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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문제 [마18;8-9절 ]
시대가 바뀌고 인간의 사상이 변하며 인류가 날로 발전해 가지만 실상은 하나님앞 에서의 인간의 본성과 예수 그리스도라는 진리는 언제나 그대로입니다.
때로 반대자들에게 진리가 고집이 세고 확고 하다
“ 독선과 아집” 이라는 말까지 들을 정도이니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진리와 타협할수 없다.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진리는 우리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 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시대에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분별력을 가져야 하는가을 생각해야 합니다.
진리는 한결같고, 변하지 않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벧전3;15]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복음만이 참으로 이성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은 어떤 존재 일까?
지금 살아가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문제에 대한 바른 성찰하기 위해서 이런 질문을 합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문제는 무엇이고
그 문제의 해결하기 위한 방법을 없는가?
불과 150년전 까지 만해도 성경이 말하는 인간의 견해는 거의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졌으나
롬3;23]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오늘날 유행하는 인간의 본성에 대하여 급속히 거기서 벗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알수 있습니다.
오늘날의 관점은 “ 자아표현에 대한 숭배” 라는 말이 적합할 것입니다.
출20; 4]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이런 인간사는 “ 거의 모든 영역에 침투하여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지금 세계는 갈등과 분쟁으로 전쟁의 광기가 거세게 몰아치고 있습니다.
세계 곳곳에서 힘에 의한 문제해결 방식으로 폭력이 만연되고 있습니다. 세계 곳곳에서 주민들의 삶의 터전을 분열시키고 파괴하고 있습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하마스의 이스라엘 공격,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무차별 공습과 전면 봉쇄 등은 그곳에 사는 주민들의 삶의 터전을 파괴하고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몰고 있습니다.
20세기 초, 1차,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수천만 명의 인명과 재산을 잃고 나서야 우리가 얼마나 비인간적인 행동을 했는지를 뒤늦게 깨닫고, 평화, 안전, 인권, 인도주의에 대한 국제적 합의를 이끌어 내었습니다. 그런데 한 세기도 지나기 전에 우리는 과거의 어리석음을 잊고, 또 과거와 같은 비인간적인 행동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세계는 다시 편을 가르고 적대적 군사충돌을 합리화하고 있습니다. 나만 옳고 상대는 그르다며 ’악마화’를 부추기고 있습니다.
특히 피해를 입었다는 이유로 수십 배로 복수하는 대량 인명 살상을 정당화하고 있습니다.
이것 지원하는 나라들의 모습은
“ 자아[자기 자신에 대한 의식]표현에 대한 숭배”을 바르게 이해하는 열쇠입니다.
이런 사상은 “비록 다른 사람들이 희생된다 하더라도 자신에게는 스스로 표현할 권리가 있으며, 그러므로 자신이 하고 싶은대로 하는 것은 정당하다” 는 주장에서 비롯 되었습니다.
이런 사상은 오늘날 교육현장에서도 “ 체벌을 가하는 교육 방법을 거의 찾아볼수 없고,
교육이란 방법으로 ” 자신을 표현하는 훈련을 시키는 것. 개념이 퍼지 면서 “ 부모가 자녀들을 통제 할수 없게 되었고ㅡ 청소년 범죄가 날로 증가 하게 되었습니다.
20세기 이전에는 어떤 사람이 자신의 옳치 못한 행동을 하면 그 죄을 고백하거나 변명의 여지 없이 솔직히 인정했습니다.
더욱기 자신의 죄을 회피하면서 죄에 대한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을 강조 하면서 죄 자체을 인정 했습니다.
죄는 어떤 잘못이든지 수치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죄에 대한 왜곡을 “자아표현에 대한 숭배 자들에게 “ 더 이상 죄는 어떤 잘못이나 수치스러운 것이 아니요 인간의 다양한 능력 ,기능, 본능,이고 이런 능력을 발휘할 때 ”인간의 최고의 선 “ 이라고 주장 합니다.
자연적이고, 본능적이다. 이런 주장을 굽히지 않는다.
이런 주장은 이제 아무런 망설임이 없습니다.
오늘날에는 이런 인생관을 가진 사람들은 전세계에 셀수 없을정도로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견해가 호소력 있다고 생각 합니다.
그럼 이런 자아 표현의 사상을 하나님의 관점은 냉철합니다.
마18;8-9절 ]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장애인이나 다리 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여기서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나으니라”
그리스도 께서는 “ 너” 라는 단어을 말하면서 너를 “ 네 눈이 ” 범죄케 한다면
지금의 현대 사상은 옳고 그름에 대한 인식하게 하는 양심을 무시하게 만듭니다.
그럼 책임도 없어 집니다. .왜? 양심에 대한 책임이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짐승과 구별되는 것은 인간의 양심입니다.
사자가 자기 새끼을 배가 고프다고 잡아 먹습니다.
왜? 양심도 없고 본능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양심이 다른 능력을 통제하고 활용해야 합니다.
인간은 충동과 본능에 똘똘 뭉쳐진 존재가 아닙니다.
그보다 한없이 크고 측량 할수 없을만큼 위대한 존재입니다.
인간의 참된 자아는 충동을 본능을 통제하고 관리가 필요하고 그것에 따라 사용할수 있는 능력과 불멸의 영혼을 소유한 존재입니다.
인간의 발은 얼마나 유용한 도구 인지 모릅니다. 발은 분명 인간의 삶에 도움이 됩니다,
사람이 선한일을 하기 위해서 다닐 때 발로 걸어 갑니다. [연탄 나르기..]
그런데 부도덕한일 악을 널리 퍼뜨리는곳을 갈 때 그 발을 사용한다면 자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나쁜짓 할 때 그발을 사용합니다.
인간의 손은 좋은일을 많이 할수 있습니다.
악수하고 , 위로하고 ,등을 다독이기도 합니다. 시원한 물을 주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손이 돌연 주먹으로 상대을 가격할수 있습니다.
그 손이 총을 가지고 사람을 죽일수도 있습니다.
손과 발은 나쁜 것이 아니지만 죄가 들어오면 그손이 발이 인간을 파면시킬수 있는 도구가 됩니다.
인간의 눈은 인간을 개발하게 하고 , 자연의 아름다운 세계을 감상할수도 있습니다. 사랑스런 미소, 사랑 하는 사람을 바라보고 기뻐할수 있습니다.
그러나 쉅게 정욕에 빠진다면 극악한 죄을 범할수 있다,
눈은 나쁜 것이 아닌데 죄로 인한 결과 저주의 원인 심판의 결과가 될수 있다.
그런데 이런 죄을 무시한다는 결과는 얼마나 어리석운 것 입니까?
만약 죄을 무시하고 인간의 괘락만을 위해 살아 가다면 ,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옭고 그름이 아닌 괘락만을 위해 살아 간다면
복음이 주는 참된 자아가 주는 기쁨, 평안, 확신을 없습니다. ‘
부모는 어린아이 에게 기쁨이 되는 것 만 주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어린아이는 “ 자신의 기쁨을 주는 것” 만 생각 합니다.
그러난 부모는 자녀의 즐거움이 너무 자주 해롭거나 철저하게 거짓되고 추악하게 할수 있다고 생각되면 통제 합니다.
그러나 어린아이는 그런 규제와 어려운일에 맛서는 것을 멀리 합니다.
그런 삶을 살고 싶지 않습니다.
단지 자기 자신을 표현하면서 옳은 행동이라고 강변 하면서 자기가 하고 싶은대로 하려고 합니다.
그 기준은 “ 오직 쾌락”입니다.
그것을 위해 그것이 정당한지, 안전한지, 자신에게 모든 부분이 발달을 돕는지 묻지 않습니다.
오직 한가지 “즐거운” 줄수 있는가 이것 하나면 충분합니다.
성경은 이것은 완전한 자멸을 초래 한다고 합니다.
“지옥 불에 던져지는 것”
자신의 양심이 질식시키고, 이성이 죽이며,
그런다면 그저 자신의 정욕과 쾌락에 대한 열망만을 만족키면 살기 원합니까?
그런 이런 생각은 “ 지옥으로부터 초청장이 올 것입니다.
세상은 인간을 짐승과 같은 수준으로 전락시키고,
거룩한 재판관을 대항해 그분을 거스리게 만들고 , 결국 영원한 죽음으로 이끕니다.
이스라엘왕 다윗이 괘락이라는 기준을 따라 살 때 ,도둑과 살인자가 되었습니다. 이게 참된자아의 표현 입니까?
어거스틴이 타락한 철학자 였을 때 참된 자아을 잘 표현 했습니까?
예수님은 자신의 손과 발을 통제하지 못한“ 너을” 책망하면서 정욕과 악한 욕망의 기로 인도하는 자신의 눈을 빼어 내버린후에 자신의 참된 자아가 무엇인지을 잘 표현 하고 있습니다.
복음은 자기을 부인하라 절제된삶을 살아라,
불현 듯 일어나는 충동과 본능을 억제하고 조절하라고 합니다.
그들은 복음의 가르침에 순종 했습니다.
자신을 훈련하고‘
이성을 사용하고
기도 할뿐만 아니라
자신의 양심에 귀을 기울이세요[성령이 주시는...]
데밍 여사[기도하시는 성도]는 런던 백화점을 돌다가 한 옷 가게에서 옷을 팔고 있는 아름다운 아가씨를 보는 순간, ‘하나님의 딸이 지금 하나님을 떠나 있구나.’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여사는 그 가게에 들어가 그 아가씨에게 맞을 만한, 아주 비싼 옷 한 벌을 사서 아가씨에게 주며 말했습니다.
“아가씨가 이 옷을 입으세요. 그리고 낡아서 못 입게 될 때 제게 돌려주세요.”
데밍 여사가 고급 옷을 사서 자기에게 주니 아가씨가 깜짝 놀랐습니다.
“손님, 이 옷은 손님께서 사신 것인데 다 낡아서 못 입게 될 때 돌려 달라는 말씀은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가씨, 내 느낌에 의하면, 예수님께서는 오래 전에 예수님의 보혈로 아가씨를 샀습니다. 그런데 아가씨는 자신이 낡아서 못 쓰게 될 때나 예수님께 오려 하고 있군요.”
그러자 아가씨가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습니다.
“제 어머니께서 세상을 떠나신 다음에 처음 들어보는 말이에요.”
아가씨가 그날 하나님께로 돌아왔다고 합니다. 그를 위해 탄식하며 기도하신 성령님의 기도 응답인 줄로 믿습니다.
모든 선한일에 대한 열망으로 자아을 표현하고
이것이 세상 사람들이 여러분을 바보라고 할찌라도
이것이 “ 인간”이라고 할수 있고, 자신을 표현할수 있는 가치을 소유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 자아가 날마다 성장하게 될 것입니다.
눅4;4 ]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였느니라
사람은 떡으로만 살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 쾌락” 만으로 사는 것은 아닙니다.
진정으로 살려고 한다면 인간의 본성의 모든 부분을 사용하고 움직여야 합니다.
그렇치 않으면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요셉이 애굽에서 종살이를 할 때 주인아주머니가 젊은 요셉, 혈기왕성한 요셉, 외로운 요셉을 유혹했습니다. 아무도 없는 집에서 요셉에게 동침할 것을 요구합니다.
그 때 요셉의 대답을 들어보면 요셉은 자기 분수를 아는 사람이었고,
하나님을 경외하던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창 39:8,9. “요셉이 거절하며 자기 주인의 아내에게 이르되 내 주인이 집안의 모든 소유를 간섭하지 아니하고 다 내 손에 위탁하였으니 이 집에는 나보다 큰 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뿐이니 당신은 그의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
요셉은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도 하나님이 자기를 보고 계심을 알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경외했기 때문에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이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고 지식의 근본이라고 말씀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인정할 만큼 세상적으로 지혜롭다 하더라도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다면 그는 지혜의 근본이 없는 사람입니다.
아는 것이 많아 척척박사라는 소리를 듣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지식의 근본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고 현대 “자아표현에 대한 숭배” 하는 생각은 자신의 최종적 으로 맞이하는 운명을 무시합니다. 현대 “자아표현에 대한 숭배”[ 우러러 공경함.]하는 생각은 철처히 현세적이고 인간의 관점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
마18;8 -9] 장애인이나 다리 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이어서“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께서 말씀 하셨습니다.
인간의 시각으로 자아 표현의 사조가 인간의 참된 자아을 철처히 모독 합니다.
우리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안에 있으며,
하나님은 영원한 재판장 이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본성을 주시고ㅡ 하나님을 닮은 어떤 실체을 주셨습니다.
그분의 형상을 따라 인간을 만드셨습니다 .
이것을 위해 어떻게 수행하실찌을 말씀 하십니다.
모세을 통해 도덕법으르 선지자들의 가르침과 예수님의 산상수훈을 그리고 성경을 통해 예수님의 삶을 얼마나 따르면 본받는지에 대하여 우리의 삶을 판단하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반드시 “ 당신의 자아로부터 어떻게 만들어는지?
당신은 그것을 어떻게 표현 했는지?
질문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 질문의 답에 따라 영원한 생명, 죽음 ..
천국과 지옥이라는 결과을 낳을 것이다.
만약 오직 본능에 따라 욕망에 따라 이끌려 살아 왔다면 여러분의 참된 자아는 이미 오랜전에 죽었을 것입니다.
사람은 참된 자아을 회복 시킬수 없습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하나님은 그 한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눅19;10]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우리을 위해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셨고, 죽으시고 , 부활하셨습니다.
우리는 죄을 범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훼손 시켜습니다.
마땅히 형벌을 받았야지만 주님은 우리위해 그 형벌을 받으시고 잃어버린 우리 영혼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새로운 본성을 주셨고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을 통제 인간의 참된 자아을 나타 내도록 우리에게 능력을 주셨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일시적인 쾌락을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참된 자아를 찾으라고 요청합니다.; 그 이유는 ?
“장애인이나 다리 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마1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