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의 천년 역사를 관통하는, 옥산서원본 『삼국사기』
경주 옥산서원에는 2018년 보물에서 국보로 승격된 『삼국사기』 (50권 9책) 완질이 갈무리되어 있다. 1512년에 개각된 판본을 1573년에 인출한 이 책은 삼국의 천년 역사를 관통하는 장엄한 콘텐츠만큼이나 지식인의 열람 욕구를 자극했음에 분명했다. 하지만 서원 문고는 아무나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사실상 모든 서원 문고에 잠금장치가 걸려 있었다. 옥산서원 또한 서책을 엄격하게 관리하여 사사로운 열람을 통제했음은 물론이고 원문(院門) 밖으로 대여는 상상하기조차 힘들었을 것이다. 1600년대 초반 옥산서원 운영진 앞으로 한 통의 편지가 도착했다. 보낸 이는 정구(鄭逑)와 함께 17세기 영남학계를 이끌었던 인동 출신의 석학 장현광(張顯光)이었다.
『삼국사기』가 귀원의 장서 가운데 있다는 말을 듣고는 한번 보았으면 합니다. 서책은 딴 곳으로 반출해서는 안 됨을 잘 알지만 그저 심심풀이로 보려는 것이 아니라 중요한 내용을 채록하여 후세에 전하려는 뜻이 있어 어렵사리 청하는 것이니, 잠시 보내 주시면 어떻겠습니까. -장현광, 『여헌속집』 권2, <옥산서원 사림에게>-
장현광의 요청에는 예의가 갖춰져 있고, 후속 세대를 위한 지식문화인프라의 확장이라는 학자적 진정성이 배어 있다. 이 청원을 옥산 원유들이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당시 원유들의 상당수가 여헌문인1)이고, 장현광이 명세(鳴世)의 대유였음은 군말을 요하지 않는 바, 차람 요청은 수락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옥산장서의 활용성을 감각할 수 있고, 여헌학(旅軒學) 형성의 지적 자양분으로서의 옥산장서와 『삼국사기』의 가치를 인지하게 된다.
1) 여헌 장현광 문하의 제자
문화·예술에 관심 있던 선비라면 탐냈던 책, 『해동명적』
옥산서원 바로 뒤편에는 이언적의 후손이 사는 독락당이라는 고옥이 있다. 서원이 이언적의 학자적 성취를 기리는 공적 영역이라면 독락당은 삶의 자취가 깃든 사적 공간이다. 독락당에는 이언적의 체취가 담긴 수많은 유품과 함께 귀중한 서책들이 갈무리되어 있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보물로 지정된 『여주이씨 옥산문중 유묵-해동명적(海東名蹟)』 이다. 문화와 예술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지닌 선비라면 누구나 탐을 낼 만한 책이었다. 수백 년 세전되는 동안 무수한 문사들의 손길을 거쳤겠지만 그중에는 서울 출신의 엘리트 지식인도 포함되어 있었다. 서얼이라는 신분적 장벽을 학문적 성취로 극복하여 북학사상 형성의 향도 역할을 했던 성대중(成大中, 1732-1809)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해동명적은 마침 손우(孫友)로부터 전질을 빌리게 되어 당신에게서 빌린 것을 즉시 되돌려드리고자 했으나 인편이 없어 걱정하다가 정혜사의 스님 편에 부쳐드립니다. - <성대중서간>(1784), 독락당 소장 -
성대중은 독락당본 『해동명적』 을 몹시 애중히 다루었고, 그 덕분에 천리 타관으로 대출되었던 『해동명적』 또한 탈 없이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었다. 서첩의 천리 왕래는 단순한 물질의 유동이 아니었다. 그것은 문화의 융·복합 과정이었고, 성대중이 홍대용·박지원·박제가·유득공 등과 함께 18세기 조선의 문단 및 사상계의 거장으로 등장할 수 있었던 것도 지식과 문화에 대한 갈급함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점에서 독락당 문고는 영남을 넘어 조선 문화(文華)를 꽃피운 양질의 영양소였다.
이황의 임고서원 서책 증정기
경북 영천에 정몽주를 제향하는 임고서원은 동방 이학(理學)의 종사를 기리는 곳인데다 소수서원에 이어 두 번째로 사액되었으니, 16세기 조선을 대표하는 학술문화공간으로 손색이 없다. 김응생(金應生) 등 퇴계 문하 제현의 노력 끝에 낙성을 맞은 것은 1555년이었다. 임고서원 낙성식이 있기 한 해 전인 1554년 여름 서원 건립의 주역 가운데 한 사람인 노수(盧遂)가 서울로 이황을 찾아 왔다. 준공을 앞두고 서원에 비치할 서책을 마련하기 위해서 였다. 지식인프라의 조성에 힘쓰는 제자의 정성은 이황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그 또한 사환 차 서울에서 우거하던 터라 서책을 제대로 갖출 처지가 못 되었다.
그나마 서가에는 얼마 전 명종 임금으로부터 하사받은 『성리군서(性理群書)』(35권) 한질이 꽂혀 있었다. 선택의 여지는 없었기에 이 책을 임고서원에 증정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속절없이 남의 일에 간섭하기를 좋아하는 호사가는 어느 시대에나 있기 마련이었다. 내사본을 증정한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이곳저곳에서 수군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군왕이 하사품을 사사로이 남에게 주는 것은 법도에 맞지 않다는 작은 여론을 형성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런 부류의 목소리에 위축되거나 소심해할 이황이 아니었다.
어떤 이는 군왕이 하사한 책을 남에게 주어서는 안 된다고 혐의하였지만 서원에서 소장하는 책은 한편으로 선현을 위함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후학을 위함인데, 이것을 어찌 남에게 준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이황, 『퇴계집』 권42, <내사본 성리군서를 상사 노수에게 부쳐 임고서원에서 소장토록 한 글>-
여기서 그가 강조하고 있는 것은 서책의 본질이다. 그에게 책은 기념품이 아닌 학습의 도구였고, 그것은 배움의 공간에 있을 때 그 가치가 극대화될 수 있다고 믿었다. 서원의 공간다움을 위한 공익적 증정을 사사로운 주고받음으로 폄하했던 일각의 주장은 이황으로 하여금 실소를 자아내게 하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이황은 그만의 독특한 필치를 창출하였지만 글씨로서 자부한 적이 없고, 평생 해정(楷定)한 글씨만을 고집했다.
노수가 『성리군서』를 받아들고 영천으로 내려가던 날 이황은 증표 한 장을 건넸다. ‘내 사본 성리군서를 상사 노수에게 부쳐 임고서원에서 소장토록 한글(內賜性理羣書付盧上舍遂俾藏圃隱書院識)’이라는 제목의 이 글은 이황이 남긴 유일한 예서체 글씨이다. 책이 왜 서원에 있어야 하는지를 피력한 이 글은 진중한 필치만큼이나 거기에 담긴 뜻 또한 간명하면서도 육중하다.
이황의 깊은 뜻은 임고 원유들에게 깊이 주입되어 하나의 교육적 지침이 되었던 것 같고, 명종과 이황이라는 군신 공여(共與)의 서책 또한 매우 소중하게 관리되었음은 도서목록인 임고서원 서책록에서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1991년 12월 16일 『임고서원 전적』 가운데 10종 25책이 보물로 지정되었다. 그 당시 이황의 증정기(贈呈記)가 누락된 것은 여간 안타까운 점이 아닐 수 없다. 서원의 공간다움을 위한 이황의 신념과 결단이야말로 이 땅의 문명화를 촉진하는 동력이었기 때문이다.
글, 사진. 김학수(한국서원학회 회장,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한국사학전공 부교수)
[문화재청, 문화재사랑. 2023-04월 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