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계 직원 연수 1 - 이육사와 퇴계
그 동안 중국연수기를 쓴 관계로 하나 빠뜨린 것이 있었다. 중앙중학교 하계직원연수다. 내 컴퓨터의 사진철에 사진들이 그대로 남아있어 그때의 광경들이 다시 떠올라 이 글을 올리고자 한다.
2008년 7월 18일 금요일 종업식날이다. 교직원들은 부산에서, 교장 연수 중이었던 나는 교원대학교에서 출발하여 서로 안동 입구에서 만나기로 했다. 교원대학교에서 청주를 거쳐 국도를 탔다. 호젓한 산길과 들길을 지나 속리산의 말티고개를 넘어서 문경방향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속리서원리의소나무(천연기념물 제352호)를 만났다. 정이품송(正二品松)과는 부부지간(夫婦之間)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정이품송이 곧게 자란 데 비하여 이 나무는 밑에서 두 갈래로 갈라져 생김새가 그렇게 생긴 것이다. 따라서 정2품송이 수나무이고 이 나무가 암나무이다.
속리서원리의소나무 정이품송
예천을 거쳐 학봉종택 입구에서 합류했다. 직원연수는 학봉종택-봉정사-제비원석불-이육사생가-퇴계종택-신세동7층전탑-임청각에서 숙박-내앞종택-조지훈생가-영양 서석지ㅡ봉감모전5층석탑-청송 달기약수 중식-부산이다. 학봉종택은 2주전에 교장자격연수단과 같이 왔다. 이곳 후손이면서 이집의 총 관리자인 김용수님께 미리 연락을 드렸다. 우리 선생님들은 모두가 이곳이 처음이었다. 삼년상을 지내는 것을 처음 보는 것이다. 다들 신기해한다. 아주 모범적으로 설명을 잘 듣고 있다.
학봉종택
이어 봉정사를 찾았다. 2주 전에 이곳에 왔는데도 같이 온 사람들이 다르니 분위기 또한 다른 느낌을 받았다. 여행은 어디를 가는가도 중요하지만 누구와 같이 가는가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삼삼오오로 이야기를 나누면서 걸어간다. 기쁜 표정으로 다들 즐거워한다. 7월 한더위에도 불구하고 피로해하는 기색이 없다. 극락전, 대웅전, 영산전을 다 둘러보고 다시 만세루에 올랐다. 시원하다. 오늘처럼 더운 날씨는 만세루가 최고이다.
봉정사 만세루
만세루에 앉아서 시원함을 즐기는 몇 분들은 한 목소리를 낸다. 그만 이곳에서 낮잠을 한숨 자고 가자고 한다. 나도 몇 시간 동안 운전한 관계로 졸음이 왔다. 어린 시절 시원한 원두막에서 낮잠을 잔 기억도 같이 되살아났다. 가기 싫은 발걸음을 다시 옮겼다. 길가에서도 볼 수 있는 안동의 얼굴인 이천동 제비원석불은 차안에서 보았다. 더운 날씨 때문이다.
이육사 시인의 생가는 도산서원을 지나야 한다. 안동댐을 지나는 풍광은 아름답다. 오천 군자리를 지나고 국학진흥원을 지나고 농암종택이 있었던 분강촌도 지난다. 이윽고 차는 도산서원으로 들어간다. 도산서원은 선생님들이 거의 다 가 보았던 곳이라 시간 관계 상 그냥 지나쳤다. 도산서원에서 작은 고개를 하나 넘으면 퇴계선생의 종택이 나온다. ‘경상감사보다도 더 좋다’는 퇴계 종손 분들이 대대로 살아온 곳이다. 다시 조금 더 가면 몇 가구만 보이는 마을이 나온다. 하계다. 퇴계 종손이 사는 곳이 상계마을이고 이곳이 하계마을이다. 하계는 퇴계선생의 지손들이 살았던 동네다. 과거 합격자를 가장 많이 배출한 마을이기도 하다.
하계마을에서 고개를 하나 넘으면 원촌마을이 나온다. 이 원촌마을이 바로 이육사 시인이 태어난 곳이다. 원촌마을에도 퇴계선생의 지손들이 지금도 살고 있다. 원촌마을 풍광은 빼어나다. 낙동강이 청량산을 돌아 원촌에 와서야 제법 강의 자태를 나타낸다. 더 넓은 들판을 배경으로 호연지기를 기를 만한 곳이다. 풍수상으로는 오지탄금형(五指彈琴型)이라고 한다. 이는 마을 뒤로 뻗어 내려온 다섯 산줄기와 앞으로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물의 조화는 다섯 손가락으로 비파를 타는 형국이다. 그러나 지금은 안동댐 건설로 인하여 법적으로는 수자원공사의 땅이다. 많은 집들이 헐리고 이사를 가고 지금은 몇 집 남지 않았다. 우리는 차에서 내려 마을길로 걸어 들어갔다. 내 고향 초등학교 동무의 처갓집인 목재고택에 들어갔다. 넓은 마당에 잔디가 잘 조성되어 있어 전성기 때에는 굉장한 집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친구 장인의 할아버지가 영해부사와 대사간을 지낸 목재(穆齋 ) 이만유님이다. 이분의 따님이 석주 이상룡선생의 며느리라고 한다. 부러운 친구다. 조금 더 가면 육사 생가가 있던 곳이 나온다.
목재고택
생가터에는 육사의 시 ‘청포도’가 새겨져 있는 오석으로 만든 시비와 포도형상을 나타낸 조형물이 있다. ‘청포도’는 국어시간에 외우지 못하면 벌을 받은 기억이 난다. 그 덕분에 지금도 많은 부분들을 외우고 있다. 주입식교육은 일반적으로 좋지 않다고 하지만 분야에 따라서는 암기식 교육도 좋은 방법이 되는 것이다.
‘내 고장 7월(七月)은 청포도가 익어 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먼데 하늘이 꿈꾸려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靑袍)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 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육사 생가터
생가 조금 위에 잘 지어진 현대식 건물이 이육사 문학관이다. 우리 일행은 2층 영상관에서 시인의 생애에 관한 영상물을 보았다. 마음의 울분과 회환이 함께했다. 이곳을 다녀간 사람은 애국심이 저절로 고취가 되는 것이다. 여기서 시인의 가계를 알아보자.
육사는 퇴계선생의 후손이다. 퇴계종택이 있는 곳이 상계이고, 퇴계의 3째 손자 동암 이영도(東巖 李詠道1559-1637)가 터를 잡은 곳이 하계다. 퇴계가 상계를 개척했고, 손자 동암이 하계를 열었다. 그리고 동암의 증손자가 원촌을 개척했다. 상계는 16세기, 하계는 17세기, 원촌은 18세기로 대략 100년을 간격으로 열어나갔다. 따라서 이 일대는 퇴계선생의 후손들이 땅을 개척하고 살아온 동네다.
육사의 어머니 허길은 범산 허형의 딸이다. 허형은 의병장 왕산 허위(旺山 許蔿)의 종(4촌)형이다. 그리고 임청각의 주인인 석주 이상룡(石州 李相龍)선생의 손부 허은(許銀)여사는 허형의 손녀다. 육사는 허형의 외손자다. 따라서 육사의 집은 허은 여사에게 고모의 집이고, 임청각은 육사의 외사촌 집이다. 말하자면 내외종간이다. 이뿐만이 아니라, 허은여사의 시어머니가 목재 이만유(李晩由)의 따님이다. 이처럼 시인은 우리나라 최고의 가문 중의 하나인 퇴계선생의 후손이자. 외가는 범산 허형의 외손자이다. 애국지사가 나오는 데에는 그냥 나오는 것이 아니라 가문의 내력이 있어야 되는 것이다.
아쉬움을 두고 시인의 기념관을 다시 나와 고개를 넘으니 옛날의 화려했던 영화는 어딜 가고 초라한 수몰지구인 하계마을만 있다. 하계를 지나면 상계가 나온다. 상계가 바로 퇴계선생의 종택이 있는 곳이다. 종택에 가기 전에 전화를 하니 종손님과 차종손님은 외출하시고 안 계신다고 한다. 그러나 문은 항상 개방하고 있으니 와서 보고 가도 된다고 한다. 전체 일행이 들르기에는 시간이 너무 지체되어 내 차에 탄 사람만 종택에 들렀다. 퇴계종택
종택이 있는 곳의 지명 전체는 토계(土溪 혹은 兎溪)이나 이곳은 조금 상류에 위치하고 있어 상계(上溪)라 한다. 퇴계선생은 ‘토계’의 토를 물러날 퇴(退)로 고쳐 호를 퇴계(退溪)라 했다고 한다. 이 토계의 개울을 건너면 종택이 나온다.
퇴계종택의 풍수를 보면 뭔가 어색하다. 전통적인 종택의 풍수는 양택의 기본 풍수를 지키고 있다. 즉 배산임수 전저후고 전착후관의 형태와 자오 방향인 정남을 주로 사용한다. 그리고 마을의 중심에 우뚝 서 있다. 그런데 이곳 종택은 외롭게 홀로 서 있다. 좌향과 산세가 외롭고 쓸쓸함은 주는 기분도 느껴진다. 이 부분에 대하여 늘 궁금했는데 농암종택의 17대 종손인 이성원님의 글을 보고는 어느 정도 이해가 됐다. 이분은 고교 교사를 20년 이상 한 분으로 퇴계선생을 연구하여 문학박사학위도 취득한 분이기도 하다. 작년에 농암종택에서 뵈었고 얼마 전에 전화로 통화를 했는데 황도사를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참 호감이 가는 분이었다. 이분의 글을 옮기고자 한다.
“나의 이런 의문은 『도산전서』에 쓰여 있는 한 문구로서 어렴풋이 풀렸다. 그 글은 다음과 같다. “군자의 학문은 위기爲己일 뿐이다. 위기’란 무엇인가? 하는 바 없이도 저절로 이루어지는 경지이다. 마치 깊은 산 무성한 숲 속에 한 포기의 난초와 같은 것이다. 종일토록 향기를 품으나 그 자신은 그 향기로움을 의식하지 못하는 것으로, 바로 군자의 위기의 의리에 부합하는 것이니, 마땅히 깊이 체득할 일이로다. “원문: 君子之學, 爲己而已, 所爲爲己者, 無所爲而然也. 如深山茂林之中, 有一蘭草, 終日薰香, 而不自知其爲香, 正合於君子爲己之義, 宜深體之”
“깊은 산 무성한 숲 속의 한 포기의 난초”와 같은 존재의 구도! 이 구도가 퇴계와 퇴계종택이 입지한 비밀의 열쇠이다. ‘심산무림지중’은 바로 상계이고 ‘유일 난초’는 곧 퇴계 자신이 아닐까? 그렇다면 퇴계에게 ‘심산 무림 속’은 왜 필요한가? 바로 ‘위기지학爲己之學’ 때문이었다. ‘위기지학’이란 무엇인가?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자신을 위하는 학문’이다. 바로 ‘경敬’ 실천의 학문이다. ‘경’은 유가의 선禪이라 할 수 있다. 선과 매우 닮아 있다. 경 실천을 ‘거경居敬’이라 했다. 거경과 참선의 궁극은 무엇인가? 모두 인생의 길[道]을 찾기 위함이다. 길을 구함이 ‘구도求道’이고 찾음이 ‘득도得道’이다. 도는 진리이고 진리를 찾음이 구도이다. 구도의 첩경은 ‘고요’였다. ‘고요가 온존한 지역! 그렇지만 그 고요는 산중 절 집 같은 곳은 아니었다. 인가가 집성한 동리는 더욱 아니었다. 동리도 산중도 아닌 그 완충지점의 ’심산 무림 속‘이 위기지학을 할 수 있는 적지였다. 강이 멀리 있지 않고, 곁에 개울이 알맞은 산으로 둘러싸인 곳, 요컨대 ‘산수의 조화’ 는 가거지지可居之地의 절대 조건이었다. -이성원, 「토계로의 여행」-
이 글귀를 보니 어느 정도 의문이 풀렸다. 역시 퇴계학 전문가가 느끼는 감각은 다르다. 뭐든지 한곳을 열심히 하면 전문가가 되는 것이다. 종손은 도산전서를 20년이상 읽었다고 한다.
퇴계종택의 대문에는 다른 종택에서는 잘 볼 수 없는 글이 있다. 종택 대문 위에 烈女通德郞行司 署直長李安道妻恭人安東權氏之閭(열녀통덕랑행사 서직장이안도처공인안동권씨지려)란 긴 정려 글씨다.
대문위 정려문
열녀는 퇴계선생의 손부 권씨이다. 즉 이안도(李安道)의 부인이다. 권씨는 남편이 죽은 후 밥을 먹지 않고 좁쌀미음으로 연명했다. 머리는 빗질을 하지 않은 채 23년을 띠를 풀지 않았다. "내가 죽지 못하고 명을 이어가는 것은 다만 후사(後嗣) 때문이다. 만일 후사를 세우지 못하고 죽으면 저승에서 무슨 낯으로 그이를 대할 것인가!" 했다고 한다. 결국 후사는 조카 억으로 결정되었다. 억이 혼인하여 며느리와 함께 들어오는 날 목욕재계한 후 소복을 입고 자결했다. 열녀 정려는 초상 중에 내려왔고, 부인의 시신은 열녀문을 나와 발인되었다. 이 열녀 부인 때문에 퇴계종택의 제례는 '중포(中鮑)'로도 유명하다. '포를 상 가운데 놓는 것'을 말한다. 부인이 홀로 제사를 지내는데 자꾸만 상머리의 포가 적삼의 소매에 걸려 떨어져서 그만 포를 가장자리로 옮겼는데 그것이 상계파의 전통이 되었다는 것이다.
퇴계선생의 계보를 보면 큰아들 준(寯)의 장남인 안도(安道)가 아들이 없이 죽자 셋째아들인 영도의 둘째 아들 억으로 하여금 대를 잇게 한 것이다. 따라서 하계파나 상계파나 모두 퇴계선생의 셋째 손자 영도의 후손인 셈이다.
계보를 정리하면 ?이황(李滉) - 준(寯) - 안도(安道)-(상계파) - 순도(純道)-(의인파) - 영도(詠道)-(하계파) ?퇴계종손 계보 李安道- 억 - 命哲- 고 - 守謙- 世德- 龜應- 志淳- -彙寧- 晩憙- 中慶- 忠鎬- 源慤- 東恩(현 종손)- 根必- 致億
하계파의 시조인 동암 이영도(東巖 李詠道,1559-1637)는 형이 죽으면 동생이 잇는다는 이른바 형망제급(兄亡弟及)의 관행을 적용하는 것을 거부했다. 큰집을 지키고자 했기 때문이다. 동암은 원주목사 등의 관직을 지내면서도 홀로된 형수를 돌보았다. 그리고 둘째아들 억을 성장시켜 혼인과 동시 큰집에 양자로 보냈다. 따라서 지금 퇴계 후손이란 의인(宜仁, 도산면 의인리)파를 제외하고는 상계, 하계, 원천, 단천, 섬촌, 부포 모두가 동암의 자손이다. 하계파는 퇴계선생이 아니라, 동암을 불천위로 제사를 지내고 있다고 한다. 이처럼 하계의 자부심은 이런 혈연적 문제가 하나의 요인으로 작용했다. 이는 하계문화 형성의 근본 토대였다.
진성 이씨 전체 문과 급제자는 55명이고 그 중에 안동 출신이 48명이다. 이중 퇴계 후손이 33명(의인파 포함)이고, 그 가운데 하계출신이 15명(계남2명 포함)이다. 퇴계 후손이 진성 이씨 절반을 넘고 하계는 그 절반에 가깝다. 후평파, 동막파, 마애파, 두루파, 노송정파, 송당파, 온계파 등 다른 파는 말할 것도 없고, 상계, 원촌, 단천, 의인, 섬촌, 부포 등의 다른 퇴계 후예들의 집성마을들과도 비교가 되지 않는다.
하계는 일제 강점기에 독립운동의 산실이었다. 3대 독립운동가로 유명한 향산 이만도(李晩燾)가문을 비롯하여, 순절한 이중언(李中彦)과 더불어 이만원(李萬源), 이목호(李穆鎬), 이운호(李雲鎬), 이용호(李用鎬), 이열호(李烈鎬), 이비호(李丕鎬), 이동봉(李東鳳)등 허다한 인사들이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하계의 독립운동은 정말 찬연하다. 이런 정신이 원촌의 육사(陸史 李源祿)를 낳았다. -이성원의 ‘토계로의 여행’에서 요약 정리-
하계파가 얼마나 대단한가는 위의 통계를 보면 알 수 있다. 이러한 하계파의 대단한 자부심은 어디에서 연유한 것일까?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그 중에서도 이성원님의 말대로 혈연적인 요인-상계는 동암의 둘째아들이 이었고, 하계는 큰아들이 이은 관계로 실질적인 종손은 하계라고 생각하는 것, 또한 무시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계는 병호시비에서도 호파를 지지했고, 상계는 병파를 지지했다고 한다. 또한 차례상의 중포도 하계는 따르지 않는다고 한다.
종택 대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면 秋月寒水亭(추월한수정)이라는 현판이 붙은 건물을 만난다. 1715년에 도산서원 원장인 권두경(權斗經)이 종손 이수겸(李守謙)과 논의하여 영남사림의 모금으로 지었다.
추월한수정
'秋月寒水亭'의 편액은 고봉 기대승(高峯 奇大升)의 '先生之心 如秋月寒水 (선생지심 여추월한수. 선생의 마음은 마치 물에 비친 가을 달과 같다 )'에서 취했다고 한다. 이는 주자(朱子)가 '恭惟千載心 秋月照寒水( 공유천재심 추월조한수, 천 년을 전해 내려온 마음이 마치 물에 비친 가을 달과 같다)'라는 주자의 시 한 구절을 인용한 것이다. 그리고 기대승선생은 이 한 구절에서 "성현의 전심(傳心)의 묘를 터득할 수 있고, 이 심법(心法)을 전수한 사람은 오직 퇴계선생 한 분 뿐이다"라고 했다. 이는 우리나라 성리학의 자부심이다.
도학연원방
퇴계선생의 정맥을 보면 요순우탕으로 시작하여 주자에서 끝이 난다. 이는 바로 요임금에서 출발하여 주자까지는 중국에서 이어져 오다가, 주자에서 퇴계로 넘어왔다는 의미다. 이는 도가 중국에서 우리나라로 바로 넘어왔다는 의미도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곳의 현판에 도학연원방이 있는 것일게다.
종택을 나와 안동댐 근처에 있는 음식점에서 안동의 전통음식인 간고등어와 헛제삿밥을 먹었다. 다들 좋아한다. 이젠 숙소인 임청각으로 향했다. 임청각 앞에는 국보 16호 신세동칠층전탑이 있다. 다들 신기해하면서도 안타까워한다. 명색이 국보가 철길에 막혀 답답한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임청각 전체를 다 빌려서 방 배치를 했다. 배치할 때 3정승을 낳았다는 우물방은 처녀 선생님과 앞으로 출산계획이 있는 선생님이 차지를 했다. 남자들은 모두 군자정에 배치를 했다.
임청각 여자 노비들의 공간(비가 내리는 모습)
모두 군자정에 모였다. 먼저 임청각에 대한 설명을 했다. 다들 침통한 분위기가 되었다. 이 분위기를 반전시키기 위해 출발할 때 가지고 온 자연산 회 파티를 했다. 이 한 여름에도 얼음이 녹지 않고 그대로 있어 회의 신선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역시 소주 안주에는 회가 최고인 것이다.
어느 정도 분위기가 무르익자 근처에 있는 노래방으로 향했다. 요즈음 우리 문화는 놀이에서 노래가 빠지면 놀이를 하지 않은 것이다. 30여 명이 한꺼번에 들어갈 수 있는 노래방을 찾는다고 시내 방향으로 30분 이상을 걸었다. 마침 안동 시내가 다 내려다보이고 낙동강 줄기가 훤히 보이는 노래방을 구했다. 누구 한 사람 빠짐없이 한 곡 이상은 다 불렀다. 처음부터 끝까지 아픈 팔에 붕대를 감고도 춤을 추는 모 부장님 등등 자신이 갖고 있는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아무리 재미있는 놀이도 너무 지나치면 탈이 난다. 중용지도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삼삼오오로 택시를 타고 임청각으로 왔다. 임청각 앞에 와서 보니 훤한 16일 보름달이 너무나도 매혹적이다. 조정댐에서 나는 물소리와 어우러져 환상적인 풍광을 뽐내고 있다. 이에 강으로 내려갔다. 여름날 밤의 강가는 정말 시원하다.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다가 내일을 위해 다시 임청각으로 들어와서 잠을 청했다.
My Heart Will Go on / Celine Dion
Every night in my dreams 매일밤 꿈속에서 I see you, I feel you, 나는 당신을 보아요, 그리고 느끼지요 That is how I know you go on, 그래서 나는 당신이 어떻게 사는지 알아요 Far across the distance and spaces 당신과 나 사이에 있는 between us 먼 공간을 가로질러 You have come to show you go on 당신은 당신이 어떻게 사는지 보여주러 오지요 Near, far, wherever you are, 가까이 있든, 멀리 있든, 당신이 어디에 있든 I believe that the heart does go on. 나는 그 마음이 계속 변치 않을 것이라고 믿어요 Once more, you open the door 한번 더, 당신은 문을 열고 And you're here in my heart, 여기 내 마음속에 있지요, And my heart will go on and on 그리고 나의 마음도 계속 변치 않을 거예요 Love can touch us one time 사랑은 한번 우리에게 다가와 and last for a lifetime, 일생동안 계속될 수 있어요 And never let go till we're gone. 그리고 우리가 저 세상으로 갈 때까지 결코 떠나지 않지요 Love was when I loved you, 사랑은 내가 당신을 사랑할 때 one true time I hold to 내가 간직하는 진실한 순간이예요 In my life we'll always go on. 나의 삶에서 우리는 항상 변치 않을 거예요 Near, far, wherever you are, 가까이 있든, 멀리 있든, 당신이 어디에 있든 I believe that the heart does go on. 나는 그 마음이 계속 변치 않을 것이라고 믿어요 Once more, you open the door 한번 더, 당신은 문을 열고 And you're here in my heart, 여기 내 마음속에 있어요, And my heart will go on and on 그리고 나의 마음도 계속 변치 않을 거예요 You're here, there's nothing I fear, 당신은 여기에 있어요, 나는 두려울 것이 없어요 And I know that my heart will go on. 그리고 나는 알아요 내 마음이 변치 않으리라는 것을 We'll stay forever this way, 우리는 이렇게 영원히 머물거예요 You are safe in my heart, 당신은 나의 가슴 속에서 안전하게 있어요 And my heart will go on and on. 그리고 나의 마음은 계속해서 변치 않을 거예요 |
출처: 황교장의 명리학 여행 원문보기 글쓴이: 황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