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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세라도 하늘로 날아오를 것만 같은 장수사터 일주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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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이종찬 |
| 산에 사는 중이 달빛을 탐내더니 물 긷는 병에 달까지 담았네 절에 가면 금세 알게 될 거야 물 쏟으면 달도 없어진다는걸
(이규보 '달빛을 탐내다' 모두)
그래. 시끄럽고 복잡한 도시에 사는 내가 하늘을 부러워하지 않으며 우뚝우뚝 솟은 산봉우리와 가없이 아래로 아래로 파고드는 계곡이 탐나 여기까지 왔다. 그리하여 내 비좁은 마음 속에 이마에 흰 띠를 두르고 우쭐대는 산봉우리와 거울보다 훨씬 더 맑은 계곡물을 담았다.
하지만 다시 여기를 떠나 도심에 파묻히면 금세 알 수 있을까. 여기를 떠나는 그 순간 산봉우리와 계곡물이 금세 사라지고 만다는 것을. 아닐 거야. 물 긷는 병에 담아둔 달은 물을 쏟으면 금세 사라지겠지만 내 마음 깊숙히 담아둔 산과 계곡은 여기를 떠나도 금세 사라지지만은 않을 거야.
나는 하늘에서 달이 떠오를 때 달만 무심코 쳐다보았을 뿐 결코 달을 가르키는 손가락은 쳐다보지 않았으니까. 나는 산이 내 앞에 있어 무심코 올라가 보았고, 계곡이 내 앞을 가로막고 있어 그냥 건넜을 뿐이니까. 아마 푸름이와 빛나도 그랬을 거야. 무심(無心)으로 산과 계곡을 쳐다보고 무심으로 히야, 하고 내뱉었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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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수사는 사라지고 일주문만 덩그러니 남아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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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이종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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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과 저승을 가르는 문처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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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이종찬 |
| "커어~ 정말 물 맛 한번 끝내준다." "이렇게 공기 맑고 물 좋은 곳에서 살면 신선도 부럽지 않겠네요." "아까 얘기 안 들었나. 90살 먹은 노인이 70살 먹은 노인을 보고 '알라(애)들은 저리 가서 놀아라' 안 카더나."
그래. 아까 이곳으로 오던 길에 마을에 잠시 들러 계곡물처럼 달디 단 안의막걸리를 마시고 있을 때, 담벼락에 서서 햇살을 쬐고 있던 노인들이 말했다. 이곳에서는 나이 7~80에 어른 행세를 하려고 하다가는 큰 코 다친다고. "왜요?" 했더니 그 마을 사람들의 평균 수명이 100세 이상이란다.
하긴, 이렇게 맑은 공기와 이렇게 맑은 물을 마시고 있으니, 제 아무리 모진 세월이라 하더라도 어찌 사람들을 희롱할 수가 있겠는가. 아니, 오히려 사람들이 세월을 희롱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늘 그 자리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 저 산과 나무와 돌과 물처럼 말이다.
"지금은 용추사에서 관리하고 있으니까 이 문을 '용추사 일주문'이라고 부르고 있지만 원래는 장수사 일주문이었지." "그렇군요. 그래서 이 문에 '덕유산 장수사 조계문'이라는 간판이 붙어 있군요." "용추사는 옛 장수사에 소속되었던 암자였지. 그런데 한국전쟁 때 빨치산 토벌을 한다는 명목으로 국군들이 장수사를 모두 불태워 버렸지. 빨치산 토벌도 좋지만 정말 무식한 군인들이었지."
그랬다. 487년, 신라 소지왕 9년에 승려 각연(覺然)이 창건했다는 장수사와 일주문은 그때 모두 불에 타 없어지고 말았단다. 지금으로부터 무려 1500여년 이상이나 된 국보급 문화재를 그렇게 불태우고 말다니. 그래. 그때 빨치산만 토벌한 게 아니라 우리 나라의 오래된 역사까지 모두 불태워 버린 게 아닌가. 이데올로기가 대체 뭐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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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구의 손길에 의해 저렇게 아름답게 태어났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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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이종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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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치 공작새의 깃털처럼 아름답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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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이종찬 |
| 이토록 아름다운 일주문도 그 당시에 허물어져 길가에 아무렇게나 버려져 있었다고 한다. 그러던 것을 한국전쟁이 끝나고 1959년에 세웠다가 1975년에 다시 보수공사를 하고 단청을 새롭게 입혀 지금의 화려한 모습으로 바뀌었단다. 하지만 일주문 뒤에 있었다는 장수사는 흔적도 보이지 않고 빈 공터만 쓸쓸하게 남아 있다.
둥지 잃은 새. 그래. 금세라도 백두대간을 거슬러 올라 날아가 버릴 것만 같은 일주문을 오래 바라보고 있으면 마치 둥지 잃은 봉황새가 마른 풀섶만 풀썩이는 빈 터를 진종일 지키며 슬피 울고 있는 듯하다. 그래. 그래서 저 화려한 깃털들도 웬지 모르게 슬픈 빛을 띤 것처럼 보이는 것일까.
"이 일주문이 문화재로 지정은 되었나요?" "다행히도1972년에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54호로 지정되었다고 하는구먼. 지금도 관리는 용추사에서 하고 있고."
장수사터 일주문은 법보사찰인 해인사의 일주문보다는 규모가 조금 작으나 건축수법은 훨씬 섬세하다. 첫 눈에 보아도 아기자기한 조각기법과 어우러지는 아름다움이 마치 공작새의 화려한 깃털을 떠올리게 한다. 아니, 지금까지 내가 바라본 그 어떤 일주문보다 가장 아름다운 문이라고 자부할 수도 있다.
"우리 조상들의 손재주가 확실히 뛰어나기는 뛰어난 모양이야. 나무를 저렇게 정교하게 다듬을 수가 있다니. 저건 조각품이 아니라 보석이야, 보석!" "저도 이렇게 규모가 크고 장식성이 뛰어난 일주문은 처음 보는 것 같습니다. 장수사까지 있었더라면 정말 금상첨화였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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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 이건 조각품이 아니라 보석이야, 보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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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이종찬 |
| 그랬다. 아름답다는 말의 의미를 나는 장수사터 일주문에서 다시 한번 되새겼다. 그리고 그 아름다움을 그대로 간직한다는 것이 더욱 어렵다는 것을 새삼 뼈저리게 깨달았다. 또한 사람들의 손길과 발길이 닿는 곳, 그곳에는 그 사람의 마음씀씀이에 따라 아름다움과 추함이 동시에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곰곰히 되새겼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