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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처음 천부경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한 것은 엉뚱하게도,
시중에 회자되는 예언서들의 공통된 한자성구 "이재전전(利在田田)"이란 구절 때문이었다.
9.11사태부터, 노무현대통령 당선에 이르기까지 그 예언의 적중도가 높아 화제가 되고 있는 책
"송하비결"에 의하면, 말세 상황에서 살아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이재전전"이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사실 인터넷 검색엔진을 통해서 이재전전을 키워드로 검색을 하면 정감록, 격암유록 등 매우
많은 예언서들이 공통적으로 "이재전전"을 이야기하고 있음을 소개하는 많은 홈페이지를 만나게 된다.
참으로 수수께끼 같은 글귀가 아닐 수 없다.
도대체 "이재전전"이 무엇이기에 수많은 예언서들이 한결같이 이재전전을 이야기하고 있을까?
한자 그대로 해석하면, 이로움이 田田에 있다는 것인데, 이 田田이라는 수수께끼같은 글귀를 두고
많은 사람들이 여러 가지 해석을 쏟아 붓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대략 4가지 정도가 대표적 해석이다.
먼저, 송하비결의 해석자인 황남송박사는 田田이라는 두 글자 보다 田이라는 한 글자에 촛점을 맞춘다.
田에서 십자출(十字出-또 다른 예언서의 구절을 인용)하면 결국 남는 것은 十자인데,
이것을 천리(天理)적 개념으로 보고 크게 한반도에 열십자를 놓으면 주변 4강과의 관계가 나오고
곧 전전이란 주변 4강과의 "중립적인 균형외교정책"이라고 해석한다.
두번째는 오래된 해석 중의 하나로 주로 "증산도가"라는 종교단체의 해석이다. 田田을 밭 중의 밭 즉,
큰 밭이라는 뜻으로 해석하고, 이것은 도시 이름 대전(大田)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따라서,
우리 나라의 수도를 대전으로 옮긴다면 말세상황에서 살아날 수 있다고 해석한다.
대전 북쪽의 공주 장기면으로 행정수도가 이전한다는 데, 근처니까 대전으로 해석해야할 지,
아니면 망하게 된 것인지 그건 알 수 없다.
세번째는 출처가 정확히 기억이 나지않지만, 한 인터넷 사이트의 해석이었다. 田田을 합치면 나올 수
있는 글자를 지경 강(畺)으로 해석한다. 이에 따르면 천지개벽되는 상황에서, 일본은 가라앉고
우리나라 서해안 쪽이 커다랗게 융기되어서, 중국과 국경을 맞닿게 되는데, 중국이 차지하기 전에
우리나라가 먼저 차지하여야 한다는 뜻으로 해석한다.
네번째는 다음의 한 인터넷 카페(예언과 미래)의 해석이다. 송하비결에 보면 이재전전이라는 글귀와
더불어 나오는 글귀가 하나 더 있다. 그것은 수중악전(手中握田)이라는 글귀이다. 해석하면 손가운데
밭을 쥐라는 뜻이다. 80년대 이후 우리 사회에 단전호흡이 유행하고 있다. 사실 송하비결의 원저자인
송하노인도 단전호흡을 통한 道의 수련을 통해서 미래를 내다보는 눈을 가졌는지도 모른다.
단전은 상단전, 중단전, 하단전의 3 군데가 있는데, 가장 중요한 단전은 배꼽 밑 3 cm(한 치)부분에
위치한 하단전(下丹田)이다. 따라서 밭 중의 밭인 田田은 하단전을 뜻하며, 여기에 손을 모으고
(手中握田) 단전호흡을 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뜻이다.
모두가 그럴싸하다. 하지만, 어떠한 해석도 일반 사람들이 스스로 자신의 구명에 대한 해결을 구할 수
있는 방도가 아니다. 1,2,3번의 해결방식의 공통점은 정치적인 해결을 지향할 뿐이다.
첫번째는 외무부장관의 입장에서,
두번째는 내무부장관의 입장에서,
세번째는 국방부장관의 입장일 뿐이다.
또한 말세상황에서 살아날 수 있는 방도라는 것에서 논리적 일탈마저 존재한다. 도대체 수도이전과
서해안개척이 어찌하여 살아날 수 있는 방도가 되겠는가? 그리로 도망치라는 이야기인가?
외교적 중립이 전쟁을 피할 수 있어, 목숨을 구제한다고 치자. 천지가 개벽하고 전염병이 도는데,
외교술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좋다. 100번을 양보해도, 어떻게 하던 결국 내 목숨을 정치인들의
선택에 맡길 수 밖에 없다는 이야기가 되지 않는가?
반면에 4번째 해석은 그나마 일반인이 행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한다. 하지만, 이 역시 도저히
논리적으로 해석이 되지 않는다. 수많은 인명을 구제할 방법이 앉아서 운기조식하면 그만인가?
도사들은 전염병이 돌고, 폭탄이 떨어지고, 천지가 뒤집히는데 내공을 이용해 혼자 공중부양해서,
정말로 일개인의 구차한 목숨을 유지하기 위해서 도를 닦는 사람들이었단 말인가?
도를 닦을 수 없는 어린아이들은 어쩌누? 도 닦다가 아직 살 수 있을 정도의 내공에 이르지 못한
사람들은 자기 내공 탓하면서 그냥 앉아서 죽으라는 이야기인가?
필자는 필요에 의하여서건, 또 다른 근거에 의하여서건 여기에 다섯번째 해석을 추가하고자 한다.
돌아가신 어머님께서 필자에게 생전에 이런 말씀을 하셨다. 남(男)을 파자하면, 입구(口), 열십(十)의
두 합 자를 힘력(力)자가 받치고 있는 모양이 된다. 이 말 뜻은 모름지기 사내란 열 명(十)의 제 식구
(口)를 먹여 살릴 수 있는 힘(力)을 가진 사람이란 뜻이다.
즉 사내란 자기 가족을 부양할 책임과 의무를 지기 위하여 태어난 존재이며 그렇지 못하면 사내라고
할 수도 없음을 명심하라는 교훈을 주셨다. 필자가 전전(田田)자를 곰곰 들여다보니, 문득 어머님의
말씀이 생각나며 입이 바글 바글 모여 있는 것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서, 너무도 유명한 속담이 떠올랐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또한 가만히 두 밭 전(田)자를 겹쳐 보았다. 그랬더니, 입 구(口) 가운데 우물 정(井)자의 도형이
나오지 않는가! 이로부터, 고대 중국의 요순시대의 고유한 토지제도로 알려져온 정전제(井田制)가
생각이 났다. 정전제란 토지를 균등하게 우물 정자로 구획을 하고, 8가구가 각 모퉁이의 땅을
경작하고, 가운데 한 토지는 공동 경작하여 국가에 세금으로 내는 제도를 일컫는다.
정전제는 동양 사회의 매 왕조마다 끊임없이 추구해 마지 않는 이상향적 토지제도였으나
균등한 생산력이 이루어지지 않아 실제로는 구현되지 않았던 토지제도이다.
그러나 이조말(17-19세기) 마을 사람들이 다함께 모여 일하는 수전이모작(모내기)에 의한
높은 생산성은 이러한 균등한 토지분배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었으며, 이것을 본 대실학자 정약용은
정전제의 한국식 변형인 여전제(閭田制)를 제안하였던 것이다. 여전제는 수조의 단위를 가구가 아니라,
마을 공동체단위로 생산량에 따라 부과하자는 것으로 일종의 "공동 농장"과 같은 제안이었다.
혹시, 입 구(口) 가운데 우물 정(井)자가 나오는 한자가 없는지 검색을 해보았는데,
마침 그러한 한자가 있었는데 흔하지 않은 확장한자의 영역에 있었다. 그것은 둘레 위(圍)의 속자였다.
둘레?.............두레!
"이병도는 두레의 어원이 원주(圓周)의 뜻인 '둘레', '둘려'에서 나왔다고 보고, 이것은 마치 영어에서
원주의 뜻을 가진 circle이 도당, 조직의 뜻이 있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보았다. 또 그는 우리나라에서
결사의 명칭인 도(徒), 접계(接契), 사(社)가 모두 둘레의 한역어라 하였다.
신용하는 "두레는 '두르다'의 고어에서 파생되어 나온 명사이며 그 부사인 '두루'의 '전체'를 나타내는
명사"라고 하였고, '두레가 공동체 그 자체를 나타내는 말'이라고 보았다.
(http://weedstory.com.ne.kr/dure.htm)"
마을 가운데 공동으로 사용하는 우물도 두레 우물이라하며, 우물에서 물을 푸는 바가지를 두레박이라
한다. 두레란 바로 이조말 마을 단위의 모내기, 김메기 등의 공동노동을 통한 높은 생산력을 이끌어내
었으며, 당시의 경제, 문화, 사상의 부흥을 일으켰던 노동공동체를 의미하는 말이다. 또한 두레는
새로운 대동(大同)세상을 지향한 당시 민중들의 가장 기초적인 노동과 놀이문화의 생활 단위였음은
두 말할 여지도 없다.
"우리 조상들은 먼 옛날부터 흥과 멋이 깃든 놀이를 즐겼습니다. 흥겨운 가락에 어깨를 들썩이고
신명 넘치는 놀이로 온 마을이 하나가 되었습니다. 옛날에는 주로 농사를 짓거나 고기를 잡으면서
살았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 모두가 힘을 모아 일했습니다. 힘든 농사일도, 먼 바다에 나가 고기를
잡는 일도 여러 사람의 힘이 필요했습니다. 사람들은 함께 모여 일을 하고 함께 모여 놀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한데 어울려 즐기는 놀이를 대동놀이라고 합니다. 대동놀이는 주로 설, 대보름, 단오,
추석, 백중 같은 명절에 벌어졌습니다. 마을끼리 편을 갈라 승부를 겨루기도 하고 함께 어울려 놀며
흥을 나누기도 하였습니다. 부자도, 가난한 사람도, 남자도, 여자도, 양반도, 평민도 함께
겨루고 어우러 질 때면 하늘 아래 모두가 똑같이 귀하고, 똑같이 즐거웠습니다.
대동 세상을 꿈꾸며 즐기던 놀이 - 대동 세상은 모두를 똑같이 귀하게 여기는 차별없는 세상을 뜻합니
다. 대동놀이는 많은 백성들이 대동 세상을 꿈꾸며 하나로 뭉처 신명나게 즐겼던 놀이입니다.
편을 갈라 승부를 겨루는 놀이도 있었고, 강강술래나 놋다리 밟기처럼 경쟁하지 않고 함께 어울려
즐기는 놀이도 있었습니다." (출처: "대동놀이"라는 어린이 동화책, 기획,글-청동말굽)
필자가 유추하기에 어떠한 방향으로 해석을 하더라도, 田田은 결국 사람사이의 협동을 의미하는 井자
모형의 도형을 의미하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인터넷을 검색하여보니 과연, 많은 예언서들은 개벽상황에
서 살아날 수 있는 방도로써, 이재전전 뿐 아니라, 석정수(石井水: 돌우물 물) 또는 석정곤(石井崑) 등
우물 井이 사용된 많은 글귀들을 지칭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삼풍(三豊)이라는 수수께끼 같은 글귀도 보았는데, 어떤 것에 미치면 모든게 그것으로 보인다더니,
풍(豊)자에도 제기 속에 담긴 井자가 보임은 필자의 과도한 망상인지... 뿐이랴..궁(弓)이건,
을(乙)이건 공(工)이건 만(卍)이건 아(亞)이건 예언서에 나온 어떤 도형도 위(圍)의 속자안에
다 있었다. 어찌하여, 우물 井(정확히는 圍)이 그런 뜻이 될 수 있을가?
그러던 어느날 필자는 우연히 인터넷에서 선풍적 인기를 끌고 돌아다니는 천부경의 한 해석을 보게
되었다. 그것은 "노자를 웃긴 남자"라는 책을 썼던 이경숙이란 한 주부가 해석한 천부경이었다. (http://bluecabin.com.ne.kr/history/chonbugyung.htm)
그래..천부경은 사람을 귀하게 여겨라하는 것이 핵심이었다. 그러나 유태인과 한국인에 대한 비교
분석은 재미있지만 마음에 닿지 않으며, 이 분이 해석한 천부경 앞구절의 수로 이루어지는 논리가
좀 빈약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앞구절의 숫자 논리를 고민하여 보니 또다시 내 머릿속에
위(圍, 즉 口안의 井)자가 떠오르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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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부경은 환인이 환웅에게 말로써 전한 인류 최초의 경전으로, 구전되어 내려오다가 녹도문이라는
옛 글자로 새겨졌고, 이를 발견한 신라시대의 유학자 최치원이 81문자의 한자로 번역하여 석벽에
남긴 것이, 20세기 초 계연수라는 사람이 묘향산에서 이것을 발견하고 판본하여 오늘날 대종교에
전해져 내려온 것이라고 한다.
최근에는 고려말 6은 중의 하나인 농은 민안부의 유집에서 갑골문으로 된 천부경이 발견되었다.
발해 문왕의 <삼일신고봉장기>에 의하면, 기자가 부여의 법학자 왕수긍을 초빙하여 은문(갑골문)으로
쓴 것이라고 하는데, 최치원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으므로, 아마도 최치원은 이 은문을 번역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현재 내려오는 천부경의 전문은 가로 9열, 세로 9행의 총 81자로
이루어져 있으며 다음과 같다.
一始無始一析三極無
盡本天一一地一二人
一三一積十鉅無櫃化
三天二三地二三人二
三大三合六生七八九
運三四成環五七一妙
衍萬往萬來用變不動
本本心本太陽昻明人
中天地一一終無終一
끊어 읽어야 될 곳이 어디인지 모르지만, 필자 역시 대체로 대다수의 역자들의 분리를 참조하여,
한 구절 한 구절 나름대로 끊어서, 해석해보고자 한다.
일시무시일(一始無始一) 하나의 시작은 없음에서 시작하는 하나이다.
이 구절은 마지막구절 일종무종일(一終無終一)과 댓구를 이루는 구절로서, 시작도 없이 시작되고
끝남도 없이 끝남을 이야기한다. 무한히 반복되는 어떤 논리를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일단 시작없이 시작한 1에서 시작하여보자.
다만, 없음(0)과 있음(1)은 같다(1 = 0)는 것을 유념해야 할 듯하다.
석삼극무진본(析三極無盡本) 3극으로 쪼개져도 그 근본은 다함이 없다.
하나에서 3으로 쪼개져도 그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는 이야기이다. 그럼 4으로 쪼개지면?
뒷 구절 "용변부동본(用變不動本)"으로 부터, 적어도 용(用, 현상)은 변함을 암시하고 있다고 본다.
천일일지일이인일삼(天一一地一二人一三) 하늘은 1 하나, 땅은 1 둘, 사람은 1 셋.
천,지,인은 하나에서 시작하여 셋으로 분리된 삼극이다.
한글 모음의 창제원리인 하늘(.), 땅(-), 사람(ㅣ)의 요소를 모두 합치면 정사각형의 口가 나올 수
있다. 필자는 이 口를 시작없이 시작하는 첫번째 하늘을 의미하는 도형이라 가정하여 보았다.
그것은 뒷구절 함 궤(櫃-원래는 나무 목변이 없는 확장한자이나 훈은 똑같이 상자를 뜻하는 '함'이다.)
에서 유추한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윗 구절은 도형으로 표시하면..
口口口 인데, 각각에 천지인의 이름과 행렬순번의 좌표를 표시하면,
口天(1,1)口地(1,2)口人(1,3)이라고 할 수 있다.
앞에서부터 네모 상자를 하늘 (1,1), 땅(1,2), 사람(1,3)이라 이름한다.
이것이 바로 필자가 생각하는 해석이다.
일적십거무궤화삼(一積十鉅無櫃化三) 1을 쌓아 10으로 커지면 함은 없어지고 3으로 변한다.
이 네모난 함(櫃)을 쌓아 올리는데, 10에서 더 쌓을 상자는 없고, 3이 된다고 해석한다.
다음의 도형을 보면 이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口口口 : 3
口口口 : 2
口口口 : 1
다만 10번째는 추가된 상자가 아니라, 전체를 의미하며 도로 정방형인 口가 되서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는 꼴임을 의미한다. 즉 무한히 반복되는 논리의 새로운 시작인 셈이다. 따라서, 이 새로운
큰 口를 다시 위 그림처럼 쌓으면, 전체 상자의 수는 9*9 = 81개 즉 천부경의 81문자의 정방형꼴
배치와 똑같이 된다. 천부경의 글자수와 배치도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천이삼지이삼인이삼(天二三地二三人二三) 하늘은 2,3, 땅도 2,3, 사람도 2,3
이것은 1에서 시작한 하늘, 땅, 사람이 다음처럼 각기 1->2->3으로 커짐을 이야기한다.
口天3口地3口人3
口天2口地2口人2
口天1口地1口人1
대삼합육생칠팔구(大三合六生七八九) 큰 3을 합하면 6 이 되고 이로 부터 7,8,9가 생긴다.
간단히 해석하자. 이 구절은 밑에서 부터 2번째 줄까지 도합 상자가 6개인데,
그 위에 7,8,9번째 상자가 생김을 이야기한다고 생각한다. 다음의 순서처럼..
7->8->9
6<-5<-4
1->2->3
천부경을 보면, 처음에 1로 시작해서 마지막도 1로 끝나는데, 맨 중간에 6이 있다.
따라서 위의 번호 배치가 맞을 것이다. 3-6-9로 변하는 이치를 알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대삼(大三)이란 둘 씩 묶어서 3번 변화하면 6이 된다고 해석한다.
운삼사성환오칠일(運三四成環五七一) 3,4를 움직여 5, 7, 1를 돌려 이룬다.
앞서, 4번째에서 용이 변함을 이야기한 바 있다. 4번째 상자는 옆으로 나열하는 것이 아니고 방향을
틀어서 즉 돌려서 다시 쌓는다. 3진수로 이야기하면, 4에서 다시 1이 됨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5를
낳는다고 해석된다. 7이란 숫자는? 4부터 6으로 가면 즉 다시 큰 3(각각 2개씩 1,2,3)이 돌면
이번에 다시 원래 방향으로 틀어서 7이 된다로 해석한다.
1이란 숫자는 다시 큰 3(각각 3개씩 1,2,3)을 돌면 마지막으로 9번째 상자에 이르게 되는데,
그 상태가 0이고 이것은 앞서 이야기 한데로 0 = 1이며 새로운 시작을 의미하므로 1이라는 표현이
가장 적절하다. 대삼합육생칠팔구(大三合六生七八九)와 함께 변화의 움직임을 표현하는 구절이다.
4번째에 용이 변할 것이다는 것은 직접 언급이 없지만, 석삼극무진본(析三極無盡本), 만왕만래용변부동
본(萬往萬來用變不動本)의 두 구절로 부터 충분히 짐작이 간다. 그 양질전환이 오묘하게도 4번째에
일어나는 법칙을 이야기한다. 따라서, 큰 3 즉 2씩 묶어서 변화를 따라가다가 3번째에 3->4 변환에
의하여 7을 이루고, 다시 3씩 묶어서 변화하면 큰 1이 형성되므로 용이 변하는 핵심은 어디까지나,
3->4의 변환이 핵심이다.
그 다음 구절은 고로 사람이 귀하니 사람을 귀하게 여겨라 이런 뜻으로 누구든지 쉽게 해석할 수 있다.
묘연만왕만래용변부동본(妙衍萬往萬來用變不動本) (이처럼) 묘연하게 넘쳐 만물이 오고 가는데
(생성소멸을 반복하는데), 모습은 바뀌어도 근본은 변하지 않는다.
본심본태양앙명인중천지일(本心本太陽昻明人中天地一) 마음의 근본은 태양의 근본이니
사람마음에 천지가 하나임을 밝게 비추어 우러러 보라.
일종무종일(一終無終一) 하나의 끝은 끝없이 끝나는 하나이니라.
도형의 개념을 도입하여 해석을 해보니 결국 천부경의 논리도 위(圍)의 속자(口 가운데, 井자)를
지칭하는 것이었다.
실제로 자연은 누층적인 계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는 곧 진화의 역사를 반영한다.
물리학자들은 만물이 엔트로피 즉 자유도가 증가하는 성질을 가졌다고 하지만,
진화는 그 엔트로피 증가의 역방향이며, 그것은 새로운 계를 구축하는 힘이 작용된 결과이다.
극대의 운동이 결국 극소의 운동을 지향한다는 역설 때문에 진화가 일어나는 것이다.
생물학은 생태학, 생리학, 세포학, 생화학의 누층적 계에 대한 학문이며,
각 학문분야마다 대상시스템의 영역이 크기면에서나 작용하는 통합의 힘의 관점에서 보나 모두 다르다.
그런 의미에서 석삼극(析三極)은 그 엔트로피 증가적 분열을, 대삼합육(大三合六)은 그 역 엔트로피적
통합과 발전을 의미하는 것이다.
도형논리의 첫 시작으로 삼은 입구(口)라는 한 자는 먹어야 사는 한 개체의 사람을 뜻한다.
또한 생태계의 한 동물로서 '욕심'을 가지고 있음을 가장 적절히 표현하는 한자로 생각된다.
'욕심'이란 먹이사슬의 생태계의 '균형'을 유지하는 힘이었다.
그것은 생물학적 계에서 보면 타생명과의 합일을 추구하는 어떠한 힘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오랜
진화의 산물로서 욕심의 계에서 이탈하여 새로운 계를 구축할 사람이란 존재는 생태계의 최종 귀착지인
지도 모르며 어찌보면 천부경 자체에 내제된 순환논리일지 모르나 새로이 시작하는 하늘일 수도 있다.
이 새로운 하늘인 인간과 땅으로 표현되는 자연과의 관계를 표현하는 한자가 바로 밭 전(田)자이다.
사람은 밭을 갈아 생명을 유지하는 즉 노동하는 존재이다. 그러나 그 것만으로 사람의 완성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더 큰 완성을 위하여 사람과 사람이 그 관계를 가져야 함을 표현하는 한자를
필자는 더 큰 정방형의 위(圍, 口 가운데 井자)라고 생각한다. 그 관계가 사랑일까? 예(禮)일까?
좌삼입삼옥쇄이(坐三立三玉璽移) 三을 누이고 三을 세우면, 옥쇄가 이동하고
거일래일금불두(去一來一今佛頭) 一이 가고 一이 오면, 이제 부처님머리가 된다.
예언서 격암유록의 한 구절이라고 한다.三을 누이고 三을 세우면, 즉 田하면 임금이 되고..
필자가 생각하기에 땅만 생각하면 무엇인가를 지배하고자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되지만,
여기에 一이 가고 一이 오면, 즉 가로 한 획 세로 한 획을 더 그으면 즉 위(圍)하면
이제 부처님의 깨달음에 도달하게 됨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닐런지...
그래도 여전히 의문의 갈증이 남았다. 어찌하여, 이 글자 혹은 숫자 및 도형논리가 "사람이 귀하다"는
결론과 바로 매칭될 수 있는 이유가 된다는 말인가? 사람이 "하늘"이어야 함을 주입하고 있으며,
그 이유를 숫자를 들어 설명하고 있지만, 하늘이기 때문에 하늘이어야 한다는 "순환 논리" 는
어찌보면 말장난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한 천부경의 도형논리는 최초라고 주장(고집으로도 비추어질 수 있음)할 수 있을지 모르나,
고유한 것도 아니다. 정전제(井田制)에서 보듯, 이 도형논리는 한국 뿐 아니라, 고대 중국에서도
사용된 논리였으며, 지금도 서경이나 주역에서도 이와 유사한 논리들을 발견할 수 있다. 역술인들이
자주 사용하는 구궁방위도의 개념, 홍범구주, 하도와 낙서에서 발견되는 정방형 도형들과 마방진 ...
또한 위의 해석에 가장 취약한 점은 운삼사성환오칠일(運三四成環五七一)이라는 구절이다.
왜 하필 4 또는 8이 아니고 5이고 7인가? 여기에 대한 의문의 마지막 풀이는 아이러니하게도
한국인의 기원에 관한 인류유전학적인 한 연구 논문에서부터 실마리를 찾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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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단일민족설의 기원이 된 우리 민족의 뿌리는 북방 몽고계통의 우랄알타이어를 사용하는
종족의 일부가 남동진하여 형성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그것을 입증하는 대표적인 유물이 빗살무늬
토기문화이다.
그런데, 최근 인류유전학의 분석기법의 발달로 이를 뒤집는 연구결과가 발표되었는데, 단국대학교의
김욱교수는 모계유전을 통하여 계승되는 미토콘드리아의 DNA와 부계유전을 통하여 계승되는
Y-Chromosome의 DNA분석을 통하여, 몽고인보다 오히려 남방계인 중국 한족이 더 가깝다는 연구결과를
제시하였다.
필자는 Human Genetics에 발표된 Y-Chromosome을 이용한 김욱교수의 논문을 구하여, 자세히 살펴보니
중국 한족 중에서도 남부지방의 운남인 또는 베트남인과 혈연적으로 매우 가깝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한국인의 유전적 좌표는 만주인과 운남인 사이의 중간적 위치에 존재함을 알게 되었다.
이 연구결과를 볼 때, 필자의 머릿속에 문득 떠오르는 것은 쌀농사의 분포도였다. 필자가 10년전
중국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는데, 천진에서 베이징으로 가는 고속도로의 광할한 벌판에서 본 것은 쌀이
아니고, 옥수수밭이었다.
조선족 안내인에 따르면, 중국에서 소비되는 쌀의 대부분은 만주에서 나는 것이라고 한다.
황하유역에서는 척박한 토지환경으로 쌀농사를 짓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범람원 지역의 황하문명을
일으킨 곳에서 쌀이 아니라, 밭작물을 키우고 있음이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우리 입맛에는 맞지 않지만, 중국 남부 및 베트남의 알락미는 매우 유명하다. 아무튼 중국남부, 만주,
한반도와 일본으로 이어지는 쌀농사의 분포도는 위의 유전적 좌표의 결과와 상당히 유사한 근거가
될 수 있었다.
자료를 조사해보니, 쌀의 기원은 BC 6,000년 경 티벳의 양쯔강 상류지역에서 하류(베트남 포함)로
퍼져 나갔으며, 중국의 동부해안을 따라 올라가, 황하의 하류지역 및 한반도에서 BC 3,000년 경에
재배되었다는 것이라 한다.
더 놀라운 것은 최근의 발굴 조사에서, 가장 오래된 탄화미가 한국에서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다만, 이 탄화미는 두가지 품종 즉 알락미와 우리쌀의 품종이 같이 발견되고 신석기인들의 주거지역과
는 관련이 없었다. 아마도 남방계 유래의 한인들이 한반도의 원시 쌀품종으로 부터, 현재의 품종을
개량한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관계자들은 오히려 BC 3,000년 경에 신석기인의 주거지에서 쌀과 함께
발견된 보리, 밀 등의 맥류에 더 주목한다.
왜냐하면, 이와 같은 겨울농사에 적합한 맥류는 동시기에 중국본토에서는 발견되지 않고,
서부 감숙성의 유적-돌궐, 위구르 문명의 발원으로 추정되는 지역-에서 발견될 뿐이기 때문에
쌀과 다른 루트를 통해서, 즉 페르시아에서 북방루트를 통하여 한반도에 유입이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이다.
따라서, 두가지 곡류의 전래루트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한국인이 북방계와 남방계의 이중
기원을 가진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는 자료라고 생각되었다.
유전자와 곡류의 기원에 대한 증거가 아니라도, 자료를 조사해보니 이전에도 한국인이 북방계와
남방계의 혼혈 민족임을 주장하는 논거가 매우 많이 제기되었다. 일단 얼굴생김새의 두가지 특징을
한 때 TV 등에서 비교 분석하는 일이 자주 있었다.
당시에 필자는 혈연적 계보보다 생물학적 남북분포가 가지는 위도차에 따른 변이로만 생각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언어적인 증거가 있다. 한국어의 유래에 대하여, 그동안의 정설은 우랄-알타이어족이
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한국어와 몽고어, 퉁그스어 등 유사언어를 비교할 때, 어순이나 교착굴절어의
특징이 동일함에도 불구하고 인도-유러피안어족의 여러 군 사이보다 그 차이가 훨씬 크다는 것이다.
중국어는 티벳-중국어 계통의 언어로서 별도의 계보를 형성하는데, 태국, 베트남어도 여기서 유래된다.
그런데, 한국어에서의 한자 발음이 표준 중국어인 북경어보다 운남인들이 사용하는 남부지역 한자발음
과 몹시 유사하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예를 들면, 장개석은 북경어로 발음하면 "쟝제스"가
되지만, 남부지방의 복건성 발음으로 하면 "쟝카이섹"이라 하며 그 발음이 매우 유사하다.
사실 한국어에서 한자어는 외래어라기 보다는 너무나 실생활에 깊숙이 사용되고 있으며,
한자어를 빼고는 이야기가 안 된다. 이것을 오랜 사대주의의 결과라고만 칭하기에는 우리 언어생활
속에 한자어가 너무 자연스러운 것도 사실이다.
또 하나의 증거는 난생신화이다. 한국의 시조에 대한 신화의 특징은 천강신화와 난생신화가 교묘히
결합되어 있다는 것이다. 천강신화는 주로 북방계 제 민족의 신화와 유사하며, 난생신화는 베트남 등
남방계 제 민족의 신화와 유사하고 이 둘이 만나는 곳이 바로 한국의 신화라는 이야기이다.
도대체 먼 옛날, 어떠한 일이 일어난 것이가? 단군신화는 이같은 조사결과에 하나의 근거를 제시한다.
환인의 아들 환웅은 곰과 호랑이 중에서 동굴에서 쑥과 마늘만을 먹고 견뎌 사람이 된 웅녀와 결혼하여
단군을 낳는다. 많은 학자들은 곰과 호랑이를 실제 동물이라기보다는 일종의 토템을 가진 부족집단으로
해석한다.
그렇다면, 곰족과 호랑이족은 과연 어떤 민족이었으며 실제로 환웅이 이끌고 내려온 배달 민족과
어떤 관계를 형성하였을까? 처음 두 이질적인 집단이 만났을 때, 자연스럽게 혼인관계가 성립할 수
있었을까? 오히려, 전쟁이라는 갈등관계는 없었을까? 필자는 여기서 재야사학가들의 주장의 근원이
되는 <한단고기>와 중국의 사서에서 언급하는 치우와 황제의 고대 신화적 전쟁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우선 김지하 시인의 놀라운 주장부터 읽어 보자.
"'치우'는 4천 5백년 전에 살아 있었던 고조선 제 17대 자오지(慈烏支)천황으로 중국 사람들이
제일 겁을 내는 '싸움과 전쟁의 신'이다. 당시 중국의 임금인 황제(黃帝)와의 47회에 걸친 전쟁에서
47회를 모두 승리함으로써 중국인들을 압도해 버리고 고조선의 역사를 튼튼한 반석 위에 올려 놓았다.
이 47회에 걸친 고조선과 중국의 전쟁은 이전까지의 지배적 질서인 유목이동 문명을 제거하고
당시 새롭게 시작된 농업정착 문명만을 고집하는 중국의 황제와 유목이동 문명과 농업정착 문명의
공존, 공영으로 역사와 현실을 통합하려 했던 고조선의 치우 천황과의 가치관과 체제의 싸움이었다."
환단고기를 근거로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치우는 고조선 이전의 환웅이 세운 배달국의 14대 자오지천황
이다. 김욱교수의 신문기사와 함께 나온 Y-Chromosome으로 본 세계 제 민족의 유전자 이동지도를 보면,
중동에서 파미르의 고원지역으로 이주한 인류가 4방향으로 분기하는데, 북방으로 이주한 두 지파 중
하나가 시베리아지역을 경유하여 베링해협을 건너 멀리 남아메리카 남단까지 이동하며, 남쪽으로
이주한 두 지파 중 하나는 티벳-중국어계통의 이주 경로를 보인다.
필자가 보기에 전자는 북방계 한인의 원류로 보이고, 후자는 남방계 한인의 원류이다. 이 4방향으로의
인류분기는 박제상이 지은 <부도지>의 설화와 매우 흡사하다. 부도지에 의하면, 태초의 마고여신이
선후천을 배우자로 두 딸 궁희와 소희를 낳고 두 어머니 여신 역시 선후천을 배우자로 각각 황궁,
청궁, 백소, 흑소씨를 낳았다고 한다. 이 유전자지도로 미루어, 백소는 유럽인처럼 보이고, 흑소는
인도인, 황궁은 몽고인, 청궁은 중국인과 흡사하다.
필자가 여러 자료조사를 통해 알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분기와 이동이 이 지역의 식량자원이
부족해지기 시작한 빙하기가 시작되는 대략 20,000년 - 15,000년 전 부터 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림에서 북방계 M242 유전자 인류의 넓은 분포도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것은 후기 구석기시대의
인류 유적이 대부분 이 북방계 민족의 활동 범위에 존재함을 알 수 있으며, 유적지로 미루어 그 문화의
중심지역은 바이칼호임을 알 수가 있다.
이 시기는 또한 빙하기에 살았던 대형동물이 멸종한 시기이기도 한데, 이들을 사냥하며 남미의 끝까지
이동한 인류의 활동 공간은 북유럽에서 한반도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분포하는 빗살무늬 토기문화와
유럽과 바이칼호에서 동시에 발견되는 구석기시대의 비너스상의 분포와도 일치한다.
추정컨데, 이러한 북방계 황궁족인 인류의 광범위한 활약상은 개를 이용한 썰매라는 운송수단을
이용한 것이 아닌가 짐작하고 있다. 실제로 북유럽 구석기유적에서 개썰매가 발견되었고, 개의 기원은
시베리아산 늑대라는 최근의 연구결과가 있다. 에스키모인은 현재도 그러한 삶을 살고 있는 인류로
보인다. 한단고기에서 이야기하는 환인제국이 동서 2만리, 남북 5만리라는 이야기가 시베리아와
남북아메리카를 합치면, 거짓말이 아닐지도 모른다.
1만년전 빙하기가 끝나면서 일정 기간 시베리아지역에서 개썰매 대신 초원을 종횡무진으로 달리는 말을
이용한 수렵이동 생활 및 반농 반유목 생활을 하다가 대략 BC 3000년 정도의 무렵에 이 북방계 유목민
의 일단이 발해만지역을 중심으로 황하의 북쪽과 만주, 그리고 한반도 지역에 남하하여 처음으로 "홍산
문화"라고 불리우는 정착농경생활을 시작하는데 이것이 환웅의 신시배달국으로 추정된다.
농경 정착생활로 특징지워지는 신석기문명은 추정컨데 식량의 부족현상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대형동물의 멸종과 빙하기의 후퇴는 지구의 세차운동의 영향이며, 편서풍의 발달로
내륙지방의 사막화가 일어나기 시작했을 것이기 때문에 이를 극복하기 위하여 수렵에서 유목으로,
채집에서 농경으로의 전환이 불가피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전히 가축을 기르는 유목민족적 전통이 강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홍산문화 유적지에서는
주로 기장, 수수 등이 발견되지만, 한반도 및 감숙성 서부에서 발견되는 맥류의 분포로 미루어,
광범위한 북방계의 활동범위가 되는 시베리아 교역 루트를 통한 페르시아 지역에서 아주 이른 초기에
개발된 맥류 작물의 수입도 역시 농경에 이용되었을 것이다.
(수메르가 정말 환단고기에 나오는 수밀이국인지도 모른다. 아무튼 원시시대지만, 인도-유로피안인
스키타이문명과 시베리아 동쪽의 돌궐-몽고-퉁그스-한인계의 기마민족의 분포로 보아 두 지역간의
교역은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는다.)
반면, 상대적으로 따뜻한 지역인 양자강을 따라 내려와 아주 이른 초기 - 대략 BC 6,000년 경부터
쌀농사의 정착농경생활을 하던 운남인 계통의 일부는 신시배달국의 개국과 비슷한 시기인 BC 3,000년
경 황하의 하류로 이주하였고, 혹은 일부는 배를 이용하여 한반도로 이주하여 쌀농사를 전파한 것으로
추정되며, 이 들의 중심 유적지는 황하하류 산동반도의 "대문구문화"로 짐작된다.
추정컨데, 이들의 북방으로의 이주 압력은 열대우림지역인 강남지방의 말라리아 등 질병에 의한 압력이
주요한 요인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기록상으로 이들은 농사의 신이기도 하며, 의약의 신이기도 한 염제
신농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염제신농을 북방계 배달족으로 보는 재야사학가들도 있으나
논리적으로 정합성이 부족하고 다음과 같은 한단고기/삼성기 기록도 염제신농족과 환웅배달족이
서로 달랐음을 반증한다.
"與炎農之國劃定彊界(염농의 나라와 강토의 경계를 정했다)-배달국 10대 갈고환웅"
그러나, 황하 중 상류지역에는 또다른 중국 민족의 지파가 이들 두 문화보다 앞서 정착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이것이 "앙소문화"로 불리워지는 신석기문명이며 약 BC 4000년경까지 높여 잡는 경우가
있다. 양자강과 마찬가지로 황하 역시 티벳의 고원지방에서 발원하며, 티벳-중국어족은 두 분기로
나뉘어 정착생활을 한 것으로 보인다.
앙소문화는 주로 "기장"과 "수수"가 발견되며, 유럽기원으로 의심받던 채색토기가 유명하다.
그러나 이들이 황하 하류지역까지 이주하지 못한 것은 하류지역의 잦은 홍수와 관련되어 있는 범람원적
특징과도 관련이 있을 것으로 짐작될 뿐이다. 이와 관련하여, 흥미로운 것은 한단고기의 다음과 같은
기록이다.
"이 때에 무리의 이름은 하나로 통일되지 않았고 풍속도 오히려 점점 달라졌다. 원래 살던 무리는
범 무리였으며 새로 살기 시작한 것은 곰 무리였다. 범 무리의 성질은 잔악한 짓을 즐기며 탐욕이
많아서 오로지 약탈을 일삼았고 곰 무리의 성질은 어리석으며 또 자만에 쌓여 조화를 이루지
못했다....그러나 범 무리는 끝내 그 성질을 고치지 못하므로 이를 사해로 내쫓았다.
한족의 일어남이 이렇게 하여 시작되었다."
여러가지로 미루어 보건데, 이 범을 토템으로 하는 부족은 앙소문화를 일으켰던 민족이며 중국의
신화를 바탕으로 고려해보면, 제곡고신의 후손으로 보인다. 환단고기로 미루어 곰을 토템으로 하는
염제신농족과 환웅배달족은 초기부터 상호 통혼을 하는 등 일정 정도의 교류관계에 있었으나,
본격적으로 배달국 14대 임금인 치우천황대에 이르러 일련의 전쟁을 거친 후, 혈연적, 문화적 통합을
이루어 비로소 한민족의 원류를 형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치우천왕께서 염제신농의 나라가 쇠함을 보고 마침내 큰 뜻을 세워 여러 차례 천병을 서쪽으로
일으켰다."
중국쪽 기록에 의하면, 황제가 처음에는 계속 지다가 마지막에 치우에게 승리를 거두고 치우를 찢어
죽였다고 하지만, 한단고기에는 역으로 황제헌원을 잡아 신하로 삼고 서쪽의 제곡고신을 쳐 공을
세우도록 하였다고 한다.
중국 쪽 신화의 기록에 치우가 풍백과 우사를 이용한 도깨비부대를 동원했다면, 황제는 곰과 호랑이
부대로 맞대응을 했었다는 기록이 재미있다. 이 전쟁의 기록을 곰과 호랑이 민족을 아울러 농경민족만
의 문화를 구축하려는 황제와 농경민과 유목민의 새로운 통합을 추구하려는 치우의 충돌로서 그린
김지하시인의 놀라운 통찰력에 감탄을 할 뿐이다.
이 전쟁의 최후의 승리자가 누구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북방계 배달민족과 남방계 염제신농족
은 황하하류의 산동반도를 중심으로한 "용산문화"를 이룩하였고, 비로소 "동이족"의 원류, 한국인의
뿌리가 형성되는 계기가 된 "청구배달국"의 건국(북방신시에서 산동반도로의 수도 이전)으로 이어졌음
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또한 이 동이문화가 한편으로는 황하 하류 유역에서는 요,순시대를 거쳐 하나라, 은나라로 이어지며
후에 중국 민족의 주류였던 서쪽의 제곡고신 혹은 범족이 중심인 주나라에 흡수 통합되고,
다른 한편에서는 황하 이북(번조선)과 만주(진조선), 그리고 한반도(막조선)의 삼한지역에서는
단군왕검의 통일 고조선제국으로 계승 발전되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특히 주목되는 용산문화의 여러 발굴유적 가운데, 우리의 귀면 혹은 도깨비 문양과 동일한 "치우천황"
의 얼굴 그림이 발견되었고, 더욱 주목할 부분은 삼태극 모양의 고리환이 발견되었다는 점이다.
즉 북방계 유목 문화와 남방계 농경 문화의 통합이 "태극 사상"의 원류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필자가 보기에 이 태극 사상은 이 연재글의 주 관심사인 천부경의 해석에 큰 도움을 준다.
결국 천부경은 환인이 환웅에게 구전으로 물려준 경전이라기보다는 역사적 사실에 기반을 두어
단군고조선 대에 완성된 이데올로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튼 천부경에 태극사상이 어떻게 반영되었는지 고찰하기에 앞서 동양철학 속에 깊숙이 뿌리박은
북방계 유목문화와 남방계 농경문화의 통합의 영향을 좀 더 살펴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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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방계 수렵-유목민은 항상 불안한 내일을 준비해야 하는 이동생활이 특징이다. 이러한 생활에서는
미래를 알 수가 없기 때문에, "신"이라는 종교 개념이 생길 수 밖에 없으며, 미래를 알기 위해
신의 계시를 받는 점복이 발달한다.
바이칼호와 유럽 등지의 구석기 유적에서 발견되는 "구석기 시대의 비너스"는 원시 수렵인들의
종교개념을 반영하는 유적으로서, 수메르의 이난나 신화처럼 농경생활의 다산과 풍요를 기원하는
개념에 입각한 신앙이 아니라, 수렵생활 공동체를 구성하는 인류 그 자체의 생산을 위한 "마고 여신상"
이 아닌가 한다.
혹자는 이를 모계 사회 를 반영한 신앙으로 평가할 지 모르나, 채집과 수렵의 생산력 차이에서
비롯되는 모계 사회개념을 빙하기의 광할한 빙원에서 이동생활을 하는 수렵민에게 적용하기는
논리적 모순이 있으며, 오히려 이동 수렵에 의존하는 사회에서는 "환인"과 같은 남성 원로의 역할이
상당히 중요하였을 것으로 생각한다.
오히려, 우리 민족의 신화에서 알 수 있듯이 이는 고유한 "조상신"에 대한 전통으로 생각해야 한다.
다만 마고신앙의 모태로 볼 수 있는 모계 사회의 구조는 훨씬 더 오래 전인 홍적세의 마지막
간빙기시대인 파미르고원에서의 채집생활에 더 적합한 개념일 수 있다.
또한, 환인이나 우리나라 국명의 어원에서 보듯, 배달민족의 주신은 하늘과 밝음의 태양이었으며,
많은 재야 사학자들은 초대 환인의 이름인 안파견을 "아버지"의 어원으로 고찰한다.
반면에 농경-정착생활을 하는 남방계 민족의 관점에서 자연은 항상 순환하며, 미래는 예측 가능하다.
사시사철의 경험 속에, 태양력이 발달하고, 24절기의 관점이 생긴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파종의
시기와 수확의 시기를 아는 것이다. 이러한 돌고 도는 생활 속에 우주는 항상 순환하며, 인생 역시
돌고 돈다는 세계관이 생길 수 있다.
남방계 농경민족에게 "신"의 개념은 그리 중요치 않다. 따라서, 그러한 생활 상 속에서는 합리적인
사유체계가 더욱 발달할 수 여지가 존재한다. 적어도 상대적으로 기온이 높고 강수량이 많은 풍요한
지역에 거주해 온 인도나 중국의 사유체계는 그러하다.
인도의 경우는 이러한 순환론적 세계관에 따라, 삶과 죽음 마저 윤회하게 되는 것이다.
혹자는 씨(氏)와 성(姓)의 차이를 부계혈통과 모계혈통의 차이로 구분하던데,
남방계 민족은 채집-농경민의 특징 상 모계혈통을 따라 주로 단음절(즉 중국어계통)의
성( 姓 = 女 + 生)을 사용한 모계사회 전통을 가진지도 모른다.
실제로 환단고기를 보면, 환웅씨, 치우씨, 복희씨, 고시씨 등 고대 북방계 배달족은 씨라는 단어를
많이 붙이는데, "씨"라는 단어의 의미나 두 글자의 구성은 한글 발음의 한자로의 이두식 음역으로
보인다. 황제헌원씨는 웅(熊: 곰족)성이라 하며 염제신농씨는 강(姜)성 이라고 한다.
다만, 복희씨는 풍(風) 성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의문이다.
그러나, 인류 최초의 농경문명을 건설한 인도-유러피안족인 메소포타미아나 이집트의 경우에는
농경민임에도 불구하고, 절대적 다신관의 개념이 성립하는데, 필자는 정착 농경생활 이전의 그들
제 민족의 "수렵-유목 이동 생활 상의 경험"을 솔직히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중동지방의 신화 중 가장 오래된 원형을 간직하고 있는 수메르의 신앙도 그런 의미에서, 북방계
수렵민과의 교류 혹은 이동 정착 생활에서 발생한 종교 신앙의 변형된 형태가 아닐까 싶다.
또한 지역의 특징 상 파미르고원을 지나며, 건조해진 편동풍의 영향은 북방시베리아의 초원지역화 혹은
사막화(예, 고비사막)보다 훨씬 더 빨리 사막화(현재의 중동지방에 형성된 사막은 초기 문명건설시기와
는 관계 없음)의 길을 가게 되어, 아주 이른 초기(BC 7000년)부터, 범람원 지역을 중심으로 대규모의
노동력을 동원하는 도시국가와 절대 왕정체계가 발전하는 사회적 조건을 생성하게 되었다.
따라서 수렵민의 이동 생활 속에 늘 존재하는 다정 다감해야할 "신"의 개념은 정착생활의 초기부터
불가침의 "절대성"을 부여받게 되었을 것이다.
여하튼 북방계와 남방계의 이질적인 두 세계관은 청구배달국의 혼혈 민족인 동이족이 출현한 이래로
태극사상이라는 독특한 융합의 길을 걸어 왔다는 것이 필자의 주장이다. 중국 신화의 고대 임금 중에
"태호 복희"씨는 최초로 팔괘를 그린 사람으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환단고기에 의하면, 태호 복희씨는 중국의 임금이 아니라, 배달족의 우사였다.
또한 팔괘 그 자체가 농경민의 세계관에 적합치 않다. 팔괘에서 유래된 주역은 점복의 의미를 가지며, 음, 양을 표현하는 막대기인 효가 세개씩 모여 하나의 괘를 형성하는데, 각 괘의 의미는 하늘, 연못,
불, 우뢰, 바람, 물, 산, 땅을 각각 의미한다.
이는 각기 하늘과 땅의 변화를 표현하는데, 불, 우뢰, 바람은 하늘(날씨)의 변화를 연못, 물, 산은
땅(지형)의 변화를 표현한다. 하늘의 변화는 몰라도, 땅의 변화는 정착 농경민의 삶 속에 이해가
되지 않으며, 결국 팔괘는 끊임없이 이동해야하는 유목민의 삶 속에서 나온 개념이라 볼 수 밖에 없다.
이와 유사한 것이 우리 민족 고유의 민속 놀이인 윷놀이이다. 윷도 마찬가지로 음, 양을 표현하는
막대기 4개를 던져 나오는 경우의 수 5가지로 경기한다. 도, 개, 걸, 윷, 모는 각기 돼지, 개, 양, 소,
말을 표현한다 하며, 달리는 속도 별로 5가축을 순서대로 나열한 것 처럼 보이는데, 이 역시 유목 민족
의 삶 속에서 이해할 수 밖에 없는 문화양식이다. 윷판은 총 29개의 점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가운데
한 점은 하늘의 중심점으로 생각한 북두칠성의 첫번째 별 천추성을 의미하고, 나머지 28개의 점은
북두칠성의 각 별이 관장하는 4방 28수(4*7)의 별자리를 의미한다고 한다.
추정컨데 천체에 대한 시각 역시 끊임없이 이동해야 하는 유목민에게 훨씬 중요한 "위치 정보"의
의미가 있다. 윷놀이도 농사의 풍흉을 점치는 도구로서 사용되었다는 기록이 있음을 미루어보면,
8괘와 더불어 이동유목생활을 하는 배달족의 고유한 점복문화 혹은 놀이문화의 하나인 것이다.
어찌하여, 천문의 중심이 북극성이 아니라, 천추성일까? 한가지 과감한 추정을 해본다면, 1만년전에
벌어진 빙하기의 후퇴는 천지개벽과 같은 현상이었을 것이며, 그 원인은 지구 세차운동에 있을
것이기에 시베리아 벌판과 남북아메리카를 내달리던 빙하기의 환인(실은 황궁, 유인씨)시절에는
지축은 천추성을 가리키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농경민족과 유목민족의 역사적인 결합은 점복의 의미로 시작한 팔괘가 농경민족의 세계관에
영향을 받아 순환하는 자연질서에 포함되었고, 8괘가 다시 두짝씩 결합하여 64괘를 이룬 "주역"과 같이
돌고 도는 인생사를 점치는 철학으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단순한 팔괘의 원형적 나열로 보이는 복희와
달리, 하나라의 임금이 만든 문왕 팔괘도를 보면 각 괘의 숫자표현이 8이 아니고, 9로 늘어나며, 어느
쪽을 합쳐도 15를 만드는 수학적 마방진의 개념까지 도입되었음을 보인다.
이는 또한 농경 생활적 표현인 정전(井田)의 개념을 표현하며, 땅에 있어서의 구궁방위도를 표현하는
것으로 바뀐다. 여기서, 모자라는 가운데 하나의 괘는 음양오행설에서 유래한 중심개념인 흙 토(土)로
통상 표시한다.
이러한 사고의 흐름 속에, 주목할 만한 부분은 배달족의 윷놀이에서 보듯 천문의 중심점은 북두칠성의
천추성이었고 상징수는 당연히 7이었으나, 하나라 문왕 팔괘에 이르면 마방진을 도입하여, 중심점의
상징수가 5로 바뀐다는 점이다. 자료를 찾아보니, 중국에서는 천문의 중심마저 금성인 태백성이며,
이는 태양계의 5행성(목,화,토,금,수)의 한 별을 의미하는 것 임에 반하여, 배달 이래의 전통을
보유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경우는 천문의 중심은 여전히 북두칠성이라는 이야기가 있었다
(http://www.shaman.co.kr/newspaper/07/bukdu.htm)
또한 5와 7이라는 숫자에서 문득, 풀리지 않던 천부경의 운삼사성환오칠일(運三四成環五七一)의
구절이 생각이 났다.
복희 팔괘에서 천부경 혹은 문왕 팔괘에 이르는 과정 중에 어떠한 역사적 사실과 변천이 있었으며,
그 역사적 변천이 주는 사상사적 변화의 흐름은 어떤 것이었을까? 첫번째는 서쪽의 제곡고신족과는
통일을 이루지 못했지만, 치우천황의 천하 통일의 역사와 동이족의 형성이 있었다. 두번째는 황하유역
에서는 요임금이 출현하고, 삼한지역에서는 단군왕검의 고조선 건국으로 이어지는 동이족 문화의
분리가 있었다.
첫번째, 치우천황에 의한 남북문명의 통합은 이질적인 두 문화를 융합하고자하는 이데올로기 작업을
통하여, 태극사상이라는 독특한 철학을 만들어 내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 뿐 아니라, 태극과 팔괘가
결합하여 오늘 날의 태극기와 유사한 "상징물"의 작업이 있었다. 다음의 그림은 한배달이란 잡지
2002년 3월호의 내용에서 박희준이란 분이 쓴 "나선 은하의 핵에 태극 문양이 있다"라는 글의
일부분이며 필자가 인터넷 검색으로 발견한 것이다.
정말 아래 태극기와 유사한 문양과 이에 대한 기록이 있었는지는 확인을 못하였지만 상당한 근거가
있으며, 고전 드라마에서 미신(?)을 믿는 사교집단을 표현할 때 혹은 무협영화에서 배경 그림으로
사용됨을 간혹 본 기억이 있다.
이 "상징물"의 의미는 무엇일까? 우선은 "전쟁의 신"인 치우천황이 태극 도형의 개념화를 이루었다는
것을 전제하면, 이것은 귀신을 쫒는 "벽사"의 의미가 있다. 우리나라의 홍살문에 사용되는 삼태극
문양은 밖으로부터 들어 오는 마귀를 내쫒고 집을 지키기 위한 벽사의 의미가 있는 것이다.
두번째, 천부경과 같이 "언어"로서 사상을 표현한 것이 아니라, 그림과 같은 상징물로 표현하였음은
통합의 정당성을 설복하기 위한 초기 남방계 민족과 북방계 민족 간의 "의사소통"을 위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유사한 것으로, 한자의 기원이 되는 갑골문은 그림 문자인데, 그 자체로는 남방계의 단음
절어에 적합한 문자방식이지만 북방계에서 유래한 점복의 의미도 있으며, 남-북방계의 의사소통을
위한 상형 문자로서의 의미도 있었을 것이다.
이 치우기의 상징 개념(복희 팔괘 + 중앙 태극 = 9수의 논리)은 황하유역의 요임금과 삼한지역의 단군
왕검의 두 정치체제로 각기 흡수되어 별도의 발전과정을 거치게 된다. 즉, 황하유역에서는 문왕팔괘의
개념으로 발전하고 중국식 도교 및 유교 문화의 뿌리로 발전하게 되고, 단군조선에서는 천부경, 삼일신
고 등의 우리의 전통 종교인 신교(혹은 무교) 문화의 뿌리로 발전하게 되는 것이다. 왜 동이족 문화가
두개로 나뉘어지게 되었는지는 불분명하다.
추정컨데, 배달국 말기에 요임금의 쿠데타가 있었고, 발해만의 구 신시지역 부족장들은 이에 대항해
별도로 단군왕검을 옹립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순임금과 하나라의 우임금 그리고 단군조선과의 관계는
http://user.chollian.net/~sppopsj/homejoh/new/soon.htm 사이트를 참조하기를 바란다.
정치적 변동이 어떠했는지는 모르지만, 분명한 것은 동이족 문화가 둘로 나뉘었으며 삼한지역의
고조선이 현재의 한국인의 뿌리가 되었음은 분명하다.
순임금, 우임금의 황하유역의 범람원 통제의 실패와 성공은 "오행" 개념의 중요성이 황하유역 동이
문화에 깊숙이 뿌리박는 계기가 된 것으로 보이며, 이로부터 음양오행설의 이론이 발달하게 된다.
문왕팔괘와 천부경을 비교 검토할 때, 필자가 느낀 것은 문왕팔괘는 마방진의 수학적 아름다움은
존재하지만 "인간 존중"의 천부경 사상이 빠져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는 전술했듯이 좋게 이야기하면, 남방계 문화의 합리적인 순환논리의 전통이 강조된 결과로 보이며
나쁘게 이야기하면, 치우기의 전통에서 철학이 아닌 형상이라는 껍데기만 전승받은 듯하다.
물론 은이 망할 때, 기자가 홍범구주(- 정약용은 이를 정전제의 표현이라 이야기했으며, 홍범이란 홍익
인간의 규범을 뜻함)의 정신을 주무왕에게 전승하고 고조선으로 망명하지만 하나라의 부패나 은나라의
부패에서 보듯, 인간존중이라는 철학의 상실은 가혹한 착취로 귀결됨이 연상되었다.
이는 또한 황하 하류지역이라는 범람원의 특징 상 대규모 노동력을 동원해야 하는 필연성에서 이후
끊임없는 무력동원에 의한 절대왕권의 성립에 따른 결과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형상화는
상대적으로 이데올로기적 통합력의 약화를 가져와 이후 춘추전국시대의 제자백가 사상이 난무하게된
계기가 된 것으로 보인다. 유교나 도교의 합리주의는 그 약화된 통합력에 대응하는 노력인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단군조선의 천부경에 표현된 "인간존중"의 철학에 기반한 강한 이데올로기적 통합력은
아주 일찍부터 "민족주의"적 정서가 싹트는 계기가 되었으리라 보이며 이러한 통합적 민족주의 이데올
로기의 유지에는 우리 민족에게 고유한 정기적인 "제천행사"가 큰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통합적 이데올로기 하에 단군조선이라는 나라는 중국과 달리 아주 오래도록 유지될 수 있었을 것이다.
민족주의적 통합 이데올로기의 영향은 한국, 고려, 조선이라는 나라 이름의 반복현상과 웬만해서는
국가질서가 바뀌지 않고 나라들이 한결같이 오래 유지되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다만, 환단고기에
의하면, 세수는 1/20에서 후기에는 1/80으로 줄어들기 조차 하는데, 이는 애시당초 착취라는 개념이
없는 민본적 전통을 반영하지만 후기로 갈수록 인구 및 영역의 증가에 따라 지배왕권이 존재하는지
조차 의심스럽게 되었을 것이며, 사회 통합력은 그만큼 약화되어 결국, 부여, 고구려, 옥저, 동예,
삼한 등의 열국시대로 나아가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분열에는 또한 범람원이 아닌 산악지형이
많은 특성도 한 몫을 하였으리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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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얼마 전 친구를 만나려고 강릉에 간 일이 있다. 마침 오죽헌에서는 민속 무교의 그림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다. 이 민속무화전을 관람하면서, 아주 특이한 점을 발견하였는데, 그림과 숫자하고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임경업장군이니 최영장군이니 호구마마니 각종 신명들을 모시기도
하지만 특히 숫자하고 관련된 신명으로는 일월성신, 삼신, 사천왕, 오방신장, 칠성신, 시방신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사천왕이나 시방신은 원래 불교의 개념에서 나온 것으로 불교가 우리 나라에 유입된 이래 민속 신앙인
무교에 영향을 끼친 하나의 증거이니, 결국 우리나라의 고유한 민속 무교 신앙에서 유일하게 남는
신명은 일월성신, 삼신, 오방신, 칠성신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 중에서, 천부경에 늘 관심을 기울이던
필자에게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오방신장"과 "칠성신"이었다.
오방신장에 대한 자료를 조사해보니, 그 기원은 치우라는 것이었다. 즉 황제에게 패한 치우가 육시를
당하여, 5군데에 나누어 묻혔는데, 이 전쟁의 신 치우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5군데로 찢어진 혼백을
모아 제사를 지냈다는 것이다. ....이런..... 정말로 치우가 황제에게 패했다면 지금까지 줄기차게
필자가 논증해온대로 "한국인"이라는 존재가 있을 수나 있겠는가?
그 뿐만이 아니다. 무교의 기원이 중국의 도교라는 것이다. 정말, 우리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왜, 몽고의 샤머니즘이 기원이라고는 하지 않는지.. 그것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음..일단
감정을 가라 앉히고...사실 칠성신도 중국의 도교에서 믿는 신명임은 틀림이 없다.
아...그럼 삼신 하나라도 건질 수 있을까? 찾아보니, 삼신 자체에 대한 신명은 없지만, 신선의 거처로
믿어지는 삼신산에 대한 신앙이 있었다. 진시황도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삼신산이라는 전설의 산을
찾아오라고 사람을 보내었다고 한다.
<부도지>에 나온 "마고" 여신도 백과사전을 찾아보니 중국의 여자 신선의 이름이다.
한나라 때 채경이란 사람의 집에 왕림하여, 동해가 3번이나 뽕나무 밭이 되는 것을 보았다고
이야기한 창해의 변이 유명하다고 한다.
정말 도교가 우리 나라에 전래된 것일까? 그러나, 중국의 도교에 대하여 백과사전을 검색하여 보니
그 기원에 대하여, 재미있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BC 3세기 무렵의 전국시대에 연(燕)·제(齊;河北省·山東省) 지방에는 <방선도(方僊道)>라 불리는
신선방술(神仙方術)을 위주로 하는 종교집단이 존재했다. 일찍이 제나라에는 민간의 무축(주술사)에
의거하는 농작(農作)을 위한 산천제(山川祭)와, 그것을 토대로 하여 왕후(王侯)들이 풍작을 기원하는
팔신(天主·地主·陰主·陽主·月主·日主 등)에게 지내는 팔신제가 있었다.
이 팔신제에 그 당시 이미 발달되어 있었던 경락의경(鍼灸醫療學)이나 본초경방(漢方醫藥學)의 학문과
보인(步引)·안마·복이(服餌)·황야(黃冶;體操·食物·鍊金養生) 등의 신선술(神僊術)이 결합되어
이루어진 것이 방선도이다..........
중국에서 성립된 도교가 한국에 전래된 시기는 정확하지 않으나, 《삼국유사(三國遺事)》에 624년
(영류왕 7) 오두미교가 고구려에 도입되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삼국시대에 전해져 주로
왕가에서 신봉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
민간도교는 일찍이 고대사회에 전파되어 민중 사이에 유행한 성상(星相)·복서(卜筮)·점험(占驗)·
수선(修仙) 등의 신앙과 그 맥을 같이 하며............오늘날의 도교는 사회 표면에 뚜렷이 부각되지
않고 있으나 민간신앙 속에 뿌리가 이어져 하나의 토속종교로 그 흔적을 남기고 있다."
물론 곧이 곧대로 읽으면, 도교는 중국에서 전래되어 민속신앙인 무교가 된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지금까지 필자의 글을 읽었다면, 이제 다른 해석을 가할 수가 있을 것이다. 연나라는 전국 칠웅 중의
하나로 황하이북에 존재하였던 나라이며, 주무왕 동생의 나라이다.
고조선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데 이 연나라에서 위만이 망명하여 이후 고조선의 임금이 되며, 발달된
중국의 철기문명을 전래한 것으로 통상 믿어진다.
재야사학가들은 위만조선은 발해만에 존재하던 번조선(변한)이었을 뿐이라고 하며,
<한단고기>를 보면 번조선의 위만왕 및 우거왕을 도둑이라고 부르며,
위만조선은 부여(진조선의 개칭)에게 정벌을 당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황하 이북의 연나라의 위치로 보면, 비록 연나라의 군주가 봉토를 받은 주무왕의 동생이지만,
연나라 사람들은 은나라 문명을 일으킨 동이족의 나라임에 틀림이 없으며, 산동반도에 위치하는 강태공
의 제나라도 마찬가지이다.
어찌보면, 강태공은 서쪽의 오랑캐에 협조한 매국노이며, 기자는 충신이었던 셈이다. 끝까지 주나라와
의 타협을 거부하고 고사리를 먹고 살았다는 백이, 숙제 등도 마찬가지이리라.
단군조선과 마찬가지로 연나라나 제나라에서는 비록 민간 신앙일지라도 계속하여 산천제의 제천행사가
행해졌던 것이며 심지어 강태공의 제나라 왕실도 팔신제를 치루고 있었다. 그것이 바로 중국 도교의
원류인 것이다.
또한 단군이 바로 제정일치사회의 군장이었으며 오늘날의 무당과 마찬가지였음은 교과서에도 나오는
이야기가 아닌가? 주기적인 제천행사는 바로 동이족 고유의 문화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후 도교는
황제와 노자를 주신으로 섬기는 소위 "황로사상"으로 빠르게 중국화의 길을 가버린 것이다.
천부경을 재해석하기 앞서, 한가지 필자의 논리를 당혹케하는 이야기가 있는데, 그것은 우리나라
사찰의 산신각에 모셔진 호랑이 토템이다. 범족이 한족의 주류인 황하 중상류의 밭농사 민족이었다면
단군신화나 환단고기에도 맞지 않는 이 호랑이 토템은 어이된 일인가?
더욱이 곰토템은 전혀 발견할 수 조차 없다. 퉁그스민족들에게 곰, 호랑이 토템을 찾는 사람도 있다.
자료를 찾아보니, 신용하교수는 <후한서>에서 예족은 호랑이를 토템으로, 맥족은 곰을 토템으로 하고
있다는 자료를 찾아내었다고 한다.
한가지 가능성은 배달족이 이주하기 전에 곰을 토템으로 한 남방계 염제신농족들은 황하하류 뿐 아니라
발해만을 지나 한반도 남서해안에까지 퍼져서 이미 살았을 가능성이 있으며, 호랑이를 토템으로 황하
중상류에 살던 제곡고신족의 일파가 곰족과 같이 이동하여 한반도 동북의 산악지대에서 이미 밭농사를
하고 살고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산동반도에서 벌어진 치우의 전쟁은 한단고기에서도 나오듯 이미 배달족과 곰족이 초기부터 통혼해오던
이후에 벌어진, 결정적으로 핏줄과 문화를 통합한 사건이었을 뿐이다. 그렇게 본다면, 예, 맥이란 원래
는 한반도로 이주한 과거 중국계 민족의 전통을 계승한 부족명칭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더욱이 종족 명
칭의 발음도 단음절이 아닌가?
"동예"는 동쪽의 "예"라는 뜻이다. 최근 고구려가 중국사라고 하는데 필자는 나라 이름 자체도 중요한
반론의 근거가 될 수 있다고 본다. 중국의 나라 이름 들은 하나같이 단음절이지만, 우리나라의 나라
이름은 하나같이 두 단어 이상이다. 이것은 한글 발음의 이두식 음역이기 때문이라고 본다.
아무튼 예, 맥족은 곰, 호랑이 구분에 관계없이 모두 우리의 조상이다.
그렇다면 중국에는 왜 곰토템이나 호랑이토템이 없을까? 아니다.
완역판 산해경(이중재)의 일부 인용글(인터넷 서점에서 발췌)을 보면 다음과 같다.
"곰은 황제의 부족 대명사이고, 호랑이는 염제 신농씨의 부족 대명사이다. 고대 깃대를 보면 황제의
국가는 곰을 상징하였고 신농씨는 호랑이를 상징하였다. 이상과 같이 곰과 호랑이를 상징하게 된 것은
상대의 적에게 위협을 주기 위함이라고 사마천 사기에 기록된 것을 볼 수 있다."
다만, 호랑이는 염제신농이 아니라 제곡고신이어야 논리적으로 말이 될 듯하다. 그러나, 필자는 설혹
예, 맥족이 원래는 중국계였고 이후 동이족화 되었을 것이라 가정하더라도, 산신각의 호랑이로부터
호랑이 토템을 이끌어 냄은 잘못이라고 생각한다. 중국에서도 찾기 힘든 곰, 호랑이 토템이라는
원시신앙을 똑같이 역사가 오래된 우리나라 민속신앙에서 찾는 것 자체가 문제이다.
필자가 보기에 산신각의 호랑이는 항상 "산신령"과 함께 나온다. 중국의 도교 신화에서 산신이 된
사람은 황제이지만, 우리나라의 신화에서 산신이 된 사람은 바로 "단군왕검"인 것이다. 즉,
이 산신각의 그림 자체가 바로 호랑이를 제압하였던 단군신화 그 자체를 표현한 것이리라 본다.
한가지 궁금한 것은 여진족에 대한 것이다. 만주어는 퉁그스어에 속하며, 지금까지의 주류적 견해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북방계 우랄-알타이어족의 한 지파로 알려져왔다. 그런데, 한국어와 퉁그스어의
차이가 상당히 심하여 언어학자들은 한국어를 이 어족 계열에 포함시킬 것인지의 여부를 고민하여왔다.
인도-유러피안어와 달리, 사실 우랄-알타이어족 간의 차이는 매우 큰 편이다. 이 퉁그스어는 연해주에
서 사할린, 캄차카반도에 널리 분포하는데, 사용 인구는 매우 적다고 한다. 재야사학가들은 이들을
고구려의 유민으로 즉 우리와 한핏줄로 보는 경향이 있다. 실제로 만주족과 한국인의 유전자는
운남인만큼이나 가깝다.
그리고, 말갈족의 어원이 되는 물길은 물가란 우리말 표현의 이두식 음역이라 하는 주장도 있다.
즉 이들이 어로생활을 했음을 짐작케하는 주장이다. 그렇다면 수렵-유목의 이동생활을 한 고대
북방계 배달민족의 한 지파로 볼 수 있는가?
아니다. 지난번 글 중에서 세계 인류의 유전자 분포 지도를 보라. 그 중에서, 중동지방에서 아주 이른
초기에 분화한 M130 유전자 인류인 폴리네시아인의 이동경로를 보라. 이들은 인도네시아와 필리핀을
거쳐 일본으로, 여기서 연해주와 캄차카반도로 다시 베링해협을 건너 북아메리카의 동부해안까지
이동하지 않는가? 가히 상식을 뒤집을 만한 일이다.
이들 인류는 아주 오래전 빙하기가 시작되기도 전에 바다를 배를 타고 건넜으며 물가에서 어로생활을
하면서 빙하기의 추위를 견디며 생활한 인류이다. 여진족의 조상은 바로 이들이며, 이들은 주로 고구려
의 동북쪽인 연해주와 송화강 등 만주의 강가에 살았다.
환단고기를 보면 단군왕검은 비서갑의 하백녀를 거두어 아내로 삼았다고 한다. 고구려의 건국신화에서,
고주몽의 어머니 유화부인은 하백의 딸이다. 하백은 물의 신으로 나온다. 이 하백이 곧 말갈족이었던
것이다. 또한 거북과 물고기로 표현된 말갈족은 고주몽의 도주를 도와준다. 물길의 어원이 한글발음에
서 나온 것은 맞으나 그들이 그렇게 부른 것이 아니고 동이족의 언어를 차용해 한자화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여진족의 변발풍습은 일본인하고도 비슷하다. 비록 일본에 AD 3세기경에 쌀경작의 농경문화를 전파한
야요이문화는 기마민족인 가야족에 의한 것이었고, 그 이전에 단군조선의 반란군이었던 소시모리의
후손 협야노(陜野奴, 즉 팔조금법에 따라 죄인으로서 노비가 되었음을 의미함) 무리가 일본(삼도)으로
도망가 천황을 참칭한 기록이 한단고기에 나와 있지만 일본의 원주민 또한 원래는 폴리네시아인이었던
것이다.
한국어의 발음은 남방계 중국어의 영향으로 받침발음이 발달해 있으나, 여진어와 일본어에는 받침이
거의 없음을 주목하라. 다만 고조선과 초기 고구려 당시의 혈연의 영향으로 발해의 멸망 후 독립한
여진족에게 우랄-알타이어계의 우리말 언어가 일부 남아 있을 뿐이리라 본다. 또한 고구려나 발해가
철기시대 이후의 신분제국가였음을 전제한다면, 후기로 갈수록 통혼이 쉽게 이루어지지 않고 그들
대다수는 피지배민으로 살았다.
이것은 기원 3세기경 일본에 이주한 가야족 역시 철기문명의 신분제가 발달하고 있는 상황 속에서
침략하였기 때문에, 선주민인 협야노-원주민의 혼혈 민족과 통혼이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며,
우수한 해양 제국이었던 백제(제의 의미는 바다건널 濟)가 일본을 정벌할 때도 마찬가지였으리라.
이것이 일본인의 유전자 지도가 우리와 멀리 차이나게 보이는 이유이다. 아이누족은 아마도 순수
폴리네시아인일지도 모른다. 다만 배달국과 단군조선의 역사는 북방계의 유목민족의 한 일파가
남방계 논농사민족, 밭농사민족, 어로민족을 상대로 끊임없는 혈연적, 문화적 통합으로 이룩한
혼혈 동이족의 대동의 역사였으며, 철기 문명의 도입과 이후 신분제 이데올로기인 불교의 도입은
동이족에게 고유한 민족 철학의 유실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제 천부경을 재해석 해보자.
필자는 지난 글에서 천부경을 해석하면서 위(圍의 속자)라는 문양을 발견하였고 이것의 기원이
치우기였음을 추정하였다. 그런데, 최근 다음카페 천부인과 천부경의 비밀(저자, 구길수)이라는
곳에서, 독특한 주장을 하는 글들을 읽었다. 그 곳의 주장에 따르면, 환웅배달 때의 신지녹도문으로 된
천부경을 발견하고 그것을 해석해보니,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여덟, 아홉, 열이라는
우리말 숫자였다는 것이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천부경은 지금까지도 구전되어 내려온 것이 된다.
상당히 근거가 있는 주장이라고 생각되었다. 이에 따르면, 하나의 어원은 하늘이며, 둘은 땅이다.
셋은 사람을 뜻하는데, 구체적으로 숫 즉 남자를 뜻하고, 넷은 여자, 다섯은 섹스, 여섯은 엄마,
일곱은 일하는 모습과 아들의 뜻이 있고, 여덟은 열매와 딸의 뜻, 아홉은 거대한 아버지라는 뜻이
있으며, 종족을 이루었으면 열고 나가라는 열의 의미가 있다고 한다.
하나, 둘, 셋의 어원은 받아들일 수 있겠는데, 나머지는 잘 이해가 안되었다. 다만 이 분의 주장 중
두가지는 상당히 근거가 있어 보였는데, 한글 자음 ㅅ은 숫, 세움 등의 모양과 비슷한 뜻이 있으며,
한글 모음 ㅂ은 모양 그대로 받침, 밭, 비 등 무엇인가를 받아들이는 뜻이 있다는 것이다.
한글의 기원이 3세 단군 가륵 때의 가림토문자에 있다는 한단고기의 기록을 근거로 한다면 매우
유의미한 주장이다. 따라서, 단군 조선때 완성된 갑골문으로 이루어진 81문자의 천부경의 이념은
환인이 환웅에게 전한 단순한 천부경의 이념-아들 딸 낳고 번영해서 이웃 부족과 싸우지말고 혈연적,
문화적 통합을 이루어 잘살아라하는 홍익인간의 뜻-을 더욱 구체적으로 완성한 것일 지도 모른다.
즉 지금까지 논증해온 배달과 단군조선의 역사가 곰족, 호랑이족, 여진족과의 혈연적 문화적 대통합의
역사였다는 필자의 가설을 뒷받침한다. 이 우리말 숫자의 논리를 필자의 해석에 따라 나열하여 보았다.
일곱 여덟 아홉
여섯 다섯 넷
하나 둘 셋
필자는 여기서 공통점을 발견하였는데, 두번째 행은 모두 받침이 ㅅ으로 끝나고, 세번째 행은 모두
받침이 ㅂ으로 끝난다는 것이었다. 즉 두번째는 무엇인가 성장하는 것을 의미하며, 세번째 행은 그것을
거두어 들인다는 의미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첫번째 열이 하늘이고, 두번째가 땅이고 세번째 열이
사람임을 주목하자. 그렇다면 넷은 사람에 세운 것이고 다섯은 땅에 세운 것, 그리고 여섯은 하늘에
세운 것이 된다. 그리고 일곱은 하늘에서 받아들이고, 여덟은 땅에서 받아들이고, 아홉은 사람에서
받은 것이 된다.
이제 여기에 무교의 신명을 의미하는 숫자를 대입하여 보자. 삼신할매 혹은 마고할매는 인간의 탄생을
주관하는 신명이다. 삼신이란 마고, 궁희, 소희를 의미함은 부도지에서 알 수가 있다.
그렇다면 첫 번째 행은 바로 하늘과 땅과 그리고 인간의 탄생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땅에 세운 다섯의
의미는 무엇인가? 오방신장은 말그대로 벽사의 의미가 있으며, 육시를 당한 치우, 그리고 그가 개념화
한 태극의 의미가 있다. 땅에 세운 다섯은 따라서, 인간의 건강한 성장을 기원하는 신명이다.
육시를 당한 것이 아니라, 바로 악귀를 물리치는 치우신명이 천부경의 논리에 따라 다섯이 된 것이다.
동일한 벽사의 의미를 담고 있는 처용무도 5명이 춤을 춘다. 2대 단군인 부루태자는 우왕에게 치산치수
의 오행을 가르쳐 주었고 그 이후 중국인들은 오행의 논리에 매달리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일곱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는 칠성신으로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신명인 것이다. 바로 하늘에
떠 있는 북두칠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하늘이 인간의 노력에 조응하여 성숙과 완성을 마무리한다는
그런 의미가 아닌가!
이제 운삼사성환오칠일(運三四成環五七一)의 의미를 모두 이해하게 되었다. 북두칠성의 모양을 보라.
바로 운삼사(運三四)하는, 즉 3번째와 4번째 별에서 변곡점을 가지는 태극의 모양을 가지고 있다.
오행을 방위별로 나열하고 그 상생의 순서를 보자. 오행은 곧 땅 즉 자연을 이루는 5가지 물질을 뜻한
다. 북방 수에서 시작하여 동방 목으로, 동방 목에서 남방 화로 가다가 여기서 다시 서방 금으로 바로
가지 않는다. 중앙의 토로 갔다가 서방의 금으로 가서 다시 수로 돌아가 순환을 완료하는 것이다.
바로 세번째 화에서 네번째 토로 운삼사(運三四)하는 변곡의 태극 모양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마지막 일(一)은 아홉번째의 사람에 있어서의 태극이 된다. 셋,넷이 남녀의 의미라면,
역시 아홉도 운삼사(運三四)인 것이다. 예로부터 우리 민족은 구환의 민족, 구이(九夷)라고 불렸으며
아사달의 어원은 아홉땅이라는 의미가 있어 황해도 구월산(九月山)이 단군조선의 수도일 것이라는
추측도 있었다.
치우천황의 청동기문명은 우리말로 구리문명인데 이 구리의 어원은 구이(九夷)에서 나왔으며, 고구려는
옛 청구배달국의 나라이름을 따 고구리라 지은 것이다. 한자어가 기원이라고 거부할 필요가 없다.
한자는 바로 우리 글이다. 또한 "순환과 태극"의 의미는 비록 최초의 이념은 환인에게서 전수받은 것이나 동이족이 발명한 "갑골문"으로 이루어진 81문자로 이루어진 천부경은 부여의 법학자 왕수긍이 번역
한 이 아니라, 단군왕검이 완성한 것이라는 뜻도 있다. 이후 3세 단군가륵은 세종대왕처럼 북방계
배달족의 한글 발음에 적합한 가림토문자를 만들게 한 것이다.
필자의 머릿속에는 가장 자연스러운 만물의 성장곡선 즉 태극문양의 S자 곡선이 생각났다. 통계적으로
순간적인 만물의 집합상태를 그리면 정규분포곡선을 이루지만, 시간을 축으로 이를 적분하면 아름다운
시그모이드 커브가 나타난다. 이 시그모이드 곡선을 아홉 등분하여 각 점을 살펴보면, 3, 5, 7에서
변곡점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천부경 전체가 태극문양이었던 것이다.
필자는 여기서 마지막 의문을 풀어야 했다. 모든 것이 논리적 정합성은 있는데, 어찌하여 이것이
사람이 귀한 이유가 된다는 말인가? 그러던 어느날 필자는 우연히 얼마전 종영된 "파리의 연인"이라는
TV 드라마를 시청하고 있었다.
그 장면은 여주인공 김정은이 라이벌 여자의 어머니에게 따귀를 맞는 장면이었다. 그 때 김정은이
따귀를 때리려는 그 아주머니의 손을 잡고 이렇게 이야기하였다. "저도 누군가에게는 귀한 존재임을
알아주세요."라고... 필자... 이 대목에서 조상의 위대한 가르침에 그만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한 인간이 귀한 이유는 그 부모가 삼신할미에게 100일 기도하며 낳은 자식이기 때문이며, 행여 병이나
들지 않을까 오방신장님께 탈없이 잘 크라고 빌고 빌며 노심초사하며 길렀기 때문이고, 다 큰 다음에도
건강하게 오래 오래 살기를 정안수(井-水) 떠 놓고서 칠성님께 빌고 있는 어머님의 흰머리가 생각나서
울었다.
그와 마찬가지로 민족이 귀한 이유, 그리고 인류가 귀한 이유는 조상이 치성을 다해서 키웠기 때문이
아닌가! 또한 만물이 귀한 것은 만물을 낳은 천지(天地)가 치성을 드렸기 때문이니 이세상 모든 만물이
귀하지 않은 것이 어디 있으랴! 내 몸을 부모가 주셨듯이 부모를 조상님이 주셨으며, 나아가 천지가
인류와 만물을 주셨으니 어찌 인간 마음에 천지가 하나이지 않을 수 없으며 천,지,인 삼색의 삼태극이
모였으니 어찌 백색 광명의 태양이 아닐 수 있으리요!
마지막으로 인터넷에서 돌아다니는 그 출처를 알 수 없는 단동십훈(檀童十訓)에 대한 글을 소개하며
이 글을 마칠까 한다.
제1훈: 弗亞弗亞(불아불아)
동작: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어린이의 허리를 잡고 세워서 왼편과 오른편으로 기우뚱기우뚱하면서
부라부라 라고 부르며, 귀에 들려주십니다.
弗(불)은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온다는 뜻이고, 亞(아)는 땅에서 하늘로 올라간다는 뜻을 말하며,
「弗亞弗亞」는 사랑으로 땅에 내려오고, 神(신)이 되어 다시 하늘로 올라가는 무궁 무진한 생명을
가진 어린이를 예찬하는 뜻입니다. '너는 귀한 자손이니 이 세상에 빛이 되거라.' 라고 해석하시면
될거에요. [부라부라]라는 단어가 너무 생소하시면 그런뜻으로 이야기 하시며 동작을 하시면 됩니다.
'우리아가, 귀한아가, 이 세상에 훤히 비칠 빛이 되거라!'
제2훈: 詩想詩想(시상시상)
동작: 어린이를 앉혀놓고 앞뒤로 끄덕끄덕 흔들면서 (시상시상)하고 부릅니다.
사람의 형상은 마음, 신체는 태극과 하늘과 땅에서 받은 것이므로 사람이 곧 작은 우주)라는 인식아래
조상님을 거슬러 올라가면 인간 태초의 하느님을 나의 몸에 모신 것이니 조상님과 하느님의 뜻에
맞도록 순종하겠다는 것을 나타내는 뜻입니다. 어른을 곤경하라는 뜻으로 이해하시면 됩니다.
제3훈: 道理道理(도리도리)
동작: 머리를 좌우로 돌리는 동작
천지에 만물이 무궁 무진한 하늘의 道理(도리)로 생겨났듯이 너도 도리로 생겨났음을 잊지 말라는
뜻이며, 대자연의 섭리를 가르치는 뜻입니다.
제4훈: 持闇持闇(지암지암)
동작: 두손을 앞으로 내놓고 손가락을 쥐었다 폈다하는 동작
그윽하고 무궁한 진리는 금방 깨댣거나 알 수 없으니 두고두고 헤아려 깨달으라는 뜻입니다.
제5훈: 坤地坤地(곤지곤지)
동작: 손 집게 손가락으로 왼쪽 손바박을 찧는 동작으로 하늘의 이치를 깨달으면 사람과 만물이
서식하는 땅의 이치도 깨닫게 되어 천지간의 무궁 무진한 조화를 알게 된다는 뜻입니다.
제6훈: 西摩西摩(섬마섬마)
동작: 어린이를 세우면서 하는 동작
서(立)라는 말로 〈섬마섬마〉라고 하는데 정신문명인 剛常(강상)의 이치만으로는 안되므로 西摩道(서마도)에 입각한 물질 문명을 받아 들여 발전해 나가라는 뜻으로 〈섬마섬마〉또는〈따로따로〉라고 부르기도 하며, 독립하여 정신과 물질에서 발전하라는 뜻입니다.
제7훈: 業非業非(업비업비)
무서움을 가르치는 말로써 어릴 때부터 조상님들의 발자취와 하느님의 뜻에 맞는 삶을 살라는 뜻인데
자연 이치와 섭리에 맞는 업이 아니면 벌을 받게 될 것이라는 뚯입니다.
제8훈:亞合亞合(아함아함)
동작: 손바닥으로 입을 막으며 소리내는 동작
두 손을 가로모라 잡으면 亞(아)자의 모양이 되어 이것은 천지 좌우의 형국을 이몸속에 모신다는 것을
상징하는 뜻입니다. 여기서 파생된 놀이가 아가 입에 대고 '아~~~~`' 소리 내시는것 아시죠?
제9훈: 作作弓作作弓(짝짝궁 짝짝궁)
동작: 두 손바닥을 마주치며 소리 내는 동작
천지좌우와 태극을 맞 부딪쳐서 하늘에 오르고 땅으로 내리며, 사람으로 오고 신으로 가는 이치를
깨달았으니 손뼉을 치면서 재미있게 춤추자는 뜻입니다.
제10훈: 羅呵備 活活議(질라아비 훨훨의)
동작: 나팔을 불며 춤추는 동작
천지 우주의 모든 이치를 깨닫고 地氣(지기)를 받아 생긴 육신을 活活(훨훨)하게 자라도록 즐겁게
살아가자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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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인류의 분기와 이동에는 자연환경조건의 변화가 커다란 영향을 끼쳤으며, 마찬가지로 진화의 압력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아프리카에서, 침팬지와 인류가 구분된 일차적 이유는 아프리카 중심을 관통하는
조산운동이었다고 많은 진화학자들이 이야기한다.
즉 조산운동으로 발생한 편서풍은 아프리카 서부지역에는 높은 강수량으로 밀림이 유지될 수 있었지만,
동부지역은 밀림에서 초원인 사바나가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이 지역에 내동댕이쳐진 인류의 조상은
사자, 표범 등의 공격을 피하기 위하여 두 발로 서서 뛰기 좋도록 직립을 하게 되었고, 벼룩, 이 등의
기생충 방지와 온도 조절을 위하여 털이 빠지게 되었으며, 별다른 공격수단이 없기에 협동 수렵 생활을
위하여 언어 능력도 발전하게 되었다.
하지만, 지표면에서의 생활은 많은 기생충, 체체파리 등 무서운 전염병 감염에 상시적으로 노출될 수
밖에 없어 이러한 열대 질병의 압력을 피하기 위하여, 일부 인류의 북방으로의 이주가 시작되었으리라
추정된다.
중동지방은 위도로 보아 아프리카보다 전염병이 드믈고, 당시로서는 매우 풍족한 지역이라고 생각된다.
아마 에덴동산과 같이 낙원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현생 인류는 사실 10만년전에서 1만년전 사이인
마지막 빙하기에 태어났다.
현생인류 이전의 네안데르탈인이나 호모엘렉투스 역시 아프리카를 벗어나 유럽이나 아시아 등지로
이주하여 동시기를 살았으나, 이들은 이 마지막 빙하기를 넘기지 못하고 멸종한 것으로 추정되며,
그 간의 인종학살설은 큰 신빙성이 없다. 약육강식, 자연도태라는 자본주의적인 진화개념의 영향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 빙하기가 항상 추운 것은 아니었다. 때로는 따뜻한 시기도 있었는데, 아래 그림처럼 대략 5
만년전은 빙하기 가운데서도 매우 따뜻한 시기였다. 필자가 보기에 최초의 인류의 이동과 분기가 동시
에 이 시점에서 이루어지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다.
왜냐하면 한 인류는 중동지방에 머무르다가 이집트, 지중해를 거쳐 그리스 로마지역으로 이주하고,
또 한 인류는 파미르 고원지방으로 또 한 인류는 과감하게도 바다를 건너 멀리 오세아니아에서
북아메리카의 동부해안으로 이주하는데 파미르의 고원지방으로의 이주와 바다로의 이주는 빙하의
후퇴에 따른 해수면의 상승과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즉 해수면 상승에 대한 인류의 두가지 대응방식이라고 생각하며, 대홍수설에 대한 인류의 신화적 기
억과도 관련이 있을지 모른다.
인간이 오스트레일리아에 발을 들여 놓은 시기가 무려 5만 6000년전이라고 하는데 이 시기는 필자의
해수면 상승설을 뒷받침한다. 이 폴리네시아인들은 호주에 건조한 기후와 사막이 생기기 시작한 시점인
2만년전까지 호주의 대형동물을 멸종시켜버렸다. 2만년전은 마지막으로 다시 빙하기의 추위가 엄습한
시기와 맞물리며, 따라서,
파미르 고원에서 인류가 4방향으로 분기한 시기와도 거의 일치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어로, 수렵민인
폴리네시아인들은 건조기후에 따라 농사를 시작한 것이 아니라, 다시 바다로 나간 것이다. 따라서,
여진족이 형성된 시기는 배달국 건국시기보다 훨씬 앞설 것으로 추정되며 일부 한반도에도 거주했는지
그것은 모를 일이다.
아마도 우리나라에서 선사시대 유적으로 발견되는 조개무지와도 관련이 있지 않을까 싶다.
고고학계에서 고아시아족 혹은 고몽골인으로 잘못 분류한 인류로 생각되며 이들이 내륙지방으로
깊숙이 이주하지 못한 것은 어로생활이 수렵생활보다 상대적으로 더 나았기 때문이다.
한편, 비교적 풍요한 지역에서 채집생활을 하던 북방이주민(이집트,라틴족)의 이동거리가 극히 짧은
것은 해수면의 상승영향이 이지역으로 이주한 인류에게는 당시로서는 크게 미치지 않은 이유도 있었을
것이며, 다시 엄습한 빙하기시절에도 차가운 편동풍은 파미르 고원지방에 막혀 상대적으로 따뜻한
기후가 계속 유지되었을 가능성이 컸던 것으로 짐작된다. 하지만,
1-2만년전 빙하기의 급격한 후퇴는 중동지방의 건조화를 가져와 수렵, 채집생활에서 농경생활로의
전환이 불가피했고 무려 BC 7000년전 부터 농경생활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결국 이 지역은 현재 보는
바와 같이 열사의 사막지역이 되어 버렸다.
반면 그리스 로마지역은 편동풍이 지중해를 거치면서, 다시 고온 다습한 기후를 남부 유럽에 전
달했기 때문에 풍요한 이 지역의 농경생활이 상대적으로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 지역, 그리고 인도,
중국 보다도 늦게 이루어진 것이다.
서부 유라시아로 이주한 현재 유럽인의 조상인 게르만,슬라브 족들은 사실 훈족의 압력이 아니었으면
대 이주를 하지 않았다. 이들의 이동 경로를 보아 이들의 조상은 한때 인류최초로 여겨지는 페르시아
문명을 건설하기도 하였으며, 동시기의 앗시리아나 조금 후대의 스키타이처럼 북방으로 조금 더 이주
하여 유목 혹은 동부 유럽지역에서 화전과 같은 농경 생활을 하기도 하였을 뿐 3세기 무렵이전까지는
이동거리가 극히 짧았다고 보아야 한다. 그 이유는 시베리아대륙 동쪽보다 냉혹한 추위가 없었기 때문
이라고 볼 수 밖에 없다.
따라서, 빙하기 시절에 유럽 지역은 사실 개썰매를 이용하여 시베리아 빙원을 종횡무진으로 내달리던
M242유전자 인류의 활동 공간이었을 뿐으로 추정한다. 이들 유로피안들이 만일 최초의 농경인류라면
필자가 제시한 수렵 이동 생활경험으로부터 나오는 종교 개념 발생 이론에 혼란이 발생한다. 왜냐하면
비교적 풍족한 지역의 채집-농경인류라면 신이라는 종교가 발생할 여지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필자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최초의 문명을 일으킨 수메르인에 대한 "수밀이국설"을
낭설이라 내팽겨치지 말고, 재평가해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수메르문명이 발굴되었을 때 유럽인들은 매우 큰 충격을 받았다. 그 이유는 기독교에서 이야기하는
구약성서의 이야기가 모두 수메르의 신화에서 유래하기 때문이다. 필자는 컬럼비아의 어원을 추적하다
가 이것이 컬럼바라는 라틴어의 "비둘기"가 어원이었고, 영어로는 "Dove"라고 쓰이는 개념임을 알게
되었다. Dove는 성령으로도 쓰이므로 사실 성모마리아를 지칭하는 것이다.
그러나 원래 비둘기 여신은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전쟁의 여신 아테네의 상징이었을 뿐이다.
다신격체로 표현된 아테네, 비너스, 데르메르 신화는 또한 이집트의 이시스 신화에 영향을 받았으며,
이집트의 이시스 신화도 그 기원은 바빌로니아의 여신 아스타로테였다. 이 아스타로테는 구약성서에
모세가 십계명을 받을 당시 유태인들의 타락상을 보여준 섹스의 여신 아스다롯과 같다. 그러나 이것
조차 그 기원은 수메르의 이난나이며 당시 필자의 추적은 여기서 끝났다.
수메르인이 전형적 교착어를 사용하고, 머리가 검은 사람들이라고 하며 주변의 사람들과 인종이 달랐음
은 백과사전에도 나온다. 이 근방에서, 백소인과 인종이 다른 인류라면, M242유전자 인류인 황궁족
밖에 누가 더 있을까? 또한 최초의 신화는 만들었을지언정 수메르인들은 최초의 농경인류가 아니다.
BC 3000년경 수메르인이 이주하기 이전부터 이 지역은 농경생활을 하고 있었다. 동시기의 정착생활을
시작한 배달족은 혼혈 동이문화를 만들어갔지만, 수메르인은 성벽을 쌓고 다른 유러피안들과 구분되는
정착 농경생활을 하였다. 이들은 멸망후 신화만 전승한 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린 것이다.
수메르인들의 주신은 7명으로 안(하늘신), 엔릴(바람,저승), 엔키(물), 이난나(사랑), 난나(달), 우트
(태양), 닌후르쌍(모신,하늘신)이며 각각 북두칠성을 뜻하고, 수메르의 7도시의 배치도 북두칠성의
모양이다. 큰곰자리의 등과 꼬리부분에 불과한 서양의 별자리 개념에 웬 북두칠성이란 말인가?
또한 이들은 농경과 유목을 병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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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노는 동호에게 조공을 바치는 예속관계에 있었다. 사마천은 동호를 예맥조선이라고 기록했다.
후에 동호는 흉노의 공격을 받아 선비와 오환으로 나뉘고, 오환족은 북위이래로 우리민족(고구려)에게
대부분 흡수되었다고 한다. 최근 선비족이 신라의 김씨의 시조라는 이야기도 월간조선에 나왔다.
독일방송은 최근 게르만민족의 대이동을 촉발한 훈족이 가야족이라는 가설을 내어 놓았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국보로 지정된, 편두머리와 솥단지를 옆에 찬 기마인물상의 모습하고 훈족하고 너무나 닮았기
때문이다. 또한 훈족의 활은 고구려의 벽화에 등장하는 맥궁과 같다.
가야가 번조선에서 내려온 유민이라면 특별히 틀린 이야기도 아니다. 도대체 이 복잡한 북방유목민들과
단군조선의 관계는 어떤 것이었을까? 한단고기를 믿는다면 이들은 고조선의 변방국들이었을 뿐이며
유목민 생활을 계속하였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넓은 거주공간이 필요했고, 철기문화의 도래 이후로
고조선(부여)의 지배력 약화에 따라 이들 제 민족들은 제각기 각자의 길을 갔을 뿐이다.
한단고기를 위서로 평가하는 근거 중의 하나는 도무지 이해가 안되는 지백특(티벳)에 대한 군사 파견
항목이 있었다. 그러나, 만일 흉노, 돌궐 등의 기원이 되는 위구르 지역이 고조선에 복속되어 있었다면
이해못할 일이 아니다.
동호는 그 중에서도 매우 가까운 위치에 존재하는 민족이었다. 오환(烏桓)의 환자는 환인(桓因)할 때의
환자와 같으며, 선비(鮮卑)의 한자는 조선의 선자와 노비할 때의 비를 사용하고 있다. 선비의 한 일족
인 탁발부족의 동굴안에서 발견된 명문은 천지와 조상에 제사를 지냈다는 것이다.
흉노(匈奴)에서 노자를 중국인들이 비하해서 붙인 것이라고 하는데, 필자는 좀 생각이 다르다. 한단고
기에 따르면, 흉노는 일종의 귀양처였다. 3세 단군때 열양의 욕살 색정을 귀양보내고 나중에 용서하고
그 지역에 봉했는데 그가 흉노의 조상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 흉노가 동족인 동호(조선의 제후국)를
침략해 2000여리의 땅을 뺏은 것은 매우 불쾌한 일일 수 밖에 없다. 우리말에 "개새끼"라는 욕은 매우
심한 욕이다. 그런데, 흉노, 돌궐 등의 신화에 어김없이 개가 등장한다.
신이담(우리나라 전설)
한 재상이 얇은 껍질로 된 북을 만들어 이 북을 찢지 않고 소리를 내는 사람을 사위로 삼겠다 했으나,
아무도 북이 찢어질까봐 치지를 못하였다. 하루는 북소리가 들려 가보니 개가 꼬리로 북을 치고
있었다. 재상은 할 수 없이 그 개를 딸과 혼인시켰다.
개는 밤마다 딸을 핥고 물고 할켜서 괴로움을 참다 못한 딸은 개의 네 발목과 입에 각기 주머니를
씌웠다. 그래서 이 개는 ‘오낭(五囊)을 낀 개〔狗〕’가 되고 말았다. 그 개와 딸은 자식을 낳자
북쪽으로 쫓겨나 후손을 퍼뜨렸다. 그 뒤 오랑구가 오랑캐로 변하여 북쪽에 사는 사람들을 그렇게
부르게 되었다는 설화이다.
돌궐신화
돌궐국은 원래 서해 바닷가에 있었는데 이웃 나라의 침략을 받아 멸망하였다. 그 때 적군이 남녀노소를
모두 죽였는데 열 살 쯤 되는 어린애를 차마 죽이지 못하고 팔, 다리를 잘라 큰 호숫가에 버렸다.
그러자 한 암늑대가 소년에게 고기를 물어다 주어 소년은 그것을 먹고 살아날 수 있었다.
그 후 암늑대는 소년과 교접을 하여 임신을 하고 서해의 동쪽에 있는 산으로 이동하였다. 그 산에는
동굴이 있어서 암늑대가 그 속에 들어갔더니 사방 200리 쯤 되는 넓고 풀이 무성한 벌판이 나타났다.
암늑대는 사내애 열 명을 낳았는데 장성해서 모두들 결혼하여 각자 한 성씨를 이루었다.
흉노신화
흉노의 왕에게 딸이 둘 있었는데 용모가 극히 아름다워 백성들이 모두 신처럼 떠받들었다. 임금은
말하길 “나의 딸들이 어찌 사람의 짝이 될 수 있겠는가? 앞으로 천신과 배필을 지으리라”고 하였다.
그는 광야에 높은 누대를 짓고 두 딸을 그 위에서 살게 한 다음 “천신께서 이들을 맞이해 가시옵소
서”라고 기원하였다.
3년이 지난 후 왕비가 딸들을 도로 데려오려고 하자 왕은 말하길 “안되오, 아직 천신과 통하지
않았소”라고 하였다. 다시 한 해가 지났을 때 늑대 한 마리가 밤낮으로 누대를 떠나지 않으며
울부짖었다. 그리고는 누대 아래에 굴을 파고 오래도록 머물러 있었다.
작은 딸이 말하길 “아버님이 우리를 이곳에 둔 것은 천신과 배필을 지어주실 생각에서였는데 지금
늑대가 온 것을 보니 혹시 천신이 보낸 신령스러운 동물이 아닌지 모르겠다”라고 하며 누대에서
내려가려 하였다.
언니가 놀라 말하길 “이것은 짐승이야. 부모님을 욕되게 해서는 안돼”라고 하였으나 동생은 듣지
않고 내려가 늑대의 아내가 되었다. 그녀는 아들을 낳았는데 후에 점점 숫자가 늘어나 마침내
나라를 이루었다.
반호(盤瓠) 신화 (묘족, 요족, 흘료족 -- 중국 남쪽..아마 객가족처럼 남방으로 흘러내려와 살던
북방민족의 갈래 같다.)
고신씨(高辛氏)가 다스리던 시대에 왕비가 귓병이 났다. 의원이 치료를 했더니 귀에서 누에 같은
벌레가 나왔다. 그것을 바가지(반호) 속에 넣고 쟁반으로 덮어 놓았는데 갑자기 오색 무늬의 개로
변하였다. 그래서 이름을 반호라고 짓고 길렀다. 그때 오랑캐가 강성하여 자주 변경을 침범하였는데
장수를 보내 토벌하였으나 이기지를 못하였다.
이에 왕은 천하에 영을 내려 오랑캐 장군의 목을 가져오는 자에게는 황금 천근을 주고 제후에 봉할
뿐만 아니라 공주를 준다고 하였다. 얼마 후 반호가 사람의 목을 한 개 물고 대궐에 왔다. 왕이 자세히
살펴보니 오랑캐 장군의 목이었다. 신하들은 모두 말하길 “반호는 짐승인지라 벼슬을 줄 수도, 공주를
줄 수도 없으니 공이 있다 한들 베풀 것이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공주가 이 소식을 듣고 왕에게 아뢰기를 “임금님께서는 이미 저를 상으로 주기로 천하에 약속하셨습니
다. 반호가 적장의 목을 물고 온 것은 하늘이 그렇게 시킨 것이지 어찌 개의 힘이겠습니까? 임금님은
말과 신의를 중히 여기셔야 합니다. 미천한 여자의 몸 때문에 천하와의 약속을 저버리셔서는 안됩니다.
만약 그러하시면 나라에 재앙이 내릴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두려워서 공주를 반호에게 보냈다.
반호는 그녀를 데리고 인적이 없고 숲이 무성한 남산(南山)으로 데려갔다. 그곳에서 그녀는 반호와
혼례를 올린 후 반호를 따라 깊은 산골짜기로 가서 동굴에서 살았다.
왕은 공주가 그리워 사신을 시켜 살펴보게 하였으나 문득 비바람이 몰아치고 산이 진동하여 아무도
가볼 수가 없었다. 삼 년이 지나자, 공주는 6남6녀를 낳았는데 반호가 죽은 후 서로 짝을 지어
종족을 이루었다.
그런데, 이 반호신화는 그 발음이 반고와 같다. 중국에서 반고는 인류의 조상으로 나온다.
삼오력기
반고는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커다란 거인이었다. 칠흑같이 어두운 혼돈 상태에서 잉태되어 무려
1만 8천년이란 계속 잠만 잤으며, 어느 날부터인가 부시시 깨어났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것은 온통
어둠뿐이라서 화가 났다. 어디선가 도끼를 가지고 와서 혼돈(混沌)을 향하여 휘둘렀다.
그러자 '쩍'하는 소리와 함께 거대한 계란이 갈라지기 시작하였다. 갈라진 많은 조각들 가운데 가볍고
맑은 것(陽氣)은 천천히 위로 올라가 하늘이 되었다. 그리고 탁하고 무거운 것(陰氣)은 천천히 아래로
내려와 땅이 되었다. 그리고 다시 끌하나를 찾아 가지고 왼손에 끌을 들고 오른 손에는 도끼를 들고
하늘과 땅이 붙어 있는 곳을 찾아다니며 도끼고 쪼개고 끌로 뚫기도 하였다.
이렇게 하여 그는 하늘과 땅을 완전히 나누어 놓았다. 하늘과 땅이 나뉘어진 이후, 반고는 다시 하늘과
땅이 합쳐질까 두려워하여 자신의 머리로는 하늘을 받쳐 이고 발로는 땅을 밟은채 하늘과 땅의 한가운
데에서 있었다.하늘과 땅이 변함에 따라 그의 몸도 변하여갔다. 이렇게 1만 8천년이란 시간이 지나자
하늘이 지극히 높아졌고 땅도 지극히 두꺼워졌다.
반고의 키는 얼마나 커졌을까? 사람들이 추산한 바에 의하면 키가 무려 9만리(1丈=3,3m 1里= 0.5km)나
되었다고 한다. 원시의 혼돈에서 천지를 떠밀어 멀리 갈라놓고서 세계를 창조한 것을 반고의 늠름한
육체의 결과로 치는 이 설화는 근로를 숭상하고, 인력에 신뢰를 거는 고대 중국인들의 건강한 사상의
소산으로서 매우 흥미있는 얘기다.
반고가 임종에 임했을 때, 숨은 풍운(風雲)이 되고, 목소리는 뇌정(雷霆) 으로 화하고, 두 눈은
태양(좌측눈)과 달(우측눈)로, 그리고 수족과 몸뚱이는 대지의 산악으로 사극(四極)고 이름난
오악(五岳,태산,형산,화산,항산,숭산), 혈맥은 강하 (江河)가 되고, 근맥(筋脈)은 도로로, 살갗은
전토로, 머리카락과 수염은 성진 (星辰)으로, 피모(皮毛)는 초목(草木)으로, 치골정수 (齒骨精髓)는
금석주옥 (金石珠玉)으로, 그리고 흘러내리는 땀은 비와 이슬이 되었다. 인류의 조상인 반고는
새로히 탄생한 이 세상을 풍요롭고 아름답게 만들기 우해 자신의 온뭄을 바쳤던 것이다.
이것만 보면 반호와 반고가 동일인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포랑족 신화(중국내 소수민족)
이 세상이 태초에는 하늘도 땅도 없고 더구나 초목이나 인류도 존재하지 않았다. 어둡고 끝모를 구름과
안개가 길에 뻗어 있을 뿐이었다. 거대한 그메이야라는 신은 12명의 자식 신들과 함께 천지를 열고
인류 이하의 모든 만물을 창조하려고 생각하여 재료를 찾아서 여기저기 다녔다.
마침 그 때 리라는 한 마리의 거대한 동물이 구름과 안개를 데리고 끝이 없는 우주를 헤매고 다니다
만났다. 그메이야는 그 거대한 짐승을 발견하자 그의 껍질을 벗겨서 천공(天空)을 만들고 아름다운
구름을 의상으로 장식했다.
그리고 그 동물의 양쪽 눈알을 빼내어 하늘에서 반짝반짝 빛나는 별을 만들었다 또 살로 대지를 만들고
뼈는 암석을, 피는 물로 바꾸고 털로 여러 가지 풀과 꽃, 나무를 만들었다. 그리고 마지막에 그 짐승의
뇌수로 인류를 만들고 또한 골수로 여러 새와 짐승, 곤충과 물고기 등을 만들었다.
이 리라는 동물과 반고는 상당히 관련이 있어 보인다. 아마도 이들 신화는 반고의 후손이
북방 유목민들이 흉노, 돌궐, 유연, 위구르 등 제 민족으로 뿔뿔이 흩어졌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또한 하늘을 조선으로 땅을 중국으로 그 둘 사이에서 오랑캐짓을 한 역사를 반영하는 것은 아닌지…
환단고기
때에 반고라는 자가 있어 괴상한 술법일 즐기며 길을 나누어 살기를 청하매 이를 허락하였다. 마침내
재물과 보물을 꾸리고 십간 십이지의 신장들을 이끌고 공공 유소 유수와 함께 삼위산의 라림동굴에
이르러 군주가 되니 이를 일러 제견(諸-)이라하고 그를 반고가한이라 했다.
반고는 환웅과 같은 시기에 감숙성 서부지역으로 이주한 군주이며, 이 지역의 신석기 문명인 제가문화
와도 관련이 있어 보인다. 그러나 내륙지방은 사막화가 진행된 지역으로 농경정착생활을 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제견의 견자는 확장한자인데, 밭전(田)자 변에 개견(犬)을 쓰는 것이 흥미롭다. 개는 빙하기
북방계 M242 유전자인류의 생활과 매우 밀접하며, 매우 친근한 동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민족의 정서상 매우 나쁜 의미로 사용되고 있음은 흉노의 침입과 같은 역사적
인 내막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또한 신화에 보이는 천신과 같은 존재는 환인, 환웅 또는 단군일 수
밖에 없지 않을까하며 흉노-동호의 조공관계처럼 매우 소홀한 대접을 받았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십간은 각 종족을, 십이지는 유목민족에게 중요한 가축을 뜻한다. 포랑족 신화의 12명의 자식신 이야기
도 무엇인가의 관련성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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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사신도는 원래 청구배달국 때의 4방 오랑캐를 의미하는 그림 문자이다. 즉 서백호는 중국의
제곡고신족(단군신화의 호랑이), 북현무는 여진족(뭍으로 올라온 폴리네시아인을 생각하면 당연하다.),
동청룡은 용왕전설로 미루어 일본을 뜻하고, 남주작은 초나라에서 유래한 봉황토템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것이 중국의 한나라때 부터 사신개념으로 발전하고 우습게도 중앙에 황룡을 넣어 중국인들은
스스로 짐승인 용토템을 만들었다. 그리고 우리 나라를 청룡으로 격하시키고 사방 오랑캐의 개념을
대입한 것이다. 중앙은 당연히 사람이어야 한다. 고구려에서도 이 사신개념이 수호신으로 왜곡되었지
만, 중앙에 존재하는 것은 무덤의 주인인 사람이었다.
과하마(유목),반어피(어로),오곡생산(밭+논)은 읍루,동예,옥저가 동이족과 말갈족의 혼혈국임을 이야기
하며, 이들이 부여와 고구려에 신속했음은 부여, 고구려가 각기 단군조선(진조선)을 이은 천자국이었기
때문이지 고구려가 약탈해서가 아니다. 철기시대로 과중한 세부담은 있었을 것이다. 민며느리제와 데릿
사위제는 풍습이 아니라 "혼혈화"의 과정이다.
삼한지역은 번조선(발해만지역)의 멸망(한사군-역시 원래는 번조선의 제후국) 혹은 동호족의 이주와
진조선인 동부여계의 남하(고구려에 대한 거부)로 마한의 땅을 나누어 살은 것이다. 즉 고조선의
삼한관경체제를 흉내내었을 뿐이며, 목지국, 월지국이 대표가 된 것도 고조선체제를 본 뜬 것일
뿐이다. 이 의미는 삼한이 고구려를 인정하지 않았다는 뜻도 있다. 고구려는 고주몽이 해모수의
적자라고 부여에 왕권(즉 천자권)을 내놓으라는 일종의 쿠데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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