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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역 주변 게스트 하우스에서 눈을 떳다.
9시에 출발하기로 하고 숙소에서 제공하는 아침식사를 아주 푸짐하게 먹었다.
우리가 생각해도 웃음이 절로 나온다. 긴~~줄의 식빵과 계란이 푹~~줄어들었다. 오랜만에 먹어보는 계란토스트를 맛있게 먹고 분주하게 나왔으나 벌써 10시다.
어제와는 다르게 바람이 사납다.
오늘 맨 처음 찾아갈 곳은 김유신묘다. 그의 무덤은 왕릉과 비교해도 전혀 손색없이 완벽하게 능묘를 갖추었다.
김유신은 금관가야 왕으로 신라에 투항하여 진골이 된 김해 김씨의 자손으로 김수로왕의 12대 손이다. 그의 집안은 진골의 대접을 받기는 하였으나 신라 호족들로부터 외면을 당했다. 이렇게 사회적으로 배척받는 분위기에서 김유신은 동생을 진골귀족 김춘추에게 시집보내어 관계를 강화하였다. 또한 비담과 염종의 난을 진압하면서 실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이후 태종무열왕과 그의 아들 문무왕과 더불어 통일 전쟁을 마무리하면서 79세로 숨을 거두었다. 그러자 문무왕은 그의 장례에 예를 갖추었는데 그 내용이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다. 또한 '삼국유사'에는 "김유신이 죽은 뒤 흥무대왕으로 봉하였으며, 그 능은 서산 모지사를 동향한 산봉에 있다."라고 기록되어 문무왕이 그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왕릉 못지 않은 무덤을 만들어 주었음을 알 수 있다.
무덤 주위로 둘레돌을 쌓았는데 기둥돌에 12지신상을 조각하여 세웠다. 또한 난간돌을 설치하고 바닥에도 돌을 깔았다.
둘레돌의 12지신상이 궁금하여 그곳을 첫 코스로 잡았으나 경주 1박2일 일정중 가장 실망스러운 곳이었다. 난간석의 높이가 우리 키만하다. 무덤 앞의 상석도 어찌나 크던지 너무 인위적인 모습이다. 묘로 들어가는 입구만이 멋지다.
봄에 벗꽃이 활짝 피면 하늘을 가릴듯 벗나무가 길 양쪽에 나란히 서 있다. 입구로 들어서면 소나무가 빼곡하게 서있다. 휘어진 모습은 다 다른 모양들이다.
매서운 바람때문인지 난간석과 상석의 과함에서 오는 실망스러운 마음인지 빨리 이곳을 떠나고 싶었다.
다음으로 온 곳이 태종무열왕릉이다. 무덤 주위에 별다른 장식이 없는데, 능 둘레에 둘레돌을 쌓고 중간에 3미터 간격으로 버팀돌을 세웠다고 하나 모두 땅속에 있어 보이지 않고, 봉분만 단정하게 남아있다. 고대 대형 봉분 형태의 왕릉은 태종무열왕릉을 중심으로 변화했는데 이후부터는 통일신라 왕릉의 특징인 화려한 석물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아마도 김유신묘도 후대에 손을 본 것같다.
태종무열왕의 이름은 김춘추이다. 그는 화백회의에서 폐위된 진지왕의 손자이다. 어머니는 진평왕의 둘째 딸 천명공주이고 선덕여왕이 이모이다. 신분적인 약점을 만회하기 위해 새로운 세력인 김유신과 연합하였고 선덕여왕의 후원을 입으며 정치의 전면에 등장하였다. 진덕여왕이 죽으므로 성골이 없기에 진골출신 그가 최로로 왕위에 올랐다. 태종무열왕은 왕위에 올라 죽을 때까지 통일전쟁에 모든 국력을 다 했다.
무열왕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은 왕릉바로 앞에 있다. 비신은 없어지고 귀부와 이수만 남아 보호각 안에 있다. 가장 화려한 귀부와 이수로 손 꼽힌다고 한다.
이수는 여섯 마리의 용이 서로 얽혀 여의주를 받들고 있는 모습인데 중앙 아랫부분에 김인문이 쓴 '태종무열대왕지비'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거북의 등에는 당초문, 구름무늬도 사실적으로 새겨져 있고 날카로운 발톱에선 강인한 힘이 느껴진다.
다음으로 간 곳이 괘릉이다.
지금은 괘릉이란 말을 사용하지 않고 원성왕릉이란 명칭으로 되어있다.
괘릉이란 이름은 이곳에 작은 연못이 있었는데 연못을 메우고 장사를 지내니 내부에 물이 고여 밧줄로 관을 매달아서 장사지냈다는 속설이 있기 때문에 생겼다. 지금도 능의 서쪽으로 샘이 있어 이곳의 땅은 웬만해서는 마르지 않는다고 한다.
남향한 왕릉의 맨 앞에 팔각 돌기둥을 세워 망석으로 삼았다. 망석 뒤로 문무인상을 각각 한쌍씩 세웠고, 그 뒤로 사자를 네마리 배치하였다. 언덕 위로 상석을 앞에 둔 커다란 봉분이 있다. 봉분의 주위에 둘레돌을 쌓았고, 그 외부에 난간돌을 둘러 능을 보호하고 있다. 이 난간돌과 둘레돌 사이 바닥에는 바닥돌을 깔았다.
기둥돌에는 12지신상을 조각하였다.
네마리의 사자는 원래 네 방위를 지키는 것으로 고대 신라에서는 그냥 자연석을 봉분에 박아 보호석으로 삼았다. 그런데 통일신라기에 불교의 융성과 함께 왕릉도 종교적 차원으로 인식되어 보호석을 석탑을 지키던 돌사자의 형태로 제작하여 네 방향에 배치하게 되었다. 그런데 괘릉은 경사가 심해 공간이 나오지 않아 두쌍 네마리를 서로 마주 보게 세웠다. 시선을 서로 달리하여 동쪽사자는 북쪽과 서쪽을, 서쪽의 두 사자는 남쪽과 동북방향을 바라보고 있다.
문무인의 얼굴 또한 평범하지 않은데, 신라인의 얼굴이 아니기 때문이다. 무인석은 아랍얼굴이고, 문인석은 중앙아시아 계통의 얼굴을 하고 있다. 무인석은 굽은 수염을 턱까지 길렀고, 손에는 옹이가 박힌 방망이와도 같은 특이한 형태의 것을 들고 있다. 머리에 쓴 두건과 팔소매를 걷어 올린 모습에서 이국적인 분위기가 풍기는데, 이미 서역과의 교류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문인석의 모습도 특이하다. 수염은 직선이고, 콧수염은 위로 올라가는 팔자수염이다. 머리에 쓴 보관과 의상, 치장한 장식물또한 평범하지 않다.
원성왕의 이름은 김경신으로 785년에 왕위레 올라 798년에 죽었다. 그는 김주원을 밀어내고 왕위레 오른 후 김주원을 지금의 강릉 지방인 명주로 이주시킨 인물이다.
〔김주원과 김경신〕
어느날 김경신이 꿈을 꾸었는데, 머리에는 두건을 벗고 하얀 갓을 쓰고, 손에는 가야금을 들고 천관사의 우물로 들어가는 꿈이다. 그가 깨어나 생각해보니 두건을 벗었다는 것은 관직에서 물러났다는 징조요, 가야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목에 칼을 찬 죄인이 된다는 징조요, 우물에 들어간다는 것은 감방에 들어간다는 징조이니, 흉몽 중에 흉몽이었다. 그래서 그는 근심하며 며칠 동안 두문불출했다.
이때 여삼이라는 자가 찾아와 꿈에 대해 듣고는 절을 하며 두건을 벗는다는 것은 모든 벼슬의 위에 있어 두건을 쓸 일이 없는 것이고, 가야금을 들었다는 것은 그 줄이 12줄이니 이후 12대가 흥한다는 것이며, 천관사의 우물에 들어갔다는 것은 왕궁에 들어간다는 것이니 이는 곧 왕이 된다는 징조라고 풀이하였다.
이에 김경신이 자기보다 위에 김주원이 있는데, 어찌 왕으로 오를 수 있겠느냐고 하니, 여삼이 우물에는 물이 있으니 물의 신인 북천 신에게 제사를 드리면 된다고 이야기 하였고 실제로 은밀하게 행하였다.
이후 37대 선덕왕이 785년 정월에 죽자 화백회의에서 김주원을 왕위 계승자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별안간 비가 많이 내려 북천에 물이 불어 며칠 동안 김주원이 왕궁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이때 김경신이 궁궐로 들어가서 왕위에 오르고는 김주원을 지금의 강릉인 하서지방으로 이주시켜 변방에서 살게 하였다.
이 이야기는 '삼국유사'에 기록된 당시의 상황이다. 그러나 당시의 또 다른 상황을 상상하여 볼 수 있다.
당시 왕위쟁탈전이 있었다. 최후의 승자는 김경신이고 패한 인물은 김주원으로 변방인 강릉 지역으로 강제 이주당한 것이다. 당시의 서열과 정치적인 상황을 삼국유사의기록으로 보면 김경신은 내물왕 계열의 12세손이고, 관직은 각간으로 서열 2위였다. 김주원은 무열왕의 6세손으로 상대등이고 서열 1위였다. 서열에서 김주원이 앞섰으나 정치적으로 김경신의 세력이 더 컸다.
김경신은 그의 형인 김양상(선덕왕)과 무열왕계인 혜공왕을 죽이고 김양상이 선덕왕으로 즉위하면서 정치적인 실권을 쥐고 있었다.
실권을 김경신이 쥐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무열왕 계열의 왕족들과의 정치적인 대립은 항상있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정권이 다시 무열왕계로 넘어가는 것은 김경신에게 큰 정치적 타격이었을 것이다.
복잡한 권력 싸움에서 김경신에게 밀린 김주원은 하서 지방으로 강제 이주당했다. 그리고 명주군왕이라는 시호를 받고 강릉 김씨의 시조가 되었지만 왕위에 오르지 못한 그의 원한은 자손으로까지 이어졌다.
김주원의 아들 김헌창이 반란을 일으키고 그의 손자 김범문도 반란을 일으켰으나 모두 실패하였다.
이러한 상황은 하서 지역에 대한 지역 감정으로 이어졌고, 분황사에서 중국의 사신을 도와 호국용을 훔친 일에 지역 사람들이 가담되었다고 기록돼 있어 갈등의 정도를 보여주는 듯하다.
경주 낭산엔 선덕여왕릉이 있다.
선덕여왕은 삼국시대 최초의 여왕이다.
남자로서는 마지막 성골로 왕위레 오른 진평왕에게 아들이 없었다. 그래서 덕만공주가 왕위를 이었으니 그가 선덕여왕이다.선덕여왕 이후에도 선덕여왕의 사촌이자 마지막 성골이었던 승만이 왕위레 올랐으니 그는 진덕여왕이다.
이렇게 신라에서 여왕이 나온 것은 신라 왕족의 골품제도에서 비롯된것이다. 신라에서 마지막 성골 남자는 진평왕이었고, 마지막 성골여자는 진덕여왕이었다. 진덕여왕을 끝으로 왕위가 진골로 넘어갔는데 신라 하대에 가서는 남자 진골도 없어 여자 진골이 왕위에 올랐는데 그가 진성여왕이다.
선덕여왕은 632년에 왕위에 올라 16년 동안 문신인 김춘추와 무신인 김유신을 등용하여 삼국통일의 기초를 닦았으며 첨성대를 축조하였고, 분황사와 황룡사 9층목탑 등을 건립하였다.
선덕여왕릉으로 가려면 도로옆에 있는 절터를 지난다. 바로 사천왕사터이다. 절터를 지나 마을 입구에서 주차를 해 줘야 하는데 사람도 없고 하니 조금만 더 가지고 들어가지 하다가 아주 무서운 길을 만났다. 뒤로 빼지도 못하고 마을까지 들어가서 차를 돌려 나왔다. 농로가 좁아 옆의 도랑으로 빠질것 같았다. 마을 입구에서 왼쪽으로 들어서면 소나무 밭 오솔길이 나온다.
선덕여왕릉에는 화려한 장식물이 없다. 그냥 커다란 자연석으로 능의 둘레를 두르고 그 위로 봉분을 올렸다.
낭산의 서쪽에 특이한 사각형 이층석탑이 있다.
고구려식 고분같기도 한 이 곳은 능지탑, 혹은 연화탑이라고 불린다.
전해 오는 이야기로는 이곳이 문무왕의 유해를 화장한 곳이라고 하는 데 1971년에 발굴해본 결과 능지탑 중앙 5미터 아래에서 불에 탄 지층과 숯이 발견되어 신빙성이 높아졌다. 사각형의 네 면에 각각 석재를 사용하여 감실을 만들고 그 안에 사방불을 모셨던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능에서 발견되는 12지신상이 기단부에 끼워져 있어 탑이라고 보기가 더욱 힘들어진다.
이는 능과 탑이 조합된 형식으로 문무왕의 유해를 화장한 신성한 곳이고, 임금의 유해를 태운 재가 남아 있으니 이러한 것을 보존하기 위해 능의 개념을 도입한 것으로 추정한다.
주변에 많은 석재들이 쌓여 있는데 어디에 쓰였는지 모른다.
전국을 다녀도 경주의 밥이 제일 맛없었다. 경주에서 맛있는 집 찾아보자 이참에...
어제 저녁도 경주역 주변을 돌아 돌아 돌아도 딱히 들어갈 만한 식당이 마땅찮았다. 간신히 들어간 식당은 춥고 이렇다 저렇다 말이 없고 물을 달라고 해도 아무 소리도 없고....어쨋든 경주에서의 식사는 그렇다.
해장국골목으로 찾아들어서다 황남빵 사려고 내린 동옥쌤을 기다리며 식당에서 나온 여행객을 잡고 물어봤다.
맛이 있냐고ㅎㅎ 맛있다는 말을 듣고 들어갔다.
찰보리 비빔밥정식과 파전을 시켜 배부르게 먹고 이번 여행의 마지막 목적지인 양동마을로 이동이다.
경주 양동마을과 안동하회마을이 2010년 한국의 전통마을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2010년 등재된지 얼마 안되 다녀왔던 것이 전부였다.
양동마을을 다시 보고 싶었던 마음이 컷으나 너무 멀기때문에 섯부르게 나서질 못했다.
양동마을은 손씨가와 이씨가가 공존하는 특이한 마을이다.
이마을은 풍수로 보면 말 물(勿)자를 거꾸로 놓은 형상으로 생겼고, 경주의 재물이 형산강의 안락천에 실려 양동마을로 다 들어오는 형국이라고 한다. 산을 등지고 물을 내려다본다는 배산임수형인데 마을 토지가 비옥하여 농사가 잘 된다고 한다.
마을은 내곡, 물봉골, 거림, 장터골을 중심으로 거주지가 형성되었는데 물(勿)자 능선을 중심으로 나누어지고 있다.
마을의 진입로 쪽은 경사가 급한 산으로 시선이 차단되고 골짜기 밖에서는 마을의 모습이 드러나지 않아 마을 입구에서는 이 마을의 규모를 짐작하기 어렵게 되어 있다.
운 좋게도 동네 주민이 하는 해설을 듣게 되었다.
물봉동산에 올라서 뒤에 있는 마을을 보게 되었다. 예전에 왔을 당시는 마을 입구만 보고간 꼴이었다.
서백당은 양동마을 안골 맨 위에 위치한 월성 손씨 집안의 종택이다. 이 집은 입향조 손소가 1458년에 지은 집으로 사랑채의 이름을 따서 서백당이라고 부른다.
손소는 조선 세조 때 이시애의 난을 평정한 공신으로 5남 1녀를 두었는데 맏아들 손백돈이 후사 없이 일찍 죽자 둘째 아들인 우재 손중돈이 상속자가 되었다. 성종의 총애를 받던 찬성공 이번이 손중돈의 누이에게 장가를 들어 영일에서 처가인 이곳 양동으로 옮겨와 살면서 낳은 맏아들이 회재 이언적이다. 이로써 양대가문 손씨, 이씨 두 씨족에 의해 양동마을이 형성되었고 집성촌으로 자리매김하였는데 이러한 특성을 가져서 양동마을을 외손마을이라 부른다.
손소의 아들 우재 손중돈(1463~1529)은 김종직 문하에서 배웠으며 21세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성종 20년에 식년문과에 급제했다. 예문관 봉교를 거쳐 관리들을 감찰하는 청환직을 여러 차례 역임하였다.
연산군의 횡포를 지적하던 간관들이 쫓겨날때 함께 파직되었다. 중종반정 직후 상주목사로 임명되었는데 선저을 베풀어 중종 4년에 좌승지로 승진했다. 주요 청요직을 두루 거치다 1529년 돌아가시니 중종은 2일간이나 슬퍼하였고 예의에 따라 제사와 부의를 했다 경주의 동강서원과 상주의 속수서원에 제향되었다.
손중돈의 조카이자 제자, 이언적
이언적(1491~1553)은 성종 22년에 외가인 양동 서백당에서 태어났다. 10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외삼촌 우재 손중돈을 스승으로 삼아 학업에 열중하여 중종 9년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김안로의 등용을 반대해서 모략을 받아 한양에서 쫓겨나 안강 자옥산 자락에 독락당을 지어 성리학 연구와 학문에만 집중하였다.
명종 2년에 윤원형 일파가 조작한 양재역 벽서사건에 무고하게 연류되어 강계로 유배가서 위리안치 되었고, 63세에 강계에서 돌아가셨다. 유배지에서 많은 저술을 남겼다. 경주 옥산서원에 제향되었고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황과 더블어 동방 5현의 한분으로 문묘에 배향되었다
첫댓글 아직 끝나지 않은 경주이야기죠~?
국불천위~^^ 놀라운 이야기들
또...급마무리가 됐어요;;;
명절 전날 사무실에서 마무리하려니 컴컴해서 무섭고;;;
변명은 끝도없다~ㅎ
물봉동산에서 보니 양동마을의 물(勿)형상을 이해하게 되었어요. 옛 사람들은 그런 내용을 이미 알고 있었는데 오늘을 사는 저는 모르는 게 너무 많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