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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교양 스크랩 李承休의 帝王韻紀 고찰
심메마니 추천 0 조회 64 16.05.03 11:15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

 

 

 

李承休의 帝王韻紀 고찰

 

 

< 목   차 >
1. 머리말
2. 李承休와 ?帝王韻紀?
  1) 李承休의 生涯
  2) ?帝王韻紀?의 撰述 動機
3. ?帝王韻紀?의 구성과 내용분석
  1) ?帝王韻紀?의 구성
  2) ?帝王韻紀?의 내용 분석
4. ?帝王韻紀?에 나타난 특징
  1) ?帝王韻紀?의 詠史詩的 성격
   2) 文學史的 價値
5. 맺는말

 

 

1. 머리말

 

?帝王韻紀?는 1287년 李承休에 의하여 찬술되었다. 檀君神話를 수록한 가장 오래된 史書의 하나라는 점 때문에, 같은 시기에 찬술된 一然의 ?三國遺事?와 더불어 널리 그 이름이 알려져 있다. 고려 중?후기에 이르면 吳世文의 ?歷代歌?1]를 비롯하여 李奎報의 ?東明王篇??중국 역사에서 소재를 택한 ?開元天寶詠史詩? 같은 등의 영사시가 나타나는데, ?帝王韻紀?도 그런 흐름을 이어서 나타난 영사시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12~13세기는 연속된 內憂外患에 따라 국내질서는 극도로 어지러워져 上?下층이 괴리된 상태에서 민족정신은 쇠미해지고, 민족은 존망의 위기를 맞이한 난해한 시대이다. 이러한 시대를 맞이하여 투철한 歷史?현실인식을 지녔던 이승휴는 민족사의 재인식을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한편, 당대의 현실을 직시하면서 혼란한 시대를 극복하고자 ?제왕운기?를 창작하였다. 2]

 

지금까지 ?제왕운기?에 대한 先學들의 연구는 크게 보아서 國文學的인 측면3]과 國史學的인 측면에서4] 전개되어 왔다. ?제왕운기?가 역사문헌이라는 한정 된 틀에서 벗어나 문학작품으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60년대 중반부터이다. 그러나 國文學史나 國文學槪論類에서 단편적으로 언급되어 왔을 뿐, 개별적인 연구는 몇 편에 불과한 실정이다.

 

이처럼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지 못한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생각해 볼 수 있겠으나, 무엇보다도 ?제왕운기?를 주로 敍事詩라는 측면에서 파악한 나머지, ‘역사의 文學化’라는 관점에서 보려는 인식이 결여된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5]

 

본 발표에서는 이러한 선행연구를 바탕으로 ?제왕운기?의 詠史詩的인 성격을 살펴보고, 다음으로 작품의 구성과 내용을 살펴봄으로써 문학적 측면에서 이 작품이 지닌 성격과 그 가치를 탐구하고자 한다.

 

1]조동일, ?한국문학통사?, 지식산업사, 1991.

2]손정인, ?이승휴의 ?제왕운기?에 대한 이해?, ?영남어문학회?, 1988, p198.

3]朴斗抱, ?帝王韻紀小考 其一, 東國君王開國年代에 대하여?, ?박두포 교수 화갑기념문집 간행위원회?, 1986.

朴斗抱, ?帝王韻紀小考 其二, 本朝君王世系年代에 대하여?, ?박두포 교수 화갑기념문집 간행위원회?, 1986.

陳寧寧, ?제왕운기 연구?, ?한국어문학연구? 제9집, 이화여자대학교 한국어문학회, 1969.

崔斗植, ?韓國詠史文學硏究??, 태학사, 1987.

김경수, ?帝王韻紀?, 도서출판 역락, 1999.

4] 李右成, ?高麗中期의 民族敍事詩?, ?논문집?제 7집, 성균관대학교, 1962.

孫政仁, ?李承休의 帝王韻紀에 대한 이해?, ?영남어문학회?, 1988.

邊東明, ?李承休의 帝王韻紀 撰述과 그 史書로서의 性格?, ?震壇學會?, 1990.

車長燮, ?제왕운기에 나타난 이승휴의 역사관?, 삼척향토문화연구회, 1989.

5]孫政仁, ?李承休의 帝王韻紀에 대한 이해?, ?영남어문학회?, 1988.

 

 

2. 이승휴와 제왕운기

 

1) 이승휴의 생애

 

이승휴(1224~1300)의 자는 休休, 自號는 動安居士. 京山府 加利縣 사람으로 加利 李氏의 시조이다. 12세에 圓靜國師의 方丈에 들어가 申償에게서 ?春秋左傳?과 ?周易? 등을 익혔으며, 1252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다음해에 홀어머니가 있는 三陟縣으로 갔다가 마침 몽고의 침략으로 길이 막히자, 그 곳 頭陀山 龜洞에서 농사를 지으며 홀어머니를 봉양하였다.

 

1264년(원종5)에 이장용과 유경의 천거를 받아 慶興府 書記에 보임되었다. 1270년 삼별초가 봉기했을 때에는 軍需가 제대로 공급되지 않고 橫斂과 부역으로 백성들이 괴로워한다며 그 폐해를 極論하였다. 1273년에는 式目 錄事로 있으면서 당시 공이 없는 사람들이 관직에 超拜되는 것이 불가하다는 상소문을 초안했다가 오히려 파직되었다.

 

그러나 바로 그 해에 서장관으로 발탁되어 원나라에 다녀왔으며, 그 공으로 雜職令 兼都兵馬錄事에 제수되었다. 다음해에 원종의 부음을 전하기 위해 또 한 번 서장관이 되어 원나라에 使行했는데, 당시 원나라에 있던 세자가 胡服을 입고 장례를 치를까 염려해 상복을 고려식으로 하도록 권유하였다.

 

충렬왕 때에는 時政의 잘잘못을 15개조로 나누어 간쟁하였다. 이후 忠淸道 按廉使가 되어 뇌물을 받은 관리 7명을 탄핵하고 가산을 적몰했다가 원한을 사 곧 東州副使로 좌천되었다. 얼마 뒤 殿中侍史로 감찰사의 관원들과 함께 국왕의 실정 및 국왕 측근인물들의 전횡을 들어 10개조로 간언을 하다가 파직되었다. 그 뒤 다시 삼척현의 귀동으로 돌아가 은거하면서 ?제왕운기?를 저술하였다.

 

1298년 충선왕이 즉위해 개혁정치를 추진할 때 특별히 기용되었으나, 70세가 넘어 顯官에 제수되는 것이 국가의 제도에 어긋남을 들어 거듭 사직을 요청했고, 결국 같은 해에 致仕하였다. 그의 저작으로 본 발표의 주자료인 ?제왕운기?가 있고, 아들 李衍宗이 편집한 문집 ?東安居士集?이 전해지고 있다. 6]

 

이와 같은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이승휴는 당대의 新進士類로서 역사의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당시 복잡다단한 국제 관계 속에 걸어나온 민족의, 고난에 찬 역정을 몸소 체험한 인생행로를 엿볼 수 있다. 그러한 환경에서 저작한 ?제왕운기?는 심령적원천의 걸작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비록 현실에 눈을 감고 있었지만 그의 腦髓속에 아로새긴 민족의 애환은 그에게 역사인식의 생동을 어찌할 수 없게 했을 것이다.

 

6]?고려사, 열전, 이승휴?, 평양 아름출판사, 1964.

 

 

2) 제왕운기의 찬술 동기

 

이승휴는 ?제왕운기?의 찬술 동기를 스스로는,

 

或難曰 子之編修帝王韻紀 皆以七言敍事 而至於本朝 則用五言者 何也 其有指乎……今夫制作之意 始起於本朝 故終之以所起之始 盖夫子修春秋之志也 7]

 

遂乃古往今來 皇傳帝受 中朝則從盤古而至於金國 東國則自檀君而?我本朝 肆起根源 窮搜簡牘 較異同而撮要 仍諷詠以成章 彼相承授受之興立 如指諸掌 8]

 

라고 하였다. 이는 고려 당대 현실 인식에 대한 비판적 사고에서 ?제왕운기?의 찬술이 비롯되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만으로는, 찬술의 실제 동기가 무엇이었는지 잘 알 수가 없다. 고려의 현실이 어떠하였으며, 撰者는 이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던가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이 없기 때문이다.

 

이승휴는 또 자기가 살던 시대를,

 

徵問亂所由 난의 까닭 밝혀 묻고,

元廟復神器 원종이 寶位를 찾았도다.

勢似再乾坤 형세는 다시 순임금시대 같고,

事未論唇齒 순망치한 논함이 없네.

……

尋承窟降寵 곧 駙馬의 영광 얻으니,

盛矣賓王利 성대하다! 빈왕의 이익이여.

……

密勿啓風雲 힘써 풍운을 열고,

憂勤闡經緯 부지런히 정사에 힘썼네.

天妹理宮? 천자의 누이는 왕비가 되고,

帝孫作儲貳 황제의 외손은 세자가 되었네.

祖業更輝光 조업은 다시 빛이 나고,

皇恩遠漸漬 황은은 멀리 젖어 왔네. 9]

 

라고 읊었다. 쇠미해졌던 왕업이 충열왕대에 이르러 다시 빛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승휴는 당시에 대하여 중흥을 이룰 수 있는 시기로 인식하였던 것이다.10] 그런데 당시를 중흥의 시기로 인식하면서 ?제왕운기?를 찬술한 이유가 무엇이었던가? 그것은 當時는 무인정권의 붕괴와 삼별초난의 진압으로부터 얼마 되지 않은 시기였다. 왕정이 복고되고 몽고와의 화친이 성사된 바로 그 무렵이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제왕운기?를 찬술할 무렵의 이승휴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하자.

 

拜殿中侍史 條陳十事 又上疎極論利害 ?旨罷 歸龜洞舊隱 別構容安堂 看佛書 著帝王韻紀 內傳錄 11]

 

시사를 논하다가 파직된 이승휴가, 삼척의 귀동에 돌아가 은거하면서 ?제왕운기?를 지었다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이승휴의 생애를 감안할 때, ?제왕운기?를 찬술할 무렵의 그에게는 현실에 대한 불만이 있었을 것이다.

그의 불만은 파직의 빌미가 되었던 상소에서 ①충열왕의 사냥놀이 중지. ②忽赤?鷹坊과의 사치스러운 宴樂 중지. ③尹秀?祖英의 무례 처벌. ④學士宴 중지 등이 상서의 주된 내용이었다.12]

그런데 이들 내용 중 ④를 제외한 나머지 사항들은, 충열왕의 재위기간 중 줄곧 문제가 되었던 폐해들이었다. 충열왕과 그의 측근들이 자행하였던 이와 같은 폐단들 때문에, 끊임없이 물의가 일곤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각종 폐단을 일으켰던 주체는, 權貴, 權勢, 嬖幸 등으로 표현되는 인물들로 알려져 왔다. 이들은 대부분이 賤系 출신 인물들이었다고 한다. 아울러 이들이 국왕의 측근세력으로서 충열왕의 총애를 받았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음도 밝혀져 있다.

한편 충열왕대에는 이승휴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충열왕 측근들이 자행한 각종 폐단을 시정하자는 요구를 하였다. 그래서 이들은 이승휴와 함께 처벌을 받았다. 이들은 대부분 登第한 문신으로서 臺諫職에 있었다. 이처럼 고려의 현실에 불만을 나타낸 이들은 이승휴뿐만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와 같은 갈등의 근본 원인은, 양세력이 배경으로 하였던 사회적 기반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한다. 그 이유는, 이승휴와 같은 사회적 성격을 지니는 인간들에게는, 무신난 이전의 고려사회가 가장 바람직하였을 것이다. 자신들의 특권이 보장되어 주도권을 행사할 수 있는 사회가 바로 고려전기였기 때문이다. 이승휴가 ?제왕운기?에서 무신란을 크게 비난하였던 것도, 바로 이런 이유였을 것이다.

무신난 이후 자신들이 각종 특권을 독점적으로 향유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이들은 국왕과 함께 무인정권을 붕괴시키고 몽고와의 전쟁을 종결짓는 데 노력하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들이 소망하던 사회로 되돌아 갈 수 있으리라는 기대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승휴가 당시를 중흥의 시대로 노래하였던 것은, 그러한 기대감을 나타낸 것이라 할 수 있다. 13]

 

이승휴는 정치현실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 폐단을 시정하여 자신의 이상으로 삼았던 사회로 나아가도록 충고하는 데에는, 歷史가 가장 좋은 소재일 것으로 생각하고, 과거의 역사에서 교훈을 얻어 지향해야 할 바를 드러내어 자신을 좌절시켰던 정치현실에 대한 근심을 역사의 서술이라는 형식을 취하여 찬술하였던 것이다. 14]

 

7]?帝王韻紀?, 下 ?本朝君王世界年代?.

8]?제왕운기?, ?進呈引表?

9] ?제왕운기?, 下, ?本朝君王世系年代?.

10]邊東明, ?李承休의 帝王韻紀 撰述과 그 史書로서의 性格?, ?震檀學報?, p21.

11]?高麗史, 列傳, 李承休?.

12] 拜監察侍史 與雜端陳倜 侍史文應 殿中侍史李承休等言 今國步多艱 天旱民飢 非遊田宴樂之時 殿下不恤民事 耽于遊田耶……又忽赤 鷹坊爭設內宴 剪金作花 蹙絲爲鳳 窮奢極侈 不可形言……上將軍尹秀侍宴殿上 登床戱舞 犯禮不恭 大禪師祖英 淫穢無行 出入臥內 大駭觀聽 請加黜責 以警其餘 且今中外多故 人民困窮 學士宴亦宜停罷 ?고려사, 열전, 심양전?

13] 邊東明, ?李承休의 帝王韻紀 撰述과 그 史書로서의 性格?, ?震檀學報?, pp24~30.

14]自古 帝王相承授受興亡之事 經世君子 所不可不明也 然古今典籍 浩汗無涯 而前後相紛如也 苟能撮要以詩之 不亦便於覽乎 …… 其善可爲法 惡可爲誡者 輒隨其事而春秋焉 (?제왕운기? 上 ?序?)

 

 

3. 제왕운기의 구성과 내용분석

 

1) 제왕운기의 구성

 

?제왕운기?는 상?하 양권 1책으로 되어있다. 상권에는 序에 이어 중국 역사의 요점을 신화시대부터 三皇五帝, 夏?殷?周의 3대와 秦?漢?魏?晉과 宋?齊?梁?陳?隋?唐?五代?宋?金을 거쳐 元의 흥기에 이르기까지 역사의 개요를 七言古詩 264句로 읊어 놓았다.

 

그리고 이를 보면 단순한 사실의 나열이 아니고 상권 서에서 말하듯 春秋大義를 명분으로 하였다. 15]는 것을 알 수 있다. 上代부터 史觀으로서 敍詠하고 난 뒤에, 끝에 가서 다시 ?正統相傳頌?을 지어 結을 맺되 수선치 아니한 傍系와는 엄격히 구분하여 正統으로 계승된 나라를 밝히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런 서서시 사이사이에는 아주 자상하게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註를 기록함으로써 짧은 이 작품 하나로 중국 역사의 줄거리를 납득할 수 있게 하였고, 또 서에서 작가가 말했듯이 經世君子로 하여금 善惡의 勸誡가 되게끔 하여 놓고 있다.

 

하권은 우리 나라 역사에 관한 내용으로 ?東國君王開國年代?와 ?本朝君王世系年代?의 2부로 나누었다.

?동국군왕개국년대?는 서에 이어 地理紀, 단군의 前朝鮮, 기자의 後朝鮮, 衛滿의 찬탈, 三韓을 계승한 신라?고구려?백제의 3국과 후고구려?후백제?발해가 고려로 통일되는 과정까지를 七言古詩 264구 1,460언으로 敍詠하고 있다. ?본조군왕세계년표?는 고려 태조 세계설화(世系說話)에서 필자 당대인 충렬왕 때까지 오언고시 152구 700언으로 읊고 있다.

 

그리고 하권도 상권과 마찬가지로 殘註로 本詩를 보충하여 독자들로 하여금 짧은 문자를 통하여 우리 나라 역사의 개요를 일목요연하게 알게 하는 동시에 善은 권하고 惡은 경계하는 춘추의 史觀에 입각하고 있다. 16]

 

체재상으로 볼 때 오언?칠언의 詠史詩이다. 이러한 체는 고려 명종 때 吳士文의 ?歷代歌?가 그 시초이며, ?제왕운기?는 규모가 크고 훨씬 자세하게 서술되어 있다.

 

특히, 長體의 영사시는 가사문학의 원초적 형태로서 고대소설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그러한 점에서 ?제왕운기?는 같은 시대 李奎報의 ?東明王篇???역대가?와 함께 장가체의 설화적 가사로 국문학상의 가치도 높이 평가받고 있다. 17]

 

15]謹據纂古圖 採諸子史而廣焉 若夫今之未著方策者 姑以彰彰耳目所熟爲據 播下諷詠 其善可爲法 惡可爲誡者 輒隨其事而春秋焉(?제왕운기? 上 ?序?)

16]김경수, ?제왕운기?, 도서출판 역락에서 재인용.

17]?민족백과사전?

 

 

2) 제왕운기의 내용 분석

 

?제왕운기?는 중국의 역사와 우리 나라의 역사를 대비하여 읊은 上下로 된 웅대한 敍事詩이며, 五言 또는 七言으로 된 古詩體로, 春秋史觀에 입각하여 노래한 내용이다.

 

중국 역대사를 夏?殷?周?秦?漢?魏?晉?宋?齊?梁?陳?隋?唐?五代?宋?金?元으로, 또 우리 나라의 역대사를 檀君?三韓?新羅?百濟?高句麗?後高麗?渤海의 차례로 서술하여 중국 역사와 우리 나라 역사를 대등하게 읊은 二重構成이다. 이러한 이중구성은 한국 서사시의 전통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18]

 

이제 ?제왕운기?의 내용을 검토하도록 하겠다.

구성 순서에 따라 중국사의 서술에 나타난 특징부터 살피기로 한다. 첫째 각 왕조의 흥망을 서술하되, 제왕중심으로 하였다. 이승휴 자신은 ?제왕운기?의 내용에 대하여,

 

名之曰 帝王韻紀 凡二千三百七十言 盖忠臣孝子 衛於君父之義也(?제왕운기? 上 序)

 

라 하여, 충신?효자와 같은 臣民에 관한 것이 주된 서술 내용인 것처럼 말하고 있다. 실제로 중국사의 서술에서, 상당수의 충신?名臣과 逆臣?奸臣이 대비되어 나타나 있기도 하다. 충신과 명신을 칭송하고, 역신과 간신을 비판하였다. 그러나 중국사 서술의 전체 내용을 두고 볼 때, 거의 대부분을 君主에 관한 서술로 일관하고 있다. 書名이 암시하고 있듯이, 신하에 대한 것은 군주를 설명하기 위하여 부수된 것으로 봄이 옳을 듯하다.

 

둘째, 왕조의 開創이나 중흥의 근본적인 힘이, 군주와 그 선조들의 덕행이라는 것을 강조하였다. 제왕과 그 선조들이 忠?仁?義?儉?淸?讓과 같은 儒敎의 덕목들을 실천하는 등 선행과 선정을 베풀었기 때문에, 창업?중흥의 덕을 누렸다고 하였다.

 

셋째, 왕조의 쇠망도 군주의 失德이 주요한 원인이라고 하였다. 그것 때문에 결국 權臣이 출현하고, 반란과 외침이 일어나, 왕조가 쇠망하게 된다는 것이다.

 

넷째, 중국의 역대 왕조를 정통론에 따라 계통을 밝혔다. 여러 왕조를 ,

 

圓點大者正統也 中者?立也 小者十二諸侯 七國與夫?號輩也(上 終結部 挾註)

 

와 같이, 정통??立?제후 혹은 ?朝로 분류하였다.19] 그리고 盤古 이래 三皇五帝를 거쳐 이어진 夏?商?周의 정통이 元에 전해졌음을, ?정통상전송?에서 읊고 있다. 정통과 傍傳을 구분하는 기준은,

 

或難曰 劉宋與托跋魏?立 而魏立天子旌旗 何出魏而以宋登於正統乎 史臣答 魏雖立天子旌旗 暴起雲中 王戎狄而已 宋則受晉禪 王於華夏 雖與魏勢均力等 稱爲南北史 至於名器 豈可假也(上 正統相傳頌 挾註)

 

에서와 같이, 현실의 세력관계보다는 명기 즉 유교적 名分에 두고 있다.

마지막으로 元에 대한 극단적인 찬양을 들 수 있다. 孔子가 堯를 찬양하였던 어구를 사용하여,

 

惟吾上國大元興 우리 상국 원나라가 흥기하여

遍使黔蒼成?? 천하 백성들로 노래하게 하였으니

巍巍蕩蕩無能名 성덕의 높고 넓음 어찌 다 이르리요.

……

土地之廣人民衆 토지는 광대하고 인민은 많았으니

開關以來無有譬 개벽한 이래로 비길 날 없구나. (上)

 

라 하여, 유사이래 견줄 만한 나라가 없다고까지 하였다. 이는 원의 干涉期라는 고려의 현실을 감안하더라도, 지나치다는 혐의를 벗을 수 없을 것이다. 20]

 

다음으로, 우리 나라 역사의 서술에서도 위와 같은 특징들이 유사하게 나타난다.

첫째, 신하들에 관한 기록이 일정한 부분을 차지하고는 있지만, 역시 그 중심은 군왕이다. 신하에 관한 내용은 군주를 설명하는 데에 부수적으로 존재할 뿐이다.

둘째, 開國祖?創業主의 신성함과 有德함을 강조하였다. 또 이승휴는, 단군을 민족의 시조로 삼아, 중국과 비교할 수 있을 만큼 유구한 역사가 이 땅에 독자적으로 전개되어 왔음을 밝히고 있다.

셋째, 왕조의 쇠망은 군주의 失德에 기인한다고 보고 있다. 고려의 역사에 대한 ?제왕운기?의 서술에서, 직접적으로 국왕의 실덕을 비판한 내용은 없다. 그러나 무신난을 일으켰던 정중부와 이의민을 맹비난함으로써, 21] 毅宗의 실덕이 컸음을 드러내고 있다.

군주의 실덕으로 인한 權臣의 출현과 반란, 외침이 王朝 쇠망의 중요한 원인임을 강조하였다. 마지막으로, 元의 간섭을 받고 있던 당시의 고려에 대하여 찬양 일변도였음을 지적할 수 있다.

 

18]上揭書.

19]現傳의 ?제왕운기?에는 圓點이 모두 같은 크기로 되어 있기 때문에, 중국의 왕조에 대한 이승휴의 3구분의 실제는 알기 어렵다. 다만, 정통왕조만은 正統相傳頌에 명기되어 있어 그 실제를 알 수 있다.

20]邊東明, ?李承休의 帝王韻紀 撰述과 그 史書로서의 性格?, ?震檀學報?.

21]仁子毅明神 卽祚序鱗次 毅亨二十五 鄭忠輔禍始 衣冠委灰塵 至今說庚癸 慶大升註凶 李義門逃避……致爾復來肆……權臣起何自(?제왕운기?, 下, ?本朝君王世系年代?)

 

 

이와 같은 내용을 담고 있는 우리 나라 서술 부분을 좀더 세분해서 살펴보기로 한다. 이를 위해 ?제왕운기? 下卷을 ?東國君王開國年代?와 ?本朝君王世系年代?로 나누어 보고, 전자는 다시 全文을 편의상 다음과 같이 11문단으로 갈라서 보기로 한다.

 

(1) 地理紀 (2) 前朝鮮紀 (3) 後朝鮮紀 (4) 衛滿朝鮮紀 (5) 漢四郡及列國紀 (6) 新羅紀 (7) 高句麗紀 (8) 後高句麗紀 (9) 百濟紀 (10) 後百濟紀 (11) 渤海紀 22]

 

그러면, 먼저 ?동국군왕개국년대?를 위와 같은 순에 따라 살펴보기로 한다.

 

(1) 地理紀

 

문단명을 지리기로 한 것은 ?動安居士集? 雜著의 ?與晉陽書記鄭?書? 가운데, 板面이 잘못 된 점을 지적해 가는 대목에, ‘遙東別有一乾坤上 地理紀三字脫 初誰開國啓風雲上 前朝鮮紀四字脫’라 하는데 근거하였다. 또, 뒤의 고구려기, 후고구려기, 백제기란 문단명이 그 文章頭에 명시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조판할 때, 여기도 지리기라 章頭에 새겨 두어야 옳았을 것인데 빠뜨렸음이 분명하다고 생각된다. 23]

 

내용은 遼河以東 삼면이 바다로 애워싸여 대륙과 가늘게 이어지는 반도란 그 지리적 위치를 밝히고 난 뒤, 이 강산의 뛰어난 形勝과 禮儀之國임을 자랑하며, 小中華라고 불리워짐을 읊어서, 이 작품의 緖로 삼았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遙東別有一乾坤 요동에 하나의 별천지 있으니,

斗與中朝區以分 지역은 중국과 구별되어 나뉘었네.

洪濤萬頃圍三面 큰 파도 넓은 바다 삼면을 둘렀고,

於北有陸連如線 북녘에 육지 있어 선처럼 이어졌네.

中方千里是朝鮮 가운데 사방 천 리 여기가 조선인데,

江山形勝名敷天 강산의 승경 천하에 이름 났네.

耕田鑿井禮義家 농사지어 먹고 우물 파서 물 마시며 예의 바른 국가인데,

華人題作小中華 화인이 이름지어 소중화라 했네.

 

22]朴斗抱, ?帝王韻紀小考 其一, 東國君王開國年代에 대하여?, ?박두포 교수 화갑기념문집 간행위원회?

23]朴斗抱, ?帝王韻紀小考 其一, 東國君王開國年代에 대하여?, ?박두포 교수 화갑기념문집 간행위원회?

 

 

2) 前朝鮮紀

 

開國祖 단군의 사적을 기술하였다. 단군은 釋帝桓因의 孫이며, 중국고대의 신화적성군인 堯帝와 같은 해 戊辰年에 나라를 세워 殷나라 武丁 八年까지, 즉 1028년간 왕위에 계셨다가 阿斯達山神이 되었다는 그 조화무궁한 비인간적 행적을 읊어, 建國의 근원이 오래되었으며 또 그 신성함을 읊었다. 24]

 

初誰開國啓風雲 처음에 어느 누가 나라 열었던가,

釋帝之孫名檀君 석제의 손자로 이름은 단군일세.

?與帝高興戊辰 요임금과 같은 무진년에 나라 세워,

經虞歷夏居中宸 순임금 시대 지나 하나라까지 왕위에 계셨네.

於殷虎丁八乙未 은나라 무정 8년 을미년에

入阿斯達山爲神 아사달산에 들어가 신선되었으니,

享國一千二十八 향국이 일천 이십 팔 년인데

無奈變化傳桓因 그 조화 상제이신 환인이 전한 일 아니겠는가.

 

24]上揭書

 

 

(3) 後朝鮮紀

 

殷나라의 遺臣이고 仁人이었던 箕子가 이곳에 망명해와서 나라를 세운 사실과, 천하대법인 洪範九疇와 人倫凡節을 周나라 武王에게 전해준 일을 읊었다. 그리고 그의 41대손 準王에 이르러 나라를 빼앗기고, 남쪽 金馬郡으로 移居하여 도읍을 세울 때까지 928년이었다는 것과, 그 기자의 유풍은 이 고장에 燦然히 전하고 있다는 것을 읊었다.

 

後朝鮮祖是箕子 후조선의 시조은 기자인데

……

周虎遙封降命綸 주무왕이 봉왕하여 조서를 보냈네.

禮難不謝乃入覲 답례차 배알하였더니,

洪範九疇問彛倫 홍범구주 인륜을 물어보네.

……

準乃移居金馬郡 나라 잃은 준왕은 금마군 옮겨 앉아,

立都又復能君人 도읍 이뤄 또 다시 임금이 되었네.

 

 

(4) 衛滿朝鮮紀

 

衛滿朝鮮 3世 88년간의 역사를 읊고 있다. 漢나라 將帥였던 위만이 조국을 背叛하고, 준왕의 나라를 빼앗았다. 그런데 나라를 배반하고 침략한 보답을 손자 右渠때에 이르러 받게되는데, 한나라 무제가 遠征軍을 보내어 토벌한 것이다. 이것은 그가 한 잘못을 후대에 받은 代價라고 읊고 있다.

 

漢將衛滿生自燕 한의 장수 위만은 연나라에 태어나니,

高帝十二丙午年 한고제 12년 병오년일세.

來攻逐準乃奪國 침공하여 준을 ?고 그 나라 앗았는데,

至孫右渠盈厥愆 손자 우거에 이르러 허물이 가득했네.

漢虎元封三癸酉 한 무제 원봉 3년 계유년에

命將出師來討焉 군사를 풀어보내 토벌을 하였네.

三世幷爲八十八 위만조선 삼대에 팔십 팔년,

背漢逐準殃宜然 한을 배반하고 준을 쫓은 죄값일세.

 

 

(5) 漢四郡及列國紀

 

한나라가 사군을 두어 민정을 보살필 때, 주위의 湖山間에 산재한 우리 민족집단들인 三韓과 扶餘, 沸流, 南北沃沮, 穢, 貊 그리고 尸羅, 高禮 등 열국들이 일어나 모두 稱國하고 侵凌하여 是非를 일삼으니, 情理가 끊어지고 풍속은 사나워지며 백성이 불안해하는 분위기란 것을 읊고서, 끝으로 삼한이 鼎立타가 마침내 新羅와 百濟, 高句麗가 잇달아 일어난 경위를 읊고 있다.

 

因分此地爲四郡 이리하여 땅을 나누어 4군을 설치하여,

各置郡長綏民編 각 군에 장을 두고 백성을 돌보았네.

……

風俗漸?民未安 풍속은 박해져서 백성은 불안하였다.

隨時合散浮沈際 수시로 합산하고 부침할 즈음에

自然分界成三韓 자연히 분계되어 삼한이 이뤄졌네.

……

各自稱國相侵凌 저마다 나라세워 서로를 침략하니

數餘七十何足徵 칠십여 나라이름 증명할 것 있으랴!

……

辰馬弁人終鼎峙 진한?마한?변한이 솥밭처럼 늘어서고,

羅與麗濟相次興 신라?고구려?백제가 차례로 건국하였네.

 

 

(6) 新羅紀

 

먼저, 始祖王 赫居世와 昔氏, 金氏시조왕의 神異한 탄생과 王位相承의 일들을 찬양하고 난 뒤, 근 천년 동안 번영한 나라의 형편을 노래하였다. 즉, 무열왕의 백제와 고구려 병합, 김유신의 武藝, 최치원의 문장, 원효?의상의 佛道, 설총의 吏讀 그리고 羲皇上世의 좋은 풍속들을 기리고 있다. 다음에, 천년왕업도 차차 쇠해가며, 甄萱?弓裔가 반역하여 민생이 도탄에 빠져 회복할 길이 없다고 읊었다.

 

新羅始祖赫居世 신라 시조 박혁거세는

所出不是人間系 그 출생이 인간 혈통 아니었네.

有卵降自蒼蒼來 알이 하늘에서 내려와,

其太如瓢紅縷繫 크기는 박과 같고 붉은 실로 매어졌네.

筒中長生因姓朴 알 속에 오래 있어 박으로 성을 삼으니,

此豈非爲天所啓 이 어찌 하늘이 점지한 것 아니랴.

……

二十九代春秋王 29대 김춘추 무열왕은

請兵於唐平麗濟 당나라에 청병하여 백제?고구려를 병합했다네.

庾信金公是功臣 김공 유신은 참으로 공신이니,

得妙兵書精虎藝 신묘한 병서 얻어 무예에 정통했네.

文章何人動中華 문장은 어느 누가 중국을 움직였나,

淸河致遠方延譽 청하공 최치원이 이름을 떨쳤네.

釋焉元曉與相師 불도에는 원효와 의상이 있어,

心與古佛相符契 이들의 마음이 고불과 부합되네.

弘儒薛侯製吏書 홍유 설총이 이두를 지어내니,

俗言鄕語通科隸 속언과 방언가지 글자로 적게 했네.

……

瓜綿椒遠業將衰 연면하고 오랜 왕업 차차로 쇠해지자

裔萱向主行狂吠 궁예와 견훤이 임금보고 덤벼드니

群情洶洶未知歸 민심은 어지러워 돌아갈 곳 몰라하네.

 

여기서 特記할 일은 신라왕 朴昔金三祖의 초인적 출생담이다. 그 가운데에서 ‘新羅始祖赫居世 所出不是人間系……此豈非爲天所啓’라고 하여 신라시조는 천인이라고 읊고 있다. 이로 보면, 열국시대의 諸君長이 단군이라 하듯이, 혁거세를 단군계라고는 직접 읊지는 않았지만, 그가 천인이라면 단군도 釋帝桓因의 孫이니, 그도 단군의 일족이며, 우리 제왕들은 모두 하느님 계통이라고 하는 점이다. 즉 모두가 같은 天神族이니 왕족의 優秀性과 同族意識을 고취하고 있는 것이다. 25]

 

다음은 경순왕이 고려태조에게 천년사직을 맡기게 된다. 때문에 신라 천년의 餘慶이 무궁하고, 또 고려태조는 前朝百官을 厚待하였다. 그래서 그의 덕을 찬양하면서도, 끝으로 왕이 신하된 전례에 없던 슬픈 역사를 탄식하였다.

 

乙未仲冬朝我陛 을미 중동에 태조께 조회했네.

……

至今餘慶猶不窮 지금까지 남은 경사 오히려 끝이 없어,

鸞臺鳳閣流苗裔 난대와 봉각에 후손들이 벼슬하네.

知幾能弱信多哉 기미 알고 약해진 것 참으로 훌륭하니

我嘆未足處臣無替 탄식하노라, 신하 노릇 두 임금 섬긴 일을

臨書點檢開闢來 개벽이래 많은 책들 찾아보고 찾아봐도,

萬有千古無斯例 천고에 이런 예를 보기가 어렵구나.

 

경순왕이 민정을 수습하지 못하겠음을 스스로 알고, 有德者인 왕건태조에게 왕위를 讓渡했다는 것은 동양의 덕치주의에 立脚한 왕도사상을 엿 볼 수 있는 부분이다. 26]

 

25]上揭書.

26] 上揭書.

 

 

(7) 高句麗紀

 

고구려 28왕 705년간의 역사를 읊었는데, 먼저 시조 동명왕의 신이한 出自, 탄생, 성장, 南渡, 立國, 천상왕래, 昇天 그리고 類利의 嗣位譚을 순서대로 읊었다. 동명왕은 皇天의 아들 海慕漱를 아버지로, 河伯의 딸 柳花를 어머니로 하여 탄생하였다. 扶餘왕 金蛙宮廷에서 유화의 左脇에서 卵生하였다. 비상한 그는 금와태자의 妬忌로 인하여 뜻을 세웠다. 그래서 궁을 떠나 ?斯水를 건너는데 그때 자라들이 다리를 놓아 무사히 건널 수 있어서, 漢나라 元年에 왕검성에서 개국하였다. 天匠이 와서 雲霧 자욱한 가운데 7일만에 궁궐을 완공하였고, 안으로 烏伊?摩離?挾夫 세 신하의 도움을 받고, 밖으로 宋讓王과의 경쟁에서 이겼다. 이후 天上을 왕래하여 天政을 배워 베풀다가 재위 19년 9개월에 승천하였다. 이 때 북부여에 있던 유리가 달려와서 嗣位하니, 자손이 흥성하고 대대로 잘 다스렸다. 마지막에는 盖蘇文이 巧言令言과 농간으로 국권을 잡고 어질고 곧은 신하를 죽이고 擅權하기 심한데다가, 보장왕이 실정하여 민심이 안정되지 않아 기울어지게 되었다. 그래서 신라왕이 청해온 당나라군으로 말미암아 신라에 병합했다고 읊고 있다.

 

高麗姓高諡東明 고구려 시조는 고씨에 시호는 동명이니,

善射故以朱蒙名 활 솜씨 때문에 이름이 주몽이라.

父海慕漱母柳花 아버지는 해모수요 어머니는 유화인데,

皇天之孫河伯甥 황천의 손자요 하백의 외손자이다.

……

扶餘國王名金蛙 부여 국왕 금와왕이

爲開別?相邀迎 별관 지어 그녀를 맞이했네.

……

時王太子生妬忌 그때 왕의 태자 투기를 내어서,

讚令牧馬驅?? 말 먹이는 고역 시켰는데 말들은 살찌었네.

王來欲渡盖斯水 주몽왕이 도망하여 개사수를 건널 적에,

魚鼈化作橋梁橫 어별들이 물에 떠서 다리가 되었네.

 

漢元立昭二甲申 한 원제 건소 2년 갑신해

開國馬韓王儉城 마한의 왕검성에 나라를 건설했네.

天遣人來立宮闕 하늘이 사람 보내 궁궐 지었는데,

山昏谷暗聞丁丁 캄캄한 산골짝에 짓는 소리 정정하네.

爲七日已雲霧捲 7일만에 완공하고 구름 안개 걷히니

金碧??磨新晴 금벽왕궁 우뚝히 하늘 ?이 솟았네.

烏伊摩離與挾父 오이?마리?와 협부

三臣同德聊贊成 세 신하 동덕으로 왕업을 도왔네.

 

……

聖子類利來嗣位 성자 유리가 달려와 왕위를 이으시고

葬遺玉鞭成墳塋 유품인 옥 채찍으로 무덤 이룩했네.

枝繁葉茂承承理 자손들 번성하여 대대로 다스리니,

時與江水爭澄淸 태평한 정치가 강물처럼 깨끗했네.

盖蘇文者乘時進 개소문이 때를 타서 등용되어,

令色巧言爲寵卿 아첨한 얼굴과 교묘한 말로 권신이 되더니,

姦回掌上弄國柄 간사스레 나라 권세 손바닥에 농간하고

臨事方便誅良貞 일에 임해 멋대로 어진 신하 죽였네.

……

後君高藏又失度 뒷 임금 보장왕이 법도를 잃으니,

安能復定輿人情 나라 인심을 어찌 다시 안정시키랴.

唐高摠章元戊辰 당나라 고종 총장 원년 무진해에

羅王奏乞王師征 신라 왕이 중국 군사 빌어다가 치니,

李績行軍誰敢拒 이적의 행군을 어느 누가 막을 것인가.

……

爾後二百三十一 그 뒤 이백 삼십일년 된 후에

地爲羅人之所? 나라 땅이 신라에게 병합되었네.

 

이와 같은 사실에서, 시조왕이 皇天之孫河伯甥으로 알에서 태어난 초인인데, 특히 황천을 그 조상으로 한 점이다. 그러니 이 일도 혁거세와 마찬가지로 단군의 직계, 내지는 천신계란 점에서 우리는 작가의 동족의식이 잘 나타나 있음을 볼 수 있다. 또, 보장왕같은 不德한 왕이나 개소문 같은 不德者는 곧 망한다는 덕치주의 역사관을 잘 볼 수 있다. 27]

 

27] 上揭書.

 

 

(8) 後高句麗紀

 

궁예왕 28년간의 생애와 고려태조에게 백성이 돌아온 일을 읊었다. 궁예는 경문왕의 서자로 태어나 齒가 두 겹에 목에는 군소리[付聲]가 나는 까닭에 凶相이라하여 ?겨나 절간에 숨어살았다. 궁예는 王字 새긴 막대를 까마귀로부터 얻어 야심을 품게 된다. 처음에 북원성 良吉의 부하로 있다가, 종내에 철원에서 王旗를 꽂았으나, 혹독하고 포악한 정치로 백성을 잃고 고려태조에게 백성을 몰아주었다는 내용이다.

 

羅王景文生庶子 신라의 경문왕이 서자를 낳았는데,

齒有兩重含付聲 이는 두 겹이고 목에서는 군소리.

相是害君乃放逐 임금 해칠 인상이라 궁에서 쫓아내니,

托跡浮圖潛遊行 불가에 의탁하여 남몰래 다니었네.

?興敎寺邏齋去 흥교사에 머물며 재 올리려 다닐 적에

時以應鉢手中擎 바릿대 응감 있어 손으로 받쳐드니,

有烏含落是器中 까마귀가 물어와서 그릇 속에 떨어뜨렸는데,

王字鏤在黃牙株 살펴보니 왕자 새긴 황아의 막대였네.

……

唐?大順元庚戌 당 소제 대순 원년 경술해에

稱後高麗立王旌 후고구려라 이름하고 왕기를 세웠네.

……

莫愧邇來尤暴恣 그 사이 포악방자한 것 괴이치 말라

爲我太祖驅蒼生 우리 태조 위해 만백성을 몰아주었네.

 

여기에서도 凶王 惡王 즉 不德한 왕은 한 때는 되는 듯 하지만, 곧 망한다는 덕치주의사관을 엿볼 수 있다.

 

 

(9) 百濟紀

 

백제 34왕 678년간의 역사를 읊은 것인데, 시조 溫祚왕이 고구려에서 온 類利가 왕위를 계승한 데 대한 불평, 이에 의한 남행, 그리고 그의 개국과 天時?地利?人和를 얻은 善政을 읊었다. 이런 창업으로 그 다음의 守成王들이 왕업을 잘 이었으나, 義慈王의 聲色을 즐기는 실정으로 신라왕이 불러들인 당나라 소정방군에 몰려, 大王浦 낙화암의 悲史로 끝마쳤다는 이야기이다.

 

百濟始祖名溫祚 백제의 시조는 온조인데,

東明聖帝其皇考 동명성제가 아버지였네.

其兄類利來嗣位 그 형 유리가 와서 왕위 이으니,

心不能平乃南渡 마음이 편지 못해 남쪽으로 옮겼네.

……

持盈日久及義慈 번성한 지 오래되어 의자왕 때 이르러

色醉聲?失王度 여색과 음악으로 왕의 법도 잃었도다.

唐高顯慶五庚申 당 고종 현경 5년 경신해에

羅王申奏邀天討 신라 왕이 唐軍을 청해 와서 치게 했네.

命蘇定方下熊? 소정방에게 명령하여 사비로 진격해서

水陸矢石紛如雨 수륙으로 비와 같이 시석을 퍼부었네.

幾多紅粉墮淸流 수많은 궁녀들은 청류에 투신하니,

洛花巖聳大王浦 낙화암만 대왕포에 우뚝 솟아 있네.

……

地爲羅人之所撫 그 땅은 신라 사람 차지되었네.

 

여기서도 부덕한 왕은 망한다는 덕치주의사관을 엿볼 수 있다.

 

 

(10) 後百濟紀

 

후백제왕 甄萱은 농부의 아들인데, 어릴 때에 밭머리에 눕혀 놓았는데 새가 와서 날개로 덮고 범이 와서 젖을 주었던 비상한 인물이었다. 성장하면서 才力이 뛰어나고 성품 또한 웅대하였으며, 선비와 백성의 마음을 모으는데 정성을 쏟았다. 그 결과 건국하였다. 그러나 그는 불량한 아들 神劍이 모반하여 아비를 감금함으로 말미암아 고려태조에게 귀의하게 된다. 신검을 잡아 죽여 길에 놓아둔들 시원할 리 만무하였다. 그래서 그는 피를 토하며 죽어간다. 끝에는 이렇게 비운에 죽어간 견훤과는 달리, 신라의 경순왕은 대세를 잘 알고 유덕자 고려왕에게 讓國한 그 去就를 찬미한 것으로 마친다.

 

加恩縣人阿慈介 상주 가은현 아자개는

生得一兒業農圃 아들 하나 낳아 농장에서 일을 할 제,

置向田頭夫婦耘 밭머리에 아이 두고 부부는 김을 매니,

鳥來舒覆虎來乳 새가 와서 덮어주고 범이 와서 젖먹였네.

……

潛含大志伺時便 큰 뜻을 속에 품고 때 오기만 엿보면서

?士誘民常吐哺 선비와 백성 모으기에 마음 기울였네.

唐?景福元壬子 당나라 소종 경복 원년 임자해에

據虎珍城初樹羽 무진성 점거하여 처음으로 터 닦았네.

……

有子不良將奈何 자식이 불량하니 이 일을 어이하리

其名神劍乃幽父 그 이름 신검인데 아비를 감금했네.

……

淸泰三年丙申春 청태 3년 병신해 봄에

偸渡碧江歸我祖 푸른 강 몰래 건너 우리 태조께 귀의했네.

對以王禮慰於朝 왕례로 대접하여 조정에서 위로하고

往討賊子尸諸路 나쁜 자식 토벌하여 각지방에 조리돌렸네.

臨薨歐血那可追 죽음에 임박하여 피 토한들 어이하리

美矣羅王知去就 갸륵하다. 거취의 의리 제대로 안 신라왕이여.

 

 

(11) 渤海紀

 

前高句麗遺將 大祚榮이 태백산 南城에서 건국하여 발해라 이름하였다. 고려태조 8년에 온 나라가 서로 거느리고 歸附하기까지 240년간의 긴 역사를 10구의 간략한 노래로 읊어 이 작품의 대단원을 짓는다.

 

前麗舊將大祚榮 전 고구려 장수 대조영이

得據太白山南城 태백산 남쪽 성에 씩씩하게 근거 삼아,

於周則天元甲申 주나라 측천무후 원년 갑신해에

開國乃以渤海名 개국하여 이름지어 발해라 하였네.

至我太祖八乙酉 우리 태조 8년 을유에 이르러

擧國相率朝王京 온 나라 손 잡고 서울로 내조했네.

誰能知變先歸附 이런 기미 먼저 알아 귀부한 이 뉘시었나,

禮部卿與司政卿 예부경과 사정경이 그들이었네.

歷年二百四十二 향국한 지 이백 사십 이년

其間幾君能守成 그 동안 몇 임금이 수성을 잘 하였던가.

 

이 짧은 노래 가운데서도 주목되는 것은 발해유민들은 스스로 망한 고구려후예로 알고 고구려의 후계자인 高麗故國으로 찾아온 그 사실을 특별히 서술하였다는 점이다. 이것은 발해 땅이며 고구려의 활약무대였던 만주벌판까지를 우리 역사권내로 넣어 읊은, 작가의 정신세계가 놀랍다고 아니할 수 없다. 28] 또 이 발해기는 물론이고 후백제기, 후고구려기, 신라기에서 본바와 같이 모두가 고려왕 태조왕건에게로 돌아오는데 있어서 무력의 힘보다도 有德의 힘을 강조하여 백성들이 스스로 따르고 나라를 讓國하고 있다는 점이다.

 

28]上揭書

 

 

다음은 ?본조군왕세계년대?를 (1) 先代紀 (2) 歷代紀 (3) 今代紀 29]로 나누어서 살펴보기로 한다.

 

(1) 先代紀

 

먼저 문단명을 선대기로 한 것은 태조 왕건이래 그 선대를 밝히고 있기 때문에 명명하였다. 또 이 부분은 본작품의 緖詞로 볼 수 있다. 즉 고려왕실의 훌륭한 출발을 칭송하였으니, 이는 王姓의 源遠함과, 非凡함을 읊어 張三李四의 그것과는 다른 天命을 받은 선대라는 것을 읊었고, 이로써 다음 역대왕들의 장한 업적들을 읊어 나가는데 있어서의 出凡歌로 삼았다.

 

내용은 ‘自古受命君 孰不非常類 惟我皇家系 於此尤奇異’라고 시작하여 이를 증명하기 위한 보기로, 聖骨將軍의 손녀 辰義가 東遊次 온 당나라 肅宗과 합혼하여 景康을 낳고, 경강은 천자인 아버지 뵈오려 상인의 배로 중국를 향하다가, 도중에 용왕을 위하여 老狐를 矢殺하고 그 보답으로 용녀를 娶하여 돌아와 송악에서 살았다. 그런데 지리산 성모가 보낸 도선에게 제왕의 터인 명당에 卜居한 뒤에 출생한 世祖는 신라 금성태수로 있다가, 궁예왕을 섬기게 되었다고 읊고 있다. 30]

 

29] 上揭書.

30] 朴斗抱, ?帝王韻紀小考 其二, 本朝君王世系年代에 대하여?, ?박두포 교수 화갑기념문집 간행위원회?

 

 

(2) 歷代紀

 

제 2대왕인 태조 왕건으로부터 23대왕 고종까지 역대왕들의 계보와 재위년수를 밝혀 이것을 經으로하고, 그 사이 사이의 치적과 변란을 緯로 하여 읊어 놓았기 때문에 역대기라 명명한다. 이는 선대기에 이은 本詞로 삼는다. 내용은 事實들이 시간적 순서에 따라 질서정연하게 짜여져 있다.

추대군왕인 태조에 대해서는 창업시절의 웅장하게 출발한 것을 읊고, 이은 惠?定?光?景?成宗대는 특별히 읊을 사실이 없던 시대였다. 이어 다음 穆宗 때 김치양의 ?恣?康兆의 作亂등의 거친 물결을 넘고, 顯宗의 중흥으로 聖嗣인 德?靖?文宗 때에는 성서로운 기운이 있어 家國이 무사하고 사방이 노래하던 태평성세였고, 順?憲宗 때에는 나라가 안정되어 無事하였고, 肅?睿宗 때에는 좋은 선비가 많았다.

그런데 인종 때 이자겸이 횡포하고 毅宗 때 정중부와 이의민의 무신난이 일어나 문신들이 핍박받았다. 무신들의 반역 등의 거센 물결을 지나, 神?熙?康?高宗 대까지는 무사한 시대라고 읊고 있다. 이런 흐름은 규칙적이지는 않으나 그 과정에서는 이와 같은 史的律動을 看取할 수 있다. 31]

 

31]上揭書.

 

 

(3) 今代紀

 

이승휴 당대의 왕인 충열에 대한 칭송을 하고, 이런 聖代가 영원토록 되기를 빌며, 좋은 시절을 만났음을 자축하며 끝을 맺는다. 이 문단에서 읊는 시기는 元宗과 忠烈 양대로 보겠으나, 원종은 일찍이 林衍의 恣意로 폐위되었다가, 세자 충열의 英偉한 덕분으로 복위되고, 황제의 駙馬國이 되어 세자의 효도를 받아 南面하는 복을 입게 되어, 비로소 정사에 힘쓰니 백성들이 즐겁게 노래하였다. 그래서 억만세월동안 부귀한 역사가 길이 이룩되고, 大陸의 망한 나라와는 달리, 민심을 얻은 어진 나라 되기를 기원하며 좋은 때를 만났음을 자축하며 끝을 맺는다. 32]

 

이상의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이승휴는 당대의 현실을 비판하면서, 한편으로 중흥의 시기로 보는 희망적 견해로 ?제왕운기?를 지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2] 上揭書.

 

 

4. 제왕운기에 나타난 특징

 

1) 제왕운기의 詠史詩的 성격

 

일반적으로 詠史詩는 역사를 읊은 시로 인식되어 왔다. 영사시는 단순히 역사적 사실을 읊는 데 머물지 않고, 그 得失을 따지고, 풍자하고, 꾸짖으며, 情을 기탁하여 작자의 감정을 담는 것이 보편적이라 하였다. 33] 영사시는 역사를 詩化한 것이라는 면에서 역사문학의 범주에 들어간다. 영사시가 객관적 사실에 바탕을 두고 있지만, 단순히 산문의 역사기록을 韻語化하는 데만 머문다면, 문학이라고까지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영사시에는 역사와 세계에 대한 작자의 인식이 투영되어야 하며, 역사적 사실이 문학적으로 재창조되면서 문학적 형상화가 이루어져야 한다.

 

?제왕운기?에 대해 諸家들은 敍事詩, 歷史敍事詩, 民族敍事詩, 歷史詩, 詠史詩 등으로 파악하고 있다. 34]이러한 견해들은 각각 용어상의 相異에도 불구하고 敍事詩系列과 詠史詩系列로 대별 될 수 있다. 서사시와 영사시는 그 성격상 구별하는 것이 마땅하지만, 영사시는 반드시 서사적 양식을 취해야 된다든지, 영사시는 반드시 서사시가 될 수 없다든지 하는 극단의 논리는 의미를 지닐 수 없게 된다.

 

그러나 장편의 형식을 취한 ?제왕운기?를 서사시로 파악하고 있지만 그 한계를 지적하는 한편, 더 나아가 서사시적 면보다는 勸戒性을 지닌 영사시적 성격에 더 주목하는 견해도 있다. 35]

 

33]孫政仁, ?李承休의 帝王韻紀에 대한 이해?, ?영남어문학회?, p199.

34]?張德順 : ?제왕운기?는 動安居士 이승휴가 지은 서사시이다. 이보다 앞서 明宗朝에 오세문의 ?역대가?라는 敍事詩가 있었으나, 이것은 그것보다는 더 규모가 크고도 상세하여 그것과는 또 다른 색채를 띤 작품이다.

?朴斗抱 : ?제왕운기?는 고려의 선대와 역대군왕의 사실를 소재로 한 서사시인 것이다. 이 ?제왕운기?를 고려중기의 歷史敍事詩로 단정해서……

?李右成 : 부족적, 지역적 설화에서 탈피하여 민족의 공동의 시조를 발견하고 거기에서 발원한 민족의 활동의 전과정을 서술한 것은, 이규보를 거처 이승휴에 이르러 비로소 가증하였다. ?제왕운기?는 이러한 의미에서 민족서사시의 대성이며, 특별히 歷史詩락 부르게 된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陳寧寧 : ?제왕운기?의 내용은 한중 양국의 역대흥망을 詠述하는 역사시였다.

?趙東一 : 역사를 읊은 시를 詠史詩라고 했다. 영사시는 서사시와 구별된다. 어느 특정 인물을 주인공으로 삼아 일관된 줄거리를 갖추고 있지는 않으며, 역대의 사실을 간추려서 인상 깊게 전달하는 것을 우선 과제로 삼는다.

?崔斗植 : 詠史는 역사적 사실을 소재로 하여 읊은 것으로 서사시의 한 양식이라 할 수 있다. ?제왕운기?는 上?下 2권으로 중국과 우리 나라의 역대사실을 韻語化한 詠史작품이다.

35] 張允翼, ?한국서사시 연구?, 명지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1983.

 

 

?제왕운기?의 영사시적 성격을 몇 가지 들어보기로 한다.

첫째, 창작의도의 면에서 보자면,

 

撮要 仍諷詠以成章 彼相承授受之興立 如指諸掌 …… 施行 爲後勸誡云 (進呈引表)

耳目所熟爲據 播下諷詠 其善可爲法 惡可爲誡者 輒隨其事而春秋焉(上卷 序)

 

라고 하였으니, 裏面적인 이유야 어떻든지 겉으로 드러난 창작동기는 과거 역사의 흥망을 통한 鑑戒主義에 있음을 알 수 있다.

 

둘째, 독자의 반응면에서 보자면,

 

其辭約 其旨暢 如珠之在貫 網之在綱 萬代相承 理亂終始 不出乎此 可謂通鑑之粹歟(李源의 後題)

全書復見 豈無益於經世之君子哉(李?의 跋)

 

라고 하였다. 이상의 기록을 통해서 ?제왕운기?에 대한 당대와 후대의 독자들의 반응의 일단을 읽을 수 있다. 즉 그들은 ?제왕운기?를 ?통감?의 정수라 할 만한 것으로 세상에 뜻하는 군자들에게 도움이 된다고 하였다.

 

셋째, 시적 표현면에서도 ?제왕운기?는 영사시적 성격을 읽을 수 있으니, 直述的 방법에 의해 사실을 표현하지 않고 飜案의 방법에 의해 당대 현실을 반대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점 등이 그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영사시적 성격을 농후하게 지닌 ?제왕운기?를 서사적 양식을 취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서사시라고 규정하기보다는 서사적 양식을 취한 영사시라고 보는 편이 작품의 성격을 보다 분명히 해 줄 것이다. 36]

 

36] 孫政仁, ?李承休의 帝王韻紀에 대한 이해?, ?영남어문학회?.

 

2) 문학사적 가치

 

일찍이 六堂 최남선은 ?新訂三國遺事? 부록에 ?제왕운기?를 싣고 그 문학적 위치를 논하면서 ‘藝林의 一奇物’라고 하였다. 또 李秉岐 선생은 歌辭의 발생을 고려말 공민왕 때 王師인 나옹화상의 ?西往歌?로 보고 있으며, ?동명왕편???제왕운기???역대가? 등에서 그 원형을 찾을 수 있다고 하였다. 37]이처럼 ?제왕운기?에 대한 논의들은 이 작품의 가치를 높이 인정하는 단서들이다. 그만큼 ?제왕운기?는 ?동명왕편?과 더불어 국문학사의 우뚝한 봉우리로서의 가치를 점하고 있음을 否認할 수 없다.

 

김경수는 ?동명왕편?의 분석을 통하여, 그 작품 구조가 二重의 구성원리를 지니고 있음을 밝힌 바 있다. 이 이중의 구성원리는 100 여년 뒤에 등장한 ?제왕운기?에도 그대로 적용되어 나타났다. 게다가 더욱 분명한 이중구조로 나타난 것이다. 중국 역사와 한국 역사의 대비로 읊은 것이 그것이고, 한국 역사도 상고 역사와 고려 역사를 대비하여 형식상 이중구조를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구조화는 그 뒤에 나타난 無寄 스님의 ?釋迦如來行績頌?에도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구성방식이 ?龍飛御天歌?에 적용되고, ?月印千江之曲?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는 ?제왕운기?가 단순히 독립된 작품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문학사의 하나의 핵으로서 傳統性을 이어주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 주고 있다. 38]

 

37] 김경수, ?帝王韻紀?, 도서출판 역락, p13.

38]上揭書.

 

 

5. 맺는말

 

이상에서 이승휴의 ?제왕운기?를 살펴보았다. 그가 ?제왕운기?를 찬술한 동기는 고려의 현실에 대한 관심에 있었다는 것이다. 당시는 왕과 그의 측근들이 자행하였던 폐단들 때문에, 끊임없이 물의가 일곤 하였다. 한편 충열왕 대에는 이승휴를 포함하여 많은 사람들이, 왕의 측근들이 자행한 각종 폐단을 시정하자는 요구를 하였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이승휴는 왕정이 복고된 당시를 중흥의 시기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정치현실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 폐단을 시정하여 자신의 이상으로 삼았던 사회로 나아가도록 충고하는 데에는, 歷史가 가장 좋은 소재일 것으로 생각하고, 과거의 역사에서 교훈을 얻어 지향해야 할 바를 韻文化하여 저술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가 역사 서술을 통해 가장 강조하였던 것은 군주의 修德과 德治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위와 같은 여러 사실들은 자료를 모으고 작품을 읽고 난 뒤, 선행 연구들을 정리하여 나열한 것에 불과하다. 발표자는 이를 계기로 지속적으로 관련 자료를 조사하고 ?제왕운기?의 내용을 면밀히 검토해서 온전한 체제를 갖춘 연구를 진행해보고자 한다.

 

 

參 考 文 獻


1. 資料
김경수, ?帝王韻紀?, 도서출판 역락, 1999.
?고려사?, 평양 아름출판사, 1964.
?민족백과사전?

 

2. 單行本
조동일, ?한국문학통사?, 지식산업사, 1991.
崔斗植, ?韓國詠史文學硏究??, 태학사, 1987.


3. 論文
손정인, ?이승휴의 ?제왕운기?에 대한 이해?, ?영남어문학회?, 1988.
朴斗抱, ?帝王韻紀小考 其一, 東國君王開國年代에 대하여?, ?박두포 교수 화갑기념문집 간행위원회?, 1986.
朴斗抱, ?帝王韻紀小考 其二, 本朝君王世系年代에 대하여?, ?박두포 교수 화갑기념문집 간행위원회?, 1986.
陳寧寧, ?제왕운기 연구?, ?한국어문학연구? 제9집, 이화여자대학교 한국어문학회, 1969.
李右成, ?高麗中期의 民族敍事詩?, ?논문집?제 7집, 성균관대학교, 1962.
孫政仁, ?李承休의 帝王韻紀에 대한 이해?, ?영남어문학회?, 1988.
邊東明, ?李承休의 帝王韻紀 撰述과 그 史書로서의 性格?, ?震壇學會?, 1990.
車長燮, ?제왕운기에 나타난 이승휴의 역사관?, 삼척향토문화연구회, 1989.

 

 

 

고전시가작품론 / 김문기 선생님 / 2006년 3월 30일 / 한문학과 김영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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