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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단.......목사들의 타락과 교회 세습*
결정을 내리기 전에
저는 1975년 5월 마지막 주일에 등마루교회를 출석하기 시작하여 1995년 12월 마지막 주에 등마루교회를 떠났습니다. 만일 제가 "청춘을 돌려다오"라는 유행가를 부른다면 아마 이곳에 와서 불러야 할 것입니다. 이곳에서 아내를 만나고 두 딸을 낳았습니다.
그리고 제 젊음의 열정을 주님께 드린 곳입니다. "그대가 내 옆에 있어도 나는 여전히 그대가 그립습니다."라고 한 시인이 사랑을 노래하였는데 등마루 교회가 바로 제게 그런 교회입니다. 오늘 제가 이곳에 와서 말씀을 전하지만 지금 이 순간도 그리운 교회가 바로 등마루 교회입니다.
그래서 저도 사도 바울처럼 여러분에게 똑같이 말하고 싶습니다. "제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여러분들, 등마루교회를 어떻게 사모하는지 하나님께서 제 증인이십니다."
또 오랜 시간이 지났습니다. 지난 시간의 이야기보따리를 풀면 부흥회를 열어야 하기 때문에 그냥 풀지 않고 꼭꼭 싸두겠습니다. 하지만 등마루 교회가 제게 그런 교회이기 때문에 오늘 전하는 말씀은 사람들의 귀를 즐겁게 하는 말씀이 아니라 여러분들의 마음을 찢는 그런 말씀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딤후4:3-4)고 말합니다. 지금이 바로 그러한 때라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십자가의 진리보다 더 분명하고 확실한 복음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부자 되고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 하나님의 축복'이라는 사고입니다. 거기에 대해 무언가 토를 다는 순간 사람들은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대개는 따지는 듯한 자세로 나오는데 그 기세가 당당하다 못해 사납다고 말하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녀들을 축복하시고 부자로 살게 하시는 것이 뭐가 이상하냐고 말하면서 부에 대해 경계하는 저를 오히려 이상한 사람 취급을 합니다. 정말 제가 이상한 사람일까요?
예, 세상의 가치관으로 보면 저는 이상한 사람 정도가 아니라 미련하고 미친 사람입니다. 하지만 하나님나라의 가치관으로 보면 두 번 설명할 필요도 없이 정상적인 사람입니다. 세상의 가치관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을 따를 것인가는 전적으로 여러분의 몫입니다.
그 결정을 내리시기 전에 두 왕의 이야기를 들려드리려고 합니다. 두 왕의 이야기를 들으시고 심사숙고하신 후에 확실한 결정을 용기 있게 내리시게 되기를 바랍니다.
솔로몬 왕 이야기
성경은 우리에게 두 사람의 평화의 왕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먼저 솔로몬 왕의 이야기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솔로몬이라는 그의 이름은 평화라는 의미의 '샬롬'에서 나온 이름입니다. 또 누구나 다 알고 있듯이 솔로몬은 지혜의 왕입니다.
여호와께서 솔로몬의 꿈에 나타나 솔로몬이 구하는 것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시면서 무엇을 구하느냐고 물으셨을 때 그는 겸손하게 자신을 '작은 아이'라 칭하며 자신이 왕이 되기에 많이 부족하다는 것을 먼저 아뢴 후에 "지혜로운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9)라고 자신을 위한 어떤 것을 구하지 않고 백성들을 위해 지혜를 구했습니다.
겸손할 뿐만 아니라 신실하기까지 한 솔로몬에게 하나님께서는 그의 청원대로 지혜를 주셨을 뿐 아니라 그가 구하지 않은 "부와 영광"까지 주셨습니다.(열상3장 참조)
우리는 거기서 예수님의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는 말씀이 의미하는 바를 분명하게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주님의 말씀대로 당신을 먼저 생각하고 당신의 뜻을 구하는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부와 영광"도 주십니다.
하지만 성경의 메시지를 거기까지만 들으면 안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솔로몬은 다른 어떤 성경의 인물보다도 부와 영광에 관한 생생한 교훈을 주는 사람입니다.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 지혜를 구하고 "부와 영광"을 얻게 된 이후의 솔로몬의 삶을 살펴봄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으로서의 "부와 영광"에 대한 전혀 다른 상반된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솔로몬은 자신에게 주어진 "부와 영광"을 가지고 무엇을 했을까요? 솔로몬은 자신의 "부와 영광"을 가지고 압제당하는 사람들의 울부짖음을 해결할 수도 있고 못들은 척 할 수도 있었습니다. (어떤 분들은 왜 갑자기 여기서 압제당하는 사람들의 울부짖음이 튀어 나오는가 의아해 할 수도 있습니다.
그만큼 오늘날의 복음은 하나님의 정의에 대해 무지합니다. 이스라엘을 애굽의 압제로부터 구원하신 하나님은 이스라엘에 압제당하는 자가 없기를 바라실 뿐 아니라 이스라엘을 세상의 빛으로 삼으셔서 세상의 압제당하는 사람들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도구가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이유는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을 통해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함이며 그것은 곧 세상이 하나님의 정의가 실현되는 곳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후에 주님의 기도를 통해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리라."라는 말씀으로 그것을 표현하셨습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솔로몬은 압제당하는사람들의 울부짖음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솔로몬은 주님의 성전과 자기 궁전과 밀로 궁과 예루살렘 성벽을 쌓고, 하솔과 므깃도와 게셀에 성을 쌓았습니다. 그가 왕으로 있던 내내 어마어마한 건축사업이 계속되었습니다. 그 일을 위해 그는 강제 노역꾼을 동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주로 감독을 맡았고 다른 민족들이 그 일을 하였는데 그것은 노예로부터 해방되었던 이스라엘이 다른 민족을 노예로 부리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부자 되고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믿는 분들은 이 대목에서 박수를 치며 할렐루야를 외쳐댈 것입니다.(하나님께서 노예였던 이스라엘을 노예를 부리는 민족으로 만드셨습니다. 할렐루아! 맞습니까?)
우리는 그 일을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착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을 몰라도 너무도 모르는 처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예를 해방시키시는 분이시지 노예를 부리게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솔로몬이 행한 잘못은 하나님께서 주신 부와 영광을 이용해 하나님나라가 아니라 제국을 건설했다는 점입니다.
불과 몇 세대 만에 압제당하는 사람들이 압제자가 된 것입니다. 속박을 당하며 울부짖던 민족이 이제 다른 사람들을 울부짖게 만드는 민족이 되었습니다. 애굽으로부터 벗어나기를 갈망하던 민족이 이제 또 다른 애굽을 세운 것입니다. 솔로몬은 하나님의 뜻에 무관한 세상의 제국을 세웠습니다. 그는 자기 조상들의 이야기를 망각하였습니다. 솔로몬은 하나님의 정의를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안락의 왕국'을 세웠습니다. 그는 인간의 고통으로 세운 궁전에서 식사를 하고 테라스를 거닐었습니다.
그의 잘못은 단순히 건축사업을 위해 노예들을 사용했다는 것만이 아닙니다. 그가 하나님의 성전과 자기 궁전을 지은 후에는 하솔과 므깃도와 게셀에 성을 지었습니다. 우리는 그 지명이 의미하는 바를 생각치 않고 그냥 지나칩니다. 그러나 그 장소들이 상징하는 바를 알면 우리는 그것이 성경에 그냥 기록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있습니다.
위 지명 가운데 하나인 므깃도는 이스라엘 북쪽에 있는 계곡입니다. 아프리카와 유럽 그리고 아시아가 만나는 계곡인데 그곳은 전략의 요충지였습니다. 솔로몬은 자신의 부와 영광을 이용해 군사기지를 지었던 것입니다. 그 이유는 자신의 엄청난 부와 영광을 지키고 보호하기 위함입니다. 제국을 세우고 나니 그의 우선순위는 제국을 지키는 일이 되었던 것입니다.(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그 뿐 아니라 솔로몬은 병거와 마병을 모았습니다. "병거가 일천사백이요 마병이 일만이천이라."(왕상10:26) 그는 어마어마한 수의 병거와 마병을 병거성과 예루살렘 성에 두었습니다. 병거와 마병 하면 생각나는 것이 없으십니까? 예, 그렇습니다. 병거와 마병은 바로의 군사들이 애굽을 빠져나온 이스라엘을 추격할 때 쓰던 군사도구입니다. 그것을 이제 이스라엘이 쓰고 있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이 새로운 애굽이 되었습니다. 새로운 바로가 등장했습니다. 그의 이름이 바로 솔로몬입니다.
오늘날의 최첨단 무기에 해당하는 말과 병거를 축적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사고팔아 이익을 남기기까지 하였습니다. 병거는 애굽에서 한 대에 은 육백 세겔에 말은 한 필에 은 백오십 세겔을 주고 사왔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헷 족속의 모든 왕과 시리아 왕들에게 팔아 차익을 남겼습니다. 솔로몬이 국제적인 무기판매상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제 그는 폭력으로 돈을 버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전쟁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을 지키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을 지키는 자'라는 말은 영적으로 하나님께 반역한 인간들을 상징하는 말입니다. 솔로몬이 바로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런 그에게서 하나님이 멀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정의로부터 멀어지는 것 역시 당연한 일입니다.
그래서 그런 것일까요? 그는 자그마치 칠백 명의 후궁과 삼백 명의 첩을 두었습니다. 간단히 말해 일천 명의 아내를 둔 것입니다. 그 아내들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그 아내들이 솔로몬을 꾀어서 다른 신들을 따르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솔로몬의 마음은 온전하게 주님이신 하나님께 바쳐지지 못했습니다. 노예제도와 군사기지가 구조적인 악이었다면 이제 아내들에 의해 버려진 것은 솔로몬 개인의 마음이었습니다. 구조가 변하니 이제 개인 역시 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솔로몬은 군마를 많이 가지고 많은 아내를 두고 마음이 다른 데로 쏠리고 말았습니다. 성경은 그런 솔로몬의 영적 상태를 그가 소유하는 금의 양을 통해 밝히고 있습니다. "솔로몬의 세입금의 중수가 육백육십육 금 달란트요.".(왕상 10:14) 해마다 솔로몬에게 들어오는 금은 그 무게가 육백육십육(666) 달란트였습니다. 오늘날로 치면 약 25톤에 해당하고 가격으로 환산하면 일천 칠백억 원 정도 됩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무게와 가격이 아니라 666이라는 숫자를 통해 성경기자가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입니다.
666이라는 숫자는 악하고, 어둡고, 잘못되고, 하나님과 반대되는 것을 말할 때 쓰는 유대인 특유의 표현입니다.(계13장 참조) 결국 솔로몬의 황금이 솔로몬을 사단의 도구로 만들고 있다는 것을 성경은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세상을 구원해야 할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도구가 되지 못하고 사단의 도구가 되고 만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만든 것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부와 영광", 그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이스라엘은 통일왕국이 깨어지고 남과 북으로 갈라진 분열왕국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한 형제이어야 할 북이스라엘과 남유다가 서로 칼을 겨루는 전쟁을 하게 되었고 무엇보다 안타까운 것은 그 이후로 멸망할 때까지 산당이라는 불신앙의 예배처소가 존속되는. 간음한 이스라엘로 남게 되었습니다.
가장 큰 불행은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할 이스라엘이 제 역할을 못하게 되어 용도 폐기 당할 수밖에 없게 된 점입니다. 그 발단이 바로 "부와 영광"이라는 사실을 새 이스라엘로서의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꼭 하나 짚고 넘어가야 할 내용은 솔로몬의 지혜입니다. 그의 지혜가 어떤 지혜입니까?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지혜와 총명을 심히 많이 주시고 또 넓은 마음을 주시되 바닷가의 모래같이 하시니 솔로몬의 지혜가 동양 모든 사람의 지혜와 애굽의 모든 지혜보다 뛰어난지라."(왕상9:29-30) 하나님이 주신, 세상 그 누구와도 견줄 수 없는 지혜와 총명을 가지고도 솔로몬이 부와 영광의 올무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명심 또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새로운 왕으로 오신 예수님
그래서 새로운 하나님 나라 건설을 위해 오신 또 다른 평화의 왕이신 예수님은 참된 하나님 나라의 왕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몸소 당신의 삶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세상의 왕들처럼 군림하고 통치하는 왕이 아니라 섬기는 자로서 사랑과 희생의 본보기가 되어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신학자는 그분을 가리켜 '몸소 하나님 나라'라고 하였습니다. 이 땅에서의 그분의 발자취 하나하나가 새로운 하나님 나라 왕의 모습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그분은 화려한 왕궁에서 태어나지 않으셨습니다. 베들레헴 마구간에서 태어나 여물통에 누우셔야 했습니다. 그분의 탄생 소식을 듣고 처음 달려온 사람들은 근처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이었습니다. 우리는 목자들이라는 말을 낭만적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그 당시의 목동들은 결코 좋은 평판을 듣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사회적 신분이 높은 사람들은 더더욱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목자들을 하찮게 여기고 무시하였습니다. 그들은 주로 도둑질을 하는 사람들이란 평판을 들었으며 결정적으로 안식일을 지키지 못하는 일이었기에 유대인이라면 인생 막장에 다다르지 않으면 그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가장 낮은 신분의 사람들의 환영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그분의 어린 시절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갈릴리 나사렛이라는 한적한 시골 마을에서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성장하셨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방문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긴 하지만 그 기간 역시 세상의 왕과는 거리가 먼 삶이었습니다.
성인이 되어 요단강에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하늘로부터 성령이 임함으로써 그분의 공생애가 시작됩니다. 왕으로서의 그분의 공식 여정이 시작되었다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거기에서도 역시 부와 영광의 그림자조차 발견할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들어가 시험을 받게 됩니다. 그 시험의 요점은 부와 영광과 인기를 피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분의 나라는 세상의 제국들처럼 힘으로 통치하는 나라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거기서 부와 영광, 그리고 사람들의 인정은 하나님 나라의 왕이신 그분을 넘어뜨릴 수 있는 결정적인 올무라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준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은 왕궁은커녕 집 한 칸이 없는, 평생 머리 둘 곳조차 없는 삶을 사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서 그분이 관심을 기울이셨던 사람들 역시 나라들의 왕이나 고관대작들이 아니었습니다. 학문과 명망이 있는 사회 지도자들도 아니었습니다. 그분은 어쩐 일인지 한사코 그 당시 사람들이 만나주지 않고 사귀려하지 않던 사람들과 주로 만나셨습니다. 세리와 창녀는 물론 이방인들과 저주의 상징이었던 문둥병 환자들까지 만나주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왕이신 그분의 사명이 바로 그런 압제당하는 사람들을 해방시켜주시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고쳐주시고 낫게 해주시고 변화시켜 주심으로써 압제의 굴레로부터 벗어나게 된 사람들은 죄사함을 받았을 뿐 아니라 그분을 따르는 하나님 나라 백성들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점차로 그분을 따르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사회 지도층 인물이었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그리고 제사장들은 점차로 자신들의 입지가 좁아지고 있다는 위기의식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들은 그렇게 말하지 않고 예수님께서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고 말하고 성전체제를 흔드는 신성모독을 범하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스라엘의 근본을 뿌리째 흔드는 사악한 인물로 지목하여 그분을 제거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 일을 망설이고 주저했던 것은 그분을 따르는 무리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는 무리들을 규합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제자들의 수를 늘릴 수도 있었고, 무엇보다 하늘의 도움을 청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분은 그들과 힘으로 겨루거나 대적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철저하게 무력을 사용하는 것을 피하고 비폭력의 길을 걸으셨습니다. 당신이 체포당하는 자리에서도 베드로에게 뽑았던 검을 도로 집어넣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무런 저항 없이 체포당하셨고 맥없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그분이 제자들에게 가르치셨던 대로 그분은 오직 사랑으로 원수들까지 대하셨으며 죽음으로써 그 사랑을 입증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오직 사랑으로 열리고 닫히는 나라임을 그분의 삶 전체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솔로목과 똑같이 마지막으로 생각해보아야 할 것은, 새로운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은 당신의 지혜를 의지하지 않고 한결같이 아버지의 뜻만을 따랐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아버지께서 일하시는 대로 일했습니다. 심지어는 하시는 말까지도 아버지께서 하기 원하시는 말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이해할 수 없고, 받아드릴 수 없고, 견딜 수 없는 일들도 그것이 아버지의 뜻이라면 그것을 따랐습니다. 겟세마네 기도에서 보듯이 그분은 피땀을 흘리며 기도하심으로써
자신의 원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원하시는 것을 따르실 수 있었습니다.
두 길
시간관계상 압축하고 또 압축해서 말씀드렸지만 두 평화의 왕이 가는 길은 정 반대였습니다. 솔로몬은 세상의 방식을 따라 제국을 건설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와 정 반대인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셨습니다.
따라서 무엇보다 먼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나라가 세상과는 전혀 상반되는 거꾸로 뒤집어진 나라라는 사실에 대한 깊은 이해가 필요합니다. 세상의 방식으로 하나님 나라를 이루려 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인간의 오만이며 착각인가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도 오늘날 교회들의 모습은 하나님 나라의 방식에 대해서는 문외한인 사람들로 넘쳐납니다.
안타깝게도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통해 드러나야 하고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규정지어주고 이끌어 가야 할 하나님 나라의 방식이 실종되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에서의 성공을 자랑하고 세상의 방식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인간들이 저울질하는 어처구니없는 현실이 아무런 저항도 없이 받아들여지고 동시에 지향하는 목표가 되어버렸습니다.
따지고 보면 오늘날의 교회들의 타락한 모습은 하등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모두가 평등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어야 할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교회의 지도자들이 왕처럼 높여져 받들어지는 세상의 방식이 통용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교회의 모든 구성원들이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을 제대로 인식하고 오직 한 분 모두의 왕이신 예수님의 길을 따라 서로 사랑하고 섬기려 한다면 교회의 모습은 얼마나 달라질까요?
교회가 무한정 커지는 일도 없을 것입니다. 목사들의 성적 타락과 교회 세습과 같은 문제는 처음부터 발생할 가능성이 없어질 것입니다. 헌금이 문제가 되는 일도 없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교회 때문에 상처 받는 일과 싸우고 갈라지는 분열의 역사도 사라질 것입니다. 예수님에게서처럼 부와 권력과 인기가 추구하는 목표가 아니라 거절해야 할 유혹이요 악덕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은 커지려고 하지 않습니다. 오직 작은 자만이 모두의 진정한 왕이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작은 자가 되어야 서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작은 자가 되어야 서로 섬길 수 있습니다. 모두가 작은 자가 된 그곳에 하나님 나라의 평화(샬롬)가 이루어집니다. 오늘의 본문은 바로 그 모습을 보여주는 하나님 나라의 원칙이요, 비결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이 소위 집권자(왕)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왕이신 예수님)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10:42-45)
이 분명한 주님의 말씀을 듣고도 그것은 다만 이상일 뿐이라고 말하고 싶은 생각이 여러분들 속에 일어난다면, 그런 교회가 도대체 세상 어디에 있느냐고 묻고 싶다면 여러분들은 예수님의 길이 아니라 솔로몬의 길을 따르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 분들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그리고 그분을 따라 섬김과 희생의 길을 걷는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런 여러분들 가운데 하나님 나라의 여명이 밝아올 것입니다. 그 나라는 희생양이 전혀 필요 없는 진정한 평화의 나라입니다.
사랑하는 등마루교회 교우 여러분!
우리는 지금 평화의 왕이신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는 성탄 축하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무엇으로 그분의 오심을 기뻐하고 축하할 수 있겠습니까? 그분을 찬양할 수도 있습니다. 그분께 예물을 드릴 수도 있습니다. 그분의 탄생을 기쁜 소식으로 세상에 전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분께 드릴 수 있는 가장 큰 예물, 가장 아름다운 예물은 우리의 마음을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존재의 핵심이며 알짬인 우리 마음을 주께 드려 그분의 말씀대로 사는 우리의 삶 전체를 드리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이 소위 집권자(왕)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왕이신 예수님)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이 말씀에 담겨 있는 예수님의 간절한 염원을 마음 깊이 느끼시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섬기는 자가 되고,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 섬김을 받으려하지 않고 도리어 섬기려 하고, 우리의 왕이신 그분처럼 우리의 목숨까지도 다른 이들을 위해 내놓을 수 있는 사람들이 될 때 우리는 세상의 빛이 되어 이스라엘이 하지 못했던 온 세상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도구가 될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결정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세상의 부귀와 영화를 좇는 솔로몬의 길을 걸으시겠습니까?
아니면 부귀와 영화와 사람들의 인기를 사단의 유혹으로 여겨 그것들을 버리고 예수님의 길을 걸으시겠습니까?
여러분들이며 여러분들의 교회인 등마루 교회가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 섬기고, 목숨까지도 내어놓는 하나님 나라가 되어 온 세상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도구가 되기를 바랍니다.
2011년 12월 25일 등마루교회 방문 설교
-최태선 목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