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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권. 기독교인은 무엇을 믿는가?
제1장. 하나님에 대한 여러 가지 개념
- 하나님과 경쟁하는 개념들
루이스는 기독교인이 되었다고 해서 다른 모든 종교가 완전히 그릇된 것이라고 할 필요는 없다, 그들도 어느 정도의 진리는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기독교는 옳고 다른 종교는 틀렸다고 생각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면 반감이 생길 것이다. 기독교가 독단적으로 보이고. 그는 수학을 예로 든다. 수학에서 정답은 하나이고 나머지는 틀린 답이다. 그렇다고 기독교 외에 다른 모든 것은 틀렸다고 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수학에서 오답이라고 해도 정답에 가까운 것이 있기 때문이다.
루이스는 인류는 크게 둘로 나눈다. 신을 믿는 다수와 신을 믿지 않는 소수다. 신을 믿지 않는 소수는 주로 유물론자들이다. 실제로 철저한 유물론자는 극소수다. 그들도 무엇인가를 의존하고 산다. 신을 믿는 다수를 말할 때 다 하나님만을 믿는 것은 아니고 ‘절대자’를 믿는다.
신을 믿는 것은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선악을 초월하는 신을 말하는 범신론(汎神論)이 있다. 그들은 우주를 신이라고 말한다. 헤겔의 신(神)개념, 힌두교, 스피노자의 철학 등이 그러하다. 그들에게는 신이 곧 자연과 동일하다. 그들은 절대적인 선과 절대적인 악이 없다고 본다. 둘째, 하나님은 분명하게 선하시고 의로우신 존재라고 믿는 종교다. 유대교, 이슬람교, 기독교 등이 그러하다. 하나님은 우주를 창조하신 분이시다. 화가가 작품에 모든 것을 쏟아 넣어도 화가가 곧 작품이 될 수는 없다. 하나님과 우주의 관계가 그러하다는 것이다.
범신론은 빈민가를 보면서 더럽고 악하고 나쁜 것에도 역시 신이 내재하고 있다고 말하는 경우가 있다. 악한 모습에도 신이 들어 있다는 것이다. 기독교인은 그런 것은 헛소리라고 말한다. 그런 면에서 루이스는 기독교는 “전투적인 종교”라고 말한다. 우주의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다. 이 창조 된 피조물이 잘못된 상태에 있고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바로 잡으려고 한다는 것을 믿고 따르는 종교가 기독교다. 범신론은 관용적인가? 기독교는 독단적인가? 그렇지 않다. 진리라면 하나를 말해야 한다는 것이다.
선하신 하나님이라면 그가 만드신 세상에 왜 잘못된 것이 있는가? 왜 악이 있는가? 왜 잘못된 것을 다시 바로잡으려고 하시는가? 이런 비판을 하는 불신자들은 대개 정의와 불의라는 개념을 가지고 비판한다고 루이스는 말한다. 하나님이 선하다면 왜 이 세상이 이런가? 왜 불의하고 정의롭지 못한가? 그렇게 말하는 것은 곧 정의와 불의를 전제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도 무엇인가 기준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세상은 무의미하고 무원칙적이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정의와 불의를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직선의 개념이 없다면 선이 휘었다고 말하지 못한다.
제2장. 침입
- 하나님의 침입
루이스는 무신론은 단순하고 무지하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무신론보다 더 조심해야 할 것이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물 탄 기독교”(Christianity-and-water. 죄, 지옥, 사탄 등을 다 제껴놓고 기독교를 단순화 시킴)이다. 하나님은 선하시니까 모든 것이 좋다고 보는 견해다. 모든 것이 잘될 거라는 근거 없는 낙관주의다.
루이스는 종교는 단순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훨씬 복잡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기독교를 비판하는 사람들 가운데 기독교를 초등학교 어린아이 수준으로 보면서 비판하는 사람이 있다. 종교는 단순해야 하고, 모든 것은 쓸데없는 짓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루이스는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단순하지 않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서 우주를 말하기 전에 우리 눈에 보이는 것도 단순하게 보이는 것도 그 자체는 단순하지 않다. 우리가 앉아 있는 탁자도 단순하지 않다. 그만큼 현실 자체는 훨씬 복잡하다. 그런데 기독교를 무너뜨리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자꾸 기독교를 어린아이처럼 대하고 공격한다. 그들에게 기독교 교리를 얘기하면 ‘아, 듣기 싫다, 짜증 난다’고 투덜댄다. 루이스는 모든 실체는 복잡할 뿐만 아니라 기이하기까지 하다고 말한다. 루이스는 자신이 기독교를 믿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복잡하기에, 추측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사람이 만들어낸 것이라면 단순할 수도 있다. 기독교는 인간이 만들어낼 수 없는 기이함이 있다.
그는 우주에 대해서 기독교적인 관점과 이원론적인 관점이 있다고 말한다. 기독교적인 관점은 세상은 선했는데 나빠졌다. 그래서 회복시키려고 한다는 것이다. 이원론적인 관점은 모든 것의 배후에는 선과 악의 독립적인 힘이 있고 그 두 힘이 끊임없이 싸우는 전쟁터가 우주라고 본다. 선과 악이 이원론화 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원론이 맞다면 그 선과 악 두 힘은 독립적이다. 영원부터 선과 악이 존재한다. 문제는 무엇인가? ‘선’과 ‘악’으로 불릴지언정 서로가 ‘선’이라고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선과 악이 구분된다면 악은 나름대로 옳다고 할 것이다. 선은 악을 부정하고 악은 선을 부정한다. 이런 투쟁이 일어난다. 문제는 선과 악의 개념이 모호하다. 선은 악을 보고 악이라고 하지만 악은 선을 보고 악이라고 한다. 혼돈이 일어난다.
“선”은 감정에 끌리는 것이 아니라 옳은 것, 당위성이다. 선과 악을 말하면 분명히 둘 가운데 하나는 선이고 하나는 악이어야 한다. 여기에서 다시 절대적인 기준, 도덕률을 말할 수밖에 없다. 선과 악을 말하려면 선과 악을 가르는 제3의 기준이 있어야 한다. 자기들끼리는 가를 수 없다(선악 이원론의 문제). 선과 악의 힘보다 더 오래된 그것을 나눌 수 있는 존재가 있어야 한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선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는 것이고 악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틀어진 것이다.
현실에서 잔인한 행동을 하는 사람은 둘로 나눌 수 있다. 첫째, 가학성 변태성욕자다. 그들은 잔인한 행동 자체를 즐거움으로 삼는다. 둘째, 잔인한 행동을 할 때 자신이 얻는 이익이 있는 사람이다. 예를 들어서 돈이나 권력을 얻는 것. 쾌락, 돈, 권력 그 자체는 악하다고 말할 수 없다. 그것이 일정한 범위를 벗어나서 이루어질 때 악하다. 루이스는 선을 위하여 선할 수는 있으나 악을 위하여 악할 수는 없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서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친절을 베풀어야 한다. 친절을 베풀지 않을 때도 친절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가지고 있다. 친절을 베풀고 싶지 않으나 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가지고 있다. 잔인한 행동은 잘못한 행동인 줄 알면서도 어떤 이익이 있기에 그것을 행한다. 가학성 변태성욕자고 쾌락이라는 이익을 추구한다. 선은 자기에게 이익이 없어도 선을 행하려고 한다. 루이스는 악은 선이 부패한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루이스는 선과 악의 이원론을 해체하고 있다. 무엇인가가 부패했다면 처음에는 좋은 것이 있었다는 것이다. 정상이라는 것을 기준 삼아서 거기에 도달하지 못하면 부패했다고 얘기한다. 선이 먼저 존재해야 악이 나온다. 악은 스스로 존재할 수 없다. 선이 있어야 악이 만들어진다. 이 세상의 악은 일종의 내란이고 반역이다. 잠시 동안 점령하고 있는 것이다.
제3장. 놀라운 대안
세상은 선하게 창조되었다. 그런데 타락하여 악한 권세에 의해 잠시 점령되어 있다. 잠시 악한 권세가 군주 행세를 한다. 이 현상이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는가? 하나님의 뜻과 일치한다고 하면 왜 이런 악이 있어야 할까? 왜 악의 점령을 허락했는가? 라고 묻는다.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하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묻는다. 악이 득세하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딜레마다.
그러나 루이스는 일상에서 얼마든지 벌어질 수 있는 일이라고 한다. 어머니가 자녀에게 ‘공부방을 정리하라’고 하였다고 해보자. ‘나는 앞으로 네 방을 치워주지 않을 거야’라고 말한다. 그러나 여전히 방이 어질러져 있다. 아이들이 어머니가 명령한다고 꼭 지키는 것은 아니다. 어머니의 뜻에 어긋났다. 그런데 그 어머니는 아이에게 스스로 방을 치우라고 자유를 준 당사자이기도 하다. 선택권을 아이에게 준 것이다. 치우지 않을 것도 예상할 것이다. 어머니는 아이에게 자발적으로 치우라고 자유를 준 것이다. 안 치운다고 칼을 들이댈 어머니는 없다. 그러면 어머니와 자녀와의 관계는 끝난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것은 “자유 의지”다. 옳은 일을 할 수도 있고 그른 일을 할 수도 있는 선택의 자유를 갖게 된다. 인간에게 자유의지에 의해 악을 행할 가능성이 열린다. 하나님께서 악을 만드신 것은 아니다. 왜 하나님께서 ‘자유 의지’를 인간에게 주셨을까? 그 자유 의지 때문에 악이 가능해졌는데. 기독교인이라면 이런 질문을 들어보았을 것이다. 루이스는 사랑과 선함과 기쁨의 가치를 주는 유일한 것도 자유 의지라는 것이다. “자유 의지는 악을 가능하게 만들지만, 또한 사랑이나 선, 또는 기쁨을 소유할 가치가 있는 것으로 만들어주는 유일한 것”이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기계를 만든 것이 아니고 자발적인 자유를 가진 인간을 만든 것이다. 악이 없는 세계를 원한다면 인격적인 존재를 만들지 말았어야 한다. 인격은 자유 의지에서 나오기에. 자발적으로 자유로 하나님과 연합하고 다른 사람과도 연합하기를 원하셨다.
하나님은 자유 의지를 주신 결과 최악의 상황을 예상하지 못했을까? 그것도 알고 계셨다. 하나님은 전능하시니까. 알면서도 그 위험을 감수할 만큼 가치가 있는 것이 자유 의지라는 것이다. 자유 의지는 창조 원리에서도 가장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또 다른 반발을 예상한다. 자유 의지를 주셨다면 쉽게 부패하지 않게 만드실 것이지, 왜 강한 의지를 가진 인간으로 만들지 않았는가? 그렇게 만들었다면 좋았을 것을. 그런 좀 더 강한 존재로 만들었다면 잘못된 길로 갈 때 타락의 정도는 더욱 강해진다고 보았다. 인간은 왜 타락했는가? 아담과 하와는 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 먹었는가? 루이스가 가장 악한 죄로 본 것은 “교만”이다. 자유 의지를 가지면 ‘자아’가 생긴다. 자아는 자아를 앞에 두고 싶어 한다. 사탄의 유혹은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과 관계없는 인간만의 행복을 만들려고 한다. 돈, 빈곤, 야망, 전쟁, 계급제도, 제국, 노예제도 등.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행복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만들려고 하는 행복을 추구한다. 거기에서 비참함과 절망이 나온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 자유 의지를 주셨지만, 하나님을 의지할 때 행복하게 하셨다. 피조물이니까. 하나님만이 사람이 행복할 수 있는 유일한 연료다. 하나님이 없이는 참된 평화와 행복이 없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은, ① 인간에게 양심, 옳고 그름을 아는 의식을 주신 것이다. 역사를 보면 어느 시대든지 옳은 일을 하려고 하는 사람이 있다. ② 선한 꿈들을 주신다. ③ 특별한 민족을 선택해서 인류의 머릿속에 하나님에 대한 개념을 심어준다. 유대교가 그러하다. 하나님의 계획은 여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모든 민족을 상대로 하신다. 가장 충격적인 것은 유대인 가운데 한 남자가 자신이 하나님이라고 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역사적으로 분명히 실존했던 분이시다. 그분은 세상 전부터 존재했다, 자신이 죄를 사하실 수 있다, 마지막 날에 다시 와서 심판한다고 하신다. 그러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거나 미친 사람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당신은 그를 바보로 볼 수도 있고 마귀로 몰아 침을 뱉고 죽일 수도 있다. 그의 발 앞에 엎드려 그를 주 하나님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그 중간은 없다. 예수님을 위대한 교사라고 말하는 것은 허튼소리다.
제4장. 완전한 참회자
양자택일을 해야 한다. 하나님이거나 정신병자이거나. 그리스도는 왜 이 땅에 오셨는가? 오신 목적이 무엇인가?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하나님과 틀어졌던 관계를 올바르게 이어지게 한다는 것이다. 왜 예수님이 꼭 벌을 받으셔야 했는가? “빚”의 개념으로 이해하라고 한다. 인간의 빚은 무엇이며, 예수님이 무엇을 대신 갚아주셨는가? 자신을 내세우는 인간은 반역자인 것을 생각하라고 한다. 우리는 조금만 개선하면 되는 상황이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의 타락은 내가 이 세상의 주인이고 창조자가 되는 것처럼 교만함으로 드러난다. 조금 개선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 완전히 항복해서 지금 가던 길을 완전히 되돌려서 올바른 길로 가야 한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개선이 아니라 완전히 되돌아가야 한다. 이 되돌아가는 과정을 기독교에서는 “회개”라고 한다. 회개는 쉬운 것이 아니다. 자신을 죽여야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다. 빚은 탕감해야 한다. 회개는 누구에게 필요한가? 악한 사람이다. 사람이 악해지면 더 회개할 필요성이 증대되는데 회개할 수 있는 능력은 더 상실하는 딜레마에 빠진다. 되돌아갈 수 있는 선함이 없다. 완전한 회개를 이끌 수 있는 완전한 인간이 필요하다. 예수님이다. 인간을 도울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이 인간이 되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인간이 되셔야 죽을 수 있고, 죽어야 빚을 갚을 수 있고, 우리가 그 죽음을 나누어 가질 수 있다.
예수님만이 하나님이시라면 정말 채찍에 맞을 때 실제로 아프셨을까? 라는 질문을 하는 사람이 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면(능력이 있으니까) 채찍에 맞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닌가? 진정한 사람이라면 모든 인간의 육체적 고통을, 정신적 고통을 다 겪는다. 루이스는 선생님과 학생의 예를 든다. 선생님이 아이에게 글을 가르친다. 그것은 선생님이 아이보다 더 글을 잘 쓸 수 있는 것을 전제한다. 아이가 글을 쓰다가 선생님이 글 쓰는 것이 더 쉽잖아요? 나는 선생님의 도움받기를 원하지 않아요, 이렇게 말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그러면 어떤 도움도 받을 수 없다. 예수님께 당신은 나보다 고통을 덜 느끼잖아요, 하면서 예수님의 도움을 청하지 않는 것은 그런 식의 얘기가 된다.
제5장. 실질적인 결론
그리스도인은 새로운 생명이 주어졌음을 믿는다. 단지 가르침을 받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변화이다. 인간은 인간보다 더 나은 단계를 생각하는데 그 기독교의 견해는 그것이 이미 일어났다고 한다. 그리스도인의 생명을 얻는 세 가지 항목이 있다. 세례, 신앙(믿음), 성만찬이다. 이 가운데 세례와 성만찬은 눈에 보이는 행위다. 믿음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세례, 믿음, 성만찬을 예수님의 권위에 의존해서 믿는다. 사람들은 뉴욕에 가보지 않고도 자유의 여신상이 있음을 믿고 이순신을 보지 않고도 살았다고 믿는다. 누군가의 권위를 믿기 때문이다. 어떤 책이나 부모 등을 통해서 들었기 때문에 믿는다. 직접 경험하지 않아도 권위를 믿을 때 지식을 확보할 수 있는 것이다.
세례, 믿음, 성만찬은 구원의 입구다. 루이스는 예수님을 닮아가는 노력은 그 후에 해야 한다고 말한다. “내가 세례와 신앙과 성례가 그리스도를 본받기 위한 당신의 시도를 대신한다고 주장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고 루이스는 말한다. 존재가 변했다고 모든 게 변한 것이 아니다. 부모가 아기를 낳았으나 그 아기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각고의 노력을 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완벽한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넘어질 때도 있다. 그러나 새롭게 삶을 시작할 수 있는 사람이다. 넘어질 때 다시 회개하는 것이 중요하다. 루이스는 “마찬가지로 기독교인이란 결코 범죄 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회개하고 자신을 되찾으며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는 사람이다.”고 말한다.
기독교인이 선하게 사는 것은 무신론자가 선하게 사는 것과는 다르다. 무신론자는 자신의 행위가 칭찬받기를 원한다. 선한 사람이라고 인정받기를 원한다. 기독교인은 자기 의라고 자랑하지 않고 내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생명에서 나온다고 말한다. 루이스는 “기독교인들은 자신이 행하는 선은 모두 자기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생명에게서 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기독교인은 우리가 선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를 선하게 만드신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한다. 그리스도가 내 안에 거한다는 것은 정신적인 것이라거나 도덕적인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작용하고 계시다는 의미다.
그리스도에 대한 말을 듣고 믿는 사람들에게만 주어진다는 것은 지극히 불공평하지 않은가? 라고 질문하는 사람이 있다. 예를 들어서 이순신 같은 분, 세종대왕 같은 분은 어떠한가? 라고 묻는다. 루이스는 “우리는 그리스도를 말미암지 않고는 아무도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를 아는 사람들만 그를 통하여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고 답한다. 루이스는 그런 질문을 하는 사람들에게 그들은 진정으로 그들의 영혼을 걱정해서가 아니라 비판하기 위한 질문을 하는 것이라고 한다. 진짜 그들을 염려한다면 우리가 유일한 분이신 그리스도의 몸에 한 세포가 되어 추가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말한다.
또 어떤 사람은 왜 하나님은 무력을 사용하여 공격하지 아니하셨는가? 라고 묻는다. 하나님이 전능하신 분이라면 왜 한 번에 와서 다 쓸어버리지 않느냐? 라는 질문이다. 루이스는 “우리는 그때를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께서 지체하시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자유로이 하나님 편에 연합할 기회를 주시기를 원하시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인간의 지유 의지를 사용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장차 세상에 오신다. 작가가 무대 위에 등장하면 연극은 끝이 난다. 루이스는 예수님의 재림에 대해서 말한다. “그때의 하나님은 변장하신 하나님이 아니다. 모든 피조물에게 불가항력의 사랑이나 불가항력의 공포를 불어놓을 압도적인 분이시다. 그때 당신의 편을 선택하기에는 너무 늦다. 설 수 없게 된 후에 눕기를 선택했다고 말하는 것은 소용이 없다. 그때는 선택할 시간이 아니라 우리가 어느 편을 택했는지를 발견할 때이다. 오늘, 이 순간은 우리가 옳은 편을 택할 수 있는 기회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 기회를 주시려고 지체하고 계신다. 그러나 영원히 뒤로 미루시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는 그 기회를 받아들이거나 버리거나 양자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