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칭은 그 사람의 사회적 역할을 의미한다. 개인적 성향과 가치관을 떠나 호칭에 부여된 역할을 잘 해내는 게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일이다. 황교안이라는 이름 뒤에 붙는 호칭은 법무부장관이다. 그가 이 호칭을 달고 있는 한 검찰, 행형, 인권옹호, 출입국관리 등 법무에 관한 사무를 공명정대하게 관장할 책임과 의무에 충실해야 한다. ‘국정원 명백한 대선개입’, 이게 국민의 상식 <한겨레>가 어제(3일) 황 장관이 법무부장관으로서 책임을 다하지 않고 있다고 질타하는 기사를 내보냈다. 검찰이 원세훈 전 국정원장에 대해 국정원법 위반과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를 적용해 구속영장을 청구하기로 방침을 정했지만,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 적용을 꺼려하는 황 장관에 의해 1주일 동안 영장 청구가 안 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를 적용하겠다는 검찰의 내부 결정은 상식적 판단과 국민 정서와도 부합된다. 원 전 원장의 지시에 의해 국정원 심리정보국 직원들이 수백개의 아이디를 만들어 1만건에 달하는 국내정치와 대선 관련 게시글·댓글을 올려왔다면 누가 봐도 명백한 선거개입이다. 검찰의 정상적인 수사활동을 다른 사람도 아닌 법무를 책임진 법무부장관이 가로막다니,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한겨레> 보도가 사실이라면 황 장관은 국민적 질타를 받아 마땅하다. '국민의 장관'이라는 직분보다 '정권의 가신'이라는 입장을 먼저 내세우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언론보도가 사실일까? ‘공직선거법 혐의 적용을 막고 있다’는 보도가 나간 직후 광주지검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이렇게 대답했다. 기자: 검찰과 이견이 있는 것인가? 황 장관: 철저히 수사할 것이고 절차도 법대로 하겠다. 기자: 원 전 국정원장에게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를 적용할 것인가? 황 장관: 개인 판단을 말하는 건 적절하지 않다. 되고 안 되는 건 절차에 따라 처리 될 것이다. 법무 책임진 장관이 검찰의 정당한 수사를 방해?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 원론적인 얘기만 했다. 사회적 파장이 일고 있는데도 자신을 적극 비호하지 않았다. 언론 보도가 사실이 아니라면 적어도 ‘그건 오보다’ 정도의 멘트는 했을 것이다. <한겨레>의 보도 내용을 사실상 인정한 것이나 다름없다. 그가 정당한 검찰수사를 방해하면서까지 무리수를 두는 것이라면 그 이유는 간단하다. 국정원법 위반 혐의만 적용할 경우 원 전 원장 선에서 ‘국정원 게이트’는 마무리되지만, 선거법위반 혐의까지 적용할 경우 부정선거 논란이 일며 불똥은 더 멀리까지 튈 수 있다. 이명박 전 대통령 뿐 아니라 박근혜 대통령도 ‘안전지대’가 아니다. ‘국정원 게이트’의 최대 수혜자는 당시 박근혜 후보이기 때문이다. 박 대통령에게까지 불똥이 튈 수 있는 상황을 미리 차단하겠다는 의도일 것이다. 직권남용을 해서라도 자신을 장관으로 발탁한 박 대통령에게 보은하려는 건가. 하기야 황 장관의 장관 발탁은 의외였다. 국가보안법, 집회시위법 등을 최고 가치로 떠받드는 대표적 공안검사 출신인 그를 장관 후보감으로 보는 이들은 없었다. 그가 장관으로 발탁된 데에는 ‘7인회’ 멤버인 김기춘 전 법무부장관의 추천과 박 대통령의 ‘수첩’이 크게 작용했다는 게 공공연한 비밀이다. 직권남용해서라도 현정권에 보은하려는 이유 ‘7인회’는 박 대통령을 지지하는 원로모임이다. 2007년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경선 때부터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했고 지난 대선 때는 월 1회 모임을 정기적으로 가져 언론으로부터 주목을 받았다. 김용환 전 재무부장관, 최병렬 전 한나라당 대표, 김기춘 전 법무부장관, 김용갑 새누리당 상임고문, 현경대 의원, 강창희 국회의장, 안병훈 기파랑 대표 등을 지칭한다. 7인회의 멤버인 김기춘 전 장관과 황 장관의 인연은 200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6.25는 북한의 통일전쟁’이라는 강정구 교수의 주장이 국가보안법 위반이라며 검찰이 구속수사를 결정한다. 수사책임자는 서울중앙지검 2차장이었던 황 장관이었다. 천정배 당시 법무부장관이 강 교수의 구속수사를 막기 위해 사상 초유로 검찰총장에게 지휘권을 행사하자 김기춘 의원 등 한나라당이 강하게 반대하고 나선다. 강 교수 구속수사를 결정한 황 차장검사는 시민단체의 항의에 대해 “헌법에 보장된 권리라 해도 헌법 제37조 유보조항에 의해 법률로 제한할 수 있고 그 법률이 ‘국보법’이라고 맞섰다. 공안통 검사 출신인 김기춘 의원의 눈에 이런 황 차장이 쏙 들었을 것이다. 당시 한나라당 대표는 박근혜였다. 여야 정쟁으로까지 번진 강정구 교수 사건을 한나라당 대표가 무관심했을 리 없을 테고, ‘공안 의식’이 투철한 박 대표에게 황 차장이 제법 인상적으로 비쳤을 것이다. 박 대통령과 김기춘 전 장관 그리고 황 장관, 이들은 ‘공안’이라는 공감대로 형성된 관계다.
박근혜-7인회-황교안...‘공안’ 이라는 공감대로 형성된 관계 “국가보안법은 남북통일 이후에도 존속돼야 한다”고 말하며 “5.16은 혁명”이라고 주장하는 황 장관. 노무현 정부의 법무부장관과 맞섰던 철저한 공안통 검사로 박 대통령의 ‘7인회’ 눈에 들었다가, “종북세력이 많아진 건 국보법 개정 때문”이라며 공안 검사의 정수를 보여주는 발언을 공개적으로 한 것이 장관 발탁의 단초가 된 것으로 보인다.. ‘7인회’와 박 대통령과의 관계가 어떠하든, 그의 정치적·이념적 성향이 무엇이든 관계없이 그에게는 법무부장관이라는 자리에 적합한 판단을 할 책임과 의무가 있다. 국정원장의 대선 개입 정황이 드러났는데도 검찰의 혐의 적용을 막고 있다는 건 국민을 상대로 몽니를 부리는 짓이다. ‘박근혜 정부의 가신’이기 이전에 대한민국 국민의 장관이어야 한다. 검찰의 정당한 수사로 인해 현정권과 대통령이 불편해질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법무부장관이 직접 나서 검찰에게 황당한 지시를 한다는 건 국민을 우롱하는 행동이다. 이런 상황이 올 것 같아 황 장관이 장관 후보로 지명됐을 때 시민단체와 야당이 그토록 반대를 했던 것이다.
‘검찰 누르기’ 중단하고 ‘국민의 장관’으로 돌아가야 제8조 (법무부장관의 지휘·감독) 법무부장관은 검찰사무의 최고 감독자로서 일반적으로 검사를 지휘·감독하고, 구체적 사건에 대하여는 검찰총장만을 지휘·감독한다. (검찰청법 제8조)
검찰청법에 의하면 법무부장관은 검찰 수사팀에 이래라 저래라 할 권한이 없다. 하려면 구체적인 사건에 대해 검찰총장에게만 지휘권을 행사할 수 있다. 하지만 검찰총장 지휘권을 행사했다는 흔적은 어디에도 없다. 황 장관의 행동은 명백한 직권남용에 해당한다. 언론보도가 사실이라면 장관 해임 사유도 충분하다. 지위를 이용해 부당하게 수사를 방해한 것이 사실이라면 국회가 나서 국정조사권을 발동해야 할 것이다. 수사권을 가진 경찰이 위법행위를 한 국정원을 비호해 ‘국정원 대선개입 의혹’ 수사를 방해하더니, 이젠 국가 법무를 책임진 법무부장관이 나서 검찰의 수사에 압력을 넣고 있단다. 기가 막힐 노릇이다. 박근혜 정부와 황 장관은 ‘검찰 누르기’를 당장 중단하고 원 전 국정원장에 대한 수사가 엄정하게 이뤄질 수 있도록 협조해야 한다. ‘국정원 게이트’에 법무부장관까지 가세한 형국이다. 황 장관에게 부탁드린다. ‘박근혜의 가신’에서 ‘대한민국 국민의 장관’으로 돌아가시기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