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天安門 그리고 廣場",
천안문과 광장, 베이징의 중심.
얼마나 클까- 축구경기장 70배가된다고....
광장의 넓이 40만㎡, 계산을 해보자.
국제축구 경기장 넓이가 8250㎡(길이110m, 너비75m)
이를 나누면 48.4848....이 되니 약 48.5배인 셈,
그러나 일반 축구경기장은 100×64이므로 62.5배인 셈이다.
천안문을 북쪽으로 중앙에 인민 영웅 기념비가 있고 남쪽으로
모 주석 기념당, 그리고 동서양쪽에 중국역사 박물관과 중국
인민대회당이 위치하고 있다.
광장에서 장안 대로를 건너 북쪽으로 천안문이 있으니 한가운데
황제가 출입하던 문위 성루에 지금은 모택동의 커다란 사진이
걸려있고 그 좌우로 다음과 같은 표어가 붙어있다.
'中華人民共和國萬歲, 世界人民大團結萬歲'
과히 대륙다운 문구로 여겨진다.
옛날 황제가 조서를 내리던 이곳 성루,
1949년 10월 1일. 모택동이 중화 인민공화국의 개국을
선포한 곳으로 중국인들은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천안문 광장의 또 하나 볼거리는 국기를 게양하고 하강하는
모습이라는데 보지 못하여 못내 아쉬웠다.
오육십 여만명이 능히 운집할 수 있다는 이 광장에 두 번의
큰 사태가 있었으니 이른바 1976년 4월의 1차 천안문사건이요,
그 후 13년이 지난 1989년 6월의 2차 천안문사건이 그것이다.
76년4월5일 저우언라이(周恩來)사망 후 북경시민들은 광장에 모여
그의 사망을 애도하며 국가 4인 방을 비방하는 대자보가 광장에
붙었고 4인 방은 그들의 권력장악을 위해 이를 제한하고 화환을 없애
버렸는데 시민들이 이를 분노 4월 청명절에 이르러 이백 여만명이
북경시가지로 몰려 나왔고 이에 당황한 공산당은
화꿔펑(華國鋒)을 국무원 총리로 임명하고
덩샤오핑(鄧小平)에 책임을 물어 실각시킴과 동시 이를 반혁명적
사건으로 규정하였는데 이후 대륙에 개혁개방이 움트기 시작하여
등소평의 명예가 회복되고 사건이 혁명운동으로 인정되면서 지도권을
다시 위임받았고 시민들에게 있어 이는 다시 자유와 민주주의에 대한
갈망으로 바뀌게 되었는데 다시 나붙기 시작한 대자보에 등소평을
살아있는 주은래'로 칭하면서 이른바 '북경의 봄'을 그리고 있었음.
물론 이는 등소평의 지위을 강화시켜 주었고 등소평도 초기에는
긍정적이었으나 한편으론 당시 웨이징셩을 비롯한 민주화의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는 통제불능의 사태 및 자신이 추구하는 사회적 안정과
경제에 도움이 안된다고 판단, 79년 미국방문 직후, 운동을 탄압하고
웨이징셩을 구속하기에 이르렀음.
다시 강산이 바뀌어 1989년 4월, 개혁파로 비춰진
후야오방(胡耀邦)이 사망하자 팡리즈(方勵之)등 지식인을 중심으로
그의 명예회복과 시민들의 민주화의 열망으로 다시금 베이징시민
사범대학생을 비롯한 각계 각층들이 천안문에 모여 호요방에 대한
애도의 뜻과 시위를 하기 시작하였는데 때를 같이해 소련의
고르바쵸프가 베이징을 방문 하였으나 백만명이 넘는 시위로
말미암아 일정을 변경하는 일이 벌어지고 급기야 당국은 난동으로
규정 계엄을 선포하기에 이르렀고 학생들의 편에 있었던
자오쯔양(趙紫陽)의 행방이 묘연한 가운데 등소평의 후계자로 알려진
양상쿤(楊尙昆)주석과 리펑(李鵬)부총리가 주도권을 잡으며 6월
인민 해방군을 동원 무차별 발포로 텐안먼쾅창의 시위군중을 살상으로
해산시켰으니 이후 미국 등 유럽 서방세계의 이 비인도적 처사에
항의와 강한 비난은 이후 대륙의 경제 발전에 발목을 잡았고
천안문사건은 고르바쵸프의 민주노선과 폴란드의 정권교체와 더불어
공산주의의 위기를 암시하고 있으며 권력구도와 맑시즘에 대한
전반적인 고찰을 요구한다는 타임지의 논평을 빌려 이상 얘기를
마치기로 한다.
다만 서기 2002년은 그로부터 다시 13년이 되는 해,
저 대륙에 이미 불고있는 민주화의 열망과 완연한 봄은 과연
언제 올 것인지-
오늘 평온한 이 광장에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
갔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서글픈 생각이 드는 것이다.
중국 사람들의 생활상은 어찌 보면 아직은 단순한 것 같다.
물론 여유 있는 생활 을 하는 사람도 많을 게다.
교수님의 말을 빌리자면 중국 인구의 10%가 절대 부자요
절대 빈민이라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면 10%, 대략 1억3천쯤 중에 절반 그러니까
6천5백만명은 세계 어디 내세워도 부자요 또한 절반인 6천5백만은
아사직전의 빈곤층이라는 것이다.
나머지 90%는 서민층인 셈,
남녀가 동등하게 일하는 이 나라에서 일 보담 일할 사람이 많음은
당연한 일. 하루 이 교대 삼 교대로 아니 시간제로 직장 생활을
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라면 당연히 받는 임금도 낮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또한 당연히 중국의 남자들은 가정에서 가사 일을
돌보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처럼 남편이 돈을 벌어 대부분 부인에게 열쇠를 맡기는게
아니라 남편이 번 돈은 남편이 아내가 번 돈은 아내가 관리하는게
보통이라고 한다.
당연히 가사 일도 같이 해야 하는데 이이가 없는 것이다.
중국사람들은 하루 세끼 중 저녁을 정찬으로 모든 식구들이 같이 식사를 한다.
노동자의 대부분이 아침 일찍 부부가 모두 일터로 가기 때문에
음식을 만들어 같이 나눌 시간적 여유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아침은 비교적 간단하게 공동식당에서 대충 끼니를 채우고
출근한다는 것이다.
앞서 얘기한 천진의 꾸부리 만두도 이들을 맞기 위해 아침
일찍부터 문을 여는 것이다.
각 동네마다 있는 공동식당에서 아침을 해결하는 것이다.
아침의 식단은 간단하다.
자색미(붉은쌀)로 만든 죽 한 그릇이나 양고기 내장탕 한 그릇
아니면 콩국이나 두부탕 한 그릇를 곁들여서 반죽된 밀가루를 쪄서
만든 둥그런 빵, 밀가루를 과베기 처럼 꼬아 튀겨 콩국과 먹는
길다란 빵, 油條(요우티아오). 아니면 고기나 야채로 만든
만두를 먹는다.
아주 간단한 아침식사의 모습이다.
물론 다 그렇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明十三陵"얘기부터 먼저 하자.
빠다링에 이어진 산기슭에 한눈으로 보아도 명당일 것 같은 들판이
있고 여기에 규모가 어마어마한 13기의 묘가 있다.
이름하여 '명13능'- 明 태조 '주원장'의 선친부터 이백 여 년 동안
이어진 명나라 13명의 황제들이 잠들어 있다.
묘들이 거대한 산을 이루면서 기기묘묘한 향나무 숲으로 꾸며진
이 곳을 사람들은 '밍시싼닝뿌우위엔'이라 부른다.
그 중에서 가장 큰 규모의 장릉과 다음으로 큰 정릉이 개방되어
있는데 마치 지하 궁전과도 같은 내부를 완전히 관람토록
아니 만들 때부터 내부로 들어갈 수 있도록 설계되어진 것이다.
장릉이 누구의 것인가.
명나라 3대 황제인 영락제가 잠든 곳이다.
난징에서 북경으로 천도하여 자금성을 조영한 황제.
물론 많은 부장품들이 출토되었겠으나 아직도 지하궁전과 황제의
유체는 발굴되지 않고 있다고 전한다.
그것은 아마도 나중에라도 알 수 없게 설계한 당시 사람들의
지혜라고 보면 맞을 것이다.
그에 비하면 정릉은 13대 신종만력제와 그의 두 명의 황후가
잠들어 있다 한다.
장릉과 달리 지하궁전이 완전히 발굴되어 관람이 가능하다.
지하궁전의 깊이가 20미터, 폭이 최대 47미터, 길이가 88미터.
13능의 정문으로 들어가면 12개의 문관의 석상과 사자 코끼리 등의
여러 동물의 석상은 단순히 능묘의 장식이기 보담 당시 사람들은
아마 사후에도 황제는 모든 것을 지배한다고 본 듯도 하다.
"명13능"을 내려오면서 택시 기사의 점심 식사로 식당을 들렸다.
기사가 식사를 하는 동안 우린 차에서 쉬고있었는데
난 이 외진 식당의 화장실이 보고 싶었던 것이다.
볼일을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흔히 말하는 '니 하오 화장실'을
보기 위해서다.
'니 하오'는 우리말로 '안녕'이라는 뜻이다.
점잖지 못하게 화장실에서 안녕 이라니-
그러나 화장실에 칸막이가 없고 들어오는 사람을 서로 보면서
볼일을 본다고 생각해 보라.
중국시골을 여행하면 가장 불편한 것이 화장실 사용이라고 한다면,
'왕부징' 거리에 있는 백화점에도 얼마 전 까지만 해도 일반화장실이
없었다 하면 쉬이 믿을 수 있을까,
그건 분뇨처리도 처리이지만 쇼핑을 한 후 빨리 돌아가란 얘기이다.
왜- 13억의 인구니깐 말이다.
아직도 외곽지 화장실은 여전히 '니하오화장실'이 있었고,
참고로 중국말로 "화장실이 어디에 있습니까?"를 배우고 가자.
가장 무난하게 "衛生間 在 那兒?"(웨이성 지엔 짜이 나알?)하면
될 것이다.
말이 나온 김에 '王府井' 이야기를 하자.
왕부징은 북경시에서 가장 번화한 거리다.
옛날 서울 명동거리만큼이나 번화한
대구로 치면 '동성로 거리',
한 오백여 미터 길이에 폭이 오십여 미터-
베이찡서 아니 중국에서 가장 큰 백화점 '新東安市場'과
'北京百貨大樓'이 있고 '北京全聚德'(북경오리구이로 유명)과 대형
가전제품매장 및 음반판매장 대형서점 등 중심지다운 면모에다
뒷골목엔 '먹자골목'이 길다랗게 자리하고 있다.
본디 왕부징은 황제의 가까운 친족들 '왕야'들이 모여 살았던 곳으로
당시 사람들이 먹던 우물이 있어 우물 '井'자를 붙여 부른 것,
지금도 그 당시의 우물자리가 표시되어 있다.
신 동안 백화점은 지금 생각하니 지하3층 지상 십여층 건물로 지하는
민속관으로 중국의 역사 민속자료들의 전시와 옛날 중국인의 음식 및
생활상등을 적나라하게 꾸며 이 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
마련해 놓았고 물론 음식을 만들어 팔기도 하고 온갖 조각 및 손재주
꾼들이 직접 만든 여러 장식품과 수공품들을 판매하는 공간이었고,
지상 층은 여느 백화점처럼 갖가지 물건 판매와 함께 극장과 춤추는
공간 그리고 상층에 여러 유명 음식점과 시내를 구경온 사람들의
서민을 위한 음식점으로 가득했다.
지상 십여층이라고나 하나 우리건물 십오육층 이상의 높이로 한층의
높이 및 공간이 매우 넓고 높았다. 높이는 동아쇼핑 정도며 전면이
대백프라자 세로길이의 1.5배 크기쯤 되는 것 같다.
최근 들어선 건물로 한쪽부분은 아직 공간으로 남아있고-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