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인 대 만인의 투쟁’
‘99학년도 이화여대(인문계), 연세대(인문계), 그리고 서울대의 논술도 개인과 사회의 관계라는 관점에서 조망할 수 있는 논제이다. 몽테스키외의 「페르시아인의 편지」에서 출제한 이화여대 논제는 최소한의 사회적 통치제도까지도 거부하고 각자가 목적의 이익을 추구하다 파멸을 자초하게 되는 한 부족에 관한 제시문을 주고 이러한 삶이 초래하는 문제점을 지적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을 논술하라는 문제이다.
<문제>
다음 글은 어떤 부족의 삶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삶이 초래하는 문제점을 지적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을 논술하시오. (’99 이화여대 인문계)
<제시문>
옛날 아라비아에 트로글로다이트라고 하는 작은 부족이 있었다. 역사가들의 말에 따르면 이 부족은 인간보다는 동물에 더 가까웠던 이전 시대 트로글로다이트의 후손들이라고 한다. 그러나 내가 지금 말하는 이 부족은 그들의 선조들처럼 그렇게 이상하게 생기지도 않았고 곰처럼 털이 나지도 않았다. 그들은 끽끽거리지도 않았으며 눈도 둘이 달려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아주 사악하고 잔인하여 자기들 사이에 어떤 공정성이나 정의의 원칙도 없었다.
그들에게는 외국 태생의 왕이 있었다. 왕은 부족의 타고난 사악함을 고치기 위하여 사람들을 엄하게 다스렸다. 그러자 사람들은 음모를 꾸며서 왕을 죽이고 왕족들까지도 모두 없애 버렸다. 그리고 나서 그들은 통치 기구를 만들기 위해 모임을 가졌고, 많은 의견 다툼을 한 뒤에 행정관들을 뽑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들은 행정관들을 부담스러워 하여 참을 수가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새로 뽑힌 행정관들마저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새로운 통제로부터 벗어나자 이 부족 국가는 타고난 사악함만이 지배하는 나라가 되었다. 이제 사람들은 각기 어느 누구의 말도 따르지 않을 것이며, 자신의 이해만을 돌볼 뿐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상관하지 않기로 합의했다.
이 만장일치의 결정은 부족 구성원 각자의 마음에 꼭 드는 것이었다.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나와 아무 상관없는 사람들을 위해 죽도록 일할 이유가 무엇인가? 이제 나는 나만을 생각할 것이다. 나만 행복하면 되지 다른 사람이 어떻게 사는지 나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나에게 필요한 것을 모두 가질 수 있다면, 다른 사람들이 불행하다고 해도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다.”
때는 바야흐로 곡식을 수확해야 하는 계절이었다. 마른 산악 지대의 경작지가 있는가 하면, 수로(水路)가 잘 갖추어진 낮은 경작지도 있었다. 그 해는 몹시 가물어서 높은 지대의 농사는 완전히 실패한 반면 물 공급이 잘 된 낮은 땅은 큰 풍년이 들었다. 많은 수확을 거둔 사람들이 추수한 곡식을 나누기를 거부했기 때문에 많은 산악지대 거주자들이 굶어 죽었다. 다음 해에는 비가 많이 내렸다. 높은 지대의 땅은 이례적으로 비옥해졌고 낮은 지역은 홍수가 났다. 또다시 인구의 반이 굶주림으로 아우성쳤지만 작년에 홀대를 받았던 사람들이 이번에는 굶주린 사람들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지도적 위치에 있었던 한 시민에게 아름다운 부인이 있었다. 그의 이웃이 그 부인을 사모한 나머지 그녀를 납치해 갔다. 두 사람 사이에 큰 싸움이 벌어졌고 서로 모욕적 언사와 주먹다짐을 주고받은 뒤에, 두 사람은 이전의 공화국에서 영향력을 가졌던 어떤 사람의 결정에 따르기로 합의했다. 두 사람은 그에게로 가서 각자의 사정을 이야기했다. 그러나 그는, “이 여자가 누구에게 속하든 나와 무슨 상관이란 말입니까? 내게는 경작해야 할 땅이 있는데 당신네 싸움치레 하느라 내일도 못하는 건 싫소. 나를 그냥 놓아두고 귀찮게 하지 마시오.” 라고 말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자기 밭으로 일하러 나갔다.
힘이 센 납치자는 죽어도 여자를 내주지 않겠다고 다짐을 했고, 부인을 빼앗긴 사람은 이웃의 불의와 심판관의 냉담함으로 인해 절망에 차서 집으로 향했다. 도중에 그는 산에서 내려오는 아름다운 젊은 여자와 만나게 되었는데, 아내마저 잃은 처지에서 그는 그녀에게 끌렸고, 그녀가 아까 냉담했던 심판관의 부인임을 알고는 한층 더 마음이 끌렸다. 그는 그녀를 잡아채서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갔다.
비옥한 땅을 갖고 부지런히 경작했던 한 사람이 있었다. 두 이웃이 결탁을 해서 그를 집에서 내쫓고 땅을 가로챘다. 두 사람은 혹시 있을지도 모를 또 다른 강탈자를 막기 위해 상호 연맹 관계를 맺었고, 여러 달 동안 실제로 서로를 보호해 주었다.
그러나 혼자 차지할 수 있는 것을 나누기가 아까웠던 동업자 중 하나가 다른 하나를 죽이고는 땅을 독차지 했다. 그러나 그의 소유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또 다른 두 사람이 와서 공격을 했고, 혼자서 두 사람을 방어하기에는 힘이 너무 약했기 때문에 죽임을 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입을 것이 없었던 한 사람이 상인이 팔려고 내놓은 양털을 보았다. 가격을 물어보니 상인은 “보통은 밀 두되 값만 받는데 지금은 여덟 되를 사야겠으니 제 배를 쳐서 받아야겠고.”하고 말했다. 다른 방도가 없었기에 그는 달라는 대로 값을 지불했다. 상인은 돈을 받아 챙기면서 말했다.
“좋아요. 이제는 밀을 좀 사야겠군요.”
양털을 샀던 사람이 말했다.
“지금 뭐라고 했습니까? 밀이 필요하다고요? 내게 팔 것이 조금 있는데, 다만 한 가지 걱정되는 것이 값입니다마는, 밀 값이 아주 비싸다는 것은 아셔야 합니다. 굶어 죽는다고 온데서 난리입니다. 하지만 아까 받았던 제 돈을 다시 주시면 밀 한 되를 드리지요. 당신이 굶어 죽는다 해도 그 값 아래로는 못 팝니다.”
그러는 동안 이 지역에 몹쓸 병이 창궐했다. 이웃 나라에서 유능한 의사가 와서 그에게 오는 모든 환자들의 병을 치료해 주었다. 병이 다 지나간 뒤에 의사는 환자들 집을 돌며 치료비를 요구했지만 모두에게서 거절당했다. 의사는 오랜 여독에 지쳐 빈손으로 자기 나라로 돌아갔다. 오래지 않아 같은 병이 전보다 더한 기세로 그 지역을 휩쓸었다. 이번에는 트로들로다이트 부족 사람들이 직접 그에게로 와서 병을 고쳐주기를 빌었다. 그러나 의사는 냉담하게 대답했다.
“돌아들 가시오. 당신들은 정의롭지 못합니다. 당신들의 영혼 안에는 당신들이 치유 받고자 하는 병보다 더한 독이 있습니다. 당신들에게는 아무런 인간성도 없고 공정한 규칙도 없기 때문에 이 세상에 살 자격이 없습니다. 당신들을 벌하고 있는 신의 정당한 분노를 어기고 당신들을 치료한다면 나는 신을 거역하는 일을 하게 될 것입니다.”
-몽테스키외, 「페르시아인의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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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시문은 부족들의 사악함과 관련된 몇 가지 에피소우드 〔삽화〕로 구성되어 있다.
① 왕과 행정관의 살해
② 가뭄과 홍수로 인한 굶주림과 이웃 간의 무관심
③ 이웃 남자 부인의 납치
④ 이웃 사람의 땅 강탈
⑤ 부도덕한 상거래 행위
⑥ 전염병의 창궐 : 치료비 지불 거절→전염병 재발→의사의 치료 거부, 가 그것이다.
마지막 단락에 나오는 의사의 말처럼 이 부족의 구성원들은 최소한의 ‘인간성’도 ‘공정한 규칙’도 없기 때문에 결국 자기 파멸을 가져올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다. 우화적(寓話的)인 이야기이지만 이런 사태를 주목한 사상가가 있다. 이른바 ‘만인대 만인의 투쟁’이라는 인간의 자연 상태로부터 벗어나 계약 상태에 이르러 국가가 발생한다고 본 T. 홉스의 견해가 여기에 해당할 것이다.
오늘날 문명사회도 위와 같은 사례에서 교훈으로 삼을만한 내용이 있다. 자본주의 그 중에서도 이른바 ‘천민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이기주의가 불공정한 경제행위, 독점과 투기, 경제력의 과도한 집중 등을 초래하면서,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로서의 공동체 의식이 부족하기 마련이다. 이러한 자본주의는 결국 장기적으로 몰락의 길을 걷게 될 것이고, 이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엄청나게 값비싼 대가를 치를 수밖에 없게 된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공동선의 추구라든지 공동체의식의 회복 등 다양한 방안들이 제시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인간이 사회적 존재자로서 사회의 규칙과 도덕을 준수할 때 사회가 존속될 수 있다는 것이다.