내용의 팻말이 있었습니다.
“이 펌프 밑에는 엄청나게 시원한 지하수가 있어요. 누구든지 이 펌프 물로 갈증을 해소하세요. 명심하세요. 펌프 앞에 놓인 바가지의 물은 절대로 마시면 안 돼요. 이것은 ‘마중물’. 잊지 마세요. 다음 분을 위해서 ‘마중물’을 꼭 채워놓고 가세요!”
우리 안에도 마중물 한 바가지가 있습니다. 이것을 잃지 않으려면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모기처럼 됩니다. 모기는 자기의 생명을 잃지 않으려 남의 생명을 취합니다. 그렇다고 죽지 않는 게 아닙니다. 생존의 불안함 속에서 어떤 관계도 맺지 못하고 외롭게 죽어갑니다.
고등 동물이 될수록 한 바가지의 물, 곧 생명, 혹은 피는 관계를 맺는데 투자됩니다. 모든 관계는 피로 이뤄집니다. 피는 나의 돈, 먹을 것, 명예, 권력 등 내가 가졌다고 믿는 모든 것입니다. 그것들이 사라지면 사람은 죽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내어놓으면 가정이나 사회에 소속되게 됩니다. 그 관계가 나를 불안해서 해방해 줄 수 있다고 믿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가지려면 먼저 내어놓을 줄 알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이것을 제 나름대로 이름을 붙이자면, ‘마중물 법칙’이라 하겠습니다. 물을 부을 때는 마치 투자하는 것과 같습니다. 투자는 이익을 예상하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내가 부은 물보다 더 많은 물이 나오리라는 희망과 믿음이 없다면 물을 붓지 않을 것입니다.
부모는 자녀에게 주는 사랑도 투자냐고 할 수 있습니다. 이익이 없는 투자는 없습니다. 분명 그 투자는 남편이나 사회, 혹은 자녀가 자라서 나에게 해 줄 수 있는 것 등의 이익을 줍니다.
양심의 칭찬도 있겠습니다. 이러한 투자가 천국을 만듭니다.
그런데 목숨은 하나뿐입니다. 어떻게 하나뿐인 목숨을 투자할 수 있을까요? 사실 모든 게 목숨과 연계됩니다. 돈과 명예, 먹는 것도 다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들로 시험을 해 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그 그릇에서 투자하는 게 몇 배로 나오느냐가 보입니다. 그러다 보면 목숨도 투자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영화 ‘삼사라’에서 어떻게 한 방울의 물이 마르지 않겠느냐는 화두를 던집니다. 그 방법은 바다에 자기를 던지는 것뿐입니다. 바다는 생명의 근원입니다. 사람은 저절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코디 리라는 청년은 자폐를 앓고 앞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아메리카 갓 탈렌트에서 우승하여 100만 달러를 어머니에게 선물합니다. 그는 어머니를 위한 노래를 불렀습니다. 어머니는 자신의 모든 것이고 빛이라고 합니다.
어린아이들도 부모에게 그렇게 투자할 줄 압니다. 자기 생명이 저절로 나오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기에 그 원천에 투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째서 하느님께 투자하지 않고 자신의 힘으로 그 한 방울의 물을 지키려고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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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오늘 성서 말씀을 묵상하면서 예전에 읽었던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 ‘가지 않은 길’이 생각났습니다. 먼저 시를 함께 감상하면 좋겠습니다. “노란 숲 속에 길이 두 갈래로 났었습니다./ 나는 두 길을 다 가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오랫동안 서서 한 길이 굽어 꺾여 내려간 데까지/ 바라다볼 수 있는 데까지 멀리 바라다보았습니다./ 그리고, 똑같이 아름다운 다른 길을 택했습니다./ 그 길에는 풀이 더 있고 사람이 걸은 자취가 적어/ 아마 더 걸어야 될 길이라고 나는 생각했었던 게지요./ 그 길을 걸으므로, 그 길도 거의 같아질 것이지만/ 그 날 아침 두 길에는/ 낙엽을 밟은 자취는 없었습니다./ 아, 나는 다음 날을 위하여 한 길은 남겨 두었습니다./ 길은 길에 연하여 끝없으므로/ 내가 다시 돌아올 것을 의심하면서./ 훗날에 훗날에 나는 어디선가/ 한숨을 쉬며 이야기할 것입니다./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다고/ 나는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하였다고/ 그리고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2000년 전에 가지 않은 길을 선택했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 ‘시몬, 안드레아, 야고보, 요한’입니다. 그들은 운명처럼 예수님을 만났고, 그물과 배를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이제 그들은 호숫가에서 고기를 잡을 때와는 비교할 수 없는 삶의 충만함과 희열을 보았습니다. 이제 그들은 호숫가에서 고기를 잡을 때와는 비교할 수 없는 삶의 고난과 절망도 보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선택하였고, 천국에서 빛나는 별이 되었습니다.
돌아보면 ‘저도 가지 않은 길’을 선택하였습니다. 어려서부터 저는 선생님이나 군인이 되고 싶었습니다. 누군가를 가르친다는 것도 매력적이고, 군인이 입는 제복도 매력적으로 보였습니다. 아버님은 교직에 계시지는 않았지만 사범학교를 나왔고, 고모부도 사범학교를 나와서 교장으로 정년퇴임을 하였습니다. 그런 제게 예수님께서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고 부르시지는 않았지만, 운명처럼 저는 ‘가지 않은 길’을 선택하였습니다. 고등학생 때 친하게 지내던 친구들이 신학교에 간다고 하였습니다. 제의를 입고 미사를 봉헌하는 신부님의 모습도 멋져 보였습니다. 성소(聖召)에 대한 깊은 고민도 없이 본당 신부님께 신학교에 가고 싶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본당 신부님은 성적표를 가져오라고 하였습니다. 부모님과 면담하였습니다. 당시 쉬고 있던 아버지가 성당에 나오는 조건으로 허락하였습니다. 아버지는 제가 신학교에 입학한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그 뒤로는 아주 열심히 신앙생활 하였습니다. 사제가 된지 33년이 지났습니다. 이제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 교사나 군인이 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돌아보면 제가 선택한 사제의 길은 교사와 군인의 모습을 모두 담고 있습니다. 사제는 강론을 통해서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합니다. 이는 교사가 교실에서 학생들에게 지식을 선포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군인은 전선에서 적을 막아내고, 국민을 보호합니다. 사제는 악의 유혹을 물리치고, 교우들이 하느님께로 향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줍니다. 사제의 직무에는 교사와 군인의 역할이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성서 말씀은 선택의 기준을 명확하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하느님의 계명과 하느님의 뜻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선택하면 하느님께서는 축복을 주신다고 합니다. 반대로 하느님의 계명을 따르지 않고,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으면 하느님과 멀어질 것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선택과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을 이야기합니다. 사제는 서품 받기 전에 3가지 서약을 합니다. 독신서약, 신앙고백, 교구장에 대한 순명입니다. 사제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독신으로 살고, 자기 뜻이 아닌 교회의 가르침을 전하고, 교구장의 뜻을 충실히 따른다면 하느님의 축복을 받을 것입니다. 둘째는 선택함에 있어 자신의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니 동산에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죽기까지 십자가를 충실히 지고 가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에게도 “나를 따르려면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 없는 부활은 없습니다. 달콤한 열매만 찾아가는 선택은 당장은 좋겠지만 그 끝이 항상 좋은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가난도, 질병도, 일찍 죽는 것까지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저희가 무엇을 해야 할지 가르치고 도와주시어 모든 일을 주님과 함께 시작하고 마치게 하소서.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주 너희 하느님의 계명을 듣고,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며 그분의 길을 따라 걷고, 그분의 계명과 규정과 법규들을 지키면, 너희가 살고 번성할 것이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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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9,22-25: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살 것이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수난을 예고하시면서 당신을 따르는 길이 어떤 길인지, 그리고 우리가 세상에서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가르치신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을 따르라고 하신다. 당신을 닮는 것만이 우리에게 참된 행복을 가져다줄 수 있다. 우리 인간은 하느님 안에 있을 때만이 진정으로 행복과 자유를 누릴 수 있다. 하느님 안에서만 자유롭다. 이 행복과 자유를 누리면서 살아갈 수 있을 때, 우리는 하느님을 닮는다. 하느님의 모습을 완성할 수 있다는 말이다. 하느님의 모습은 매일 우리 자신의 십자가를 잘 짐으로써 이룰 수 있다. 주님의 말씀대로 자신을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면서, 주님을 닮아가면서 이룰 수 있다. 내가 지고 가는 십자가는 다름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이기기 힘든 상대는 다른 사람이나, 환경이 아니고 바로 나 자신이다. 나 자신이 가장 큰 십자가이며, 이 십자가는 다른 누구도 대신 져줄 수가 없는 나만이 지고 갈 수 있는 것이다. 나의 인생을 누가 대신 살아줄 수 없는 것처럼, 나의 십자가도 꼭 나만이 질 수 있고, 그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는 우리 자신을 완성해야 한다. 이것이 하느님의 뜻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헛되이 보내지 말라는 주님의 말씀이다. 우리의 생명은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다. 이 생명을 우리가 마음대로 취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 생명이 살아 있는 한 자신의 안일만을 위해 이기적인 삶을 살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 시간과 능력을 그리고 가진 것을 나누어야 한다. 그래야 자신의 생명을 영원히 살릴 수 있다는 말씀이다. 우리가 입으로만 주님을 부르고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 마음이 주님으로부터 멀리 있다면 주님으로부터 우리도 외면을 당할 것이다. 주님께서 외면하시는 것이 아니라, 아마 우리가 그분을 외면하여 바라볼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이 사순시기가 이제 진정으로 우리에게 은총의 때가 될 수 있도록, 우리 자신이 근본적으로 변화하는 시기가 될 수 있도록, 그래서 영광의 부활에 우리도 기쁘게 참여할 수 있도록 우리의 십자가를 잘 지고 갈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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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최정훈 바오로 신부님]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에 대한 첫 번째 예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 하고 이르십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이 길이 오직 당신만의 길이 아니라, 당신을 따르는 모든 제자의 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을 따르는 이는 주님께서 하신 일과 그분의 삶도 “반드시” 따라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십자가를 지고 죽음을 통하여 부활하신 것처럼, 우리도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바칠 때,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십자가를 지는 것은 “날마다” 이루어져야 하는 과업입니다. 날마다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은, 희생이 한 번으로 그치거나 문득 생각이 들 때 어쩌다 하는 행위가 아니라, 연속적이고 항구하여야 함을 말합니다. 사실 하느님을 닮아 가는 비결은 항구함에 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닙니다. 주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어렵고 거대한 영웅적인 일을 한 번 하는 데 있지 않고, 작고 단순한 일을 꾸준하게 하는 데 있습니다. 날마다 참례하는 미사, 날마다 바치는 아침 기도와 저녁 기도, 날마다 이웃에게 베푸는 친절과 미소 짓는 얼굴, 날마다 하는 어려운 이들을 위한 봉사와 나눔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치를 지닙니다.
그런 항구함이 우리를 변화시키고, 더 큰 십자가를 기꺼이 질 수 있도록 준비시킵니다. 일상의 삶에 놓인 작은 십자가들을 거들떠보지 않는 사람이 목숨으로 주님을 증언하여야 하는 결정적인 순간에 순교라는 거대한 십자가를 껴안을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날마다” 항구하게 자신의 십자가를 묵묵히 지고 간다면, 이전에 자신이 질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하였던 더 큰 십자가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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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십자가의 길 - 나 자신을 위한 길>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루카 9,22)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 예고 말씀’에 있는 ‘반드시’라는 표현과‘... 해야 한다.’라는 표현 때문에, 예수님께서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운명’으로 표현하신 것으로 오해하기가 쉬운데, 그 표현들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을 나타내는 표현들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나타내는 표현들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하느님의 섭리, 또는 하느님의 인류 구원 계획으로 바꿔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십자가 수난과 죽음은, 인간들을 구원하시려는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당신의 목숨을 속죄 제물로 바치신 일인데, 허무하게 죽음으로 끝난 일이 아니라 부활로 마무리된 일이기 때문에, 부활에 초점을 맞춰서, 예수님 말씀을, “나는 많은 고난을 겪고 살해당하겠지만 ‘반드시’ 되살아날 것이다.”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사도들이 처음에 그랬던 것처럼 오늘날의 우리도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 예고 말씀’을 대할 때 수난과 죽음만 생각하고 부활은 생각하지 않거나 덜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은 분명히 큰 사건이고, 중요한 사건이지만, 예수님의 부활은 훨씬 더 큰 사건이고, 훨씬 더 중요한 사건입니다. 신앙인은 십자가 뒤에 있는 부활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입니다. 십자가는 목적지가 아니라 목적지까지 가는 과정일 뿐입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루카 9,23-25)
신앙인의 신앙 여정에서 ‘십자가의 길’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닙니다. 신앙 여정 자체가 십자가의 길입니다.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길 자체가 십자가의 길입니다. ‘누구든지’라는 말씀은, 십자가를 면제받는 사람은 없다는 뜻이기도 하고, 그 길은 모든 사람에게 개방된 길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내 뒤를 따라오려면”은 “내가 주는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입니다. 신앙생활의 목적은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는 방법이 곧 십자가입니다. “자신을 버리고”는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을 방해하는 내적인 걸림돌들을 모두 제거하라는 뜻입니다.
가장 먼저 치워야 할 걸림돌은 ‘지금 당장’ 편하게 지내고 싶은 욕구입니다. 신앙생활의 목적지가 어디인지 알고 있고, 목적이 무엇인지도 알고 있지만, 그곳까지 가는 길은 힘들고 어렵고 불편한 길로만 보이고, 그래서 그 길을 걸어가는 것은 나중으로 미루고 우선 지금은 그냥 편하게 살고 싶어 하는 것, 그런 욕구나 충동부터 버려야 합니다.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것들에 대한 욕심과 집착을 버리는 것도 중요한 일이고, 자신을 버리는 일에 포함됩니다. <‘자신을 버리고’는 그 모든 ‘버림’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날마다’라는 말씀의 핵심은 ‘끝까지’입니다. 중간에 멈추는 것은 처음부터 출발하지 않은 것과 같습니다. ‘제 십자가’는 신앙인으로서 내가 해야 할 신앙생활의 모든 일, 즉 특별한 희생이나 봉사나 헌신이 아니라, 신앙인이라면 당연히 해야 하는 일들입니다. “나를 따라야 한다.”라는 말씀은, 당신이 걸어가신 길 외에 다른 길은 없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살리려고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셨지만, 나는 나 자신이 살려고 그 길을 걸어갑니다. 그러니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는 일은 희망과 기쁨입니다.>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것들에 대해 집착하는 사람입니다. “목숨을 잃을 것이고”는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고”입니다.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것들을 모두 버리는 사람”입니다. “목숨을 구할 것이다.”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입니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라는 말씀은, “이 세상의 허무한 것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 일에 아무 소용이 없다.”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에서 ‘온 세상’은 먼지처럼 허무하게 사라질 것들, 하느님 나라에 가지고 들어갈 수도 없고,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는 일에 아무 도움이 안 되는 것들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믿음, 희망, 사랑 같은 것만 하느님 나라에 가지고 들어갈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는 것’은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는 것을 뜻합니다. 사람들 가운데에는 ‘허무하게 사라질 것들’인데도 그것들을 조금이라도 더 차지하려고 욕심부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을 죽기 전에라도 깨닫는다면 다행인데, 끝까지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있고, 그 경우에는 조금이라도 더 차지하려고 욕심부렸던 그것들과 함께 그 자신도 허무하게 사라질 것입니다. 무엇이 영원한 것이고, 무엇이 허무한 것인지를 올바르게 판단하는 것, 그리고 영원한 것만 추구하고 허무한 것은 버리는 것, 바로 그것이 ‘신앙인의 지혜’입니다. 그 지혜는 머리가 좋다고 또 공부를 많이 한다고 생기는 것이 아니라, 신앙인답게 충실하게 생활하는 신앙인들에게 성령께서 내려 주시는 은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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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정진만 안젤로 신부님]
루카 복음서의 저자는 베드로의 신앙 고백(9,18-21 참조)에 이어 수난과 부활에 대한 첫 번째 예고(9,22 참조), 예수님을 따르는 방법과 조건(9,23-27 참조),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9,28-36 참조)를 차례로 전해줍니다.
이와 같은 전개는 마르코 복음서와 마태오 복음서에서도 같습니다. 세 복음서의 저자들은 베드로의 신앙 고백을 시작으로 예루살렘에서 일어날 예수님의 파스카 사건을 준비합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처음으로 당신의 미래, 곧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예고하십니다. 여기에서 루카는 ‘-해야 한다’를 뜻하는 비인칭 동사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단어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예수님께서 스스로 선택하실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뜻에 따른 필연적 결과임을 강조합니다.
루카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님께서는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성경에 기록된 것, 다시 말해 이미 예언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신 하느님의 구원 약속을 완성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과 부활을 예고하신 다음에, 제자가 되기 위한 조건을 제시하십니다. 무엇보다 먼저, ‘자기 자신을 버려야 합니다.’ 여기에서 ‘자기 부인’은 관계의 재설정, 곧 하느님을 중심으로 예수님의 가르침에 절대적으로 순종하여 제자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는 사람은 자기중심적인 생활 방식에서 벗어나 예수님 중심으로 살아야 합니다.
다음으로, ‘자신의 십자가를 짊어져야 합니다.’ 이에 따라 예수님의 제자들은 십자가 형벌을 선고받은 것처럼, 선고받은 장소에서 처형당하는 장소로 옮겨 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걸어가실 ‘십자가의 길’은 제자들이 뒤따라 걸어갈 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시선을 향하시면서, 먼저 당신께서 걸어가실 십자가의 길을 보여주시고, 제자들에게 그 길을 함께 걸어가자고 초대하십니다. 이렇게 십자가의 고난과 영광으로 초대받은 우리에게 남은 것은 선택과 결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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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이기우 사도 요한 신부님]
“보아라, 내가 오늘 생명과 행복, 죽음과 불행을 내놓는다”(신명기 30,15-20)
오늘 우리는 생명과 죽음 중의 하나를 선택하라는 신명기의 말씀과, 참 생명을 선택하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와 부활을 예고하시는 복음 말씀을 들었습니다.
신명기의 말씀은 생명을 선택하면 행복을 누리게 되리라는 하느님의 약속을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해준 내용이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생명은 아직까지 육신 생명이요 행복은 현세적 번영을 뜻했습니다. 그리고 그 생명과 행복은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서 누리게 될 것이라는 뜻이었습니다. 이렇게 정치적이고 지리적인 뚜렷한 경계를 지닌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는 정치적이고 지리적인 경계를 초월할 뿐만 아니라 현세적인 한계도 넘는 보편적인 현실이었습니다. 내세에까지 열려 있되 현세의 어느 지리적 범주도 다 포괄하는 보편적인 현실이었습니다.
진리로 열리고 진리가 다스리는 이 나라에서 누릴 생명 역시 지금 여기서부터 육신과 영혼이 모두 충만한 생기를 누릴 전인적인 생명이었습니다. 이렇게 보편적인 현실에서 전인적인 생명을 누리는 것이야말로 참된 행복임을 예수님께서는 선포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사랑하듯이 몸과 마음을 다하여 이웃을 사랑하되, 특별히 보잘것없는 이웃을 섬기는 사랑의 삶을 살아가셨습니다. 그분의 말씀을 듣던 청중은 주로 갈릴래아 유다인들이었는데, 그들은 그들의 땅을 차지한 예루살렘의 부유한 유다인 부재지주들로부터 착취당하면서도 무시당하고 있었던 데다가, 갈릴래아 평원이 비옥했던 그 만큼 그들을 수탈하고자 로마제국이 부과한 과중한 세금까지 겹쳐서 이중으로 억눌리고 있었습니다.
이렇듯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땅에서 행복과 번영을 누리기는커녕 불행과 고통에 시달리던 가난하고 힘 없는 유다인들 한가운데에서 행하시던 복음선포는 “영과 진리 안에서”(요한 4,23) 하느님께 바치신 진실한 제사였습니다. 하지만 이렇듯 하느님의 약속과는 반대로 역설적으로 상황이 엄중한 만큼 그 제사는 비장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초대교회의 신앙인들은 유다교의 박해 속에서도 예수님께서 사셨던 바를 따랐습니다. 이러한 신앙 증거는 로마 제국의 전 영토에 퍼져서 로마의 박해를 받던 고대교회 3백 년 동안에도 이어졌고, 신앙 진리와 정의의 가치로 살아가는 공동체가 폭발하듯이 늘어나 인류 역사의 신기원을 이루었습니다. 이 3백 년 동안에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의 길을 따라 걸었습니다.
무신론자들과 우상숭배자들에게 배척당하고 권력자들에게 박해를 받으면서도 구차하게 목숨을 구걸하려 하지 않고, 신앙 진리와 정의의 가치를 목숨보다 더 소중히 여기며 영원한 생명을 얻었으며, 빛나는 별처럼 후대 신앙인들을 비추어주고 있습니다.
비록 박해 받은 육신 생명은 한 알의 밀알처럼 땅에 떨어져 죽임을 당했어도 땅 속에서 더 많은 싹으로 불어난 이 밀알은 더 많은 입교자들로 열매를 맺음으로써 십자가로 부활의 역설적 진리를 증명해 주었습니다.
죽음과 불행보다는 생명과 행복을 선택한 후대 신앙인들은 조선 시대 후기에 이 땅에서도 이어졌습니다. 실로 오묘한 섭리로 들어온 신앙의 진리를 받아들여 교회를 세웠고, 성직자 없는 평신도 교회에서도 스스로 성사에 대한 갈망으로 성사를 베풀어 놀라운 선교 성과를 이루어냈습니다.
그러다가 제사금지령으로 박해가 시작되자 자발적으로 조직했던 성사조직을 해체하고 성직자 영입운동을 벌이는 한편, 박해를 피하여 전국의 심산유곡으로 찾아들어 모두 189군데에 교우촌을 세우고 신앙의 가치를 지켜나갔습니다.
신분으로 백성을 나누어 차별하던 사회적 불의에 저항하여, 하느님을 닮도록 창조된 사람이 귀하다는 천주교 교리를 의롭게 증거했습니다. 하느님을 믿을 수도 없었고, 개인들은 양심의 자유가 인정되지도 않았으며, 오로지 임금 혼자서만 자유롭고 양반들만 평등하던 조선 사회에서, 교우촌 신자들은 공소에 모여 기도를 바치며 영과 진리 안에서 진실한 제사를 하느님께 봉헌하였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수많은 신자들이 조정과 유림의 박해로 죽어갔습니다. 칼에 목이 떨어져 죽고, 매맞아 죽고, 바위돌에 패대기쳐져서 죽고, 얼굴에 바른 젖은 창호지로 숨막혀 죽고, 굶어서 죽고, 매맞으며 퍼진 장독으로 죽고, 나중에는 수십 명씩 생매장당해서 죽어갔습니다.
그렇게 죄 없는 자기 백성을 죽인 조선 왕조는 국력이 소진되어 일제에 멸망했고, 입술로 배교했다가 풀려나와서는 후손들에게 순교정신을 가르친 배교자들 덕분에 조선의 천주교회는 살아남았고 드디어 신앙의 자유를 얻었습니다. 그런데 아직 이 자유를 누리는 땅이 반쪽입니다.
이 고귀한 희생으로 얻은 신앙의 자유는 우리만을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라 온 겨레를 위해 주어진 것입니다. 식민지배와 전쟁, 가난과 독재의 가시밭길까지 무사히 건너온 우리 교회와 신자들은 신앙의 자유와 진리와 정의의 가치를 온 겨레에게 나누어주어야 할 소명과 십자가를 받고 있습니다.
이 또한 생명과 행복, 죽음과 불행 중에 선택하라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속합니다. 갈라진 겨레, 나누어진 국토로 인한 불행을 딛고 하나된 겨레, 통일 조국을 향하여 우리의 올바른 선택은 계속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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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교구 한재호 루카 신부님]
세상에 참으로 많은 종교가 있지만, 믿음의 대상이 비참한 몰골을 하고 있고, 또 그런 모습을 경배하는 경우는 그리스도교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가령 불교는 부처상을 앞에 두고 예배하는데, 그 모습은 매우 평화롭고 세상 고통을 초탈한 것처럼 보입니다. 원불교는 동그란 원을 그려 우주의 궁극적 진리를 표현합니다.
이슬람교는 쿠란의 여러 문구를 예술적으로 그려 내는데, 이 역시 알라의 초월성을 상징합니다. 그런데 유독 그리스도교만이 예수님께서 못 박혀 돌아가신 모습의 십자가를 걸어 놓습니다. 절대자의 고통, 그 절대자의 죽음을 앞에 두고 경배하는 것입니다. 전지전능하시지만 동시에 무능하시고, 초월적이시나 가장 버림받은 곳에 머물러 계시는 분을 경배합니다.
십자가는 죄인이 지고 가는 형벌 도구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그 위에서 죽었다는 것은 극악무도한 죄를 지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죄도 없으신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십니다. 세상의 불의와 부조리로 억울하게 고통받는 이들과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무겁습니다. 예수님께서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가신 이유는 가족이라는 무게, 경제적 어려움이라는 무게, 사회적 책임이라는 무게 등 온갖 무게에 짓눌려 고생하는 이들과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십자가는 외로운 자리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간다는 것은 갖은 비난을 받아들인다는 것이고, 십자가를 지고 죽음을 향하여 걸어가는 것은 철저하게 고독할 따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외로움에 떨고 있는 이들과 함께하시려고 십자가를 지십니다. 이렇듯 예수님께서는 억울하게 고통받고 있는 이들, 삶의 무게에 짓눌려 살아가는 이들, 외로움에 떨고 있는 이들의 하느님이십니다.
하늘 저 높은 곳에서 이들을 내려다보시며 혀를 차시는 분이 아니라 그들과 함께 고통받으시고, 그들의 노고를 함께 짊어지시며, 그들의 외로움을 사랑으로 채워 주시려고 몸소 그들의 자리인 십자가를 지고 가십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분을 모시고 경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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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9,24)
인간의 인생은 태어나서 죽는 순간까지 그리고 매일 아침 일어나는 순간부터 잠자리에 드는 순간까지 끊임없는 선택과 결단의 연속입니다. 그 선택이 올바른 선택이라면 행복한 열매를 맺을 수 있겠지만, 그 선택이 잘못된 선택이라면 불행한 결과를 낳습니다. 이는 개인이나 공동체 그리고 정부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잘못된 선택과 결단이 인류의 치명적인 결과인 원죄를, 잘못된 정부 시책은 경제적 손실은 물론 환경 파괴로 인해 우리 세대만이 아닌 우리 후손에게 엄청난 재앙을 가져다준 사례들이 비일비재했습니다. 이처럼 잘못된 선택이 가져다준 결과는 엄청난 고통과 죽음을 불러들입니다.
오늘 하느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느님의 계명을 전해준 다음 자기스스로 선택하도록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오늘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세우고, 생명과 죽음, 행복과 불행, 축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내놓았다. 너희와 너희 후손이 살려면 생명을 선택해야 한다. 또한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말씀을 들으며 그분께 매달려야 한다.”(신30,19~20) 사순시기는 바로 선택과 결단의 시기이며, 그 선택과 결단의 기준과 지향은 바로 생명이고 행복이며, 축복의 삶을 위한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생명이신 하느님과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하느님께 매달려 살아야 합니다.
생명을 얻고 영원한 생명을 누리며 살기 위한 길을 예수님께서는 당신 먼저 그 길을 향하면서 다음과 같이 명확하게 수난을 예고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대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받아 죽었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9,22)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도 생명을 얻고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부활의 삶을 살려거든, 선택하고 결단하도록 촉구하고 있습니다. 그 까닭은 바로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9,24)라고 진실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를 위해 당신을 따르는 사람 역시도 반드시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9,23)라고 단언하십니다. 당신을 따르는 길과 삶을 살도록 모두를 초대하고 재촉하시지만 강요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진정 당신을 따르려면 다음과 같은 2가지 요건을 충족해야만 합니다. 무엇보다 앞선 요건은 자기 자신을 버리고 따라야 한다, 는 점입니다. 사실 우리는 세례성사를 통해서 우리의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했으며, 이로써 우리의 참 주인은 그분이심을 고백했고 그분의 뜻을 살겠다고 다짐하고 맹세했습니다. 더 나아가서,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한 증거는 바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를 짊어지셨던 예수님처럼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는 사실입니다. 인생은 피할 수 없는 고통을 겪게 되겠지만, 그리스도를 따르는 그리스도인은 의지적으로, 믿음으로 삶의 고통을 사랑으로 받아들이고 짊어지고 가면서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고 세상의 남은 고난에 참여하려고 합니다. 삶에는 어쩔 수 없고 피할 수 없는 고통이 있겠지만, 바오로 사도의 권고처럼 날마다 겪는 고통을 무의미하게 보내는 것이 거룩한 산 제물로 바쳐드려야 합니다. 자발적으로 기꺼이 십자가를 짊어지고 따르는 까닭이란 이미 언급했었지만, 그리스도인은 고난과 고통이 좋아서, 곧 피학대증被虐待症(=고통을 받음으로써 죄책감에서 벗어나고 보상받는다고 생각하는 믿음, 또는 이성으로부터 정신적ㆍ육체적 학대를 받는 데서 즐거움을 느끼는 정신 상태) 환자가 아닙니다. 그 이유는 바로 그리스도를 따르고자 함이며 아울러 목숨을 얻기 위한 신앙적 결단이며 고백에서입니다. 비록 어리석게 보이는 십자가의 길과 삶처럼 보이지만 그 길이 아닌 다른 길은 있을 수 없고 그 길을 따르는 삶이야말로 가장 지혜로운 선택이며 결단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삶이야말로 생명을 얻고 더 얻는 길, 곧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희망하는 사람만이 자기 목숨을 구할 것입니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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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신학생 때 저를 신경 쓰게 했던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무릎 통증입니다. 고등학교 때 교통사고 났던 적이 있는데, 당시 제대로 치료하지 않아서인지 신학교에 들어가서 계속 통증이 있었습니다. 병원에 가보니 무릎에 물이 많이 찼다면서 커다란 주사기로 물을 빼주면서 무릎 사용을 하지 않아야지, 그렇지 않으면 더 안 좋아질 것이라는 말씀을 의사 선생님께서 해주셨습니다.
문제는 신학교에서 기도할 때, 무릎을 반드시 끓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깁스를 한 것도 아니어서 아픈 사람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무릎이 아프다고 하면, ‘젊은 놈이 뭘 아파?’라는 식입니다. 무릎 아픈 것보다 꾀병 부리는 것처럼 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저를 더 힘들게 했습니다.
고통은 단절과 고립에서 온다고 합니다. 세상에 홀로 있다는 느낌이 있을 때, 우리는 고통 안에 머물게 됩니다. 따라서 이 고통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두말할 필요 없이 ‘연결’을 깨닫는 것입니다. 혼자가 아님을, 함께할 누군가가 있음을 느낄 수 있는 ‘연결’을 통해서만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됩니다.
삶 안에서 단절과 고립은 계속 이어집니다. 육체뿐 아니라 특히 정신 안에서 강하게 주어집니다. 그래서 고통 속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연결에 집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과의 만남 안에서도 이 ‘연결’을 유념해 두어야 합니다. 고통 속에 있는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고 자기 이야기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연결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도 우리와의 연결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손을 잡아 주셨고, 또 함께해 주셨습니다. 이 연결을 위해서 오늘 복음에서는 당신의 수난과 죽음에 대해 그리고 사흘 만에 되살아는 부활까지 이야기해 주십니다. 혹시라도 각종 고통과 시련 안에서 주님과의 연결을 끊어버릴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주님께서 십자가 지신 것을 떠오르게 합니다. 즉, 주님과 연결되어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주님과의 연결 없이 과연 주님을 따를 수 있을까요? 불가능합니다. 계속된 불평과 불만 속에서 더 힘든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을 따른다는 우리는 주님과의 연결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먼저 주님과 연결해야 하고, 이웃과도 연결하면서 사랑의 관계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고통의 삶이 아닌, 기쁨과 행복의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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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과연 나의 십자가는>
루카 9,22-25 (수난과 부활을 처음으로 예고하시다. 예수님을 어떻게 따라야 하는가)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 하고 이르셨다.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과연 나의 십자가는>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23)
십자가
모든 이가
지닌
십자가
누군가는
지는
십자가
누군가는
지우는
십자가
너
살리려고
내가
지는
십자가
나
살려고
너에게
지우는
십자가
과연
나의 십자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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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저의 뜻을 버리고 당신의 뜻에 저를 맞추겠습니다>
오래전의 일입니다. 본당의 한 자매와 그 자녀가 온몸에 화상을 입었습니다. 예기치 않은 가스폭발로 큰 상처를 갖게 되었는데 여러 차례 수술해야 하는 상황에서 남편은 옛 기억을 떠올리며 말했습니다.
저는 손을 씻기 위해 세면장에 들어가 있었기에 그 화를 면할 수 있었지만, 모든 유리창이 깨져 멀리 날아가 버리고 아수라장이 되었습니다. 구급대의 도움을 받아 병원으로 옮겨져 있는 아내의 참혹한 얼굴을 보며 눈물을 삼켜야 했고 가슴은 찢어졌습니다. 아내의 상처가 너무 심해 아들의 상처는 보이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와중에 아내는 말했습니다. “감사미사를 봉헌하라!” 도대체 무엇을 감사하라는 말인가? 사람이 죽게 되었는데 감사하라니…… 오히려 화가 났습니다.
사고가 있은 다음 날 아침, 어린 손자 손녀가 “할아버지!” 하면서 달려와 품에 안기는 순간 “감사미사 봉헌하라”는 의미가 무엇인지 알아듣게 되었습니다. 어린 손자 손녀가 그 자리에 없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또한 자신이 화를 당하지 않은 것에 감사하라는 외침이었습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말했습니다. “3일만 고생하면 될 것을! 이렇게 살아서, 고생하게 해 미안하다.”고.
참된 믿음은 어려울 때 알게 됩니다. 고통과 시련 앞에서도 흔들림 없이 하느님께 의탁하며 기도하는 모습을 보며 믿음의 사람이 가야 하는 길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 와중에 십자가의 예수님을 생각하고 그분의 고통을 대신하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며 눈물을 보이셨습니다.
치료해야 할 일이 이 ‘산 넘어 산’이지만 이내 맑은 미소를 간직하고 주님께 감사한다고 말씀하시는 힘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주님께서 그들을 보호하고 지켜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사실 저는 그 자매에게 위로를 줄 수가 없었고 오히려, 위로를 받았습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23)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을 버린다는 것은 곧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은 하느님 아버지의 뜻 앞에서 당신의 뜻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알퐁소 성인은 “당신이 제게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려 주십시오. 저는 저의 뜻을 버리고 당신의 뜻에 저를 맞추겠습니다.” 하였습니다. 주님의 뜻에 부합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나를 버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구원을 위해 자신의 생명까지 바치신 예수님께 사랑으로 응답할 때입니다.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는 말씀은 힘들게 고생하면서 따라오라는 말씀이 아니라 순간마다 자기의 뜻을 비우면서 주님의 마음에 드는 것,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선택하라는 요구입니다.
인간적인 것을 생각하면 매 순간이 짐이 됩니다. 그러나 주님을 앞세우면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한 번 또는 두세 번 십자가를 졌다고 해서 끝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이 부담일 수밖에 없지만, 그분이 모든 것을 주관하시고 책임져 주시니 나는 따를 뿐입니다.
신명기에 보면 “내가 너희 앞에 생명과 행복, 죽음과 불행을 내 놓는다.”(30,15) “너희와 너희 후손이 살려면 생명을 선택해야 한다.”(30,19)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어떠한 일과 처지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가르침을 밤낮으로 되새겨 생명을 선택하고 “제때 열매를 내며 하는 일마다 모두 잘 되기를” 희망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십자가는 감당하기 힘들지만, 기꺼이 짊어지면 “하늘로 올라가는 사닥다리이며 천당의 문을 여는 열쇠”(성 요한 비안네)입니다.
십자가는 언제나 하느님께서 우리의 사랑을 당신에게 드러내 주는 방법으로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고 순종하며 십자가를 지십시오! 그러면 마지막에는 그 십자가가 여러분을 져줄 것입니다.”(성 토마스 아 켐피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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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삶은 선택입니다>
-짐이 아닌, 늘 선물 인생을 사십시오-
“생명의 길, 행복의 길, 구원의 길, 성인의 길”
다산(茶山) 정약용과 논어 공자(孔子)의 오늘 말씀이 멋집니다.
“꽃향기를 맡기 위해서는 먼저 허리를 숙여야 한다. 시냇물을 마시기 위해서는 먼저 무릎을 꿇어야 한다.”-다산
“육포 한 묶음 이상을 예물로 갖춘 자를 나는 가르치지 않은 적이 없다.”
스승이나 제자를 막론하고 겸손과 감사는 ‘배움의 여정’중에 있는 평생학인의 기본적 품성임을 깨닫습니다.
어제가 ‘재의 수요일’이자 ‘발렌타인데이’인줄은 후에 초콜릿 선물을 받고 알았습니다. 외출 후 귀원하니 집무실 앞에 정체불명의 봉투가 있었고 초콜릿이 들어 있었습니다. 후에 카톡 메시지를 받고 알았습니다.
“신부님, 오늘 재의 수요일이면서 Valentine’s day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초콜릿 선물하는 날입니다. 사랑합니다!! 봉투에 글을 읽어 보세요! 제가 신부님께 드리고 싶은 말씀입니다!”
“아, 자매님 선물이었군요! 감사합니다! 그런데 봉투가 보이지 않네요!”
“초코렛 넣은 bag을 말하는 것입니다.”
자세히 보니 봉투에 영문글자들이 보였습니다.
“Thank you, is the least I can say to you show my appreciation for everything you have done for me.”(감사합니다, 당신이 제게 베풀어 주신 모든 것에 대한 제 감사를 보여줄 수 있는, 당신께 말할 수 있는 최소한의 것입니다.)
아 그러고 보니, 이 아름다운 말마디는 그대로 하느님께 드리고 싶은 말마디처럼 들립니다. 하루하루가 하느님의 참 좋은 선물입니다. 하느님 선물에 대한 응답은 감사와 찬미입니다. 어제 재의 수요일 미사 강론은 “하느님 중심의 참된 삶-회개하라, 사랑하라, 진실하라-”는 요지로 전개했는데 후에 생각난 내용을 첨가하지 못했음이 못내 아쉬웠습니다.
“살아있을 때 회개요 사랑이요 진실이지, 죽으면 회개도 사랑도 진실도 끝입니다. 삶이 연장되는 것은 하루하루 회개하라, 사랑하라, 진실하라 주어진 날들인 것입니다.”
얼마전 교구 신부님과 대화하면서 은퇴신부들의 처우에 대해 나눴습니다. 교회 역시 고령화가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습니다. 앞으로 계속 양산되는 고령 은퇴 사제들의 처우가 만만치 않기 때문입니다. 선물인생인듯 생각했는데 이제는 교회에 불편하고 무거운 짐들로 느껴지고 있는 노은퇴사제들입니다.
“삶은 선물인가? 짐인가?”
제가 늘 화두로 삼고 있는 말마디입니다. 받을 때는 선물이었는데 받고 나서 시간이 흐르면 어김없이 대부분 불편하고 무거운 짐이, 쓰레기가 됩니다. 사랑했던 사람들도 병들고 아프면, 심지어 나도 병들고 아프면 무거운 짐이 되어버리는 엄연한 현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선물 인생을 살고 싶은 것”은 누구나의 영적 본능입니다.
“삶은 선택입니다!”
“늘 선물 인생을 사십시오!”
생명도 선택, 행복도 선택입니다. 타고난 부정적인 것들에 탄식하고 원망하는 어리석은 사람이 될 것이 아니라 날마다 생명의 주님, 희망의 주님, 행복의 주님을 선택하여 기쁘게, 감사하며 살아가는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사람, 지혜로운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이런 이들이 진정 살 줄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용감하게, 무거운 짐 인생이 아니라, 가벼운 선물 인생을 선택하여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루하루 날마다 “오늘” 지금 여기서 희망차고 기쁘게 감사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기도하고 사랑하면 짐도 선물로 변합니다. 어제도 내일도 아닌 오늘입니다. 하느님을 대변한 신명기 모세의 말씀은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 우리가 대상입니다.
“보아라, 내가 오늘 너희 앞에 생명과 행복, 죽음과 불행을 내놓는다.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주 너희 하느님의 계명을 듣고,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며 그분의 길을 따라 걷고, 그분의 계명과 법규들을 지키면, 너희가 번성할 것이다.”
“나는 오늘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세우고, 생명과 죽음, 축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내 놓았다. 너희와 너희 후손이 살려면 생명을 선택해야 한다. 또한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말씀을 들으며 그분께 매달려야 한다. 주님은 너희의 생명이시다.”
“주님은 너희의 생명이시다”
라는 말마디가 참 은혜롭습니다. 헛것인 세상 우상들에, 결국은 버려질 짐같은 것들에 매달릴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생명이신 주님께 매달리라는 말씀입니다. 신명기 제1독서에 “오늘"이란 말이 무려 4회 나옵니다. 영원한 오늘, 지금 여기 오늘을 뜻합니다. 모세의 말씀을 구체화하는 신약의 새모세, 오늘 복음의 예수님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바, 바로 생명의 길, 행복의 길, 구원의 길, 성인의 길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누구든지', 예외없이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만고불변의 보편적 구원의 진리입니다. 오늘 지금 여기서 우리가 선택하여 따라야 할 생명의 길, 구원의 길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뿐입니다. 주님을 온전히 사랑하는 마음으로 자신을 버리고 내 책임의, 내 운명의 십자가를 지고, 살아있는 그날까지, 죽는 그날까지 하루하루 한결같이 날마다 오늘 예수님을 따라가야 할 구원의 길, 생명의 길, 행복의 길, 성인의 길입니다.
더불어 예수님과 우정의 일치도 날로 깊어져 예수님을 닮아갈 때 참나의 실현입니다. 하루하루 이렇게 살아야 비로소 늘 선물인생이겠습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힘껏 늘 십자가의 길 선물 인생을 살게 하십니다. 다음 고백기도대로 살 때 하루하루 날마다 선물 인생이 될 오늘입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오늘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一日一生),
하루 오늘을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살았습니다.
저에겐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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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살려면 매달려야 한다.>
오늘 독서와 복음의 공통 주제는 생명의 선택입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생명을 선택하는 삶일지 얘기합니다.
그 방법에 대해 신명기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보아라, 내가 오늘 너희 앞에 생명과 행복, 죽음과 불행을 내놓는다.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주 너희 하느님의 계명을 듣고,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며 그분의 길을 따라 걷고, 그분의 계명과 규정과 법규들을 지키면, 너희가 살고 번성할 것이다.”
하느님의 명령인 계명을 지키면 생명을 얻게 되고 행복하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중요 단어를 나열하면 계명-생명-행복이라고 할 수 있는데 제 생각에 여기에 순명이라는 말이 숨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계명-순명-생명-행복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제가 자주 얘기하는 바이지만 무릇 모든 생명은 창세기 1장의 얘기대로 생기라는 명령에 순명하였기에 생명이 된 것들입니다.
창세기 1장을 보면, 하느님께서 생기라고 명령하시자 그대로 되었다고 하고, 그걸 보시고 좋아하셨다고 하시지 않습니까? 그러니 생기라는 명령에 순명한 것이 생명 맞습니다.
그리고 생명의 탄생 자체가 하느님 명령에 순명한 결과이니 생명을 계속 살 수 있는 것도 하느님 명령에 달렸다는 것이 신명기의 가르침이고 구약성경이 내내 가르치는 것입니다.
사실 하느님의 명령은 죽으라는 명령이 아닙니다. 생기라는 명령이고 제발 살라는 명령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명령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누구보고 하라 마라 하느냐’고 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아무리 좋은 것도 명령조로 얘기하면 싫어하고, 부탁하면 하려고 했던 것도 명령조면 하기 싫어집니다.
그런데 미성숙한 사람처럼 그렇게 반항하면 어떻게 될까요? 나이를 먹으면 사태를 파악하고 굽힐 줄 알지만 젊었을 때는 젊은 혈기로 그렇게 할 수 없다고 대들 듯 살라는 명령도 명령이니 따르기 싫다고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것은 의사의 명령을 거역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성숙하고 현명하다면 생명 앞에서는 겸손해야 합니다.
의사의 명령에 고집부리지 말고 겸손해야 하듯 하느님 명령에는 더더욱 겸손해야 하고 순명해야 합니다. 의사의 명령은 잘 들으면서 하느님 명령을 듣지 않는다면 말이 안 되겠지요.
오늘 복음에서도 주님께서는 생명의 길을 가르치십니다. 살려면 당신을 따르라고 하십니다.
당신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신 대로 당신을 따르면 진리의 길을 걷고 생명에 이를 것이라고 하십니다.
길이신 주님을 따라 가면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께 가기 때문이니 생명의 길이요 생명의 길잡이신 당신을 잘 따르면 된다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신명기의 마지막 말씀을 마음에 새깁시다.
“그분께 매달려야 한다. 주님은 너희의 생명이시다.”
(2023년 02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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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루카 9,24)
<선택과 매달림!>
오늘 복음(루카 9,22-25)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수난과 부활을 처음으로 예고하시는 말씀'과 '예수님을 어떻게 따라야 하는가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사람들'입니다. '생각과 말과 행위로 따라가는 사람들, 날마다 그렇게 따라가려고 애쓰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믿고 따라가고 있는 예수님께서 걸어가셨던 길은 '고난의 길, 배척의 길, 죽음의 길'인 '십자가의 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길 너머에 예수님의 부활이 있습니다. 이것이 '하느님이신 예수님의 본질'이요, 우리가 믿어야 할 '믿음의 본질'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예수님처럼 나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나의 십자가를 지고 나의 부활을 향해 걸어갑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따라가는 길은 결코 쉬운 길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도 힘들어 하셨던 길입니다.('겟세마니에서 기도하신 예수님' 참조)
'예수님의 본질과 믿음의 본질', 곧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내 안에 자리 잡고 있을 때만, 우리도 예수님처럼 십자가의 길을 걸어갈 수 있고, 마침내는 부활할 수 있습니다.
"나는 오늘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세우고, 생명과 죽음, 축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내놓았다. 너희와 너희 후손이 살려면 생명을 선택해야 한다. 또한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말씀을 들으며 그분께 매달려야 한다. 주님은 너희의 생명이시다."(신명 30,19-20)
생명이신 예수님을 선택합시다! 나의 생각과 말과 행위가 생명이신 예수님께 매달려 있도록 합시다!
이 '선택과 매달림'이 바로 날마다 우리가 짊어져야 할 '십자가요 따름'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십자가와 따름' 너머에 부활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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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zlgZZYEMl1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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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 23)
십자가로
날마다
마음을 다잡는
우리의
순간들입니다.
십자가에서
하느님을 만나는
은총의
사순시기입니다.
우리의 삶을
지탱하는 것이
십자가임을
깨닫습니다.
자신을 버려야
십자가가
보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뽑아낼 수 없는
저마다의
십자가
마디마디입니다.
자신을 버려야
십자가에서
가장 멀리
있는 우리가
돌아갈 곳이
하느님임을
알게 됩니다.
버려야
알 수 있고
버려야
따를 수
있습니다.
십자가로
우리를 다시
빚으시는
주심이십니다.
십자가는
견디는 것만이
아니라
함께 생활하며
오고가는
마음입니다.
십자가로
연결된
주님과 우리의
관계입니다.
십자가로
삶의 매듭을
풀어주십니다.
자신을 버려야
진정한 사랑을
알게 되는
십자가에서
마구 쏟아지는
주님의
은총입니다.
목숨을 살리는
십자가가
우리에게
있어야 할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으로
보여주십니다.
날마다
십자가이며
날마다
주님의
은총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이
사실은
십자가의
구원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따르는
사순의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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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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