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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누구와 살 것인가? / 잘못된 만남
장폴 사르트르(프랑스 소설가요 철학자)가 “인생은 B(Birth) 와 D(Death) 사이에 C(Choice)다” 라고 했지요.
하지만 저는 C를 Choice가 아닌 Challenge라고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 글은 그의 말대로 Choice 개념으로 쓰겠으며 부끄럼을 무릅쓰고 남기려는 것은, 부모님께 드린
천추의 한 불효를 속죄하기 위해서 입니다.
내가 고등학교 1학년 때(1956년) 충청도에 사는 정 정원이라는 친구가 제 짝이 되었습니다.
공부는 그렇게 잘하지는 못 했지만 마음씨가 착한 친구였고 아버지는 한의사이셨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친구와 점점 더 가까워 가던 어느 주말 친구가 "야, 오늘 우리 집이나 같이 가자"
하더군요.
당시만 해도 작은 여객선이 군산에서 출발해 친구 집이 있는 화양에 내려주고 부여까지 다녔는데
배는 주민을 위한 여객선이었기에 학생인 우리는 시간에 맞춰 타기가 어려웠고, 주말에 친구 집에
갈 때는 가끔 돛단배를 타고 가기도 했고 그럴 때는 많이 무서웠습니다.
그 사이 친구와는 동창생으로 나보다 두 살이나 어린 친구의 당고모인 남 지향이란 학생을 만났고
3년을 다니며 갈 때마다 그녀의 집에서도 저를 초대하여 저녁을 대접하기도 했습니다. 그 사이
그녀와 저는 남몰래 아주 가까워 갔었습니다.
그런데 그녀의 아버지가 지방 유지로서 면에서 하는 여러 직책이 많았는데 그만 간암으로 일찍
고인이 되셨고 그로 인해 가산이 기울어 그녀는 고등학교를 다니지 못하고 집에 있던 때었습니다.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가정 형편이 어려워 대학을 포기하고 심한 우울증에 걸렸고 급기야는
극단적 선택을 시도하였다가 겨우 살아 병원에 있을 때, 나는 아버지께 "아버지 지향이가 보고
싶습니다. 만나게 해 주십시오" 하였더니, 하나밖에 없는 자식 살리려고 돛단배를 빌려 그녀의
집에 가서
“내 아들이 지금 이런 형편이다. 그러니 내 아들 살리는 마음으로 집에 한 번 와줄 수 없겠니?”
하고 사정하셨지만 거절을 당하고 돌아오셨습니다. 그때 아버님이 얼마나 절망적인 심정이었을지
지금도 가슴이 아픕니다.
그걸로 마음의 정리를 하고 나는 병원을 퇴원하고 마음의 갈등을 견디지 못하여 무작정 집을
나섰다가 우연히 버스에서 선배 한 분을 만났고 그 선배가 서울에 가신다 하여 따라 나선 것이
나의 운명을 바꾼 외출이 되었습니다., 서울에 올라와 가정교사 5년을 하면서 SKY 중 한 대학을
다닌 것은 정말 꿈만 같은 인연의 열매였습니다. 그 사이 그녀는 결혼을 하고 나와의 인연은
끊겼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자원 입대하여 우리나라 최전방 부대 7 사단에 배치되어 근무하다가 상병 때
휴가 나와 친구 정 정원을 만났습니다. 아 운명의 장난이였던가요!
친구를 만나 그간의 얘기를 나누던 중 그녀가 이혼을 하려고 지금 친정집에 와 있다 하였습니다.
잊었던 사람인데 그 얘기를 듣는 순간 나의 모든 생각은 그녀와 지내던 그때로 돌아갔습니다.
시집가서 5살이나 먹은 딸까지 데리고 있다는 이야기도 들었지만 대수롭지 않은 일로 여겨졌고,
그녀 생각이 나의 머리를 흔들었습니다. 나는 그 자리에서 내일 만나게 해달라고 했고 다음 날
그녀와 만났습니다.
선생님과 결혼했고 부잣집 며느리라는 여자의 모습은 산산이 사라지고 그 예뻤던 그녀는 어느
시골 아줌마로 변해 있었는데 그때 그녀 나이 26세 때입니다. 그 자리에서 대충 이야기를 듣고
나는 모든 것을 이해할 테니 다시 만나자고 했습니다. 그녀가 쉽게 대답할 리 없지요.
그렇게 나 혼자 마음을 정하고 귀대 하였지만 그날부터 모든 생각은 그녀에게 가 있었습니다.
군대 생활이 제대로 되지도 않고 나는 매일 그녀에 대한 그리운 마음을 일기로 써나갔습니다.
지금처럼 연락이 용이한 때도 아니고 해서 마음 아픔이 커만 갔습니다.
그 일기장은 아직도 내가 보관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면서 지나고 있던 1966년 4월 10일!
나는 군무 일로 사단을 다녀오는데 초소에서 나를 부르더니
“최 상병 님, 어느 여인이 면회 오셔서 지금 평양 여관에 계십니다.”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니 면회라니 누구? 혹시 지향이가?” 가슴이 뛰었습니다. 가보니 지향이었고 다섯 살 먹은 딸
란이도 같이 와 있었습니다.
“아니 여기가 어디라고? 그 먼 길을 연락도 없이 갑자기 오다니. 나는 상병인데 어쩌라고 내
처지에 이곳 민통 선 이북 지역까지 오다니?” 반가우면서도 앞이 캄캄했습니다.
당장 어떻게 수습은 하며 부모님께 지는 불효는 또 어떻게 감당해야 하나? 만감이 엄습했습니다.
일개 상병이 영외 거주도 불가능한데 더구나 월급이라고 해야 360 원일 때니 막막했습니다.
그러나 다음 날 외출하여 사방 거리 어느 빈집을 세를 내어 며칠을 쉬게 한 후 나는 부대 울타리
바로 앞에 다시 그녀와 이사하였습니다.
그렇게 우리의 신혼은 시작되었고 최전방 민통 선 이북 지역에 상병이 살림을 차리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고 부대장의 묵인(?)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부대장 님이 묵인은 하시었지만 자초지종 이야기를 들으시더니 한 말씀 하셨습니다.
"네가 내 동생이라면 때려주겠다. 네가 뭐가 부족하여 그런 여자를 만난단 말이냐? 조용히 소리없이
살다가 가거라"
그렇게 해서 남은 부대 생활을 마치고 전역을 하였습니다.
부대장 님의 은공으로 부대 생활을 마치고 저는 사회에 나와 부대장 님 은공을 생각해 수소문해서
찾았습니다. 부대장 님은 제대 후 조폐공사 기획부장으로 계시다가 정년 퇴임하시고 고향이신 경남
사천에 사시는 것을 찾아 서울로 모셔와 감사한 인사를 드렸더니 고마와 하셨습니다.
이렇게 나의 아내가 된 그녀였지만 직장도 없고 모든 것이 없는 상태에서 이루어졌는데 운명이었나
5년이 지나도록 아기를 잉태하지 않던 그녀가 나를 만난 한 달 만에 우리 아기까지 갖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1966년 12월 말일 그녀를 집으로 먼저 보내고 나는 보름 후 만기 제대를 하고 집에 갔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상상이 되십니까?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 공부는 잘해서 남의 칭찬을 많이 받던 아들이 대학을 못 가서 약을 먹고
사경을 헤매다가 살아난 아들,
그 아들 살려 달라고 매달릴 때 외면하고 돌아섰던 그녀가 갑자기 배마저 불러서 아이 하나까지
데리고 시골 그곳에 불쑥 나타나니 부모님은 얼마나 놀라시고 부끄러워 하셨을까요? 상상하면
머리가 절래절래 저어집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끝났으면 자식의 선택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드렸겠지요.
그런데 내가 직장을 구하러 서울에 와서 있는 동안 남편이 나타나서 아이를 데려가며 우리를
간통으로 고소까지 하여 자식이 경찰서에 불려 다니게 되니 우리 부모님 가슴이 어떠셨겠습니까?
강원도 나에게 올 때 협의 이혼 서류를 받아 들고 신고까지 하고 왔어야 했는데 오는 게 바빠
달려온 것이 그런 어려운 일이 생겼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협의 이혼 서류를 받고 헤어진 후라 불기소 처리되었고 모든 게 제 자리로 돌아왔
습니다.
그러나 그간 데리고 왔던 아이가 손녀였나 하고 반신반의 하셨던 부모님은 절망이었겠지요.
지금도 그때 부모님께 지은 불효는 천추의 한으로 남습니다.
그 후 나는 첫 아기 우리 딸까지 낳은 아내를 고향 집에 두고 직장을 구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1967년 1월 15일 제대라 당시는 직장 신입생 모집 요강에 28 세라는 제한 요인이
있었는데 나는 이미 28세도 초과했고, 11월이면 직장 신입생 모집도 끝난 후라 직장을 구할
기회가 참으로 없었습니다.
엄청 큰 마음의 부담을 안고 노력하여 이듬 해인 1968년 초 결국 직장을 구했고 우선 아내와
저의 첫 딸 갓난 아기까지 서울로 데려와야 했습니다. 그때 첫 월급이 팔천 오백 원이었고 단돈
6만 원으로 겨우 셋방을 얻어 셋방 살이가 시작되었으니 그게 얼마나 어려운 출발이었나 짐작이
되겠지요.
나는 나에게 그처럼 뼈아픈 슬픔을 안겨준 그녀와 정말 사랑하며 살았습니다.
셋방 살이 여섯 번 이사 끝에 그녀의 절약 정신이 결실을 맺어 홍은 동에 집을 장만하던 기쁨은
세상을 다 얻은 감정이었고 우리는 모든 것을 다 얻은 듯 열심히 살았습니다.
달 동네에서 부터 시작하여 평지로 내려오기 까지 참으로 암담한 삶이었습니다.
라디오도 없어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4천 3백 원에 사고도 그렇게 기뻐하던 아내였고 미닫이 식
흑백 텔레비전을 사다 준 날은 그렇게 감사하던 아내였습니다.
외아들인 제가 딸 둘에 아들 하나 셋이나 두기도 했고 부모님도 모든 것을 다 용서하고 사랑하고
살았습니다. 마지막에는 역촌 동에 대지 83평에 56 평짜리 단독 주택까지 마련하고 살게 되었고요.
다섯 살 때 엄마 따라왔던 란이는 고등학교 때에는 나에게 연락하면서 삶의 어려움을 얘기하면
그때마다 학교로 찾아가 도와주었고, 졸업하고는 상경하여 같이 역촌 동 집에서 살았고 제 아이들
과도 언니 동생 하며 잘 어울려 살다가 직장에서 만난 사람과 결혼하여 미국으로 이민 가서 조지아
에서 살고 있으며 지금도 딸같이 여기며 전화로 메일로 소식 주고 받으며 살고 있습니다.
란이는 그처럼 저를 아버지처럼 대하고 아주 잘 따랐습니다. 그 란이는 지금 60세가 되었네요.
잠시 나의 직장 생활을 미리 남기는 것이 이야기를 이어가는데 도움이 되겠네요.
남자는 첫 직장이 그 사람의 일생의 경제력이라 했던가요? 나의 직장 생활은 참으로 힘든 여정
이었습니다. 직장에 들어가 열심히 살았지만 26년 직장 생활 중 사주가 5번이나 바뀌고 사장님만
18분을 모시는 아픔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입사할 때 10명의 대학생이 함께 들어갔지만 임원이
된 사람은 나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직장 들어가자마자 이미 다니고 계신 대학 선배 님이 직장이 그만큼 어려운 회사였기에 저를
좋은 곳으로 보내려 포항 제철 창립 멤버로 가라는 추천도 하셨는데 저는 따르지 못 했습니다.
뒤에 그 선배 님이 다른 회사 사장으로 가시면서 전무까지 제안하시며 같이 가자 했지만 하필
그때 나는 아내의 불륜으로 심한 고통을 받고 있어 따를 수도 없었고, 포항제철로 가라 하셨을
때는 입사한 지 6개월 정도 지난 신혼 시절이라 응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후 오직 처음 입사한 회사에서 뼈를 묻을 각오로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런데 그 회사는 나를 배신(?)하였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렸지만 5번의 주인이 바뀔 때마다 그렇게
당했습니다. 이미 기획 부장을 오래했는데 5번째 사주가 되는 D회사의 부장이 어느 날 나를 찾아와
정보를 요구했습니다. 이미 소문은 듣고 있었지만 무슨 충성으로 정보를 주겠습니까? 주지 안했지요.
그랬더니 새 주인으로 오더니 비 협조자라며 나를 광주로 좌천 시키더군요.
(직장에 대한 아픈 이야기는 다른 글에서 옮기렵니다.)
이 좌천이 나의 삶을 송두리째 짓이길 줄을 어떻게 알았으며 이미 정해진 운명의 장난이었을까요?
그렇게 해서 1년을 그곳에서 보내는 동안 그것으로 죽기에는 너무 억울해 맡은 임무를 죽도록 했고
결과는 전국 1등을 하여 생각지도 않게 본사로 왔고 거기서부터 전국을 도는 영업 본부장이 되어
처음에는 경기 강원 담당, 두 번째는 충청 호남 담당, 그리고 마지막에는 서울 담당으로 월요일 나가면
금요일에나 오는 5년의 출장 생활이었습니다. 그렇게 보내고 있는 사이 누가 하루는 저를 보자 하더니
“효준 아빠, 아무래도 효준 엄마 잘 살펴보세요. “
”아니 이게 무슨 말씀이세요? “ 하고 놀랐지만 더는 말씀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때부터 나의 머리는 완전히 돌아버렸습니다. 아내가 잘못되고 있다는 언질이 아닌가? 살피기
시작한 얼마 후 아내의 비위가 잡히기 시작했습니다.
그때부터 모든 삶은 변했습니다. 우선 전화기에 귀를 기울였고 지방에 출장 나가 있을 때는 수시로
전화를 걸어 확인했지만 밤 12시 넘어서도 집에 없었고 귀가 시간은 제 멋 대로였고 완전히 미쳐
갔습니다.
결국 흥신소에서 현장을 잡도록 거금까지 투자하면서도 집에 들어오면 내색을 하지 않고 아내의
수첩에 있는 전화번호를 적어두고 서울의 그 큰 전화번호부를 ㄱ(기역)에서부터 찾기 시작했습니다.
상상해 보십시오. 1985년대 서울 전화번호부가 얼마나 두터웠나요? 그 두터운 전화번호부를 한
페이지씩 넘기며 찾았지요.
결국 찾고 보니 전에 문화 촌에서 살던 집에서 100미터도 안 되는 집 여자하고 밤마다 그렇게 살고
있었는데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지요. 그러나 그 긴 5년의 세월 동안 오직 나 혼자만의 아픔이었지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안 했습니다.
심지어 내가 입사 시킨 처남이 같은 회사에 다녔는데 하루는 그가 와서 집 2층으로 올라오는 벽을
주먹으로 쳐서 구멍이 뻥 났는데도 말하지 안 했고, 하루는 싸우고 장모님께 도망갔는데 찾으러 가니
장모님 왈 “자네 하나 믿고 보냈는데 왜 그러는가?” 하시며 원망조로 말씀하시는데
“살라니까 그러죠” 하고 데려오면서도 장모님께 한마디 하지 안 했습니다.
그런 와중에 우리 아이들마저 어렴풋이 알았는지도 모르지만 엄마 아빠가 만나면 싸우기만 하니
얼마나 가슴 아팠겠습니까? 그러나 나는 아이들에게 까지 결코 말하지 안 했습니다.
어차피 부모에게 한 번 큰 죄를 지은 이 불효자 두 번 다시 불효를 드리면 안 된다 생각하고 내 하나
희생하면 된다 생각하고 어떻게든지 마음 돌려 살면 용서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한 번 돌아선 아내는 결코 돌아오지 안 했습니다.
그 사이 한 번은 아내의 정부가 사는 구로동에 있는 아파트까지 미행한 적도 있었는데 거기까지
가면서 전철을 몇 번이나 갈아타면서 가더라고요. 뺑뺑 돌아서.
그런데 엘리베이터 옆 유리에 비치는 바람에 들켜 아내는 도망 가고 기사님은 친척이라 온다고
했다며 “에이 버려버리세요” 하더라고요. 수모였습니다.
결국 차일피일 미루던 현장 검거가 이루어지던 날 나는 더 이상 숨겨서는 안 되겠다 싶어 처제 둘,
처남 하나 같이 현장을 덮쳤습니다. 세상에 그곳은 제 큰딸이 다니는 서울 대학 정문에서 얼마 안
되는 여관이었습니다.
흥신소 믿지 마세요. 흥신소 그 사람들 현장을 잡지 않고 각종 핑계만 대고 돈만 요구합니다.
그날도 그간 도청을 근거로 나 혼자서 전날 현장 여관을 다녀온 후에야 잡는 사람들입니다.
결국 관악 경찰서에 붙잡혀갔고 거기에는 처제 처남 다 같이 갔지요.
취조 하던 형사 님 나에게 와서 15년 경력에 이런 일 여러 번 보았는데 저런 독한 여자 처음이라며
역시 버려버리세요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일을 마치고 돌아서려는데 처제 처남이 매달리며
“누나가 한 번만 용서해 주면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하니 한 번 용서해 달라”고 사정하였습니다.
아 어쩌란 말인가? 온갖 갈등이 밀려왔지만
“그래 나 하나 희생하고 살면 아이들 구하고 부모님께 용서도 비는 심정으로 용서하자”고 다짐하며
고소를 취하했지요.
그러나 그것이 천추의 한이 된 잘못된 결정이었습니다.
용서하면 같이 따라와 저와 함께 집으로 올 줄 알았는데 오는 것이 아니라 정부가 나올 때까지 기다
리는 것이었습니다. 참담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밝혀진 것인데 저도 모르게 신림 동에 방까지 얻어
살기 까지 했더군요.
전국을 돌아다니며 가정을 위해 죽도록 일한 결과가 아내의 부정을 도운 일이 되고 있었네요.
그들이 다니는 모텔은 아내가 얻어 살던 셋집에서 두 정거장이었고 정부의 집은 네 정거장 거리였
습니다. 아무리 불륜에 빠졌다 해도 세 자식을 두고 남편 몰래 셋방까지 얻어 숨기며 산 모습을 보고
내가 살아온 삶이 무엇이었나 싶었습니다.
나중에 처제들과 같이 짐을 찾아오며 내가 느낀 절망은 차라리 죽고 싶고. 자식들이 얼마나 불쌍
하던지 하염 없는 눈물만 삼켰습니다.
그후 집으로 와야 할 사람이 집에는 오지 않고 처남 댁에 머무르더니 얼마 후 집에 당장 오기 무엇
하니까 당분간 별거 해 살자고 제안을 하기에. 그렇게 하면 마지막이 된다 싶어 거절했더니 장모님과
함께 살 것이니 그래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는 수 없이 셋방을 얻어 주고 별거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한 번 돌아선 아내가 돌아오겠습니까? 가끔 아내가 사는 곳을 가보았더니 아내가 집에 들어
오지 않는다기에 장모님께 어떻게 된 것인가 물었더니
“병원에서 밥 해주는 일을 한다니 참고 견디게. 내가 꼭 데리고 가도록 할 테니” 하는 거였습니다.
병원에서 밥을 해주며 산다는 사람이 집에 한 달에 한두 번 온다는 말이 의심이 가서 거기에서도
경비에게 물으니 사실이었습니다. 저를 속이고 이미 둘이 합쳐 살고 있었던 것이지요.
셋방을 얻어 달라는 것은 저에게서 돈을 챙겨가려는 술책이었을 뿐 처음부터 다시 합칠 생각은
없었던 것이지요.
그러더니 얼마 지나서 저의 사무실에 찾아오더니 이혼을 요구하더군요.
"이혼이라니? 내가 얼마나 참고 견딘 삶인데. 지난 5년 간 내가 받은 그 아픔은 어쩌라고. 그리고
내 3 자녀들은 어쩌고 우리 부모님은 어쩌란 말인가? "
외아들로 며느리 얻어 따뜻한 밥 한 끼 얻어 드시지 못하고 자식 하나 삶 망친 죄는 어떻게 용서
하란 말인가?
매일 찾아와 1주일을 버티던 광화문에 있던 사무실은 본사에서 길 하나 사이인데 매일 찾아와
저토록 나를 괴롭히니 결국 그 사실이 본사에 들어갈 터인데 어쩌란 말인가? 악마였습니다.
눈 하나 깜짝 않고 1주일을 버티는 것이 아닌가? 같이 근무하는 아래 직원들에게 제가 무엇이
되며 결국 본사에서는 그 사실을 어떻게 이용할 것인가? 앞이 캄캄했습니다.
결국 이혼을 해주기로 하고 법원에 갔습니다.
처음에 법적으로 해버릴 것을 협의 이혼이라니 내가 완전히 당한 결말이었습니다.
정부(제비)의 지시대로 움직이는 결말이었습니다.
판사가 물었습니다. 이혼에 동의하시냐고. 아니라고 대답했더니 그러면 이혼이 안 되니 나가서
다시 조정하고 오라 했습니다. 길이 없었습니다. 이미 떠난 사람 잡을 길이 없었습니다.
결국 이혼하고 돌아서던 나는 그간 쌓인 한에 엉엉 울었습니다. 그러나 단발머리로 까지 변신한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 버리더군요.
어떻게 살아온 나인데 부부의 연이 되려면 8000겁의 연이 있어야 이루어지는 인연이라는데
그 인연 이렇게 버려도 되는 게 인생 사입니까?
1990년 2월 23일 우리의 잘못된 만남은 저를 파멸로 밀어 넣고 그렇게 떠났고 끝났습니다.
하지만 부모님께 지은 이 큰 불효 어떻게 보상해 드려야 하나요.
정화 수 떠 놓고 칠성 님께 빌고 비시던 어머니!
하늘에 가신지 어언 20년이 되었지만 이 자식 생각하며 또 빌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아버지 어머니 엎드려 통곡하며 용서 빕니다.
대학 1학년 때 철학 교수 님이신 이 상은 교수 님께서 강의 중에 결론이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앞 뒤 문맥으로 보아 맞지 않는 말이었지요. 그 말씀은 경상도에서는 결혼을 결론이라고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잘못된 결혼은 그 사람의 일생을 불행으로 결론 짓는 것이었습니다.
러시아 속담에 “싸움터에 나갈 때는 한 번 기도하라. 바다에 나갈 때는 두 번 기도하라.
그리고 결혼할 때는 세 번 기도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저는 한 번도 기도하지 않고 결혼을 했습니다.
부처님 말씀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不要想拉 住禽去的女人(불요상납 주금거적 여인)
抓住失去的 自己(조주실거적 자기 )
떠나가 버린 여자를 찾으려(잡으려) 하지 말고 잃어버린 자신이나 찾아라.
말씀 대로 나 자신이나 찾고 살아야 할 시간에 가버린 여자를 붙잡으려 7년이나 허송세월을
보낸 자신이그렇게 부끄럽습니다.
이것이 테레샤 수녀 님이 말씀하신
“인생은 낯선 여인숙에서 하룻밤이다”라는 짧은 삶을 사는 바보 같은 사람이 살아온 삶이었습니다.
<끝>
첫댓글 몇번을 읽어도 가슴이 찡합니다
이제는 노년의 뜨락에 행복한 삶만 가득하시기를
만남 중에 부부의 만남처럼 중요한 만남이 있을까요? 잘못된 만남은 행과 불행의 갈림길이오,
잃고 얻음의 답을 주는 결정인 걸요.
이건희 삼성회장 님이 "마누라 만 빼고 다 바꿔" 하심은 마누라가 그 어느 것보다 중요함을 말함이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